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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0 03:06:59

진(고구려)

고구려의 국소대형
진 | 鎭
파일:덕흥리묘주초상.jpg
덕흥리 고분 앞칸 북벽 입구 왼편에 그려진 진의 초상화.
국적 후조고구려
관등 국소대형(國小大兄)
직위 건위장군(建威將軍)
좌장군(左將軍)
용양장군(龍驤將軍)
요동태수(遼東太守)
동이교위(東夷校尉)
유주자사(幽州刺史)
출생 330년 혹은 332년
후조 기주 장락군 신도현 도향[1] 중감리
(現 허베이성 헝수이시 지저우구)
사망 406년 혹은 408년 (향년 76세)
고구려
성씨 ▨▨(복성)
이름 진(鎭)
종교 불교[2]
묘소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

1. 개요2. 덕흥리 고분3. 생애4. 진의 정체?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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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인물. 덕흥리 고분의 묘주이자 고구려에서 유주자사의 직책을 지냈던 사실로 역덕후들에겐 나름 유명하다. 참고로 성은 따로 있고 이름이 진으로, 하필 묵서명에 판독이 안되는 부분 중 복성인 그의 성씨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어서 오늘날엔 이름만 전해지고 있다.

2. 덕흥리 고분

파일:덕흥리벽화분.jpg

진의 무덤은 덕흥리 벽화 무덤이라 불린다. 1976년 12월 8일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3]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허나 고구려 무덤이 대개 그렇듯이 이 무덤도 이미 도굴되어(...) 부장품과 유골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다만 곡괭이와 삽 등이 널려 있었고 인골 네 구가 흩어져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 도굴꾼들이 팀을 나눴다가 네 명을 버려두고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4]
파일:덕흥리묘주및태수.png
진과 13인의 태수를 묘사한 널방 입구 왼편의 벽화.
파일:d0dfc3ef9539_image.png
파일:인면조.jpg
견우와 직녀인면조를 묘사한 앞칸 남벽 벽화.

408년(영락 18년)에 건립된 이 무덤은 2실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각종 벽화와 함께 14행 154자를 종서로 쓴 묘지명(墓誌銘)이 존재한다. 여기에 그려진 벽화는 안악 3호분과 더불어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 말고는 기록이 별로 없는 고구려의 역사와 사회상 및 내세관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유적이다. 2004년 고구려 고분군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3. 생애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 사람이며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인 ▨▨씨(氏) 진(鎭)은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였다. 진(鎭)은 77세로 죽어, 영락(永樂) 18년 무신년(戊申年; 408년) 초하루가 신유일(辛酉日)인 12월 25일 을유일(乙酉日)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靈柩)를 옮겼다. 주공(周公)이 땅을 상(相)하고 공자(孔子)가 날을 택했으니 무왕(武王)이 시간을 선택했다. 날짜와 시간을 택한 것이 한결같이 좋으므로 장례 후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을 잡아서 고기, 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소금과 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 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덕흥리 벽화 무덤 묵서명 출처
이것이 그의 생애에 대하여 전해지는 기록의 전부이다. 이마저도 형식적인 수사로 채워져 있어 구체적인 삶은 알기 힘들지만[5] 덕흥리 벽화 무덤의 규모와 그가 거친 관직으로 보건대 고구려 지도층 중에서도 정상급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임명한 제후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당 묵서명에 따르자면, 진은 330년 혹은 332년에 태어나 406년 혹은 408년에 사망했다. 330년은 고국원왕 즉위년, 332년은 고국원왕 2년에 해당하고 406년은 광개토대왕 16년(영락 16년), 408년은 광개토대왕 18년(영락18년)에 해당한다. 이렇게 출생과 사망 연도를 두 개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진이 사망한 연도가 408년인지, 장사 지낸 해가 408년인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북사(北史)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장례 풍습은 3년 상이지만 3개월 이내에 장사를 지내고 3년 간 상복을 입는 중국식 3년상과 달리 3년 동안 시신을 모셨다가 장사 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의 장례가 408년 고구려의 풍습에 따라 치러진 것이라면 진의 사망 연도는 406년이 되고 출생 연도도 2년 더 올라가게 된다.

모두루와 달리 진에게는 성씨가 있었고 복성인 것까지는 확인되나 지워져 무슨 성씨였는지는 알 수 없다. 보통 그 무렵 고구려와 한창 치고박았으며 요서~요동을 점거하고 있던 후연의 황성인 모용씨가 보통 성씨 후보로 많이 제기되었으나 가능성은 낮은 게, 사서상에 기록된 남연의 모용진이 고구려의 진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지만 둘의 행적이 확연히 다르므로 모용씨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진은 다른 중국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상기한 덕흥리 고분의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다. 덕흥리 고분의 묘지명에 의하면 □□군 신도현 도향 □감리에서 태어나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의 관직을 역임했다. 건위장군으로 관료에 데뷔하여 유주자사로 마감한 것. 77세[6]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영락 18년(408년) 12월 25일에 안장되었다. 묘의 규모로 보나 묘지명에 '부(富)는 7세(七世)에 미쳐 자손(子孫)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位)는 후왕(侯王)에 이르도록 하라. 무덤을 만드는 데 만 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 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 창고 분이나 보관해 두었다.'라는 기록으로 보건대 상당한 위치의 인물로 추정된다.

4. 진의 정체?

진과 관련해서는 크게 두가지 논쟁이 있는데, 첫째는 그의 출신국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그가 최종적으로 역임한 관직인 유주자사의 정체에 대한 것이다. 일단 유주라는 곳은 현 베이징의 옛 지명인데, 진이 고구려인으로 그곳의 자사를 지냈다면 이 당시 고구려가 베이징 일대를 다스렸다는 주장이 이론적인 가능성을 얻게 된다. 물론 현재 (북한을 제외한) 한중일 사학계에선 이 당시 고구려가 베이징을 다스렸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는 없다.

진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한국학계와 일본학계 및 중국학계에서는 진의 출신을 중국계 망명자로 보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며, 이에 반해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 출신으로 보는 시각이 다수인 편이다.[7] 일반적으로 북한학계의 주장은 무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진의 출신지를 중국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는 묵서명에 묘사된 그의 출신지이다. 그에 따르면 그는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8]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여기서 보이는 지명에 대한 묘사는 당시 고구려의 지방제도와는 다른 중국 군현제와 흡사한 구조를 띈다. 광개토왕비문을 비롯한 고구려 당시의 지명을 보면, 이때까지 고구려에서 중국적인 군현제가 실시된 흔적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성(城) · 촌(村)을 비롯한 고구려 고유의 지방제도가 실시된 흔적이 보이는데, 진의 출신지에 대한 묘사와는 꽤 이질적인 면모가 있다. 이에 대하여 북한학계에서는 《고려사》 지리지에 "가주(嘉州)는 본래 고려의 신도군(信都郡)이다(嘉州本高麗信都郡)"라는 구절이 있다는 점을 들어서 진의 출신지를 고구려로 비정하고 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한국과 일본 및 중국학계에서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9] 뿐만 아니라 묵서명의 기록에 따르면 진의 매장지를 정하기 위해 주공 단과 공자, 주 무왕 등의 중국 위인들에게 점을 쳤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점도 그가 본래 중국 출신임을 방증하고 있다.

한편, 진이 역임했던 직위의 성격 또한 학계에서 많은 논쟁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학계의 다수설을 먼저 설명하자면, 진이 비록 중국계라고는 하지만 그의 묵서명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연호인 "영락"이 표기되어 있고, 그가 역임한 관작에도 전형적인 고구려풍 관등인 "국소대형"이라는 관등이 있어 그가 종국에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묵서명에 보이는 유주 군현의 구조도 기존 중국의 것과는 다른 것이기에 고구려로부터 유주자사라는 관직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다만 그 유주자사라는 것이 실직이라기 보다는 허직에 가까운 것이며, 만일 실직이었다고 하더라도 오호십육국 당시의 혼란상에 따라 이치된 교군을 다스리는 것으로 그 지배영역이 중국 유주 일대 전체를 포괄한다고 보긴 어렵다는 견해가 주를 이룬다.

반면 긍정하는 쪽은 모본왕, 태조왕때 이미 베이징, 톈진 지역인 상곡, 어양, 태원을 공격하고 정벌했다는 기록과 고국원왕, 광개토대왕때 유주에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고, 관직 마지막에 유주 자사를 지낼때 유주 자사 관할하에 있는 고구려 13태수들이 정무 보고를 하고 있는 벽화가 있으며 고구려 제후왕의 기록까지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진 관할하에 있던 13개 태수의 위치는 무덤벽면에 사신들 우측에 쓰여 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5) “광령(廣寧)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13) “(판독 불능)”

일본학계와 중국학계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진이 지냈다는 유주자사를 허직으로 보는 편이며,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오호십육국의 혼란상을 틈타 실제로 중국 유주에 진출하여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으며, 그 흔적이 덕흥리 고분분의 묵서명에 남았다고 보는 편이다. 다만 북한학계에서도 고구려가 유주를 장기적으로 지배했을 가능성은 낮으며 길어도 몇 년 동안의 일시적인 지배에 그쳤을 것이라 추정하는게 다수설이다. 여담으로 북한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선 이런 견해를 받아들였는지 갑론을박이 있지만 어쨌든 고구려 영토를 남한 역사 교과서보다 많이 설정해놨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KBS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에 등장하는 담덕의 책략가 '하무지'는 바로 덕흥리 고분벽화의 진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이다. 작중에서 하무지는 후연 출신으로 담덕의 책사로 활동하는데 광개토태왕(담덕)이 그에게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의 고향인 유주에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다.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에서 후연의 유주를 점령해 고구려군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만 후연의 계략에 빠져 살해당하고 죽기 직전 담덕이 있는 곳이 바로 자신의 고향이라고 말하며 죽어서도 폐하(담덕)를 모시려면 자신도 고구려 땅에 묻혀야겠다고 말하며 죽는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소설급 전개긴 하다.[10]

소설가 김진명이 집필한, 중국인 보물 사냥꾼들의 암투로만 보였던 살인사건이 실은 중국의 조직적인 고구려 역사왜곡 공작의 한 단면이었고 이 공작에 우연히 엮여버린 제자를 구명하기 위해 버클리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 김민서가 개입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소설인 《신의 죽음》에서 '현무첩'[11]이라는 소재로 소설을 전개해나간 적이 있다.

또한 그가 집필중인 '고구려'라는 소설에서 광개토대왕 시기를 다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에 진이 등장할 확률도 있다.
[1] 도향(都鄕)은 군이나 현의 치소가 있는 향(鄕)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신도현의 치소를 가리킨다.[2] 묘지명에서 진이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제자"라고 언급되었다는 점을 통해 진이 생전 불교 신자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3] 현재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4] 무덤 내부에서 부장품을 가지고 건네주는 팀, 무덤 외부에서 부장품을 받는 팀으로 나눴을텐데 아마 외부에 있던 도굴꾼들이 부장품만 챙기고 무덤을 닫아버려서 무덤 안에 있던 네 명은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순장(...)된 모양이다.[5] 대신 출신지, 생몰년, 경력이 완벽하게 적혀있다. 대부분의 한국 고대 인물들이 기록의 부재로 출신지, 생몰년, 경력을 알 수 없는 경우와 대비된다. 하지만 적혀있는 출신지에 비해 최초 국적이나 성씨를 알 수 없으니 이것 아이러니이다. 희한하게도 다른 기록은 거의 멀쩡한데 최초 국적을 가늠할 수 있는 군의 이름과 복성인 성씨만 지워져있다.[6] 고대인의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장수했다. 그가 고구려인이라면 젊어서는 고국원왕대의 쇠락을 지켜보고 늙어서는 광개토왕대의 위상을 지켜본 것이다.[7] 일각에서는 덕흥리 고분군의 구조가 중국 지역의 고분과는 다르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고분의 형태는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백제 무령왕의 경우처럼 전형적인 중국 남조식 벽돌무덤에 매장된 케이스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진이 사망한 광개토왕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의 전통적인 묘제는 집안 일대에 밀집한 돌무지무덤, 즉 적석총에 가깝지, 벽화고분은 고구려와 중국의 묘제가 서로 혼합된 양상을 띄고 있다.[8] 중국 기주의 치소인 장락군 신도현을 가르키는 듯 싶다.[9] 더욱이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어떤 지역의 연혁을 설명할 때에 "본래 고려의 땅이다"라는 구절과 "본래 고구려의 땅이다"라는 구절이 확연히 나뉘어져 있다. 때문에 몇몇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하여 신도군은 고구려 시대의 지명이 아니라 고려 시대의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10] 애초에 광개토대왕을 다루는 매체 대부분이 그 굇수격인 '광개토대제'의 등장 인물들을 거의 그대로 퍼왔고 광개토대제마저도 시원치 않은 작품임을 생각해보면 이런 문제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제정신(?)인 '우리나라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진이라는 인물이 진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진은 부여 출신의 유민이라는 소수설을 채택했다.[11] 화려하게 장식된 현무 한 마리와 함께 '신 진은 백제 상인 삼십 명으로 하여금 우리 말을 가르치게 하였나이다(臣鎭使殘商三拾敎邦言)'라는 열 글자가 새겨져 장식된 금첩으로, 보물의 액면가치 정도는 다른 보물에 비하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단순 보물이 아니라 역사적 유물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 함의(고구려는 중국이 주장하는 대로 변방의 오랑캐 지방정권 수준이 아니라, 오늘날의 베이징 일대까지 지배한 대제국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료라는 설정이다.)를 고려한다면 그 어떤 보물도 비할 바가 못 되는 막대한 가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