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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막성전투 阿莫城戰鬪 | ||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 1차, 2차 전투 : 602년 8월(음력) 3차 전투 : 616년 10월 | |
장소 | 신라, 아막성(현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일대)[1][2] | |
원인 | 관산성 전투 이후 무왕의 반격. | |
교전 세력 | <rowcolor=#C00D45,white> 백제 (공격자) 승 | 신라 (방어자)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해수 (좌평) (2차) 지휘관 불명 (3차) | 지휘관 건품 (파진간) (2차) 무리굴 (파진간) (2차) 이리벌 (파진간) (2차) 지휘관 불명 (3차) |
참가자 불명 | 참가자 무은 (급간) (2차) 비리야 (급간) (2차) 귀산 (소감) † (2차) 추항† (2차) | |
병력 | 40,000 명 | 1,000 명 + @[3] |
피해 | 궤멸적 피해 상세 피해는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2차 전투는 신라의 대승. 그러나 이후의 전투는 아막성 이동 신라 영역에서 지속. | |
영향 | 신라에 대한 백제의 가열한 공세 지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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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02년, 신라와 백제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전투. 삼국시대 후반부를 알리는 전투로, 이 전투를 시작으로 무왕 -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맹공을 시작하게 되었고, 신라 또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서부 전선에 대한 강화를 시작했다.▲무왕 재위 당시 신라와의 전투 지점들.(화염 표시) △남원 운봉 지역에 아막산성(阿莫山城)이 있다. |
2. 배경
진지왕이 의문의 폐위를 당하고, 즉위한 진평왕은 각종 국가 기관 설치와, 전쟁 영웅을 측근으로 삼는 등의 정치적 수완을 통해 왕권 강화를 이뤄 나가게 된다. 한편 이 시기 신라는 이전 진흥왕 시대에 흡수•합병했던 가야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언급된다.600년 봄 2월 신라와 임라가 서로 다투니, 천황이 임라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601년 3월 갑신 초하루. 오토모노 무라지 쿠이(大伴連 囓)를 고려에 보내고, 사카모토노 오미 아라테(坂本臣 糠手)를 백제에 보내어 “급히 임라를 구원하라”고 조칙을 내렸다.[4]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601년 3월 갑신 초하루. 오토모노 무라지 쿠이(大伴連 囓)를 고려에 보내고, 사카모토노 오미 아라테(坂本臣 糠手)를 백제에 보내어 “급히 임라를 구원하라”고 조칙을 내렸다.[4]
《일본서기》 <스이코 덴노>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당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했고, 고구려 - 왜국과 함께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감행했다고 볼 수 있다.[5] 하지만 고구려는 돌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신라에 대한 압박 수위를 낮출수 밖에 없었으며, 왜국도 내부 사정이 혼란스러워졌기에 무왕은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3. 아막성
현재 아막성은 남원시 아영면 아영 고원에 그 일부가 남아있으며 시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었던 요충지 중 하나였으며, 인근 4개 성을 거느린 모성(母成)이기도 했다. 실제로 발굴 조사결과 신라계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4. 전투
4.1. 1차 공방전
602년 8월, 무왕은 병사들을 출전시켜, 아막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진평왕이 정예기병 수천 기를 보내 방어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소타(小陁),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등 4개 성을 쌓아 서부 전선에 대한 수비를 보강함과 동시에, 신라의 병력이 역으로 백제를 침공했다. 해당 공격로는 현재의 남원 일대였다.4.2. 2차 공방전
4.2.1. 무왕의 분노
이 소식에 무왕은 크게 분노하며 좌평 해수(解讎)에게 보•기 40,000명의 대군을 주며, 아막성 인근 지역의 성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신라는 파진간 건품(乾品), 무리굴(武梨屈), 이리벌(伊梨伐)과 급간 무은(武殷), 비리야(比梨耶)에게 병사를 주어 백제군을 상대하게 했다.4.2.2. 신라, 만인적(萬人敵) 등장
아막성 인근에서 벌어진 양측의 전투는 신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해수는 천산으로 급히 후퇴했다. 신라는 추격을 하다 너무 깊숙히 들어갔다고 판단해 되돌아 가게 되는데,[6] 이때 천산 서쪽의 큰 연못 인근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해수는 신라군의 후위를 맡은 대감(大監) 무은의 병력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공격을 지시했다. 이때 무은과 추격대 1,000명의 병력은 당황해 어쩔줄 몰랐고 심지어 지휘관인 무은은 백제군의 갈고리에 걸려 낙마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때 무은의 아들인 소감(少監)[7] 귀산[8]은 누군가가 어서 후퇴하자는 말을 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무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귀산은 말을 타고 용감무쌍하게 나아가 백제군 수십명을 쳐 죽여 아버지를 구해내는데 성공하고, 자신의 말에 아버지를 올려태운 후 탈출케 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직책이었던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백제군을 베어내니 혼란에 빠졌던 신라군의 사기가 급격히 상승하며 전황이 급격히 바뀌게 된다.
용맹하게 백제의 병사들과 맞서던 귀산과 추항은 온몸에 창칼을 맞아 상처입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해수가 이끄는 백제군은 이들의 용기와 신라군의 압박에 결국 물러났다.
4.2.3. 전투 결과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에 쳐들어왔다. 임금이 장수와 졸병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병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병사가 패배하였다. 해수는 겨우 위기를 벗어나 단신으로 돌아왔다.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신라군의 대승이었다. 40,000명에 달하는 백제의 대군이 궤멸당했으며, 총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사비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해수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는 없으나 왕이 분노하며 40,000명의 병력을 모아 보냈던 것임을 감안하면 대성팔족의 일족임에도 처벌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진평왕은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로 나아가 이날의 승리를 치하했다. 하지만 용맹하게 싸운 귀산과 추항은 온 몸에 난 상처로 인해 신라로 돌아오던 중 숨졌고, 진평왕은 이들의 시신을 보며 통곡하며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후 귀산에게는 나마, 추항에게는 대사를 추증했다.
4.3. 3차 공방전
17년(서기 616년) 겨울 10월, 달솔 백기(苩奇)에게 명령하여 병사 8,0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삼국사기》 제27권 <백제본기> 제5 무왕
38년(서기 616년)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에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평왕
무왕 17년이던 616년 10월, 달솔 백기 8,000명의 병사를 주어 모산성(母山城)으로 쳐들어 가게 했으나, 신라가 이를 막아냈다.
5. 전투 이후
아막성 전투는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대승으로 끝났으나, 오히려 아막성은 이후에 등장하지 않고 백제와 신라의 전투는 아막성 이동 이북 지역에서 이어지게 된다. 아막성 역시 이후의 사료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신라의 승리는 전략적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무왕(6세기말) ~ 의자왕(7세기 초) 시기 백제가 확장한 강역으로 알려져 있지만 강원도 중부의 움푹패인 부분은 655년 무열왕 기사에서 멀쩡히 공물을 바치며 신라 지역으로 나오고 있으며 공략한 경남 서부 부분은 사실 김유신이 자력으로 다 회복하기 때문에 655년 경에는 김유신의 도비천성 공략기사로 금산-논산 부근이 신라-백제 국경인 상황이다. 한마디로 오류가 많은 지도.[9] |
이 전투를 시작으로 진흥왕 대의 영광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국가 존망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6. 기타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의 황산벌 지역에서 던전 중 하나로 등장한다.[1]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아막산성(阿莫山城)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삼국사기》 <귀산 열전>에는 아모성(阿暮城)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막(莫)'자가 '영(英)'자와 비슷해 아영성(阿英城)으로도 기록되었는데, 아영면(阿英面)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딴 것이다.[2] 참고로 아막이라는 이름이 모(母)에 대응되는 것에서 보이듯, 아막은 중세 국어에서 ㅎ 종성 체언이였던 ‘암’의 옛 형태일 가능성이 높다.[3] 일단 확인되는 병력으로 정예 기병 수천명과 무은이 이끌던 추격대 1,000명이 있다.[4] 《일본서기》는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띄고 있어서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신라와 백제가 왜에 두려움을 떨며 신하국처럼 행동했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쓰여 있다.[5] 실제로 진평왕 - 선덕여왕 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으로 양면전선이 형성되면서, 신라의 상황이 몹시 위태로워졌고, 결국 수양제에게 손을 벌려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요청했다. 그리고 수나라는 때마침 양제의 야욕과 맞물려 이를 받아들이기까지 힌다.[6] 다만 이때 <무왕 본기>의 기록과 <귀산 열전>의 기록이 상충된다. <무왕 본기>에는 "승리로 인해 기세 등등했던 무은이 1,000명의 추격대를 이끌고 천산까지 추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7] 신라의 무관 계급으로 17등 관위에서 12번째였던 대사(大舍)의 아래로 추측된다. 소감이라는 직책이 <귀산 열전>에만 언급되는데 <귀산 열전>의 기록에 근거해 대감(大監)의 자제 혹은 친밀한 사이에게 주어지는 직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로 양분되어 있다.[8] 귀산은 아막성 전투 이전에 추항과 함께 원광법사로부터 화랑의 다섯 규율로 전해지는 세속오계를 전수받은 일화가 있는 인물이다.[9] 신라가 급속도로 위축되던 시기로서, 선덕여왕 재위 당시에는 경상남도 서부 지역 대부분에 걸쳐서 압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