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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1:12:24

석가모니/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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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탄생 이전3. 탄생
3.1. 출생년도3.2. 성장
4. 사문유관(四門遊觀)5. 성을 넘어 출가하다
5.1. 고행의 시작과 끝
6. 마왕의 꾐을 물리치다
6.1. 깨달음을 전파할 것인가, 말 것인가
7. 초전법륜(初轉法輪)8. 열반의 길

1. 개요

불경은 성경과는 달리 석가모니 부처가 언제 어디서 무슨 연유로 어떠한 설법을 했노라고 석가모니의 '설법'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 대부분이다. 석가모니의 일생 자체에 초점을 두어 조망한 불경은 많지 않다. 석가모니 부처의 구체적인 일생 관련 내용은 현존하는 불경 곳곳에 조각처럼 흩어졌거니와, 석가모니와 이전 시대의 여섯 부처, 즉 과거칠불의 일대기와 섞인 것도 있다.

2. 탄생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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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는 가장 앞에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이라는 그림으로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 이전에 거쳐온 여러 전생들과 그 전생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이루었던 공적들을 언급하고, 석가모니 부처 이전의 '붓다' 즉 '과거불'로부터 그들이 훗날 깨달음을 얻고 붓다가 되어 세상을 구제할 것이라는 '수기' 즉 '인증'을 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붓다라는 존재가 석가모니 부처 한 명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불경에서는 어떤 공덕을 지은 누구누구에게 너는 나중에 무슨무슨 이름의 붓다가 될 것이라고 수기를 주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불교에서 붓다라는 존재는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가 아니라 현세 이전의 생에서부터 사람 혹은 짐승으로서 태어나 붓다가 될 조건을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그리고 때로는 그 공덕이 완벽하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1] 축생도에 떨어지기도 하지만[2] 그럼에도 쉼없이 공덕을 적립 쌓음으로서 최종적으로 인간 세상에 붓다라는 존재로 태어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붓다가 되기 직전의 존재가 바로 '보살'(菩薩)[3]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붓다'가 될 것이라는 '붓다'의 수기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수메다[4]라는 바라문의 일화로, 수메다에게 "너는 내세에 반드시 붓다가 되어 '석가모니 부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 수기를 준 것이 연등불[5]이다. 증일아함경 권11과 불본행집경 권3에는 수메다가 무마성(無魔城)[6]이라는 곳에 살던 바라문이고, 3아승기겁(阿僧祇劫)[7] 전에 7대가 청정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전한다.

연등불이 세상에 있었던 시절에 설산[8] 근처에 살던 야야달(耶若達)[9]이라는 바라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제자인 운뢰 바라문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만큼 뛰어난 경지에 오르자 다른 나라에 가서 재물을 공양받아 스승님께 공양하겠다고 청하고 길을 떠났다. 이에 야야달은 운뢰에게 '초술'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초술, 즉 수메다는 발마국에 도착했고, 마침 그곳에서 1년 기한으로 열리던 무차회(無遮會)에서[10] 모든 바라문들이 모여 있었는데, 따로 금 5백 냥과 금 지팡이 하나, 금 물통 하나, 소 천 마리를 가지고 그들 가운데 제일가는 상좌에게 주기로 하고 강론을 열고 있음을 보고, 찾아가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바라문들의 인정을 받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수메다는 금 5백 냥과 금 지팡이와 금 물통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었으며, 그나마도 금과 지팡이, 물통은 설산의 야야달에게 보낼 생각이었는데, 마침 발마국 안에서는 왕명으로 온 길을 깨끗이 쓸고 더러운 물건을 치우며 비단으로 만든 번기와 일산을 다는 등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수메다는 "어디 뭐 왕자님 결혼이라도 하시나 보네요." 하고 일하던 사람에게 물었는데, 그 사람은 그런 게 아니고 연등불께서 이 성으로 오실 것이라 왕명으로 온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비단으로 장식하라는 왕명이 있었다고 알려 주었다. 이때 수메다는 생각을 바꾸어 스승에게 보내려던 것 중 금 500냥으로 꽃을 사다 연등불에게 공양하려고 했는데, 마침 발마국 왕이[11] 왕명으로 향이나 꽃을 모두 왕이 사들일 것이니 따로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 바람에 구할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어디 꽃 파는 데가 없나 하고 찾아다니던 수메다는 골목에서 물 길러 나오던 어느 여자를 발견했는데, 선미(善味)[12]라는 이름의 그 여자가 마침 꽃 다섯 송이[13]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수메다는 가서 "금 500냥을 줄 테니 그 꽃을 자신에게 팔라"고 했지만, 선미는 난처해하며 자신도 이 꽃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꽃집 주인과의 친분으로 몰래 받은 거라서 함부로 줄 수 없다고 했는데, 수메다는 아무리 왕명이 지엄해도 설마 여자한테까지 엄격하겠느냐며 이 꽃을 자신에게 팔면 당신은 큰 공덕을 짓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애원했고, 이에 선미는 꽃을 어디다 쓰려는지 묻고는 "꽃을 팔 테니 그럼 다음 생에 나하고 부부가 되어달라"라는 조건을 걸었고, 수메다는 "그럼 나하고 부부가 되더라도 내가 출가할 때 잡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해서, 선미는 수메다에게 꽃을 팔아 주었다.[14] 이게 연이 되어 선미는 훗날 수메다의 환생인 싯다르타의 아내가 되는 야소다라 공주로 환생한다.

꽃을 사가지고 나오던 참에 수메다는 마침 발마성으로 들어가는 연등불을 발견했고, 연등불 앞에서 꽃을 바치며 받아달라고 했다. 연등불은 수메다에게 "마음에 아직 애욕이 끊어지지 않았다"며 수메다가 바친 꽃을 받지 않고 지나가려 했는데, 연등불이 가는 길에 진흙창이 있는 것을 본 수메다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머리를 풀어 진흙 위를 덮어 연등불에게 그 위로 디디고 지나가라며 당신이 이를 밟고 지나가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에 연등불은 "제 몸도 아끼지 않는데 재물을 아낄 리가 없다"(불본행집경) 하며 놀라고 또 감탄하면서 수메다에게 "너는 내세에 반드시 붓다가 될 것이고 '석가모니 부처'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라는 수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파일:베제클리크연등불수기도.jpg

수메다 바라문이 연등불의 가는 길에 진흙창 위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깔았다는 불경 속 일화는 불교 미술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고, 둔황의 베제클리크 석굴에도 그려져 있다.

증일아함경 권3의 선지식품에는 이때 수메다가 머리카락을 풀어 까는 것을 보고 담마류지(曇摩留支)라는 바라문이 "쟤 왜 저렇게 오버하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그걸 또 깔아준다고 밟고 지나가는 연등불은 또 뭐래? 아무리 그래도 브라만이면 고위 카스트인데 어떻게 고위 카스트의 머리카락을 사문 주제에 맨발로 밟으란다고 밟고 지나갈 수 있어?"라고 불쾌해하며 연등불을 비난했다. 이후 담마류지는 수없이 많은 겁을 축생(畜生)으로 환생하기를 거듭해 최종적으로 몸의 길이가 7백 유순(由旬)이나 되는 큰 물고기의 몸으로 태어난 뒤에야 다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혼자 선정에 들어있던 그는 자신이 지금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직전의 7백 유순이나 되는 그 큰 물고기의 시체를 직접 올라가 보고 나서 명상에서 깨어나, 석가모니 부처 앞으로 와서 부처 앞에 예를 갖추고 "오랜만입니다."라고 했고, 이에 석가모니도 웃으며 "그래, 오랜만이지."라고 화답했다. 제자들은 당연히 쟤가 왜 갑자기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 석가모니 부처에게 "쟤가 오랜만이라고 하는 게 뭔 소리래요? 쟤 꿈에서 덜 깬 거 아니에요?"라고 물었고, 석가모니 부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담마류지의 이야기를 해준 뒤에 석가모니 부처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 이거다. "너희는 항상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행을 잘 닦아 익혀야 한다."

파일:도솔래의상.jpg

이후 수메다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그 태어난 세상에서 수행하고, 최종적으로 도솔천에 보살의 몸으로 태어났다. 도솔천에서 그는 보살로서 호명(護明)이라고 불렸다. 불교에서는 천계도 그 구역에 따라 그곳의 시간이나 그곳에 사는 이들의 수명이 제각기 다르다고 하는데, 도솔천의 경우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400년에 해당하고 도솔천 천인의 수명은 인간의 시간으로 약 5억 7600만 년에 해당한다고 언급된다.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들이 도솔천에 태어났지만 가장 훌륭하고 가장 묘한 5욕(欲)을 보고는 마음이 미혹해 잊어버리고 본행(本行)이나 선업(先業)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호명보살은 도솔천에 나서 설사 가장 훌륭하고 가장 묘한 5욕을 보더라도 마음에 미혹이 없이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본래 인연을 바로 생각하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도솔천에 머물러서 하늘의 수명으로 4천 세가 차도록 그 모든 하늘을 위하여 법을 설해 교화하고 법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그 하늘에 난 다른 중생들은 옛날의 청정하지 않은 업 때문에 그 가운데 났거나 하늘의 수명을 채우지 못하고 횡사하였으나 호명보살은 과거에 수행한 청정한 업 때문에, 그리고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도솔천의 수명을 끝까지 다하였다. 이런 까닭에 ‘희유하고 희유하며 불가사의하다’ 하였으며, 또 다시 ‘부사의법을 얻어서 호명보살은 저 하늘의 수명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상탁도솔품(上託兜率品)제4상(上)

불본행집경에는 호명보살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의 직전 전생이며, 도솔천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마야 부인의 몸에 들어오기 전에 도솔천에서 보살로서 설법을 행했는데,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기 전, 그러니까 인간의 시간으로 12년 전부터 도솔천의 수명이 다하는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그 조짐이라는 게

것으로, 이른바 천인오쇠이다.

도솔천의 천인들은 호명보살이 인간의 세상으로 가려는 것을 아쉬워 하면서도 그가 내려갈 만한 곳을 찾았는데[15] 두루 내려갈 나라를 찾는 와중에[16] 눈에 띈 곳이 바로 숫도다나 왕과 마야 부인이 다스리던 가비라국이었다. 호명보살은 내려가기에 앞서 도솔천의 천인들에게 백팔법명문(一百八法明門)을 설법하고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갔다. 호명보살이 마야 부인의 옆구리로부터 태내로 들어간 날 마야부인은 그 유명한 태몽, 여섯 상아를 가진 코끼리가 자신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불본행집경은 묘사했다.

3. 탄생

파일:EDTVXOI594.jpg
석가모니 부처가 탄생하던 순간의 일화를 묘사한 탄생불. 6세기경의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유일한 탄생불 조각이다.
파일:석가탄생도.jpg
조선 세조 때에 그려진 석가탄생도.

카필라[17]는 기원전 6세기 어느 때에 현재의 네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 히말라야 기슭에 위치한 샤카족의 작은 나라였다. 싯다르타는 그 나라의 왕 슈도다나[18]와 마야 부인[19] 사이에서 태어났다. 숫타니파타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켜 "감자왕(甘蔗王)의 후예"라고 언급하는데, 석가족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감자왕으로부터 니구라 - 구로 - 구구로 - 사자협 - 정반(숫도다나)에 이르는 부계로 이어지는 것으로 계보를 전하고 있다.

정반왕과 마야 부인은 부부관계가 화목하고 백성들 사이에서도 덕망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결혼 20년, 서로 나이 쉰이 다 되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어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야 부인은 상아가 여섯 개 달린 흰 코끼리[20]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선 임신했다.[21] 마야 부인은 당시 풍습에 따라 친정인 천비성(데바다하)으로 향했는데[22], 도중에 룸비니 동산[23][24]에서 탐스러운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고선,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25]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26]을 걸었는데 그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다.[27] 하지만 마야 부인은 임신 중 무리해서 여행을 나간 게 원인이 되어 그 후유증으로 출산 7일 뒤[28]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후 이모 마하파자파티가 사별한 슈도다나와 결혼하여 어린 고타마를 돌보았다.

싯다르타가 태어나고 난 후에 히말라야 산정에서 수행하던 현자 아시타 선인이 신들이 서른이나 모여 기뻐하고 제석천이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신들은 "비할 데 없이 뛰어난 보배이신 저 보살께서 모든 사람의 이익과 평안을 위해 인간 세계에 태어나 석가족 마을 룸비니 동산에 나셨기로 우리가 이렇게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아시타 선인은 곧 내려와 카필라 국에 있는 슈도다나 왕의 궁정으로 찾아가서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했다.
아시타 현자는, 얼굴을 흰 양산으로 가리고 빨간 담요에 싸여 있는 황금 보물 같은 아기를 보고 기뻐서 가슴에 안았다. 관상과 베다에 통달한 그는 황소같이 훌륭한 석가족의 아기를 안고 그 남다른 상을 살피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이 아기는 최고로 뛰어난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합니다. 성장한 훗날, 속세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면 법륜을 굴려 만인을 제도하는 대성자 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러더니 현자는 자기의 얼마남지 않은 삶을 생각하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현자가 우는 것을 보고 석가족의 왕 정반은 물었다.
"갑자기 왜 슬퍼하십니까? 혹시 우리 왕자에게 무슨 장애라도 있단 말입니까?"
석가족의 왕이 걱정하는 것을 보고 현자는 눈물을 거두고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왕자님에게 어떤 불길한 상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소견 좁은 늙은이의 관상에서 왕자님을 보면 이 분은 평범한 상이 아닙니다. 정성껏 길러주십시오. 이 왕자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29]에 이를 것입니다. 가장 으뜸가는 맑고 순수함을 볼 것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들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덕행은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 늙은이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30] 이제 곧 이 늙은이에게는 죽음이 찾아올 것인데 이 늙은이가 죽으면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이분의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아쉬워서 슬퍼하는 것입니다."[31]
숫타니파타 11 날라까의 경(nalaka sutta)[32]
아버지 슈도다나는 "싯다르타가 출가하지 않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한다면 부처가 되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하는 예언 때문에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바깥의 어두운 모습을 잘 안 보여주려고 궁정에서만 호화롭게 자라게 했다. 심지어 아들 앞에서 자신이 나이 들어 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아들 몰래 센 머리를 염색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팔상도의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그림이 석가모니의 탄생을 묘사한다.

3.1. 출생년도

여느 고대 종교 창시자와 마찬가지로, 석가모니가 태어난 해가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딱 잘라서 말할 수가 없다. 여러 경전들이 공통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의 사망 당시 나이가 80세였다는 것이다.

남방불교에서는 기원전 624-기원전 544년, 북방불교에서는 기원전 1026-기원전 949년으로 보아 그 차이가 대단히 크다.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기원전 560-기원전 480년 / 기원전 460- 기원전 380년 설이 있다.[33] 와타나베 쇼코는 불타 석가모니에서 기원전 560년 무렵이라는 데에 세계 학자들의 의견이 유력하게 모인다고 설명했다. 이때 딱 '기원전 560년'이 아니라 '기원전 560년 무렵'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데, 기원전 560년을 전후로 몇 년 정도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대충 그 정도라는 뜻이다. 한스 볼프강 슈만(Hans Wolfgang Schumann) 같은 서양의 불교학자들은 석가모니의 생몰년을 대체로 기원전 563년 - 기원전 483년이라고 보지만, 이러한 추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주류 학설과는 100년 넘게 다른 연도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석가모니의 탄생 날짜를 한중일 삼국 똑같이 4월 초파일(음력 4월 8일)로 보고 기념하는데, 인도 달력으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와타나베 쇼코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어머니의 태 안에 들어간 시기, 즉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 부인이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던 것이 '베샤카 달의 보름날'[34]이라고 한다. 겨울이 지나고 봄빛이 무르녹을 때쯤으로 4월 그믐께쯤 되는데, 이로부터 열 달 뒤에 석가모니가 태어났다고 한다면 양력으로 3월 초순이다.

인도를 직접 방문하고 견문을 기록한 중국 당의 승려 현장은 상좌부 불교에서 석가모니가 어머니의 태에 들어간 시기가 웃타라 아샤다 달의 그믐날(음력 5월 보름)에 해당하고 태어난 것이 베샤카 달 후반 보름(음력 3월 보름)이었다고 전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이 밖에 아샤다 달 스무사흘(5월 여드레)에 어머니의 태에 들어가 베샤카 달 후반의 여드레(3월 여드렛날)에 태어났다고 하는 학설도 적었다.[35]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는 현재 네팔의 영토에 있다. 아소카 왕의 석주에 새겨진 문장이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는 네팔 남부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적으로는 석가모니가 인도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퍼져있어서, 네팔인과 인도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석가모니의 활동 지역이 룸비니 근처에만 머문 게 아니라서 생긴 일이다.[36] 다만 현 네팔의 성립은 매우 후대이기 때문에 네팔인이라는 주장은 다소 무리한 면이 있다. 사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인도인'이라는 것은 인도 문화권 사람이라는 것이지, 인도 공화국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불기(불멸기원)는 상좌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때가 아니라 입적한 때를 기준으로(석가모니 생몰년을 서기전 624-서기전 544년으로 잡고) 서기전 544년을 원년으로 삼고, 다만 대승불교(북방불교)에서 사용하는 불기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석가모니 생몰년을 1026-서기전 949년으로 잡고) 서기전 1026년을 원년으로 삼는데, 한국 불교는 1956년 부처 입멸 2500년을 기념하여 열린 세계불교대회에서 대부분의 불교국가의 불기가 남방불기 기준으로 통합된 이래 남방불교의 불기를 채택하고 있어서 북방불기는 역사자료를 연구하다 북방불기 관련 연도를 계산해야 할 때(즉 1956년 이전)를 제외하면 쓰지 않고 있다. 불멸기원 항목 참조.

3.2. 성장

爾時, 太子生長王宮, 孩童之時, 遊戲未學, 年滿八歲, 出閤詣師, 入於學堂. 從毘奢蜜及忍天所, 二大尊邊, 受讀諸書, 幷一切論, 兵戎雜術, 經歷四年, 至十二時, 種種技能, 遍皆涉獵. 旣通達已, 隨順世閒, 悅目適心, 縱情放蕩, 馳逐聲色.
이때, 태자가 왕궁에서 자라던 어린아이 때는 놀기만 하고 배우지 않다가 여덟 살이 되어서야 문을 나와 스승에게 가서 학당(學堂)에 들어갔다.이때, 태자(싯다르타)는 비슈바미트라(毘奢蜜)와 크샨티데바(忍天)의 두 높은 스승 곁에서 모든 서적과 일체의 논(論)과 군사와 온갖 술법을 배워 익혀, 4년이 지나 열두 살에 이르렀을 때는 여러 가지 기능을 두루 다 섭렵해 이미 통달했으며 세간에 따라서 눈으로 즐기고 마음에 맞추어 뜻대로 노닐고 노래와 색을 따라다녔다.
《불본행집경》권12, 유희관촉품(遊戱觀矚品)

싯다르타는 일곱 살 때에 5백여 명의 샤카족 귀족 집안의 자제들과 함께 처음으로 박사 비사밀다(비슈바미트라)를 스승으로 브라흐미 문자와 카로슈티 문자를 배웠고, 이듬해부터 외삼촌 크샨티데바[37]에게서 칼과 활, 창과 방패 등의 무기 사용법과 각종 무술, 코끼리와 말 등을 잘 기르고 조련하는 기술, 수레와 마차 타는 법, 군사 지휘, 연설로 상대 제압하기 등의 무예를 배웠다고 한다. 불전에는 싯다르타 태자의 어렸을 때의 모습에 대한 일화들이 실려 있는데, 그 일화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물론 다 믿기는 곤란하고 은유가 가미된 설화로써 이해해야 한다).

와타나베 쇼코는 이런 류의 경기대회가 이따금 열렸다는 것은 그때의 일반 사정으로 보아도 짐작할 만한 일이지만, 남들은 당길 수 없는 활을 쏘았다거나 화살이 박힌 곳에서 샘물이 솟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싯다르타만이 아니어도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영웅 전설의 테마이며, 어린 싯다르타가 앉은 자리에서 활을 쏘아 보이는 것은 훗날 석가모니가 마왕 마라 파피야스를 항복시키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모습과 동일한 사고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는 처음부터 붓다였다', '석가모니 부처는 오래 전부터 이미 붓다였다'는 말과 같은 발상의 전설이라고 지적하고, 또한 설화에서 태자의 경쟁 상대로 으레 데바닷타와 난다가 나오는 것도 실제로 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선인과 악인의 대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고 설명한다.[39]

그리고 싯다르타의 나이 열두 살이 되던 2월 8일에 사해의 물을 태자의 정수리에 붓고 칠보로 만든 도장을 맡기는 책봉 의식을 치르고 숫도다나 왕의 태자로 정식 책봉되었다(《불설중허마하제경》). 싯다르타가 태자로 책봉된 해에 카필라 왕국에서는 농경제 파종식[40]을 거행했는데, 그런데 본생경과 불본행집경에는 이때 싯다르타 태자는 이 농경제 의식에서 싯다르타는 신분의 고하[41]와 생사의 먹이사슬[42]이라는 것을 목격하였다. 특히 생물이 남을 멸했으나 그 생물 역시 불멸을 얻지 못함을 보고 전전(展轉), 돌고 도는 생사의 허망함을 느끼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왕은 이 날 온 성안을 천인의 궁전처럼 꾸미고 하인과 사환들도 모두 새 옷을 입고 향과 화환으로 몸을 장식하고 궁전 안에 모였다. 왕이 일할 장소에는 천 개의 쟁기를 붙들어 매어두었다. 왕은 금으로 장식한 쟁기를 가지고, 대신은 백여덟 개보다 한 개가 적은 은으로 만든 쟁기를 가졌다. 왕이 쟁기를 몰고 나가자 다른 모든 사람도 일을 시작했다. 여기서 왕은 자신의 큰 영화를 느꼈다.

그때 그 들에 있는 모든 농부들은 발가숭이로 고생하면서 소에 보습을 매어 밭을 가는데 소가 늦으면 때때로 고삐를 후려쳤다. 해가 길고 날이 뜨거워 헐떡거리고 땀을 흘리며 사람과 소가 다 고달파서 주리고 목말라했다. 태자는 보습을 끄는 소가 피로할 대로 피로한데 또 채찍으로 얻어맞고 멍에에 목이 졸린 채 고삐로 코를 꿰여 피가 흘러내리고 가죽과 살이 터지는 것을 보았다. 또 농부도 몸이 수척해 뼈만 남아 있었으며 햇볕에 등이 타서 발가숭이 몸이 먼지와 흙투성이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보습에 흙이 패여 뒤집히자 벌레들이 나왔으며 사람과 보습이 지나간 뒤에는 뭇 새들이 날아와 서로 다투며 그 벌레들을 쪼아먹는 것을 보았다. 태자는 이것을 보고 나서 크게 걱정하고 근심하기를 마치 사람들이 자기의 친족이 얽매임을 당했을 때에 큰 걱정과 근심을 내듯이 태자가 그것들을 불쌍히 여김도 또한 이와 같았다.
《본생경》

태자는 결국 자신의 애마 칸타타를 타고 파종제 자리를 빠져나와서 깊은 숲으로 들어갔고, 칸타타에서 내려서 숲을 조용히 거닐면서 "이러한 고통을 해결할 방법은 없단 말이냐"라며 잠부나무 아래에 앉아 선정에 빠져 고민했다. 왕과 신하들이 싯다르타 태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43] 이게 싯다르타가 열두 살 소년일 때의 일이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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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삼국시대). 일본 고류지 소장 목조 반가사유상.

한국과 일본의 국보로도 알려져있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이렇게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숲 속에서 고민하던 왕자 시절의 싯다르타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국의 경우 해당 불상이 석가모니의 미래에 올 예정이라는 미륵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르는데, 해당 불상을 미륵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반가'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온 것이라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존재하고 있다. #[45]

재미있게도 일본의 와타나베 쇼코가 지은 <불타 석가모니>와 법륜 비구가 지은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은 본 사건에 대한 서술 태도가 미묘하게 다르다. 와타나베 쇼코는 밭을 가느라 흙속에서 파헤쳐져 나온 벌레가 다시 새들에게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고 산 것끼리 서로 잡아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참혹한 사실을 바로 눈앞에서 본 것에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해서 자연계의 약육강식에, 법륜 비구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당하고 살 수밖에 없는, 누구는 땡볕에 고통스럽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하고 굽실거리며 살아가는데 자신과 같은 어떤 사람은 편안하게 나무 그늘 아래 놀면서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인간 사회의 불평등한 관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풍족한 생활에 대해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제왕으로서 지배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달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중생들은 참으로 불쌍하구나. 서로서로가 잡아먹고 먹히니 말이다.
《불본행집경》

이후 싯다르타가 정말 자라서 출가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숫도다나 왕이나 카필라 국의 신하들은 태자의 출가를 막고 그가 무사히 왕으로 즉위하여 전륜성왕으로써 나라를 부흥시키는 길을 갈 수 있도록, 태자의 출가를 막기 위한 갖가지 방법들을 강구했는데, 태자의 나이 열여섯 살에 태자를 위해서 삼시전 즉 겨울용, 여름용, 봄과 가을용 이렇게 세 채의 궁전을 짓기도 하고, 이듬해 태자의 나이 열일곱 살에는 태자의 혼처를 구해 태자를 혼인시키기로 했다.

흔히 싯다르타 태자의 부인으로는 야쇼다라 한 사람만이 알려져 있지만, 《불본행집경》 권14나 《수행본기경》에는 태자에게 야쇼다라를 포함해 세 명의 부인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첫 번째 태자비는 샤카족의 부호 단다파니의 딸 고피카로 고피카로부터 몇 년 동안 자식을 얻지 못하자[46] 다시 야쇼다라를 아내로 맞았으며, 야쇼다라에게 자식이 없자, (나중에 야쇼다라가 자식을 낳기는 하지만) 샤카족 사람 카라스셰마의 딸을 세 번째 부인으로 들였는데, 책에 따라서 이름이 마노라타(또는 마노다라) 또는 므리가자 등으로 나오는 데다 자세한 기록도 없다.

4. 사문유관(四門遊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사문유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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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사문유관이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로 팔상도에서 세 번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에 해당한다.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및 《불본행집경》에 실려 있는 이 일화는 싯다르타가 네 개의 성문에서 각기 인간의 생로병사를 목격하고 그의 일생 처음으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나이 스물아홉 살 되던 때, 싯다르타는 궁밖으로 나가보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하고 마차에 올라 마부 찬다카와 함께 궁을 나섰다.

첫날, 궁궐 동문으로 나간 싯다르타는 늙어 힘도 없는 노인을 발견했다.[47] 싯다르타가 목격한 노인의 모습을 수행본기경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머리는 희고 이는 빠졌으며 살갗은 느슨하고 얼굴은 주름지고 살도 없고 등은 앞으로 구부러졌으며, 뼈마디는 시들어서 굽고 눈물과 콧물과 침은 뒤섞여 흐르며 상기(上氣)가 되어 어깨로 숨을 쉬고 몸의 빛깔은 검으며, 머리와 손은 쓸데없이 흔들고 몸은 벌벌 떨며 오로(惡露)는 저절로 흐르는데 그 위에서 앉았다 누웠다 하였다.

너무도 추레한 노인의 모습을 본 태자는 옆에 있던 종에게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고, 종이 왕년에는 용맹하기로 유명한 전사였던 늙은이라고 대답하자 다시 "무엇을 늙음이라 하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대저 늙음이란 나이가 많아서 감관이 완숙하고 모양이 변하고 빛깔이 쇠하며 기운이 미미하고 힘이 다하며 음식은 소화가 안 되고 뼈마디는 끊어지려 하며, 앉고 일어남에는 사람이 필요하며, 눈은 멀고 귀머거리가 되며, 문득 돌아서면 곧 말을 잊어버리고 갑자기 슬퍼지며,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늙음이라 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노인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싯다르타는 "사람이 세상에 사는 데에 이런 늙음이란 근심이 있었구나. 어리석은 사람이야 탐내고 사랑하겠지마는 어찌 즐거워 할 수가 있겠느냐? 만물이 봄에 나서 가을과 겨울이면 시들고 마르며, 늙음이 번개처럼 닥쳐오거늘 몸에 만족하고 의지하겠느냐?"라고 탄식하고 돌아왔고, 동쪽 성문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나라 안에 명을 내려서 태자가 다니는 길에 노인들이나 슬프고 불편한 감정을 자아낼 만한 것은 모두 치우게 했다.

다시 남쪽 성문으로 나간 싯다르타는 이번에는 병든 사람을 보게 되었다.
몸은 파리하고 배는 크며 몸은 샛노랗게 되었으며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며, 온갖 마디는 몹시 쑤시고 아홉 구멍에서는 썩은 물이 새며, 부정한 것이 저절로 흐르고 눈으로는 빛깔을 보지 못하며, 귀로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신음하면서 숨을 쉬며, 손발은 허공을 더듬으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짖고 ‘아내야, 아들아’ 하며 슬퍼하고 그리워하는지라.

역시나 충격을 받은 싯다르타는 종에게 "저 사람은 왜 저러느냐"고 물었고, 종은 "이 마을 부자인데 병들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싯다르타가 다시 "병들었다는 것이 어떤 것이더냐?"라고 묻자, 종은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요소[四大]인 땅[地]ㆍ물[水]ㆍ불[火]ㆍ바람[風]이 있어서 하나의 요소에 101가지 병이 있으며, 차츰 서로가 모여서 404가지 병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데, 이 사람은 반드시 극도로 춥고 극도로 덥고 극도로 굶주리고 극도로 배부르고 극도로 마시고 극도로 목마르는 등, 때와 자리를 잃었고 눕고 일어나는 데 법도가 없기 때문에 이런 병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태자는 다시 충격을 받고 "나는 부귀한 곳에서 살고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음식으로 입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을 놓아 제멋대로 하며 다섯 가지 욕심에 빠져서 스스로 깨달을 수가 없으므로 역시 이런 병이 있을 터인데, 저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느냐?"라며 한탄하며 궁으로 돌아왔다. 부왕은 이번에도 태자가 유람하는 곳에 길을 평탄하게 닦아 놓고 더러운 것을 길 가까이에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자는 이번에는 서쪽 성문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싯다르타는 상여가 성을 나가고 집안 사람들이 상여를 따라 가면서 울부짖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번에도 태자는 옆에 있던 종에게 "저건 무슨 일이냐?"라고 물었고, 종은 마을에서 잘생긴 청년이 사고로 사망해 지금은 죽은 사람이라 그의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다고 대답했고 다시 싯다르타가 죽음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종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죽음이란 다함입니다. 정신이 떠나간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요소가 흩어지려 하면서 혼신(魂神)이 편안하지 못하며 바람 기운이 떠나가서 숨이 끊어지고 불기운이 스러져서 몸이 차가워지며, 바람이 먼저, 불이 다음으로, 그리고 혼령(魂靈)이 떠나갑니다. 신체는 뻣뻣해지고 다시는 느끼는 것이 없어지며 10여 일 동안이면 살이 무너지고 피가 흐르며 띵띵 부풀고 문드러져 냄새나며, 취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몸 속에 있던 벌레가 도리어 그 살을 뜯어먹으며, 힘줄과 맥은 문드러져 다하고 뼈마디는 흩어져서 해골은 제 자리를 달리하며 척추ㆍ옆구리ㆍ어깨ㆍ팔ㆍ넓적다리ㆍ정강이와 발이며 손발가락은 저마다 제 자리에서 떨어지고 날짐승ㆍ길짐승은 다투어 와서 뜯어먹으며, 하늘과 용ㆍ귀신ㆍ제왕ㆍ인민 등,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간에 이 환난만은 멸한 이가 없습니다.

이 말에 싯다르타는 사색의 혼란에 빠져 "아아, 아무리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결국 죽는 것은 매한가지이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프단 말인가!"라며 탄식하였다.

결국 인간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모두 보게 된 싯다르타는 며칠 동안이나 탄식에 빠져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자가 여러 일로 인해 근심하면서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숫도다나 왕은 아들이 걱정이 되어 "내가 저번에 태자가 다니는 길에는 쓸데없는 것이 눈에 안 띄게 관리 제대로 하라고 했잖아!"라며 종에게 성을 내니 종은 "왕자님께서 그 문을 막으면 다른곳으로 가시니 저도 어쩔 수 없단 말입니다..."라고 하소연한다. 이렇게 해서 왕의 명으로 서쪽 성문을 폐쇄하였다.

하지만 해가 지나서 태자는 다시 북쪽 성문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법복을 입고 한 손에는 지팡이, 한 손에는 바리때를 든 어느 사문을 발견했는데, 걸음걸이는 차분하고 항상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도 흔들림이 없는 차분한 사문의 모습을 본 태자는 "저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인고?" 하고 종에게 종은 "출가한 사문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태자가 "사문이란 무엇이냐?"하고 묻자 종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문이란 도를 닦는 사람입니다. 집과 처자를 버리고 애욕을 버리며 6정(情)을 끊고 계율을 지켜 함이 없으며, 선정[一心]을 얻으면 곧 만 가지 삿됨이 사라지옵니다. 선정의 도는 아라한이라 하는데, 아라한이란 진인(眞人)입니다. 소리와 빛깔로 더럽힐 수 없고 영화스런 지위로 굽히게 할 수 없으며, 움직이기 어려움이 마치 땅과 같고 이미 근심과 고통을 면하였으며, 살고 죽음이 자재하다 합니다.

이 말에 싯다르타는 큰 울림을 받아 "바로 그것이다! 나는 사문이 되어 모든 고통과 근심이 없는 해탈에 들어서리." 라 외치며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이를 들은 숫도다나왕은, 신하들을 불러서 태자가 출가하지 않을 방법을 의논하였는데, 어떤 신하가 태자에게 농원 관리를 맡겨서 수도할 생각이 나지 않게 하자고 건의해 숫도다나 왕은 소와 쟁기 그리고 노비를 딸려서 태자를 농사 업무를 맡게 했다. 그러나 태자는 농사 지으러 나간 밭에서 다시금 돌고 도는 생명의 순환이라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태자는 염부수(閻浮樹) 아래 앉아서 밭갈이하는 것을 보았는데, 흙덩이가 부서지면서 벌레가 나왔다. 천인이 또 변화로 소에게 목으로 흙덩이를 후비적거려서 벌레가 아래로 뚝뚝 떨어지게 해두면 까마귀가 따르면서 쪼아 먹고, 또 개구리를 만들어서 꿈틀거리며 쫓아가서 지렁이를 잡아먹게 하며, 뱀이 구멍으로부터 나와 개구리를 잡아먹고, 공작이 날아 내려와서 그 뱀을 쪼아 먹고, 매가 있다가 내려와서 공작을 쳐서 잡고 독수리가 다시 와서 매를 움켜쥐며 잡아먹게 하였다. 이 중생들이 돌고 돌면서[48] 서로 잡아먹음을 보고서 인자한 마음으로 가엾이 여기며 보리수 나무 아래서 제일선(第一禪)을 얻었는데, 햇빛이 쨍쨍 빛나는지라, 나무가 그를 위하여 가지를 굽혀 주어 그 몸을 따르면서 그늘이 지게 하였다.

5. 성을 넘어 출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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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의 출가를 묘사한 1~2세기경 간다라 미술의 부조. 싯다르타가 말을 타고 카필라바스투의 성벽을 넘어갈 때 여러 신들이 나타나서 그의 말을 들어올려 성벽을 넘었다는 전승을 묘사한 것이다. 파키스탄 스와트박물관 소장.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의 그림으로 묘사한 불교의 팔상도에서 싯다르타의 출가는 유성출가상(喩城出家相)으로 표현된다. 서양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는 The Great Renunciation, 즉 '위대한 포기'로 불린다.

과거현재인과경에 따르면 싯다르타는 출가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먼저 부왕 숫도다나를 찾아가서 뜻을 밝혔다.[49] 아무리 속세와 연을 끊는 마당이라도 지금까지 자신을 보살펴 기르신 부모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의 출가를 막자고 기울였던 온갖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니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던 숫도다나 왕은 "아들아, 그런 생각 하지 마라. 아직 때가 아니다. 아직 어린데 출가해서 고행하는 그 고된 삶을 네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니. 내가 이제 늙어서 곧 있으면 너한테 양위하고 한적한 데에서 고행할 생각인데, 제발 한 번만 생각 다시 해다오. 네가 바라는 것이 있으면 여기서 말해라. 네가 출가하지 않겠다면 내가 뭐가 아깝겠냐."라고 달랬다. 싯다르타가 "아버지께서는 그럼 언제까지나 늙지 않는 것, 병들지 않는 것, 죽지 않는 것, 서로 이별하지 않는 것, 이 네 가지 소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묻자, 숫도다나 왕은 아시타 선인의 예언을 떠올리고는 "그래, 네가 결정했다면 내가 어쩔 수 있냐. 정 그렇다면 이 나라 왕위를 이을 후사 하나만 낳고 나서, 그러고 나서 네 뜻대로 출가해라." 하고 말했다. 싯다르타도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고 한다.[50]

싯다르타가 출가를 하기로 마음먹었던 그때 태자비 야쇼다라가 아들을 낳았다. 싯다르타는 이 소식을 듣고 "라훌라(장애)...."라고 중얼거렸는데 시종은 이를 아기의 이름으로 알고 태자비에게 알렸다(《본생경》).[51] 싯다르타는 후사가 생겼으므로 아버지와의 약속이나 왕자로서 의무를 다했다는 판단과 함께 더 이상 지체하면 출가가 미루어질 것이므로, 모두가 잠든 밤,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싯다르타가 출행을 결행한 때를 대승불교에서는 2월 8일이라고 말한다. 많은 석가모니의 전기에 싯다르타가 성을 나오던 날의 모습이 묘사되는데, 싯다르타가 궁을 나오면서 본 것들 가운데는 환락이 끝난 뒤에 미녀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온갖 추태를 보이는 모습들도 있었다.
그때에 태자는 문득 잠에서 깨어 궁전 안을 살펴보았다. 주먹덩이와 같은 등불과 팔뚝과 같은 촛불이 휘황한 광명을 내며 조용히 타고 있는데 뭇 미희들이 추하게 늘어져 자는 몸을 보았다. 어떤 미희는 용모가 단정하고 평소 행동에 부끄러움을 잘 알고 모든 예절이 단정했으나 이제 깊은 잠 때문에 옷을 버리고 팔다리며 몸의 은밀한 곳을 드러낸 채 눈을 부릅뜨고 자는 것이 마치 죽은 시체와 다름없어 산 사람이라는 생각도 못 갖게끔 되었으며, 혹 어떤 미희는 코를 골고 이를 갈며 침을 흘리고 얼굴이 창백해 매우 추하게 자며, 혹 어떤 미희는 대소변의 부정한 것을 흘리면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는 것이 마치 무덤 사이의 시체와 같았다. 제석천의 궁전과도 같던 태자의 큰 누각도 온갖 해골이 사방에 어지러이 뒹구는 묘지와 다름없어 보이고 세계는 마치 불이 붙은 집처럼 생각되었다.
본생경

와타나베 쇼코는 <불타 석가모니>에서 미녀를 보면서 그 노쇠한 모습을 떠올리고 젊은이를 보면서 백골을 생각하는 것은 인도에서는 불교가 아니어도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요가 수행법의 하나이며, 굳이 이 이야기 자체를 사실로 보아 그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서양의 유명한 라틴어 경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비슷한데, 고대 로마에서 장군(임페라토르)의 개선식에서 노예가 장군이 탄 말 뒤에서 자만과 교만을 경고하는 의미로 외치게 했다는 이 문구는 이후 그리스도교에 수용되면서는 현세에서의 쾌락, 부귀, 명예 등은 모두 부질없는 것(Vanitas)이라는 등 다소 허무주의적인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마냥 다 부질없다는 것보다는 지금 잘 나간다고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가 더 짙다. 싯다르타 태자가 궁을 나오면서 보았다는 갖가지 인간 세상의 이면에 대한 묘사도 하나의 수행이자 결심의 정도를 나타내는 일종의 은유라는 것.

싯다르타는 시종 찬다카만을 깨워서 아무도 부르지 말고 자신의 애마인 칸타카를 몰고 나오게 했다. 본생경에 따르면 찬다카를 깨워서 애마 칸타카를 몰고 오도록 명령해 둔 뒤, 궁을 떠나기 전에 싯다르타는 아내와 자신의 아들을 보고 싶어서 아내의 방에 몰래 찾아갔지만, 야쇼다라의 품에 안겨 자고 있는 아기를 보고 지금 여기서 손을 들어 아기를 안는다면 아내는 깰 것이고 자신의 출가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나와서 칸타카를 타고 성을 빠져나왔다.
我今寧被刀割身肉, 寧食毒死, 寧入大火, 寧投大崖, 寧自剄死, 我今終不未得免離生死之法, 而還向家.
나는 이제 차라리 칼로 몸과 살을 도려내고 차라리 독약을 먹고 죽을 지라도, 차라리 큰 불에 들어갈지라도, 차라리 큰 벼랑에서 떨어질지라도, 차라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을지라도 나는 이제 생사를 여의는 법을 얻지 못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불본행집경》 권17 체발염의품(剃髮染衣品)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카필라와 마가다 국의 국경인 아노마 강가에 이르러[52] 강의 이름을 물어보고, 말에서 내린 싯다르타는 자신이 차고 있던 화려한 장신구들을 모두 풀어서 찬다카에게 주며 아버지와 이모(이자 새어머니), 아내 및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지냈던 이들에게 전하는 말을 남긴 뒤 찬다카를 돌려보냈다. 찬다카는 태자를 두고 혼자서 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태자에게 생각을 바꿀 것을 권했으나 싯다르타는 "내 부왕과 권속에 내가 받은 은혜가 크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고, 오늘의 이 출가가 그것을 저버리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일체중생이 삿된 길에서 헤매며 괴로워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세간을 이익되게 할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불본행집경)라며 찬다카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칼을 뽑아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지나가던 사냥꾼[53]과 옷을 바꿔 입은 다음, 그대로 숲으로 수행의 길을 떠났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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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조 때에 제작된 석가출가도.[55]

싯다르타의 출가를 다루고 있는 경전은 원시 경전과 불전(佛傳) 경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원시 경전으로는 팔리어 디가 니까야4 ‘소나단다 숫따(Sonadanda Sutta), 맛지마 니까야26 성스러운 구함의 경(Ariyapariyesanā sutta), 장아함경(長阿含經), 중아함경(中阿含經), 율장 오분율(五分律) 「수계법」(受戒法), 근본유부율(根本有部律) 「필추니파라시가」(苾芻尼波羅市迦), 「파승사」(破僧事) 등에서 간략하게 싯다르타의 출가를 언급하였고, 불전 경전으로는 니다나카타(Nidānakathā)[56],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 228년 한역), 이출보살본기경(異出菩薩本起經, 280~312년 한역), 보요경(普曜經)[57], 방광대장엄경(放廣大莊嚴經)[58], 불소행찬(佛所行讚)[59], 불본행경(佛本行經)[60],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61],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62], 중허마하제경(衆許摩訶帝經)[63] 대사(大事)[64] 등의 경전이 있다.

5.1. 고행의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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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고행상(83㎝. 시크리 출토. 2~4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소장)



출가한 뒤에 싯다르타는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는 고된 삶과 마주했다. 일주일 동안 스스로 자신이 찾는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스승을 찾아나섰다. 아노마 마을에서 바이샬리 방면을 향해 간 싯다르타는 그 부근에서 수행하고 있던 바르가바(Bhagava) 선인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는데, 바르가바는 육체적인 고행을 통해 순수해지고 고상해진다고 주장하는 철저한 '고행주의자'였다. 그의 제자들은 바늘 방석에 앉아 있거나, 타오르는 불길 옆에서 뜨거움을 견디거나, 하루 종일 물구나무를 하고 서 있거나 종일 한쪽 발로만 서 있거나 태양 아래에서 알몸으로 명상을 하거나, 쇠침으로 자신의 살을 뚫는 등의 혹독한 고행을 하고 있었고 석가모니도 그 틈에 끼어서 고행에 들어 갔다.

그러나 눈이 움푹 들어가고 몸은 야위어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날 정도의 고행을 행했음에도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65] 싯다르타는 바르가바 선인이나 그와 함께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고행하는 것이 내 눈에는 대단하기는 하지만, 대체 무엇을 추구해서 이렇게 혹독한 고행을 하는가?" 물었고, 바가바 선인은 "고행을 견디어 내는 것이 위대한 것이며, 고행을 통하여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혹은 인간으로 태어난다." 대답했다. 싯다르타는 "하늘에 태어나려면 죽어야 하는데, 그럼 고행을 하다 죽어야만 하느냐? 하늘의 과보가 다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다시 육도의 윤회로 되돌아가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행해야 하느냐?[66] 장사꾼들이 돈 때문에 거친 파도에 뛰어들고 군주가 영토를 얻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켜 상대 국가를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물었고, 싯다르타 자신은 천국이나 귀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에 그곳에 있던 수행자들은 "이곳에 멀지 않은 곳에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라는 선인이 있는데 그는 이미 결정된 바른 지혜와 청정한 눈을 얻었으니, 그에게 가서 물으면 지극히 참된 방편의 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고, 싯다르타는 그곳을 떠났다.
마가다 국의 수도인 왕사성(라자그리하)에 이르러 나무 아래서 수행할 때 싯다르타는 부왕의 명으로 자신를 찾다가 바르가바 선인의 교단에서 싯다르타의 소식을 듣고 뒤쫓아온 국사 브라만과 대신을 만났다. 두 사람은 태자 싯다르타에게 절을 올린 뒤에 그를 데리고 돌아가려 했지만 싯다르타는 "나는 내 일신의 안락을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니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궁중에 있으면 다섯 가지 욕락에 물들 것이고, 밖으로 다스리자면 반드시 채찍으로 때리고 죄를 물어 벌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는 해탈을 구할 수 없다." 하며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대신들을 만나고 다음날 싯다르타는 훗날 자신이 성도한 뒤에 자신에게 귀의하고 평생 후원자가 될 빔비사라 왕을 만났다. 빔비사라 왕은 싯다르타가 카필라 국의 왕자로서 자신의 자리를 다 던지고 출가해 수행한다는 소식을 진작에 들었기 때문에, 싯다르타가 라자그리하 안을 돌며 탁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싯다르타를 만났다. 빔비사라 왕은 싯다르타가 내심 다른 생각이 있어서 출가를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영입을 제안한다. 마가다 국의 절반에 병력도 지원할 수 있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67] 이때 빔비사라 왕과 싯다르타의 만남은 숫타니파타의 출가의 경(pabbajja sutta)에도 짧게 기록되어 있다.
"어지신 비구여, 내 이제 당신을 보니 매우 기쁩니다. 그러므로 내 이제 당신에게 묻고자 하나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한 마디 여쭙고자 하오니 부디 들어주소서. 무엇이냐 하면, 당신은 지금 한창 젊은 나이로 단정하기 비길 데 없고 신체가 미묘하여 환락하고 즐기기 좋은 때 입니다. 지금 무엇 때문에 이런 뜻을 내어 사문의 행을 하며, 왕실을 떠나 빈 산에 홀로 앉았습니까. 또 당신의 몸의 이런 상호에는 붉은 전단향을 바르는 것이 합당하고 가사를 입을 것이 아니며 당신의 두 손은 세간을 다스리고 가르칠 것이며, 백 가지 맛이 앞에 가득 있어 언제든 마시고 먹을 것인데 어찌 그릇을 들고 남에게 밥을 빌겠습니까? ... (중략)
당신께서 이제 만약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였다면 나는 이제 당신에게 내 나라에서 5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겠으며 당신 마음대로 재물과 채녀들을 주리다. 만약 나를 돕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나라의 절반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겠으니 내 경계에 있으면서 나의 왕위를 받으소서. 나는 당신을 섬기고 받들어 모자람이 없게 하리다. 무엇 때문인가 하면, 당신 사문의 몸은 부드러워 한적하고 텅빈 난야(蘭若)에 살 수 없습니다. 만약 땅바닥에 풀 자리 깔고 앉아 있으면 당신의 몸이 축나서 병이 될까 두렵습니다. 조금만 지내다가 당신의 아버지가 늙고 쇠하거든 돌아가 본국의 왕위를 받으소서.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하고 나를 어여삐 여기거든 나의 왕위를 받아 우리 나라에 머무소서. 당신은 큰 종성이라서 우리 나라 땅이 좁고 더럽고 잡되다고 싫어하시면 나와 모든 신하들은 다시 따로 당신을 위하여 다른 나라를 개척하여 넓히고 당신과 함께 다스리겠나이다. 또 나는 당신 같은 귀족을 얻어 함께 인연을 맺고 친한 권속이 되기가 소원이옵니다. 부디 내가 하는 말을 참말이 아니라고 의심치 마소서."
불본행집경 권제23 권수세리품(勸受世利品)

이에 싯다르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왕의 성바지는 본래 밝은 달(明月)이신지라 성품이 자연히 높고 시원하며 비루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는 일들은 맑고 훌륭하지 않음이 없으신데 이제 하시는 말씀만은 기특하시다고 하지 못하겠습니다.그러나 나는 왕을 자세히 살피건대 속의 뜻이 지극히 간절하므로 앞보다 뒤가 갑절이나 되십니다.왕은 이제 곧 몸과 목숨과 재물에 대한 세 가지 굳건한 법을 닦으실 것이요, 또한 굳건하지 못한 법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권장하지 마셔야 합니다.
나는 이제 전륜왕의 자리를 버렸거늘 또한 무슨 일로 왕의 나라를 가져야 합니까? 왕은 착한 마음으로써 나라를 버리어 나에게 주겠다는 것도 오히려 갖지 않겠거든 무엇 때문에 군사로써 남의 나라를 쳐서 가지겠습니까? 나는 이제 부모를 작별하여 수염과 머리칼을 깎아 없애고 나라를 버리게 된 까닭은 나고ㆍ늙고ㆍ병들고ㆍ죽음의 괴로움을 끊기 위해서요, 다섯 가지 욕심의 즐거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세간의 다섯 가지의 욕심은 큰 불더미와 같아서 모든 중생들을 불사르며 스스로 뛰어 나올 수 없게 하거늘 어찌하여 나에게 탐내고 집착하기를 권하십니까?내가 이제 여기까지 온 까닭은 두 신선인 아라라와 가란이 바로 해탈을 구하는 가장 으뜸 되는 길잡이라 하기에 그 곳에 나아가서 해탈의 도를 구하려 한 것이요, 오래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겠습니다.나는 왕의 처음에 하신 말씀과 기쁜 마음으로 나에게 주신 것을 어겼으나 싫어하거나 원망을 하지 마십시오. 왕은 이제 바른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인민들을 그릇되게 하지 마십시오."
과거현재인과경 권제3

이에 빔비사라 왕은 그 자리에서 싯다르타를 향해 "당신은 반드시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해 부처를 성취할 것입니다." 하고 격려하면서 "당신이 성도하고 나면 나한테 먼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향후 깨달음을 얻어 돌아올 싯다르타의 곁에서 평생 공경하고 공양하리라 약속하였고 싯다르타도 받아들였다고 한다.

싯다르타가 바르가바 선인에 이어 두 번째 스승으로 섬긴 알라라 칼라마 선인은 16세에 출가해서 104년을 수행 정진한 마가다 국 최고의 선정 수행자로 알려져 있었고,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68]을 수행의 기치로 바이살리 근처에서 집단 3백 명을 이끌었다. 싯다르타는 알라라 칼라마의 가르침을 받으며, 선정 수행의 가르침을 배우고 일주일 만에 싯다르타는 무아(無我)·무심(無心)의 경지에 도달했다. 알라라 칼라마는 싯다르타가 이렇게 빨리 자신의 가르침을 구현해보이자 뿅 가서 "교단의 통제권을 위임해줄 테니 같이 이들을 이끌어보자"고 제안했지만, 싯다르타는 여기에서도 자신이 찾는 해탈에 이르지는 못했기에 사양하였다고 한다.

다시 알라라 칼라마를 떠나서 싯다르타는 웃다카 라마풋다(Uddaka Ramaputta)라는 선인을 만났다. 그 역시 알라라 칼라마 선인과 같은 선정 수행자로,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인 비상(非想)의 마음[69]을 가르치며 제자 7백 명을 거느린,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선인이었다. 싯다르타가 웃다카의 가르침도 구현해보이자 이번에도 교단을 같이 이끌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싯다르타는 사양했다. 선정만을 찾는 것도 싯다르타 자신이 찾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진정한 해탈의 길은 아니라고 느꼈다.
세간에 사문이거나 브라만들이 몸과 마음이 방일해 타오르는 욕망에 집착하면 번뇌가 따르므로 비록 고행을 하더라도 도에는 이를 수 없다. 또한 몸을 제어해 욕락을 행하지는 않더라도 마음은 오히려 쾌락에 집착하면, 비록 고행을 닦더라도 도에는 이를 수 없다. 그러나 몸을 제어해 욕락에 탐착하지 않고 마음이 순일해 타오르는 번뇌를 소멸하고 부지런히 고행을 닦아 행하면, 곧 스스로 이익이 되고 남에게도 이익이 되는 도를 증득할 수 있으리라.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결국 싯다르타는 다시금 길을 떠나 다른 바라문들을 찾아 다니며 수행했지만,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이상의 답을 구하지 못하자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내가 찾는 진정한 깨달음을 구하자고 다짐했다. 이때 웃다카의 아래서 수행하던 이들 가운데 다섯 명이 싯다르타를 따라 나섰다.

싯다르타는 서남쪽으로 나이란자라 강이 흐르는 우루벨라 마을의 수행자들이 모여 사는 고행림으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금 고행에 들어갔다. 어떤 스승에 의지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의지에 따른 고행이었다. 이 고행림에서 싯다르타는 6년을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말 그대로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고행이었다. 훗날 석가모니 부처는 제자들 앞에서 "나만큼 고행한 자는 없다." 말하고 있을 정도.
나는 무덤가에 가서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 내 몸을 가렸다. 그때 안타촌 사람들이 와서 나뭇가지로 내 귓구멍을 찌르기도 하고 콧구멍을 찌르기도 했다. 또 침을 뱉기도 하고 오줌을 누기도 하고 흙을 내 몸에 끼얹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마음을 지켰다. 또 외양간에 가서 송아지 똥이 있으면 그것을 집어먹었고, 송아지 똥이 없으면 큰 소의 똥을 집어먹었다. (중략)

그러자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 뼈만 앙상하게 남았고 정수리에는 부스럼이 생기고 피부와 살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다. 내 머리는 깨진 조롱박 같았다. 내가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깊은 물속에 별이 나타나듯 내 눈도 그러했다. 낡은 수레가 허물어지듯 내 몸도 그렇게 허물어져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 엉덩이는 낙타 다리 같았고, 손으로 배를 누르면 등뼈가 닿았다. 몸이 이처럼 쇠약해진 것은 다 내가 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략)

나는 이렇게 6년 동안 애써 부지런히 도를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가시 위에 눕기도 했고, 못이 박힌 판자 위에 눕기도 했으며, 새처럼 공중에 몸을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에 몸을 태우기도 했고, 몹시 추운 날에 얼음에 앉거나 물속에 들어 가기도 했다. 알몸으로 지내기도 했고, 다 해진 옷이나 풀로 만든 옷을 입기도 했으며, 남의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리기도 했다. 머리카락을 길러 몸을 가리기도 했고, 남의 머리카락을 머리에 얹기도 했다.
증일아함경 제23권, 증상품 제8경.

이러한 싯다르타의 고행을 보고 어떤 사람은 '고타마는 죽었다.' 혹은 '고타마는 죽지 않았다.' 혹은 '고타마는 죽지 않았으나 7일을 지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말했다고 하고, 심지어 어떤 신이 천상에 올라서 그곳에 있던 싯다르타의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 이를 알리니 마야부인이 지상에 내려와 싯다르타를 끌어안고 슬퍼하기도 했으며, 카필라 왕국의 부왕 숫도다나도 이를 듣고 슬퍼하면서 사신을 시켜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오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마라 파피야스가 싯다르타의 앞에 나타나 싯다르타를 꾀기 시작한다(후술).

그러나 6년간 고행을 하고도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고행 끝에 육체의 욕망 때문에 수행을 포기하거나 정신이 흐려지지 않을 정도까지 이르기는 하였으나 그 너머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네란자라 강 옆의 나무 아래에서 수행할 때 강을 지나가던 배에서 어느 악사(樂士)가 제자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녀석아. 그렇게 줄을 팽팽하게 하면 끊어지지 않느냐?", "이 녀석아. 그렇다고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안 나지 않느냐?" 이 때 싯다르타는 중도(中道)를 깨달았다.[70]

싯다르타는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힘을 잘 활용함으로써 인간의 고뇌를 해결할 수 있으리란 데에 생각이 미쳤다.[71] 이미 싯다르타는 열두 살 때에 농경제 현장을 빠져나와서 나무 아래서 명상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내면적으로 높은 단계를 체험했던 적이 있었다. 스승의 가르침이나 고행으로 육체를 괴롭히는 일이 없었던 그때조차도 높은 단계의 경지를 혼자서 체험할 수 있었다면 지금도 그때와 같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과거의 여러 붓다들이 수행했던 경험에 비추어서 싯다르타 자신도 고행과 단식을 그만두고 음식을 먹기로 했는데, 이때 신들이 싯다르타 앞에 나타나서 신통력으로 영양을 공급해 주겠다고 했지만 싯다르타는 이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같이 있던 다섯 수행자들은 싯다르타가 고행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식사를 우리도 같이 하면서 수행하자고 제안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 "저놈이 이제 타락했구나. 그토록 고행하면서도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놈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식사를 한다면 어떻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느냐?"라며 침을 뱉고 가버렸고, 싯다르타는 혼자 남아서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파일:梁楷出山釋迦圖.jpg
남송 시대의 화가 양해가 그린 출산석가도(出山釋迦圖).[72]

싯다르타가 고행을 그만두고 설산의 고행림을 나오는 장면은 석가출산도(釋迦出山圖)/출산석가도(出山圖釋迦)라고 해서 선종 계열 불교에서 회화 소재로 자주 사용했다. 선종 불교에서는 싯다르타가 부질없는 고행을 그만두고 설산을 미련없이 떠난 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던 것.

중국 남송 시대의 화가 양해가 그린 그림이 유명하다.# 한국에도 고려 공민왕이 그린 석가출산상이 조선 중기까지 청주 흥덕사에 있었다고 용재총화에 전한다. 조선 후기 김홍도도 석가출산도를 그렸는데 지금은 일본 교토의 고려미술관에 소장 중이다.#

싯다르타는 고행림을 나와서 우선 묘지에 흩어져 있던 망자의 수의 조각[73]을 주워 와서 빨아 입었다. 싯다르타는 강가에서 몸을 씻은 뒤 근처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았다. 마침 지나가던 수자타라는 소녀가 이 모습을 보고 우유죽을 공양하자, 싯다르타는 이를 받아 먹고 힘을 차렸다. 남방의 전승에서는 이때 인드라가 석가모니가 먹을 우유죽에 힘을 내는 약을 섞었다고도 한다. 수자타는 마침 싯다르타가 수행하는 우루빌바 마을을 소유한 마가다국의 어느 장군의 열 딸 가운데 막내였고, 그 전부터 싯다르타와 다섯 수행자에게 보리와 삼씨를 제공했다.[74]

목욕을 마친 싯다르타는 지금의 인도 가야 시 교외에 있는 부다가야에 이르러 스바스티카[75]라는 이름의 나무꾼으로부터 그가 베어둔 풀을 얻어다 유명한 보리수 아래에 이르러 나무 둘레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76] 동쪽 아래에 그것을 깔고 앉았다. 지금의 인도 가야시 교외에 있는 부다가야이다.

6. 마왕의 꾐을 물리치다

파일:L'assaut_de_Mara.jpg
싯다르타 앞에 나타나[77]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마라. 2세기 간다라 부조이다.
파일:월인석보.jpg
마왕의 협박을 물리치는 싯다르타. 조선 초기 월인석보에 삽입된 삽화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에 나타난 사탄의 유혹을 이겨냈다는 성경 속의 이야기처럼 석가모니 부처 역시 마왕인 마라 파피야스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린 적이 있다. 숫타니파타의 정진의 경(padhana sutta) 및 석가모니의 전기라고 할 수 있는 《불설보요경》, 《방광대장엄경》에는 보리수 밑에서 석가가 수행할 때 마라가 깨달음을 방해하려 하는 일화가 나오는데 실제 마왕이자 제육천마왕이자 마신이라는 위치에 있는 것에 비하면 치사하고 졸렬하며 정신적으로 약하고 옹졸한 찌질이처럼 나온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틈틈이 수행을 방해해오던 마라 파피야스가 이번에는 자신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싯다르타를 어떻게 곤경에 빠뜨렸고 거기에 어떻게 석가모니가 어떻게 대응하냐 나오는데 불경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공통되는 점은 주로 색(色)을 이용한 유혹, 무력을 이용한 협박, 약속된 권좌를 보장하는 회유 &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는 조롱이다.

이미 싯다르타는 출가했을 때부터 마왕 마라 파피야스의 끊임없는 환속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싯다르타가 막 출가했을 때에, 마왕 마라 파피야스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 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이때 마왕이 나타나 속삭였다.
"왕자여, 어서 궁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가서 때를 기다리시오, 그러면 이 세상 모두가 그대의 것이 될 것이오."
고타마는 소리 높여 꾸짖었다.
"마왕이여, 어서 물러가라. 지상의 모든 것은 내가 구하는 바가 아니니라."
본생경

싯다르타가 고행림에서 6년 동안 고행을 하고 있었을 때도 마라 파피야스는 그에게 고행을 그만 두고 바라문들처럼 불을 섬기고 제물을 바쳐서 공덕을 쌓으라고 유혹했지만 싯다르타는 자신은 자신이 찾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때 마왕 파피야스가 고타마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은밀하고 부드러운 말로 유혹했다.
"당신의 몸은 이미 쇠진해 죽음이 가까웠소. 세간에 생명만큼 소중한 것은 없소. 살아 있어야만 수행도 온전히 할 수 있으리. 당신은 이제 살아날 가망이 천에 하나도 안 되오. 보리도를 얻기는 불가능한데 차라리 브라만과 같이 불을 섬기고 제사를 지내면 손쉽게 공덕을 쌓아 생명을 얻고 큰 과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고타마가 대답했다.
"파피야스여, 탐욕과 진에와 치암의 권속이여. 어둠의 아들아, 그대는 세속의 욕망으로 유혹해 나의 수행을 부수려 하지만 나의 서원은 결코 허물어뜨리지 못하리라. 내 이미 죽음의 고통을 삶과 같이 보아, 죽음의 두려움을 깨뜨린 지 오래이니라. 비록 모든 중생계가 다 멸해 없어져도 나의 서원은 멸하지 않으리. 바람이 강물을 말리게 하듯이 고행을 계속해 살과 피와 모든 진액을 마르게 하리라. 육신을 조복받을수록 안정되는 나의 마음과 정신의 청정함을 보라. 온 육신이 꺼지고 껍질만 남아 기력이 쇠했을 때, 나는 신명을 바쳐서 더욱 정진해 결단코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리라. 나의 서원은 신념으로 뭉쳐 있고 지혜로써 장엄되어 결코 그대가 깨뜨릴 수 없으리라.
나는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패장이 되어 욕된 삶은 살지 않으리라. 명장은 두려움 없이 모든 원적을 깨뜨리나니, 내 이제 목숨을 걸고 너의 군세와 맞서 싸워 기필코 항복받으리라. 너의 군세 중 제일은 탐욕이요, 둘째는 원망이고, 셋째는 굶주림과 춥고 더움이며, 넷째는 애착이고, 다섯째는 권태와 수면이며, 두려움과 공포는 그 여섯 번째 군세이다. 일곱째 군세는 의심이요, 여덟째는 진에와 분노, 아홉째는 시기와 질투이고, 어리석고 무지함이 그 열 번째이며, 열한 번째는 교만과 허영이고, 열두 번째는 비난과 질시이다. 파피야스여, 내 이제 너희 군세들을 보매 묘한 지혜의 군사로써 쳐부수어 남김없이 항복받으리라."
불본행집경[78]

고행과 현인들과 물음으로 계속해서 사색을 나아가던 싯다르타가 극단적인 고행을 그만두고 보리수 밑에서 앉아 선정에 들어서 드디어 대오각성 일보직전에 이르자 미간의 백호상에서 광휘가 일어나 온 천계를 뒤덮어 마라가 거하는 타화자재천에까지 이르러서 마라의 궁전이 박살나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렀다.

이때 마라 파피야스는 스물두 가지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마라의 궁전이 무너지고 일족에게 배신당하는 내용이었다. 악몽을 꾸고 깨어나자 마라 파피야스는 아들들과 딸들을 모아서 싯다르타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토의했다. 마라 파피야스의 아들 1천 명 중 5백 명은 백조, 5백 명은 흑조로 각기 오른쪽과 왼쪽에 앉았다. 오른쪽의 백조 아들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될 싯다르타를 이길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가 포기합시다."라고 말했지만 왼쪽의 흑조 아들들은 "우리 군세로 총공격하면 질 염려가 없습니다."라며 반대하여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라의 자녀들 중 첫째인 사르타바하(Sārthavāha)라는 아들은 아버지는 결코 싯다르타를 이길 수 없을 테니 싯다르타에게 예를 갖추자고 건의하지만, 마라는 그 말을 듣지 않고 흑조의 편을 들어서 싯다르타를 방해하기로 했다.

먼저 마라는 백조 흑조 아들들의 여동생들인 색기가 있고 미녀인데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미모의 세 딸[79]을 시켜 싯다르타를 유혹하게 했고 아버지의 분부대로 세 딸들은 하늘하늘한 옷으로 서로 장난치며 싯다르타 앞에서 서른두 가지 교태를 떨면서 아양을 떨다가 옷을 하나씩 벗으며 알몸이 되어 "남자는 즐길 때가 있는 법이니, 지금 안 즐기면 언제 즐기겠어요?"라고 유혹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유혹에 넘어가긴 커녕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떠나거라. 뱃속에 똥밖에 안 들어있는 것들에겐 관심없다."라며 독설을 날리곤 이들을 무시했다. 이런 모습에 오히려 마라의 세 딸들은 도리어 석가모니에게 반해버리고 꽃을 바쳐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대신 사과드리옵니다."라고 용서를 구한 다음 오히려 자기 아버지한테 가서 "그분은 반드시 생사의 속박을 초월해 모든 중생을 구제해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 쓸데없는 반항일랑 그만 두소서. 비록 수미산이 무너지고 일월성신이 떨어진다 해도 그분은 꿈쩍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며 말했다.[80] 안 그래도 상황을 보던 중 딸들이 석가모니에게 반한 걸 보고 화가 난 마라인데 두 딸은 물론이고 가장 예뻐하는 막내딸 라가까지 언니들을 따라 이러니 마라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 다음엔 마라가 자신이 거드린 18억 군대를 총동원하여 석가모니를 협박하였으나 오히려 석가모니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십바라밀행을 검과 방패 삼아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그 군대가 역으로 와해되었고, 마라 자신이 싯타르타의 옛 종자로 위장해서 '왕국이 망하고 아쇼다라 비가 겁탈당했다.'고 거짓으로 전하여 마음을 흔들어보려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고 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마라가 회유책으로 '그래, 네가 인간계에서는 그나마 우월한 자다. 그런데 그런 너도 경지에 이른 자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깨우치고 또 욕망을 억누르고자 고행 속에서 몇 년 굴러도 열반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너도 이렇게까지 해서 안 되었으니 열반의 경지라는 것은 결국 말뿐이다!' 하는 내용으로 꼬드겼으나 역시 반박당했다고 전한다.

이런 공작이 모두 실패마자 마라가 직접 나타나서 "수행을 그만두어 부처의 자리를 포기하면 너는 틀림없이 전륜성왕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정복하고 온갖 세상의 부귀영화와 쾌락을 누릴 것이며 오히려 전륜성왕의 덕으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석가모니가 평소 주장하고 다닌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꼬셨으나[81] 싯다르타는 역시 넘어가지 않는다.

결국 최후의 회유마저 먹히지 않자 마라는 "붓다가 되어 해탈을 하겠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 줄 아느냐. 차라리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황제가 되는 것이 어떠냐.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 못 하겠으면 나의 마왕의 자리와 권능도 줄테니 깨달음을 포기해라." 하고 제안했지만 싯다르타는 "내가 왕자로 있으면서 웬만한 쾌락은 다 누려봤고 전생에서도 다 누려봤지만 부질없는 짓이더라. 마라 파피야스, 지금 욕계의 지배자가 된 것이 전생의 단 한 번의 공덕 덕분인데[82] 그 권세로도 욕망과 번뇌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고 타일렀다. 마라가 "나와는 달리 초라한 네가 무슨 깨달은 자냐? 그리고 니가 무슨 공덕이 있고 그걸 누가 증명하겠느냐?" 하고 힐난하자, 재차 싯다르타가 "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생애를 두고 내 몸이나 소유물을 가리지 않고 몇 번이고 중생에게 베풀어왔기에 이제 붓다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단 한 번의 공덕으로 욕계의 지배자가 된 너와도 비교도 될 수 없다." 하자 마라는 "내가 공덕이 있음은 너도 인정했고[83] 나의 부하들도 인정했다. 그럼 네가 전생에 쌓았다는 공덕이 부처에 이를 만큼인 줄은 어떻게 증명하겠느냐?" 하고 비꼬았는데[84] 싯다르타는 "여기 이 땅이 나를 증명할 것이다."라고 하며 오른손으로 땅을 짚었다.[85] 여기서 유래한 불교의 수인(手印)이 바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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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본존불. 이 불상이 취하는 자세가 바로 항마촉지인이다.[86]
만물의 의지처인 이 대지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것에 공평한 이 대지가
나를 위해 진실한 증인이 될 것이다.
자아, 나를 위해 증언해 다오.
此地能生一切物 이 대지는 일체의 사물들을 세상에 내고
無有相爲平等行 어떤 상(相)도 없이 평등을 행하도다.
此證明我終不虛 이것이 나를 증명한다면 헛말이 아니리니,
唯願現前眞實說 부디 이 앞에 나타나 진실을 말하라.
불본행집경 권29 마포보살품(魔怖菩薩品)하

이에 온갖 장식을 몸에 걸치고 수많은 대지의 여신들을 권속으로 거느린 대지모신 수타바라가 나타나서 싯다르타가 앉은 자리 가까이에 땅바닥을 뚫고 몸을 절반만 드러낸 채,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저희가 증인이 되겠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인간계는 물론 신들의 세계에서도 최고의 권위자이십니다."라며 싯다르타와 그가 거쳐온 무수한 전생의 선업에 대해 증언하였고, 동시에 마라 파피야스를 꾸짖었다.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꽃잎이 휘날렸다고 한다. 마라는 결국 버로우 해서 사라져 버렸다고도 하고 천지의 진동에 놀라 기절해버렸다고도 한다.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에서 좌선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은 여러 불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도에 앞서 항마에 대한 이야기가 먼저 나오는 것이 북방불교나 남방불교 모두 내용이 일치하지만, 중아함의 라마경이나 여기에 해당하는 팔리어 사본인 팔리어본 중부경전 제26경처럼 항마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깨달음에 대한 것만을 간결하게 설명하는 경전도 있다. 한역 중아함의 라마경이나 팔리어본에는 마을 처녀의 공양이니 강가에서의 목욕이니 길상초 보시니 보리수나무니, 마라 파피야스 이야기도 전혀 언급이 없어서 이러한 간단한 기록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마라 파피야스와의 싸움에 대한 것은 전기 작가의 창작이거나 후세에 가필된 것이라 단정하는 사람도 있다. 와타나베 쇼코는 팔리어 성전(남전대장경)이나 한역 아함 등은 보통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석가모니를 설명하려는 경향이 짙다며 어느 특정한 교파의 경전에 없다고 후세의 첨가나 창작이라고 판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다.[87]

석가성도일을 대승불교에서는 12월 8일로 기념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바이사크하(4~9월)의 보름 날 밤, 그러니까 고타마 싯다르타가 서른다섯(35세)이 되던 날 드디어 붓다가 되었다고 한다.[88] 초경[89]에 그는 네 단계의 선정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정신을 물질적 관심사에서 완전히 초탈하게 만들어 ’완전하게 맑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멸수상정)’에 이르렀고, 중경에는 천안통을 갖추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전생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고통이 끝없이 반복되는 과정을 훤히 꿰뚫어보게 되었다. ‘완전한 깨달음’은 후경에 이루어졌다. 이제 십이연기를 완전히 꿰뚫게 된 보살은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었다. 팔상도의 다섯 번째 그림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은 진리란 고, 집, 멸, 도의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와,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이끌어주는 팔정도였다. 고통을 없애는 팔정도의 여덟 가지는 완전함을 성취하는 여덟 가지 방법을 상징한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가 행한 두 번째 위대한 기적이었다. 마라의 간특한 방해 때문에 잠시 물러가 있던 신들은 이저 붓다에게 돌아와 성도를 축하하면서 그에 합당한 이적과 경이를 펼쳤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우친 이들 진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의 근본으로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붓다만이 가르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 대중들에게 윤회를 끝내는 길을 계시하는 이 교리는 그 방법론으로 중생들에게 죄를 짓지 말고 선업을 행하고 정신을 맑게 가지고 선정(명상)을 함으로써 옳은 지식에 도달하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하여 결국에는 윤회전생의 사슬을 끊고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6.1. 깨달음을 전파할 것인가, 말 것인가

Anekajāti 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Gahakārak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生死有無量 往來無端緖 求於屋舍者 數數受胞胎
많은 탄생을 되풀이 하며
집 짓는 자를 찾아서 방랑했건만
나는 아무런 보람이 없었다.
거듭되는 탄생은 고통스럽다.
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ṃ na kāhasi
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auṭaṃ visaṅkhitaṃ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以觀此屋 更不造舍 梁棧已壞 臺閣摧折 心已離行 中間已滅
집 짓는 자여!
마침내 나는 너를 보았다.
너는 이제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네 모든 서까래는 부러졌고,
마룻대는 부셔져 형체를 모르게 되었고,
마음은 갈망(渴望)의 끝에 도달하였다.
담마빠다(법구경) 153, 154번 게송 영문 번역본[90][91][92][93]

원시불교 설화는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와 그 근처에서 7주를 보냈다고 전한다. 그동안 그는 선정과 수행을 계속했는데, 7주 동안을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를 돌면서 생각한 것은 자신이 얻은 이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할 것인가, 아니면 전하지 않고 석가모니 부처 자신만이 담아둘 것인가였다.

첫째 주는 보리수 밑에서 보냈는데 , 이것은 왕들이 자기를 신성하게 만들어준 장소를 1주일 동안 떠나지 못하게 한 법(펠리오자) 때문이었다. 그는 보리수 밑에서 과거불들처럼 '연기설'을 주제로 한 명상을 했고, 7일째 되는 날 밤에 12연기[94]를 명료하게 사유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주에는 신들에게 성도를 고했으므로 보리수나무의 북동쪽인 부다가야로 가서 1주일 내내 선채로 명상을 했다. 그리고 아자빨라 나무 아래에서 어느 바라문에게 '올바른 바라문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법하였다고 한다. 세 번째 주에는 이곳에서 성도한 곳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했고[95] 네 번째 주는 교리에 대한 정리와 앞으로 자신이 할 일에 대한 명상과 사색으로 보냈고[96] 다섯 번째 주도 역시 명상을 하며 보냈는데, 석가모니 부처는 보리수로 되돌아갔다.

석가모니 부처는 다섯 번째 칠일에 무찰린다 호수 옆의 무찰린다 나무 밑에서 또 다시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작스런 추위와 비가 몰아치자 호수에 살던 나가(용) 무찰린다가 석가모니 부처에게 다가와 자기 몸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몸을 일곱 번 친친 감고 머리를 꼿꼿이 세워 비와 추위를 막아주었다고 한다.[97] 칠일이 지나자 비가 그치고 날씨는 온화해졌다. 무찰린다는 석가모니 부처를 감았던 몸을 풀고 홀연히 뱀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젊은 바라문의 모습으로 변하여 석가모니 부처에게 합장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는 나가 무찰린다에게 간명하게 삶의 행복에 대해 설명하였다. #
여섯 번째 칠일에 석가모니 부처는 라자따야나 나무 밑으로 갔다. 팔리어 삼장에 의하면 이날 상인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 형제[98]가 지나가던 마차에서 내려 석가모니 부처에게 음식을 공양했다.[99]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이들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공양을 바친 두 상인은 석가모니 부처와 그의 법에 귀의하여 출가하게 되었고,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다고 한다. 두 형제는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 이 유물을 탑에 모셨다고 한다.[100] # 또한 이때 사천왕이 나타나 금과 은으로 만든 바리때 네 개를 석가모니 부처에게 바쳤지만 석가모니 부처는 받지 않았고, 이에 사천왕은 다시 돌로 만든 바리때 네 개를 바치자 석가모니 부처는 그 네 개의 발우를 겹쳐서 하나로 만들어서 사용했다고 한다. #
내가 증득한 이 법은 매우 깊어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것이 마치 미세한 먼지와도 같아서 살필 수 없고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하거나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스승도 없었고 방편에 능숙하거나 지혜로운 분이 나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나 홀로 이 법을 증득하였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저 아라야(阿羅耶)[101]에 집착하고 아라야를 좋아하고 아라야에 머물며 기뻐하고 좋아하며 그것에 집착한다.
마음에 탐욕이 많은 까닭에 이곳을 보기 어려우니 그곳이란 이른바 12인연(因緣)이다. 이 12인연이라는 곳[處]이 있어 서로 나는 것인데, 이곳을 일체 중생들은 보지 못하고 오직 부처만이 능히 아는구나. 또 모든 곳을 의심하는 길은 버리기 어려우나 온갖 삿된 길을 모조리 남김없이 멸하였고, 사랑에 물든 곳에 탐욕을 다 여의어 적멸 열반을 얻었다. 내 이제 이런 법을 저들에게 말하고자 하지만 저 모든 중생들은 이 법을 증득하지 못하리니, 내 한갓 수고로이 말만 허비할 뿐이리라.
불본행집경 권33 범천권청품(梵天勸請品) 하
부처님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 대인(大人)의 법을 부리는 까닭에 비록 큰 자비가 있다 해도 청하지 않으면 말씀하지 않는다. 만일 청하지 않았는데도 말씀했다면 외도(外道)에게 조롱 받을 것이므로, 처음에는 반드시 청함을 기다리는 것이다. 또한 외도들은 범천을 숭상하는데, 범천이 스스로 부처님께 청하면 곧 외도의 마음도 굴복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팔리어 <앙굿따라 니까야>나 한역 <잡아함경>, <불본행집경> 등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이 깨달은 가르침이라는 것에 대해서 세상에 전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깨달음의 상태를 사람들에게 말한다 하더라도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험담을 하거나 다른 구업을 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번뇌에 물든 이들은 어렵게 얻은 것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고,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석가모니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으로 조용히 열반에 들려고 했는데, 석가모니 부처 앞에 범천(브라흐마)[102]가 나타나서 석가모니 부처를 향해 그의 깨달음을 세상으로 나아가 전파할 것을 권청(勸請)[103]하였다고 한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선서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눈에 먼지가 적게 들어간 중생들이 있습니다. 법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파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을 들으면) 그들은 법에 대해 구경의 지혜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상윳따 니까야』 제1권 485-492쪽
지금 이 세계 중생들은 귀의할 데가 없어 선(善)이 다 무너졌습니다. 오늘 세존께서 이렇게 위없는 법보를 증득하고 보셨으면서도 홀연히 아란야에 들어가 기꺼이 설법하려 하지 않으시니, 저는 이제 위없는 세존께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고요히 머물지 마시기를 권청합니다.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자비로 법을 설하소서. 원하옵건대 수가타(修伽陀)[104]시여, 불쌍히 여기시어 법을 설해 주소서. 지금 모든 중생들은 먼지와 때가 적으며 모든 근(根)이 무르익었고, 번뇌가 엷으며 근기(根機)가 예리하여 쉽게 교화될 수 있지만 법을 듣지 못한 까닭에 자연히 줄어듭니다. 여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법의 요체를 설하셔서 세존의 법상(法相)을 증득해 알게 하옵소서.
불본행집경 권33 범천권청품(梵天勸請品) 하

상윳따 니까야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경'에는 범천뿐 아니라 제석천도 나타나서[105]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며 석가모니 부처에게 세상에 나아가 전법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빨리어) Uṭṭhehi vīra vijitasaṅgāma
pannabhāra anaṇa vicara loke,
Cittañca te suvimutataṃ
cando yathā paṇṇarasāya rattinti.
보름날 밤에 떠오르는 달처럼
그대의 마음은 완전히 해탈되었으니,
일어서소서 영웅이여, 전쟁의 승리자여, 세상을 거니소서.
짐을 놓아버린 님이여, 허물없는 님이여.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의 앞에 네 번째 칠일부터 다시 나타난 마라 파피야스는 유혹을 멈추지 않았다. 브라흐마가 열심히 "깨달은 이가 나오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입니다. 붓다께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라고 설득하는 옆에서 마라는 옆에서 "세상 인간들은 고타마 너의 생각대로 네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만큼 현명한 놈들이 아니니깐 어서 너 혼자 열반의 경지에 올라라"[106]라고 설득했지만, 브라흐마가 다시 "번뇌에 적게 물든 이들은 쉽게 당신의 법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득해, 석가모니 부처는 브라흐마의 권청대로 중생을 구하는 법의 바퀴를 굴리겠다고 다짐했고, 이번에도 마라의 설득이 먹히지 않았다.[107][108]

상윳따 니까야에 따르면 보리수로 돌아온 석가모니 부처는 중생들에게 필요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궁리했는데, 다시 범천 사함빠띠가 그의 앞에 나타나 법을 스승으로 삼아 망설임을 극복하라고 권유했다. 불본행집경에 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있던 석가모니의 눈에 연꽃이 가득한 연못이 들어왔는데, 어떤 연꽃은 물속 너무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어서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어떤 연꽃은 수면위로 올라와 활짝 꽃을 피웠고, 어떤 꽃은 수면위로 올라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석가모니 부처는 첫 번째 꽃은 절대로 피지 못할 것이고 두 번째 꽃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며 세 번째 꽃은 머지않아 꽃을 피울 것임을 알았고, 연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세 종류의 연꽃처럼 오류와 잘못된 가르침의 노예가 된 사람, 진리를 발견한 사람, 아직도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어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과 이미 진리를 얻은 사람들에게는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아직 갈길을 정하지 못하고 조금만 도움을 주면 구제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들, 이들을 대상으로 설법에 나서기로 석가모니 부처는 결심했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109]들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110]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피로해질 뿐이라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았다.
『상윳따니까야』 제1권 485-492쪽
我今開甘露味門 나 이제 감로법의 문을 여노니,
若有信者得歡喜 누군가가 믿기만 하면 기쁨 얻으리.
於諸人中說妙法 모든 사람 가운데 묘한 법 설함은
非惱他故而爲說 남을 괴롭히려 함이 아니라네
『대지도론』 1권

그러자 사함빠띠 범천은 '나는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도록 기회를 만들어 드렸다.'라고 여기고, 석가모니 부처를 향해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 그곳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일본의 불교학자 미야사카 유소우(宮坂宥勝)는 이 범천권청에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풀이했다. 첫째로 바라문교의 최고신인 브라흐마(범천)가 석가모니 부처에게 설법을 간청한 것은 바라문교의 가치 체계가 변경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고,[111] 석가모니 부처가 범천의 간청을 받고서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라고 외친 것은 만인을 향해 공개적으로 가르침을 펴겠다는 공개성의 표현이며,[112] 설법을 하지 않겠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모습은 '신비와 직관을 체험하는 세계', 세상에 나아가 가르침을 펴겠다고 선언한 것은 자신이 체험한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는 공개의 세계를 말하며, 설법 이전(밀교)과 설법 결심 이후(현교)로 표현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

7. 초전법륜(初轉法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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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체를 아는 사람.
무엇에도 더럽혀짐 없는 사람.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와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
스스로 체득했으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 없고, 같은 이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이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
나 홀로 정각(正覺) 이루어 고요롭도다.
이제 법을 설하려 카시(迦尸)[113]로 가거니
어둠의 세상에 감로(甘露)[114]의 북을 울리리라.
『방광대장엄경』 11권. 득도 후 처음으로 만난 우파카[115]라는 자의 질문에 답하여.[116]

깨달음을 얻은 직후 석가모니는 예전에 수행에 도움을 주던 수행자 두 사람을[117] 떠올렸지만, 신통력으로 살피니 애석하게도 두 사람이 7일 전, 그리고 전날 밤(사흘 전이라고도 한다)에 죽었음을 알았다. 그는 직후 자신과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를 떠올렸다. 각기 이름을 콘단냐(Kondanna)[118]·아사지(Assaji)[119]·마하나마(Mahanama)[120]·밧디야(Bhaddhiya)[121]·바파(Vappa)[122]라고 하는 이들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처음 싯다르타가 출가했을 때에 아버지 숫도다나가 아들을 호위하라고 파견했다는 설이 있고, 혹은 싯다르타의 인간됨을 보고 따랐던 그의 수행 시절 동료였다고도 전한다. 앞서 언급한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을 보고 그들은 "세속의 음식을 받아먹다니 저놈이 결국 타락했구만"이라고 욕하면서 그를 떠나 사르나트(녹야원)로 가서 따로 수행을 하였다.

보리수를 떠난 석가모니는 가야에서 길을 서북쪽으로 잡고 로히타바스투, 울루빌파칼파, 아나라, 사라티프라 등을 거치며 강가 강(갠지스 강)에 이르렀는데, 사공은 석가모니의 허름한 자태를 보고 뱃삯이 없으면 못 건네준다고 대답했고[123] 이에 석가모니는 그 자리에서 공중으로 떠서 강을 건넜다고 한다. 나중에 이를 사공으로부터 전해들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은 '앞으로는 출가한 수행자들은 뱃삯 받지 말고 무상으로 건너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석가모니가 보리수에서 녹야원으로 가는 길에 거쳤던 가야부터의 지명은 팔리어 경전에는 나오지 않으며, 갠지스 강에서의 설화도 《불본행집경》에 실려 있는 것으로 팔리어 경전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와타나베 쇼코는 출가수행자에게 뱃삯을 받지 않게 된 역사적 사실의 기원을 밝힌 설화의 한 유형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예수가 호수 위를 걸었다는 설화에 견주어 '현실에서 이상으로 건너갔다.'는 상징적 예화로 해석하였다.[124] 한편 법륜 비구는 처음 석가모니가 출가할 때에 강을 넘는 것이 속세의 모든 것을 뛰어넘었음을 상징하듯 성도 이후에 또 한 번 강을 건넜다는 것은 다시 속세로 돌아가 그곳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해석을 제기하였다.[125]

사르나트에 석가모니가 막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는 석가모니를 떠나버린 다섯 수행자가 수행 중이었다. 그네들은 석가모니를 보고 '수행이 힘들다고 타락한 놈 따위, 발 씻을 물이나 차려주고 내버려두자.'고 무시하기로 서로 약속했는데[126] 석가모니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자신들도 모르게 석가모니를 향해 엎드렸고, '자리에 앉든 밥을 먹든 제가 알아서 하게 놔두자.'던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들이 먼저 자리를 펴서 석가모니가 앉을 자리를 만들고 발을 씻어주려 하거나 석가모니의 발우를 받아 스승의 예를 갖추며 알아서 저절로 석가모니를 맞이하였다고 한다.[127]
이때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128] 고타마시여, 신색과 피부가 대단히 좋고 청정하오며 면목이 원만하옵고 또 광명이 족하오며 모든 근이 청정하나이다. 장로 고타마시여, 이제는 좋고 묘한 감로를 만났거나 청정한 감로의 성도를 얻었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나를 여래(如來)[129]라고 부를 것이요, 고타마라고 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미 감로의 도를 발견했고, 나는 이제 감로의 법을 증득했기 때문이니라. 나는 곧바로 부처로서 일체지를 완전히 갖추었으며 고요하고 번뇌가 없어서 마음에 자재로움을 얻었느니라."
이때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다섯 수행자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 고타마시여, 예전에 6년 간의 극심한 고행을 하면서도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하지 못했거늘, 모든 성인이 수행했던 그 같은 길을 증진하지도 못했거늘, 하물며 장로께서는 지금 육신의 욕망을 좇아 나태를 내어 선정을 잃고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는데 어찌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하십니까?"
그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자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는 욕망에 끌리지 아니하며 선정을 잃지도 않고 또한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지도 않다. 그대들은 스스로 알리라. 내 지난날 사람들에게 망령되이 거짓을 말한 것이 있는가? 또한 일찍이 상호가 이처럼 청정하고 원만히 빛나던 때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내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따르고 청정히 수행한다면 곧 해탈락을 얻으리라.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이제 조용히 법을 들을 귀를 준비하라."
《불본행집경》 권37상 전묘법륜품(轉妙法輪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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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의 첫 설법인 초전법륜을 묘사한 간다라 부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다.
파일:안압지 출토 금동판 불상 일괄3.jpg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발굴된 금동판 불상. 가운데 부처가 하고 있는 손 모양은 전법륜인(초전법륜인)이라고 해서 초전법륜을 행할 때의 수인으로 전해진다.

이때 석가모니가 다섯 수행자들을 향해서 설법한 내용이 오늘날 불경 가운데 《초전법륜경》(담마짝가)이다.

불상 가운데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 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의 불상의 손 모양을 가리켜 전법륜인(轉法輪印)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가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 사성제, 팔정도 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들을 설법할 때 취했다는 자세에서 유래한다. 이 초전법륜의 자리에서 석가모니는 유명한 고집멸도와 팔정도를 가르쳤고, 다섯 제자 중 아즈나타 카운디니야가 처음으로 가르침의 오묘한 뜻을 파악해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아라한'이 되었고, 나머지 네 제자들은 닷새 후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설교를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를 보고 "이로써 세상에는 아라한이 (나까지) 6명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의 시작이었고, 승가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수행자들과 함께 우루벨라 지역으로 갔다. 이곳에 조로아스터교를 전파하는 수행자 카사파 삼형제가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카사파 삼형제의 맏이인 우루빌바를 찾아가서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했고, 우루빌바는 화룡이 있는 방으로 석가모니를 보냈고[130] 석가모니가 들어 온 것을 본 화룡은 노해서 독 연기를 내뿜었지만 석가모니는 용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말고 신통한 힘만 빼앗자는 생각에 화계삼매라는 선정의 경지에 들어서 화룡의 독기에도 해를 입지 않고 화룡을 순하게 만들었다. 바깥에서 석가모니가 있는 화당은 온통 벌겋게 변해 있었으므로 멀리서 보던 수행자들은 "그 훌륭한 사문도 결국 용 때문에 사망하는가"라며 안타까워했는데, 다음날 석가모니가 멀쩡하게 걸어나와서 신통력을 잃은 용을 바리때에 담아 카샤파에게 보였고, 우루빌바는 석가모니의 법력에 놀라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131] 그의 두 아우인 나디와 가야도 형의 뒤를 따라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새로 제자가 된 1천 명을 거느리고 라자그리하로 가던 도중에[132] 가야쉬르샤(가야 산)에서 '타오르는 불의 법문'이라는 제목으로 설법을 행했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불타고 있다.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비치는 형상이 불타고 있다.
불에 의한 인식도 불타고 있다. 눈과 그 대상과의 접촉도 불타고 있다.
눈이 접촉하는데서 생기는 감수(感受), 즉 즐겁고, 괴롭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들도 불타고 있다.

왜 불타고 있는 것일까. 탐욕의 불, 노여움의 불, 어리석음의 불도 타오르고 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불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관찰할 수 있는 현명한 제자들은 눈이나 형상, 그 접촉이나 감수,
그리고 귀나 코, 혀나 몸이나, 마음에 대해서도 모두 하잘 것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되면 집착에서 떠난다. 집착을 버리면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인식이 생기고 생존의 밑바닥은 이미 다 없어진다.

청정한 수행은 이미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윤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알게 되는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35.28)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Ādittapariyāyasutta)[133]《잡아함경》 권8 197번째 시현경(示現經)

라자그리하에 도착한 석가모니는 빔비사라 왕에게 환대를 받았고, 왕은 석가모니를 위해 벨루바나에 사원을 지어주었다. '베누바다 비하라'라는 이 사원은 훗날 한자문화권에 죽림정사(竹林精舍)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곳을 방랑하며 많은 제자들을 받아들인 석가모니는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제가 10명을 중용했는데, 이들을 십대제자라고 불렀다. 십대제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던 인물인 사리풋다와 목갈라나는 죽림정사를 기증받고 난 뒤에 처음으로 석가모니의 제자로 들어온 이였다고 한다. 당대에 살인마로 악명이 높던 앙굴리말라(아힘사카)를 교화시켜 불문에 들게 하기도 했다. 석가모니의 뛰어난 인품에 반하여 그를 돕고자 사찰을 짓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중 유명한 이들이 기원정사(기수급고독원)를 지은 제타 태자와 수달다 장자이다.

다만 사리풋다와 목갈라나처럼 석가모니에 의해 제자를 빼앗기다시피 한 당시의 다른 '외도'의 무리들이 석가모니 부처를 음해해 죽이려는 시도도 잇따랐다. 어느 브라만의 딸 친차란 처녀를 꾀어서 석가모니 부처가 자신을 건드려서 애를 배게 했다는 소문을 띄우거나, 같은 브라만의 딸 순다리란 처녀를 몰래 죽여서 기수급고독원 가까운 곳에 그 시체를 묻어놓고 석가모니 부처가 죽였다고 음해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마다 천신들이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기 위해 도움을 주었는데 쥐를 보내 친차의 배에 묶여 있던 바가지끈을 쏠게 하여 바가지가 드러나게 하여 친차의 말이 거짓임을 밝히고 순다리의 영혼을 불러들여 석가모니가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도움에도 음해는 계속되었다. 특히 내부문제도 만만치 않았는데 가장 위협적이었던 것은 석가모니의 사촌동생인 데바닷타[134]였다. 과거 석가모니에게서 교단을 넘겨받으려다 석가 왈, "수석제자들인 사리불과 목건련도 나에게 교단에 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데, 너는 어찌 그리 욕심을 부리는 것인가?"라고 엄숙하게 말하여 실패하자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교단을 분열시켰으며, 자신을 따라 분파했던 신자들이 사리풋다와 목갈라나의 설득으로 다시 석가모니 부처에게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석가모니를 죽이려고 돌을 벼랑 위에서 굴리거나[135] 술을 먹인 코끼리를 석가모니에게 돌진시켜 죽이려 들기도 했고, 마지막에는 데바닷타 자신이 손톱에 독을 묻혀서 석가모니 부처를 할퀴어 죽이려다 손의 상처를 간과해 독이 전신에 퍼지고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코살라국의 파세나디 왕 역시 석가모니 부처에게 귀의했지만, 그 파세나디 왕의 아들 비루리 왕은 석가모니 부처의 나라인 카필라바스투를 쳐서 샤카 족을 몰살시켰다. 석가모니 부처는 비루리 왕의 군대를 세 번이나 막아서면서 돌려보냈지만,[136] 네 번째로 비루리 왕이 카필라바스투를 공격하려 군사를 일으켰을 때는 그것이 샤카 족이 치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과보임을 인정하고 더 막지 않았다. 즉 석가모니 부처는 살아서 자신의 나라가 무너지고 샤카 족이 몰살당하던 것을 목도해야만 했다.

증일아함경 등견품에 그 내막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석가모니가 막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당시 코살라 국에서도 막 새로 왕위에 오른 파세나디 왕이 카필라바스투에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 국은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경멸하던 샤카 족은 말리카라는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루타카였다. 비루타카가 아직 왕자일 적에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했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앉을 자리에 앉았다가 "종년의 자식이 감히 어디를 앉아?"라며 그를 흠씬 때려서 내쫓자 앙심을 품었고[137] 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카필라 국을 침공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세 번에 걸쳐 비루타카의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다시 군대를 보내자 네 번째는 카필라 국의 멸망은 결국 샤카 족이 치를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치러야 하는 과보임을 알고 슬퍼하면서도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증일아함경에는 포로로 잡은 샤카 족을 일일이 죽이느라 시간이 많이 든다며 지면에 머리만 나오게 묻어놓고 코끼리를 풀어 밟아 죽이게 했고, 도망쳤던 카필라 국 여자 5백 명도 니구류 원에서 비루다카에게 붙잡혀서 "종년의 자식에게 수청 들 생각 없다"며 욕하자 더욱 빡쳐서 여자들의 손발을 모두 잘라서 구덩이에 처넣으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죽인 샤카 족의 수가 9990만 명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의 사촌 동생으로 카필라바스투의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는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비루다카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오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자신의 상투를 붙잡아 매어 둔 채 익사해 있었다고. 비루타카 왕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증일아함경에는 석가모니가 비루다카에게 죽은 기타 태자[138]와 샤카 족의 여인 5백 명을 위해 설법을 베풀고 난 뒤 "비루다카는 앞으로 이레 뒤에 죽을 것이며, 나는 오늘 이후 다시는 니구류 원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곳을 떠났다. 비루다카 왕은 그 말을 듣고 이레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다가 이레가 지나서야 안심하고 병사와 시녀들을 데리고 강가에서 놀다 그곳에서 묵었는데, 그날 밤 갑자기 비구름이 일어나고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쳐서 강가에서 묵던 비루다카 왕과 그 일행은 모조리 물에 휩쓸렸고,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139][140]

79세가 되던 해 그는 또 한 번 슬픈 일을 겪었으니, 십대제자 중 제일 먼저 제자가 된 사리풋다목갈라나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것도 목갈라나는 불교 교단을 견제하던 다른 수행자나 반대파 교단 세력에게 집단 린치를 당해 죽었다. 잡아함 42권 <순타경(純陀經)>을 보면 사리풋타는 마가다의 나라 마을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는데, 석가모니 부처는 이들 두 제자의 사망을 매우 안타까워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지금 가지가 없는 큰 나무와 같다.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열반에 든 것은 큰 나무에 가지가 잘려나간 것 같다. 대중들을 살펴보니 마치 텅 빈 것 같구나. 그들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있었으면 이렇게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증일아함 18권 사의단품(四意斷品) 제9경

8. 열반의 길

파일:쌍림열반도.jpg
조선 전기에 그려진 쌍림열반도. 열반에 드는 장면에 이르러 슬퍼하는 제자들과, 석가모니의 다비 이후 사리를 거두는 사부대중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파일:仏涅槃図.jpg
남송 시대 화가 목신충의 불열반도(仏涅槃図).[141]

석가모니의 사망은 석가모니 부처의 마지막 순간이자 그의 인생과 모든 설법을 총망라하는 클라이막스이기도 하다.[142] 다만 '열반'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열반'이라는 이름이 붙은 경전 즉 열반경(대반열반경)이라는 경전만을 놓고 본다면 상좌부 불교에서 전해지는 열반경(디가 니까야 16)은 대중부 불교에서 전해지는 열반경과 달리 석가모니 부처에게 마가다국의 아자세사트루 왕이 대신 바르사카라를 보내 바이샬리에 거점을 두고 있던 밧지족의 나라를 멸망시킬 방법을 묻는 데서 시작한다.[143] 이때 석가모니 부처는 옆에서 자신을 따르고 있던 아난에게 밧지족의 모습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한다.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묻는 일곱 가지 밧지족의 풍속에 대해서 모두 그렇다고 대답했고, 석가모니는 그때마다 "그러한 풍속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밧지 족에게는 번영이 있을 뿐 쇠망은 없을 것이다."라고 대답해 돌려보냈다.[144]

사실 석가모니 부처가 밧지족을 치려는 아자세사트루 왕의 자문 요청을 정중하게 돌려보낸 것은 석가모니 자신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종교 지도자로서도 온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석가모니 자신이 바이샬리라는 도시를 마음에 들어했고,[145] 이 바이샬리가 다름 아닌 밧지족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이후 석가모니는 같은 내용의 설법을 영축산에서 행한 뒤, 영축산을 떠나서 죽림정사로, 다시 파릉성(巴陵弗城)[146]으로, 다시 발지국의 구리촌(拘利村)으로, 나다촌(那陀村)으로, 그리고 비사리국(毘舍利國) 즉 바이샬리로 왔다. 이곳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유녀 암바팔리로부터 망고나무 정원을 희사받아(암라수원정사) 암바팔리에게 설법을 행한다.

법현이 번역한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죽음을 석 달 앞두고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하안거를 보내고 건다 마을로 가려던 석가모니 부처가 바이샬리를 돌아보며 조용히 웃었는데, 옆에서 이를 본 아난다가 이유를 묻자 석가모니 부처는 "내가 저 바이샬리를 보는 것이 지금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불경에서는 이때 석가모니 부처가 바이샬리를 돌아보던 모습을 상왕회수(象王廻首) 즉 '코끼리가 자신이 태어난 숲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것 같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바이샬리를 떠난 석가모니 부처가 다시 돌아온 것은 마가다 국의 죽림총(죽림정사)이었다.

그때 석가모니 부처는 온 나라를 휩쓴 흉년으로 제대로 공양도 받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곡식이 귀해져서 탁발도 어렵게 된 가운데 안거가 다가오자 석가모니 부처는 마가다 안에 있는 비구들에게 "이 나라에 흉년이 들어 구걸하기가 매우 어렵다. 너희들은 각각 무리를 나누어 아는 곳을 따라 비사리나 발지국으로 가 그곳에서 안거(安居)하도록 하라. 그러면 궁색한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조언해 흩어 보낸 뒤, 자신은 아난과 함께 그대로 마가다에 머물렀다. 그리고 하안거 동안에 석가모니 부처는 병을 얻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자기의 섬에 머물고 자기에게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법의 섬에 머물고 법에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해당 발언은 디가 니까야 16경 <대반열반경>과 26경 <전륜성왕사자후경>에서 전하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명한 가르침이자 석가모니 부처의 유언으로 알려져있다. 보통 한역(漢譯)으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法燈明 自歸依 法歸依)으로 옮기거나 현대한국어로는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라고 번역한다. 형식적으로 a-c와 b-d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atta dīpā | dhamma dīpā가 대구를 이루고 atta saraṇā | dhamma+saraṇā가 대구를 이루는 것. 문장 전체의 핵어(head)가 vihar '살다'로서 전체를 관할하는 것으로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으나 분석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무리하게 번역하지 않고 '디빠'로 옮기는 팔리어 단어 dīpā는, 전통적으로 등불로 번역되었으나 섬으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번역을 취하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와 법을 지침으로 삼으라"는 의미는 동일하다.

a. atta+dīpā vihar+atha
재귀사+'디빠' 살다+순접
"스스로를 '디빠'로 삼아 살고"
b. atta+saraṇā an añña+saraṇā
재귀사+피난처부정어다른 것+피난처
"스스로를 피난처로, 다른 것을 피난처로가 아니라"
c. dhamma+dīpā
법+'디빠'
"법을 '디빠'로"
d. dhamma+saraṇā an añña+saraṇā
법+피난처부정어다른 것+피난처
"법을 피난처로, 다른 것을 피난처로가 아니라"

자현 비구는 <붓다 순례>에서 해당 발언이 나온 상황을 제시한다. 바이샬리를 좋아해서 생의 마지막 안거도 바이샬리에서 했던 석가모니 부처는 그 무렵 바이샬리를 휩쓴 기근에 그 자신의 노쇠 탓에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명상으로 감관을 제어해 고통을 이기고 기적적으로 회복하였는데[147] 제자 아난다가 "저는 부처님께서 회복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석가모니가 근거를 묻자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아직 교단(상가)와 관련된 후계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스승에게는 사사롭게 쥔 주먹(師拳)은 없다."[148]고 대답하면서 "나는 교단(상가)의 지배자도 명령자도 아니며, 내가 열반에 든 뒤에도 따로 교단(상가)의 지도자는 세울 필요가 없다." 단언하고, 그때 그러면 누가 교단을 이끌어야 하느냐는 아난다의 질문에 석가모니가 바로 '자등명 법등명' 발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구절은 자신의 사후 교단(상가)를 가톨릭이나 이슬람처럼 어떤 통합된 지도자가 선출되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법과 가르침, 계율 대로 이끌면 된다는 취지로 말한 것.[149]

바이샬리를 떠난 석가모니 부처는 파바 성에서 금 세공업자[150] 춘다에게 공양을 받았다. 이때 춘다가 올린 음식이 붓다가 받은 마지막 공양 '수까라 맛다와(sukaramaddava)'이다.[151]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춘다의 수까라 맛다와 공양을 받고는 "이 음식은 붓다 이외에는 소화시킬 수 있는 이가 없으니, 아무에게 주지 말고 버려라." 하고는 사람이나 동물이 접할 수 없도록 땅을 파고 묻으라고 지시했다. 숫까라 맛다와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152] 춘다가 의도한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만 먹고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석가모니 자신이 먹은 것은 공양받은 음식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고.

결국 석가모니 부처는 이 음식을 먹고 극심한 복통과 설사에 시달린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았다"고 불전에서 그리고 있을 정도.[153] 자신 때문에 부처가 아픈 것을 눈치 챈 춘다가 울자, 울고 있는 춘다에게 "걱정 말게나. 무릇 세상에는 훌륭한 보시가 둘 있다네. 하나는 정각을 얻으려는 자에게 행한 보시[154] 나머지 하나는 깨달은 자가 열반에 이르렀을 때 행하는 보시일세."라며 다독여주었다고 한다. 이는 춘다를 추켜올려 석가모니를 죽였다는 죄목을 뒤집어 쓰게 하지 않기 위한 행동이기도 하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 말에 춘다는 완전히 무너져내리며 더욱 큰 소리로 울었고, 아난은 우는 춘다를 달래며 "이 역시도 결국 운명이니, 어쩔 수 없소. 비구들이여, 부디 불쌍한 춘다에게 어떠한 원망도 하지 마시오. 이 역시도 결국 운명이오."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비구들을 진정시켰다.

석가모니 부처는 히란야바티 강을 건너서 말라족의 땅 쿠시나가라로 가서 두 그루의 사라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머리를 북쪽으로 놓고 오른쪽으로 누웠다.[155]

동아시아의 불교 전승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사망일은 2월 15일이지만, 장아함경 유행경은 붓다의 탄생, 출가, 성도, 열반이 모두 2월 8일이었다고 기록하고, 반니원경은 탄생, 출가, 성도, 열반을 모두 4월 8일이라고 적시한다. 이와 달리 인도를 직접 견문하고 기록을 남긴 현장은 대당서역기 권6에서 열반일에 대한 일반론은 3월 15일이지만 설일체유부(상좌부 불교)는 9월 8일을 사용한다고 밝혔다. 자현 비구는 대당서역기의 언급과 석가모니 부처의 죽음을 전하는 기록들에서 공통적으로 '승상(繩床)'이라는 그물침대(해먹)를 언급한 부분이 있음을 주목했다.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서 사망한 이유는 바로 그물 침대를 매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는 말이며, 계절상 야외에서 그물 침대를 걸고 자기에는 2월은 아직은 쌀쌀하고 추운 날씨이므로 대당서역기에서 현장이 기록한 대로 9월의 더운 날이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일이고 2월 15일은 어떤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6] 석가모니가 수까라 맛다와라는 공양을 받고 식중독 증세를 보였다는 전승과 대조해 보면 자현 비구의 추정도 설득력이 있다.
爾時,世尊與阿難俱,漸次遊行,到諸國界、村邑、聚落廣說諸法,所可化度,不可稱計。漸次復到鳩尸那竭國,力士生地,熙連河側,娑羅雙樹閒,而語阿難:‘可安繩牀而令北首,我今身體,極大苦痛,入於中夜,當取涅槃。’ 阿難受教,施繩牀已,佛卽就臥,右脅著地。爾時,阿難見佛臥已,隱於佛後悲泣流淚,極大苦惱。
이때 세존께서 아난과 함께 차례로 여러 나라와 고을과 마을들을 찾아다니면서 모든 법들을 자세히 설하니 그 교화하여 제도된 자들이 이루 일컬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는 다시 구시나갈국(鳩尸那竭國)의 역사(力士)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희련하(熙連河) 곁에 있는 사라쌍수(娑羅雙樹) 사이에 이르러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지금 저 승상(繩床)에다 머리를 북쪽으로 하여 눕혀라. 지금 나는 몸이 지극히 고통스럽다. 그러니 오늘 밤에 열반에 들어야겠다.”
아난이 지시를 받고 승상을 마련하자 부처님께서 오른쪽 가슴을 땅에 붙이고 자리에 누우셨다. 이때 아난이 이처럼 부처님께서 누우신 것을 보고는 부처님 뒤에 숨어서 슬피 울면서 몹시 괴로워하였다.
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 권하(卷下)
彼時,佛勅賢者阿難,汝於蘇連雙樹閒,施繩牀令北首,我夜半當滅度。受敎卽施,還白已具。佛到雙樹,就繩牀側右脅而臥。阿難在牀後,垂頭啼忼愾言 “一何駛哉!佛取泥洹。一何疾哉!世閒眼滅。我諸同志,從四方來,欲見佛者,望絕已矣。佛難復睹,難復得侍,來而不見,皆當悲慕,子何心哉。”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현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사라쌍수[蘇連雙樹] 사이에 승상(繩床)을 차려 놓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라. 내가 밤중에 마땅히 열반에 들겠노라.”
아난은 곧 분부대로 하고 돌아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다 준비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쌍수 아래로 가시어 승상에 나아가 오른쪽 옆으로 누우셨다. 아난은 승상 뒤에서 머리를 숙이고 울면서 목 메인 소리로 말하였다.
“어찌하여 그렇게 빠른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심이여. 어찌하여 그렇게 빠른가, 세상의 눈이 없어지는구나. 나의 모든 동지들이 사방에서 부처님을 뵈려 하는데 그들은 절망하고 말 것이며, 또 다시는 뵙기도 어렵고 다시는 모시기도 어렵고 와서 뵙지 못하니, 모두 슬피 사모할 뿐이니 나의 마음을 어찌할까?”
『반니원경』(般泥洹經) 2권(ABC, K0654 v19, p.217c02-c09)

석가모니 부처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서 아난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눈물 흘리는 이유가 절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웃긴데, 스승이 곧 죽음에 드는 것이 슬퍼서가 아니라 자신이 석가모니 부처를 25년이나 모셨음에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이제 죽음에 드신다니 그것이 슬퍼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알아챈 석가모니 부처는 아난을 불러 가까이 오게 하고는 "너는 내가 열반한 뒤에 머지 않아 반드시 깨달음을 완성할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었고, 이에 아난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의 장례법과 탑을 세우는 위치와 주관자까지 세심하게 지시한 다음, 아난에게, 말라족 사람들에게 가서 '오늘밤 수행을 완성한 위대한 성인이 열반에 든다.'고 알려주도록 했다. 당시 말라족 사람들은 마침 일이 있어 공회당에 모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구름같이 몰려나와 석가모니 부처의 발에 예배를 올렸다. 이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번거롭자, 아난은 한 사람씩 인사하지 말고 가족끼리 나와서 할 수 있도록 규칙을 수정하여 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에 대한 말라족의 예배가 모두 끝나고 겨우 번잡함을 넘어선 안정이 찾아왔을 때, 수바드라라는 수행자가 석가모니 부처의 친견을 요구했다. 수바드라는 당시 120세[157]나 되었다는 말라족의 이름난 수행자였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미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 알았지만, 석가모니 부처를 찾아가서 묻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다고 하자, 더 이상 자신을 속이는 허울을 벗고 진실한 무지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석가모니 부처를 찾은 것이다.

아난다는 수바드라를 예배자가 아니라 논쟁하러 온 사람으로 여겨서 "당신은 너무 늦었소."라는 말로 친견을 막았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를 듣고는 아난에게 "나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니 막지 마라. 그가 내 마지막 제자가 되리라."라며 수바드라를 불렀다. 석가모니를 만난 수바드라는 자신이 알고 경험한 수행의 가치들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석가모니는 평생 없었던 행동, 그러니까 말을 중간에 끊는(!) 행동을 하면서 "당신이 말하려는 것을 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당신이 부족한 것만을 지시해 주도록 하겠다."라고 말했고, 수바드라가 이를 받아들이자, 석가모니 부처는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했던 것과 같은 주제의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을 준다.[158] 수바드라는 그의 완성되었던 수행자였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자 곧장 깨달음을 얻었는데, '석가모니 부처의 열반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보다 먼저 열반에 들기를 희망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뜻대로 하라고 하자, 수바드라는 "당신을 만나 여한이 없소."라 상서로이 웃으며 열반에 들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석가모니 부처는, 제자들에게 최후로 더 질문할 것이 없는지를 물었지만 대중은 말이 없었고, 석가모니 부처는 다시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물어볼걸.' 하면서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물어보라."라고 재차 종용했지만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석가모니는 "내가 현재 열반에 가까웠다고 부담스러워서 못 묻는 것이라면, 친구의 일이라고 하면서 물어보라." 하고 다시금 말했지만 대중은 말이 없었다. 아난다가 "이 대중 가운데는 따로 궁금한 것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사뢰었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나도 그런 줄 안다. 이 대중들 중에 가장 어린 비구도 모두 도적(道迹)을 증득하여 악한 세계[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일곱 번을 오가고 나서 반드시 괴로움의 끝을 다할 것이다.'라며 그 자리에 있던 1200명 제자들에게 그들이 얻게 될 도과(道果)에 대하여 기별하고, 팔을 내밀어 모든 비구들에게 "너희들은 마땅히 생각하라. 여래가 가끔씩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마치 우담발꽃이 가끔 한 번씩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고 말한 다음, 게송을 읊었다.
오른팔은 자금(紫金)의 빛깔
부처의 나타남은 영서화(靈瑞華)와 같아라.
오고 가는 행(行)은 항상함 없으니
멸(滅)을 나타냄에 방일(放逸)함이[159] 없어라.

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석가모니 부처가 의식이 있을 때 남긴, 사실상 석가모니 자신의 유언이었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a
"이제 그대들에게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 비구들이여,
조건 따라 움직이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방일하지 않음으로(appamādena)[160]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하라.
《디가 니까야》 중 『마하빠리닙바나 숫딴따』, 6. 7
是故, 比丘! 無爲放逸. 我以不放逸故, 自致正覺, 無量衆善, 亦由不放逸得. 一切萬物, 無常存者, 此是如來末後所說.
그러니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말지어다.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에 이르렀나니, 나의 한량없는 모든 올바름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에서 연유하였을 따름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일 뿐이나니,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설법이니라.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 제4권 중 '유행경(遊行經)'

석가모니 부처가 숨을 거두는 장면을 불경은 선정의 순서에 따라 비유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눈을 감는 순간 초선에 들었고, 초선에서 출정하여 제2선· 제3선·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 무소유처정 ·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차례로 든 후 멸수상정(滅受想定)[161]에 들었다. 이때까지 아직 수다원이었던 아난다는 이때 부처가 완전히 열반에 들었는지 궁금하여 천안이 열린 아누룻다 존자에게 물었으나, 아누룻다 존자는 부처가 멸수상정에 들어 있는 것이라고 정정하면서, 제4선에서 출정하여야 열반이라는 설법을 생전의 부처로부터 들었음을 이야기해준다. 이후 부처는 멸수상정에서 깨어나 비상비비상처정에, 비상비비상처정에서 깨어나 무소유처정에, 그렇게 차례로 식무변처정 · 공무변처정 · 제4선 · 제3선 · 제2선 ·초선에 들었다가 초선에서 깨어나 제2선 ·제3선 · 제4선에 들고 제4선에서 반열반, 즉 열반에 들었다. 대승불교에서는 기원전 544년 2월 15일의 일이라고 일컬어지며, 이 날을 음력으로 열반재일(涅槃齋日)로 기린다.

최후에 사망한 후 다비를 거행하였을 때, 사리가 무려 8 4이 나왔는데, 당시 석가모니를 조문하러 온 8부족 왕들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다가 어느 바라문이 중재하여 나눠 받았다고 한다.[162] 뒤늦게 온 한 나라는 남은 재를 가져갔고, 조정을 맡은 바라문은 사리가 들어있던 병을 가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전승에 따르면 이 바라문의 이름은 도로나 또는 향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의 사망 이후 마하가섭의 주도로 석가모니 부처의 생전 언행과 설법에 대한 결집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제1차 경전 결집이라고 부른다.


[1] 석가모니 부처를 죽이려다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데바닷차는 석가모니 부처 본인이 "걔는 전생에 나에게 해 준 공덕이 있어서 지 죄값 다 치르면 바로 부처가 될 거야"라고 친히 인증했다. 여기서 전생의 공덕이란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에 어느 나라의 왕이었을 때 그에게 가르침을 주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왔다는 것으로, 법화경 제바달다품에 나온다.[2]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이라는 '본생담'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전생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토끼나 사자, 원숭이 같은 짐승으로 태어나기도 한다.[3] 산스크리트어로는 보디사트바(बोधिसत्त्व bodhisattva), 팔리어로는 보디삿따(बोधिसत्त bodhisatta)이다.[4] 증일아함경에는 초술(超術), 불본행집경에는 운(雲)으로 나온다.[5] 디팡카라 붓다. 연등불은 한역한 이름이고, 광불, 정광불이라고도 한다.[6] 증일아함경에는 발마(鉢摩)라고 나온다.[7] 무량겁이라고도 한다. '아승기'는 산스크리트어로는 asaṃkhyeya, 팔리어로는 asaṅkheyya인데, 수치를 나타내는 수학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 수량이 어느 정도인지 도저히 헤아리기도 나타낼 수 없는 상당히 어마어마하게 긴 개념이다. 그냥 '겁나 오래 전에'라고 번역할 수밖에 없다.[8] 히말라야 산이다.[9] 불본행집경에는 진보(珍寶)라는 이름으로 한역되어 있다.[10] 불본행집경에는 제사덕(祭祀德)이라는 바라문이 다른 바라문 6만 명을 대상으로 주최했다고 한다.[11] 불본행집경에는 어느 나라라는 이름은 없고 왕의 이름만 항원왕(降怨王)이라고만 나온다.[12] 증일아함경. 불본행집경에는 현자(賢者)라고 나온다.[13] 불본행집경에는 일곱 송이라고 했다.[14] 불본행집경에는 일곱 송이 꽃 전부는 아니어도 두 송이만 남기고 나머지를 다 달라고 했다고 한다.[15] 이때 금단(金團)이라는 천자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금단천자는 예전에 여러 번 염부제(인간 세상)에 내려갔다 오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디가 어떤 나라고 어떤 왕이 다스리는지 그 나라 백성의 성격이 어떤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16] 마가다 국이나 구살라 국도 가장 먼저 추천되지만, 호명보살은 "마가다국은 그 부모 될 왕이 청정하지 못하고 나라 안에 수목이나 과일나무 동산도 없다.", "구살라 국은 그 부모가 될 왕이 청정하지 못하여 잡되고 더러운 데 났으며, 또 예로부터 지금까지 왕종이 아니라서 비겁하고 하천하며 의기가 높지 않다." 하며 거절한다. 이후 십육대국의 이름이 죽 언급되지만 그 나라는 왕비가 바람을 피워 딴 데서 자식을 낳아와서, 그 나라는 왕은 좋은 사람인데 백성들 성격이 뭐 같아서, 그 나라는 왕이 성격이 잔인해서, 그 나라는 왕이 나이가 많고 형제가 많아서, 등등 이런저런 이유로 퇴짜를 놓으면서 호명보살은 "모든 왕종 가운데 내가 날 만한 곳을 다시 살펴보라." 하고는, 바라문이 아니라 찰제리 즉 크샤트리아 집안 가운데서 찾으라고 당부한다.[17] 가비라성, 지금의 네팔 티라우라코트[18] 한자로 정반왕 또는 백반왕이라 한다. 말 그대로 흰쌀왕. 석가족 안에서 명궁으로 이름이 자자했던 사자협왕(師子頰王)의 3남 1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19] 싯다르타의 어머니는 콜리야 족 선각왕(善覺王)의 딸 마야부인이었는데, 마흔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20] 불교에서 신성히 여기는 짐승으로, 한자로 옮겨서 육아백상(六牙白象)이라고도 부른다.[21] 서양 학자들은 이를 수태고지와 같은 처녀수태로 보기도 하는데, 동양의 태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이다.[22] 과거현재인과경에 따르면 산달이 다 되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왕비가 잠시 유람을 나왔는데 그만 출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23] 흔히 인도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현재의 네팔에 있으며 인도-네팔 국경 인접지역이다. 훗날 아소카 대왕이 이곳에 석주를 세우고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난 곳이므로 세금을 감면해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24] 네팔의 관광 수입을 책임지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에 네팔에서는 민감하게 여겨 룸비니 동산이 인도에 있다고 말하면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게다가 네팔이 불교가 강세 국가임을 감안하면...[25] 다분히 힌두교적인 설화로 석가모니가 왕가의 자손임을 상징한다. 힌두교 신화에선 브라만 계급은 신의 입에서, 크샤트리아는 겨드랑이에서, 바이샤는 무릎에서, 수드라는 발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즉 석가모니를 겨드랑이 밑에서 낳았다는 것은 석가모니가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임을 의미한다.[26] 여섯 걸음에서 한걸음을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한다.[27] 해석: 세상 밖과 세상 속에서 오직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 삼계(윤회하는 세계)는 모두 고통이니 마땅히 내가 편안하게 하리라.[28] 이는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고, 실제로는 좀 더 오래 살았을 것이다. 아시타 선인이 싯다르타의 미래를 예언한 바 있는데 그 자리에 왕비도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전 등의 묘사를 보면 마야 부인이 출산하고도 이레 이상 살았을 법한 묘사도 종종 보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오래 살지 못하였음은 사실인 듯하다.[29] 한역 불경에서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또는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 무상정편지(無上正遍智)로 번역되며, 반야심경처럼 산스크리트 어 원어를 한자로 음차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도 번역된다.[30] 한역 불경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에 따르면 아시타 선인은 그때 나이가 120세였다고 한다. 현대 기준으로도 전설적인 고령인 나이지만, 실제 생물학적 나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그만큼 오래 살았고 곧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임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수사적 은유로 해석된다.[31] 나중에 아쉬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아시타 선인은 누이의 아들인 마하카트야야냐에게 "부디 너라도 그 가르침을 들으라." 유언했으며, 마하카트야야냐는 그렇게 석가모니의 십대제자 중 한 명이 되었다.[32] 한역 불경인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에도 비슷한 줄거리로 실려 있다.[33] 고대 종교의 창시자 중 정확히 언제 태어나고 사망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그런 부류 중에서도 유독 전승이나 학설에서 언급되는 생몰년도의 폭이 매우 크다.[34] 베트남이나 태국, 스리랑카 등 상좌부 불교권 국가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베삭'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35] 여러 불경을 보면, 마야 왕비가 도착한 그 무렵, 룸비니 동산에는 꽃이 만발하고 목욕을 할 만한 여건이 되었다고 한다. 네팔 남부 터라이평원에 자리 잡은 룸비니의 기후를 이 기록에 대입하면 양력 4월(음력 3월) 부근이 유력하다.[36] 그중에는 현재 파키스탄 지역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서, 석가모니 탄생지를 현 파키스탄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37] 불본행집경에는 그 이름이 인천(忍天)으로 나온다. 선각왕(수프라붓다)의 아들로 마야 부인과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의 형제이다.[38] 싯다르타의 사촌동생이다.[39] 출처: 와타나베 쇼코, 법정 역 <불타 석가모니>[40]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을 거두기를 신에게 기원하는 행사로 왕이 몸소 쟁기를 잡아 밭을 갈아보이는 절차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필라국을 비롯한 당시 인도의 대부분이 농경 위주의 국가였음은 싯다르타의 아버지 숫도다나왕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의 이름에 한결같이 다나(밥)가 들어가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경에는 논에 대는 봇물을 놓고 나라와 나라 간에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의 불교학자 와타나베 쇼코는 <불타 석가모니>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 이름 마하마야(마야 부인)도 '위대한 어머니' 즉 대지모신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출처: 와타나베 쇼코, 법정 역 <불타 석가모니>).[41] 왕과 귀족들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농부들이나, 농부들이 채찍으로 때려가며 부리는 소들.[42] 소가 밭을 갈고 지나간 자리에 쟁기와 보습이 파낸 흙 틈으로 드러난 벌레들이 발에 밟히거나 혹은 새들이 달려들어 쪼아 먹었다.[43] 불경에 따르면 이때 다른 나무들은 해가 옮겨감에 다라 그늘의 자리도 바뀌는데, 태자가 앉아 있는 잠부나무만은 그늘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태자의 머리 위에 드리워 있었다고 한다. 잠부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는 싯다르타 태자를 찾아낸 왕과 대신들은 싯다르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예배를 행했다고 한다.[44] 예수 역시 싯다르타와 같은 열두 살 때에 유월절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 예루살렘에 갔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어디 있는지 찾아다녔는데, 찾고 보니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서 율법학자들과 함께 율법에 대해 문답하고 있었고, 왜 말도 없이 빠져나가서 걱정시키느냐는 마리아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의 복음서 2장 49절)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45] 사실 표현 기법이나 양식으로 봐도 엄연히 관음보살 등 다른 부처(혹은 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임에도 민간에서는 그냥 '미륵보살'이라고 뭉뚱그려서 불리게 된 사례가 한국에는 꽤 많다. 대표적으로 은진미륵.[46] 왕이나 대신들이 싯다르타의 결혼을 서두른 이유는 태자의 출가를 막는 것 외에도 전륜성왕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있었다.[47] 수행본기경에서는 수타회천(首陀會天)의 난제화라(難提和羅)라는 신이 일부러 변장한 것이었다고 설명된다. 물론 이 또한 하나의 은유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48] 전전(展轉) 돌고 돈다는 뜻. #[49] 양모 마하프라자파티나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50] 싯다르타로서는 국왕으로서 카필라 왕국의 후사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의무감을 헤아린 것이었지만, 숫도다나 왕으로서는 그때까지만이라도 아들의 출가를 늦춰보려는, 그리고 내심 가정이 생기고 나면 싯다르타가 생각을 바꿔 먹지 않을까 하는 내심 기대도 있었다.[51] 다만 싯다르타가 출가하기 전에 아들이 태어났다는 내용이 다른 경전에 없어서, 라훌라라는 이름은 라후(Rahu) 즉 태양이나 달을 집어삼켜서 일식월식을 초래한다고 믿었던 악마의 이름으로 해석해, 라훌라가 태어났던 시점에서 마침 월식이 일어났기에 이에 빗대어 라훌라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해석도 있다(출처: 법륜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52] 본생경에 따르면 단 하룻밤 동안에 세 왕국을 지나 카필라바스투 왕국에서 30유순을 갔다고 한다. 유순이란 소가 끄는 수레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80리를 대유순, 60리를 중유순, 40리를 소유순로 구분한다. 그러니까 소가 끄는 수레로 40일을 가야 하는 거리를 단 하룻밤 만에 갔다는 것이다.[53] 불본행집경에는 정거천이라는 신이 변신해서 싯다르타 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데, 불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그때그때 싯다르타의 감정과 필요에 따라서 신이 화현한 것이라고 하는 은유가 많다. 그러니까 내가 길을 가다가 음료수가 사먹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서도 혹시 몰라 주머니를 뒤졌는데 돈이 나왔다는 것을 '어느 신이 동전의 모습으로 내 주머니에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다.[54] 찬다카는 팔리어로는 찬나라고 하는데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뒤에 다른 석가족과 마찬가지로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으나, 붓다의 제자나 신자들 앞에서 "내가 그때 붓다께 출가하지 말라고 끝까지 말렸으면 붓다께서 출가할 수도 없었고 너희도 붓다의 가르침을 듣지도 못했을걸? 그러니까 붓다의 깨달음에 가장 공헌한 건 나다 이 말이야"라며 뻐기고 다녔는데, 결국 죽음을 앞두고 석가모니 부처는 아난 존자에게 제자 및 신도들 앞으로 찬다카에 대한 '브라흐마빈다'의 처벌을 지시했다. 한역하면 '묵빈대처(默賓對處)'로 앞으로 찬다카가 무슨 말을 해도 태클을 걸지도 동의하지도 말고, 그에게 뭔가 어떤 지적이나 조언도 하지 말고 아예 그에게 처음부터 말도 걸지 말라는 병먹금 형벌이었다. 이에 찬다카는 크게 깨달아 뉘우치고 그뒤로는 다른 제자들 앞에서 뻐기거나 하는 일이 사라졌으며,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55] 그림을 보면 윗부분에 말 앞에 꿇어앉아서 상투를 자르는 모습과 그 오른편에 붉은 옷을 들고 머리를 깎은 이가 보이는데, 모두 싯다르타 한 사람을 그린 것으로 싯다르타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모습과 이후 자신의 옷과 패물을 사냥꾼에게 주고 사냥꾼이 입고 있던 옷을 받아 입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56] 기원 후 5~600년경에 붓다고사(Buddhagosa)에 의해 정리된 자타카의 주석서이다.[57] 308년 한역[58] 산스크리트어 불경인 랄리타비스타라(Lalitavistara)의 한역이다. 683년에 한역. 서양에는 아랍어본 بلوهر وبوذاسف 를 거쳐 바를람과 유서퍼트로 알려지게 된다[59]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를 읊은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붓다차리타(Buddhacarita)의 한역이다. 기원 1세기경에 성립되었으며, 414~426년 한역되었다.[60] 424~453년 한역되었다[61] 444~453년 한역되었다.[62] 587~591년 한역되었다.[63] 985~994 사이에 한역되었다.[64] 산스크리트어 경전 Mahāvastu의 한역이다.[65] 다만 육신을 가진 인간이 이만큼이나 큰 고통을 견뎌낼 수도 있으며 인간에게 잠재된 능력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그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다.[66] 기독교에서 천국과 지옥은 한 번 그곳에 들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거나 하는 일 없이 복락을 누리거나 고통을 받으며 어떠한 변화도 없이 그대로 살게 된다고 하지만, 불교의 천국과 지옥은 육도육회의 흐름에 있는 또다른 세상이므로, 거기 있는 시간이 인간이 상상하기에 굉장히 오랜 시간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정해진 때가 되면 다시 그곳에서 자신이 이룬 행적의 과보에 맞춰서 또 다른 곳으로 죽어 환생한다. 싯다르타의 말은 인간 세상에서 뼈빠지게 고행해서 천상에 올랐다 치면 천상에 오른 다음에도 어디론가로 윤회할 텐데, 그러면 천상에 올랐다고 고행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고행만 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에서 법륜은 이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고행이 아니라 고행 그 자체를 위한 고행이 되고 마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67] 인도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왕의 자리 때문에 부자 간에 죽고 죽이는 혈겁은 싯다르타가 살던 고대 인도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나중 일이지만 빔비사라 자신도 결국 친아들 아자타사트루에게 찬탈을 당하고 석실에 갇혀 굶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빔비사라 왕으로서는 엄연히 한 나라의 차기 대권 계승자에 정통성도 능력도 뭐 하나 흠 잡을 것 없는 인간이 뭐가 아쉬워서 그걸 하루 아침에 다 내다 버리고 출가하겠나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당시 빔비사라 왕의 나라 마가다 국은 이웃한 코살라 국과 정략 결혼으로 잠시 잠잠해지긴 했지만 분명 코살라 국과 대치하는 중이었고, 출가 전에는 학문도 무예도 제왕에 준하는 교육을 받은 고급 인재 싯다르타를 우대해서 카필라 국과의 동맹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빔비사라 왕에게 싯다르타는 나라 절반씩이나가 아니라 나라 절반쯤이야 내어 주고 영입하더라도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거물급 FA인 것이다.[68]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주시하는 선정(禪定). 외계의 일은 물론 자기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완전히 초월해서 무념무상의 평온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69]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욕계·색계의 거친 생각은 없지만 미세한 생각이 없지 않은 경지. 무소유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것으로 일상적인 사고를 모두 초월해 오로지 순수한 사상만이 남는 상태로,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정삼매의 최고 경지라고 여긴다.[70] 전승에 따르면 이때 악사의 정체는 사실은 인드라 즉 제석천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싯다르타에게 깨달음에 대한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71]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72]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의 국보이다.[73] 그 지역을 다스리는 마가다 왕국 장군의 딸의 시녀 라다의 시체를 쌌던 옷이라고도 한다.[74] 수자타의 우유죽 공양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로도 굉장히 중요한데, 석가모니의 삶에서 석가모니 자신이 직접 공양을 받은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수자타가 첫 번째고, 석가모니가 죽음을 앞두고 대장장이 춘다가 올린 수카라 맛다바 공양이 두 번째다. 이 공양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가모니는 사망했다.[75] '길상'이라는 뜻이다.[76] 오른쪽으로 세 번 도는 것은 인도에서 존귀한 인물에 대해서 행하는 인사법이다.[77] 여기서 싯다르타 즉 석가모니 부처의 모습을 그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와 그 아래에 왕좌로 대체하여 표현하고 있다.[78] 숫타니파타에도 마왕에 맞서는 고타마의 모습이 언급되어 있으며, 내용도 대체로 비슷하다.[79] 타나(Tanha: 탐욕. 집착), 아라티(Arati: 성냄. 악심)와, 라가(Raga: 욕망)라는 이름이라고 한다.[80] 다른 일화에선 유혹하던 중 늙은 할머니처럼 변해버리자 싯다르타가 "너희는 착한 과보로서 하늘 몸을 받았다. 그러나 덧없는 늙음이 덮쳐왔구나. 너희 모양은 고운데 그 마음은 단정치 못하구나. 죽으면 악도에 떨어지리라. 이제 와서 후회한들 어찌하랴?"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자매들이 울면서 뉘우치자 싯다르타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려주었고 세 자매는 완전히 석가모니의 불심에 반해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도 한다.[81] 단 일반적으로 퍼진 일화들에서 이 부분을 잘 읽어보면 '깨달음을 포기하면 내가 다 해준다.'가 아니라 '깨달음을 포기하면 니가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마라는 '그리된다.'고 보장하지 않는다. 다만 저 소리가 아예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는데, 싯다르타는 어린 시절 속세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출가하면 부처가 될 것이란 예언을 받은 적이 있다.[82] 마라 파피야스는 그의 전생에 벽지불에게 한 번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제육천마왕으로 전생했다고 한다.[83] 공덕이 있어 마왕이 되었다니 현대에는 많이 이상하겠지만, 당시 인도에선 어쨌든 높잖아? 왕이잖아? 신이잖아? 그럼 됐지 하는 마인드였다(...). 현대에선 마왕하면 '마'에서 나오는 악한 이미지에 더 신경 쓰는 반면, 그 당시 인도는 마왕하면 악한 이미지보단 '왕', 즉 악행을 저지르는 폭군이든 선행을 베푸는 성군이든 어쨌든 왕종(王種)으로 태어난 것 자체만으로 그가 보통 사람들보다 공덕이 많았다는 증거라는 시선이 일반적이었다. 자현 비구는 이런 인식을 최고급 로펌을 소유한 사회 상류층 인사 정도로 풀이해 설명했다.[84] 와타나베 쇼코는 이러한 마라의 논법을 상대편의 말꼬리 붙잡고 자신한테 유리하도록 억지 해석을 내리려는, 상대편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될 수 있는 증언을 한 것을 가지고 이를 트집잡아 상대편의 논리를 공격하는 방식이며 재판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수법이라고 설명한다.[85] 오른손을 땅에 갖다 대는 것은 고대 인도 설화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해 그것이 진실이며 만약 거짓이라면 대지의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의미가 담긴 제스처였다(출처: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86] 이 수인 때문에 석굴암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란 설이 정설이지만, 아미타불이라는 이설도 있다.[87] 출처: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88] 부처가 된 이후의 싯다르타의 이름은 그 시점부터 석가모니로 바뀌게 된다.[89] 인도에서는 밤을 초경, 중경, 후경의 3경으로 나눈다.[90] 일각에서 초기불교에 윤회의 개념이 없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오도송과 배치된다.[91] 반론: 법구경은 초기불교에 해당되지 않는다. 초기불교란 승단이 없던 시대를 뜻한다. 가족과 사회를 떠나 '무소의 뿔'처럼 홀로 유행하라고 말했던 것이 초기불교이기 때문에 승단이 만들어질 수 없었다. 석가모니 사후에 제자들이 모여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승단이 만들어졌고, 장로들의 불교, 즉 부파불교가 성립이 된다. 법구경과 아함경은 부파불교에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책. 부파불교의 전형적인 특징이 선업(올바른 행동이 올바른 결과를 가져온다)를 강조하는 것인데, 법구경이 딱 그렇다. 따라서 법구경은 부파불교의 책이고 부파불교는 윤회를 믿었으므로 앞의 각주에서의 주장은 초기불교와 부파불교의 구분을 모르는 셈.[92] 초기불교만 봤을 때 윤회는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원불멸의 영혼인 '아트만'이 있다는 것을 가정할 때 윤회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인데, 초기불교는 이러한 '아트만'을 부정함으로써 생겨난 개념인 '안-아트만'(무아)을 핵심가치로 삼고 있어서, 애초부터 초기불교에서 윤회라는 개념이 생겨날 수가 없었다. 초기불교에 윤회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를 보면, 초기불교가 아니라 부파불교의 책들을 가져와서는 초기불교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불교 이전의 사상인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의 개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93] 앞의 각주에 따르면 초기불교는 책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초기불교를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94]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95] 그 거리는 현장의 저술과 커닝햄이 수행한 고고학적 탐사를 종합하면 불과 183미터였다고 한다. 반면에 방광대장엄경(랄리타비스타라)는 그 거리가 삼천대천세계에 이르는 먼 거리라고 주장한다.[96] 이 넷째 주에 북서 방면을 관장하는 신들이 라트나그리하(보거)를 건립했다고 한다.[97] 서양 사람들이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이 일화는 일부 불교 교단에서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되고 있지만 많은 불도들은 이 기적적인 일을 성도의 절대적인 증거라고 여겨 널리 전승되었고, 바르후트와 파우니의 불교 유적이나 동남아시아 전역의 불교 미술에서도 등장하고 있을 정도이다.[98] 이들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소재하고 있던 고대 왕국 박트리아의 수도 발흐(Balkh) 출신이라는 설, 혹은 말레이 반도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99] 타이에서 그린 불화를 보면 석가모니 부처가 가부좌를 하지 않고 정좌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보시를 받을 때 취하는 자세로 이렇게 앉으면 몸이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서 보시를 바치는 자에게 호의를 표시할 수 있는 것이다.[100] 중앙아시아불교는 이 두 사람이 전하여 이른 시기부터 시작한 듯하다. 미얀마의 슈웨다곤 파고다가 바로 이때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받아온 머리카락을 봉안하고 지은 사찰이라는 전승이 있다. 슈웨다곤 파고다는 현대에도 미얀마의 불교 성지로 손꼽힌다.[101] 불본행집경 본문에는 "수나라 말로는 소착처(所着處)라고 한다"라고 주석이 붙어 있다. 쉽게 말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이라는 뜻.[102]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세상의 창조주 브라흐마. 상윳따 니까야에는 브라흐마 사함빠디(brahmā Sahampati)라고 되어 있는데, 가섭불(깟사빠 정등각자)의 제자로 청정한 범행(梵行)을 닦아 사후에 범천의 세상에 올라 브라흐마 사함빠디로 환생했다고 한다(사함빠디 범천 경).[103] 일본의 경우 어느 신사의 연혁을 소개할 때 어디어디 신사로부터 신을 '권청'해서 지었다고 연혁을 소개하는 신사가 제법 있는데, 이때 '권청'이라는 용어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범천이 석가모니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는 이른바 범천권청(梵天勸請)은 간다라 불교 미술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그 전승이 오래되었다. #[104] 석가모니 부처를 가리키는 열 가지 호칭인 여래십호(如來十號)의 하나로 '잘 가신 분'이라는 뜻이며, '피안(彼岸)에 가서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105] 불교의 세계관에서 제석천은 33천 모든 천신들의 제왕이고, 범천 사함빠띠는 범천계의 신이지만, 제석천은 욕계에 속해 있고 범천 사함빠띠는 색계와 무색계를 아우르는 범천계의 최고신이라 격은 범천이 더 높다.[106] 석가모니가 죽어서 부처가 된 것을 언급하는 것처럼 그냥 빨리 뒈져버려(…)라는 게 절대 아니고, "너와 나 사이에 괜히 다른 애들 집어넣지 말고 네 갈 길이나 가라"라고 어느 정도 부탁이나 애원에 가까운 투였다.[107] 힌두교 신화에선 이때 비슈누 신도 세 차례나 강림하여 석가모니 부처에게 중생을 깨우쳐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비슈누 역시 브라흐마와 마찬가지로 힌두교에서 모시는 최고위 신이다.[108] 1998년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연이 깊었던 법정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길상사 개창 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1998년 명동성당에서 열린 성탄전야미사에서 제대에 올라 강론을 하면서 "이 제단 위에 저를 올려주신 천주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라는 강론의 첫 문장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이 말은 가톨릭의 창조주 야훼와 그에 대한 신앙에 대한 존중이자, 여기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세계의 창조주 범천(브라흐마)의 권청으로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나아가 전법하였다는 불경 속 예화를 적절하게 인용한 위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범천의 청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설하러 나선 것처럼 법정 비구 자신도 가톨릭의 창조주 야훼의 뜻(권청)으로 이 자리에 나와 설법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가톨릭의 신앙의 대상인 창조주 야훼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로써의 자신의 위치 또한 잊지 않음으로써 양쪽 모두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라 할 수 있다.[109] amatassa dvāra. amata는 a(부정접두어)+√mṛ(to die)의 과거분사 형이며 명사로 쓰여서 '죽지 않음' 즉 불사라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불사에는 불사약 즉 만병통치약이란 의미가 들어있으며, 불사는 한역 불전에서는 '감로'로 번역된다.[110] pamuñcantu saddhaṃ. 주석서는 “모두는 자신의 믿음을 내버려야 한다(sabbe attano saddhaṃ vissajjentu).”(SA.i.203)라고 했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고루한 고정관념, 이제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낡은 사고방식을 가리킨다.[111] 훗날 범천은 불교의 유력한 수호신이 돼 불교에 흡수되었다.[112] 석가모니 부처는 열반을 앞두고 아난다에게도 “여래는 혼자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는 비밀스런 가르침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는데, 이러한 '공개성'이 불교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세계 종교로 성장하는 한 동인이 된다.[113] 바라나시를 말한다. 바라나시는 인도 동부 갠지스 강 유역의 중심 도시다. 옛날에는 '빛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카시(Kasi)'로 불리었다. 기원전 600년경 카시 왕국의 수도였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지금도 인문과 문화의 중심지다.[114] 고대 인도, 중국에서 전승되는 영약. 인도에서는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아므리타로 〈죽지 않는다〉를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인도 최고의 고전 『리그 베다』에서는 뜻이 바뀌어서 불사가 되는 것, 신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생과 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사'를 뜻하는 감로에 비유한 것이다.[115] 우파가(優波迦). 아자파(阿字婆)라고도 쓴다.[116] 우파카는 석가모니의 첫 제자가 될 뻔했지만 이때는 인연이 없었는지 "그런가?" 하며 그냥 지나가버렸다. 우파카는 나중에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어 아나함과를 증득한다.[117]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하는 심오한 말을 좀 알아들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랬다고.[118] 한역하면 종련지(倧蓮如) 또는 교진여(憍陳如)라고도 한다. 이 사람의 외조카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의 십대제자 가운데 설법제일이라 불렸던 부루나 존자.[119] 한역하면 아설시(阿說示)이다.[120] 한역하면 마하남(摩訶男)이다.[121] 한역하면 파제(婆提)이다.[122] 한역하면 파파(婆頗)이다.[123] 석가모니의 허름한 차림만 보고 무시해서라기보다는 본인도 뱃삯을 받아야 자신과 딸린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처지라서 어쩔 수 없었다.[124] 출처: 와타나베 쇼코, 법정 역 <불타 석가모니>[125] 출처: 법륜 <인간 붓다, 그 위대한 삶과 사상>[126] 물론 이 가운데 안나콘단냐만은 "그게 말처럼 쉽게 되겠냐 혹시 그가 정말 깨달음을 얻었을 지도 모르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바깥으로 말은 못하고 있었다.[127] 불본행집경에는 이때 이들의 모습을 "새장 속의 새가 불길이 다가오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저절로 날아오르고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고 비유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가 이들을 보며 "나를 보면 상종도 하지 말자고 자기들끼리 약속해놓고 이제와서 뭐 하는 건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28] 산스크리트어로 아유시만트이며, '경외받아 마땅한 자', '경외 받을 자'라는 뜻이다.[129]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처럼 석가모니 부처는 자신을 가리킬 때 이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 15세기 전에는 이 말을 놓고 여덟에서 열여섯 가지 해석이 나왔는데, '과거불처럼 이렇게 되었다',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다', '진리를 획득한 사람' 같은 해석들이 있었다. 항목 참조[130] 화룡은 카샤파의 말은 잘 들어도 다른 사람에게는 해를 가했다고 하며, 동료를 원망하고 죽은 병든 수행자의 넋이 변해서 화룡이 되었다고도 한다.[131] 이밖에도 석가모니가 카샤파에게 3500가지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출처: 와타나베 쇼코 <불타 석가모니>)[132] 물론 빔비사라왕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133] 석가모니 부처가 불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바라문을 깨닫게 했다는 것은 숫타니파타의 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sundarika bharadvaja sutta)에도 실려 있다.[134] 승단의 수행을 더욱 엄격히 할 것을 주장하는 등 나름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문제는 이 개혁안이 당시 기준으로 보기에도 극단적으로 엄격했으며 현대 회사 돌아가듯이 수행자를 다루려고 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떠난 제자.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 형제이며, 7 ~ 8세기 인도의 북부에는 데바닷타의 극한 고행 방침을 따르는 추종 수행자들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떠날 당시에도 따른 제자 및 추종자들이 있었던 만큼 그 갈등의 여파를 오늘날 불교 설화의 데바닷타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135] 석가모니가 돌을 피하다 발가락이 스쳤는데 발에서 나온 피에서 꽃 칸나가 피어났다는 설화가 있다. 그리고 돌조각 대부분은 석가모니를 피해 튕겨나갔다고 한다.[136] 군대가 진군하는 길에 잎도 가지도 없는 나무 아래에서 참선하고 있었는데, 비루리 왕이 "가지도 잎도 없는 나무 아래서 덥지도 않으십니까?"라고 물어보자 석가모니 부처는 "친족의 그늘만큼 시원한 것은 없지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비루리 왕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을 이해하고 군사를 돌렸다고 한다. 또한 진군하는 길에 사문을 만나면 군사가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속설도 한몫했다고.[137] 이때 단단히 빡친 비루다카가 호고(好苦)라고 하는 어느 브라만의 아들에게 "내가 나중에 왕위를 이어받게 되거든 내게 '너는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말아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고, 호고는 그 말대로 하루에 세 번씩 "전하,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기억하소서"라고 태자에게 아뢰었다. 비루다카가 즉위할 때도 그를 찾아가 똑같이 "폐하, 샤카 족에게 당한 치욕을 기억하소서"라고 말하자 비루다카는 그를 칭찬하고 곧바로 카필라 국의 침공을 단행하였다고 한다.[138] 비루다카의 아들인데, 비루다카의 원정에 참가하지 않고 궁에 있으면서 술 마시고 놀았다. 카필라 국을 멸망시키고 돌아온 비루다카가 기타에게 "너 내가 카필라 국을 치러 간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같이 안 가고 이렇게 술 마시고 놀고 있어?"라고 물었고, 기타는 "죄 없는 중생을 죽이느니 술판에 빠져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비루다카는 기타까지 죽였다.[139] 석가모니는 비루다카 왕이 죽은 뒤, 비루다카 왕이 어째서 그런 최후를 맞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샤카 족은 모두 전생에 라열성(羅閱城, 마가다의 수도 라자그리하) 어촌의 주민들이고 비루다카 왕과 호고는 그 어촌에 있는 어느 연못에 살던 물고기였는데, 가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게 된 마을 주민들이 연못으로 가서 물고기를 잡아먹자, 두 물고기는 "우리는 이전에 이 사람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 사람들은 지금 와서 우리를 잡아먹고 있으니, 우리가 환생하게 된다면 원수를 갚자"고 맹세했고, 죽어서 각각 비루다카 왕과 호고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때 마을의 여덟 살 된 한 어린아이는 물고기를 잡지도 않고 목숨을 죽이지도 않으면서 물고기들이 언덕 위에 죽어 있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며 킥킥거렸는데 바로 전생의 석가모니 자신이며, 그 과보로 부처가 된 지금도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140] 대당서역기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비루타카 왕은 이레 뒤에 불에 타서 죽는다"라고 예언했는데, 비루타카 왕은 이레 동안 근신하다 "불에 타서 죽는다고 했으니 물은 괜찮겠지"라고 하면서 뱃놀이를 나갔다가 강물 속에서 화산이 터져서(!) 비루타카 왕이 타고 있던 배가 순식간에 폭발해 죽었다는 믿기 힘든 전승을 전하고 있다.[141] 그림 오른쪽에 「慶元府車橋石板巷陸信忠筆」라는 묵서명이 있어서 남송 경원(慶元) 원년(1195)에서 원 지원(至元) 14년(1277) 사이에 경원부(지금의 닝보)에서 목신충(陸信忠)이라는 인물에 의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일본 나라 현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42] 석가모니의 죽음을 다룬 경전인 열반경은 한문본 다섯 종에 팔리어본과 산스크리트어본과 티베트어본까지 합치면 총 여덟 종이 달하며, 내용은 모두 비슷하다. 자현 비구는 불교권 전체에서 유사한 내용의 경전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석가모니 부처를 '열반'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일찍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출처: 자현 <붓다 순례>). 실제로 후대에 천태종을 중심으로 '어떤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설(眞說)에 가까운가'에 대한 성서비평학과 같은 교차 검증 작업인 교상판석을 행했을 때, 가장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경전은 석가모니의 사망 시기 모습을 서술한 열반경이었다고 한다.[143] 불설장아함경에 실려 있는 '유행경'에는 이 부분이 실려 있다.[144]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한 뒤에 마가다와 밧지는 다시금 석가여래의 사리를 누가 더 가져갈 것이냐를 놓고 분쟁을 벌였고,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졌다(마가다-밧지 전쟁). 기원전 484~468년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의 최종 승자는 마가다였다. 자이나교 전승과 불교 전승 모두 마가다와 밧지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마가다가 이겼다는 것을 공통되게 전하고 있어서 교차검증이 가능하지만, 전쟁의 전개에 대해서는 불교 전승과 자이나교 전승이 서로 다르다. 이는 전쟁 당시 밧지의 수장이었던 체타카가 자이나교 신자였기 때문에 불교쪽에서 그를 다소 소홀히 다룬 것이 원인이기도 하다.[145] 아닌 게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 자신이 출가해서 처음 수행한 곳이 이곳이었다.[146] 파탈리푸트라로 훗날 마가다의 아자세사트루가 이곳으로 천도했으며, 마가다가 멸망한 뒤 시슈나가-난다 왕조를 거쳐 마우리아 왕조의 수도가 된다.[147] 그래봐야 석가모니 부처가 당시 여든을 넘긴 나이였음을 생각한다면 아주 잠깐 동안의 회복이었다.[148] 석가모니 자신이 깨달은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했으며 숨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어느 특정한 제자에게만 따로 비밀스럽게 교리나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149] 이를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에 있었던 일화와 견주어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무슬림 가운데는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 예수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무함마드가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함마드가 죽었으니 이제 이슬람도 끝이다"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때 훗날 이슬람 공동체의 초대 칼리파가 되는 아부 바크르가 나서서 "너희가 이제껏 믿고 섬긴 것은 무함마드였느냐, 주님(알라)이었느냐? 너희가 무함마드를 믿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 하지만 너희가 주님을 믿었다면 주님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시다. 무함마드가 아무리 성사(라술룰라)였다고 해도 그 역시 주님께서 선택하신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을 뿐이다. 무함마드가 죽었다고 해서 영원하신 주님(알라)께 등을 돌릴 수 있겠느냐?"라고 진정시켰다는 일화에서 석가모니 부처와 다른 점은 교조 사후 이슬람이 교조가 강조한 '유일신에 대한 복종'으로 교단 통합의 수단을 삼았다면 불교는 교조가 깨닫고 설파한 가르침에 근거한 교단 구성원 각자의 깨달음과 합의에 따라 정한 계율을 따르는 것을 교단 통합의 수단으로 내세웠다는 것. 이런 점에서 불교가 오히려 전근대보다 훨씬 공화제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느냐는 시각도 존재한다.[150] 자현 비구는 금 세공업자는 당시 금은방과 대장간을 겸했다고 해석했다.[151] 이 '수까라 맛다와'라는 것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승려들과 불교사학자들에 있어 유명한 미스터리이다. 그러나 이렇다할 정설은 없다. 북방불교에서는 전단수이(栴檀樹耳)라고 해서 '전단향이 나는 나무의 버섯'이라고 하고, 남방불교에서는 '부드러운 돼지고기'로 이해하는데, 5세기 인도의 승려 불음(佛音)이 주석을 붙일 당시에는 늙지 않은 야생 양의 순한 고기, 부드러운 밥에 우유를 섞어 만든 음식, 말린 야생돼지고기라는 세 가지 설이 있었다. 법륜 비구는 '맛다와'가 벵갈어토란이라는 점을 들어 '돼지 토란' 즉 야생 토란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주장했다. 토란은 독성이 있어서 그냥 먹으면 해롭다.#, 자현 비구는 '버섯'과 '돼지고기'라는 뭔가 언밸런스한 조합을 두고 송로버섯이 아니었겠느냐 주장했다. 또한 처음부터 그런 음식은 없었는데 후대의 불전기 작가들이 '수까라 맛다와'란 가공의 음식을 꾸며내었다는 주장도 있다.[152] 숫까라 맛다와가 돼지고기 요리였다면 고기가 상해서였을 수도 있고, 버섯 요리였다면 독버섯이 섞여서였을 수도 있다.[153] 서유기에서 전갈 요괴의 도마독(독침)에 쏘이고 고통스러워 했다는 표현이 있긴 하나 단순한 창작물이다.[154] 석가모니 부처 자신이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하고 있었을 때 수자타가 공양했던 우유죽을 말한다.[155] 이는 서쪽을 보고 누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쪽은 해가 지는 땅으로 죽음을 상징하는데 이는 이집트의 ‘죽은 자의 도시’인 네크로폴리스에서도 발견되는 고대인들의 공통된 인식 중 하나이다.[156] 자현 <붓다 순례> 340~343[157] 아시타 선인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를 사용한 은유이다.[158] 이는 석가모니 부처 가르침의 본령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통해서 수미일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59] 게으름이라는 뜻이다.[160] '방일'은 팔리어로 pamāda, 산스크리트어로 pramāda인데, 어떤 자극에 의해 정신이 마비된 것을 가리키는 말로 특히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 그것이 방일이다. 그러므로 '방일하지 않음' 즉 불방일(不放逸)은 그렇게 욕망에 취해 거기에 빠져 내키는 대로 사는 일이 없는 '마음이 깨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자제집중지속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방일하지 않음(불방일)'은 산스크리트어로는 apramāda, 팔리어로는 apamāda이다.[161] 모든 감정과 생각이 사라진 경지. 상수멸정이라고도 한다.[162] 이 사리를 진신사리라 한다. 그중 일부는 한국에도 전해져 몇몇 에 봉안되었다. 이중 신라시대 자장대사가 가져온 사리를 5군데 절에 모셨는데 이 다섯 절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그런데 사실 자장율사가 가지고 왔다는 진신사리는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받았다고 하기 때문에 출처가 불분명하다. 한국에서 사리 1과가 3과로 늘어난 기적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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