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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0:54:11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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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라스코(Lascaux) 동굴에 그려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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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벽에 그려진 현대의 벽화.

1. 개요2. 상세
2.1. 선사시대의 벽화2.2. 고대의 벽화2.3. 현대의 벽화
3. 관광지
3.1. 고대 벽화3.2. 현대 벽화
4. 같이 보기

1. 개요

벽화(, mural)란 벽에 그린 그림을 뜻한다.

2. 상세

2.1. 선사시대의 벽화

인류는 구석기 시대부터 벽에 그림을 그려왔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동굴 벽화가 발견되고 있다. 동굴 벽화에는 주로 동물의 형상이 있는데, 그것을 숭배하거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서 그렸을 거라고 추측한다. 혹은 그려놓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에 성공하기를 기원하며 그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선사시대 벽화를 보면 당시 그 지역에 살던 동물들이 무엇이 있었는지, 원시인들이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도 알 수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처음 선사시대 벽화가 발견되자 그렇게 긴 기간 유지되는 것이 미스터리였으나 이후 석회벽의 탄산칼슘이 습해져 녹아 탄산수소칼슘이 되고 다시 탄산칼슘으로 굳길 반복하고 버틴 것이다.

2.2. 고대의 벽화

구석기 시대뿐만 아니라 이집트피라미드고구려 고분벽화, 백제, 발해왕릉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고대 한국의 고분벽화는 대부분 고구려나, 혹은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나 신라 영역에 있더라도 고구려의 영향을 받을만한 국경지대에나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구려는 무덤 벽에 이것저것 많이 그려놓은 편. 백제는 무덤 구조가 고구려와 비슷하지만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백제 고분 중 그나마 벽화가 있는 것도 고구려 벽화처럼 이것저것 많이 그려넣지는 않는 편이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의 초~중기 고분은 구조가 달라 벽화가 없다. 무덤 안에 '방'이 있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은 시신과 부장품을 나무로 된 널에 넣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나무널이 썩어 없어지면서 돌이 무덤 안을 빈틈없이 가득 파묻어 채우는 형태라 벽화를 그릴 벽이 없기 때문이다.[1] 신라시대 그림으로 유명한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는 벽화가 아니라 말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덮는 '장니'에 그려진 그림이다. 각종 시험에서 여러 보기 중 고구려 벽화 사이에 벽화가 아닌 천마도를 은근슬쩍 끼워넣는 낚시 문제가 자주 나온다.

그러다 신라 후기에 들어서 묘제가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하면서 일부 고분에서 벽화의 희미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영주시 순흥 어숙묘나[2] 경주시배동 삼릉은 벽면을 채색한 흔적이나 희미하게 그려진 연화무늬나 인물상을 확인할 수 있다. 가야권에서도 대가야가 위치했던 고령 고아리 벽화고분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연꽃무늬 벽화가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가야 고분벽화이다.

2.3. 현대의 벽화

근현대에 들어서는 벽화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실내가 아닌 공공장소에 그려지는 벽화는 대중에게 노출되어 쉽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특히 사회 리얼리즘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통의 예술가들이 벽화에 집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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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리베라, 멕시코 대통령궁 벽화, 1945년 작
아즈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의 시장을 묘사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멕시코 혁명 직후 발생한 멕시코 벽화운동이다. 혁명으로 세워진 신정부는 대중 교육 및 계몽을 목적으로 문화 장려 정책을 펼쳤다. 그 일환으로 1920년대부터 디에고 리베라[3], 클레멘트 오로스코, 다비드 시케이로스 등을 중심으로 하여 멕시코 각지에 멕시코의 역사와 신화를 소재로 한 수많은 벽화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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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샨, 뉴저지 홈스테드 벽화, 1936~38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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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 《마약은 쓰레기야》, 뉴욕 시, 1986년 작품

미국에서는 대공황 시기에 실업자가 된 예술가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이들을 지원하는 대신 공공시설(특히 우체국)에 벽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이때 활동한 화가로는 벤 샨(Ben Shahn)이 유명하다. 7~80년대에 그래피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키스 해링 역시 벽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미국에서는 필라델피아가 벽화의 성지로 유명하다.

현대에는 미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지하철이나 오래된 건물이나 담에 그린다. 이걸 잘하면 설령 달동네라고 할지라도 도시 미관이 크게 개선될 수 있으며, 심지어 관광지로 거듭나게 될 수도 있다. 관리를 안 하면 다시 요요현상 다만 벽화를 그릴 땐 해당 건물의 주인 혹은 지역의 관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벽화' 소리를 듣지, 안 그러면 그냥 '낙서'고, 개인의 재산 혹은 공공기물을 훼손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데도 가끔가다 허가 없이 벽화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유명한 벽화 마을에는 부산광역시감천문화마을, 인천광역시송월동 동화마을, 광주광역시양림동 펭귄마을, 통영시동피랑 마을[4]이 있다. 드라마 《카인과 아벨》, 《제빵왕 김탁구》 촬영지로 유명한 청주 수암골에도 벽화를 그려놓았다.

그러나 도시재생이랍시고 주로 못 사는 동네에서 너도나도 벽화를 자주 그려놓다 보니 반대로 잘 사는 동네에서는 벽화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컬러풀하게 외벽을 꾸미는 걸 경박하고 집값 떨어뜨리는 것 같다며 금기시하는 반작용이 일어났다. 또한 벽화를 그리는 인력으로 실력 미달의 인원들을 선출하여 그린 벽화의 질이 떨어져 되려 도시미관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해 갈색, 검은색 등 무채색 계통을 고급스러운 색깔로 선호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담벼락 그림, 도시 살릴까

3. 관광지

3.1. 고대 벽화

3.2. 현대 벽화

4. 같이 보기


[1] 벽화는 없지만 이 덕분에 유물들이 엄청난 양의 돌무지에 파묻히게 되므로 도굴이 어려워, 고구려와 백제 무덤은 이미 옛날에 다 도굴당해서 무덤 속이 벽화만 빼고는 텅 비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신라 무덤은 껴묻거리가 보존된 경우가 많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금관이나 허리띠 같은 것도 무덤의 구조상 도굴이 어려워 현대까지 남은 덕분이다.[2] 영주는 경상도 최북단으로 고구려 전성기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역이었다. 즉 양국의 접경지역으로 서로의 문화적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영주 안에는 또다른 벽화고분인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도 있지만, 순흥 읍내리 고분은 고구려계 고분이고 이 어숙묘는 (고구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더라도) 신라 고분으로 파악되고 있다.[3]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다.[4] 이 마을에 그려진 벽화 중에는 하츠네 미쿠카가미네 린·렌이 그려진 것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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