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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제117호 |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 |
<colcolor=#fff>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전라남도 장흥군 |
분류 | 유물 / 불교조각 / 금속조 / 불상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1963년 2월 21일 |
제작시기 |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 |
1. 개요
長興 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 서기 859년(통일신라 헌안왕 3년) 제작되어 현 전라남도 장흥군의 보림사에 봉안되어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상. 현재 장흥 보림사(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로 224)에 소재 중이며,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었다.2. 내용
불상 높이 2.51 m, 무릎 너비 1.97 m.
현재 장흥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 철제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어지고 불신(佛身)만 남았다. 신라 하대에 유행했던 철제 불상으로 상체에 비해 하체가 큰 편이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부분에 불상조상기 8행이 양각되었다.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當成弗時釋迦如來入滅
당성불시석가여래입멸
後一千八百八年耳此時
후일천팔백팔년이차시
情王卽位第三年也
정왕즉위제삼년야
大中十二年戊寅七月十
대중십이년무인칠월십
七日武州長沙副官金邃
칠일무주장사부관김수
宗聞奏 情 王▨八月[1]
종문주 정 왕▨팔월
廿二日勅下令▨躬作不[2]
입이일칙하령▨궁작불
覺勞困也
각로곤야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情王(헌안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858)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진주하여, 정왕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당성불시석가여래입멸
後一千八百八年耳此時
후일천팔백팔년이차시
情王卽位第三年也
정왕즉위제삼년야
大中十二年戊寅七月十
대중십이년무인칠월십
七日武州長沙副官金邃
칠일무주장사부관김수
宗聞奏 情 王▨八月[1]
종문주 정 왕▨팔월
廿二日勅下令▨躬作不[2]
입이일칙하령▨궁작불
覺勞困也
각로곤야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다. 이때는 정왕情王(헌안왕) 즉위 3년이다. 대중 12년(858) 무인 7월 17일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진주하여, 정왕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기록 맨 앞에는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 후 1808년"이라고 했는데, 1950년대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대승불교계는 석가모니가 기원전 1027년에 태어나 일흔아홉 살이 되는 기원전 949년에 사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기원전 949년을 석가모니 입멸 1년으로 삼아 1808년이 되는 해를 따지면 서기 859년이고 헌안왕 3년이다. 명문에서도 석가모니 입멸 후 1808년이 정왕(헌안왕) 즉위 제3년이라고 했으므로 일치한다.
다음 문장에는 대중(大中)이란 연호가 나온다. 당나라 선종이 사용하던 연호로, 대중 12년은 서기 858년, 헌안왕 2년이다. 명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58년(헌안왕 2년) 7월 17일에 당시 무주(武州)와 장사(長沙)의 부관(副官)으로 있던 김수종(金遂宗)[3]이 불상을 만들자고 왕에게 주청을 올리자 왕이 허락하였으으로 발원하여 이듬해(859) 완성하였다. 또한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의 탑비(塔碑)[4]에 따르면 859년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이 사재를 들여 2500근짜리 노사나불(盧舍那佛)을 주성하였다고 하므로, 위의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이 불상은 858년에 착수되어 859년에 완성되었음을 교차확인할 수 있다.
이 불상은 국보 제233-1호로 지정된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766년 제작) 다음으로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년명 비로자나불상인데, 현재 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철불 중에서는 가장 이르다.[5] 법보신문 : 조성시기 확인된 두 번째 오래된 불상, 통일신라 불상 편년문제 실증에 중요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불교언론 : 철불 조성의 배경 문제
이 때문에 이 철조 불상은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9세기 후반 한국에서 철이라는 소재로 불상을 만드는 새로운 양식의 선구적인 걸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에 1963년 2월 21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3. 복원
사진 출처 : 천지일보 - 문화재, 미숙한 보존 처리 ‘안 한만 못해’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본 불상과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학계에서 언론에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두 불상에는 아래와 같은 문제가 있었다.
잘못된 보존처리로 인한 문제점은 바로 국보 제63호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통해 드러났다. 비전문가가 가장 기본적인 보존 원칙을 무시한 채 보존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도피안사 불좌상의 경우 1988년에 도금공이 개금했는데 개금 당시 녹을 제거하지 않고 면이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것이 드러났고, 보림사 불좌상의 경우에는 전문 지식이 없는 비전문가가 임의로 보존처리해 색상이 변하는 등 처리 전과 달라진 불상이 돼 종교 미학적 가치를 떨어뜨렸다며 논란이 됐다.
지난 2일 ‘문화유산 보존원칙과 합리적 판단’이란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이수정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보존가로서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당분야에 대한 세부적인 전문 지식도 필요하지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논리적 사고력도 함께 길러야 한다”고 꼬집었다.
도피안사 불좌상의 경우 1988년에 도금공이 개금했는데 개금 당시 녹을 제거하지 않고 면이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칠을 하고 금박을 입힌 것이 드러났고, 보림사 불좌상의 경우에는 전문 지식이 없는 비전문가가 임의로 보존처리해 색상이 변하는 등 처리 전과 달라진 불상이 돼 종교 미학적 가치를 떨어뜨렸다며 논란이 됐다.
지난 2일 ‘문화유산 보존원칙과 합리적 판단’이란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심포지엄에서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이수정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보존가로서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해당분야에 대한 세부적인 전문 지식도 필요하지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논리적 사고력도 함께 길러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 두 국보 불상들은 1980년대에 한 번 정부가 주도하여 보존처리를 했지만, 여러 가지로 미숙하고 부실해서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일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두 불상 모두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새로이 보존처리 작업을 받았다.연합뉴스 : "철불(鐵佛)에 웬 금박(金箔)?"
2007년 7월에 두 불상의 최종 보존처리 모습이 공개되었다.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황금옷 벗다 개금 벗겨내고 맨살 드러낸 '철불의 온화한 미소'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5 - 전남 :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한국사전연구사 한국불교미술대전 :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 두산백과 :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5. 국보 제117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의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1] 이 행에서 정(情) 자를 앞뒤로 다른 글자와 한 칸씩 벌림은 원문 그대로이고 실수가 아니다. 정(情) 자가 임금의 이름이기 때문에 존경을 표하는 의미로 벌린 것이다. 한문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 또는 그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을 쓰면서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한 칸 벌림은 나대(挪抬)라 부르는데, 한문 글쓰기의 한 가지 격식이다.[2] 입(廿) 자는 숫자 20을 뜻한다.[3] 신라 제42대 국왕인 흥덕왕의 이름도 김수종이지만, 한자도 다르고 시대도 수십 년 차이가 난다.[4]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884년 제작.[5] 물론 아직 연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철불 중에는 이보다 연대가 더 이른 작품도 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 철불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보원사지 출토 철제여래좌상이 꼽힌다. 하지만 이는 아직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으므로 확실히 연대가 밝혀진 철불 중에서는 본 불상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인정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