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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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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शाक्यमुनि | Śākyamuni
파일:Gandhara_Buddha_(tnm).jpg
기원후 1-2세기 간다라불상
〈석조입불상(石造立佛像, Standing Buddha of Gandhara)[1]
본명 고타마 싯다르타
출생 기원전 560년경 추정[2]
사캬국 카필라바스투 룸비니 동산
(현 네팔 룸비니 루판데히 구 마야데비 사원)
사망 기원전 480년경 추정 (향년 80세)
말라국 쿠시나가르
(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쿠시나가르)
신분 왕자
가족관계 아버지 슈도다나
어머니 마야부인
계모 겸 이모 마하파자바티
아내 야쇼다라
아들 라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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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c00,#ff8c00><colcolor=#fff,#ddd> 호칭 프라크리트어 𑀲𑀓𑁆𑀬𑀫𑀼𑀦𑀻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문자 शाक्यमुनि[3]
라틴 문자 Śākyamuni
한자 釋迦牟尼[번체]/释迦牟尼[간체]/釈迦牟尼[6]
한국어 석가모니
영어 Sakyamuni
본명 산스크리트어 데바나가리 문자 सिद्धार्थ गौतम[7]
라틴 문자 Siddhārtha Gautama
한자 瞿曇悉達多
한국어 고타마 싯다르타
영어 Gautama Buddha
}}}}}}}}} ||

1. 개요2. 호칭3. 생애
3.1. 역사적 붓다:석가모니는 실존했는가
4. 사상5. 가족
5.1. 석가족5.2. 석가모니 부처 이전의 인도
6. 제자7. 한국에서의 인식8. 서구 사회에서의 인식9. 외모10. 기타11. 미디어에서의 언급12.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석가모니불교의 교조이자 창시자이며, 여러 붓다(부처) 중 하나다.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 고타마가 성씨이며 싯다르타가 이름이다.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캬무니'를 음역한 것으로 샤캬족(석가)의 성자라는 뜻. 또한, 무니에는 고행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고대 인도의 샤캬 부족의 소왕국 '카필라'의 왕[8]정반왕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인간의 삶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고자, 이후 왕세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많은 수행 끝에 '감정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견뎌내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마지막 제자인 쑤밧다를 교화하고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9]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디가 니까야 16경 <대반열반경>과 26경 <전륜성왕사자후경>(상세내용)[10]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가르침이 현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 로마를 거쳐 서구 전역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처럼,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네팔과 인도를 거쳐 중앙아시아[11]동아시아[12]를 거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크게 대승불교[13]부파불교[14]로 종파가 나뉘었고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남기고 있다.

2. 호칭

언어 명칭
한국어 부처, 불(佛), 세존(世尊), 석가모니(釋迦牟尼)[15], 여래(如來)
산스크리트어 बुद्ध(buddha), शाक्यमुनि (Śākyamuni)
티베트어 བཅོམ་ལྡན་འདས(bcom ldan 'das)[16], ཤཱ་ཀ་མུ་ན་[17]
영어 buddha, Gautama, Sakyamuni
중국어 释迦牟尼[중국어], 釋迦牟尼[중국어], 佛, 佛陀, 佛祖
일본어 釈迦牟尼(しゃかむに), 仏陀(ぶつだ、ぶっだ), 仏(ほとけ)
태국어 พระพุทธเจ้า
라오어 ພຣະພຸດທະເຈົ້າ
몽골어 ᠪᠤᠷᠬᠠᠨ / Бурхан[20], ᠪᠤᠳ᠋ᠳ᠋ᠾᠠ / Будда(봇다)
버마어 ဗုဒ္ဓ
베트남어 Phật
크메르어 ព្រះពុទ្ធ
에스페란토 Budho (Gotamo)

이름은 성이 고타마, 이름이 싯다르타. 호칭 석가모니는 '샤캬무니'를 음역한 것으로 '샤캬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또한 '깨달은 자'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붓다(佛陀, 불타),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도 칭한다.

무차무등(無差無等)[21]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불교는 누구든 깨달은 자, 각자(覺者)[22]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와 불교가 탄생하기 전에도 부처는 존재했고, 그 뒤로도 누구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불교 문화권에서 부처라 하면 일반적으로 이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절에서는 이 깨달은 자란 의미를 살려 석가모니 외의 다른 무수한 종류의 부처를 모신다. 다른 나라들이 붓따, 부따, 부떠에 가깝게 발음하는데 비해 한국에서 '부처'라고 부르는 것은 구개음화의 결과물이다. '불타'라고도 하는데, 이는 한국 한자음에서 원래는 ㄷ받침을 가졌던 음가들이 전부 ㄹ받침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으로, 그 현상을 감안해서 '불타'를 다시 읽어보면 '붇타' 즉 Buddha와 매우 비슷한 발음이 된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世尊), 석존(釋尊), 불(佛), 여래(如來) 등의 10가지가 있다. 실제로는 10가지보다 더 많아졌지만, 대승불교에서는 하여간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서 10가지라고 일컫는다. 이를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부르는데, 다음과 같다.
명칭 의미
여래(如來) 석가모니여래의 준말,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
응공(應供) 깨달음을 얻었기에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될 분[23]
정변지(正遍知) 등정각자와 같은 말로, 우주 만물의 모든 이치를 완전하고 바르게 깨달은 분[24]
명행족(明行足) 깨달음의 지혜와 그 실천을 함께 갖추신 분
선서(善逝) 고통스런 생사윤회의 강을 건너가신 분
세간해(世間解)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완전하게 이해하신 분
무상사(無上士) 그 어떤 것보다 위에 계시는 분[25]
조어장부(調御丈夫)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분
천인사(天人師) 하늘의 신과 인간 중생의 스승
불세존(佛世尊) 깨달음으로 중생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분

이들 각 열 가지 호칭들은 각기 따로 쓰이기도 하지만, 두 개나 세 개, 혹은 열 개의 단어가 한꺼번에 쓰이기도 한다.
爾時, 世尊與大比丘八十億百千人俱, 前後圍遶. 二月十五日臨涅槃時, 以佛神力出大音聲. 其聲遍滿, 乃至有頂. 隨其類音普告衆生 “今日如來、應、正遍知,憐愍衆生、覆護衆生、等視衆生如羅睺羅, 爲作歸依、屋舍、室宅. 大覺世尊將欲涅槃, 一切衆生若有所疑, 今悉可問, 爲最後問.”
세존(世尊)께서는 앞뒤로 둘러싼 큰 비구 80억 백천 인과 함께하셨는데, 2월 15일 열반에 드실 때였다. 부처님께서 신통한 힘으로 큰 소리를 내시니, 그 소리가 유정천(有頂天)에까지 두루 가득 차고, 중생들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음성으로 널리 외치셨다.
“오늘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이신,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중생을 감싸고 도우시며, 중생을 외아들 라후라(羅睺羅)처럼 평등하게 보시고, 중생을 위하여 귀의할 곳이 되어 주며 집이 되어 오신 대각(大覺) 세존께서 곧 열반에 들려 하신다. 모든 중생들은 의심나는 데가 있거든 지금 모두 물어라. 이번이 마지막 물음이 될 것이다.(후략)"
『대반열반경』 1권
어느 때 세존께서 아모다라국(阿牟多羅國)에서 세간에 노니시다 아마나성(阿摩那城)에 이르러 시누편발(翅㝹編髮) 바라문의 동산에 머무르셨다. 이때에 시누편발 바라문은 사문 석종자(釋種子)가 집을 떠나 아모다라국에서 아마나성에 이르러 자기의 동산에 계신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되, ‘사문 구담은 큰 명예가 있어서 여래(如來)ㆍ무소착(無所着)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족(明行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라 불리는 분이시다. 매우 좋구나, 나는 지금 이 집착 없는 분을 만나 뵈리라’ 하였다.
『사분율』 42권
述名號品第三 亦作四門分別: 初釋名,二來意, 三宗趣, 四釋文。 (중략) 三品名者如來之名號. 依主釋, 或如來則名號,以十號中如來爲一故,於中名,謂釋迦等別名,號謂十號諸佛通具。又召體爲名,標德爲號。又亦名號無別,如文內說.
「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 제3 가운데 또한 네 가지 문(門)을 만들어 분별한다. 첫째는 이름을 해석함이요, 둘째는 온 뜻이요, 셋째는 종취(宗趣)요, 넷째는 본문을 해석함이다. 처음 가운데 셋이 있다. (중략)
세 번째 품의 이름이라는 것은 여래의 명호(名號)이니 주석에 의하면 혹 '여래가 곧 명호(名號)'라고 하는데 10호(號) 가운데 여래가 그 하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 이름[名]이라는 것은 '석가' 등의 별명을 말하며, 호(號)라는 것이 10호이니 모든 부처님의 통명이다. 또 체(體)[26]를 불러서 이름이라 하고, 덕(德)[27]을 표하여 호라고 한다. 또한 '이름'과 '호'에 구별이 없다. 경문에서 설한 것과 같다.
『화엄경탐현기』 4권

불경에서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석가모니를 향해 질문을 할 때 석가모니를 '세존(世尊)'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이 등장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바가완'을 번역한 단어로 인도에서는 불교 외에 다른 정신적인 위인에게도 많이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밖에 석가세존(釋迦世尊, 석가족의 큰어른) 또는 석존(釋尊)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스스로를 지칭할 때에 '여래(如來)'라고 불렀다.[28] 여래는 산스크리트어 따타가따(tathāgata)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어 따타가따는 해석하기에 따라 '~에서 오는자' 혹은 '~로 가는 자'로 해석할 수 있는데, 如來는 그 두 가지 뜻을 동시에 나타낸 번역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온 곳/혹은 석가모니가 향해서 가는 곳은 다름 아닌 진리를 말한다. 여래 항목 참조.

한국에서는 으레 석가모니라는 이름을 줄여서 '석가'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에서도 석가모니 부처를 줄여 부를 때에 '석가'라고만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석가에 설법 공자에 오도(釈迦に説法 孔子に悟道)'라고 하는 속담이 그것이다(한국 속담으로 '공자 앞에서 문자 쓰기',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라는 의미와 같다). 일본의 와타나베 쇼코는 이런 이유로 석가모니 부처를 줄여 불러야 할 때는 '석가'보다는 '석존'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는 한국의 법정 비구를 통해 <불타 석가모니>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책의 원제는 '신석존전(新釋尊傳)'이다. 아울러 석가탄신일은 석가모니 부처 단 한 명만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이지만 '부처님오신날[29]'이라고 부를 경우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명의 부처뿐 아니라 '과거불' 즉 석가모니 부처 이전에 존재했던 여섯 명의 부처(붓다)와 석가모니 부처 이후에 현세에 올 것으로 수기[30] 되어 있는 '미래불' 즉 미륵 부처 및 불경에 제시된 수많은 '부처'들까지 아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불교라는 종교의 사상적 외연이 더욱 넓어지게 되며[31] 석가탄신일이라는 용어보다 더욱 불교의 본질적 가르침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32] 용어라는 것이다.

출가하기 전의 석가모니 부처는 불경 속에서 대체로 '태자'로 지칭된다.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축건태자(竺乾太子)라고 불렀는데, 축건은 천축 즉 인도를 가리키는 한자어로 '인도 왕자님'이라는 뜻이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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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의 생애 전체를 총망라한 경전은 석가모니 부처 당대에서 조금 후대에 정리된 경전들이 대부분이며, 이들 경전을 바탕으로 다시 팔상도라는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그림으로 구현한 미술 장르가 성립되었다. 불경은 석가모니 부처 개인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무슨 내용의 설법을 하였는가가 초점이 될 뿐이다.

불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숫타니파타가 3장에서 석가모니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대략적으로 요약해서 서술하였다고는 하지만[33] 널리 알려진 석가모니 부처의 인생 속 장면 가운데 탄생 장면과 출가 수행 도중 빔비사라 왕을 만나고, 참선 도중 마라 파피야스의 유혹을 이겨낸 일화가 등장할 뿐 사문유관이나 열반 등은 언급이 없다.[34] 또한 석가모니의 출가 이전의 삶이나 일생에 대해서는 숫타니파타 외에도 《아함경》 곳곳에 조각조각 등장한다.

일본의 불교학자 와타나베 쇼코(渡邊照宏, 1907∼1977)는 그의 저서 《불타 석가모니》(원제: 新釋尊傳)에서 "팔리어 성전(남전대장경)이나 한역 아함 등은 보통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석가모니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짙다." 하며 어느 특정한 교파의 경전에 없다고 그 예화를 후세의 첨가나 창작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석가모니 부처 한 사람의 인생에 초점을 맞춰 책을 저술한 것은 석가모니 입멸 6백 년 뒤인 기원후 1~2세기 마명보살(馬鳴菩薩)[35]이 지은 《불소행찬(佛所行讚)》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며, 198년 후한(後漢)의 축대력(竺大力) · 강맹상(康孟詳)이 번역한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4세기 중국 유송의 학승 보운이 번역한 총 7권 31품의 불본행경(佛本行經)과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444년에서 453년 사이에 총 4권으로 번역한 《과거현재인과경》, 의 사나굴다(闍那堀多, 523~600)[36]가 번역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의 지바하라(地婆訶羅)[37]683년에 번역한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등이 있다.

한국에는 대중도서로 일본의 불교학자 와타나베 쇼코가 쓴 《불타 석가모니》와 법륜 비구가 쓴 《인간 붓다 -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이 가장 널리 알려졌는데, 와타나베의 저서는 유명한 법정 비구가 번역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에서 따로 《부처님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2010년에 대중용 서적을 내기도 했다.

3.1. 역사적 붓다:석가모니는 실존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존 인물이 맞다. 다만 일생에 워낙 신비한 전설이 많이 섞여 있는지라 한 때 일부 학자들은 그 실존을 의심하기도 했다. 석가모니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한때 계몽주의자들로부터 실존 여부를 의심받은 적이 있었다.

일단 석가모니 부처라는 인물이 태어나 활약하고 생을 떠난 것은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의 일인데, 이 시기에 지구상에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서쪽의 이집트 문명과 그리스 문명, 동쪽의 중화 문명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도의 역사만 하더라도 해당 시기의 역사는 거의 신화와 역사가 뒤섞여 있고, 그나마도 헤로도토스가 인도에 대해 직접 간 것은 아니고 전해 들은 것을 자신의 저서인 역사에 기록했다.

인도의 역사 관념은 서구 문명과도 다르고, 또 중국으로 대표되는 동방 문명과도 달랐다. 인도에서 역사 서술은 크게 1) 브라만교–힌두교 전통과 2) 불교 전통, 3)자이나교 전통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브라만–힌두 전통의 역사 기록은 고대의 이티하사(Itihasa)–푸라나(Purana) 전통을 그 기원으로 하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은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지배적인 역사 기록 양식이었다. 다만 '이티하사'[38]는 원래 역사 기록 그 자체를 위해 남긴 것이 아니라 베다 성전의 종교적 의미를 명료화하기 위해 즉 종교 경전의 교리를 뒷받침하고 보조할 참고 자료의 성격으로 작성된 것이었다.[39] 이티하사 문헌에는 준역사적인 서사시 《마하바라타》, 허구적 서사시 《라마야나》, 그리고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우주 창조 설화 등과 함께 신, 반신, 전설적 영웅, 그리고 어느 정도 역사적인 군주와 성인의 행적이 설화적 필체로 기록된 '푸라나'[40]가 있다. 푸라나는 베다 시대 이래 구전으로 전승되었고 기원후 굽타 제국 시대를 전후로 하여 문헌의 형태로 대거 작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푸라나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내는 방식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미롭게도, 굽타 제국의 멸망 이후 약 7세기부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을 출발점으로 힌두교 문헌에서 보다 전기적, 연대기적인 서술 양식들이 나타나고 점차 종교적 내지 설화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데, 새롭게 등장한 이러한 서술 양식으로 차리타(carita)[41], 프라샤스티(praśasti)[42], 왕샤왈리(vaṃśāvalī)[43] 등이 있고, 여러 문서와 비문에 남아 있는 이들 문헌은 이슬람 도래 이전까지 새로운 힌두 전통의 사료가 된다.

자이나교 전통은 상대적으로 브라만–힌두 전통과 불교 전통에 비해 문헌의 수가 적은 편이지만, 기원후 두 번째 천년기 초부터 프라반다(prabandha)라는 독자적인 전기 기록 양식이 자이나교 전통에서 발달하였고, 14세기 초에 집대성된 《프라반다친타마니》(Prabandha-cintāmaṇi)가 좋은 사례이다.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역사 기록이 종교 문헌에서 서서히 분리 독립해 나간 것과 달리, 불교 전통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이른 시기부터 명확한 역사적 목적을 갖고 나름대로 내용의 진실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며 남긴 다양한 전기와 연대기 문헌이 존재한다. 불경 속에서 이미 석가모니 부처 당대 인도의 모습이나 역사적 동향을 드문드문 추론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불교 텍스트를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은 고대부터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 불교적 형태의 역사 의식을 관찰할 수 있다.

불교 전통의 연대기에서는 특히 사건의 진실성과 인과 관계에 따른 서술이 브라만–힌두 전통에서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부터 편찬된 스리랑카의 연대기 마하밤사(Mahāvaṃsa)[44]는 이러한 불교 연대기의 훌륭한 사례다. 마하밤사는 석가모니 부처의 스리랑카 섬을 방문해 당시 스리랑카 섬에 거주하던 야카족과 나가족을 그의 위신력으로 제압하거나 몰아내고 스리랑카가 훗날 중요한 불교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전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스리랑카에 왔는지는 팔리어 율장이나 다른 초기 불교 문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의 형상을 처음으로 '불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기원전 1세기경에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일대기도 하나의 서사시(차리타)로 편집 정리되었는데, 그것이 《붓다차리타》(Buddhacarita)이고, 4세기경에 담무참에게 한역되어 불소행찬(佛所行讃)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차리타》는 석가 왕족의 계보(系譜)와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에서부터 입멸(入滅)에 이르는 장중한 내용을 기술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계통적으로 너무 과장되거나 조잡하게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상세하게 기술한다.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 속에 불교의 교의가 교묘하게 녹아 있고, 생전의 석가모니 부처를 실제로 만난 듯한 생생한 묘사로 석가모니 부처가 걸었던 고뇌의 길과 '스스로 깨달은 자'로서의 일깨움이 다른 불전문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붓다차리타를 편집한 인물은 기원전 1세기 용수와 더불어 일출논사로 꼽혔던 인도의 논사 아슈바고샤[45]인데, 최근 중앙 아시아에서 마명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희곡 《사리불극(舍利弗劇)》외에 두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브라흐미 문자)𑀤𑁂𑀯𑀸𑀦𑀁𑀧𑀺𑀬𑁂𑀦 𑀧𑀺𑀬𑀤𑀲𑀺𑀦 𑀮𑀸𑀚𑀺𑀦𑀯𑀻𑀲𑀢𑀺𑀯𑀲𑀸𑀪𑀺𑀲𑀺𑀢𑁂𑀦 𑀅𑀢𑀦𑀆𑀕𑀸𑀘 𑀫𑀳𑀻𑀬𑀺𑀢𑁂 𑀳𑀺𑀤𑀩𑀼𑀥𑁂𑀚𑀸𑀢 𑀲𑀓𑁆𑀬𑀫𑀼𑀦𑀺𑀢𑀺
(발음)Devānaṃpiyena Piyadasina lājina vīsati-vasābhisitena atana āgācha mahīyite hida Budhe jāte Sakyamuni ti
𑀲𑀺𑀮𑀸𑀯𑀺𑀕𑀥𑀪𑀺𑀘𑀸𑀓𑀸𑀳𑀸𑀧𑀺𑀢 𑀲𑀺𑀮𑀸𑀣𑀪𑁂𑀘 𑀉𑀲𑀧𑀸𑀧𑀺𑀢𑁂 𑀳𑀺𑀤𑀪𑀕𑀯𑀁𑀚𑀸𑀢𑀢𑀺 𑀮𑀼𑀁𑀫𑀺𑀦𑀺𑀕𑀸𑀫𑁂 𑀉𑀩𑀮𑀺𑀓𑁂𑀓𑀝𑁂 𑀅𑀞𑀪𑀸𑀕𑀺𑀬𑁂𑀘
silā vigaḍabhī chā kālāpita silā-thabhe cha usapāpite hida Bhagavaṃ jāte ti Luṃmini-gāme ubalike kaṭe aṭha-bhāgiye cha
(해석) 자비로운 삐야다시 왕은[46] 왕위에 오른지 20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하였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돌담을 쌓고 돌기둥을 세웠다. 부처님께서 여기, 룸비니 마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이 마을에 세금을 면제하였고 단지 생산의 1/8만 내도록 하였다.
룸비니 돌기둥 담마 칙령[47]

그리고 1895년에 독일의 고고학자 포이러(Alois Anton Feuhrer)가 네팔 남부 지역을 탐험하다가 우연히 아소카 대왕(재위 기원전 268-232)의 석주를 발견하였고, 석주에 새겨진 문장을 해독했는데, 거기에 인도의 아소카 대왕이 석가모니불의 탄생지인 이곳에 와서 참배하고 석주를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소카 대왕은 석가모니 부처 입멸 이후 300여 년 뒤의 인물이다.

아소카 대왕의 석주는 아소카 대왕이 불교에 귀의하고 적극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실천하고 나아가 그것을 주변국에 전파하기 위해 애썼음을 문헌으로 증언하고 있었고,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라는 인물의 존재와 그의 존재를 추앙하며 전하는 집단 즉 '승가'가 이미 아소카 대왕의 치세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아소카 대왕 석주는 그들 승가가 추앙하던 성자, 즉 붓다(𑀩𑀼𑀥𑁂) 석가모니(𑀲𑀓𑁆𑀬𑀫𑀼𑀦𑀺)의 이름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이기도 했다.

이로써 석가모니 부처가 역사상의 실존 인물임과, 룸비니 동산의 위치도 확정되었다.[48] 게다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로 여겨지는 유물도 당대의 문자와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석가모니의 사리용기) 이게 정말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 유물이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겠지만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일단 일본의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는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임을 확신한다고 밝혔지만.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일대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성경처럼 태어나고 살고 나이 들어 죽기까지의 일대기로써 정리되지 않은 것은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을 신격화하지 않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초월적인 신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이되 지극한 깨달음을 얻어 초인적인 존재로 거듭났다라는 점이 더욱 부각되었고 동시에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석가모니 부처 한 개인보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법문과 계율을 중시했고 경전 결집에 있어서도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법문과 계율)이 중심이었지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생애는 중심이 아니었으며, 그러다가 석가모니 부처가 초월적인 인간이라는 인식을 넘어 또한 신적인 존재로써 신격화되기 시작하면서[49]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생애'나 그가 생애에서 보인 여느 인간과는 다른 '이적'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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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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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상의 위대함은 역시 인류가 혹독한 삶으로 고통받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경이며, 이는 후대에 그를 따른 수많은 이들을 통해 정립되고 확장되었다.[50]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성, 위엄, 절대의 모습보단, 제자에게 신통력을 내보이지 말고[51] 수행에 정진하라고 가르치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

당시 인도는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상들이 혼잡하게 있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석가모니는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이들 사이의 대화 내용이 결국 불교의 경전이 된다. 대화 내용 중에는 민감한 내용을 직설적으로 물어보거나 석가모니를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도 많았다. 석가모니는 일관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설하였다.
붓다가 께사뿟따라는 깔라마들의 성읍(북인도의 조그만 도시)을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수행자와 성직자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이런 존경하는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들에 대해서 저희들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을 통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리라고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스스로 깨닫고 알게 되면 그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앙굿따라 니까야 3:65, 깔라마 경 중에서[52]

다만 모든 교조주의, 전통, 편협함으로부터의 자유를 논하는 내용이다 보니까,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부분적인 인용을 바탕으로 《깔라마 경》은 급진적인 회의주의나 비이성적이고 주관적인 진리 창조를 옹호하는데 악용되곤 한다. # 이에 관하여 미국의 승려 빅쿠 보디(Bhikkhu Bodhi)[53]는 "문맥에서 벗어난 단 한 구절의 인용을 근거로, 붓다는 '모든 교리와 신앙을 일축하는 실용적인 경험주의자'가 되어버렸고, 그의 법은 단순히 자유사상가의 진리에 대한 도구가 되어 각자 자기 멋대로 수용하고 거부하는 상황을 초래하였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54]

《깔라마 경》은 진리에 대한 판단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깔라마 사람들을 위해 즉각적이고 도덕적이며, 유익하고 본질적인 가치인 '탐진치(貪瞋痴)의 소멸'을 우선 기준으로 제시한 경전이다. 《깔라마 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논리와 추론, 사유만으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였지만, 그러한 지적 작용들 자체를 배제해야 한다는 내용은 해당 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깔라마 경》을 독해하는 과정에서부터 이미 논리적 사고는 요구된다. 바른 법을 '이익과 행복의 획득 수단'으로 정의하고, 이익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탐진치를 소멸해야 하며 따라서 바른 법과 바르지 않은 법을 탐진치의 소멸 여부로 판단하는 《깔라마 경》의 전개 역시 일종의 연역적 추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깔라마 사람들의 삼보에 대한 귀의 부분에서 알 수 있듯, 건전한 사유에 기초한 믿음에 대해서도 《깔라마 경》은 부정한 바 없다.
차연성(此緣性)[55]을 알고서 사견(邪見)의 그물인 분별(分別)을 벗어난 사람은, 탐욕, 미움, 우치를 벗어나 [번뇌에] 물들지 않은 열반으로 나아간다.
나가르주나, 《공칠십론》(이지수 번역)#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의 탁월한 지성을 적극적으로 중생 교화에 활용하였는데, 단적인 예로 석가모니가 설한 연기법은 독립된 존재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의존적인 존재를 성립시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동시에 제거하기 때문에 "왕(王)과 같은 논리"[rigs pa'i rgyal po]로까지 일컬어진다. 용수(나가르주나)보살이 《공칠십론》에서 밝혔듯이 연기를 통해 '다른 것에 의존한 것(차연성)', 즉 '공성'을 알게 되어 사견(邪見)[56]과 그로 인한 탐진치를 소멸할 수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의 교설인 연기는《깔라마 경》에서 말하는 '유익한 법'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한다.

일반적으로 '공성'에 대한 지혜가 성장함에 따라 탐진치와 같은 번뇌도 점진적으로 소멸된다. 티베트 불교의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57]에 대한 티베트 불교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소수의 티베트 원전들은 점진적 수행의 구조에 한정되지 않는 갑작스럽거나 즉각적인 접근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 나는 마하무드라(Mahāmudrā)를 돈오 수행으로서 명확하게 설명한 까규빠(Kagyupa)의 원전을 읽었다. 사꺄빠(Sakyapa)의 저술들에서는, ‘깨달음과 해탈의 동시성’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고, 닝마빠(Nyingmapa)의 족첸(dzogchen) 수행도 이것에 대해 말한다. 쫑카빠 스님은 동시성과 즉각적인 해탈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쫑카빠는 돈오(단박에 깨달음)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원인이 함께 쌓여진 것의 정점이라고 지적한다. 부처님에게서 사제(四諦)에 대한 가르침을 한 번 들은 직후에 공성을 깨달았던 최초의 다섯 제자들의 경우와, 밀라레빠(Milarepa)가 그 생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 많은 생애 동안에 진지한 수행을 했던 것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점오를 말하든 돈오를 말하든 간에, 진실한 종교적 발달을 위해서 원인과 조건을 오랫동안 쌓을 필요가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 툽텐 최된,《달라이 라마의 불교 강의》(주민황 譯)[58]

즉 대승의 수행 과정에서 처음에는 논리적인 추론인 '비량(比量)'을 통해 '공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견도(見道)에 이르러 직접적인 지각인 '현량(現量)'으로도 공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수도(修道)에서 명상을 통해 견도에서 직접적으로 지각한 공성에 대해 더욱 익숙해지고, 해탈을 방해하는 '번뇌장(煩惱障)'과 일체법을 깨닫는데 장애가 되는 '소지장(所知障)'을 끊음으로써 모든 번뇌가 소멸된 무학도(無學道)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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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적으로 따져보자면, 석가모니는 그 당시 브라만교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한 지식인에 가깝다. 힌두교는 영원불멸하는 영혼인 '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하여 죽은 이후에도 이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카르마에 따라 윤회한다고 하였는데, 불교는 이러한 '아트만'에 반대하여 '안-아트만', 즉 무아를 주장하였다. 무아는 윤회하는 영혼은 없으니 '나'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어서, 무아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난 현세의 깨달음을 중시하게 된다. 이것으로써 불교는 아트만의 윤회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불경에 대한 정리나 그에 맞추어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에 대한 체계적인 구성이 중국에서 시도되었다. 중국은 후한 명제 때에 불교가 전래되어, 서기 67년에 중인도 사문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최초로 인도의 경전을 사십이장경이라는 이름으로 한역한 이래, 8세기에 이르는 동안 여러 루트를 거쳐서 중국으로 불경이 전래되었고, 번역이 이루어졌으며, 개인이 하거나 또는 국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 경전을 번역하고 보니 경전들마다 조금씩 가르치는 문장이 다른 경우가 생기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어디에서는 또 이렇게 설명을 하는 등 경전의 자구나 중시하는 가르침이 조금씩 달라지는 일도 많았다. 동시에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과는 거리가 먼데도 마치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인 것마냥 꾸며낸 위경도 생겨나게 되었다.

불경을 번역한 중국의 승려들은 이러한 경전의 내용상 차이점들을 규합하고 정리하여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이란 무엇인지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아끼지 않았다. 천태종에서는 자국에 전래 및 번역된 불교 경전들을 향해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는 일종의 불경 비평을 행했다. 인도에서도 논사(論師)들에 의한 원시적인 형태의 교판이 있었기는 하지만[59] 불교의 교리가 자연스럽게 발달한 인도에서는 그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불교가 전파된 지역인[60] 중국 및 티베트에서 불경들에 대한 교차검증 및 비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종의 성서비평학의 불교 버전이라고 할 교상판석은 후대로 갈수록 각 종파가 자신들이 중시하는 소의경전의 가치를 띄우기 위한 목적으로[61] 변질되기도 하지만, 근대적인 연구방법에 비춰 보면 정밀함은 떨어진다 해도 석가모니 부처의 교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경전들 사이의 상이점이 발생한 원인을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그 의의를 무시할 수가 없다. 참고로 한국에서도 이러한 교상판석에 관한 이론이 신라의 승려 원효를 통해 사교판(四敎判)[62]이라고 해서 제시되었던 것이 그나마 유일하다.

티베트를 제외하고[63] 동북아시아 불교권에서 널리 통용된 것은 천태종의 교상판석이었다.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시기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오시설법'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다섯 시기로 나누고 다시 중생을 가르치는 형식에 따른 네 가지, 교리 내용의 깊이에 따른 네 가지로 분류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석가모니가 하고자 했던 진정한 설법은 바로 묘법연화경이었다, 라는 결론으로 귀결시킨다.
화엄최초삼칠일(華嚴最初三七日)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이십일재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법화열반우팔년(法華涅槃又八年)

천태종의 교상판석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분기별로 다섯 시기가 있었고 앞의 칠언절구는 그 다섯 분기의 가르침을 네 줄의 문장으로 저리한 것인데,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64]
1) 처음(1기) 석가모니 부처가 막 깨달음을 얻고 21일 동안 자신이 깨달은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토해낸 것이 화엄경이었는데, 이 화엄경의 가르침은 너무 수준이 높아서 중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2) 이에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65] 기초학습으로 아함경을 12년 동안 설법을 했고(2기),
3) 다음으로(3기) 대승경전인 방등부 불경[66]을 8년 동안 설법했고,
4) 다음으로(4기) 600권에 이르는 대반야경을 21년 동안 설법했는데,
5) 반야를 일깨우려는 공 사상의 본의와는 달리 중생들이 자칫 허무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67] 생애 마지막(제5기)에 이르러 8년 동안에 걸쳐 법화경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기 직전 하룻 동안 열반경을 마지막으로 설법했다.

아함경의 경우 근본 불교의 중심사상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의 내용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법문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교훈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아함으로 불리는 문헌으로 한역 대장경 안에 장아함경(22권), 중아함경(60권), 잡아함경(50권), 증일아함경(51권)이 있는데, 이들은 각기 팔리어 경장의 디가 니까야(장부), 맛지마 니까야(중부), 상윳따 니까야(상응부), 앙굿따라 니까야(증지부)에 대응되는 경전이다. 그리고 이들 팔리어 경장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에 편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경전이 바로 숫타니파타이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지만 불교에서도 마냥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을 담은 것만이 진정한 불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흔히 불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자체를 적은 경장(經藏)이고, 경장은 불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불경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 자체뿐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와 그 제자들, 나아가 재가제자들이 신행(信行) 또는 일상에서 겪은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에 대해 석가모니 부처가 어떤 것이 맞고 어떤 것이 맞지 않다고 판결하고 이를 계기로 제정한 계율들을 모은 '판례집' 율장(律藏),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 사후 불교 교단 안에서 경장 및 율장의 가르침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는지, 현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아가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교도들의 비난에 대해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비난을 반박하기 위해 승려들과 재가자들이 쓴 '교리해설서' 논장(論藏)이 포함된다.[68] 이는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 본인이 직접 한 설교만이 아니라 예수의 12사도, 나아가 사도 파울로스성 아우구스티노,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의 교부들의 저술 역시 성경과 같은 반열에 올려 우대하는 것과 같다.

이 경장, 율장, 논장을 모두 합쳐서 삼장(三藏)이라고 하며, 승려 가운데 경장뿐 아니라 율장과 논장 모두에 두루 통달한 달인이 비로소 '삼장'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한국이 포함된 동북아시아 불교권에서 불경 한역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쿠마라지바도, 현장도 모두 '삼장'이라 불린다. 때문에 불교 교리를 공부하려면 아함경이나 화엄경, 법화경 같은 경장만 읽어서는 안 되고 사분율, 십송율 및 쭐라박까, 비나야삔디까[69] 같은 율장, 대지도론, 구사론, 성실론 등의 논장도 모두 읽어야만 하는데, 안타깝게도 한국 불교는 그런 쪽이 많이 미진하다.[70]

5. 가족

5.1. 석가족

Adicca nama gottena, Sakiwa nama jatiya, tamha kula pabbajito'mhi raja na kame abhipatthayam.
가계는 아딧짜(Adicca)이며, 가문은 사끼야(Sakiya)이니, 내가 그러한 태생에서 출가한 것은 기쁨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숫타니파타 출가의 경(pabbajja sutta)[71]
gotamo sakyaputto sakyakulā pabbajito kosalesu cārikaṃ caramāno mahatā bhikkhusaṅghena saddhiṃ pañcamattehi bhikkhusatehi icchānaṅgalaṃ anuppatto icchānaṅgale viharati icchānaṅgalavanasaṇḍe.
사문 꼬따마는 사까의 후예인데 사까 가문으로부터 출가하여 500명 정도의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꼬살라를 유행하시다가 잇차낭깔라에 도착하여 잇차낭깔라의 깊은 숲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

스리랑카에 전해지는 역사서 마하왕사(대사)와 같은 연대기에는 세계 최초의 군주인 마하삼마따(Mahāsammata)[72]가 석가모니 부처가 속한 석가(사꺄) 왕조의 창시자라고 적고 있지만, 석가 왕조 즉 석가족 그리고 콜리야족의 직계 시조는 마하삼마따 왕조를 계승한 옥까까(okkāka)라고 알려져 있다.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73]은 석가모니 부처가 석가족을 "비천한 주제에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숭상하지도 않는다"고 세 번에 걸쳐 욕하는 암밧타 바라문 학도[74]에게 석가족의 연원을 말해주며 그를 깨우쳐주는 장면이 있다.[75]
Sakyā kho pana, ambaṭṭha, rājānaṃ okkākaṃ pitāmahaṃ dahanti.
암밧타여, 사꺄들은 옥까까 왕을 선조로 여긴다.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

산스크리트어 문헌 뿌라나에서는 익슈와꾸(Ikṣvāku)라 불리며[76] 한역하면 감자왕(甘蔗王)이라고 불리는 그는 아리야 족의 태양계 씨족 첫번째 왕이었으며 처음에 밧따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4남 5녀[77]를 두었고, 이후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잔뚜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옥까까 왕은 잔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고 이에 전처 밧따 소생의 자녀 중 맏이인 옥까무카(Okkamukha)가 나머지 동생들을 데리고 궁을 떠나 북쪽으로 히말라야 산기슭으로 가, 훗날 카필라바스투[78]라고 불리게 되는 까삘라(Kapila)로 와서, 이곳에서 까삘라 브라만의 도움으로 도시를 세우게 된다. 이들은 혈통을 보존하고자 장녀 삐야(Piya)를 어머니로 모시고 나머지 네 명의 왕자와 네 명의 공주가 서로 결혼하는 것으로 가족을 이룬다. 그의 자녀들이 도시를 세우고 나라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까까 왕이 "참으로 장하구나. 실로 능력있는 내 아들들이다!"라고 외쳤는데, 이때 옥까까 왕이 감탄하며 외친 잘했다(Sakya/sakka)라는 단어가 그대로 석가(사꺄)라는 종족의 이름이 된다. 옥까까 왕의 아들들은 카필라바스투 외에도 데와다하(천비성)라는 도시를 더 세우게 되는데, 이후 카필라바스투의 왕들은 카필라바스투 사캬, 데와다하의 왕들은 데와다하 사캬 또는 콜리야로 불린다. 이 콜리야가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 전의 아내 야쇼다라의 친정이다.[79]

초대 옥까무카 이후 석가모니 부처의 친할아버지인 아들 시하하누(Sihahanu)[80]에 이르기까지 카필라 국의 계보에 대해서는 불경마다 언급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불본행집경에는 옥까무카를 따라왔던 형제 가운데 막내였던 니구라(尼拘羅)[81]가 카필라 국의 왕이 되어 구로(拘盧) - 구구로(瞿拘盧) - 사자협(師子頰)으로 이어지고, 경률이상에는 울마(鬱摩)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인 니루왕(尼樓王)이 오두라(烏頭羅)를 낳았는데 오두라가 석가모니 부처의 고조할아버지이며, 오두라 - 구두라(瞿頭羅) - 시휴라(시하하누) - 정반(숫도다나)로 이어진다고 했다. 기세경은 감자종(甘蔗種) 왕의 자손들이 101명을 거쳐 마지막 불선장(不善長)의 대에 이르러 네 명의 아들[82] 막내아들 족구왕부터 그 아들 천성(天城) - 우성(牛城) 이후 7만 7천명의 왕을 거쳐 마지막 왕의 이름은 광거왕(廣車王) 이후 다시 별거왕(別車王) - 견거왕(堅車王) - 주거왕(住車王) - 십거왕(十車王) - 백거왕(白車王) - 구십거왕(九十車王) - 잡색거왕(雜色車王) - 지거왕(智車王) - 광궁왕(廣弓王) - 다궁왕(多弓王) - 겸궁왕(兼弓王) - 주궁왕(住弓王) - 십궁왕(十弓王) - 백궁왕(百弓王) - 구십궁왕(九十弓王) - 잡색궁왕(雜色弓王) - 지궁왕(智弓王) - 사자협(師子頰)[83] - 정반(숫도다나)에 이르는 장황한 계보가 이어져 있다. 불본행집경이나 경률이상, 지세경 모두 감자왕의 아들들이 카필라바스투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에 막내아들을 통해 왕계가 부자상속으로 이어졌다는 것,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의 직계 삼대 조상의 경우 사자협왕(시하하누) - 정반왕(숫도다나)으로 이어진다는 계보가 서로 일치한다.

자야세나 왕에 이르러 아들 시하하누(Sihahanu)가 자야세나의 뒤를 이어 카필라 국의 왕이 되었고, 그는 데와다하의 왕 안자나 왕의 여동생 깟짜나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5남 2녀[84] 가운데 맏아들이 바로 싯다르타의 아버지 슈도다나이고, 슈도다나 역시 데와다나 국 출신인 마야부인과 그 누이동생인 마하파자파티와 결혼했다.[85] 석가모니 부처의 아내 야쇼다라 역시 데와다하 출신으로, 숫도다나의 여동생인 아미따(감로)가 마야 부인의 오빠이기도 한 숩빠붓다와 결혼해서 낳은 딸이다. 그리고 숩빠붓다의 아들이 데바닷타이다.[86] 북전 기세경에는 숫도다나 왕의 동생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삼촌인 숙까다나(백반)에게 제사와 난제가 두 아들이 있었으며, 도또다나(곡반)에게는 아니루타와 난제리가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적었다.

아버지 슈도다나가 죽자, 새어머니 마하파자파티와 아내 야소다라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87] 사촌 형제로 아난다와 아나율, 이복동생으로 난다가 있는데, 이들 셋 다 석가모니를 따라서 출가했다.[88] 석가모니를 일생의 원수로 삼고 그를 해하려 했다 알려진 데바닷타 역시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이다.

이렇게 왕족 중 뛰어난 남자는 대부분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슈도다나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이을 후계자 문제를 제기, 이후 승단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이끌 장남은 출가할 수 없으며, 출가 시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새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슈도다나 왕의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다 출가했기 때문에 슈도다나 왕 사후 샤카 족은 석가모니 당대에 인접한 강국 코살라(사위국)[89]의 침공으로 멸망하나, 석가모니 이외에도 출가한 샤카 족이 몇몇 있었기에 샤카 족이 아예 멸절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5.2. 석가모니 부처 이전의 인도

유럽과 인도 아대륙의 어느 중간 지점으로부터 이동해 온 민족들이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인도 서북부를 통해 인더스 강과 쟘나 강 사이의 펀자브 지방으로 쳐들어와, 이곳 원주민들을 정복했다. 자신들을 아리야(Arya)[90]라 부르며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기원전 1100년에서 900년경 사이에는 갠지스 강 상류 유역까지 이르렀고, 기원전 6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는 갠지스 강 중류에 정착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다시 남인도 쪽으로도 세력을 넓혔다.

인도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그들이 숭상하는 베다 경전에 의지하여 세습적인 바라문이 희생제(야즈나) 등의 종교 의식을 집행하면서 사람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였고, 바라문은 나면서부터 최고라고 결정되어 있었으며 아리야인의 생활은 주로 목축에 의존했기에 소를 신성한 것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펀자브 평원을 넘어서 동쪽으로 이주하면서부터는 그들의 종교는 현지 생활에 맞추어 점차 농경 생활에 적합하게 발전해갔고, 따라서 그들의 종교는 주로 농경에 관계가 깊은 신들을 모시는 제의종교(祭儀宗敎)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것이 베다(Veda) 종교 또는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다. 이러한 가운데 본래는 사제였던 바라문들이 점차 하나의 사회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술의 힘을 기조로 하는 제사 의식(야즈나)의 효과를 강조하고 이 제식을 독점함으로써 종교권 권력을 장악했다. 여기에 바라문 지상주의, 야즈나 만능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브라만 중심의 문화가 이른바 기원전 10세기부터 6세기, 5세기에 걸쳐 바라문 중국(中國)[91]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융성하게 된다. 석가모니 부처가 활약했던 비하르 주의 동방은 이 '바라문 중국'의 관점에서 보면 변방이었다.

이후 사회의 발전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다. 고대 인도의 공화제는 종족 사회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고, 이러한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하는 종족을 정복함으로써 전제군주제가 발전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속한 사캬족(Sakya)을 비롯하여 말라(Malla), 리챠비(Licchavi), 비데하(Videha), 박가(Bhagga), 불리(Buli), 콜리야(Koliya), 몰리야(Moliya), 브라르마나(Brahmana), 칼라마(Kalama), 티바라(Tivara), 판다바(Pandava), 카칸다(Kakanda) 등의 종족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종족 사회는 공화제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과정에서 해체되었고, 부족간의 전쟁으로서는 당시 최강의 부족이었던 바라따(Bharata)와 뿌루(Puru)족간의 전쟁이 유명하며, 이를 읊은 서사시가 마하바라따(Mahabharata)이다. 그리고 이렇게 군소 부족국가들이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체계가 형성되는데, 이른바 십육대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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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가 활동하던 당시 이들 십육대국 각 나라들의 정치체제는 공화정(共和政)이냐 혹은 군주정(君主政)이냐, 이렇게 두 가지 형태의 통치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군주정 국가들은 주로 야무나 강과 갠지스 강 유역에, 공화정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인접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6대국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로 일컫던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반티 4개 국은 모두 군주정 국가들이었다.[92]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난 카필라바스투도 군주정 국가이기는 했지만, 마가다나 코살라 정도의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와 마찬가지로, 힘 있는 나라들은 힘 없는 나라를 쳐서 빼앗고 멸망시키는 전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군주정 국가들의 팽창에 맞서 공화국들(ga a-sa ghas)은 존립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또한 군주국끼리의 큰 전쟁도 빈발했고, 공화국끼리의 작은 싸움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공화국은 점점 쇠퇴해가고, 군주국은 영토와 국력을 증대시켜 갔다. 석가모니 부처의 나라인 카필라국 역시 코살라국에게 멸망당했고, 코살라국은 마가다국에게 멸망한다.
당시 마갈왕(摩竭王) 아사세(阿闍世)는 월지국(越祇國)과 서로 좋지 않은 사이였다. 하루는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말하였다.
“월지국이,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많으며 땅이 기름지고 들에는 풍년이 들며 진기한 보물이 많이 나는 것을 믿고 나에게 굴복하지 않으니, 마땅히 가서 정복하고야 말리라.”
그 나라에는 우사(雨舍)라는 어진 대신(大臣)이 있었는데, 바라문[梵志] 종족이었다. 왕은 그를 사신으로 명하여,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하여 여쭙기를 “기거가 편안하시고 기력이 강건하시며 덕화(德化)가 날로 높으십니까?” 하고 문안을 올린 뒤에 “아사세왕이 월지국과 뜻이 맞지 않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나서 정벌하려고 하오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자 합니다”고 하도록 분부하였다.
반니원경 권상#[93]
그때에 구사라국의 바사닉왕(波斯匿王)과 마갈국의 아사세왕(阿闍世王) 사이에 싸움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때에 비구들이 거기에 가서 죽은 사람의 옷을 가지려 하여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도 좋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이 있거든 말을 하고 가지고, 사람이 없거든 그대로 가져라.”
그때에 아사세왕이 비사리의 왕족들과 자주 싸워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때에 비구들이 거기에 가서 죽은 시체의 옷을 가지려 하여 부처님께 말씀드리니, ‘가서 말한 뒤에 가져라. 만일 사람이 없거든 그대로 가져라’ 하셨다.
『사분율』 39권#

또한 경제적으로도 특기할 만한 현상이 석가모니 부처의 시대에 나타났다. 인도에서는 대략 기원전 800년경에 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철의 사용으로 농기구와 그 이외의 도구가 개량되었으며, 이는 숲의 개간과 농업 생산의 증대, 나아가 다양한 수공업 제품의 증산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토지가 증가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풍부하게 생산된 제품은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를 사고 파는 상인계층이 출현했다. 이러한 부농이나 상인 자본가들이 불경에서는 가하파티(Gahapati)로, 한역하면 거사(居士)이다. 그리고 이들 상공업자들이 만든 조합의 우두머리를 세아히(seaahi)라 불렀으며, 한역하면 장자(長者)이다.[94]

이들은 도적과 교통의 불편함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시골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했고, 이 교역로의 안전을 위하여 실제적인 무력을 지닌 왕족들의 힘을 빌렸다. 무력을 통해 보호받으며 확장한 교역의 이익은 상인뿐 아니라 왕족들까지도 누리게 되었으며, 육로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가 개척되고,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도시가 나타났다. 초기 불교 문헌에는 참파, 라자그리하(왕사성), 사밧티(사위성), 코삼비, 바라나시, 바이샬리(폐사리) 등의 도시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특히 상업의 발달은 자연히 교환의 매개체로서 금, 은, 보석 등의 사치품과 특산물 나아가 화폐의 수요를 불러온다. 이 시대에는 구리로 주조해서 타각인(打刻印)을 새긴 네모꼴, 동그란 모양의 은화, 금화, 동화를 이용한 교환 경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 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발행권은 국정의 최고 수반인 국왕의 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제 국가가 신장됨에 따라 국가의 장벽을 넘는 통상, 경제행위가 발전하였고, 이는 불가분 왕권의 강화와 결부되어갔다. 화폐경제가 일반화되고, 도시에는 상공업자의 길드도 생겼으며, 조합장과 대상인의 자본가와 왕족은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을 형성해, 과거 바라문들이 주장해오던 사성제도(바르나)에 구속되지 않게 되었다.[95]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제사 의식 대신 푸자(puja)라는 새로운 예배의식이 등장하고, 기존의 옛날의 신들 대신 시바 또는 비슈누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이 시기부터다.

이러한 시대, 경제상의 변화는 사상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해탈에 관한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윤회'와 '업'의 사상도 이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은 왕족이 이러한 새로운 설을 바라문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초기의 불교경전이 사성을 기록함에 있어 찰제리(크샤트리야)를 바라문보다 먼저 열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석가모니 부처 본인부터가 크샤트리아 출신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문화가 특히 현저했던 곳은 '바라문 중국'의 입장에서 변방이었고 덕분에 전통적인 바라문 문화의 구속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웠던 동인도에서 특히 현저하게 발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 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을 '슈라마나(Sramana)'라고 부르는데, 한역하면 사문(沙門)으로 불리는 이들은 출가유행자로써 반바라문적 색채를 감추려 하지도 않고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였다. 석가모니 부처 당시에 활약했던 이른바 육사외도라 불리는 이들 역시 이러한 사문 그룹의 일원이었고, 심지어 석가모니 부처 자신도 그러한 '사문(슈라마나)'의 일원이었다.
Ujum janapado raja Himavantassa passato, dhanaviriyena sampanno Kosalesu niketino.
왕이시여, 저 히말라야 기슭에 한 정직한 종족이 있으니, 옛부터 코살라국의 주민이며 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숫타니파타 출가의 경(pabbajja sutta)

석가족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귀족적 공화제였고, 소수의 지배계급의 합의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불전(佛典)에 공회당(公會堂)의 건설 및 낙성식 같은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정세는 점차 강력한 전제정치가 대두되는 기운이 농후했다. 그리고 석가 당시에는 이미 네 개의 전제 왕국이 그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숫타니파타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석가모니 부처의 나라 카필라바스투는 당시 이미 코살라국에 예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당시 마가다국과 꼬살라국과 같은 아리야계 종족들은 전제 군주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밧지족과 말라족 등과 같은 비아리야계 종족은 공화제로 통치하였다. 마가다 국은 빔비사라왕의 영도 아래 앙가(Anga, 鴦伽)를 비롯한 밧지, 말라의 군소국가를 정복해 가는 기세였으며, 꼬살라 왕국은 까시(Kasi, 迦尸)국을 점령하고, 카필라바스투를 일종의 보호령(保護領)으로 두고 있었으며, 석가족은 그러한 상태에서 마가다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은 덕택에 간신히 평화를 유지할 정도였다.[96] 카필라 왕국은 코살라 국에 대해 정치적으로 반쯤 예속된 상태였지만 혈통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았고, 언젠가는 독립하겠다는 열망도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통치의 주체는 여러 큰 종족의 수령들로 구성되었다. 이들 석가족의 수령들을 자신들은 깟띠야(Khattiya)[97]나 ‘전사(戰士)’ 혹은 때로는 ‘라자(Raja)’라고 불렸는데, 서양 개념의 왕은 아니고 대개 회의를 열어 그들은 의장직을 수행할 자신들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직위를 매우 잘 실행했다면 그는 석가족의 숫도다나(Suddhodana)와 같이 오랜 기간 동안 의장으로 임명되는 식으로, 그리고 때때로 의장직은 밧지족의 경우와 같이 윤번제로 하기도 했다. 석가족의 정치적 위치가 이러한 때에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났다. 그는 석가족의 ‘희망의 아들’이었고, 그의 아버지와 국민들은 그를 사랑했으며, 그가 최고의 군주가 되어 자신의 나라를 코살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결국 출가를 하셨고...

근친혼까지 해가면서 보존에 매달릴 정도로 집착했던 그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결국 카필라의 멸망을 불러온다. 증일아함경 등견품에 그 내막이 실려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막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당시 코살라 국에서도 막 새로 왕위에 오른 파세나디(바사닉)가 카필라 국에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를 신분도 비천한 주제에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은근히 경멸하던 샤카 족은 말리카라는[98]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 말리카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루타카였다. 비루타카가 아직 왕자일 적에 카필라 국을 방문했는데, 석가모니가 앉을 자리에 모르고 앉았다가 이를 본 샤카 족 사람들이 "저 종년의 자식이 감히 어디를 앉아?" 라며 그를 흠씬 때려서 내쫓아, 이에 비루타카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동시에 샤카 족에게 앙심을 품었고[99] 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카필라 국을 침공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세 번에 걸쳐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돌려보냈다. 비루다카 왕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를 갖추고 물러났지만, 이후 다시 군대를 보내자 네 번째는 카필라 국의 멸망은 결국 샤카 족이 치를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치러야 하는 과보임을 알고 "전생의 업보란 하늘로 옮길 수도, 쇠 그물로 덮을 수도 없구나"라고 슬퍼하면서도 더이상 막지 않았다.

이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살라 국 군사들이 샤카 족을 학살하자[100]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는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잠수해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비루다카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오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물 밖으로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솟아난 물푸레나무 뿌리에 자신의 머리칼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101] 비루타카 왕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증일아함경에는 석가모니가 비루다카에게 죽은 기타 태자와 샤카 족의 여인 5백 명을 위해 설법을 베풀고 난 뒤 "비루다카는 앞으로 이레 뒤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이후 다시는 니구류원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곳을 떠났다. 비루다카 왕은 그 말을 듣고 이레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다가 이레가 지나서야 안심하고 병사와 시녀들을 데리고 강가에서 놀다 그곳에서 묵었는데, 그날 밤 갑자기 비구름이 일어나고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쳐서 강가에서 묵던 비루다카 왕과 그 일행은 모조리 물에 휩쓸렸고,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102]

달리 말하면 여래의 가르침이 의외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또한 수행에 있어서 엄숙함이나 교조주의를 최대한 배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는 초기의 불교 전파에 매우 큰 강점이 되었다. 풍속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 풍속을 지키며 불법을 따르고 싶다"고 하니 다 허락하는가 하면,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가 출가한 제자가 발에서 피를 흘리자[103] 모든 비구들에게 신발을 신게 하기도 했다. 또 라훌라가 탁발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숙소를 뺏겨 화장실에서 자는 걸 보고 당시 계율이던 '1인 1실'을 '2인 1실'도 허용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또한 라훌라가 1일 1식을 견디지 못하고 배가 고파서 훌쩍거리자 어리거나 병든 수행자에게는 조식을 허용했다.[104]

6. 제자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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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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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지혜제일 사리풋다
(사리불)
2대 신통제일 마하목갈라나
(대목건련)
3대 두타제일 마하카사파
(대가섭)
4대 해공제일 수부티
(수보리)
5대 설법제일 푸르나
(부루나)
6대 논의제일 마하카트야야나
(대가전연)
7대 천안제일 아니룻다
(아나율)
8대 지계제일 우팔리
(우바리)
9대 밀행제일 라훌라
(라후라)
10대 다문제일 아난다
(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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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국에서의 인식

한국에서는 가끔 존재감이 기복신앙의 대상인 아미타불이나 미륵, 관세음보살 등에 밀리기도 한다. 기원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하고 석가모니불 독송은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조이므로 대부분의 절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고[105], 가장 많이 신앙하고 있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도, '부처'하면 우선 석가모니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불경을 독송하거나 할 때 쉬운 발음으로 석가모니를 '서가모니'라고 읽기도 한다. 석가여래 역시 '서가여래'라고 하기도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1998년에 발간한 <<서울새남굿(중요 무형문화재 제104호)>>을 보면, 무가 부분에서 '서가세존', '서가여래'라고 기록된 구절이 있다.

어째서인지 무속에서는 현재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최고신으로 인식된 것 같다.[106] 이는 석가모니가 이 시대의 부처(현존불)라는 가르침이 변질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을 더 높이 치기도 하는데, 실제 불교에서도 미륵이 이 세계에 내려오려다 석가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더 완전한 세계의 부처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미륵의 위치가 높긴 하다.

한국에서는 불교 문화가 강한 탓에 개신교, 천주교 등 타 종교 신자거나 무종교, 무신론의 경우에도 그를 선지자이자 성인으로써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예수나 무함마드도 마찬가지.

8. 서구 사회에서의 인식

부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이 선한 삶을 얻도록 돕는 것이지만, 고통의 근원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이 세계 자체와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주장 뿐 아니라 사람의 본성에 관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형이상학인식론에서 다양한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키고 옹호하는 철학적 전통의 기초를 형성했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
붓다는 대담하게도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중략) 붓다는 자신의 사상이 독재적 승직을 갖는 무미건조하고 흔해빠진 종교로 저하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신의 견해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예외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과거 수천 년 동안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이 최고 지상의 실체라고 생각한 것을 추구해 왔다는 점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이 실체를 하나의 인격의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그 인격은 인간이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 자기 부친이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 권력입니다.
버트런드 러셀(B. Russell). 1962. 5. 13. '사람은 왜 신을 만들었나?'
부처는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바로 복수심과 혐오감 그리고 원한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그리스도교에 대한 저주> 20번 글#

석가모니의 사상이 워낙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사유 구조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아브라함계 종교가 모두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셈족에게 나왔듯이, 같은 어족에서 비슷한 사유가 나오는 경우가 있고 그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연구도 있는 것이 사실. 무려 3,372개의 언어와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는 인도[107]에서[108] 태어난 석가모니가 실제 모어로서 사용했던 언어는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은 충분히 들 수 있다. 일단 현존하는 불경들은 모두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

염세주의의 대부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이마누엘 칸트와 인도철학의 기반에서 자신의 사상을 만들었는데,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근본은 자연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적 사상이며 불교가 기반이 되는 부분이 많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허무의 종교로 보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다소 왜곡시킨 것에 가깝다. 불교는 중도의 종교이고 애초에 석가모니가 설법하면서 이런 허무주의를 단견이라고 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어 설했고, 더불어 영혼의 실존 같은 평범한 종교관적 사고로 치우침 또한 상견이라고 하며 역시나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둘 중 어느 것도 답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에서 공통분모가 있다면 집착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불교에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지 "어차피 허무하니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109] 그리고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은 현대에까지 불교에 대한 상당한 오해와 편견을 남겼다. 이는 불교를 영지주의 비슷하게 잘못 해석한 것 같은데, 실제로 지금도 서구권의 종단들은 신자들이 공부하는 도중에 영지주의 비슷하게 결론을 내는 것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고 한다. 또한 서구권에선 이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선 불교관을 낮잡게 혹은 우습게 보는 시각을 가진 이들이 상당히 많다.

헤르만 헤세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소재로 하는 <싯다르타>라는 소설을 썼으며[110]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숫타니파타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보르헤스는 그 자신이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의 철학을 설명하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다만 이 책은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9.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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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

11. 미디어에서의 언급


11.1. 싯다르타(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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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단락은 (주)엠에스엠시가 제작한 뮤지컬을 다룬다. 싯다르타(뮤지컬)은 국내 유일의 불교 뮤지컬로서 2019년 9월 5일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첫 무대에 올랐다. 본 작품의 플롯(plot)은 싯다르타가 야소다라를 아내로 맞이한 19세, 사문유관 후 출가한 29세, 깨달은 자로 거듭난 35세로 나뉜다.

이유, 곽동현(가수), 김보강, 노희찬, 김대웅, 신유(가수), 박시원(배우), 박시환(가수), 서도진, 이경수 등이 주인공 싯다르타 역을 맡았다. 수행 도중에 안타고니스트이자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 마라 파피야스의 방해를 받는다.

12. 같이 보기



[1] 석가모니를 표현한 초기 불상 중 하나다. 다만 초기 불상이라고 해도 석가모니 부처가 살았던 당대의 것은 아니다. 불상이라는 것 자체가 석가모니 부처 입멸 이후 거의 5백 년이나 지난 뒤에야 제작되기 시작한 데다, 종교적 목적으로 제작되는 이상 작성자의 주관 즉 제작 대상에 대한 경모의 감정이나 작성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형태의 신성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미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석가모니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고 실제 얼굴이 어땠는지 현재 시점에서 100% 완벽하게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2] 석가모니의 정확한 탄생 연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와타나베 쇼코는 <불타 석가모니>(법정 역)에서 탄생 연도에 대한 세계 학자들의 주된 의견이 기원전 560년경이라고 설명했다.[3] 'Śākyamuni' 네팔어힌디어도 같은 철자를 사용한다.[번체] [간체] [6] 신자체. 일본에서는 주로 앞만 뗀 釈迦(しゃか)로 불린다.[7] /s̪id̪̚ˈd̪ʱɑːɾ.t̪ʰɐ/ /ˈɡɑw.t̪ɐ.mɐ/ '싯다르타 거우타마'에 가깝게 발음한다.[8] 이러한 소왕국의 군주를 '라자Raja'라고 한다. 라자는 중세유럽기준으로는 군소 영주 정도로 리히텐슈타인이나 모나코 공국 정도의 규모의 영주이다. 마하라자가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부족을 통합하는 장(長)을 의미하며, 도시국가성읍국가의 왕 정도로 볼 수 있다.[9] 출가는 29세, 득도는 35세에 했다고 알려져 있다.[10] 다만 원전인 팔리어 경장에는 등불이 아니라 섬으로 되어 있다. 흔히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法燈明 自歸依 法歸依)로 알려진 이 구절은 "누구든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뒤에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으로 삼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다음 구절이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몸에서 몸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느낌에서 느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기억하면서, 마음에서 마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현상에서 현상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이다.[11] 아소카왕이 죽은 이후로 불교의 중심은 북인도에서 서인도(쿠샨왕조)로 옮겨졌다. 지금의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지역이다. 이 지역의 뛰어난 승려들로 인해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12] 불경 가운데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중국으로, 팔리어로 번역된 것은 스리랑카, 태국으로 전해진 것도 이 시기이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을 통해 한자 불경이 전해졌으며, 한국은 한글 반포(1446년) 이후 세조가 설치한 간경도감(1461년)을 통해 언역 즉 한국어(중세 한국어)로 불경이 번역되었다.[13] 티베트, 몽골, 한중일 등지에 많이 퍼진 종파.[14] 남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지에 많이 퍼진 종파.[15] 고구려 덕흥리 고분 묵서명에는 석가문불(釋迦文佛)이라는 표기가 나오는데, 석가모니의 '모니'를 '문'으로 줄여 쓴 듯하다. 무덤의 주인인 유주자사 진은 생전 불교 신자였다.[16]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하나인 산스크리트어 단어 바가반(भगवान्, 薄伽梵) 즉 세존(世尊)의 티베트어이다. 바가와떼(བགྷ བཏ་)라고도 한다.[17] 티베트어로 써서 쌰꺄무니라고 읽는다.[중국어] 간체자[중국어] 정체자[20] 몽골에서는 절대자라는 의미로 정착해서, 그리스도교의 신을 번역할 때에도 이 단어를 쓴다. 그러다 보니 예수가 부처의 아들이 되는 괴이한 해석이 나타나기도 한다.[21] 불교의 무등등(無等等), 무유등등(無有等等)에서 유래됐다. ‘비할 데 없이 높고, 등급을 매길 수 없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가장 높아 견줄 이가 없는 분, 다시 말해 부처님을 뜻하기도 한다.[22] 우주의 진리를 깨달아서 모든 의혹과 번뇌를 버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존재.[23] 한자로는 응수공양(應受供養)을 줄인 말이기도 하며, 또한 산스크리트어 ‘아르하뜨(Argat)’를 번역한 말로 아라한 등의 말의 유래와 같다.[24] 산스크리트어 '삼먁삼보리'를 번역한 말이기도 하다.[25]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뇩다라'이다.[26] 붓다라는 존재 그 자체[27] 붓다라는 존재가 가지는 덕[28] 예수가 설교하면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이라 부른 것과 비슷하다.[29] 부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본래 '석가 탄신일'로 불리었으나, 2018년 '부처님 오신 날'로 공식 명칭을 변경하였다.초파일(初八日)이라고도 한다.[30] 불교에서는 과거의 부처가 어떤 공덕을 완수한 자에 대해서 "너는 먼 미래에 부처가 되어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라고 일러 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런 식으로 미래불로써 나타날 것이라는 '인증'이 바로 '수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그 자신이 과거로부터 행해온 모든 선업에 따라 부처가 될 운명을 받고 부처로써 태어났고, 여기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선업이 미래에 부처가 될 만한 것이라는 '인증'도 포함되어 있다.[31] 불경을 읽어보면 석가모니 부처는 이미 과거불 즉 석가모니 자신의 '선배' 부처연등불(디팡카라 붓다)로부터 "너는 미래에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 부처'라 불리게 될 것이다"이라는 수기를 받았으며, 이는 연등불 이전의 과거칠불이라 불리는 부처들도 마찬가지다.[32] 애초에 불교는 최고의 이상적 인격이자 신적인 존재인 '붓다'가 될 수 있는 길은 선악의 여부마저도 초월해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미천한 미물부터 지고한 왕족, 귀족이라 해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과보(까르마)'를 모두 치르고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붓다)가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33] 다만 8. 화살의 경(salla sutta)과 12. 두 가지 관찰의 경(dvayatanupassana sutta)은 부처의 일생보다는 가르침에 중점을 두었다. 화살의 경은 4장 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경(kama sutta)을 부연설명한 듯한 내용이다. 두 가지 관찰의 경은 4장 11. 투쟁과 논쟁의 경(kalahavivada sutta)을 부연설명한 듯한 내용. 사성제와 12연기에 대해서 설명하였다.[34] 수당대에 번역된 방광대장엄경(랄리타비스타라)이나 불본행집경도 비슷하게 석가모니의 출생과 출가 과정 그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까지가 그려져 있지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은 다루지 않고 있다.[35]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아슈바고샤(Aśvaghoṣa)이다. 그가 태어날 때에 그리고 그가 설법을 행했을 때에 이를 들은 말들이 모두 울었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 데바와 용수, 그리고 동수(쿠마라라타)와 함께 '일출논사(日出論師)'라고 불린다.[36]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즈나냐굽따Jñānagupta이다.[37] 마찬가지로 산스크리트어 이름을 음차한 것으로 훈독해서 일조(日照)라고 부르기도 한다.[38] 산스크리트어로 '과거에 그러하였던 것' 즉 대략 역사를 뜻하는 단어이기는 하다.[39] 원래 역사 기록을 목적으로 남긴 게 아니었는데 후대에 역사 기록으로써 쓰이게 된 것은 중국의 춘추좌씨전과도 비슷하다.[40] 오래된 것이라는 뜻이다.[41] 특정 인물에 대한 전기 및 행전. 차리타 문헌의 예로는 가령 7세기에 작성된 바르다나 왕조 하르샤 왕의 전기 《하르샤차리타》(Harṣacarita) 등을 들 수 있다. 후술할 석가모니 부처의 행적을 기록한 서사시 불소행찬도 원래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붓다차리타'이다.[42] 특정 군주에 대한 찬가[43] 연대기. 왕샤왈리 문헌으로는 12세기 초의 《제왕들의 강》(Rājataraṅgiṇī)을 꼽을 수 있다.[44] 한문으로 번역하면 대사(大史) 즉 '위대한 역사'이다.[45] 한자로는 마명(馬鳴)으로 번역되며, '마명보살'이라고도 불린다.[46] 데바남피예나 피야다시나 라지나. 아소카 대왕은 자신을 지칭할 때에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아소카 라자(Devanampiya Piyadasi Asokaraja) 이렇게 불렀다. '데바남피야'는 '신들의 신임받는 종'이라는 뜻이다.[47] 아소카가 남긴 칙령들 가운데 작은 돌기둥 담마 칙령에 속한다.[48] 지금도 룸비니 성지에 가면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볼 수 있다.[49] 바트 어만의 표현을 빌리면 '신성하게 된' 존재에서 '세상에 오기 전부터 신성한' 존재로 인식이 변화한 것이다.[50]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에는 불경이 없었으며 열반제자들을 통해 결집되었다.[51] 물질적인 기적이 관련 설화에 나타난 경우가 아예 없진 않지만, 분량이 적고 그나마 불가피할 상황에만 일어난 수준이며, 오히려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도 인과응보의 세상 이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발언이 나오기까지 한다.[52] 깔라마 경의 내용 중 일부를 축약해놓은 것이다. 실제 내용은 더 길게 설명되어 있으며 석가모니의 대답은 깔라마 경 9번째 게송을 인용한 것이다. 중아함경의 가람경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으나 석가모니의 답변은 조금 다르다.[53] 1944~ . 이 사람은 유대인(!) 출신으로 1973년 스리랑카에서 비구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해 승려가 되었다. 2002년부터 미국에 머무르며 저서를 펴내고 있으며, 니까야를 번역하기도 했다. 한국에는 그의 저서로 <아비담마 연구>와 <분노와 논쟁 사회에 던지는 붓다의 말>이 번역되어 있다. #[54] 이런 식으로 경전 속 교조의 말씀을 지 좋을 대로만 따다 인용하면서 악용하는 건 다른 종교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경우 개독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고, 이슬람에는 탈레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있다.[55] 연기를 통해 다른 것에 의존한 것[56] 삿된 견해.[57] 단박에 깨달음.[58] 겔룩 뿐 아니라 닝마, 까규, 사캬 등 모든 티베트 불교 종파들은 사실상의 점수(漸修) 체계를 갖추고 있다. 현교의 경우 삼사부(三士夫) 도차제(道次第)를 강조하는 까담 전승에 강한 영향을 받았고, 밀교 역시 온드로(Ngöndro)라고 일컬어지는 기초 수행을 비롯해 생기차제(生起次第), 원만차제(圓滿次第) 등으로 구성된 밀교의 도차제(道次第)를 따른다.[59] 대표적으로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대지도론(大智度論)』의 현밀이교설(顯密二敎說),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의 난행이행이도설(難行易行二道說), 계현(戒賢)의 삼시교설(三時敎說)과 지광(智光)의 삼교설(三敎說) 등이다.[60] 애초에 인도에서는 상좌부 불교나 대중부 불교 및 대승불교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발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리가 이론화됐기 때문에 굳이 따로 불교의 교리를 체계화할 필요가 없었지만, 인도와는 아예 언어를 비롯해 문화적 풍토가 완전히 다른 중국이나 티베트,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들과는 사고 방식도 문화도 언어도 전혀 다른 땅의 종교 및 관련 이론을 거의 백지 상태에서 도입한 상황이었다.[61] 소의경전이란 무조건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인 경장이어야 할 필요가 없고, 불교의 계율인 율장이나 불교의 교리 해설서인 논장도 엄연히 소의경전의 자격이 있다. 율장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계율종(율종)이나 논장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삼론종처럼.[62] 원효는 법공(法空)과 보법(普法)을 기준으로 하여 석가여래의 설법 전체를 삼승(三乘)과 일승(一乘)으로 나누고, 전자를 다시 별상교(別相敎)와 통교(通敎)의 두 가지로, 후자를 수분교(隨分敎)와 원만교(圓滿敎)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삼승별교(三乘別敎)는 사제교(四諦敎), 연기경(緣起經) 등을 말한다. 삼승통교(三乘通敎)는 반야교(般若敎)와 해심밀경 등을 말한다. 일승분교(一乘分敎)는 영락경(瓔珞經), 범망경 등을 말한다. 일승만교(一乘滿敎)는 화엄경과 보현교(普賢敎)를 말한다. 삼승이 함께 배우는 것을 삼승교라 하며, 그 중에서 아직 법공(法空)에 밝지 못한 것을 별상교라 하는 반면에, 법공을 두루 설하는 것을 통교라 한다. 그리고 이승(二乘)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일승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 아직 보법(普法)을 다 드러내지 않은 것을 수분교라고 하는 반면에, 보법을 완전히 밝힌 것을 원만교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한 법공은 객관적 세계가 불변의 실재로서 존재하지 않는 이른바 공(空)라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보법은 모든 존재가 상입상시(相入相是)함을 의미한다. 원효의 사교판에서도 다른 교판들과는 달리 영락경, 범망경 등과 같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실천윤리를 설법한 경전을 반야경이나 해심밀경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63] 티베트는 중국보다 늦게 불교를 수용한 동시에 7세기 인도 불교의 논사와 중국 불교의 화상이 티베트(토번)의 짠뽀(왕) 앞에서 벌인 대론(교리 논쟁) 결과 인도 불교쪽이 승리, 이후 인도 불교의 교학 체계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체계화했고, 국가 지원으로 불경을 번역했다.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중국 불교와는 구별되는 교리 학습 체계를 지니며 인도 불교의 직계로 평가될 정도가 되었다.[64]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불교, 그 중에서도 천태종의 기준에 맞춘 것으로 화엄종이나 법상종은 물론, 티베트 불교나 동남아 상좌부 불교의 설명과도 다르고 천태종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부기해 둔다.[65] 쉽게 말해 어려운 전문용어를 가지고 말했더니 대중들이 어려워해서 알아듣기 쉬운 일상용어로 다듬었다는 뜻이다.[66]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승 불경 전체를 가리킨다.[67] 불교를 좀 겉핥기로 이해한 사람들 중에 이런 식으로 공 사상을 허무주의로 이해해 버리는 경우가 꽤 많다.[68] 논장 가운데서도 특히 훌륭한 것은 경장 즉 석가모니 부처의 친설과 같은 반열에 오르는 영예가 주어지기도 한다.[69] 둘 다 팔리어 율장이다.[70] 애초에 티베트를 제외하고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불교권이 대체로 선(禪)이라 불리는 명상과 '마음 수행'을 이론보다 중시하는 중국식 선불교가 대세인데, 후대로 갈수록 문자로 기록된 경론의 학습보다 '불립문자'를 내세운 선불교가 동북아시아에서 불교의 대세가 되고, 험악하게 표현하면 "이론 따위 뭐가 중요하냐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그만이지"라는 경향이 커지다 보니, 불교라고 하면 공연히 뜬구름잡는 선문답이나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명상이나 하는 도를 아십니까 수준의 '겉멋만 들었지 자기들 교리에 대한 이론도 뭔가 정리되어 있지 않고 그렇다고 '중생 구제'를 뭔가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거나 현실 참여도 하려 하지 않는 종교'인 것마냥 이미지가 퍼져나간 것이다. 이는 근대에 들어 그리스도교 전도 과정에서 불교가 제대로 저항을 못하고 교세가 밀리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현대에도 대중들 사이에 불교의 진입 장벽을 잔뜩 높여서 '뭔가 고차원적이고 대단한 내용 같기는 한데 이해하기는 어려운' 종교로 인식되어 불교가 대중 전도에 있어 그리스도교보다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는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71] 출가하여 마가다국에 와서 자신을 찾아온 빔비사라 왕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이다.[72] '위대한 선출자'라는 뜻이다.[73] 한역 불경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약사에 관련 내용이 한역되어 있다.[74] māṇava. 청년, 어린이를 뜻하며 특히 초기경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아직 결혼하지 않고 스승 밑에서 학문과 기술을 연마하는 사람을 칭한다. 당시 인도의 전통 바라문 지식계급의 청년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다른 초기경들에서도 상당수 바라문 학도들이 본경에서처럼 베다와 바라문의 권위에 대해서 석가모니와 격론을 벌이고 있다.[75] 암밧타 경의 주인공인 암밧타 브라만 학도는 스승 뽁까라사띠 바라문의 명령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확인하러 가서 석가모니 부처와의 대화에서 "브라만 밑으로 다른 카스트야 별 볼 것도 없죠"라는 투로 은연중 카스트에 대한 자부심을 비치다 "너는 아직 너의 생을 완성하지 못한 것 같다"는 석가모니의 일침에 과거 자신이 석가족으로부터 받은 모욕을 기억하며 석가모니 앞에서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거칩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성미가 급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포악합니다. 아주 비천하면서도 바라문들을 존경하지 않고,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숭상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예배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공경하지도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들이 비천하고 비천한 출신이면서도 바라문들을 존경하지 않고,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숭상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예배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공경하지도 않는 것은 적당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비난하다가 도리어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석가족이 어떤 종족이며, 암밧타의 조상이 실은 석가족의 시조 옥까까 왕이 데리고 있던 여자 노비의 후손이었음을 일깨워주었다가, 이를 알고 다른 바라문들이 암밧타를 비난하자 "그의 조상은 노비이긴 했어도 훌륭한 선인이었다"고 추켜세워 신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76] 뿌라나 문헌에서는 옥까까를 최초의 인간인 마누의 열 명의 아들 가운데 첫째라고 하고, 마하바라따에는 마누의 5대 손이라고도 하는데, 팔리어 문헌의 옥까까 왕 이야기가 산스크리트어 뿌라나 문헌보다 더 오래되었고 그것이 산스크리트어 문헌에 흡수된 것이라고도 한다.[77] 아들의 이름은 옥까무카, 까라깐다, 핫띠니까, 시니뿌라이고, 다섯 딸은 각기 삐야, 숩삐야, 아난다, 위지따, 위지따세나이다. 한역 불경에는 네 명의 아들의 이름만 소개되었고, 모두 표기도 발음도 다르다.[78] 팔리어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이다.[79] 석가족과 콜리야족이 마냥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농사 짓는데 논에 댈 물을 두고 싸울 때는 서로를 '문둥이', '개돼지'라 부르며 얕잡아보기도 했다.[80] 한역하면 사자협왕(師子頰王)이다. 경률이상에는 시휴라(尸休羅)라고 했다.[81] 한역하면 별성(別成)이다.[82] 첫째는 이름이 우모거(優牟佉)이고, 둘째는 금색(金色)이고, 셋째는 사백상(似白象)이고, 넷째는 족구(足瞿)이다.[83] 지세경에는 사자왕에게 사자족(師子足)이라는 동생이 있었다고 했다.[84] 숫도다나(정반), 도또다나(곡반), 삭코다나, 숙까다나(백반), 아미또다나(감로반). 두 딸의 이름은 아미따(감로)와 빠미따이다. 다만 북전(산스크리트어로 전승된 문헌) 불경인 기세경 권제10이나 한역 불경인 불본행집경에는 사자협왕의 자녀가 4남 1녀였다고 적어서 어느 쪽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알 수 없다.[85] 마야 부인과 마하파자파티의 어머니 야소다라는 깟짜나의 오빠인 안자나 왕과 결혼했다. 근친혼이자 일종의 겹사돈. 그리고 둘 사이에 마야 부인과 마하파자파티 외에도 숩빠붓다와 단다빠니가 있었다.[86] 다만 북전(산스크리트어) 기세경에는 데바닷타는 석가모니 부처의 삼촌인 아미또다나(감로반)의 아들로 아난다와는 친형제간이라고 되어 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인 디파밤사(도사) 등 남전(팔리어) 문헌에는 아미또다나의 아들이 마하나마와 아누룻다(아나율)라고 했고, 북전 기세경과 마찬가지로 아난다가 아미또다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한편 팔리어 전승에서는 숫도다나와 아미또다나를 제외하고 석가모니 부처의 다른 삼촌들은 자녀가 없었다고 했지만, 마하와스뚜(대사)에서는 슈끄로다나(숙까다나)의 아들이 아난다이고 데바닷타와 우빠다나의 형이라고 적고 있다.[87] 한국의 불교 종파 가운데 유일한 비구니 종파인 대한불교보문종은 마하파자파티를 종조(宗祖)로 삼고 있다.[88] 그중에서도 난다는 미모로 유명했던 공주와 약혼식을 치르려는 중에 출가했으며, 약혼녀도 훗날 출가해 두 사람 모두 수행의 경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89] 불교의 주요 후원자였던 파세나디(바사닉) 왕이 아들 비루타카(毘琉璃) 왕자의 반란으로 물러난 게 결정적인 침공계기가 되었다.[90] 아리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Rg-veda) 등에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다.[91] 남북으로는 빈디야 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한정되며, 동쪽으로는 프라야가, 서쪽으로는 비나샤나에 이르는, 현대의 웃타르 프라데쉬 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다. 그들은 이곳을 중국으로 불렀다.[92] 이들 4개 국은 나르마다 강에 위치한 아반티를 빼면 모두 강가 강에 위치하고 있었다.[93] 디가 니까야의 마하빠리닙빠나 수트라 즉 대반열반경이라 불리는 경전을 한역한 것으로, 장아함경 유행경에도 내용은 비슷하다.[94] 대표적인 장자로는 아나따삔디까 장자가 있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수닷타 장자라고도 하며, 석가모니 부처에게 제따와나 사원을 지어 기증한 인물이다. '아나따삔띠까'는 수닷타 장자의 별명으로 한역하면 둘 다 급고독(給孤獨), '고아와 과부, 독거노인을 위해 베푸는 자선가'라는 뜻으로 제따와나 사원의 부지는 원래 사위국의 제타 태자가 소유한 원림이었는데, 아나따삔띠까가 처음 제타 태자에게 이 땅을 석가모니 부처님께 봉헌할 사찰을 짓고 싶으니 자신에게 팔아달라고 요청하자 제타 태자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 땅바닥에 네가 가진 보물과 돈을 빈틈없이 깔아낼 수 있다면 기꺼이 너한테 팔아주마"라고 했는데, 아나따삔띠까 장자는 그걸 말 그대로 실현에 옮겨버렸고 놀란 제타 태자는 그 땅을 약속대로 그에게 팔았다. 이후 석가모니 부처에게 봉헌된 그 사원은 '제타 태자의 원림 터에 아나따삔띠까 장자가 세운 사원'이라는 뜻의 '제따와나 아나따삔다다샤 아라마'(jetavana-anāthapiṇḍadasya-ārāma)이라고 불렸고, 한역하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舎)로 불린다. 한국의 경주에 있는 기림사나 일본의 고전인 헤이케모노가타리 첫 구절에 나오는 기원정사도 모두 여기서 따왔다.[95] 그리고 아리아인들이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이주해 오면서 원주민들과의 혼혈이 늘어난 점도 사성제도가 흔들리는데 한몫했다.[96] 이 점에 있어서는 태어날 당시 유대가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예수와도 비슷하다.[97] 흔히 산스크리트어로 읽은 것이 크샤트리아(Kshatriya)로 불리는, 왕족이나 무사 계층이다.[98] 훗날 숫도다나 왕의 뒤를 이어서 카필라의 왕이 되는 마하나마가 여종과의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99] 이때 단단히 빡친 비루다카가 호고(好苦)라고 하는 어느 브라만의 아들에게 "내가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게 되거든 내게 '너는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말아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고, 호고는 그 말대로 하루에 세 번씩 "전하,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기억하소서"라고 태자에게 아뢰었다. 비루다카가 즉위할 때도 그를 찾아가 똑같이 "폐하,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기억하소서"라고 말하자 비루다카는 그를 칭찬하고 곧바로 카필라 국의 침공을 단행하였다고 한다.[100] 증일아함경에는 포로로 잡은 샤카 족을 일일이 죽이느라 시간이 많이 든다며 지면에 머리만 나오게 묻어놓고 코끼리를 풀어 밟아 죽이게 했고, 도망쳤던 카필라 국 여자 5백 명도 니구류원(니그로다 나무 정원)에서 비루다카에게 붙잡혀 와서 "종년의 자식에게 수청 들 생각 없다"며 욕하자 더욱 빡쳐서 여자들의 손발을 모두 잘라서 구덩이에 처넣으라고 명령했다. 증일아함경에는 이렇게 죽인 샤카 족의 수가 9990만 명이었다고 한다.[101] 비루다카 왕에게는 기타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비루다카의 원정에 참가하지 않고 궁에 있으면서 술 마시고 놀았다. 카필라 국을 멸망시키고 돌아온 비루다카가 기타에게 "너 내가 카필라 국을 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같이 안 가고 이렇게 술 마시고 놀고 있어?" 라고 물었고, 기타 태자는 "죄 없는 중생을 죽이느니 술판에 빠져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비루다카는 기타 태자마저 죽였다.[102] 석가모니는 비루다카 왕이 죽은 뒤, 비루다카 왕이 어째서 그런 최후를 맞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샤카 족은 모두 전생에 라열성(羅閱城)이라는 어촌의 주민들이고 비루다카 왕과 호고는 그 어촌에 있는 어느 연못에 살던 물고기였는데,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된 마을 주민들이 연못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자, 두 물고기는 "우리는 이전에 이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 사람들은 지금 와서 우리를 잡아먹고 있으니, 우리가 환생하게 된다면 원수를 갚자"고 맹세했고, 죽어서 각각 비루다카 왕과 호고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때 마을의 여덟 살 된 한 어린아이는 물고기를 잡지도 않고 목숨을 죽이지도 않으면서 물고기들이 언덕 위에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며 킥킥거렸는데 바로 전생의 석가모니 자신이며, 그 과보로 부처가 된 지금도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103] 당시 출가자들은 맨발로 다니는 게 보통이었다.[104] 라훌라는 바로 싯다르타의 아들이다.[105] 위에도 나오듯 절의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곳이다[106] 엄밀히 말하면 무속 세계관에서 천상계와 마주하는 극락세계의 지배자. 서유기 원전만 읽어도 그런 모습이 많이 반영되어있다. 옥황상제도 쩔쩔맨 손오공석가여래가 제압한다.[107] 미국처럼 근대의 이민자들 때문에 인종이 다양한 것이 아니라 본래 원주민들 자체가 인종이 다양하다. 사실상 유럽인과 차이가 없는 카슈미르 산악지대 사람부터 한국인,중국인과 외모 차이가 거의 없는 티베트-버마계 소수민족들도 수백만명 단위로 산다고 한다.[108] 사멸하는 언어를 가정하면 과거에는 더 많았을 수도 있다[109] 기독교도 비슷한 왜곡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코헬렛(전도서).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쇼펜하우어가 불교 보듯이 코헬렛을 보면 허무 타령만 가득한 책으로밖에 안 보인다. 개신교 목사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불교를 공격하면서 전도하려 드는 사람이 좀 있는 듯하다. #[110] 제목인 싯다르타는 석가모니가 아닌 별개의 인물로 이 소설은 석가모니의 전기가 아니다. 헤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데미안>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世界)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유명한 구절에서 '알을 깨고 나온다'란 곧 불교적인 해탈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11] 이 인간이 그 유명한 "전라도 사투리가 세계 언어의 뿌리"라고 주장한 사람이다.[112] 조선의 진묵스님이 석가모니불의 환생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 이런 스토리는 주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에서 인용됐다. 이 능가경 구절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 능가경 구절과 법화경 여래수량품은 의미 자체가 다르다. 여래수량품은 석가모니가 무량겁 전에 이미 성불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의미한다. 풀이하자면 모든 중생이 이미 성불한 부처이지만 번뇌망상으로 인해 자신들이 부처인지 모르고 윤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의미이다.[113] 원래 다섯이었으나 6대 샤먼킹이 하오파로 전향했다.[114] 자신 역시 왕족 출신이지만 호화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속세에 싫증이 나 출가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자본주의로 세상이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며 불만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야비스의 시대에 자신의 가르침이 뒤틀린 방향으로 왜곡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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