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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6 19:54:10

사리(불교)

1. 개요2. 명칭과 세는 단위3. 사리의 종류
3.1. 승사리
3.1.1. 승사리의 정체?
3.2. 법신사리3.3. 진신사리
4. 외부 링크

1. 개요

사리()는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시신(Śarīra: शरीर)을 가리키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 문화권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고승이나 여래의 시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위해 번역할 때 일부러 음역하였다. 이미 삼국시대 문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로 산스크리트어의 본디 의미와 달라졌다.[1] 불교계에서는 크게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법신사리(法身舍利)[2], 그리고 승사리(僧舍利)로 나눈다.

진신사리는 석가모니의 실제 유해, 법신사리는 불법(佛法,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의 또다른 몸이라 하여 불경을 사리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승사리는 고승의 시신, 또는 그들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돌 조각을 가리킨다. 한국에서 일반대중에게 다짜고짜 '사리'라고 하면 대개는 고승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승사리를 떠올린다. 한국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시신을 높여서 법구(法軀)라고 부름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불자들조차도 '사리'라고 하면 보통은 화장하면 나오는 구슬 같은 승사리를 떠올린다.

2. 명칭과 세는 단위

한자 문화권의 고서에서는 사리를 두고 유형(遺形)이란 표현도 사용했는데,[3] 부처나 고승이 지상에 남긴(遺) 육신의 형체(形)라는 뜻이다. 원래는 유형(遺形) 또한 시신을 돌려 표현하는 말인데, 사리와 의미가 같으므로 통용하여 쓴 것이다.

현대 한국 불교계는 사리의 개수를 과()라는 단위로 센다. 원래 과(顆)라는 한자는 조그만 머리(頭)를 가리키지만, 여기서 파생하여 작고 동글동글한 물건이나 덩어리진 것을 세는 단위로도 쓰인다. 아마도 승사리가 대개는 작은 구슬처럼 생겼기 때문에 '과'로 세다가 그대로 관습이 되어버린 듯.

하지만 옛 기록에는 다른 단위도 나타난다. 577년 백제는 부여에 왕흥사를 창건하며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2007년에 사리기를 발굴해보니 명문에서 사리를 매(枚)라는 단위로 세었다. 현대 한국어에서 매(枚)는 종이나 널빤지를 세는 단위지만, 고전 한문에서는 사람을 비롯하여 잡다한 이런저런 물건을 폭넓게 세는 단위로 쓰였다.

또한 13세기에 쓰여진 삼국유사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조에서는 사리를 립(粒)이란 단위로 세었다. 원래 한문에서 립(粒)은 쌀알을 가리키지만, 쌀알처럼 작고 동글동글한 물건을 세는 단위로도 쓰인다.

3. 사리의 종류

3.1. 승사리

흔히 한국에서 '사리'라고 할 때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승사리이다. 일반적으로 화장장에서 화장해서는 나오지 않고, 옛날처럼 나무나 새끼줄을 모아 태워서[4] 다비식을 진행을 해야 나온다고 한다.

백양사에서 진행하는 다비법이자 한국 불교에서 사용하던 전통적인 다비(불교식 화장법)를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땅 속에 밀봉된 거대한 물 항아리를 묻는다.
2. 항아리를 묻으면 흙을 덮고 장작을 쌓고 고승의 유체를 얹고 화장을 한다.
3. 화장이 끝난 뒤 뼈는 알아서 모시고 밑에 묻은 항아리를 파내면 그 독 안에 조그마한 보석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그걸 사리라고 부른다.[5]

한편, 화장장에서 화장을 하면 온도가 너무 높아 사리가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리가 안 나온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인의 시신을 화장했는데 사리가 나온 사례들도 있다.[6] 도력이 높아야 나온다지만, 말 그대로 누구나 고승으로 인정하는 도통한 승려라도 화장해서 사리가 안 나오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그냥 유품으로 보는 것이 맞다.[7] 불교계에서는 현대식 화장이 도입된 초기에 잘 모르고 높으신 스님이니 최신식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다비가 아니라 화장을 해서 사리가 녹아버렸다고 설명한다.[8] 반대로 승려가 아니라 일반인에게서도 나오기도 한다. 또한 꼭 화장을 해야 나오는 것은 아니고 살아있는 상태에서 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것은 생사리라고 부른다.

사리가 워낙 불교에서 중요한 상징물이다 보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만, 사리가 많이 나오면 덕이 많고, 사리가 적게 나오면 덕이 적었다고 단정하지 말자. 불도로 따지면 색에 집착하는 행위다. 이를 잘 알던 만공스님도 자신을 다비할 때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고 못을 박아두었기에[9] 덕숭산 수덕사의 다비식 때는 숭산 스님처럼 극히 드문 예외적인 경우[10]를 제외하고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 되었고, 법정스님도 "다비하고 나면 나의 사리는 찾지 말라." 하고 유언했다.[11] 경봉 스님은 사리에 집착하는것은 "수행자의 본분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심지어 성철스님은 "개에게나 던져줘라."라고 하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12] 한술 더 떠서 춘성스님은 제자 승려들이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 할 것 이라며 걱정하자 "야 이 씨부랄 놈 들아. 내가 불자들 위해서 사냐?"고 일갈했을 정도다.[13]

이렇게 현대의 일부 스님들은 다비식과 사리 유무가 여러사람 번거롭게 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걸 감안하여, 전통적 다비를 하지 말고 소박하게 일반 화장장에서 화장하라고 유언한다. 또한 사리에 집착하는 태도에 짜증이 난 어떤 주지스님이나 일부러 자신은 높으신 스님이라는 것을 더욱 과시 하려는 어떤 스님들은[14] "나는 제자들보다 훨씬 높은 큰스님이니 오래되고 낡은 전통적인 다비방식보다 일반화장장에서 더욱 훨씬 좋은 최신식 기술을 써서 다비를 하라"고 유언을 남겨 사리를 찾지 못한 사례도 있다. 이렇듯 세인들의 일반적 인식과는 다르게 사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사리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유품 이상의 의미는 없다. 어떤 경전에도 사리를 영험하다든지 신성한 것이라고 중시하는 내용은 없다.

승사리가 나오면 조그만 석조 구조물을 만들어 그 안에 모시곤 하는데, 이 구조물을 흔히 승탑 혹은 부도(浮圖)라고 부른다. 승탑은 (부처가 아닌) 승려의 탑이란 뜻이고, 원래 부도(浮圖)란 말은 범어 붓다(Buddha)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즉 불타, 부처와 부도는 원래 동의어이다. 그런데 부처의 사리를 모신 불탑도 부도라 하고, 우리 스승(승려)도 부처와 같다는 뜻으로 승사리를 모신 구조물 또한 부도라 하다가 점차 의미가 분화되었다.[15] 역사가 오래된 사찰에는 부도전(浮圖田), 또는 부도림(浮圖林)이라 하여 부도들을 따로 모은 공간이 있다.

과거에는 승려의 시신이라 하여 꼭 화장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시신을 관에 넣어 매장하고 그 위에 부도를 세운 사례가 있었다. 1996년 전남 광양 옥룡사지(玉龍寺址)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도선의 부도라고 추정되는 유적에서도 부도 밑 석관에서 화장하지 않은 유골이 발견되었다. 원래는 이런 화장 안 한 시신도 당연히 '사리'이다.

힘든 고행을 해야 사리가 나온다는 인식 때문인지 아주 고생길이 험한 상황을 두고 사리가 생긴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가객 김광석이 1996년에 사망한 후 화장했을 때 사리가 9과나 나왔다고 한다. 또한 조기순 할머니도 사망 후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나왔고 스님의 감정을 통해 봉안되었다. X JAPAN히데가 사망한 후에 화장을 했는데 사리가 많이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화장한 시신 및 애완견을 사리로 만들어주는 업체도 있다.

천주교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으니 성유물이 이에 해당한다.

3.1.1. 승사리의 정체?

다비식을 하면 나온다는 구슬 같은 승사리의 정체를 두고는 여러 주장이 있다. 아직 '이것이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명쾌한 연구는 없지만, 화장에 쓰이는 장작의 성분이 특정 온도에 반응하여 얻어지는 결정이 사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다. 실제로 본차이나의 뼈와 장석, 카오리나이트를 고온에 구워 만들어진다. 이 추측은 고행을 한 사람들에게서 사리가 많이 나온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해 뼈의 성분이 정상적인 성분 외 중금속이나 기타 이물질이 많아 사리 생성에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항간에는 우스개소리나 지레짐작한 설이 여럿 떠도는데 예를 들어 승려가 수십 년간 동정으로 살아서 모인 기운이 내단화되어서[16] 나온 것이라는 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 있는데, 정액은 몸 안에서 굳을 수가 없다. 금욕한다 해도 몽정을 통해 배출되거나 몽정을 안해도 고환이나 전립선 등에서 체내 흡수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녀 모두 사리가 나온다. 비슷한 헛소리로 '스님들은 워낙 오랫동안 참선을 하니 하도 오래 앉아 있어서 단순히 몸의 칼슘이 굳어져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성분분석 결과만 봐도 말이 안 된다. 또한 단순히 오래 앉아 있는다고 사리가 생긴다면 한국의 수험생들,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는 5급 이상 공무원들, 대기업 본사 사무직 임직원들, 버스 기사들, 택시 기사들, 화물차 기사들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사리가 많아야 한다.(...)

입적을 앞둔 한 스님이 사리가 나오면 유용한 일에 써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이 스님이 남긴 사리 1과를 인하대 임형빈 박사가 제공받은 덕에 1995년 최초로 성분분석을 할 수 있었다. 기사

지름 0.5센티미터 정도의 팥알 크기 사리에서 방사성 원소프로트악티늄(Pa), 리튬(Li)을 비롯하여 티타늄, 나트륨, 크롬, 마그네슘, 칼슘, 인산, 산화알루미늄, 플루오린, 산화규소 등 12종이 검출되었다. 사리의 성분이 일반적으로 성분과 비슷했으나 프로트악티늄, 리튬, 타이타늄 등이 들어있는 것이 큰 특징으로 사리의 굳기 즉 경도는 1만 5천 파운드 압력에서 부서져 1만 2천 파운드에서 부서지는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결석의 주성분은 칼슘, 망간, , 등으로 되어 있는데다가 고열에 불타 없어지며 경도도 사리처럼 높지 않아 사리는 결석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몸속에 있는 칼슘, 규소 등 금속이온이 산화하면 사리 같은 성분이 생길 수 있는데 특히 채소에 금속이온이 많아 채식을 하는 스님들에게서 사리가 나올 확률이 더 높고, 다비식 자체가 일반 화장과는 다르게 서서히 태우고 서서히 식히기 때문에 사리 생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기사

3.2. 법신사리

원래 절에 있는 탑은 안에 석가모니를 화장하여 나온 유해의 일부를 봉안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매우 귀하므로 불교가 인도 북동쪽 지역에서 다른 곳으로 퍼지면서 제대로 탑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석가모니의 머리카락, 손발톱, 사용하던 발우 등을 봉안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한계가 있었다. 불교 신자가 된 사람들은 불탑을 보고 또 참배하고 싶어했지만 안에 봉안할 사리를 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한 가지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그것이 바로 법신사리(法身舍利)이다.

불교에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부처의 몸은 금빛이나 보석의 색을 띤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의 몸과 색이 비슷하다는 보석을 진신사리를 대신하여 안치하였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 더 넓게는 불교의 가르침, 즉 불법(佛法)이야말로 부처님의 또다른 몸이라는 개념이 태동했다. 같은 이치로 불법의 가르침을 담은 불경은 또다른 부처의 몸(사리), 즉 법신사리가 되어 탑에 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경을 탑 안에 봉안하는 것은 종이에 글씨를 쓰면 되니까[17] 진신사리를 구해 안치하는 것보다 훨씬 쉬우므로 점차 이런 방식으로 탑을 제작하는 것이 대중화되었다.

법신사리의 개념은 점점 넓어져서 보석이나 불경뿐만이 아니라 불상, 진언(眞言)이나 다라니를 적은 물건, 또는 불교의례에 사용하는 도구도 법신사리가 될 수 있었다. 흔히 불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안에 안치된 사리란 대개 이런 법신사리이다. 한국 불탑들은 금강경이나 반야부 경전[18]을 법신사리 삼아 넣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심지어 아예 불탑 속에 안치할 것을 전제로 하는 대승불경마저 나왔다. 이러한 불경들 중 한국의 신라시대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을 안치한 탑이 많은데, 불국사 석가탑이 대표적이다. 무구정경의 내용은 석가모니와 바라문이 대화를 하는데, 석가모니가 진언을 설하면서 '이 내용을 탑에 안치하고 예배하면 큰 공덕을 쌓으리라.' 하는 것이다. 무구정경의 내용에 따르면, 먼저 조그만 모형 탑(소탑小塔) 77기를 만들어 안에 (무구정경이 설한) 다라니를 넣고 큰 탑 안에 안치하라고 한다. 그래서 무구정경을 봉안한 탑에서는 마치 탑의 미니어처처럼 생긴 소탑들이 함께 나오곤 한다. 석가탑 안에서도 목제 소탑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역시 무구정경에 따르면 소탑을 99기를 만들어 또다른 다라니를 적어 넣어 안치하면 큰 공덕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신라 진성여왕 9년(895) 건립된 해인사 길상탑(吉祥塔)에서는 아예 소탑을 99기와 77기를 따로 봉안하기도 했다. 따라서 안에서는 소탑이 총 176기가 나와야 하지만, 현대에 행한 조사에서는 157기가 나왔다. 이런 소탑들은 국립경주박물관 등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비슷하게 탑에 안치할 것을 전제로 하는 대승불경으로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 이하 '보협인경')이 있다. 이 경전을 안치한 불탑을 보협인탑(寶篋印塔)이라고 부른다. 10세기 중엽 중국 오월의 마지막 왕 전홍숙은 자신의 업보를 씻고 인도의 아쇼카 왕처럼 되고자 대대적으로 보협인경을 발행하고 탑을 짓고자 하였다. 이 영향으로 중국과 일본에는 보협인경을 안치한 보협인탑이 상당히 많다. 보협인경은 무구정경과 달리 소탑을 99/77기를 만들라는 내용이 없고, 안에 보협인경만 안치하면 된다고 설명한다. 당연히 무구정경보다는 보협인경의 방식이 탑 조성자들 입장에선 훨씬 쉽기 때문에, 고려시대에 보협인경이 들어온 이후로는 무구정경의 위치를 대체했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무구정경 유물은 석가탑에서 나온 목판인쇄본일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문서 참조. 하지만 보협인경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고려시대에 석가탑을 수리하고자 해체할 적에 보협인경도 넣은 듯하다. 1970년 국보 제48-1호 월정사 팔각 구층석탑을 해체수리할 때에도 내부에서 (1007년 고려 총지사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보협인경인 듯한 종이 뭉치가 사리장엄구와 함께 발견되었다.[19]

그런데 한국에 보협인경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탑에 안치하기보다는 불복장[20] 용도로 더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보협인경을 안치한 탑도 오월의 전홍숙이 퍼트린 양식이 아니라 전통 석탑 양식을 따랐다. 한국에 현전하는 (전홍숙식) 보협인탑은 국보 제209호 보협인석탑(寶篋印石塔), 단 한 기에 불과하다. 고려시대, 아마도 11세기 초에 조성한 탑이라고 추정한다. 폐사지에 버려져 부재가 흩어진 것을 현대에 짜맞추었는데, 그마저도 부재 사이에 동전을 끼워넣는 등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2019년에 재조립하여 원형을 어느 정도 찾았지만, 상륜부 부분이 옛날에 소실되어 완전한 형태를 복원하지는 못하였다. 보협인석탑은 오월국 전홍숙이 만든 탑을 본땄기 때문에 한국의 석탑들 중에서는 같은 형식이 없고 매우 이질적이다.

3.3. 진신사리

사리들 중에서도 석가모니화장하여 나온 것을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부른다. '부처의 진짜 몸(진신眞身)에서 나온 사리'라는 뜻이다. 불경에 따르면 석가모니를 화장하자 사리가 8섬 4말이나 나왔다고 하는데, 다비식을 하고 나온 재까지 모두 합친 분량이다.[21] 개요에서 설명했듯 본래 '사리'라는 용어는 구슬 같은 결정체가 아니라, 산스크리트어의 본래 의미대로 시신 자체를 가리킨다. 스리랑카의 진신사리가 치아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불경의 기록에 따르면 석가모니가 사망하자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나무를 모아 전륜성왕의 예법에 맞추어 화장을 하다가 향수를 부어 불을 끈 뒤, 불에 타고 남은 를 인근 8개 나라/부족의 대표들에게 분배하였다. 대표들이 저마다 사리를 분배받아 고국으로 돌아가 탑을 하나씩 세우니, 최초로 세운 불탑이라 하여 '근본8탑'이라고 부른다.[22] 석가모니가 사망하고 2-3백 년 남짓 지나 아쇼카 왕이 인도를 통일한 뒤 불교에 귀의하자, 근본8탑 중 한 기만 제외하고 나머지 탑들을 해체하여 사리를 꺼내 인도 각지에 진신사리를 담은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고 한다.[23] 아쇼카 왕이 열지 않은 한 기는 오늘날 네팔 람그람에 있는 탑인데, 전설에 따르면 아쇼카가 탑을 열려고 하자 용왕이 나타나 막았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이 있으므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라고 주장하는 사리 대부분은 아쇼카 왕이 인도 전역에 세운 불탑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니면 석가모니 생전에 받은 머리카락 등이라고 하거나...

진신사리는 세계적으로 매우 귀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진신사리라는 게 화장을 하고 남은 석가모니 육신의 일부니 많으려야 많을 수가 없다. 물론 위 전승처럼 8섬 4말씩이나 나왔다고 전하므로 전세계의 유서 깊은 사찰들에는 진신사리라고 불리는 것이 나름 있긴 하다. 아무튼 한국을 포함해 대부분 나라의 탑에는 석가모니의 진신(眞身 진짜 몸) 대신 불경이나 보석 등을 법신(法身 법의 몸)으로 삼아 사리로 간주하여 법신사리라는 명칭으로 넣음이 일반적이다.

한국 불교계에는 진신사리를 모신 절에는 석가모니를 형상화한 본존불상을 안치하지 않는[24] 관례가 있다. 불상은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진신사리를 안치한 사찰은 바로 그 부처에게서 나온 사리를 모셨기 때문이다. 진짜가 있는데 굳이 대체물을 놔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진신사리를 안치한 건물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부른다. 조계종 승려 자현(玆玄)에 따르면, 한국 사찰 중에서 처음으로 '적멸보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곳이 바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라고 한다. 이후 이 명칭이 다른 곳에까지 퍼졌다는 것.

스리랑카의 불치사는 진신사리를 모셨지만, 당연히 한국 불교계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므로 불상을 따로 봉안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 10년(549), 중국 양(梁)나라에서 유학하던 각덕(覺德)이란 승려가 양나라 황제가 보내는 불사리 몇 과를 모시고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와 귀국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진흥왕은 궁에서 기다리지 않고 흥륜사(興輪寺)까지 마중나왔다고 한다. 현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양나라에서 들어온 사리가 한반도에 최초로 들어온 진신사리이다. 하지만 이때 들어왔다고 하는 진신사리는 행방이 묘연하다.

현대 한국에서 진신사리를 보유했다고 주장하는 사찰은 한두 곳이 아니지만,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경남 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금강계단에 있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조계종에서는 통도사 금강계단을 합동 구족계 수계식장으로도 사용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자장율사(590-658)가 선덕여왕 5년(636)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대산에 머물 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받았다고 한다. 선덕여왕 12년(643)에 여왕이 귀국을 요청하자, 자장율사는 신라로 돌아가 선덕여왕 15년(646)에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우고, 거기에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진신사리 일부를 봉안했다고 한다.[25]

삼국유사나 전설에 따르면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세운 뒤에도 오대산 월정사(또는 상원사) 사자암 적멸보궁[26]영월 법흥사 적멸보궁ㆍ정선 정암사 적멸보궁ㆍ설악산 봉정암 5층석탑을 세워 진신사리를 모셨다 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흔히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5대 적멸보궁은 1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부침을 겪었지만 지금까지도 한국 불교계의 성지로서 역할을 한다. 5대 적멸보궁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곳은 통도사와 월정사이다. 그래서 "야산제일통도사(野山第一通度寺) 고산제일월정사(高山第一月精寺)"라는 말이 숙어처럼 전한다.

이중 희한한 곳은 오대산 월정사 사자암에 있는 적멸보궁이다. 다른 적멸보궁들은 어디에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는지 그 위치가 명확한데, 사자암 진신사리는 사자암 건물 뒤편 땅 어딘가라는 '전설'만 전할 뿐 위치가 불명확하다. 전설에 따르면 그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용의 형상이라 무거운 석물을 사용해서는 아니되었기에, 부득이하게 눈에 띄는 석물이 없이 진신사리를 땅에 묻었다고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도적이 진신사리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묻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누군가가 진신사리를 묻었다고 전해지는 땅을 한번 파보았더니 마치 석관(石棺) 같은 것이 나왔다고 하지만,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사자암 뒤편 땅 어딘가에 진신사리가 있다고 전하고 믿으므로, 사자암 측은 그 근처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지한다.

자장율사로부터 기원한 전통적인 적멸보궁 이외에도 대구 비슬산 용연사[27], 구미 태조산 도리사, 고성군 금강산 건봉사를 더해 8대 적멸보궁이라고도 한다. 현대에 들어와 동남아와 교류가 많아지자, 한국 승려들이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 '진신사리'를 이운하여 봉안, 적멸보궁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 쪽 나라들은 불교의 발상지 인도와 가깝기 때문에 전해지는 진신사리도 한국보다 더 많은 편이기 때문, 예를 들어 대구 비슬산 대견사에도 스리랑카 정부에서 정식으로 기증한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고, 제주도 표선면 육각사에도 미얀마로부터 기증받은 진신사리가 있다. 영상. 그 외에도 조계사 앞에 있는 10층 석탑 안에 모신 사리 역시 진신사리이다.

현대 한국에서 자칭 '적멸보궁' 또는 '진신사리를 모신 곳' 중 위에서 이야기한 8대 적멸보궁을 제외하면, 모두 현대에 상좌부 불교권에서 승려들이 어찌어찌 넘겨받아 이운하여 봉안한 것이다.

조계사 10층 석탑의 사리는 이운 과정이 좀 재미있다. 스리랑카의 반승반속 행자로 이름 높았던 다르마팔라(Dharmapāla, 1864-1933)가 1913년 8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식민지 조선에 들러 강연을 하였다. 과거 다르마팔라는 태국 왕실로부터 진신사리 한 과를 시주받아 펜던트 안에 넣어 소중히 간직했는데, 조선과 일본도 불교국가라는 설명을 듣고 감탄하며 자기가 지니고 다녔던 사리를 조선 승려에게 기증했다. 이후 1930년에 일본풍 석탑을 세워 사리장엄구와 함께 다르마팔라가 기증한 사리를 봉안했다. 2009년 조계사는 일제강점기에 조성한 석탑을 해체하여 이전하고, 안에서 나온 사리는 새로 조성한 10층 석탑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진신사리의 진위 여부를 두고 논란도 많지만, 실질적으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검증하자고 덤비는 것은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베드로 묘역이나 이슬람 메카 카바 신전을 발굴해보자는 것과 동등한 신성모독이어야 할 터인데, 현대에는 진신사리에 감정서가 따라다닌다. 지금은 이런 감정서가 필요한 세상이 되었다. 후술할 가짜 사리 때문이다.

불자들 중에 종종 인도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얻어왔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낚인 것이다. 인도에는 이렇게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라고 한국이나 일본의 불자들을 현혹하여 가짜 사리를 만들어 파는 범죄자들이 상당히 많다. 참고로 가짜 사리의 재료는 보통 [28]이며 주로 사형수의 뼈가 많이 이용된다.

한국에도 그렇고 불교권을 중심으로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주장하는 곳들은 많지만, 정말로 진신사리라고 확신할 만한 사리들은 많지 않다. 까놓고 말하자면 석가모니가 아닌 그냥 다른 승려의 사리 같은 것이나, 심지어는 출처불명의 무언가를 가져다 두고 '진신사리'라고 뻥을 쳤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7세기에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받았다는 진신사리 역시 엄격하게 따지면 사실 여부가 불확실하다.

석가모니 사망 때 석가족들도 찾아와 사리 일부를 받아서 카필라성에 불탑을 세웠는데 현대에는 피프라와(Piprahwa) 불탑으로 알려졌다. 피프라와 불탑 역시 당연히 근본8탑이다. 1898년, 당시 영국령 인도의 공무원 윌리엄 페페(William Claxton Peppe)는 흙에 온통 파묻혀 마치 언덕처럼 보이는 피프라와 불탑을 발굴하고 안에 있는 사리와 사리기, 사리장엄구 일체를 꺼냈다.[29] 사실 페페는 정식 고고학자도 아니었고 다분히 월권행위였기 때문에 페페의 행동은 문제가 되었다.

영국인 관리들은 페페가 발굴한 석가모니 사리를 처리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사리를 태국 왕실에 보내었다. 친영국적이고 독실한 불교 국가인 태국에 넘기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태국의 국왕 라마 5세(쭐랄롱꼰)는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피프라와 진신사리를 받아 일부를 동남아 등지에 분배하고, 남은 것을 태국 왓 사켓 사원에 봉안했다.

피프라와 불탑에서 발굴된 진신사리 중 대중이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인도 델리 박물관에 있는 것이다. 다른 진신사리들은 전부 불교신앙이 강한 국가에서 받아 탑에 넣어 봉안했기 때문에 '친견'이 불가능하다. 근본8탑인 피프라와 불탑에서 발굴된 사리는 '진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30]

만약 피프라와 발굴 사리마저 진짜가 아니라면, 전세계에서 진짜라고 확신할 수 있는 석가모니 진신사리는 전무하다.

이 외에 '틀림없는 진짜'라고 확신할 만한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법문사의 불지사리 역시 첫 출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확언하기가 어렵다.[31] 그 외에 미얀마 종교성에서 관리하는 진신사리나 스리랑카 불치사의 불치사리[32] 역시 진짜일 가능성이 없진 않으나 확신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이렇게 진짜 진신사리일 가능성이 있는 사리들의 특징은 한국에서 흔히 사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보석같이 생긴 구슬'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 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리들은 나눠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진신사리들' 중 진짜가 얼마나 될지는... 기사

4. 외부 링크

인간의 뼈를 결정화 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화장 후 유골분으로 인공사리를 만드는 장례방식도 있다. https://www.xn--oy2bn5d93jnke.com/jewelry


[1] 한국에서는 불교 자체가 중국을 거쳐서 전래되었으므로 처음 알려졌을 때부터 중국을 거치며 의미가 달라진 상태 그대로 도입되었을 거라 쉽게 유추 가능하다.[2] 또는 법사리(法舍利)라고도 부른다.[3] 2009년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쪽 석탑 심주석에서 금제사리봉영기가 발견되었다. 봉영기는 백제 무왕 40년(639)에 제작했는데, 여기서도 사리를 유형(遺形)이라고 표현하였다.[4] 볏짚을 모아 엮은 새끼줄에 불이 붙으면 상상 이상으로 화력이 강하다. 제대로 건조된 경우 한정.[5]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다비 방법은 현대에서는 백양사 등에서만 한다. 이 방법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에 광복 이후로 각 사찰에서도 다비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그래서 사찰마다 저마다 다비하는 방법이 다르다. 수덕사는 심플함 자체로 내화벽돌로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6] 아래 과학적 분석 링크에 나온다.[7] 본래 공개적으로 다비식을 했지만, 다비식 중 유명한 고승에게서 사리가 나오지 않자 광분한 사람들 때문에 이후에는 비공개로 진행한다고 한다.[8] 후술하겠지만 사리에 집착하는 제자들과 불자들의 태도에 질려버린 스님들이나, 장례비와 시간을 절감하고 싶거나, 자신이 훨씬 높으신 스님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스님들은 입적 후 일부러 현대 최신식 화장장에서 자신의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하기도 한다.[9] 설정스님 말에 따르면 만공선사가 유언으로 "부처님 사리로 모든것은 넉넉하다. 그리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 하였다.[10] 숭산 본인은 수습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다비식 후 유골을 정리하던 중 사리가 나와버렸다(...) 이 사리는 제자들만이 친견한 다음 밀봉했다고.[11] 다만 비공개적으로 수습하여 길상사 법정 스님 초상화를 제작하는데 안료와 섞어서 사용했다는 말도 존재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해당 작가와 상좌들이 법정의 유언을 지키지 않은 셈이 된다.[12] 다만 상좌들은 성철스님의 유언과 달리 성대한 다비식을 거행한 후 방송 3사가 중계하는 가운데 사리를 수습하였다. 이때 무려 110과에 달하는 사리가 나와 신도들이 역시 큰 스님이다 라며 안도했다고 전해지며 성철 스님의 사리는 해인사 사리탑에 봉행되어 있다.[13] 유명한 승려들 중 사리에 연연하지 말라고 생전에 누누이 훈계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춘성 스님은 그걸 욕설로(...) 표현을 한 셈이다.[14] 자신이 훨씬 높으신 스님이라는 것을 더욱 과시하려는 이러한 스님들은 입적 후 다비를 할 때 가장 최근에 세워진 서울추모공원 같은 가장 최근에 세워진 최신식 기술을 사용하는 일반 화장장을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비싼 돈을 지불해서라도 찾는 경우도 많다.[15] 한자 고서에서는 '부도'가 승려를 가리키는 다른 호칭으로 쓰이기도 했다.[16] 내지는 정액이 굳어서.[17] 물론 탑에 담는 불경은 대충 쓰는 게 아니라 정성들여 쓴다. 사경 문서 참조[18] 반야를 중점적으로 설한 경전을 두루 일컫는 말[19] 종이가 너무 꽉 달라붙어서 현대기술로도 손상 없이 분리할 자신이 없어서 보존만 하는 중이다. 겉으로 보이는 글자만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1007년에 찍은 보협인경이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20] 불상을 조성하면 그 속에 집어넣는 유물[21] 8섬 4말이라는 기록도 정말 역사적 사실이라고 여기긴 어렵고, 그냥 '많이 나왔다.'는 뜻으로 쓰는 과장이다.[22] 일부 경전에서는 뒤늦게 온 부족에게 나누어준 것까지 포함해 근본10탑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23] '8만 4천'이란 불교에서 '엄청 많은 수'를 가리키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모두 '8만 4천'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쇼카 왕이 정말로 불탑 8만 4천 기를 세웠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무지 많이 세웠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적절하다.[24] 석가모니불 이외의 부처를 묘사한 불상은 안치하기도 한다.[25] 아쇼카 왕의 불탑에서 나왔다는 것도 아니고, 문수보살이 건네준 사리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역사학적으로는 자장율사가 봉안했다는 진신사리가 '진짜 진신사리'인지는 신뢰하기가 어렵다.[26]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이라고도 불린다.[27] 통도사에 있던 진신사리 1과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옮겨온 것이다.[28] 전용 기계로 를 고열 압착해 사리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한다.[29] 아쇼카 왕이 근본8탑의 사리를 꺼내어 다른 불탑에 분배했다고 하는데, 피프라와 불탑에서 여전히 사리가 있었다. 아마도 아쇼카 왕은 근본8탑의 사리를 몽땅 꺼내지 않고 적당히 덜어갔던 모양이다.[30] 피프라와 불탑의 유물이 위조되었고, 현대적 불교 연구에 큰 족적을 남긴 영국인 불교학자 리즈 데이비스(Thomas William Rhys Davids, 1843-1922)가 여기에 관여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학자들은 대부분 이 주장이 별 근거가 없다고 본다.[31] 중국 법문사의 불지사리, 즉 석가모니의 손가락는 인도 아쇼카 왕이 인도 곳곳으로 분배한 사리의 일부라고 전한다. 동한 말기에 법문사 탑을 세워 봉안하고, 중국 역대 왕조가 탑을 확장했다. 절이 쇠락하면서 오랜 세월 사리가 잊혔지만 1980년대에 탑이 무너진 뒤에 발견되었고,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역사가 웨난이 쓴 <법문사의 비밀>에 따르면 홍위병들이 법문사에 들이닥쳤을 때 절과 탑을 지키기 위해 주지승이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이런 소신공양에 놀란 홍위병들은 그 장면을 보고 놀라 도망쳤고 절과 탑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한다. 80년대 무너져서 지하 저장고의 진신사리가 발견될 때까지.[32] 석가모니의 치아라 하여 불치(佛齒)사리라 부른다. 스리랑카의 불치사리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배 때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에게 파괴될 뻔했으나, 지역 주민들이 모형을 만들어 알부케르케를 속인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불치사리는 석가모니 사망 이후로도 자라고 있다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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