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의 10대 제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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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가모니와 아내 야쇼다라의 아들. 한역으로는 나후라(羅睺羅)인데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읽으면 '라후라'가 된다. 사미(沙彌)의 시초.2. 생애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얼마 전에 태어났다. 라훌라가 태어나자 석가모니는 자신을 묶는 인연이 하나 더 생긴 것을 탄식하여 "라훌라[1]"라고 탄식하였으므로 '라훌라'를 이름으로 삼았다.[2]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도 이별의 고통을 낳는다고 보기 때문에(그리고 고통이 번뇌를 낳고) 그만큼 라훌라를 사랑했다는 징표로 해석하기도 한다. 부처가 된 뒤 '나는 일체 중생에 대하여 아들과 같이 여기어, 아들인 라훌라를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라훌라가 태어났기 때문에 석가모니는 고대 인도의 크샤트리아(찰제리) 계급 남성들이 짊어지고 있던 자손을 이어나가야 할 의무를 수행한 것이 되었으며 갓난아기인 라훌라를 놔두고 출가했다.
석가모니가 부처가 된 후 고국으로 돌아와 설법하자 야쇼다라는 아들 라훌라에게 "네 아버지를 찾아가 유산(왕위계승권)을 물려달라고 청하여라."고 시켰다. 라훌라가 어머니에게 들은 대로 행하니 석가모니는 "나의 유산은 너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니 법의 유산을 물려받아라."라고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제자 사리푸트라를 라훌라의 스승으로 삼고 출가시켜 버렸다. 그리고 "다시 세속에 돌아가지 말거라"고 간곡히 말한다.[3] 이 때문에 석가모니의 아버지이자 라훌라의 할아버지인 정반왕은 아들에게 후계자 문제를 따졌고 석가모니는 '부모가 살아 계실 적에 출가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한다. 부모를 모시고 집안을 이끌 장자는 원칙적으로 출가할 수 없다.'는 계율을 새로 만들었다.[4] 결국 정반왕의 뒤는 석가모니의 사촌 마하나마가 이어 왕이 되었는데 이후 코살라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라훌라는 출가 당시 어린아이였는데 처음에는 자만하여 수행을 게을리하기도 했다. 나이도 어렸고 왕족의 자손이고 아버지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7살 무렵에는 한창 사춘기라도 왔는지 누가 부처가 있는 곳을 물으면 기원정사에 있는데도 주암원(晝闇園)에 있다고 하고 거꾸로 주암원에 있을 때는 기원정사에 있다고 하여 골탕 먹이기도 했다. 아난이 이를 부처에게 고하자 부처는 라훌라를 불러 물을 떠오게 하여 자신의 발을 씻게 한 뒤 "아들아, 이 아비가 발 씻은 이 물을 네 입으로 마시고 내일 이 대야로 탁발을 받아 와서 먹을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다. 라훌라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자 부처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너도 이 대야와 같다. 대야도 물도 본래 그 자체는 깨끗했지만 거기에 더러운 발을 씻었으니 물도 대야도 더러워졌다. 네 마음도 본래는 깨끗하지만 입에는 진실과 신의가 없고 심성은 억세며, 정진에 힘쓰지 않아서 마음이 더러워졌고 그 더러워진 마음을 담고 있는 네 몸마저도 사람들이 더럽게 여긴다. 이 또한 더러워진 물과 그 물을 담았던 대야에 음식을 담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라훌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부끄러운 마음이 생겨 정진에 노력해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라훌라는 아라한이 된 뒤에도 설법에는 영 꽝이었다고 한다. 설법을 해도 대중들이 내용을 쉽게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한다.[5] 불교 기록에 따르면 라훌라는 공부하는 요령도 없었고 아는 지식을 남들에게 쉽게 설명해주는 요령도 많이 부족했던 듯하다. 그래서 정말 단순하게 수행하여 아라한이 되었는데 남들에게 설법을 해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는 어느 객승이 라훌라 숙소에 머무르게 되어 화장실에서 잠을 청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사미는 비구와 한 방을 쓸 수 없다는 계율이 있어 비구인 객승과 함께 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알고 석가모니는 이 규제를 없앴다. 어린 라훌라가 1일 1식을 견디지 못해 아침마다 배고파서 훌쩍이자 어리거나 병든 수행자에 한해서 조식을 허용하도록 규칙을 바꾸었다. 무엇보다 석가모니는 대체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나친 고행을 하거나 너무 엄격히 규율을 지킴은 나쁘다고 여겼다. '규율을 지키기 위해서 규율을 지키는 것'을 나쁘게 본 셈이다. 당장 출가 초기에도 단식 수행을 하던 중 '이런 걸로는 깨달음을 얻기 힘들다.'며 그만두고 식사를 했더니 다른 고행자들이 타락했다며 떠나 버린 적도 있다. 제자였던 데바닷타는 훨씬 더 엄격한 계율을 주장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교 승단을 떠났다.
후에는 '십대제자' 중에서 '밀행제일'로 불린다. 뭇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6] 마음을 닦고 선행을 하는 밀행을 일생 동안 함으로써 훗날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밀교의 주요 개조로 존중받았다. 다만 밀행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3. 기타
석굴암에도 석굴암 본존불을 둥글게 둘러싼 십대제자로서 부조로 조각되어 있는데 위치는 본존불을 앞에서 바라봤을 때 뒤쪽 오른쪽 1시 방향이다. 다른 아홉 제자들의 부조는 전부 본존불을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모습인데 라훌라는 부처의 친아들이라서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조각했다고 한다.
라훌라를 시작으로 석가모니의 계모 겸 이모인 마하파자바티와 아내 야쇼다라도 출가했는데 둘은 여승(비구니와 사미니) 교단을 이끌면서 존경받았다.
[1] 아들이 태어났을 당시 일식이 일어났기 때문에 '(태양을 가리는) 장애물=일식'이라는 의미로 라훌라라고 지었다는 말도 있다.[2] 혹은 저렇게 탄식한 것이 이름이 되었다고도 한다. 어느 쪽으로든 석가모니가 '라훌라'라는 말을 했고 그것이 이름이 된 점에서는 같다.[3] 이후 샤카족의 운명을 생각하면 자식의 운명을 본 것일지도 모르겠다.[4] 정작 라훌라는 그 아버지가 석가모니 본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계율대로 부모의 동의를 받은 거라고 볼 수도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부와 모친이 반대(당연히 두 사람은 라훌라가 태손으로서 왕위를 승계하기를 바랐다.)했기 때문에 계율을 깨고 출가했다고 볼 여지도 있겠다. 하지만 석가모니는 아이만 낳고 출가해달라는 정반왕의 뜻에도 따랐고, 유산을 달라는 라훌라의 뜻에 따른 후 정반왕이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가 출가하려면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하지 않겠냐는 요청에 그것또한 따라주었으니 모든 요청을 수긍해줬다고 보는 편이 맞다.[5] 사실 자기 자신은 잘 이해했는데 남이 이걸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설명을 못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라훌라도 이와 같은 부류였던 것으로 보인다.[6] 가장 눈에 띄지 않게 정진한 라훌라는 아이러니하게도 부처의 친아들이라는 고귀한 태생 때문에 출가 직후부터 차기 법왕(法王)으로 주목받고 그 탓에 한때는 교만도 심해서 장난을 쳐도 부처 외에 아무도 제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쭐한 인물이었다. 가장 고귀한 태생으로서 가장 주목받던 부처의 친아들이 가장 눈에 띄지 않게 정진하기로 제일이 되는 이 역설은 그만큼 라훌라가 그런 교만을 버리고 온전히 거듭났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