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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1 10:45:57

황산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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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하 전투
黃山河 戰鬪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1차: 음력 115년 7월
2차: 음력 116년 8월
장소
황산하 일대(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낙동강 하구 일대)
원인 가야신라낙동강 일대 지배권 충돌
교전 세력 <rowcolor=#C00D45,white> 가야
(방어자)
신라
(공격자)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수로왕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지마 이사금
병력 파일:가야의상징이라고칩시다심볼할게없네.png
병력 규모 불명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1차 침공 : 불명
2차 침공 : 10,000명
결과 가야군의 방어성공

1. 개요2. 배경3. 전개
3.1. 1차 전투3.2. 2차 전투
4. 전투 이후5. 기타

[clearfix]

1. 개요

지마 이사금 4년에 신라가야가 황산하에서 벌인 전투.[1]

2. 배경

102년, 수로왕이 신라를 도와 진한의 음즙벌국과 실직국의 무역 분쟁을 해결하는 등 신라-가야 사이의 잠깐의 평화가 깃들었으나 108년, 신라가 진한의 다벌, 비지, 초팔 3국을 병합하자 현재 대구-경산 지방을 중심으로 신라와 가야 사이의 영토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라는 황산진구 전투 이후 가야와 지속적인 군사 대치와 교전을 이어갔다.[2][3] 선대 왕 파사 이사금 치세에는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수로왕에 대한 외교 결례 논란이 발생하면서 양국 관계는 대치 상태로 되돌아갔다.[4]

신라와 가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지마 이사금 4년이 되던 시기에 가야는 신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여 노략했다.[5]

3. 전개

115년, 신라 지마 이사금이 직접 1만 군사를 이끌고 황산하를 건너 금관가야를 공격했으나 가야군의 복병에 걸려 참패하고 왕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왔다. 이듬해 116년, 이사금이 다시 한번 가야를 공격하지만 가야군은 버텼고 장마마저 내리며 또 다시 대패하여 돌아갔다. 이리하여 10여년에 걸쳤던 2차 전쟁은 가야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80여년간 신라-가야 사이의 접촉은 없었다.

3.1. 1차 전투

가을 7월에 왕이 친히 가야를 정벌하였다.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건너는데, 가야인들이 군사를 수풀 사이에 숨겨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왕이 깨닫지 못하고 곧장 나아가니, 복병들이 나타나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군사들을 지휘하여 분연히 공격하고서, 포위를 헤치고 물러났다.

秋七月, 親征加耶. 帥歩騎度黄山河, 加耶人伏兵林薄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지마 이사금 4년 7월 기사,음력 115년 7월,

3.2. 2차 전투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가야를 침략하게 하고, 왕이 정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가야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굳게 지켰다. 때마침 비가 오랫동안 내리니, 돌아왔다.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以繼之. 加耶嬰城固守. 㑹久雨乃還.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지마 이사금 5년 8월 기사,음력 116년 8월,

4. 전투 이후

지마 이사금 치세에 가야에 대한 공세적인 움직임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음력 121년 2월 대증산성,大甑山城,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금관가야와 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추정한다.[6][7]

5. 기타



[1] 황산하는 현재의 경남 양산시와 김해시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 하류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2 양산군 산천조에 황산강,黃山江,이 부,,의 서쪽 18리에 있다고 언급한다.[2]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음력 77년 08월 기사, 음력 87년 07월 기사, 음력 94년 02월 기사, 음력 96년 09월 기사[3] 신라본기 초기 기사에 언급되는 가야는 금관가야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주류이다.[4]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음력 97년 01월 기사, 음력 102년 08월 기사, 음력 106년 08월 기사[5]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음력 115년 02월 기사[6]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지마 이사금 10년 2월 기사, 대증산성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일대에 있었던 산성으로 비정한다.[7] 대증산성에 축성에 대해서 기록과 달리 5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신라 내물 마립간에서 지증왕 치세에 해당한다.#[8]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음력 201년 2월 기사, 음력 209년 7월 기사[9] 황산하 전투에서 가야가 땅을 점유했다면 내해 이사금부터 미추 이사금 치세 시기 사이에 해당 지역을 반환해야 미추 이사금의 행차가 가능해진다. 양국 간의 우호적인 시기에도 반환 기사가 없으므로 황산하 지역은 신라가 계속 점유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