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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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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명3. 문제점
3.1. 기독교 명칭 범위3.2. 세대주의
3.2.1. 극우 네오콘과의 유착 및 미국-이스라엘 숭배3.2.2. 예수천국 불신지옥
3.3. 기복 신앙번영신학
4. 역사사례5. 대중매체에서의 개독교6.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서울역 선교.jpg 파일:개독교.jpg
서울역 앞을 지나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팻말을 들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개신교인 사진.[1] 명동 거리에서 촬영된 팻말을 몸에 걸고 전도하러 다니는 개신교도 사진.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7장 21~23절, 공동번역 성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로마에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었고,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고, 결국 대한민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
김재환 감독의 영화 <쿼바디스> 중에서[2]
개독교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개신교에 대한 멸칭으로, 접두사 ''가 기독교의 '기'를 대체해서[3] " 같은 기독교" 혹은 순화해서 "념을 밥에 말아먹은 기독교"의 의미로 부른다.[4] 더 줄여서 개독이라고 부른다.

2. 설명

1970년대까지는 개독교라는 단어 대신 '곬예수' 혹은 '골예수'라는 표현이 이에 해당하였다. 2000년대 전까지 예수쟁이가 통용되었으나, 사실상 개독교로 대체되어 가는 상황이다. 또 다른 멸칭으로는 '교회꾼'도 있다. 처음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파될 당시에는 야소(예수)꾼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현진건B사감과 러브레터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B사감을 가리켜 '찰진 야소꾼'이라고 하는데, 좋게 얘기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거고 나쁘게 말하면 지독한 예수쟁이란 뜻이 되겠다.

한국에서의 활발해진 개신교의 활동, 수많은 논란사건사고, 마치 개신교가 세상 그리스도교의 전부인 것마냥 '기독교'라고 자처함이 매우 눈에 띄는 관계로 개독교라고 하면 십중팔구 개신교를 이른다.

'개독교'의 주요 타겟이 개신교인 이유는 최초로 쓰였을 당시라 예상되는(즉, 안티기독교 운동이 시작되었을 당시) 2000년대 초반에도 "기독교=Christianity"가 아니라 "기독교=개신교"라는 관념이 지배적으로 쓰였고, 지금도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과거에 천주교라는 전통스러운 단어 자체를 고수했지만, 개신교는 각 종파 자체를 통틀어서 기독교라고 자처했고 행정적으로도 그렇게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즉, 엄연히 기독교 계열에는 가톨릭도 포함되지만 한국에서는 양자를 잘 구별하지 못하고 '기독교'라고 하면 개신교만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다.[5] 명칭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으니 이 항목을 참조하길 바란다.

개신교인들은 개독교라는 단어를 혐오표현, 멸칭으로 여기며 거부감을 갖는다. 일부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 표현 사용이나 증오 표현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하면서도 이미 기성화된 주류 종교에 대해선 아무렇지도 않게 '개독교'와 같은 증오/혐오표현을 조장 및 남용한다"며 이중적이라는 볼멘소리까지 늘어놓는다.

물론 개독교라는 단어가 '땡중/중놈'이나 '개불릭'처럼 혐오표현이자 멸칭의 범주에 해당되는 건 맞다. 다만 이러한 멸칭을 얻기까지 한국에서 개신교가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워 저질렀던 사회적 논란들이나 국내외에서 타종교 및 타문화에 대해 자행한 모멸과 부정 행위에 대해서는 모른 척 외면하거나[6]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꼬리자르기 바빴던, 나아가 자신들의 교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타종교 내지 사회적 소수자로 분류되는 계층에 대해 온갖 왜곡을 퍼뜨리고 지나칠 정도로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극단적인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우리와는 상관없다'며 뻔뻔스럽게 방관하고 외면하기만 했던[7] 많은 개신교인들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크다.

개신교 신자들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실제로는 중앙 교단과 관련이 없고 개신교의 이름만 걸고 있을 뿐이라며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가 성경의 해석과 교리와 예식이 자유롭다 보니 중앙 교단이나 교단 주류적 시각이 아닌 '일부'의 시각인데도 단지 개신교의 이름이 붙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중앙교단 및 교단 주류적 사고인 것처럼 확대해석되어 다른 개신교인들까지 욕 먹는다며 불만을 토로한다. 개신교계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단체가 많다며 이런 '좋은' 사람들은 안 보고 왜 '일부'만 보느냐는 항변이나 자신들의 일방적이고 무례한 전도에 대해서는 "우리가 교회 다녀 보니까 좋아서 그러는데, 좋은 건 같이 하면 더 좋다는 좋은 마음에서 좋은 걸 주려고 그러는 건데 왜 우리의 좋은 의도는 몰라 주고 욕부터 하느냐"라는 항변도 있다. 이 문서는 그러한 개신교 신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편집되거나 삭제 요청까지 올라온 적도 있다. ##

사실 기성 종교의 이름을 걸고 사이비 행각을 벌이는 경우는 개신교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고 불교[8]나 가톨릭, 이슬람 등에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항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신교의 이름만 내건 '사이비'가 존재한다고 해서 개신교 중앙 교단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까지도 "일부 이단을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것이 용인될 수는 없다.[9] 개신교 중앙 교단 차원의 사회적 논란이나 개신교의 이름을 걸고 개신교의 신앙 체계로 인해 벌어지는 범죄 및 개신교 교계 차원의 사회적 물의임이 분명한 사건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러한 개신교 차원임이 분명한 범죄와 사회적 물의들에 대한 비판마저 "우리 교회는 안 그러니 우리와는 상관없다",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10], "개신교 교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개신교에 대한 편견만 가지고 일방적으로 개신교를 욕한다"[11]며 시종일관 철면피 같은 태도로 일관했고, 심지어 2020년 코로나 방역에서 개신교계의 방역 당국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와 방해, 전광훈 등의 사이비 및 이단 목사들의 논란, 정인이 사건처럼 "개신교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개신교를 미워하는 이들이 사건 하나 터진 거 가지고 꼬투리 잡아 개신교를 매도한다"는 남탓, 위선, 피해자 코스프레까지도 서슴치 않는 태도가 개독교라는 멸칭이 생겨나고 나아가 확산되는 데에 크게 일조한 것이다.

본 문서는 엄연히 '다른 종교들도 개신교 뺨치는 부패와 타락상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개신교만 뭐라고 한다' 라는 양비론이나 덮어놓고 개신교가 잘못했다는 식의 인신공격의 오류적 측면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개신교 자체의 많은 전도를 빙자한 범법 및 사회적 논란들과, 그에 따른 피해 및 그에 대한 개신교의 대응 및 반응에 있어서의 비판에 관한 내용이다. 때문에 본 항목에 대한 삭제 주장이 나왔어도 삭제되지 않고 존속된 것이다. 자신이 이 '개독교'라는 항목 속의 개독교라 불리는 비행들과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이런 항목을 없애야 한다, 혹은 이 항목은 반기독교적이다 라며 수정을 가할 이유가 없으며 "일부를 가지고 개신교인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지 말라"며 자신은 억울하다는 말만 되뇌는 위선은 좋은 태도라고 볼 수 없다.

"한국의 사회복지단체 대부분은 개신교계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개신교 없으면 한국에서 사회복지가 제대로 돌아갈 것 같으냐"라는 항변이나## "우리가 교회 다녀 보니까 좋아서 그러는데, 좋은 건 같이 하면 더 좋다는 좋은 마음에서 좋은 걸 주려고 그러는 건데 왜 우리의 좋은 의도는 몰라 주고 욕부터 하느냐"라는 항변도 마찬가지다. 명백하게 본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그걸 "우리가 사회에서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고 니들한테 도움을 얼마나 많이 줬는데, 도움 받을 거 다 받아 놓고는 감히 우리를 욕하려 들어?" 식의 태도로 문제점에 대한 지적, 비판과는 별 상관도 없는 선행들을 내세워 덮으려 드는 태도는 온당하다고 할 수 없고, 본인들에게 좋으니 다른 사람들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끈질기게 상대의 의사도 무시하고 강요하는 시점에서[12] 이미 상대에게는 '폭력'이나 다름없다.[13][14]

무엇보다 "개신교 못지 않게 가톨릭이나 불교, 이슬람교 등 대형 종교들 역시 내부에 개신교 못지않게 각종 부패, 타락상 및 문제점들이 존재하는데도 유독 대한민국에서 개신교만 집중적으로 '개독교' 등과 같은 증오적, 혐오적 표현으로 공격당한다"고 억울해하는[15] 것도 전형적인 피장파장의 오류이며, 개신교인들이 개독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불쾌감 혹은 냉소라는 감정도 역시 불교나 가톨릭 같은 기타 대형 종교의 신자들도 그들의 종교가 공격당할 때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며[16] 유독 개신교 집중적으로 공격당한다고 하거나 일부를 트집잡아 개신교 전체를 모두 비난한다고 개신교 신자들이 볼멘소리만 웅얼거리기에는 이제까지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온 어그로, 타종교, 타문화에 대한 매도와 인신공격, 사회적/문화적인 영역에서 지나칠 정도로 자신들만의 교리만을 들이밀며 저지른 종교적, 사회적 논란 행각들은 이미 선을 넘었으며, 개신교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않고 외면해온 인과응보다. 개신교의 탈을 쓴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덕정사랑교회 같은 소위 '일부 이단 및 사이비'들의 활동들은 단지 그러한 인과응보의 실현을 좀 더 앞당겼을 뿐이다.

심지어 개신교 언론CTS가 이미 코로나19 사태 16년 전인 2004년"한국교회 자정능력 상실"이라는 보도를 내보낸 적도 있다. 그만큼 한국 개신교의 시스템적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 2017년 명성교회의 부자(父子) 세습 사태에 대해 JTBC 뉴스룸에 출연했던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박득훈 목사는 이미 2008년에도 종교법인법에 대한 찬성 입장을 밝힌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적지 않은 교회들의 불투명하고 부패한 재정운영에 대한 교회 자체 내의 자정 능력이 상실돼 있다"고 지적했으며# 2017년에도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인데, 한국 교회의 자정작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손석희 당시 앵커의 질문에 "자정 능력이 소진되어가고 있는 상태다"고 토로했다. # 비교적 최근 기고된 한국 개신교의 투명성 확보를 주제로 한 논문에서도 서두에서 '한국 개신교 교회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고 밝히고 들어가고 있다. # #

2025년 시점에서는 안 그래도 코로나 19가 창궐하던 시기에 개신교 목사들이 보인 각종 만행들로 인해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대놓고 등지기 시작하는 등 이미지가 극히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전광훈을 필두로 많은 목사들12.3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것도 모자라서 대한민국 헌정사에서도 보기 드문 서울서부지방법원 점거 폭동이 일어나게끔 선동까지 하는 대형사고를 계속해서 치는 바람에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예부터 개신교 내부에서 "한국 개신교회는 위선에만 물들어져 있으며 스스로 내부의 부조리를 자정할 능력을 상실했다"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목소리를 애써 부정한 결과 한국 교회가 개념이 없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며 잘못을 끝까지 인정을 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은 물론 명백히 사이비적그리스도가 행할 법한 행동을 하는 자들도 확실하게 제지하거나 제명 및 단죄하지도 않은 채 돈만 밝히는 우유부단한 종교라는 극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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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제점

3.1. 기독교 명칭 범위


개신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새롭게 개수한' 종교로 가톨릭에서 분파된 종교이다. 16세기에 처음 등장했으므로 세계의 주요 종교분파가운데서는 연령이 매우 어린 신흥종교 축에 든다. 가톨릭의 다른 이름이 천주교로 즉 개신교의 원조는 천주교이다. 한국에서는 기독교라는 단어를 개신교에만 쓰는 경향이 강한데, 원래 기독교는 그리스도교(크리스트교), 즉 예수를 믿는 종교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등 모두 기독교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본래 가톨릭과 정교회, 개신교와 오리엔트 정교회 등 비칼게돈파까지 전부 합친 개념이지만, 천주교가 중국에서 '그리스도(Christus)'를 한자어로 음차 번역했던 '기리사독'→'기독'이라는 명칭을 개신교가 종교를 뜻하는 교(敎)를 붙여 처음 한반도에 진출할 때부터 본인들이 적극 사용했고, 분단 이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개신교의 교세가 커지며 기독교라는 명칭이 잘못 정착되어 버린 것이다. 정교회의 경우 애초에 교세가 너무 약하고, 가톨릭의 경우 천주(天主, 하느님)교라는 명칭을 동아시아 전래 초기부터 사용했기 때문에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겼다. 영미권에서는 공식 명칭인 Protestant보다는 일상생활에서는 Evangelical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교파의 교세가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의 여러 문제점 중 하나가 기독교라는 용어에 대한 문제다. 기독교를 달리 이르는 말은 그리스도교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라고도 하며, 이 기독교 안에 가톨릭과 개신교 등 여러 종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서는 기독교라는 단어가 개신교 하나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용되고 있으며,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자신들을 기독교라고만 자칭하는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등 다른 종파의 존재를 몰라서 이렇게 자칭하는 것도 아니며, 이들은 대부분 "가톨릭 등 다른 종파들은 제대로 된 기독교가 아니며 오직 개신교만이 제대로 된 기독교이니 개신교를 곧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선민사상에 빠져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개신교인들은 가톨릭을 '면죄부 팔아먹는 종교'라며 종교개혁 시절 이야기까지 끌어와 폄훼하며,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같은 국내에 희귀한 기타 종파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제대로 모르거나 알고도 무시한다.

이런 오해가 100년이 넘도록 지속되다보니 비 교인들은 물론 개신교, 천주교 신자들조차 '기독교는 개신교와 같은 말이고 천주교는 별개의 종교이다'라고 오해하는 지경이 되었다. 특히 대한민국 국군이 이런 오해를 퍼트리는 데에 일조했는데, 군대에서 종교를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4종으로 분류하는 탓에 대부분 군 복무를 하는 한국 남자들의 인식에 기독교와 천주교는 다른 것이라고 자리잡게 되었다.[29] 2020년대까지도 군대에서는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원인이 저것뿐만은 아니다.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공교육 세계사 시간에 종교개혁을 배우면서 기독교의 역사에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분리되었음을 배운다. 교과과정 중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라 학창시절부터 이미 기독교가 개신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인터넷이 퍼진지도 이미 수십년이 지났고, '기독교'라는 용어가 개신교에 의해 독점된 상황에 대해 지적하는 문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오해가 지속되는 것은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부분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무관심이 지속되는 한 이 오해가 풀릴 일은 요원해 보인다.

3.2. 세대주의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으로 지적받는 것들을 나열 해보면, 세대주의, 오순절 운동적인 은사주의신사도 운동, 기복 신앙, 번영신학, 대형교회의 정치권과의 유착 관계, 유교나 무속 샤머니즘적 가치관의 혼합 등이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으로 자주 지적 받는다.

순수하게 교리적인 부분만 본다면 특히 많이 지적되는 것이 바로 세대주의이다.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에 세대주의 성향의 인터콥이 관련되어 있다고 비판받는다. 세대주의에서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을 주장하며, 전광훈 목사도 세대주의적 백 투 더 예루살렘 운동의 논리를 사용한다. 전광훈 목사는 자신이 세대주의자가 아니라고 부정하며, 샘물교회도 자신들은 인터콥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값없는 은혜를 강조하고,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한 죄인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을 강조한다.

일반인들은 물론 기독교인이라도 이러한 세대주의라는 말이 생소하고 처음 듣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세대주의자들 중에서도 세대주의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고, 여지껏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해왔던 경우들이 있기도 하다.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에 기초한 종말론이 꽤 오랜 기간 한국 교회를 난도질하고 있다. 상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종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세대주의인 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은 잘못되었다”라고 공인하면서, 정작 자신의 신학적 틀이 세대주의라는 사실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실제적 무지로 인해 자신의 신학이 건전한 성경 해석에 근거한다고 자부하며, 수정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어쩌면 무엇을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혼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에 기초한 운동 중에 한국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백투예루살렘 운동(Back to Jerusalem Movement)이다. 이 운동은 대형 교회와 목회자, 심지어 신학교 교수들의 용인과 지지하에 성도들의 삶 속에 독버섯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규장, 두란노, 홍성사와 같은 주요 출판사들을 통해 이와 관련된 서적들이 출간되어 한국 교회에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문적으로, 세대주의는 이미 죽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목회 현장과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말초 신경과 감정을 자극하는 세대주의적 감성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이필찬,『백투예루살렘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8~9p

파일:친박 극우단체의 이스라엘 국기 흔들기.png

세대주의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태극기 부대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 깃발을 흔들면서 시한부 휴거와 음모론적인 아마겟돈 종말론을 주장하면서 창조 과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알 아크사 모스크를 폭파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조건부 종말론을 주장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면 대환난 이전에 예수가 하늘로 1차 재림하고, 기독교인들은 환난을 겪지 않고 비밀스럽게 하늘로 휴거되며, 지상에서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세계연합군이 결성되어 아마겟돈 전쟁을 치르며, 예수가 지상으로 2차 재림하여 유대인들의 왕으로써 천년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리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세속국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천년왕국 이라고 믿으며,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종말론을 주장한다. 흔히 떠올리는 극우 뉴라이트 목사들의 신학이 바로 세대주의 신학이다.
2. 세대주의? 근본주의?

세대주의에 이어서 일어난 미국 근본주의에 관해서도 뒤에서 좀 더 자세히 논하겠지만, 여기서는 간단하게 새대주의와 근본주의와의 관계를 요약해보겠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미국 근본주의의 성경신학이 세대주의며, 근본주의의 종말론은 전천년설이고, 근본주의의 극단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이며, 근본주의의 과학이 창조과학이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연합하게 해주는 용매가 바로 문자적 해석이다. 문자적 해석이라는 용매가 있었기에, 이들을 한 지붕 세 가족 살림을 할 수 있었다. 이들 모두가 똑같은 성경해석 방법에 의해 묶여 있다.
윤철민, 『창조과학과 세대주의』, 120p

전통적인 기독교와 세대주의 기독교의 세계관을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은 구속사이다. 인간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하여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와 창조 질서가 훼손되었다.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죽음의 세력이 죄인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고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고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게 하여 인간의 죄를 대속하였다. 예수는 죄가 없음에도 죽임 당함으로써,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를 본받아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서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이다.

반면에 세대주의 기독교의 세계관은 종말론에 상당히 집착하는데, 특정한 날짜에 종말이 온다는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으며, 지나치게 아마겟돈적인 대환난과 종말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협박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 선택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대환난을 피하는 휴거가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면서, 유대인들의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모두 학살해서 정화해야 예수가 재림한다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약을 바탕으로 구약을 해석하여, 구약 성경의 내용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복음에 대한 예고로 보는데 반하여, 세대주의는 정반대로 신약 성경의 내용들을 끌어와서 구약의 예언을 해석하여,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는 유대인들만의 지위를 정당화한다. 이로 인해 세대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이며 바리새인의 누룩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실제로 세대주의 기독교는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의 지원을 받아 확산되었으며, 메시아닉 쥬라 불리우는 유대인들이 관련된 경우들이 많다. 이러한 세대주의는 수많은 기독교 계열 사이비 종교들의 원천이 되어왔다.
'유대적 배경 안의 기독교가 되지 않는 이상 결코 완전히 회복할 수 없다'는 하이들러의 말은 메시아닉 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의 갱신을 위해 유대적 배경을 추구해야 하며, 구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유월절, 초막절과 같은 절기도 지키고, 할례도 행하고, 성전 제사도 드리려면 결국 성전도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가르침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 유입되어 성도들의 시야를 흐리고 있다는 말인가! 이런 상황은 요한계시록 2-3장의 교회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에베소 교회에는 거짓 사도와 니골라당의 가르침이 있었고, 버가모 교회에는 발람의 교훈이 있었으며,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세벨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유대적 배경이 복음을 대신하려고 한다.
이필찬,『백투예루살렘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211p
하이들러는 2부에서 잃어버린 유산의 회복에 대해 서술한다. 메시아닉 쥬는 예수님을 굳이 히브리식 발음인 '예수아'로 부른다. 그 이유는 히브리적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이들러는 그 외에도 유대적 뿌리들이 회복되고 있는 증거들로서 '다윗의 별'로 장식된 목걸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의 기도용 숄인 탈릿을 쓰는 것, 교회에서 뿔나팔을 사용하는 것 따위를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점은 (하이들러도 인정했듯이) 이런 물품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는 일관되게 은사주의적 교회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신사도 운동과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서로 만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두 운동의 성경 해석은 동일하게 세대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다. 원래 기독교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약적 제도와 형식이 재해석되는 과정을 통과했다. 그러나 세대주의적 접근은 구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이필찬,『백투예루살렘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212p

세대주의와 기독교 시오니즘, 그리고 친이스라엘 정책
시위현장에 태극기와 성조기 이외에 이스라엘 국기가 함께 들려있는 장면이 자주 포착되고 있다. 수도권의 몇몇 대형교회 신자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든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한미 동맹과 한-이스라엘 외교관계가 장차 우리나라의 장래에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본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친한 나라가 종말에 예수님 재림시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신념을 갖고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 일어나는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에 영향을 받아 좀 더 구체적인 종말의 시간표를 의식하며 이스라엘 국기를 드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종말에 하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믿어진다. (...) 이스라엘 국민들은 야웨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토와 국방권을 가진 주권국가인 이스라엘 나라를 숭배한다. (...) 가장 먼저 지적할 것은 세대주의자들의 예언 이해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이다. (...) 가장 확실한 것은 세대주의자들이 중시하는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세대주의자들이 그리는 에스겔 40-48장의 미래상과 충돌한다.
벤자민 네탄야후의 유사신학적 정치수사와 세대주의의 위험한 공생의 선교학적 함의 분석

세대주의는 이스라엘 유대 민족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정작 신약 성경에서는 성전 파괴를 예언하였고, 기독교 교부들은 적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하려 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기독교를 탄압한 로마 황제 배교자 율리아누스가 유대교의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시도했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한복음 4장 21절
스코필드의 주해는 복음 메시지와 함께 수출되었고, 흔히 복음 메시지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한국, 동아프리카, 과테말라의 선교사들은 스코필드 성경을 통해 기독교를 소개했고, '그리스도인 사역자'를 위해 책 한 권에 모아 놓은 자료를 제공하려 했던 스코필드의 목표는 즉각적인 결실을 보게 되었다. 한국에 온 최초의 미국 선교사 중 한 명인 호러스 언더우드는 1912년 초에 스코필드의 주해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대니얼 허멀,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218p
한국 교회의 세대주의 신학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세대주의는 초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이었다. 놀랍게도 1907년 대부흥운동 역시 세대주의적 신학에 의해 주도된 사건이었다. 신학적으로는 선교사 블랙스톤의『예수의 재림』(1913년 출간)이라는 제목의 요한계시록 해설집을 시작으로 1913년에만 3종, 1918년과 1922년에 각각 4종의 요한계시록 관련 서적이 출간되었다. 이후, 초기 한국 교회의 요한계시록 해설집은 1936년 길선주 목사의『말세학』이 출간되기까지 4, 5년 간격으로 꾸준히 출간되었다. 물론 이런 서적들은 한결같이 세대주의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한다. 장로교 목회자로 한국 개혁주의 신학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도『말세학』에서 1939년과 2002년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적시함으로써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했다. 이렇듯 시한부 종말론으로의 귀결은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선교 초기에 도입된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한국 기독교 백년의 역사 동안 기독교의 정신을 지배해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신학교에서는 소위 개혁주의 종말론을 주창했지만 성경 본문의 구체적 주해를 통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단지 신학의 차원에만 머물렀을 뿐, 목회 현장에서는 신비적 · 감성적 호소력이 강한 세대주의가 득세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공중전에서는 이겼지만 지상전에서는 처절하게 패배한 양상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에서 번성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각종 이단들이 기생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했다. 예언이 실제 성취되는 신호를 찾아 헤매는 세대주의는 교회의 합리적 사고를 매우 취약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성도들은 여러 가지 거짓 가르침에 노출되었을 때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세대주의 종말론에 물든 한국 교회에서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횡행하는 것은 예고된 현상일 수 있다. 지금부터라도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과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세대주의의 신화를 걷어내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각종 거짓 가르침과 이단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유린할 것이다.
이필찬,『백투예루살렘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323~324p

3.2.1. 극우 네오콘과의 유착 및 미국-이스라엘 숭배

정치권과 결탁한 극우 성향 대형 교회의 목사들이 성도들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미디어로 홍보해서 개신교에 대한 대중적인 이미지에도 영향을 끼친다. 특히 백 투 예루살렘 운동이나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면서 뉴라이트(대한민국)세력에 속하는 경우가 그러하며, 전광훈 목사가 유명하다.

세대주의 신학에서는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신이 선택한 특별한 국가로 여기고 카고 컬트처럼 우상화하여 숭배하기도 한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뭐가 문제일까요?"
와이넌스는 잠시 생각했다.
"미국이요." 그가 대답했다. "그들 중 너무 많은 이들이 미국을 숭배하죠"
팀 앨버타, 『나라, 권력, 영광』, 1장 신의 선택을 받은 나라?: 미국의 영광과 진실, 43p
미국 역사에서 백인 기독교인들은 권력과 영향력, 번영과 안전, 이 모든 것을 누렸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하면, 또 영국을 물리치고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기적이나 자유와 민주주의(그리고 기독교)를 전세계에 전파한 유산을 고려하면, 많은 복음주의자가 미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믿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축복과 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어떤 복을 주셨다고 확신하게 되면, 그 축복은 시기와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우상 숭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부 사람들에게 미국이 우상이 된 것이죠."
팀 앨버타, 『나라, 권력, 영광』, 1장 신의 선택을 받은 나라?: 미국의 영광과 진실, 51p
대중적 세대주의자들은 문화적 경향을 단순히 마지막 때의 징조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복음적 사명의 달성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미국이 교회의 세대주의적 목적에 힘을 실어 주는 정도와 관련하여 미국의 예외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독교 국가주의의 한 버전을 개척했다.

특정한 가족 가치관 쟁점들을 제안한 기독교 국가주의에 내재된 이 주장은 린지가 "미국이 자유 국가로 보존된 네 가지 이유"를 열거한 자신의『1980년대』에서 잘 드러난다. 그 네 가지 이유는 (1) 국민 중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점, (2) 국민의 국가를 위한 끊임없는 기도, (3) 세계 선교를 위한 미국인의 자선 활동, (4)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다. 팰웰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단순화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때에 세계 복음화와 자기 백성인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을 일으켜 세우셨다. 나는 이 두 가지 목적 외에 미국의 다른 권리나 존재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린지와 팰웰에게 미국의 목적은 세대주의적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런 우선수위는 미국 안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법적 보호, 해외에서의 종교적 자유,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한 많은 신 기독교 우파의 노력에 영향을 미쳤다.
대니얼 허멀, 『세대주의의 부상과 침몰』, 408~409p
이러한 주장이 위험한 이유는 세속적 나라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적하는 모든 국가를 종말 전쟁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한 세력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적 패러다임에 갇힌 결과로서 이슬람권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야기하며 불필요한 무력 충돌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오는 전쟁의 표현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방 나라를 향한 심판의 표현들을 빌려 사용한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은 물리적 전쟁의 발생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의 종말적 정황을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유의미한 존재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여전히 유의미한 존재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한 신약성경 읽기는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현대의 세속적 국가인 이스라엘을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면 그 이스라엘과 대치 상태에 있는 모든 국가 기관을 사탄적 존재로 간주하게 되고 그것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자리 잡는다. 과거 중세 시대의 십자군 운동과 다를 바 없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필찬,『백투예루살렘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79~80p

대중적인 편견과 달리 2025년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기독교인의 정치 의식 지형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인의 극우 비율은 전체 성도 중에서는 14%이고, 목회자는 13%로 별로 많지 않은데, 그 소수인 극우 그룹의 활동성이 매우 높아서 한국 교회의 개신교인 이미지로 과잉 대표되고 있다고 한다. 극우 성향 성도의 71%가 60대 이상의 고령층이라고 하며, 노령층인 장로나 권사 직분의 경우에는 극우 성향의 비중이 높아진다. 개신교인 정치 성향 중도 38% 최다… ‘매우 보수’ 13.5% 그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2025 개신교인 인식조사 “개신교인의 극우성향을 진단하다” 결과발표회에 의하면, 개신교인 중 극우성향 22%… 국내 전체 비율과 유사하다고 한다. 개신교인은 극우? 사실은 일반사회 비율과 비슷하지만, 태극기 흔드는 '극우 개신교'는 20%…이들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교회 내의 극우 세력이 조직을 통해서 세력화되어 과잉 대표된다고 한다.

개신교인 전체 신자의 정치적 성향은 일반인과 별로 차이가 없으며, 다만 개신교인이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있다고 한다."개신교·비개신교인 정치성향 차이 적지만 동성혼 인식차 커"

개신교 일반 신자들이 모두 극우 성향이라는 오해와는 달리 사실 한국에서 개신교인의 비율이 높은 지역은 진보적 성향이 강한 전라도 지역이고, 보수적인 경상도는 불교세가 강하다.불교는 동쪽, 개신교는 서쪽

일반적인 개신교인의 성향과는 별개로 이렇게 소수의 극우 세력이 과잉 대표되는 것에 대해 네오콘과 같은 외세의 지원도 지적된다. 외국 정부나 정보기관의 자금 지원을 받아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으며, 특히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서 기독교 단체가 미국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는 경우들이 있으며, 탈북자들이 극우 시민 단체의 시위에 투입되는 경우들이 꽤 있다. 사실 종교인이나 선교사를 간첩으로 활용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전통이긴 하다.

실제로도 CIA에서 모킹버드 작전으로 일반 시민사회에 침투하였었는데, 교회에도 침투하여 기독교 신학을 정부에 순종하도록 편집하고, 목사들에게 접근해서 지시하며, 위험지역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간첩활동을 시킨다고 한다.Langley to Lausanne: How U.S. Intelligence Engineered a Globalist Christianity

미 인권단체, 한국 단체에 북한 인권 개선 자금 지원
미 국무부, 북 인권 및 정보유입 단체 보조금 지원 공고
美민주주의진흥재단, 대북인권단체에 4년간 127억6천만원 지원
북한 선교 저변 확대 위한 미주북한선교학교
‘탈북민 구출’ 김성은 목사, 6월 오슬로 자유포럼서 연설
탈북자 단체 지원하는 미국 정부…그 속내는?
탈북민 중 개신교가 절반 이상...이유는?
보수 개신교는 왜 성조기를 흔들게 됐을까
개신교 친미주의 ‘힘숭배’서 비롯
에이전시가 한국내 반공단체를 지원한 정황도 많이 발견된다. 예컨대 서북청년단은 극우 반공단체로 좌익세력에 대한 폭력 테러를 자행했고 이승만 정부와 한민당과 자유당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 자금의 출처가 미국정부였고 에이전시는 그와는 별도로 반공단체를 후원하고 있었다. 일본의 야쿠자 활동자금의 상당부분이 CIA로부터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에이전시가 서북청년단(서청)이나 조선민족청년단(족청)과 같은 극우단체를 지원 안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미군정은 이범석이 결성한 비교적 온건한 행동노선의 족청에 대해 전면적인 지원을 제공했다.
이창천,『브라보 한미동맹』, 198~199p

이로 인하여 민족주의 좌파 운동권 성향의 사람들에게 혐오받기도 한다.

탈북자를 조직화하는 극우주의
개신교와 극우주의의 끈끈한 결합
한국 사회 흔드는 극우 개신교…그 뒤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좌파로 몰아 공격하는 것이다. 사랑제일교회의 목사 전광훈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미국뿐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나라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의해 건국됐고 해방됐다”. 그는 삼일절 집회에서 애국가 제창 후 미국 국가를 부르기도 한다.
이창천,『브라보 한미동맹』, 179p
나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미국은 이제 신 중에서도 최상의 신이요, 한미동맹은 한국의 헌법 위에 위치하는 초월자가 된 셈이다. (...) 또 그것은 미국이 무슨 요구를 하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미국을 섬겨야 한다는 식의 정언명령을 우리의 피와 두뇌에 심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떠받드는 삶의 원칙이 정언명령 아닌가.
이창천,『브라보 한미동맹』, 268p
이들은 주인님 나라에서 던져주는 빵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며 헤죽헤죽 웃기나 할 뿐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CIA 돈을 받아 북한을 향해 풍선이나 날리고 숭미찬양 집회나 여는 일부 소위 태극기파들이 그들인 셈이다.
이창천,『명품외교의 길』, 300p

반미 성향의 민족주의자들은 주로 미국만 지적하는데, 사실 이스라엘도 한국에서 여론 공작을 한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이 독도와 동해 명칭 표기에 있어서 한국 편이라는 거짓 선전을 주기적으로 유포하고는 한다.
전 세계에서 미국 성조기를 들고 시위를 하는 곳이 둘이 있다. 하나는 한국이다. 앞서 말했지만 목사 전광훈은 삼일절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른 다음에 미국 국가도 부른다. 미국은 나의 조국이다. 다른 한 곳은 푸에르토리코다. 나라는 아니다. 미국의 법적인 식민지다. 시위의 주제는 독립국 수립이 아니다. 얼른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도록 미국 정부가 통촉을 해달라는 얘기다. 그래서 성조기를 든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극우 시위대는 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행진하는 것일까. (...) 최근에는 이스라엘의 다윗의 별 깃발도 들고 나온다. 미국이 애지중지하는 이스라엘은 우리의 사랑이기도 하다는 마음표현이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미국의 에이전시와 이스라엘의 모사드(Mossad)가 이들 극우단체에 자금을 지원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애기다. 내가 알기에 한두 푼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단체들은 에이전시의 후원 하에 성장했다. 그들은 해방 후 에이전시가 지원한 서청이나 족청의 후예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창천,『브라보 한미동맹』, 291p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성경적인 영유권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시오니스트 네오콘인 마이크 폼페이오는# 전직 CIA 국장이다. 마이크 폼페이오는 한국의 주류 기독교에서 이단시 되는 통일교를 옹호하면서 통일교 수사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사실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에 따르면, 예수는 가짜 메시아 사기꾼이므로, 유대교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독교 사이비와 범죄자 목사들을 지원해서, 최대한 기독교를 타락한 상태로 만들어야만 한다.

교계 내부 사정을 모르는 외부인들은 신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목사들이 왜 제재받지 않느냐면서, 단순히 한국 교회들이 모두 썩었고 부패해서라는 식으로 생각하고는 하는데, 나름 복잡한 사정이 있다. 주요 교단들의 총회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려면 일종의 정치자금이 필요하다. 이 때 어떤 외부 세력의 이해관계에 맞아 떨어지는 후보자에게 특정 단체에서 자금을 지원해주는 경우도 있기도 하다. 그렇게 특정 단체의 지원을 받아서 총회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위에 당선되면, 지원해준 세력에게서 특정인을 교단 내부 직위에 임명시키라는 지시/부탁이 내려오기도 하며, 그런 사람들은 정보기관과 연결되어서 교계 내부 동향을 파악하고 보고하기도 한다. 즉, 정보기관에서 교회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것이다. 대개 바로 정보기관의 신분을 밝히지는 않고 위장 단체를 통해서 연결된다. 아무튼 이렇게 함부로 못 건드리는 배후세력과의 연결이 있을 경우에는 쉬이 제재하지 못한다. 단순히 교계가 부패했다기 보다는 침투 장악당한 것에 가까운데, 결과적으로 일종의 부패나 타락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미국에 충성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고, 자녀가 미국 대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미국 대사관에서 추천서를 써주며, 미국 시민권을 받을 수 있고, 어지간한 범죄 행위에 연루되어도 신변이 보호받기도 한다고 한다.
사탄은 광야에서 세상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과 그에 따르는 영광을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예수는 사탄이 제안한 모든 것을 거절했다. 왜 그러셨을까? 진정한 나라와 진정한 권력과 진정한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귀가 2천 년 전에 예수를 유혹할 때 내밀던 것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유혹할 때 내미는 것들, 그것들은 모두 싸구려 위조품이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이 세상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 그 권세는 그 어떤 정치적 · 문화적 · 사회적 영향력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 영광은 지상의 어떤 존재가 받는 찬양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구약과 신약, 선지자들과 제자들, 기도문과 서신을 아우르는 성경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상 숭배에 맞서라는 권고다. 예수는 이 선택의 문제를 명확히 이분법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거나, 이 세상의 신을 섬기고 경배하거나 둘 중 하나다.
팀 앨버타, 『나라, 권력, 영광』, 1장 신의 선택을 받은 나라?: 미국의 영광과 진실, 28~29p

기독교 성경에서는 세상의 강대국을 믿고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의 말씀들을 변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을 치시리니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사야 31장

네오콘과 같은 시오니스트와 결탁한 세대주의와 뉴라이트 성향 극우 개신교의 행태는 다음과 같다.
"비상계엄 선포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극우 세력은 광장과 거리를 점거하며 본격적인 정치 행위의 주체로 등장했고 그 중심에는 조직력 자원 서사를 제공하는 개신교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제 에큐메니컬 회의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
12.3 비상계엄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계기로 몇몇 대형 개신교 교회(사랑제일교회, 은평제일교회, 세계로교회, 운정참존교회 등)가 사회적 물의와 민폐로 부정적 이미지 확산에 일조했다.

윤석열 정부 해병대 제1사단 사망 사고 수사 외압 사건에 해병 군종 목사를 포함해 한국 개신교계가 집단 연루된게 확인되어 전방위적 수사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국내 최대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임성근 구명 로비 사건에 연루되어 결국 압수수색을 당했다. # #

리박스쿨 여론조작 사건에선 초등학생들에게 반강제적인 개신교 사상 교육이 이루어져 논란이 되었다. #

정교유착을 통한 정치인에 대한 우상화와 신격화는 좌우 정치 성향에 상관없이 문제시된다.#, 이재명은 재림예수인 듯

3.2.2. 예수천국 불신지옥

파일:external/cdnweb01.wikitree.co.kr/img_20131018174916_ae340469.jpg

개독교+개병대. 사진의 인물은 무려 동시에 3가지 법률을 위반하고 있다. 도로교통법, 총포화약법[17], 군복 및 군용장구 단속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

파일:예수 천국 불신 지옥.png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관중석에서까지 등장했다.

세대주의 신학의 문제점이 종말론에만 지나치게 치중하며, 성화론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세대주의의 구원론에 있어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값없는 은혜가 구원이 단순히 예수에 대한 정신적인 동의에만 초점을 맞추고 죄인의 회개와 성화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고 개혁주의 신학에게서 비판받는다. 이러한 문제가 극대화된 사례가 바로 자신들은 예수를 믿고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구원파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싸구려 은혜라는 표현이 그런 문제점을 지적한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하 예천불지)은 가톨릭의 교리 Extra Ecclesiam nulla salus를 개신교에서 발전시킨 교리이지만, 이 교리를 한국 역사에서 처음 설파하고 정착시킨 목회자는 일제강점기 서북기독교 근본주의 목사였던 최봉석(최권능) 목사(崔鳳奭, 1869-1944)였다. # 당시 신사참배 강요 시국에서 예천불지는 강력한 반대 근거였고, 비록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일제 치하 절망적인 상황에서 의외로 희망적인 메시지였으며 여느 친일 목사들과 달리 최봉석은 상당히 모범적인 생활을 한 선비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18]

하지만 해방 이후 남북 분단6.25 전쟁으로 인해 서북의 근본주의 기독교인이 대거 남하하게 된다. 빈손으로 내려와 가진 게 믿음밖에 없는 그들은 현실 극복 방안으로 신앙에 더더욱 의존하게 된다. 이들의 영향으로 "이 세상에서 위로받을 것이라곤 아버지 하나님밖에 없고, 그분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순교자 논리가 교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개신교가 대분열을 겪어도 근본주의가 강화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독재정권부터 급성장한 경제 발전에 비해 시민의식과 신학이 성숙되지 못한 상황에서 기독교 근본주의는 독재 정권과 유착 관계를 맺고 신자들을 선동하면서, 기독교 자유주의는 독재와 싸우면서 세를 불려갔다. 여기서 각 교회는 교리교육을 등외시하여 목회자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고 합리성과 비평은 연약한 믿음과 불신앙의 발로로 취급하는 오를 범하게 된다.[19] 그 결과 목사들의 입맛대로 단순한 예정설과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에 경도되어 전도에 과도히 집중하게 되었다. 즉, 모든 개신교가 성향과 상관없이 예천불지에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시엔 그렇게 하는 게 편했고 호응도 나쁘지 않았다. 이단은 아니지만 얄팍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천불지 전도는 주로 역, 행사장, 시위 현장에서 이루어지며, 간간히 뉴스거리가 되어 왔다. # # # # 심지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특집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 이들 노상전도꾼은 대부분 가난하거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교회에서도 차별을 받던 신자로, 잘못된 교리교육을 받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개신교의 미덕을 배제한 체 오로지 '전도'가 유일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노상전도를 업으로 해도 교회에서 지원을 잘 안해주는데도 불구하고, 상대의 인생보다도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고 그 결과로 비난을 듣더라도, 부끄러움이나 죄책감 없이, 심지어는 하나님이 내린 사명을 수행한다는 자부심까지 느끼면서 예천불지를 외치며 다니는 것이다. # 더군다나 이런 행위가 오히려 개신교의 인식 자체에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끊임 없이 지적되고 있음에도 이들이 이것을 멈춘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더욱 이러한 몰두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기에 현시점에서는 본인의 자존감을 채울 목적 그 이상도 아닌 행위로 변질되어 버렸다.

사실 예천불지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종파는 없지만, 각 종파의 구원론과 차이점이 있다. 보편교회가톨릭정교회에서는 예수천국은 맞지만 불신지옥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어느 종파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확실한 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도 베드로부터 전해지는 형성기부터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기 때문에 단순히 예천불지를 말하려면 논리적으로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다 즉, 기독교 이전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기독교를 모르는 문명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들은 구원받지 못하는가? 와 같은 문제다. 여기서 성경성전의 계시 가르침을 발전시키며 가톨릭의 연옥, 정교회의 델로니아와 같은 중간 단계를 명확히 정립하여 이 문제를 극복했고, 가톨릭에서는 플라비우스 유스티누스라는 신학자가 선재적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론으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리를 반박하였다. #[20][21]

모든 유럽이 기독교화된 환경에서 태어난 개신교는 말 그대로 개혁교회였고, 개혁교회는 제2경전을 제외한 성경을 중시했기 때문에 보편교회의 전승에 구속받지 않았다. 칼뱅의 가르침을 중요시하는 예장통합에서도 '마태복음에서 나타난 구원 얻는 믿음은 행위가 수반되는 온전한 믿음으로 나타난 행위 지향적 구원론이며, 이는 예수 전승과 구약 예언의 성취의 관점에서 언약신앙의 전승을 이어받은 결과물'이라고 해석했다.[22] 반대로, 예장대신에서는 칼뱅의 구원론의 요지는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예정)에 의한 결정이며, 그렇다고 행위가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고, 그 삶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열매를 맺은 신자는 이제 그 택함과 믿음에 합당한 결실로 행위를 보여야한다'고 해석했다.[23]

예일 대학교 신학박사인 진 아웃카(Gene Outka)는 "구원자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과 똑같이 우리가 그렇게 '구원론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지고지순하면서도 극진한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성자 예수이지, 인간인 우리가 아니다."라고 밝혔다.[24]

튀빙겐 대학교 조직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은 '하나님만이 세계와 함께, 세계를 위하여 고난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된 인간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면서 인간과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과 구원받은 인간의 하나님의 고난에의 동참을 결부시키는 주장을 하였다.[25]

3.3. 기복 신앙번영신학

개신교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과 그러한 삶의 방식을 되찾아 본질적인 영혼 구원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인 고등종교이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는 기복을 중시한 원시종교적 성질이 강하다.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화평해지고 사업이 번창하고 만사가 형통한다"고 말하며 개인의 영달과 이득을 위하여 예수 믿기를 주변에 권할 뿐만 아니라 몇몇 목사들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병이 낫고 돈 문제가 해결된다"고 대놓고 장사치 마인드의 사이비 설교를 퍼뜨리며, 성도들은 그걸 믿고 따른다.[26] 장수, 건강, 부귀나 공명을 위한 기도는 말할 것도 없으며, 심지어 자식들 입시를 위한 특별 기도회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27]

이런 현상을 기독교계에서는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이라고 한다. 선교사들이 주는 구휼미를 위해 기독교를 믿는 17세기 인도인들처럼, 올바른 영성이 아닌 현실의 이득을 위해 종교행위를 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이다. 이 라이스 크리스천으로 일어난 적폐는 결국 개신교회 간의 빈부격차와 신자 및 비신자의 혐오를 불러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를 떠나가게 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에 본격적으로 라이스 크리스천이 뿌리내리게 된 상황은 경제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조용기 목사의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그 시발점인데, 그가 속한 오순절교회장로교감리교침례교와는 구원관이 완전히 달라 '중생과 성령세례'를 별도로 구분시켜 중생 후에 성령세례를 따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성령세례 시에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인 방언이나 치유 등의 성령세례의 체험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성령세례의 체험을 강조하면서 최단기간에 가장 빠르게 교인 수가 늘어나면서 양적 성장과 함께 교단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나갔다. 여기서 조용기 목사는 1962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집회 때마다 설교를 통하여 오중복음 가운데 하나인 병 고침과 삼중축복 가운데 하나인 물질적인 축복에 대해서도 역설해 왔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강조하고 현세적인 물질적인 축복도 내세우며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 최대의 교인 수를 갖게 되었다. 이런 초고속적인 양적 부흥에 놀란 다른 교파들은 여기에 현혹되어, 많은 교파들이 조용기 목사를 모방하면서 신오순절주의인 은사주의를 서서히 도입하고 교리적으로도 금기시 여겼던 병 고침과 방언은 물론이고 심지어 물질적인 축복의 기복 신앙까지 도입하면서 교회의 양적 성장을 지향하게 된 것이다.[28]

소위 '하나님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해지고 영적으로 평안해진다!'라는 사이비식 삼박자 구원론은 이 조용기 목사의 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따지고 보면 은총론을 오순절교회식으로 해석한 결과다.[29] 하지만 80년대 이전까지는 기독교 각 교단간에 정치적 싸움이 빈번하던 시절이라 라이스 크리스천으로 인한 적폐가 크게 눈에 띄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1980년대에 조용기 목사뿐만 아니라 교단과 정치성향을 불문하고 수많은 목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다.

슐러는 원래 미국 개혁교회 목사이지만, 그의 근본적인 사상은 성경적이지 않았다. 바로 신사고운동(New Thought Movement)이라는 이단적 사상이었다. 신사고운동은 피니어스 P. 큄비(Phineas Parkhurst Quimby)란 최면술사가 제창한 사이비 이론으로, 마음의 치유와 물신적 출세는 긍정적인 사고를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며, 자신의 현세적 열망을 긍정적 언어로 표현하는 적극적, 긍정적 습관을 숙달하면 무엇이든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의 저변에는 카발라, 힌두교, 불교, 고대 신비종교, 기독교 신비주의 등 각종 이단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들이 가득했다. 문제는 이 이단사상이 '긍정주의'라는 것으로 좋게 축약이 되다 보니 신복음주의를 중심으로 미국 사회와 개신교에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그렇게 변한 미국 개신교를 1960년대 조용기 및 한국 몇몇 유수한 목사들을 통해 직수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사고운동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긍정적인 사고로 인한 무한한 번영을 누리게 된다는 골자의 번영복음이다.[30][31]

로버트 슐러, 그리고 조엘 오스틴(Joel Osteen)[32]이 확립한 번영복음은 "진정한 개신교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성공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목적"이라 설교한다. 뭔가 90년대 운동권의 진보적 사회진출론이 생각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들은 성공 자체가 목적이라는 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과 안드로메다만큼 거리가 멀다. 즉, 기독교의 은총론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 결과 약자에 대한 멸시가 정당화되기 때문에 개신교인의 도덕성 하락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 밖에도 크고 화려한 교회 그 속에서 화려하고 편안한 예배[33]수정교회에서 대한민국 개신교에게 끼친 영향이었다.[34] 즉, 수정교회의 화려한 모습들을 벤치마킹하려고 개발독재시기에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무한경쟁을 일삼았고,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을 주어 강압적인 전도와 이웃 교회와 이교간에 불필요한 경쟁[35]까지 낳게 되었다. 결국 교회들이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며, 교회가 믿음과 사람을 무시하고 전도와 헌금에 집착하게 된 근본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류의 경건주의나 현대기독교의 은사중지론자들이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부흥운동에서 금전과 엮어진 이적체험, 메가처치 페라처피로 변한 대형교회 주식회사화를 보고 은사를 빙자한 사기라고 규정하는 이유가 바로 '번영신학'이다. 존 맥아더 목사(2차대전과 한국전쟁 영웅 더글라스의 사촌)와 폴 워셔 목사가 이러한 번영신학 출신 목회자들을 '삯꾼'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4. 역사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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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매체에서의 개독교


* 디스클로저의 음악 'When a Fire Starts to Burn'의 뮤비가 타락한 목사와 광신도 등 현대 개신교의 문제점을 비꼬는 내용이다.

* N.EX.T의 5집 개한민국의 수록곡인 Saving Private Jesus(예수 일병 구하기)도 개독교를 디스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6. 관련 문서


[1] 아이러니한 것은 해당 비판 기사를 작성한 언론사 자체가 개신교에서 유래한 악성 사이비 종교신천지의 관련 단체라는 것이다. # 물론 비판 기사를 쓴 사람과 비판 내용은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다.[2] 해당 대사는 미국 상원의 채플 목사였던 리처드 핼버슨(Richard C. Halverson)이 1984년 미국 장로교 총회에서 행한 설교에서 "초기 교회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녀의 친목 모임이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그리스로 이동하여 철학이 되었죠. 그리고 나서 그것은 로마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제도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그것은 유럽으로 퍼져나가 그곳에서 문화가 되었죠. 그리고는 마침내 미국으로 건너와 기업이 되었습니다.(In the beginning the church was a fellowship of men and women centering on the living Christ. Then the church moved to Greece, where it became a philosophy. Then it moved to Rome, where it became an institution. Next, it moved to Europe, where it became a culture. And, finally, it moved to America, where it became an enterprise)#라는 말을 연장한 것이다.[3] 개신교가 한국에서 기독교라는 명칭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이다.[4] 보통은 전자의 의미로 더 많이 쓰지만 후자의 의미로도 최근 들어 많이 쓰고 있는 추세이다.[5] 당장 교보문고영풍문고, 알라딘 중고서점 같은 한국의 대형서점의 기독교 관련 서가에서는 해당 관련 서적 분류를 굳이 '기독교(개신교)'와 '가톨릭'/'정교회'/등으로 해놓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이런 제목이 붙은 책도 존재한다. 대한민국 국군에서도 종교 분류할 때 복음주의 계통 개신교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한다.[6] 그러면서 토속신앙이나 불교/가톨릭 등 타종교에 기반을 둔 문화축제, 민속행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원 얘기가 나오면 '종교 차별' 이라며 반대부터 하던 사람들이 개신교도들이다. 이중잣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7] 당장 개신교의 이름을 걸고 목사를 자처하며 온갖 사회적, 종교적 논란들을 일으키는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목사에 대한 이단 결의를 한국 개신교 중앙 교단은 차일피일 미루거나 외면하고 있다. # # 전광훈의 그 유명한(?) 발언인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도 있고 1주일 뒤에 완도성광교회(예장통합) 소속 정우겸 목사가 그런 전광훈의 꼴을 두고 "저 똘것(또라이) 좀 누가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 어디서 저런 놈이 나와서 개신교 망신을 이렇게 시키는지 내가 아주 환장하겠다"라고 발언한 것에 대해서조차 개신교 신자들은 정우겸 목사가 쓴 '똘것', '없애버렸으면'이라는 표현만을 문제삼으며 "어디 목사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 위협하는 막말을 입에 올리느냐"며 오히려 전광훈을 두둔하고 정우겸 목사를 비방해대는 지경이다. 명색이 목사라면서 여호와를 향해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하는 사람과 그런 목사를 향해 "누가 저 사람 좀 없애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둘 중 누가 개신교의 교리상 더 문제가 있을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걸 단순히 욕한 놈도 똑같이 잘못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명백히 양비론적인 어불성설이다. 심지어 전광훈이나 사랑제일교회가 개신교 중앙교단에서 아예 제명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복원)라는 자칭만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완도성광교회는 엄연히 한국 개신교의 주요 교단이라고 할 예장통합 소속이며, 정우겸 목사는 명성교회의 부자 세습을 통과시킨 통합측 104회 결의를 반대한다는 청원을 순천중앙교회(홍인식 목사)와 공동으로 나서서 정식으로 교단에 제출하기도 한 인물이다. # 결코 전광훈 따위와 동일선상에 놓여 "둘 다 똑같다" 식의 양비론으로 비난당해야 할 인물은 아니다.[8] 무속불교는 한국에서 거의 뒤섞여 버려서 '보살'이나 '도사'를 무속인의 호칭으로 붙이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며, 승복 차림으로 길에서 모금함 놓고 혹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목탁을 두드리며 대놓고 탁발을 하는 자들도 있다. 한국 불교의 중앙 교단이나 다름없다고 할 대한불교조계종은 분명하게 교단 차원에서 이러한 탁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9] 물론 이는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다.[10]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불교나 가톨릭이 방역 당국의 대면 모임 자제 요청을 수용하던 와중에 개신교만은 '종교 탄압'이라며 대면예배를 밀어붙였고, 이에 대한 비판마저도 "교회에 대한 부당하고 편파적인 비난"이라며 "우리에게 예배를 드려라 드리지 말라 명령하실 분은 오직 창조자이자 구원자인 주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방역 당국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신앙과 믿음에 대한 명령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고 방역에 협조해 달라고만 말해야 할 것"이라며 대놓고 정교분리 원칙마저 부정하며 방역 지침을 거부하는 발언이 엄연히 중앙 교단인 감리교회의 원성웅 목사에게서 나왔다. #[11] 후술하겠지만 개신교계는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개신교의 문제점과 그것을 희화화해 풍자하는 것에 대해서도 "방송매체가 반개신교 감정에 편승해서 개신교 이미지를 망친다"며 매체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최근의 경우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나 수리남, 더 글로리 등에서 극중 악역으로 등장하는 개신교 신자 캐릭터들에 대해 "기독교적 가르침과 가치를 구시대적 억압들의 근원지로 여기는 영상제작 철학", "기독교의 가르침과 문화적 영향력 자체에 대한 조직적 반감"이라거나 "드라마를 본 해외 시청자들이 한국 개신교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한국 교회가 해외에서 전도하는 데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라는 황당한 반응까지 보인 목사도 있었다. # #[12] 본인들에게 좋으니 다른 사람들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부터가 '자기만의 환상'에 중독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13] 아동심리 전문가 오은영 박사는 한국일보 기고에서 비슷한 문제(어머니의 교회 강요)로 상담을 요청한 익명의 인물에게 "어머니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어디서도 존중 받지 못했던 사람이 종교 활동으로 인해 처음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삶을 지탱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종교 활동으로 인해 본인이 누린 기쁨을 나눈답시고 ‘이렇게 기쁜데, 이렇게 좋은데, 넌 왜 이걸 안 해?’ 란 식으로 아들을 자신과 다른 개인으로 인식하는 데 실패했고 '강요'를 통해 남편이나 사연자를 포함해서 자신과 가까운 가족들을 소리 지르고 때리며 강요하고 압박한 행위는 전도라는 말로 포장한다고 해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 오은영 박사 역시 개신교 신자이다.[14] 개신교 언론인 국민일보조차도 2022년에 한국 개신교계에서 2030세대가 차츰 교회를 등지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개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지나친 간섭'을 들었다. #[15] 한술 더 떠서 이런 한국에서의 반개신교 여론을 공산주의, 또는 중국이 배후에서 조장하고 있다는 가짜 뉴스까지 퍼뜨리기도 한다. ####[16] 불교 신자들은 땡중이나 반불교 문서를 보면서, 가톨릭 신자들은 가톨릭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 문서를 보면서 불쾌해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슬람 근본주의이슬람/여성 인권 문서가 한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작성되고 그 문서를 읽은 무슬림들이 그 문서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에 대해서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17] 실총이면 10조 위반, 모형이라면 모의총포임을 나타내는 표식(칼라파트)이 없기 때문에 11조 위반이다. 전체적인 실루엣과 명확히 보이는 두 개의 총열, 그리고 과거 수렵용 산탄총은 개인 소지가 가능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실총 쌍열 산탄총일 가능성이 있다.[18] 굳이 최봉석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개신교 판도는 서북계 근본주의 신학이 대세였고(한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213~220p 류대영), 조선 내 모든 개신교가 강제적으로 금연, 금주, 권학을 강조할 정도로 권면사상이 강했다.[19] 다만 당시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군사정권 시기라 정보가 통제되고 학문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이는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엔 성서비평학을 따르는 자유주의 교회조차도 신자들의 성서비평을 엄격히 금지했다. 당시에 신자들이 잘못 성서비평을 하다 이단으로 흑화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였고, 교리교육으로 인한 영성 함양보단 이단 타파와 방지를 중요시한 시기였다. 당장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과 같은 독재정권 시기에 만들어진 개신교계 이단들이 이런 꼴인데, 체계적인 교리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이 잘못된 성서비평을 하다 만든 사이비 종교라는 공통점이 있다. 교리는 커녕 라틴어 번역조차 엉터리로 배우고 단순한 라틴어 문법조차 알지 못해 '아! 하나님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구나!' 라고 생각해 '어머니 하나님'을 주장하는 사이비 분파가 대표적인 예시다.[20] 이 선재적 그리스도 이론은 예수회 신학자 카를 라너에 의해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으로 발전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일치주의의 형성에 방향성을 주었다.[21] 물론 카를 라너도 '그럼 기독교를 모르는 이교도나 보편교회에 떨어져나온 개신교라도 착하게만 살면(우연하게 기독교가 추구하는 공동선대로 살면) 구원받는가?'라고 비판을 받았다. 이론상으론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적으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선 기독교의 공동선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의미다.[22] 마태복음에 나타난 행위 지향적 구원. 2017. 한일장신대학교 대학원. 오미영.[23] 칼빈의 구원론적 관점에서 본 예정과 행위의 관계. 2016. 12.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진학동[24]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성에 대한 신학적·윤리적 탐구 –아웃카, 포우스트, 몰트만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2016. 3, 이창호, 268p[25] 동일 논문 273p[26] 사실 이는 한국인들이 정말 멍청하고 배운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국에 개신교가 퍼진 환경의 특성이 작용했다. 당시 조선에는 실질적으로 별 효과도 없는 한의학과 침술이 전부였고, 그나마도 가난한 평민들은 의원 볼 돈과 여유조차 없어 민간요법에 의존하던 조선시대에 비교적 선진적이고 혁신적인 데다 효과도 확실한 서양 의술은 그야말로 성서에서 예수가 행하는 기적처럼 보였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에 이런 의술을 행하는 의사들은 슈바이처 박사나 이태석 신부처럼 선교 목적도 겸해서 봉사하러 온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예수믿고 교회 다니면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인식이 박힐 만도 하다.[27] 이를 히즈키야의 예를 들면서 "간절히 아무나 빌면 이루어진다"고 부추기는 경우도 있으나, 애시당초 주기도문으로 부정되어진다.[28] <한국 개신교 주요 교파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3-234p[29] 80년대에 장로회에서 이단으로 지정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기복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성령 충만과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교회의 교리(흔히 '방언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라는 것) 때문이다. 물론 머지 않아 취소되었지만, 당시 이단지정을 내린 진짜 사유는 국내 기독교계에서 순복음교회가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끼쳤기 때문이다. 순복음교회를 위시한 오순절교단이 큰 교세를 떨쳐 교인 수평이동으로 기존 장로교도들을 흡수하는 정황이었기 때문에 장로교가 순복음에게 이단 지정을 내린 것이다.[30] 《한권으로 읽는 한국 기독교의 역사》, 류대영,326p[31] #, #, #, #[32] 현재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부유한 목사로, 레이크우드 교회의 담임목사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저서론 《긍정의 힘》이 있다. 십자가를 봉헌하지 않고, 지옥이나 각종 신학적 변론에 대해서는 회피하는 발언만 하고 PC적인 담론과 번영복음에만 집착해 이단/사이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짝퉁이다.[33] 전통적인 전례를 넘어 상당한 사치를 과시하며, 설교조차도 어렵고 번거로운 영성 함양은 일절 하지 않고 오로지 자존감을 키우는데 주력했으며, 성경적인 이야기보다 세속적인 이야기가 많았다.[34] AFKN에 슐러의 예배방송인 'Hour of Power'에서 보여준 수정교회의 화려한 모습들이 당시 80년대 개신교 목사들의 동기부여가 되었다.[35] 가령 이웃 교회나 성당이 이단이라는 비난이라던가, 이교에 Prayerwalking를 하는 짓거리. 다만 이런 움직임 속에서 개신교단을 중심으로 (단순히 종교적이거나, 밥그릇 문제더라도) 이단연구소를 세워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를 근절시키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는 않으나, 과포화된 개신교회 사이에서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36] 비리를 저지른 해당 교회의 담임목사의 친인척이 바로 HBC 사장이었다.[37] 구해줘(OCN)의 백정기 교주, 사이비(애니메이션)구해줘 2성철우 목사와 최경석 장로, 의뢰인(2011년작 한국 영화)의 피해자 어머니.[38]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는 등 신앙생활 자체에는 열심이지만, 중요한 기로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나 종교를 내세워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하는 경우다. 밀양(영화)의 신애와 살인범, 심장이 뛴다(2011년작 한국 영화)의 연희, 친절한 금자씨의 전도사,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유정 어머니, 4인용 식탁의 정원 아버지, 도가니(영화)의 성폭력 가해자들, SKY 캐슬의 영재 어머니 명주,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 양부모, 사랑의 불시착의 세준 아내 혜지. 더 글로리이사라.[39] 교회가 권력과 유착해 권력을 이용하는 모습이다. 아르곤(tvN)의 방송사 사장, 내 ID는 강남미인!의 도상원 국회의원, 작은 신의 아이들의 천인교회, 블랙머니(영화)의 임승만 장로.[40] 리턴(드라마)김학범 교수, 독전의 브라이언, 1987(영화)의 조 반장, 타인은 지옥이다의 엄복순.[41] 다만 1987의 경우에는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쫓기는 사람들을 숨겨 주는 교회의 모습도 제대로 나온다. 운동권 인사를 체포하러 교회에 들이닥친 공안들을 담임목사가 직접 호통치며 막아서다가 진압당하고 가톨릭, 불교 등과 협력해 민주화운동에 도움을 주는 등 개신교 자체를 비판하는 뉘앙스는 아니다.[42] 독실한 신자였던 사람들이 마주치는 어려움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종교의 실상이다. 오로라 공주(한국 영화)의 오 형사, 파괴된 사나이(영화)의 주영수 목사, 그놈 목소리(영화)의 경배, 사바하의 박웅재 목사.[43] 윤희에게의 윤희 가족.[44] 유일하게 개신교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묘사한 작품이 완득이(영화)인데, 완득(유아인 분)의 담임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동주(김윤석 분)는 자립이 어려운 이주 노동자를 돕는다. 동주는 자신을 교회 전도사라고 소개하며 동네 교회를 운영한다. 그는 예배당을 이주 노동자를 위한 쉼터로 제공하고, 교회 내 외국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완득이 어머니(이자스민 분)를 찾아 주기도 한다. ·담배를 금하는 개신교인데도 불구하고 저런 것들을 서슴지 않는 그가 운영하는 교회를 '사이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동주는 "교회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니까 내가 전도사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야말로 참 교육자와 참 목회자의 표본.[45] 과거 이정재의 수하에 의해 사지가 박살나고 병원신세를 져야 했지만 이정재를 살리기 위해 폭행당한 적 없다고 진술하며 거짓말이라는 죄까지 지으면서 이정재를 살리려 노력했다.[46] 본인 언급으로는 경찰 간부들도 다닌다고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