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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23호 | |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 |
소재지 | <colbgcolor=#fff,#1f2023> 충청남도 논산시 관촉동 254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2018년 4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시대 |
<colbgcolor=#315288>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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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충청남도 논산시 반야산(般若山)에 위치한 관촉사에 있는 거대한 석조 불상이다. 한반도에 현존하는 석조 불상 중에, 20세기 이전에 세워놓은 것으로는 가장 거대하다. 고려시대인 968년경에 조성됐다.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예로부터 영험하기로 유명하여 민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일반적으로는 흔히들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 부른다. 관촉사가 있는 곳의 옛 지명이 은진면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상 지명은 논산시 관촉동이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다가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이른바 '못생긴 부처님'으로 유명하며, 석굴암 본존불과 대비되기도 한다.
2. 내용
높이 18.12m, 둘레 9.9m로 국내 최대의 석불이다. 이 불상은 천연의 화강석 암반을 불상의 발로 조성한 대좌(臺座), 허리를 기준으로 하체와 상체, 그리고 면류관 형태의 보개(寶蓋)를 각각 조각하여 전체적으로 커다란 석재 4개를 다듬은 후 하나씩 얹어 거대한 불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고려 광종 때 반야산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 아낙이 다가갔더니 큰 바위가 땅에서 튀어나왔다. 신령한 돌이라 여겨 조정은 불상을 만들기로 하였다. 광종 21년(970)에 혜명(慧明) 대사가 석공 100명과 공사를 시작하여 37년이 지난 목종 9년(1006)에 돌을 다 다듬었지만, 너무 커서 합칠 방법을 찾질 못하였다. 혜명대사가 고민에 빠진 어느 날, 동자 2명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는 모습을 보고서 불상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동자들은 평지에 불상의 아랫부분을 먼저 세운 다음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 불상의 가운뎃부분을 위로 밀어 올리고, 다시 그 주변에 모래를 높이 쌓아 불상의 윗부분을 밀어 올리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훗날 이 마을은 모래 사다리라는 뜻으로 사제촌이라고 불렸다. |
한국사 교과서나 옛 학술지 등에서 '못생겼다'며 꽤나 폄하를 당했던 불상이다. 앞서 통일신라의 불상들이 사실적이고 근엄함을 강조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고려의 불상들이 상대적으로 조형미, 균형미 등 부족한 면모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이 은진미륵이 자주 꼽혔기 때문이다. 이는 통일신라가 새로 통일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수도 서라벌에서 형성된 귀족적 문화를 일률적으로 지방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국사의 석가탑과 거의 똑같게 생긴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이 북쪽 금강산, 북서쪽 황해도, 서쪽의 경기도나 충청도, 남서쪽 전라도에도 오래된 절이나 절터에 하나씩 있는 것이다. 반면 고려는 각 지방 호족의 연합으로 형성된 나라로서 각 지방의 불교미술도 전형적 양식을 벗어나 자유분방해지는데, 아무래도 일개 지방세력 단위다보니 수도의 중앙 귀족이 주도한 신라식 양식보다 균형미나 세련미는 떨어지는 느낌이 많다.
심지어 미술사학자 김원용은 '3등신에, 미련하게 생긴 얼굴, 불상이라기보다는 그냥 돌기둥, 신라의 전통을 잃어버린 한국 최악의 졸작'이라는 박한 평가까지 내릴 정도였다. 이런 평가를 한 이유는 비교하는 기준이 석굴암 본존불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에는 그 정도의 예술품을 만들 기술이 있었는데 고려로 넘어가면서 그 기술이 끊겼다며 기술의 퇴보를 한탄하면서 석굴암의 비교대상으로 지목한 것이 관촉사의 불상이었던 것. 상대인 석굴암 본존불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표준 석불로서 워낙 넘사벽이니 관촉사 불상 입장에서는 억울했을 듯하다.
하지만 후에 와서는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스타일로 재평가받았고, 이러한 점이 부각되면서 기존의 보물에서 2018년 4월 20일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물론 고명하신 학자님네들이 못생겼네 잘생겼네, 사실은 관음보살이네 미륵보살이네 하고 입방아를 찧건 말건, 관촉사 은진미륵은 예로부터 민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에 대해 전하는 현지 전승이 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죽어서 온 영혼에게 이승에 있을 때 개태사 가마솥과 관촉사 은진미륵을 봤느냐고 묻고는, 봤다고 대답하면 잘했다고 칭찬하고 못 봤다고 대답하면 '살면서 그것도 한 번 안 보고 뭐 했냐.'며 버럭 화를 낸다고 한다. 관촉사 은진미륵에 대한 민중들의 애정과 존중이 나타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구전되는 전승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불상이 완성되고 얼마 후 북방에서 고려를 침공한 오랑캐 무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압록강에 도달하자 삿갓을 쓴 승려 1명이 태연하게 강을 건너기에 이를 보고 오랑캐들도 그를 따라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승려와는 달리 오랑캐들은 물속에 빠져서 죽어버렸고, 화가 난 오랑캐 장수는 승려를 칼로 내려쳤으나 삿갓 한 귀퉁이만 베어졌다고 한다. 이 승려가 은진미륵 불상이 현신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은진미륵 불상 보개의 귀퉁이가 떨어져서 꿰맨 듯한 자국[1]이 있는데 이를 보고 만들어진 전설로 보인다. 이 밖에도 민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불상이라 그런지 전설이 많은데, 잘 정리된 유튜브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조하자.
무엇보다 예술적으로 퇴보했다고 평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것이, 불상의 눈동자의 검은 부분은 색칠한 것이 아닌 눈동자의 크기에 맞게 정교하게 깎고 다듬은 점판암을 박아넣어 장식한 것에 보관의 기둥부분에 뚫려있는 수많은 구멍에는 원래 수많은 금동장식들이 붙어있었다고 한다. 다시말해 퇴보했다고 보기에는 매우 정교한 조각기술의 사용과 장식성이 추구되었다는 이야기.
은진미륵 앞에 석등이 있고 그 앞에 미륵전이 있는데, 마치 적멸보궁처럼 이 건물에는 불상이 없는 대신 그 너머로 통유리창을 내어 법당 안에서 은진미륵을 볼 수 있게 해두었다.
참고로 호남고속도로지선을 타고 탑정호 인근을 지나다 보면 멀리서 이 은진미륵이 보인다. 워낙 특이하게 생긴데다가 엄청나게 커서, 보는 순간 바로 그 불상이라고 알아챌수밖에 없다.
3. 기타
- 충청남도 부여군 대조사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은 높이 10m로 관촉사 은진미륵보다 작지만, 전체적인 조형미가 거의 동일하다. 또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도 관촉사의 미륵불상 못지않게 거대한 불상이다.
- 2022년 4월부터 2023년 9월까지 보존 처리를 위한 공사를 진행했으며# 10월에 점안식을 마쳤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한국고중세사사전: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시사상식사전: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한국민속문학사전 - 설화 편: 관촉사은진미륵
- 두산백과: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5. 국보 제323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의 명으로 968년경 승려 조각장 혜명(慧明)이 제작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불로서,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8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가, 이번에 고려시대 신앙과 불교조각사에 있어서의 위상을 재평가 받아 국보로 승격하게 되었다.
석불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䟽)」를 비롯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이 참여하여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와 균제되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우아한 이상미(理想美)를 축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창성과 완전성 측면에서도 뛰어나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석불과 관련된 기록은 고려 말 승려 무외(無畏)가 쓴 「용화회소(龍華會䟽)」를 비롯해『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 고려 문인 이색(李穡, 1328~1396)의 시 등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당대 뛰어난 조각장이 참여하여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은 좌우로 빗은 머릿결 위로 높은 원통형 보관(寶冠)을 썼고 두 손으로 청동제 꽃을 들고 있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와 균제되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 등은, 한국 불상 중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을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우아한 이상미(理想美)를 축구한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을 담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 불교신앙과 조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독창성과 완전성 측면에서도 뛰어나 국보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1] 철근으로 보수한 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