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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315호 |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 |
소재지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길 313, 봉암사 (원북리)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수량/면적 | 1기 |
지정연도 | 2010년 1월 4일 |
제작시기 | 924년 |
<colbgcolor=#315288>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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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희양산에 있는 봉암사 경내에 위치한 편마암(비신)과 화강암 귀부[1]로 구성된 비석으로 통일신라 말기인 924년에 세워졌다.봉암사는 신라 하대의 구산선문[2]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 열린 사찰로, 신라 헌강왕 5년(879) 지증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천 년도 더 전에 창건된 봉암사는 번창과 몰락을 반복하면서 현재까지 계속 명맥을 이어왔으며, 역사가 깊은 사찰이니만큼 지증대사탑비 이외에도 다수의 유물들이 전해져 온다.[3][4]
본 지증대사탑비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글을 쓴 4개의 비문[5] 중 하나이며,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일생에 관한 서술과 그를 기리는 내용, 그리고 희양산문인 봉암사의 내력을 서술하면서 당대 불교계의 상황도 함께 전하였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1963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에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지증대사탑비는 현재 봉암사에 지증대사의 사리를 모신 지증대사탑과 함께 보호각 안에서 보존된다.
2. 내용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879년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824-882)가 신라 헌강왕 8년(882년)에 봉암사에서 입적한 지 40년이 지난 후인 경애왕 원년(924년)에 세워졌다. 비에 적힌 비문을 토대로 추측해보았을 때, 최치원이 비문에 쓰일 글을 작성한 것은 진성여왕 7년(893년)인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본 비석은 최치원이 글을 쓴 지 30년이 지난 후인 924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에 적혀 있다.지증대사탑비는 총 높이 약 4.1m, 비신의 높이는 약 2.7m이며, 세워진 지 천 년 이상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비석과 지붕돌 그리고 귀부는 일부 깨지고 손상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현대까지 거의 온전하게 전해졌으며 비석에 적힌 비문도 역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비석이나 귀부는 당대 신라 말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비문에 적힌 글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최치원이 썼고, 글씨는 분황사의 승려 혜강이 새겼다고 비문에 적혀 있으며 서체는 왕희지의 영향을 받은 행서로 적혀 있다.
지증대사탑비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비석에 적힌 그 내용이다. 우선, 탑비를 세운 연대와 글씨를 새긴 사람이 비문에 명시되어 있다는 점은 서예사적인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치원은 지증대사의 전기를 기술하면서 신라의 불교, 특히 선종이 전래된 역사와 계보를 서술하고 있으며 구산선문 가운데 본 탑비가 세워진 희양산문 이외의 다른 선문들의 개창자들에 대해서도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 내용을 통해 그 유래부터 비문에 서술된 시기까지의 선종의 법통을 상당히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이는 현전하는 거의 유일한 1차 사료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기록물이다.
지증대사탑비는 이러한 점들 외에도 신라 하대의 사회상이나 제도 등에 대한 귀중한 사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중요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비문에 언급되는 여러 인물 중에 무관이었던 김팔원(金八元)이 집사시랑(執事侍郞)이라는 관직을 지냈다고 나오는데,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에도 그가 언급되며 이를 통해 교차검증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팔원 외에도 아질미(阿叱彌)라는 사람이 탑비를 세울 때 참여했다는 것도 언급된다. 탑비에 적힌 아질미에 대한 서술에서 西□大將軍着紫金魚袋蘇判(서□대장군 착자금어대소판)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그의 직함이 서□대장군이었고 자금어대라는 것을 착용한 소판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그가 문경 지방의 호족이었고 희양산문의 후원자였을 것이라는 점도 추측할 수 있으며, 이로 미루어 보아 신라 하대 산문의 개창에 지방 유력자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신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백제에 존재했던 소도에 대한 언급도 명문 중에 나오는데, 이는 현재 전해지는 것 중에서 소도에 대해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위와 같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가 가지는 가치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살펴봤을 때 상당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탑비가 가지는 문화재적,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었기에 1963년 1월 21일에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138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1월 4일에는 본 탑비가 지닌 중요성을 고려하여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제315호
이 석비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창자인 도헌국사(道憲國師) 곧 지증대사(智證大師)의 탑비로서, 비석의 크기나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 등이 통일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비문에는 신라의 불교사를 3시기로 나누어 약술하고 도신(道信)-법랑(法朗)-신행(愼行)-준범(遵範)-혜은(慧隱)-도헌(道憲)으로 이어지는 도헌국사의 법계(法系)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신라하대의 불교사 특히 선종사(禪宗史) 연구의 중요한 1차 사료가 된다. 이 비는 당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그가 비문을 지은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와 함께 4산비문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탑비로서, 그 학술적 가치가 일찍부터 높이 평가되어온 것이다. 이 비에는 탑비를 세운 연대가 밝혀져 있을뿐 아니라, 비문을 쓰고 각자(刻字)한 사람이 분황사의 승려 혜강(慧江)임이 밝혀져 있어서 한국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저자 최치원은 여타 전기자료와는 달리 지증대사의 일생 행적을 여섯 가지의 신이(神異)한 사실〔육이(六異)〕과 여섯 가지의 훌륭한 행적〔육시(六是)〕으로 정리하고, 예를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다른 비문에서는 볼 수 없는 전기 서술의 한 특징이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
한편, 이 비문에는 신라 하대의 인명, 지명, 관명, 사찰명, 제도, 풍속 등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신라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왕토사상(王土思想) 및 사원에 토지를 기진(寄進)하는 절차를 알려주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신라 말 선종 산문의 개창이 지방 유력자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명확한 기록이 비문 중에 밝혀져 있고 비 건립의 후원자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것도 이 비가 갖는 의의를 높여 준다. 또 사원 운영의 주체인 사직(寺職)의 구체적인 모습이 확인되는 신라 유일의 비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이 비문에는 백제의 소도(蘇塗)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백제 소도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국내 유일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이 탑비는 고비(古碑)로, 지증대사의 전기자료적 가치는 물론이고, 한국고대사 특히 신라선종사·서예사·한문학사 등 한국고대문화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갖는 탑비로 평가된다.
[1] 거북이 모양 비석 받침돌.[2] 九山禪門. 신라 하대에 발생한 9파의 승려집단으로, 당대 신라의 지배적인 불교 교파였던 교종에 반대하여 선종을 기치로 삼았다. 지증대사가 세운 희양산 봉암사를 시작으로 총 아홉 산들에 창건된 아홉 산사들에서 선종의 가르침을 따랐기에 구산선문이라 불린다.[3] 봉암사 경내에 있는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제137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 보물 제169호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 보물 제171호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 보물 제172호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보물 제1574호 문경 봉암사 극락전, 보물 제1748호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등의 국가 중요 문화재들이 있다.[4] 아쉽게도 봉암사에 다수 남아 있는 문화재들은 일반인들은 쉽게 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바로 봉암사가 대한불교조계종의 특별수도원이기 때문이다. 봉암사는 평소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일반인이 봉암사에 방문할 수 있는 날은 오직 부처님오신날뿐인데 이마저도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출입 통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봉암사 홈페이지에 방문하면 확인이 가능하다.[5] 이를 4산비문, 혹은 사산비명이라고 일컫는다. 지증대사탑비 외의 나머지 3개는 경주 초월산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제47호)가 있다. 이 중 다른 셋은 지금까지 비석 실물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현전하지 않고 일부 파편만이 남아 있다. 다만 숭복사비의 내용은 따로 후대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겨 지금까지 전해진다. 현재 경주시 숭복사 터에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