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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원 전투

고구려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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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원 전투
坐原 大捷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172년 (신대왕 8년)
원인 현도태수 경림고구려 침략
교전국 고구려
(방어)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구려 군기.svg 신대왕
파일:고구려 군기.svg 명림답부
지휘관

[[한나라|
]] 경림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군 전멸
결과 고구려의 승리
1. 개요2. 기록3. 전투 양상과 기록 논란4. 기타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한나라(후한) 말기에 한나라 현도군에서 고구려침공한 사건.

2. 기록

四年 漢玄菟郡太守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菟
4년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삼국사기》 신대왕 4년 기사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菟太守公孫度 討富山賊
5년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삼국사기》 신대왕 5년 기사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羣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 一夫當關 萬夫莫當者 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荅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王然之 嬰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荅夫帥數千 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荅夫坐原及質山 爲食邑
8년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사기》 신대왕 8년 기사

3. 전투 양상과 기록 논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신대왕 4년에 '한나라의 현도 태수 경림이 쳐들어와 우리 군사 수백을 죽이자 왕이 항복해 현토에 붙기를 청했다'라고 했고, 신대왕 5년에는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을 보내 요동 태수 공손도를 도와 부산적을 토벌했다'라고 했으며, 신대왕 8년에는 '한나라가 대병으로 우리를 공격하자 답부가 수천의 기마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교전했다. 한나라의 군대는 대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라고 했다. 고구려에게 패했다는 기사는 《후한서》, 《삼국지》에 나와있기도 하다.

한편 위 《삼국사기》의 4년, 8년 기록은 5년 기록을 실수로 2차례로 나누어 놓은 것 같다는 느낌(?)도 준다.

이를 두고 신채호는 '김부식이 시비를 모르고 《후한서》의 기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공손도는 동한의 헌제 영평 원년에 비로소 요동의 태수가 되었는데, 영평 원년은 기원 190년으로 신대왕 5년으로부터는 20년도 뒤다. 명백한 오기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위의 《삼국지》와 《후한서》의 대고구려전 패전 기록에 대해서는,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고구려의 종주국으로 기록했으니, 이런 것에서 중국사에 무필(誣筆)이 많음을 볼 수 있다.'라고 했다. 하지만 공손도가 저 시기에 잠시 요동 태수로 왔다가 다른 곳으로 전출간 기록이 있기에 위의 두 기록은 사실에 부합한다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의 국상이자 장군으로 활약한 명림답부의 나이는 기록으로 추산해보면 105세에 달하는데, 당연히 부정확한 기록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만약에라도 사실이라고 한다면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간달프와 같았을 것이다.

4. 기타

5. 대중매체

소설 《우리나라 삼국지》에서는 한나라군이 공격하자 고구려에서는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싸우겠다며 요충지를 지키면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한나라 군사의 강함을 생각해 산성으로 옮겨 지키면 된다면서 한나라 군사가 지칠 것이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퇴각할 때 공격하면 된다고 하자 명림답부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왕정이 경림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들이 저항하지 않자 겁먹은 것이라 여겼고, 경림은 함정이 있는 것이라고 경계해야 한다면서 척후병을 보냈으며, 왕정은 고구려의 군사를 2차례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밤에 공격하려 했지만, 기습을 알아챈 고구려군의 불화살에 맞고 전사한다.

경림은 한 달 넘게 포위했지만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퇴각하기로 하며, 부장 두선에게 후위를 경계하도록 지시하는데, 좌원에서 두선이 공격을 받고 달아나다가 매복한 명림답부가 이끄는 군사들의 공격을 받았다. 두선은 우거에게 죽고 경림도 전사했으며, 한나라군은 일부만이 살아남아서 돌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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