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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8 12:27:48

사천 전투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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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전투
蛇川 戰鬪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668년 (보장왕 27년) 7월 16일
장소

평양성 근교 사천(蛇川) (현재 평양시)
원인 고구려의 내분으로 인한, 당고종의 고구려 3차 침공
교전국 고려
(수세)
<rowcolor=black> 신라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연남건 (대막리지)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문무왕 (신라 국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문영 (金文穎)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상경 (金相京)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본득 (本得)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구율 (求律)
병력 병력 규모 불명 신라군: 200,000명[1]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고구려의 패배
- 신라군과 당군의 합류, 도성 평양성 포위
영향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 포위

1. 소개2. 배경3. 진행4. 결과5.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668년, 고구려 정복을 위해 수도 평양성으로 진격하던 신라군이 사천(蛇川)과 들판에서 고구려 군대와 맞붙은 전투. 사천이 현재 어느 곳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평양시 동쪽을 흐르는 합장강(合掌江)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제2차 고구려-당 전쟁사수 전투의 사수와 같은 지명으로 여겨진다.

수도로 진입하는 마지막 길목에서 결사대와 맞붙었다는 점에서 백제멸망전 당시 황산벌 전투의 고구려판과 같은 전투였다.

2. 배경

고구려연개소문 생전에는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연개소문 사후 연씨 형제의 내분으로 연남생이 당나라에 투항, 연남생이 당군의 길앞잡이를 맡으면서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이 발발한다. 신라 측은 일단 전쟁 초기 1년간은 참여하지 않고 전쟁 준비만 하면서 방관하고 있었지만 과거와 달리 고구려의 패색이 짙자 대대적인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668년 6월 22일에 김인문, 천존, 박도유(朴都儒) 등이 이끄는 선발대가 한성(漢城)에서 출진했으며 문무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는 수도 서라벌에서 6월 27일에 출발했다. 이미 남쪽에서는 백제가 660년 멸망하고 백제부흥운동도 663년경에는 이미 진압되었으며 백제와 함께 신라 후방을 괴롭히던 일본도 664년부턴 백제 지원을 포기하고 신라와 우호관계로 전환했기 때문에[2] 후방 걱정없이 신라가 뽑아낼 수 있는 전국 각 주의 병력이 거의 총집결했다. 이미 고구려의 남부 방어선을 맡고 있던 연정토가 앞서 신라에 12개 성과 수천명의 백성을 통째로 바치며 항복했기 때문에 국경 방어선은 뻥 뚫려 있었고, 신라군이 본격적으로 출진한 시점에 고구려의 대곡(大谷)[3]과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漢城)[4]을 포함한 2군 12개 성이 추가로 귀순하여 항복했다.[5] 이렇게 국경 방어선에서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황해도를 거의 무혈입성한 신라군은 평양 근교까지 다다랐다.

3. 진행

연남건은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을 투입해 성문을 열고 평양성 동쪽 근교 사천 들판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려 했고, 김문영이 주축이 된 신라군과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사천 들판에서 본대가 맞붙었는데, 대당소감(大幢小監) 관직에 있는 본득(本得), 그리고 한산주 소감 김상경(金相京)이란 자의 전공이 으뜸이었다고 한다. 이 중 김상경은 여기서 전사했다. 이들에게는 문무왕이 이후 일길찬의 관등과 조 1,000섬을 내려 주었다.

신라군이 사천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는 아술(牙述,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사람으로 사찬(沙湌) 지위의 구율(求律)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한다. 구율은 고구려군이 사천 다리 일대를 지나갈 무렵, 다리 아래로 내려가 물을 몰래 건너 위에 있던 고구려군을 기습 공격해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구율의 이런 행동은 군령을 위반하고 자기 스스로 위험한 곳에 들어가 독단으로 행한 작전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이후 논공행상에서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했다. 구율은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어 자살하려 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만류해 죽지는 못했다고 한다.

4. 결과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신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했다. 이후 고구려 북쪽 방어선을 돌파한 당군과 신라군은 668년 9월 21일 평양성 앞에서 합류,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포위해 평양성 전투(668년)로 이어졌다.

5. 관련 문서


[1]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기록된, 고구려로 북진한 신라 총 병력의 수이다. 다만 668년 시점까지 그동안 보여왔던 신라의 국력으로 20만명은 전례가 없이 무리인 대군이라 해석에 이견이 존재한다. 이 총병력 중 사천 전투에 얼마나 참여했는지는 불명이다.[2] 당시 일본에선 신라와 당이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번엔 일본으로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거란 걱정을 했다. 그래서 대마도다자이후에 백제식 방어성을 여럿 쌓고, 한편으론 얼마 전까지 적이던 신라에 사신을 여러 번 보낸다.[3] 황해도 평산군[4] 황해도 재령군[5] 이 때 별 저항없이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황해도 지역은 이후 검모잠, 안승이 주도하는 친신라 반당 고구려부흥군의 활동거점이 되었고, 나당전쟁에서 신라와 함께 당군에 맞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