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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대웅전 전경 |
대한민국 국보 제49호 | |
예산 수덕사 대웅전 禮山 修德寺 大雄殿 | |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수덕사안길 79 (덕산면, 수덕사)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불전 |
수량/시설 | 1동 |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
제작시기 | 고려 충렬왕 34년(1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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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수덕사의 대웅전으로,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건축 시기가 명확한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며, 한반도 목조건축물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이다.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선 시기에 건립됐다 보지만, 두 건물이 언제 건립되었다는 기록은 남은 것이 없고 중수 기록만 전해져서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은 중수 기록과 건축양식 등을 통해 대략적으로 건립연대를 추정하여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1962년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2.1. 상세
수덕사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4칸으로 된 목조건물로 단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1]으로 만들어진 주심포 건물이다.[2]수덕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고려 충렬왕 34년(1308)이다. 이와 같이 수덕사 대웅전의 건축 시기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인 1936-40년에 걸쳐서 대웅전을 완전 해체수리하던 중 대들보에서 건립연대를 적은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3] 물론 1308년 건립한 후 일제강점기까지 한 번도 수리가 없던 것은 아니고, 조선시대에도 수차례 수리했다.
수덕사 대웅전의 외형은 아주 특별난 것은 없고 오히려 단순한 편이지만, 크게 눈에 띄는 별다른 장식 없이 단정하고 정숙하여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건물의 맞배지붕이 상당히 장중한 인상을 줘서 무게감까지도 느껴지지만, 건물의 기둥을 한반도의 특징적인 고중세 목조건축 양식인 배흘림기둥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는 무게감을 약화시키고 안정적으로 보이게끔 한다. 이에 대해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수덕사 대웅전을 앞마당 아래쪽에서 정면 정관으로 올려다보면 지붕골이 아주 길고 높아서 지붕의 하중이 대단히 위압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더욱이 이 지역 백제계 건축들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은 것이 특징인바 그로 인하여 위압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 팽팽한 팽창감의 배흘림기둥이 탄력있게, 어찌 보면 상큼하게 지붕을 떠받치고 있어서 우리에게 하등의 시각적 불편이나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남도답사 일번지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에 건립 연도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절대 연도가 확실하여 한반도 건축사 연구에 중심이 되는 기준 중 하나를 제공하며, 대웅전 건물 그 자체로서도 고려 목조건축의 형태적인 아름다움이 잘 보존된 점과 같은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2.2. 수덕사 대웅전 벽화
앞서서 대웅전에 벽화가 있었다고 잠시 언급되었는데,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는 현전하지 않는다.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는 발견 당시 부석사 조사당 벽화와 함께 고려시대의 불교 벽화 작품으로는 유이하게 남은 대단히 귀중한 유물이었는데,[4][5] 대웅전 해체 수리 중의 벽화 발견 당시에도 이미 작품의 여러 군데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또한 벽화 전체적으로도 그림 형상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인 한계로 인해 벽화는 딱히 별다른 보존 처리 없이 벽과 함께 통째로 떼어진 채로 경내에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정확한 시기도 모를 언제인가 벽화가 완전 소실되어버렸다.[6]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당시에 벽화를 촬영한 사진과 벽화를 모사해서 그린 모사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벽화 사진은 18점이 남았는데 대웅전 해체수리의 공사감독이었던 오가와 게이기치(小川敬吉)가 찍은 것이고, 벽화 모사도는 고미술사가이자 동양화가였던 임천(林泉)이 꼼꼼하게 40개를 그린 것이다.[7] 하지만 임천이 그린 모사도 중 일부는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모사도의 일부와 사진은 모두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8]
수덕사 대웅전 벽화 중 공양화의 모사도 |
또한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는 고려시대의 벽화만 있던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그려진 벽화도 함께 있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졌던 벽화는 다섯 부처를 그린 오불도(五佛圖)로 그림의 중앙에는 석가여래를, 석가여래의 양옆에는 보살을 그리고 양쪽 끝에는 일월광불(日月光佛)을 그렸다.[9]
비록 원본은 소실되긴 했으나 사진과 모사도와 같은 기록이 남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만약에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 원본이 현대까지 보존되었다면 부석사 조사당 벽화와 함께 현전하는 유이한 고려의 불교 벽화 작품이자 고려와 조선의 불교 벽화를 함께 볼 수 있는 대단히 드문 유물로서 당연히 국보로 지정됐을 귀중한 작품이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수덕사 대웅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한국 최고의 목조 건축, 수덕사 대웅전
- 한국건축사: 수덕사 대웅전
- 한국고중세사사전: 수덕사 대웅전
-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사진으로보는 한국전통건축): 대웅전
- 답사여행의 길잡이 4 - 충남: 수덕사 대웅전
- 두산백과: 예산 수덕사 대웅전
4. 국보 제49호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의 하나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의 하나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1] 맞배지붕은 지붕 양식 중 하나로 옆면을 보았을 때 팔(八)자형으로 된 지붕면이 크게 노출되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 두산백과 - 맞배지붕[2] 주심포(柱心包)는 목조건축의 한 가지 방식으로 한반도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다.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주심포[3] 참고문헌에 따라서는 1928년 대웅전의 단청을 새로 칠할 때 발견된 벽화 뒤에서 至大元年 武申 四月十七日 立柱(지대원년 무갑 사월십칠일 입주)라는 묵서명이 발견되었다고도 한다. 출처: 한국건축사 - 수덕사 대웅전[4] 애초에 벽화로만 한정할 것도 없이 회화 전체로 그 범위를 넓혀봐도, 고려의 회화 작품 자체가 불교 회화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 몇 점 되지 않는다. 고려 이전의 회화 작품은 무덤 벽화, 암각화 및 장례용 부장품에 그려진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제대로 전해지는 것이 실질적으론 단 한 개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5]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의 회화 작품은 영주시 지역에 위치한 고분 벽화 2점과 장례용 부장품인 천마도를 제외하면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10, 44~50에 그려진 변상도와 초화문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는 안타깝게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진 않다. 그나마 이거라도 있는게 다행이지만.. 그래도 범위를 넓힌다면 암각화 및 비문에 새겨진 그림이 몇 점 남아 있긴 하다.[6] 아마도 해방공간의 혼란한 때나 혹은 6.25 전쟁의 난리통에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7] 참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임천[8]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건립 연대를 알 수 있는 한국 최고의 목조 건축, 수덕사 대웅전,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회화 - 수덕사 대웅전 벽화 모사도[9] 출처: 두산백과 - 수덕사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