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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보 | |
부안 내소사 동종 扶安 來蘇寺 銅鍾 | |
<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 의식법구 |
수량/면적 | 1구 |
지정연도 | 2023년 12월 26일 |
건축시기 | 1222년(고려 고종 9년) |
<colbgcolor=#315288> 부안 내소사 동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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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扶安 來蘇寺 銅鍾. 부안 내소사 동종은 고려 후기 금속공예의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동종이다. 높이 103cm, 입지름 67cm의 크기이다.2. 내용
고려 고종 9년(1222)에 주조되었다. 고려 후기의 금속공예의 걸작으로 꼽힌다.전북 부안군 내소사에 있지만, 원 위치는 내소사가 아니다. 처음 청림사에 봉안되었다가 1850년(철종 1) 내소사로 옮겨졌는데,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옮겼다. 이를 기록한 이안기(移安記)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853년(철종 4)에 쓰여졌으며, 몸체에 음각으로 남겨져 있다.
이 종을 만든 장인은 한중서(韓冲叙)라는 사람이다. 이 종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 활발히 활동했던 장인이었다.
종 몸체에는 조성 당시 쓰여진 명문도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扶寧邊山中有靑林
三韓前寺革古鼎今
堂宇宏麗禪侶盍簪
命白公等鑄發鯨音
停離輪苦警悟昏沉
凡有耳者開覺本心
壬午六月日社主禪師湛黙誌
貞祐十年六月日社主禪師湛黙記
貞祐壬午六
月初七日邊山
鑄成入重七百
斤 棟梁
道人 虛白
道人宗益
匠 韓冲叙(以上原銘)
余己酉九月七日卜居
靑林翌年九月七日鑿
此金鐘移懸于來蘇寺
銘曰性保金剛體法轉
輪聞聲悟心花開實新
崇禎紀元後四癸丑九月
二十七日隱士金性圭記
而施焉 持殿完岩正宇(以上追銘)
청림사(靑林寺)의 명(銘)
부녕(扶寧)의 변산(邊山)에 청림사(靑林寺)가 있으니
삼한(三韓)의 옛 절은 없어지고 지금 다시 세워졌다
건물[堂宇]는 크고 화려하며, 선승(禪僧)들이 많이 모이니
백공(白公) 등에게 명하여 종을 만들도록 하였다.[鑄發鯨音]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어지럽고 막힌 것을 깨우치게 하리니
무릇 귀가 있는 이들은, (듣고서) 본심(本心)을 열고 깨달으라
임오년(壬午年: 1222년, 고종 9) 6월 일 사주(社主) 선사(禪師) 담묵(湛黙)이 짓다.
정우(貞祐) 10년 6월 일 사주(社主) 선사(禪師) 담묵(湛黙)이 쓴다.
정우(貞祐) 임오년(壬午年) 6월 초7일에 변산의 청림사에서 금종(金鐘)을 주조하여 이루니, 무게가 700斤이다.
동량(棟梁)은 도인(道人) 허백(虛白), 도인 종익(宗益)이며,
장인(匠人)은 한중서(韓冲叙)이다. (이상 원명)
내가 기유년(己酉年:1849년, 헌종 15) 9월 7일에 청림사에 머물면서 이듬해 9월 7일에 이 금종을 뚫어 내소사(來蘇寺)에 옮겨 매달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본성(本性)은 금강(金剛)을 보전하고 몸은 전륜(轉輪)을 본받는다. 소리를 들으면 마음을 깨닫고, 꽃이 피면 과실이 맺히리라”라고 하였다.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네 번째 계축년[四癸丑] 9월 27일에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쓰고 시주하다. 지전완암정우(持殿完岩正宇) (이상 이안기)
三韓前寺革古鼎今
堂宇宏麗禪侶盍簪
命白公等鑄發鯨音
停離輪苦警悟昏沉
凡有耳者開覺本心
壬午六月日社主禪師湛黙誌
貞祐十年六月日社主禪師湛黙記
貞祐壬午六
月初七日邊山
鑄成入重七百
斤 棟梁
道人 虛白
道人宗益
匠 韓冲叙(以上原銘)
余己酉九月七日卜居
靑林翌年九月七日鑿
此金鐘移懸于來蘇寺
銘曰性保金剛體法轉
輪聞聲悟心花開實新
崇禎紀元後四癸丑九月
二十七日隱士金性圭記
而施焉 持殿完岩正宇(以上追銘)
청림사(靑林寺)의 명(銘)
부녕(扶寧)의 변산(邊山)에 청림사(靑林寺)가 있으니
삼한(三韓)의 옛 절은 없어지고 지금 다시 세워졌다
건물[堂宇]는 크고 화려하며, 선승(禪僧)들이 많이 모이니
백공(白公) 등에게 명하여 종을 만들도록 하였다.[鑄發鯨音]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어지럽고 막힌 것을 깨우치게 하리니
무릇 귀가 있는 이들은, (듣고서) 본심(本心)을 열고 깨달으라
임오년(壬午年: 1222년, 고종 9) 6월 일 사주(社主) 선사(禪師) 담묵(湛黙)이 짓다.
정우(貞祐) 10년 6월 일 사주(社主) 선사(禪師) 담묵(湛黙)이 쓴다.
정우(貞祐) 임오년(壬午年) 6월 초7일에 변산의 청림사에서 금종(金鐘)을 주조하여 이루니, 무게가 700斤이다.
동량(棟梁)은 도인(道人) 허백(虛白), 도인 종익(宗益)이며,
장인(匠人)은 한중서(韓冲叙)이다. (이상 원명)
내가 기유년(己酉年:1849년, 헌종 15) 9월 7일에 청림사에 머물면서 이듬해 9월 7일에 이 금종을 뚫어 내소사(來蘇寺)에 옮겨 매달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본성(本性)은 금강(金剛)을 보전하고 몸은 전륜(轉輪)을 본받는다. 소리를 들으면 마음을 깨닫고, 꽃이 피면 과실이 맺히리라”라고 하였다.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네 번째 계축년[四癸丑] 9월 27일에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쓰고 시주하다. 지전완암정우(持殿完岩正宇) (이상 이안기)
종의 아랫부분과 윗부분에는 덩굴무늬 띠를 둘렀고, 어깨부분에는 꽃무늬 장식을 하였다. 종의 어깨 밑에는 사각형의 유곽이 4개 있고, 그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는 연꽃으로 장식했고, 종의 몸통에는 구름 위에 삼존상이 새겨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종 정상부에는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과 큰 용머리를 가진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있다.
워낙 오래된 유물이다보니 현재는 종을 직접적으로 타종하는 일은 없고, 원래 보종각(寶鐘閣)에 있다가 국보 지정 후 수장고로 옮겼다.
3. 외부 링크
4. 국보
사찰에서 사용하는 종은 소리를 통해 범음(梵音)을 전파하는 도구 중 하나로 법고, 운판, 목어와 더불어 법구사물(法具四物)로 불린다. 종은 대중을 모이게 하거나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기도 하지만, 신성한 불음(佛音)을 통해 현실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의 깨달음과 구제를 염원하는 종교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부안 내소사 동종’은 몸체에 음각으로 새겨진 주종기(鑄鍾記)를 통해 도인(道人) 허백(虛白)과 종익(宗益)의 주관 아래 장인 한중서(韓冲敍)가 700근의 무게로 1222년(貞祐 10) 제작하였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13세기 동종의 기준작이다. 한중서는 13세기 전반부터 중엽까지 활동한 장인으로 사장(私匠)에서 시작해 대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관장(官匠)이 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한중서는 고령사 청동북, 복천사 청동북, 신룡사명 소종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다양한 분야와 영역에서 활약한 기록이 확인된다.
현재 내소사 보종각에 걸려 있는 이 동종은 고려 후기 동종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다. 통일신라시대 동종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시대 동종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장식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데 종의 어깨 부분을 장식하는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가 표현된 점, 몸체에 부조상으로 천인상 대신 흩날리는 천개(天蓋) 아래로 삼존상을 배치한 점, 당좌(撞座)가 4개로 늘어난 점 등이다. 이러한 장식성과 조형성은 이후 고려 후기 동종의 모본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장인 한중서의 숙련된 기술력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이 동종은 처음 청림사에 봉안되었다가 1850년(철종 1) 내소사로 옮겨졌는데, 1853년(철종 4)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이를 기록한 이안기(移安記)도 몸체에 음각으로 남겨져 있어 동종의 역사적 변천사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따라서 이 동종은 양식, 조각, 주조 및 설계 등에서 한국범종사와 제작 기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주종기와 이안기 등을 통해 봉안처, 발원자, 제작 장인 등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 국보로 지정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
‘부안 내소사 동종’은 몸체에 음각으로 새겨진 주종기(鑄鍾記)를 통해 도인(道人) 허백(虛白)과 종익(宗益)의 주관 아래 장인 한중서(韓冲敍)가 700근의 무게로 1222년(貞祐 10) 제작하였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13세기 동종의 기준작이다. 한중서는 13세기 전반부터 중엽까지 활동한 장인으로 사장(私匠)에서 시작해 대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관장(官匠)이 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한중서는 고령사 청동북, 복천사 청동북, 신룡사명 소종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다양한 분야와 영역에서 활약한 기록이 확인된다.
현재 내소사 보종각에 걸려 있는 이 동종은 고려 후기 동종 가운데 크기가 가장 크다. 통일신라시대 동종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시대 동종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장식 요소가 나타나고 있는데 종의 어깨 부분을 장식하는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가 표현된 점, 몸체에 부조상으로 천인상 대신 흩날리는 천개(天蓋) 아래로 삼존상을 배치한 점, 당좌(撞座)가 4개로 늘어난 점 등이다. 이러한 장식성과 조형성은 이후 고려 후기 동종의 모본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장인 한중서의 숙련된 기술력과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이 동종은 처음 청림사에 봉안되었다가 1850년(철종 1) 내소사로 옮겨졌는데, 1853년(철종 4)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이를 기록한 이안기(移安記)도 몸체에 음각으로 남겨져 있어 동종의 역사적 변천사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따라서 이 동종은 양식, 조각, 주조 및 설계 등에서 한국범종사와 제작 기술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주종기와 이안기 등을 통해 봉안처, 발원자, 제작 장인 등 내력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 국보로 지정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