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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43호 | |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和順 大谷里 靑銅器一括 | |
소재지 | 광주광역시 북구 하서로 110, 국립광주박물관 (매곡동,국립광주박물관) |
분류 | 유물 / 생활공예 / 금속공예 / 무속구 |
수량/면적 | 일괄(11점) |
지정연도 | 1972년 3월 2일 |
제작시기 | 시대미상 |
1. 개요
[clearfix]和順 大谷里 靑銅器一括.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은 약 기원전 3세기 후반 청동기 시대에 만들었다고 추정하는 청동기들의 세트다.
본 청동기 유물들은 1971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 위치한 민가의 땅속에서 발견되었는데,[1] 저때까지 청동기 유물이라고 알려진 것들은 태반이 도굴로 유출되어 출토지가 불명확했다. 제작양식이나 형태로 보아서 청동기 시대 유물이리라고 추정하는 정도였지, 이 외의 정보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2]
하지만 화순군 대곡리에서 출토된 본 청동기 유물들은 출토위치가 명확하여 학술조사로 유물들의 제작 시기나 유물들이 부장된 무덤의 양식[적석목관묘(積石木棺墓)[3]]과 같은 귀중한 정보를 알아내었고, 후에 실시한 학술발굴에서 추가적으로 유물을 더 수습하는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은 여섯 가지 종류 청동기 총 11점인데, 모두 일괄로 묶어서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되었다.
2. 내용
2.1. 발견 경위
화순 대곡리 청동기들은 발견 경위가 드라마틱하다. 이 유물들이 세상에 드러난 데에는 천운이 따랐다.1971년 어느 날[4]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에 거주하던 구재천(具在天)이 본인 집에서 빗물 배수로 작업을 하느라 땅을 파다가 땅 속에서 본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괴상한 금속기구라 용도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발견한 유물들을 얼마간 보관하다가 때마침 동네를 방문한 엿장수에게 돈(혹은 엿) 약간을 받고 이것들을 고물로 넘겼다. 유물들을 받은 엿장수는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이후에 전라남도청에 이 유물들을 신고했고, 전라남도청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이와 같은 신고가 들어왔다고 전달하였다.
신고로부터 4개월 정도가 흘러 1971년 12월 20일에 당시 문화재관리국 학예사 조유전이 전남도청을 방문했다. 이때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은 엿장수가 신고하며 맡긴 유물들을 보관하다가 조유전에게 보여주었다.[5] 보자마자 귀중한 유물임을 직감한 조유전이 다시 보고를 올리자, 문화재연구소는 연구사를 비행기 편으로 현장에 바로 파견했다. 나흘 뒤 24일에는 긴급수습조사 형식으로 화순 대곡리 현장을 조사했다.
1971년 12월 24일 현장조사로 본 유물들이 발견된 무덤을 발굴했고, 여기서 목관의 흔적과 목관 위를 덮은 깨진 돌들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조사는 하루 만에 급하게 끝났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 본 유물들의 발견은 언론에 대서특필되었고, 문화재적인 가치가 아주 높게 평가되어[6] 유물들의 출토지가 확인된 지 넉 달밖에 안 된 1972년 3월에 11점 모두 국보 제143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하지만 발굴장소는 민가였기 때문에 따로 국가지정사적이나 시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 및 관리되지는 않았고, 본 유물들의 발견지라는 푯말만 구재천 집 옆에 세웠다. 그리고 이후 시간이 37년이 흘러서 2008년, 집주인 구재천도 떠나 집은 버려져 폐허가 되었고 대나무가 숲을 이룰 정도로 빼곡히 자라서 주변 정리가 필요했다. 또한 1971년 실시했던 현장조사는 긴급조사라 다소 미흡한 부분이 있었기에, 국립광주박물관이 주관하여 2008년 2월 13일부터 21일까지 재조사를 실시했다. 여기서 추가로 세형동검 2점을 더 발견했다.[7] 이로서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6종 13점이 되었다.[8] 이 13점 모두 국립광주박물관 선사문화실에 전시 중이다.
하마터면 고물로 사라져버렸을 귀중한 청동기 유물들이 엿장수의 신고 덕분에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엿장수의 정체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2.2. 상세 내용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을 처음 발견했던 구재천의 회고에 따르면, 목관의 동남쪽 모서리에 잔무늬 거울[9] 2점, 목관의 서북쪽에 세형동검 1점과 서남쪽 끝에 세형동검 2점이, 동쪽으로 팔주령 2점과 쌍두령 2점이 나란히 놓이고, 서쪽에 청동 새기개[10]와 청동 도끼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재조사 때 통나무 관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남벽석 가까이의 통나무 관 밑에서 세형동검 2점이 추가로 발견되었는데, 이 동검들은 관의 외부에 부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1]국보 제143호로 지정된 11점의 청동기 유물 일괄은 6가지로 분류한다.
한편 2008년에 추가 수습된 세형동검 2점은 모두 연마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2점 모두 길이가 30cm 가량으로 1971년 발견된 것들과 크기가 비슷하다.
상단 : 청동 도끼 / 하단 : 청동 삭도 |
다섯째로는 청동 도끼가 있다. 삭도와 마찬가지로 무덤 주인의 발치 쪽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현대에 사용하는 손도끼의 도끼날과도 흡사한 형태로, 한쪽에 날을 세우고 다른 쪽에는 자루를 끼울 수 있게 홈이 파였다. 자루를 끼우는 부분에는 가느다란 선 4개로 장식했다. 몸체 길이는 7.6 cm, 날 길이는 약 4 cm 가량이다. 본 도끼 1점은 국보 제143-5호로 지정되었다.
큰 정문경 | 작은 정문경 |
본 유물들이 부장된 무덤의 수습 조사를 진행하면서 발견된 나무 조각을 시료로 해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시행한 결과 현대로부터 대략 2560±120년 전(대략 기원전 5-6세기) 유물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들의 종류로 보면 아마도 기원전 3세기 후반경의 유적이자 유물들이라고 추정한다. 이 시기는 고대의 청동기 제작 기술이 가장 정점에 올랐던 시기다.[12]
한편 청동기들의 제작수준이 높고 종류도 다양하며 수량도 많은 데다 종교적인 귄위를 나타내는 유물(금속방울, 청동거울)과 정치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유물(청동검)이 동시에 발견되었으므로, 아마도 무덤에 묻힌 사람은 신분이 높은 지배층이자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이 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제정일치 사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화순 대곡리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들의 보존상태는 양호하고 그 수량과 종류도 매우 많고 다양하여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종교적, 장례 의례와 당대 사회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한 청동기들의 제작 기법도 뛰어나서 이를 통해 당시 고대 한반도의 청동기 제작 기술이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은 유물들의 출토지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청동기들은 역사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 1972년 3월 2일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세형동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 팔주령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쌍두령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동사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 투겁 도끼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 다뉴세문경
- 한국 미의 재발견 - 선사 유물과 유적: 화순 대곡리 유적
-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유물
- 두산백과: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4. 국보 제143호
전라남도 화순군 대곡리 영산강 구릉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무덤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출토된 청동기 유물 중 세형동검(청동검) 3점·청동팔령두 2점·청동쌍령구 2점·청동손칼(청동삭구) 1점·청동도끼(청동공부) 1점·잔무늬거울(청동세문경) 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세형동검은 양 끝에 날이 서 있으며, 그 중 1점은 칼날 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동검 중앙에 굵게 나온 등대의 모습이 칼마다 다른 것이 특징이며, 한국에서 출토되는 동검으로는 시대가 늦은 편이다.
청동팔령구는 8각형의 별모양으로 생겼으며, 각 모서리에 방울이 달려 있다. 그 안에 청동구슬을 넣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 것으로, 주술적·종교적인 의식용 도구로 보여진다. 방울 표면에는 고사리문양이 새겨져 있다.
청동쌍령구는 양끝에 방울이 있고 마찬가지로 그 안에 청동구슬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 주술적·종교적인 의식용 도구로 짐작된다.
청동손칼은 공구류의 일종으로, 현재 조각칼의 용도로 보이는 것이다. 바닥은 평평하고 날의 끝이 일부 부러진 모습을 한다.
청동도끼는 한쪽면에 날을 세우고, 반대쪽에 자루를 끼울 수 있게 홈이 파인 형태의 도끼이다. 홈이 파인 쪽에는 어깨가 있으며, 폭에 비해 길이가 짧다.
잔무늬거울은 거울면에 광택있는 녹으로 되어 있지만 상태가 양호하며, 거울 뒷면에 기하학적인 문양과 거울을 매달 때 사용하는 두 개의 뉴가 달려 있다.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유물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제작기법이 뛰어나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일괄유물로서 당시 금속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출토된 청동기 유물 중 세형동검(청동검) 3점·청동팔령두 2점·청동쌍령구 2점·청동손칼(청동삭구) 1점·청동도끼(청동공부) 1점·잔무늬거울(청동세문경) 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세형동검은 양 끝에 날이 서 있으며, 그 중 1점은 칼날 부분이 손상되어 있다. 동검 중앙에 굵게 나온 등대의 모습이 칼마다 다른 것이 특징이며, 한국에서 출토되는 동검으로는 시대가 늦은 편이다.
청동팔령구는 8각형의 별모양으로 생겼으며, 각 모서리에 방울이 달려 있다. 그 안에 청동구슬을 넣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 것으로, 주술적·종교적인 의식용 도구로 보여진다. 방울 표면에는 고사리문양이 새겨져 있다.
청동쌍령구는 양끝에 방울이 있고 마찬가지로 그 안에 청동구슬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나는 주술적·종교적인 의식용 도구로 짐작된다.
청동손칼은 공구류의 일종으로, 현재 조각칼의 용도로 보이는 것이다. 바닥은 평평하고 날의 끝이 일부 부러진 모습을 한다.
청동도끼는 한쪽면에 날을 세우고, 반대쪽에 자루를 끼울 수 있게 홈이 파인 형태의 도끼이다. 홈이 파인 쪽에는 어깨가 있으며, 폭에 비해 길이가 짧다.
잔무늬거울은 거울면에 광택있는 녹으로 되어 있지만 상태가 양호하며, 거울 뒷면에 기하학적인 문양과 거울을 매달 때 사용하는 두 개의 뉴가 달려 있다.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유물들은 종류가 다양하고 제작기법이 뛰어나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일괄유물로서 당시 금속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1]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는 영산강의 지류인 지석천 인근에 위치한다.[2] 다행히도 2020년 현재 시점에는 정식 학술 발굴조사로 출토된 청동기 유물들이 상당히 늘어나서 대한민국 전국 각지의 박물관에 소장되었다.[3] 돌무지덧널무덤과는 다르다.[4] 여름이었던 듯하다.[5] 일부 관련 자료들에서는 1971년 12월 20일 엿장수가 전남도청에 신고했다고도 하는데 오기록인 것 같다.[6] 이 당시만 해도 본 유물들 이외에는 출토지가 명확한 청동기 시대 유물이 없었고, 그나마 청동기 시대 유물인 듯한 것들은 죄다 '어디어디서 발견된 것이라 카더라' 라는 정보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7] 2004년에도 전남대학교 박물관 팀에서 조사하긴 했지만 이때는 추가유구를 발견하지 못했다.[8] 2008년에 발견된 세형동검 2점은 국보 제143호에 추가지정되지는 않았다.[9] 다뉴세문경 또는 정문경으로도 부른다.[10] 손칼이나 동사 또는 삭도라고도 한다.[11]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12]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선사 유물과 유적 - 화순 대곡리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