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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22:38:27

서라벌 기습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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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기습
徐羅伐 奇襲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927년 (태조 10년)
장소
양주 금성 (현 경상북도 경주시)
원인 신라, 고려 동맹의 후백제 포위 및 압박
교전 세력 <rowcolor=black> 후백제
(공세)
고려-신라 연합
(수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견훤 (후백제 국왕)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경애왕 (신라 국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억렴[1]
파일:고려 의장기.svg 왕건 (고려 태조)
병력 후백제군: 5,000명 ↑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후백제의 승리 및 서라벌 함락
영향 * 신라의 완전한 도시국가화
* 후백제신라 간섭
1. 개요2. 배경3. 전개4. 평가5. 견훤의 선택에 대해
5.1. 왜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았는가?5.2. 약탈과 방화5.3. 경애왕에 대한 가혹한 처우5.4. 경순왕 옹립
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후백제 견훤신라 경애왕이 있는 서라벌을 함락한 기습전.

2. 배경

견훤은 892년 서남해안에서 거병한 이래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라는 긴 관직을 자칭하면서 신라로부터 서해안 지역의 통치권을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벌였으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 확실시되자 900년에는 공식적으로 완산을 도읍으로 삼고 후백제의 건국을 선포했다.

백제의 핵심 고지인 전주와 무주를 장악하고 의자왕의 복수를 천명했던 후백제는 건국 직후부터 주로 신라 방면으로의 공략에 역량을 집중해왔다. 북쪽에서 건국된 태봉과의 충돌도 대부분 최단거리인 웅주 지방이 아니라 추풍령-소백산맥 일대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역시 반신라 강경책을 부르짖으며 신라 방면 남진을 시도하는 태봉군의 전진을 차단하는 동시에 왕가의 본향인 상주 지역을 확보하려는 정치적인 필요성도 있었다.[2] 그러는 한편 건국 직후인 901년부터 무려 3차례에 걸쳐 대야성 전투를 치른 끝에, 고려 건국 2년 후엔 920년에서야 고대로부터 신라로 향하는 직통로였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서라벌로 향하는 길을 확보했다. 또한 궁예 정권의 붕괴와 패서계가 주도하는 왕건의 고려 건국으로 웅주와 청주 일대 구 백제계 호족들이 대거 후백제로 이탈하면서 그동안 손대기 힘들었던 금강 이북지역까지 판도에 넣는 등 910년대의 교착상태를 타개하고 다면적으로 팽창일로에 들어섰다.

이렇게 對신라전선에서 잠시 후백제가 누렸던 우위가 927년 김락대야성 함락과 상주 흥달의 고려 귀부로 깨지게 된다. 고려와의 전선이 북서부 웅주, 북동부 상주, 서남부 나주, 동남부 강주-대야성까지 무려 4면에 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왕건은 육로를 통해 강주 순행까지 단행하면서 이 신규 점령지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은 물론 고려-신라의 동맹이 든든함을 과시했고, 이대로 방치하면 기어이 추풍령 일대에서 고려와 신라의 연합전선이 후백제를 완전히 포위할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왕건이 강주를 순행한 지 1개월이 지난 927년 9월, 견훤은 한반도 전사에 길이 남을 대규모 기동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3. 전개

927년 9월, 견훤이 직접 이끄는 후백제의 철기대는 신라의 근품성(문경)을 공격, 함락시켰다. 이곳은 견훤의 고향인 상주 지역의 관문이었고 상주가 후백제에게 함락되면 고려는 애써 구축한 신라와의 연합전선이 차단당할 수 있었다. 혹은 북동쪽으로 진군할 경우 당시까지 송악의 왕건 정권과 대립중이던 명주의 김순식과도 연계가 가능했으므로 고려와 신라는 즉각 이들을 저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후 후백제군은 경주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고울부(경북 영천)에 나타났고, 신라는 급히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1만의 고려군이 서라벌을 구원하기에는 이미 후백제군이 너무 가까이 닥쳐 있었다. 결국 경애왕 재위 내내 공들여 구축한 여-라 동맹의 보람도 없이 후백제군은 서라벌에 입성하는데 성공했고,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생포되어 궁으로 끌려갔다.

견훤의 기습으로 인해 경애왕은 타살 혹은 강요에 의해 자살하게 된다.
지난번에 신라의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장차 족하(足下)를 왕경(王京)으로 불러들이려 했던 것은 작은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호응하고 메추라기송골매의 날개를 쪼고자 달려드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생령(生靈)을 도탄에 빠뜨리고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 행위였습니다. 이에 내가 먼저 조적처럼 채찍을 잡고, 한금호(韓擒虎)[3]처럼 홀로 부월(斧鉞)을 휘둘러, (신라의) 백관들에게 밝은 햇빛과 같은 맹서(盟誓)를 받고, 육부(六部)에 의로운 기풍을 유시(諭示)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간신은 숨거나 도망쳐버리고 임금이 죽는 변고가 생겼고, 결국 경명왕(景明王)의 표제(表弟)[4]이자 헌강왕(憲康王)의 외손 되는 분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였습니다.
족하께서는 내 충고를 자세히 보지도 않고 떠도는 말만 듣고서 온갖 수단을 써서 틈을 엿보다가 여러 방면에서 우리를 쳐들어와 어지럽혔습니다. 하지만 여태 내 말의 머리도 보지 못하고 내 소의 털 하나도 뽑을 수 없었습니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湘)이 성산(星山)의 진(陣) 아래에서 손이 묶인 듯이 패배했고, 같은 달에 좌상(左相) 김락(金樂)이 미리사(美利寺) 앞에서 해골을 볕에 쪼이게 되었습니다. 죽거나 포획한 자가 많았으며 쫓아가 잡은 자도 적지 않으니 강약이 이와 같다면 승부는 알 만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평양(平壤)의 누각에 활을 걸고 패강(浿江)의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吳越國)의 사신 반(班) 상서(尙書)가 와서 왕의 조지(詔旨)를 전하기를 ‘경(卿)과 고려는 오랫동안 소통하고 좋아하면서 함께 이웃으로 맹약(盟約)을 맺은 것으로 안다. 근래 두 인질이 다 죽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화친하였던 옛 관계를 잃고 서로 국경을 침범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경의 나라에 가게 하고 또 고려에는 글을 보내니, 마땅히 서로 화친하여 길이 평화를 아름답게 누리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의리를 돈독히 하고 왕을 존중하며, 또한 큰 나라를 섬기는 마음이 깊으므로 그 조유(詔諭)를 듣고서 곧 지시를 따르고자 합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족하께서 싸움을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고, 곤란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싸우려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조서를 베껴 보내드리니 마음을 두어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교활한 토끼와 날랜 사냥개가 번갈아 이기는 것[㕙獹迭憊]도 끝내 반드시 남의 놀림거리가 될 것이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맞버티는 것[蚌鷸相持]도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길을 잃어버리고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迷復]을 경계로 삼아 후회를 스스로에게 남기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견훤은 공산 전투가 승리로 끝난 뒤에 12월 왕건에게 국서를 보냈는데, 국서에는 삼국사기고려사 같은 기존 고려측 사료와는 내용이 다르거나 실리지 않은 말들이 다수 보인다. 정리해 보면

인데, 서라벌 약탈을 왕건이나 신라에 책임을 돌리는 건 그렇다 쳐도 경애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난 왕을 죽이거나 할 생각이 없었는데 내가 오니까 돌아가셨더라"라는 투로 설명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국서에서 견훤은 "나는 존왕의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다"라고 해서 존왕, 즉 신라 왕실에 대한 존중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왕건에게 피력하고, 자신이 서라벌에 쳐들어가서 새로운 왕을 세운 것은 신라가 고려와 연결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후백제가 서라벌 함락 후 서라벌에 남아 있던 건장한 군인들을 포로로 잡아 압송했다는 기록으로 봐선 서라벌에 그나마 있던 수도방어 부대인 육기정 부대[5]도 이 당시에 해체되거나 유명무실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신라군이 동원할 수 있었던 상당수의 병력은 최초 근품성에 나타난 견훤군을 요격하기 위해 경북 북부 방면으로 이동하다가 서라벌이 기습당하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이후 신라는 서라벌 바깥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다만 결과로만 따졌을 땐 이 기습전의 과실은 후백제에게 돌아가지 못했고 대부분의 이득은 고려가 어부지리로 챙기게 된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놓았다면 그 전처럼 신라 내부에서 계속 박씨 족단과 김씨 족단이 다투었을 텐데, 견훤이 이상하게도 박씨 족단만 일방적으로 족치고 아예 모조리 오늘날 전주 일대로 끌고 가서 서라벌 내부 갈등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이밖에도 견훤의 기습으로 온 서라벌이 전란에 휩싸였음을 암시하는 일화들이 남아 있는데, 손순매아 설화로 유명한 손순이 얻었다는 돌로 된 범종과 이를 모시고 지은 홍효사가 '후백제 도적들'이 쳐들어왔을 때에 범종이 박살나고 절만 남았다는[6] 얘기나, 훗날 고려 왕조에 출사해 성종에게 시무 28조를 바치게 되는 최승로(927~989)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후백제가 서라벌까지 치고 들어오자 아버지 최은함이 다급한 나머지 아이를 중생사(衆生寺)[7]의 관음보살상 사자좌 밑에 숨겨 놓고 피란을 떠났다가 보름 만에야 돌아왔다는 일화 등이다.

4. 평가

이후 국론이 통일된 신라가 경순왕의 지도 아래 일관되게 고려를 지지하면서 후백제에 대해서는 대항 노선을 걸었기에, 결국 견훤은 왕건 좋은 일만 해준 격이 되었다. 여러모로 군사적 재능은 천부적이었지만, 정치력은 그것만 못했던 견훤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고려의 왕건이 삼한일통을 하고 싶으면 신라만큼은 어떻게든 처리를 했어야 했는데, 신라의 마지막 남은 저력을 견훤이 없애버렸기에 왕건은 좋아 보이는 역할만 하면서 눈 앞에 떨어진 콩고물만 주워 먹으면 되었다.[8]

그 전까지만 해도 신라의 신하국을 자처하던 고려가 이 이후로 태도를 돌변하여 옛 신라 땅에 자국 군부대를 자의적으로 심거나, 931년에 신라왕에게 충성 서약을 받으면서 드디어 군신 관계 자리마저 완전히 뒤바꾸게 되는 일 또한 분명코 이 전투의 직접적 영향력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또 한 가지 아이러니한 일이, 견훤이 서라벌 기습에 성공하고 공산 전투에도 승리한 다음 서라벌인들을 다름 아닌 후백제의 수도 전주로 압송해서 사민했다는 점이다. 통일신라가 옛 백제인들을 서라벌에 사민하는 한편 원 신라인들은 백제의 수도권인 부여, 공주 그리고 전남 동부 지역에 사민하였는데,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백제의 제2수도권 지역이었던 전주, 익산 등지에는 그러한 흔적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견훤의 서라벌인 압송으로 옛 백제 지역의 신라화 작업은 그때에야 마침표가 찍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견훤이야 별 생각 없이 적국 수도인들을 자국 수도에 압송해서 인구를 늘린다는 발상으로 했겠지만, 그로 인해 신라 임금들이 못 다 이룬 과업을 끝맺게 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여담으로 견훤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을 공격할 때 지나갔던 경로는 현대 대한민국 지도의 상주영천고속도로 경로와 비슷하다. 서라벌 침공 이전 상황을 요약하자면 고려군과 신라군은 후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하였지만, 견훤은 신라의 북부 지역인 근품성(오늘의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일대)을 빼앗은 뒤 경북 북부로 진격하려던 것 같던 군사를 남동쪽으로 돌려 고울부(高鬱府)(지금의 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지금의 경북 경주시)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한 것이다. 물론 이때 고속도로 같은 건 없었고 이 길에 있는 산을 다 넘어서 지금의 경주로 쳐들어간건데, 견훤 입장에선 엄청난 기동전으로, 근품성은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일대로 예천군 용궁면과 인접해있기에 왕건과 경애왕의 입장에서는 견훤이 근품성을 함락시킨 뒤 예천을 거쳐 고창이나 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 예상하고 병력을 그쪽으로 보내게 될테고, 그렇게 되면 견훤 본인은 좀더 쉽게 경주로 진격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5. 견훤의 선택에 대해

이 사건은 흔히 견훤의 출중한 군사적 재능과 동시에, 견훤이 끝내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 즉 부족했던 정치적 비전과 오판의 사례로 회자된다. 즉 약탈과 방화, 파괴행위, 그리고 경애왕과 신라라는 국체에 대한 가혹한 처우, 경순왕이라는 정통성 있는 국왕의 옹립 등등 서라벌에 견훤의 선택은 단 한가지도 이후 고창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부메랑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가혹한 처사를 과연 견훤의 '비이성'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검토가 필요하다.

5.1. 왜 신라를 멸망시키지 않았는가?

이 부분은 비판이라기보다는 대중적으로 많이 공유되는 의문점이다. 이는 '후삼국'을 곧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전반적으로)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공존하던 삼국시대의 그 관계로 이해하는데서 비롯되는 오해다. 물론 삼국시대에 아신왕광개토대왕에게 조건부 항복을 하며 광개토대왕의 신하가 되었었고-왜, 가야에서 용병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뒷치기해서 곧 그 관계를 파기하지만, 신라는 내물 마립간 때부터 눌지 마립간 때까진 엄연히 고구려의 신하였다. 눌지 마립간 때 신하에서 '동생'으로 관계를 조정하지만 여하튼 464년 눌지 마립간의 반란 이전까진 신라는 엄연히 고구려보다 지위가 아래였다.
역사적으로 군웅할거시대의 패자(覇者)가 곧바로 옛 종주국을 폐지하지 않고 명목상으로라도 존속시키는 경우는 흔한데,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하던 춘추시대나, 의제(초)를 옹립한 서초패왕 항우, 죽는 날까지 일단은 한나라의 제후였던 조조, 아예 황실과 조정을 쭉정이로 만들고 따로 막부를 차려 놀았던 일본의 사례 등이 있었다.

후삼국시대는 삼국시대의 종식 이후 무려 200년이 지난 시기, 즉 신라가 대동강 이남에서 명실상부한 종주권을 정착시킨 때였으며, 후백제나 고려 모두 이런 신라의 지방세력으로 시작해 지역 유민세력을 결집, 국가화 하는데 성공한 케이스였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지방세력의 흥기와 독립시도가 구 백제와 고구려 핵심지역에서만 발생한 것도 아니고 원신라지역에서도 무수히 많이 일어났다는 것. 즉 지방세력들 중에서도 유민세력이라는 강력하고 광범위한 결집력 있는 기반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경우가 대성공을 거둔 것이지 유민세력들만 신라에서의 이탈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당장 삼국통일로부터 백 년도 더 전에 신라 영토가 된 낙동강 하류나 상주 등지에서도 독립세력은 잔뜩 나왔다. 견훤 본인부터가 이 상주 독립 군벌의 아들이고.

이런 유민의식으로 건국된 고려나 후백제도 200년간 이어져 온 관성이나 혹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에서 서라벌로 집중되어온 인적, 물적자원의 한계 등으로 인해 당장은 신라의 종주권을 완전히 부정하긴 힘들었는데, 유민세력을 중심으로 건국해도 영역국가화 되는 과정에서 편입되는 각지 세력들의 입장은 다 달랐다. 이를테면 삼국시대의 각축장으로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변방 신세였던 한강 일대의 주민들은 일단 후삼국 초기부터 일찌감치 신라에서 떨어져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신라를 미워할 이유도 없었다. 서남해안은 아예 후백제를 거부해 고려로 이탈할 지경이었고 백제 고지의 핵심 중 핵심이었던 웅주는 궁예가 죽고 나서야 후백제로 들어왔다. 명주는 심지어 통치자인 김씨 가문이 신라 왕실 출신이라 신라에 대한 예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국가를 멸망시킨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 일이다. 고구려가 한성을 불태우고 개로왕을 참살했음에도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했던 것은 남쪽에 건재한 백제 지방군과 신라 지원군까지 상대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며, 마찬가지로 동해안을 따라 경주 인근까지 남하해놓고도 신라를 합병시키지 못한 것 역시 신라 지방군과 백제 지원군을 동시에 상대할만한 자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앙집권이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던 후대의 고려나 조선은 수도 중앙정부의 정치적 결정만으로 국체를 완전히 넘기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 시절은 그렇지 못했다. 당장 후삼국시대부터가 고구려부흥운동백제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서 개막되었다. 동시대에는 발해부흥운동도 있었다. 청나라 역시 조선을 침공해 국왕에게 항복을 받고도 멸망을 시키지는 못했고, 사실 경술국치도 최소한 청일전쟁 이래 15년의 세월동안 서서히 저항여력을 제거한 후에야 완전한 병탄이 가능했다.

아래에서도 누차 언급하겠지만 이 때 견훤이 동원한 병력 자체가 어디까지나 '서라벌을 점령'하는데 있었지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준의 규모가 아니었다. 신라 멸망전이 가능하려면 추풍령 혹은 대야성 경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보급선을 유지하며 수만 규모의 군세를 동원해야 했겠지만 당장 대야성은 고려군에게 점거당했고 사면이 둘러싸인 후백제는 단일 전선에 그 정도의 병력을 동원할 수도 없었다. 견훤은 어디까지나 고려와 신라의 포위망을 뚫고 서라벌 입성을 통해 이 연합전선을 끊는데 목적이 있었다.

5.2. 약탈과 방화

약탈방화가 민심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나 고대로부터 수많은 군대들이, 심지어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발전한 근현대에도 약탈을 허용해왔던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보급능력의 한계와 사기의 문제인데, 서라벌 습격 당시의 후백제군은 그 장렬한 우회기동으로 인해 현지보급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서라벌을 점령한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등 뒤에서 고려의 대군이 전진해오고 있었으므로 이들과의 전투를 치르기 위한 물자까지 충당해야 했다. 물론 어설프게 신라의 저항 여력을 남겨두어 한창 싸우고 있는데 등 뒤에서 칼 맞는 사태를 방지할 필요도 있었고, 아무리 정예병력이라 해도 이런 강행군에 추가적인 결전까지 앞둔 상황에서는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일정 정도의 가혹행위는 용인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었다.

5.3. 경애왕에 대한 가혹한 처우

일부에서는 경애왕의 살해 그 자체가 견훤의 실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일단 견훤에게 사로잡힌 시점에서 경애왕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없었다. 단순히 국체 보존을 위해 고려와의 동맹과 후백제와의 대립을 택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심지어 고려와 후백제 간의 화의마저도 까대며 후백제 공략을 주장한 사람을 살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살려두고 완산으로 압송하는 것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고려군과의 일전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라벌이든 자신의 군막이든 이런 폭탄덩어리를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경애왕에 대해, 핍박하여 자살에 이르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도 있다. 즉 처리는 불가피해도 최소한의 예우는 갖췄다면 신라계 호족들의 여론이 고창 전투 한 방에 고려로 쏠려버리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것.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견훤이 아무리 신라계이고 신라 장수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내보였다 한들 그는 공식적으로 후백제의 국왕이며 의자왕의 복수를 건국 명분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당대 백제인들도 바보는 아니라서 어디까지나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써 견훤을 밀어준 것일 뿐 그가 아무리 봐도 백제 왕족의 후손은 고사하고 구백제계조차 아닐 가능성이 높은 상주 출신임은 자명했으므로 견훤은 어떻게든 스스로가 백제인임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었고, 그러자면 결론은 신라 왕신라의 도성에 대한 가혹한 응징 뿐이었다. 방향이 좀 다르긴 하지만 궁예 역시 청주의 구백제계를 우대하며 대신라 강경책을 내세웠고 결국 건국의 주축이었던 고구려계와의 대립으로 몰락했으니, 아예 백제를 자처한 견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견훤의 나이도 고려의 대상이다. 이미 당시로써는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환갑의 나이였고,[9] 후계구도를 생각할 때 누가 봐도 군사적 재능이 떨어지는 장자 견신검에게 신라를 병합하지 못한 국가를 물려주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즉 견훤으로써는 남은 시간동안 반드시 신라 병탄을 마무리지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러자면 신라에 대해 완전한 힘의 우위를 보여주어야 했다. 또한 그런 '온건한' 대응을 통해 과연 견훤이 정치적으로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즉 아무리 신라 왕실을 예우해주고 서라벌을 불태우지 않는다고 한들, 견훤은 결국 신라 왕실에게든 신라계 호족에게든 정규군 지휘관 출신의 반란수장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서라벌에 대한 물리적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끝내 견훤을 '백제왕'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신라 조정인데, 그보다 말랑하게 구는 견훤에게 보다 호의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오히려 기회를 틈타 고려와 다시 연계할 궁리를 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5.4. 경순왕 옹립

경순왕 옹립도 여러모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부분이다. 김씨 왕가에서 가장 정통성이 높았던 김부를 옹립한 결과 비록 강역은 축소되고 사실상 고려의 속국인 도시국가 수준으로 전락했을지언정, 적어도 신라 내부에서는 감히 경순왕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의 정치적 결단에 따라 신라가 빠르게 고려에 숙이고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라 조정을 확고히 장악하지 못할 정통성 없는 꼭두각시 국왕을 앉혔다면, 고창 전투의 패배 이후에도 신라가 곧바로 편을 바꿔 고려에 납작 엎드리거나 이후 몇 년이라도 더 고려에 대한 귀부를 결정하지 못해 시간을 질질 끌었을 터이고 고려도 섣불리 후백제를 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 요지다.
그러나 이 역시 서라벌에 입성한 견훤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견훤은 기습을 통해 서라벌을 일순간 장악할 수는 있었지만, 직후 거의 전 병력을 공산 전투에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서라벌에 대한 통제를 일순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누차 언급하지만 서라벌과의 직통로인 대야성은 고려군에게 점거당해 1년 후에야 회복했고, 등 뒤에 나주가 버티고 있었다. 서라벌 습격과 공산 전투라는 잭팟을 통해 잠시 우위를 점한 후백제 앞에는 당장 이 걸림돌들부터 해치워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물론 고려가 국왕이 전사할뻔한 대위기와 호족들의 이탈 속에 지리한 수세에 몰린 것은 사실이지만 삼년산성 전투에서 보이듯 후백제에 대한 공세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고, 견훤은 928~929년 사이 계속해서 경북 중남부 일대에 버티고 있는 고려군을 몰아내는 작업을 벌여야 했다.[10] 이 사이에 '정통성 없는 허수아비'가 버텨주지 못하고 신라 하대의 그 빈번한 정변으로 실각하거나 한다면 후백제는 다시 서라벌에 물리적으로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견훤이 택할 수 있었던 최선책은 서라벌에서 어떤 사달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통성 있는 국왕을 앉히고 고려에 대한 힘의 우위를 과시함으로써 서라벌이 후백제의 영향력에서 이탈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전략은 고려에 대한 힘의 우위를 상실하는 순간 파탄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6. 대중매체에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156~159화에서 묘사 되었다. 서라벌 정복 편, 황궁 점령 편

[1] 901년과 916년 후백제의 대야성 공격을 막아낸 신라군의 총사령관이었다. 이후 920년에는 후백제에 의해 결국 대야성이 함락되지만, 이 당시에도 김억렴이 대야성주였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인해 알 수 없다.[2] 고려의 건국으로 대신라 정책이 유화책으로 돌아선 이후에는 신라와의 연결을 위해 여전히 추풍령 일대에서의 쟁탈전이 중요했다. 고려가 본격적으로 후백제와 맞붙은 것도 경북 지역인 조물성이었다.[3] 수나라의 무장으로 진 공격 때에 후주 진숙보를 잡은 인물이다.[4] 외사촌 동생[5] 연구자에 따라서는 바로 청소년기~청년기 말단 병사 ~ 하급 장교 시절 10대 후반 ~ 20대 견훤이 입대하여 소속했던 부대로 추측하기도 한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을 봐선 견훤은 육기정 부대보다는 신라 왕실 근위대 소속 장교였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 견훤의 출신지인 경북 문경 및 상주 일대는 무려 지증왕 때부터 신라 왕실 근위대 및 특별 파병 부대에 지원병을 제공하던 신라 성골 왕실의 직할 왕령지였기 때문. 육군본부 발간 한국군사사 제1~2권 참조[6] 다만 이 '후백제 도적들'이란 견훤이 아니라 적고적 같은 민란 세력이었으리라는 해석도 있다.[7]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지금도 남아 있다. 다만 지금의 중생사는 후대인 1940년대에 재건된 것으로 신라 때의 그 중생사 자리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8] 물론 견훤이 보여준 저력은 대단했기에 당장은 신라가 후백제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후백제는 그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9] 일반인 기준으로 봐도 고령이지만, 재위기간을 보면 거병으로부터 셀 경우 벌써 재위 35년째였다. 국왕의 직무에 더해 재위 내내 전장의 가혹한 환경에 노출되었던 점까지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체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0] 이조차도 929년 겨울 가은 포위가 실패하면서 경북 방면에 대한 후백제의 확장은 한계에 이르렀고, 끝내 고창 전투라는 재앙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