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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2:17:02

치양 전투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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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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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양 전투
雉壤戰鬪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369년 (고국원왕 39년) 음력 9월
장소
백제, 치양성(현재 황해남도 배천군 치양성)
원인 백제의 굴기와 고구려의 예방전쟁.
교전국 <rowcolor=black> 백제
(수비)
고구려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백제 군기.svg 부여구수 (백제 태자)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국원왕 (고구려 국왕)
참가자

파일:백제 군기.svg 막고해
참가자

파일:고구려 군기.svg 사기[1]
병력 병력 규모 불명 고구려군: 2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포로 5,000명
결과 백제의 대승
영향 백제의 강역 확장 및 국가 정체성 확립

1. 개요2. 배경
2.1. 고구려2.2. 백제
3. 전투 경과
3.1. 고구려의 선제공격3.2. 붉은 깃발의 군대3.3. 태자의 말발굽이 이곳에 머물다
4. 전투 이후5. 여담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고구려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 고국원왕근초고왕, 태자 부여구수의 맞대결이자 양국 간의 직접적인 물리적 충돌이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전투이기도 하다.

2. 배경

2.1. 고구려

미천왕 재위 당시 낙랑군대방군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당시 백제는 대방군을 후원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미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고국원왕 시기에는 중국에서 너도나도 황제를 자청하는 5호 16국 시대가 열렸고, 고구려도 여기에 휘말리면서 백제와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게 된다. 고구려가 지속적인 예방 전쟁을 통해 영향력 아래에 두었었던 선비족모용황의 지휘 아래 급격히 성장해 337년 연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르렀고, 고구려는 전연의 침공에 환도성이 불타고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지는 굴욕을 당했다. 전연에게 남소성을 빼앗겨도 태클 한번 못 걸고 스스로 신하국을 자처할 만큼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다소 만만한 남쪽으로 시선으로 돌리게 된다.

2.2. 백제

분서왕-비류왕-계왕으로 이어지는 혼란의 시기를 거친 백제는 진씨(眞氏) 가문의 힘을 빌린 근초고왕이 왕위에 오르며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근초고왕은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해 나갔는데, 369년에는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백(沙白), 개로(蓋盧)에게 병력을 주어 탁순국을 거쳐 신라의 군대를 격파하게 했으며, 이후 금관국과 탁순국 등 가야 7개국[2]을 백제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침미다례를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도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남쪽을 평정해 안정화시킨 백제는 신라고구려 쪽으로 손길을 뻗기 시작했다.

3. 전투 경과

양 국가가 국경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각각 서로를 목표로 정했으니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결국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먼저 칼을 빼 들면서 향후 300여 년 동안 이어질 백제고구려 간 무력 충돌의 서막이 열렸다.

3.1. 고구려의 선제공격

파일: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충돌 지역.png
치양평양성의 위치
高句麗王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고구려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주둔하며 병사를 풀어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369년) 9월조 #
369년 9월, 고국원왕은 친히 20,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해 치양[3]을 기습해 점거했다. 위례성으로 향하는 길목인 칠중성[4] 대신 한강 하류에 위치한 치양을 공격한 것인데, 한강 하류 지역을 장악해 백제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고 황해 주도권을 차지하고자 이러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근초고왕은 이 소식을 듣고 태자 부여구수에게 병사를 주어 고구려와 맞서도록 했으며, 이윽고 부여구수는 병력을 이끌고 지름길을 통해 치양에 도착했다.[5]

3.2. 붉은 깃발의 군대

양군은 치양에서 진을 치고 대치했는데, 이 때 사기(斯紀)라는 사람이 고구려 진영에서 탈영해 백제 진영으로 넘어오는 일이 발생한다. 사기는 원래 백제 출신으로, 왕이 타던 말발굽에 상처를 낸 사건으로 벌을 받게 될 처지가 되자 고구려로 망명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치양에 종군했다가 다시 백제 진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사기는 부여구수에게 다음과 같이 제보했다.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唯赤旗. 若先破之, 其餘不攻自潰.
"저쪽 군사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숫자를 채운 가짜 병사일 뿐입니다. 날쌔고 용감한 것은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그들을 먼저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공격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원년(375년) 11월조 #
붉은 깃발이 언급되었는데, 고구려의 벽화고분으로 유명한 안악 3호분에 그려진 행렬도에 무덤의 주인으로 보이는 높은 인물 주위에 있는 병사들이 붉은 방패와 붉은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군 중에서도 정예로 추정된다. 고국원왕이 직접 친정에 나섰기 때문에 보통 고국원왕의 친위대로 보는 편이다.
파일:external/pds27.egloos.com/a0053134_56bca6033be9d.jpg
서기 357년경 그려진 고구려 행렬도의 일부
사기의 말을 들은 부여구수는 즉시 붉은 깃발을 든 진영을 집중 타격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는지 고구려군은 대패하여 줄행랑을 쳤고, 백제는 5,000명이 넘는 포로를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이때 얻은 수많은 노획물은 부여구수가 모두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續.
임금이 병사 20,000명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침입하도록 하였으나 치양(雉壤)에서 싸우다 패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39년(369년) 9월조 #

3.3. 태자의 말발굽이 이곳에 머물다

영혼까지 털린 고구려군은 수곡성[6]까지 도망쳤고, 부여구수가 이끄는 백제군은 기세등등하여 신나게 추격하였다. 수곡성 서북쪽에 이르렀을 때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부여구수에게 《도덕경》의 구절 일부를 인용하며 추격을 만류했다.
嘗聞道家之言, '知足不辱, 知止不殆.' 今所得多矣, 何必求多.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구하려고 하십니까?"
막고해의 간언에 부여구수가 동의하며 추격이 중단되었다. 부여구수는 돌을 쌓아 거대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둘러보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今日之後, 疇克再至於此乎.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

4. 전투 이후

고국원왕은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2년이 지난 371년에 또다시 병사들을 보내 백제를 치게 한다. 하지만 근초고왕이 직접 친정한 백제군은 패하(예성강) 강가에 매복하는 작전으로 고구려를 물리친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백제군이 역러쉬를 가서 평양성을 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기에 이른다.

이 전투 이후 백제군은 통일된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황해도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구 대방군의 한인(漢人)들을 대거 편입시키며 선진 기술들을 흡수했다.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왕이 타는 말을 관리하는 인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금관국, 탁순국, 반파국, 안라국, 비자벌, 탁기탄, 다라국을 가리킨다.[3] 오늘날의 황해남도 배천군으로 비정된다.[4]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일대로 비정된다.[5] 부여구수가 달려간 장소가 근초고왕 본기에는 치양으로, 근구수왕 본기에는 반걸양(半乞壤)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고국원왕 본기에도 고구려군이 침공한 곳이 치양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반걸양과 치양은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6] 오늘날 황해남도 신계군 예천강 일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