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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3:24:07

침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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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회(a.k.a 안식교)는 안식일이 결부된 구원론과 엘런 화이트에 대한 직통 계시론 때문에 이단 논쟁이 심하다.
강력한 에큐메니컬 성향 교단에서는 정통의 일원으로, 구원론 및 계시론에 민감한 교단에서는 이단으로 분류한다.
국내 개신교계는 조직신학(교의학)에 민감하기에 대체로 이단으로 받아들인다.
같이 보기: 기독교의 종파 }}}}}}}}}
설립자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1]
존 스필즈버리(John Spilsbury)[2]
설립년도 1611년
1638년
교세 약 5,100만 명[3]
계통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종교 기독교
종파 개신교
교파 침례회
언어별
명칭
한국어 침례회
한자 浸禮會
영어 Baptist Church
에스페란토 Baptista Preĝejo

1. 개요2. 기원3. 신학적 특성4. 신앙적 특성5. 조직 특성6. 침례
6.1. 일반침례교회, 특수침례교회6.2. 1689 침례 신앙 고백
7. 사도신경을 대하는 자세8. 한국 침례회
8.1. 신학교8.2. 지역 분포8.3. 교단
8.3.1. 침례 행위를 하는 이단8.3.2. 이단 시비가 있는 교회
8.4. 주요 교회와 목회자
8.4.1. 기독교한국침례회8.4.2. 한국성서침례친교회8.4.3. 한국기독교침례회
9. 국외 침례회10. 교인
10.1. 목회자10.2. 평신도

1. 개요

침례회()는 16세기 영국 비국교도운동에 기원을 두는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침례회가 재세례파와 연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재세례파와 침례회는 관련이 없다. 재세례파의 후예는 메노나이트, 아미시 등이다.

침례회세계연맹(Baptist World Alliance)은 2023년 기준 침례를 받은 성인 교인이 5100만명이라고 밝혔다.#

미국에서 가장 큰 개신교 교파이다.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과 관련 있는 미국 남침례회 교단의 2023년 교인 수는 1322만명이다.#

2. 기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피영민 총장의 침례교회 역사 강연을 정리한 내용이다.#

기독교의 뿌리는 여섯 개이다. 구교는 가톨릭, 정교회이다. 개신교는 루터교회, 개혁교회[4], 재세례파, 성공회이다.

침례교회가 재세례파의 후손이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성공회 안에서 칼빈주의, 개혁교회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청교도이다. 청교도는 국가와 교회의 일치를 주장했다. 청교도 중 국가 교회를 부정하고 나와서 자유 교회를 만든 사람들이 있다. 국가 교회에서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 이들을 분리주의자라고 부른다. 신앙은 청교도와 같은데 청교도는 국가 교회를 추구했고, 분리주의자들은 국가 교회를 부인했다는 점만 다르다. 분리주의자 중 믿는 자가 침례를 받아야지 유아 세례를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침례교회의 기원이다. 침례교회는 분리주의자의 후계자이다. 이것이 침례교회 기원의 통설이다.

이외 주장으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계승설(JJJ이론). 예수님과 침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침례교회를 세웠다는 주장이다. 기분은 좋지만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 ‘피 흘린 발자취’ 같은 표현을 쓰지만 이 이론은 사실이 아니다.

재세례파 영혈설. 침례교회는 재세례파와 영적인 혈족이라는 주장이다. 주장하는 사람이 꽤 많다. 재세례파와 침례교가 비슷한 점이 약간 있다. 믿는 자가 침례 받아야 하기에 유아 세례를 부정한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재세례파와 침례교는 이외 관련이 없다.

대부분 신학자는 침례교회의 기원을 영국 분리주의자 가운데 유아 세례를 부인한 사람들로 생각한다.

침례교회는 영국에서 나왔는데 처음부터 두 줄기로 나왔다.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이다. 둘의 차이는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하는 속죄 범위이다. 일반침례교회는 온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특수침례교회는 성부 하나님의 특별히 택한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믿는다. 일반침례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이고, 특수침례교는 칼빈주의이다. 침례교회는 양립될 수 없는 두 줄기가 각각 별개로 시작되었다. 하나로 있다가 갈라진 것이 아니다.

영국 일반침례교회의 시작은 존 스마이스(John Smyth),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존 머튼(John Murton)이다. 존 스마이스는 1609년 네덜란드에서 믿는 자가 침례받는 것이지 유아가 받는 것은 아니라고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이때는 몸이 물에 푹 잠기는 침수례가 아닌 그릇에 물을 담아 머리에 끼얹는 방식의 침례를 했다. 존 스마이스는 침례교회에 남지 않고 나중에 재세례파 공동체로 들어가버렸다. 토마스 헬위스가 존 스마이스를 정죄하고 “우리는 재세례파가 아니다.”라고 확고히 하였다.[5] 토마스 헬위스가 1611년 영국 스피탈필즈(Spitalfields)에 첫 침례교회를 세우고 1616년 순교하였다. 침례교회를 처음 세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1611년 토마스 헬위스이다. 후에 존 머튼이 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영국 특수침례교회는 칼빈주의인데 시작은 JLJ교회이다. 헨리 제이콥(Henry Jacob), 존 래스롭(John Lathrop), 헨리 제시(Henry Jessey). 헨리 제이콥은 1616년 런던 근교 사우스워크 (Southwark)에 교회를 세웠는데 침례교회가 아니라 독립파 교회였다. 헨리 제이콥이 미국으로 이민 간 후 래스롭이 10년간 목회했다. 그 후 헨리 제시가 목회할 때 몇 사람이 침수례를 받고 침례회로 개종했다. 이 사람들이 존 스필즈버리(John Spilsbury)를 중심으로 1638년 런던에 첫 특수침례교회를 처음 세웠다. 따라서 특수침례교회의 시작은 1638년 존 스필즈버리이다.

3. 신학적 특성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침례회/신학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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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회의 대표적인 신학적 특성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4. 신앙적 특성

개인의 신앙적 의지와 신앙적 자유를 강조한다. 한국 침례회는 미국 남침례회 영향으로 보수적인 성경 해석을 중시하는 느낌이 강하다.

한국, 미국 침례회는 음주나 흡연에 대해 보수적이다. 2007년 삶의 길 연구소(LifeWay Research Center)가 실시한 조사결과 미국 내 개신교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음주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갖고 있으나 남침례교가 음주에 있어서 다른 교파들보다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남침례교는 2006년에도 주류를 제조 선전하거나 사고 파는 행위 주류를 소비하는 행위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도 침례회는 과거 금주법을 지지했던 교단들 중 하나였다.

유럽 국가의 침례회나 미국 북침례회(American Baptist Churches, 약칭 ABCUSA)는 대체로 진보적이어서 동성애동성결혼에 우호적이다. 개인의 성경 해석을 중시하기 때문에 보수적이 될 수도, 진보적이 될 수도 있다.

5. 조직 특성

침례회의 교회운영은 회중 정치이다. 감독을 두는 감리회, 주교를 두는 성공회처럼 중앙집권적 체제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회처럼 개교회마다 장로 중심의 당회를 두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마다 교회 내의 운영을 위한 기구의 명칭[6]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침례회는 민주주의적 체제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교회의 현안에 대해 모든 침례교인을 대상으로한 회의를 열고, 거기에서 결정된 사안을 교회의 방침으로 한다. 침례회의 중앙 교단인 총회는 '지방회'[7]에 간섭할 권한이 없으며, 심지어는 개교회에도 간섭할 권한이 없다. 그렇다고 총회가 도·시별 지방회에 아예 간섭 안하는건 아니고, 약간은 큰 틀에서 조언하는 수준이다. 총회는 개교회 목사들이 모여 토의를 통해 교단의 나아갈 방향과 협력을 도모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또한 지방회 역시 소속 교회에 간섭할 권한이 없으며, 지방회 역시 개교회들의 협력을 위한 자치모임과도 같다.

침례회 직분은 목사집사뿐이다. 침례교회의 성경해석은 사도와 장로직은 동일하게 특별계시가 지속되던 시기에 성령께서 직접 임명하신 한시적인 직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각 침례교회가 장로 호칭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도 장로교와는 달리 목사직처럼 신학이나 교리적으로 어떤 특별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특별히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아 집사도 대외로는 장로로 칭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8][9] 교회의 운영은 당회 혹은 주교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닌, 주로 '사무처리회'라 불리는 전교인 회의를 통해 자유로이 안건을 제출하고 다수결로 결정한다. 대형화된 침례교회의 경우 전교인이 모두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 하므로 교회 정관등을 통해 '사무처리회'의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목회자가 되는 방식도 다른 개신교 교단과 달리 아무나 신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개교회에서 필요한 경우 신학공부를 별도로 하게 하여(주로 신학교에 보내는 방식) 필요한 만큼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 원래의 방식이다. 성소가 있는 침례교인이 목회자가 되기를 원할 경우 사무처리회를 통해 교회 교우들의 인준을 받고 나아가 지방회의 최종인준을 통해 신학생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인준 절차는 유지되고 있지만[10] 한국의 개신교의 전체적인 하락세로 인해 신학 공부를 마친 전도사(목사 후보생)가 모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성소식별(discernment)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지만 침례회에서는 성소식별이 중우정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교단의 성소식별이 중우정치를 통해 이루어지면 신학적 훈련이 부족한 인물에 대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목사/전도사 안수의 건이 흔하다.

침례교회의 회중 정치는 수직적인 직급을 가진 가진 가톨릭은 물론이고, 집사 이외 직급이 있는 개신교 교단과도 구별되는 특징이다. 하지만 최근 기침 교단이 다른 교단과 교류할 때 불편하다는 이유로 안수집사를 '호칭 장로'로 부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교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목사가 안수집사를 장로님이라고 부르는 교회가 생기고 있다.

6. 침례

침례교회는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자 요한에게 받으셨던 것처럼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수례(Immersion)를 행한다. 그리고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의 고백 없는 침례는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침례 받을 수 있는 나이는 교회마다 다르다. 어떤 곳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고백'할 수 있으니 침례를 준다. 어떤 곳은 만 16~20세가 되어야 침례를 준다.[11] 침례 자체가 다른 교파의 입교를 겸한다.

참고로 침례를 준다고 다 침례교회는 아니다. 정교회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처럼 침례교가 아닌데도 침례를 주는 교파가 있기 때문이다. 침례는 침례교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지 침례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6.1. 일반침례교회, 특수침례교회

침례교회 안에 공존하지만 교인에 따라 구원관이 두 부류이다. 일반 침례교인과 특수 침례교인으로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희생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은혜라는 '일반구원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일반'침례교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나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예정된 이들만을 구원한다는 '특수한(특별한) 은혜라는 개혁교리(특수은총론)'를 따르는 사람들이 '특수'침례교인이다. 주의할 점은 특수침례교인이라도 결론만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예정된 자들만 십자가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이 특수은총론이라는 등의 서술한다. 결론만 아는 것과, 전체적인 맥락을 아는 것의 어감은 전혀 다르다.

현재도 루터파내 강경파[12] 웨슬리안을 포함한 아르미니우스파, 심지어 강경한 일반침례교인 등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성경을 왜곡한 사람들로 개혁교인과 특수침례교인을 공격하며 매도하는 것은 바로 특수은총론의 결론부 만을 그들이 알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일반침례교회가 설립은 앞서지만, 청교도인 특수침례교회가 현재 침례교회의 주류이다.

특수침례교회는 회중교회에서 분리되어 1616년 헨리 제이콥이 설립한 교회가 최초의 교회다. 교회론에서 장로회, 회중교회와 차이가 있던 청교도들이 형성했다. 장로회와는 노회장의 권한으로 대표되는 각 교회에 대한 간섭을 부정하는 회중교회와 같은 입장이었고, 특수침례교회는유아세례를 부정하여 회중교회와 다른 길을 걸었다. 특수침례교회가 1689년 채택한 제2차런던신앙고백서는 장로회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회중교회의 사보이선언과 함께 3대 청교도신앙고백서로 인정받는다.

미국 남침례교회의 주류이다. 북침례교회에도 교회가 있다.

명성 높은 찰스 스펄전이 특수침례교회 목사이다.

1609년 성공회의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피신한 존 스마이스가 시작했다. 하지만 존 스마이스와 추종자들은 재세례파 메노나이트로 옮겨갔다. 존 스마이스를 따르지 않은 토마스 헬위스가 동료들과 영국으로 귀국하여 일반침례교회를 세웠다. 교리는 만인구원론이다.

6.2. 1689 침례 신앙 고백

침례교회 교인들이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인지 정리한 문서이다.

'신조'가 아닌 신앙 고백이다. 신조가 아니므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침례교회 밖으로 쫒아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침례교회는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신조를 만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경 이외 침례교회를 설명하는 어떤 문서도 만들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 오직 성경만 본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내키는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이단들이 자주 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침례교회를 설명하는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 성경이 재료라면 신앙 고백서는 요리이다.

침례교회는 청교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거의 비슷하다. 특히 특수침례교회와 장로교회는 유아 세례 유무, 장로 정치인가 회중 정치인가 정도의 차이만 있다.[13] 일반침례교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이므로 구원관에서 장로교회와 차이가 있다.

미국 침례교회의 근본인 '필라델피아 신앙 고백'은 1689년 침례 신앙 고백에서 문장 몇 개만 바꾼 정도이다.

현재 미국 남침례회가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신앙 고백은 2000년에 발표한 '침례교의 신앙과 메시지 2000(Baptist Faith and Message 2000)'이다.

7. 사도신경을 대하는 자세

침례교회는 교단 차원에서 예배 중 사도신경 암송을 각 교회 자율로 맡긴다. 예를 들어 침례회 대형교회 중 연세중앙교회, 지구촌교회는 예배 중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고, 강남중앙침례교회는 사도신경을 외운다. 한국 침례교회 중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 곳이 훨씬 많다. 침례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중시하고, 꼭 지켜야 하는 '신조'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사도신경에 관한 지구촌교회의 설명이다.
질문: 주일 예배시간에 지구촌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답변: 침례교회에서는 사도신경에 고백된 모든 고백의 내용에 대하여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동일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신경의 모든 신조적 고백이 이미 성경 안에 충분히 표기되었기에 "성경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충분하지 이 내용을 반드시 예배시간의 한 순서로 넣어 고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예배 순서는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배는 중요한 것이지만 예배 순서는 결코 이렇게 가져야 한다고 성경에 가르쳐진 일이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하나의 신조(Creed)인데 성경에 이미 존재하는 신조를 성경 밖으로 끄집어내어 신조화 하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비성경적인 내용까지도 신조화할 가능성도 있다(이미 어떤 교단에서는 그런 징조를 보이고 있습니다)고 보아 침례 교회는 철저하게 오직 한 책 - 성경 그 자체만을 더 소중히 여기자는 전통을 지켜왔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침례교인들은 "한 책의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불려졌습니다.

8. 한국 침례회

한국 침례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 선교사 맬컴 펜윅(Malcolm C. Fenwick, 1863 ~ 1939)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가 기원이다.[14]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했다.[15] 또한 만주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펜윅의 신학과 성경관은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이러한 특색은 현재의 한국침례회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있다.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명이 변경되었으며, 미국 최대의 교단인 남침례회 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와 1950년에 제휴하였고 6.25 이후 존 애버내시(John A,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등의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를 따르는 교인들과 동아기독교회 출신 토착 교인들 간의 신학적 논쟁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일명 포항파. 안대벽 목사 중심)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미국 남침례회 선교사 계열, 일명 대전파. 장일수 목사 중심)로 분열되기도 했으나,[16] 1968년 두 파벌이 합동하였다.[17]

현재의 명칭은 기독교한국침례회(약칭 '기침')이다.

1950년 미국 남침례회를 탈퇴한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독립적 교회들의 연합단체[18]인 '성서침례친교회'도 1954년 미국의 아이작 포스터(Isaac Foster, 한국명 표수다) 선교사가 대한민국에 들어와 서울 왕십리에 성서침례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한 이래 작은 규모이지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김기동 목사의 세계베뢰아연합 교단(주요 교계에서 이단으로 평가받음)을 탈퇴한 목회자들이 '한국침례교회연합' 교단을 만들었고 정통 신학으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미국 침례회와 교류하고 있으며 정통 신학자들을 초청해 신학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점차 교세를 늘려나가고 있다. 신학교를 조직하였으며 교단명을 '한국기독교침례회'로 변경했다.

8.1. 신학교

대한민국의 침례회 산하 고등교육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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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침례회
(기침)
한국성서침례친교회
(성침)
세계베뢰아교회연합[◆]
(세배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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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한국침례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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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파일:베뢰아국제대.jpg
신대원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침례회 계열 초교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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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
파일:한양여자대학교 엠블럼.svg
한양여자대학교
파일:한양사이버대학교 엠블럼.svg
한양사이버대학교
[◆] 이단 시비가 있는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교단.
[7] 재단이 침례회 계열이지만 어떤 교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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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신학교는 1954년 설립된 대전광역시 유성구 소재 한국침례신학대학교 하나이다. 1960년대 포항파가 설립한 대한침례회신학교가 있었으나 1968년 포항파와 대전파가 합동하면서 침신대에 흡수, 폐교되었다. 수도권 내 군소 신학교와 영남신학교 등 침례회 군소 신학교들을 통합하여 1981년 경기도 안성시에 4년제 학력인정 각종학교인 수도침례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2006년 침례신학대와 통합하여 안성캠퍼스로 개칭되었다,

한국성서침례친교회는 1966년 설립되어 2003년 대학원대학교로 개편된 경기도 이천시 소재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2006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성동구 소재 성서침례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8.2. 지역 분포

교단의 하나뿐인 신학교가 수도권이 아닌 지방(대전)에 있다보니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국내 5대 개신교 교단이고 총회가 서울 여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교회 지역편중이 심각한 수준이다.[19]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충청권 남부 및 경기도 남부, 전라북도 북부 지역, 부산경상북도 동해안 지역[20] 등에서 교세가 강하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가 위치한 대전과 인근 위성도시 지역에 교세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21] 그 외에 고양, 수원, 동해, 부산, 포항, 문경, 예천, 울진, 울릉도 등지가 침례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더욱이 이들 지역으로의 집중은 개교회주의가 강하고 교회 설립이 자유로운 침례회의 특성에 신학교 통폐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지역 거점 신학교의 소멸까지 겹쳐져[22]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23][24]

기독교한국침례회 홈페이지에서 지역별 지방회 목록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은 인구 990만명인 서울만 31개일 뿐 도단위의 경우 잘해야 도시별로 1개, 대도시의 경우는 많아야 4~5개 수준인데 비해 인구 154만 명에 불과한 대전에는 무려 15개의 지방회가 있다. 비슷한 인구수를 가진(151만 명) 강원도만 해도 지방회는 6개에 불과하며, 인접 지역인 충북(159만 명)은 7개, 충남(211만 명)은 12개다. 이를 지역별 인구수 대비로 환산해 보면 서울이 지방회당 31만 9천 명[25], 강원도는 지방회당 25만 1천 명, 충북은 22만 7천 명, 그나마 밀도가 높은 편인 충남도 17만 6천 명 정도 인구를 커버하는데 비해 대전은 지방회당 10만 3천 명 정도 밖에 커버하지 않아 그만큼 인구 대비 침례교회의 비중이 높다는 결과가 나와 침례회의 지역 편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당장 바로 아래 문단에 수록된 국내 침례회 주요교회 명단 중 5개 교회가 대전에 있다.

국내에서 인구 대비 침례회 비중이 대전보다 높은 지역은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인구수 1만 명 남짓에 별도의 지방회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 교회의 절반이 침례교회이며, '리' 단위로 침례교회가 하나씩 있을 정도다.[26][27] 침례회의 교세가 약한 광주광역시, 전라남도[28] 인천광역시, 강원도 영서 지역[29], 제주도 등지에서는 침례회를 이단으로 오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음을 감안하면 이는 심각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교회주의 성향이 강하고 신학교 교수들이나 신학생들의 신학 노선도 천차만별인 침례회의 특성은 교세 집중 지역에 교회가 난립해도 통폐합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30] 교단 내에서도 수도침례신학교 폐교 이후 수도권 신학교의 부재[31]와 지역 편중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2010년대 들어 동두천 주한미군 기지 캠프 님블 부지에 침례신학대의 수도권 캠퍼스 설립을 추진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승인까지 얻었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이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승인이 취소되고 말았다.[32]

8.3. 교단

8.3.1. 침례 행위를 하는 이단

8.3.2. 이단 시비가 있는 교회

8.4. 주요 교회와 목회자

8.4.1. 기독교한국침례회

8.4.2. 한국성서침례친교회[77]

8.4.3. 한국기독교침례회

세계베뢰아교회연맹이 분열되면서 나온 교회들이 침례회 신학을 바탕으로 다시 시작하려 조직한 교단이다. 2024년, 미국 침례회와 신학 협력을 추진했고 성공했다. 현재 교단 목회자세미나에 미국 침례회(옛 북침례회) 관계자들도 와 배석하고 있다.

9. 국외 침례회

유럽의 침례교회는 미국보다 급진적이며 진보적인 색채가 더 짙다. 물론 유럽에도 미국의 일부 침례교 교단처럼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침례교 교단이 존재한다. 하지만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82]

한국 침례회는 미국 침례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미국에서는 침례회가 개신교 교단 중 가장 거대하다.[83] 대표적인 교단은 흔히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남부 보수 공화당 지지 기반 지역의 교회들이 중심이 된 남침례회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며, 한국의 침례회는 미국의 남침례회와 가깝다. 이 외에는 남침례회총회와 노예 문제로 분열[84]미국침례회총회(American Baptist Convention),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기존 침례회 교단을 탈퇴하고 창설한 전국진보침례회총회(Progressive National Baptist Convention) 등이 있다.

현재 미국의 침례회 목회자 중 유명한 목사는 순회전도집회로 유명한 빌리 그레이엄, <목적이 이끄는 삶>을 저술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대표 기도를 한 릭 워렌(지향하는 신학이 꽤 진보적이고 에큐메니컬적이다.), 조용기 목사를 비판하여 국내에 더욱 유명해진 존 파이퍼[85], 급진적인 회심을 강조하는 폴 워셔, 칼뱅주의 강해설교가로 유명한 존 맥아더 목사 등이 있다.각종 고인드립패드립 남발로 유명한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도 있다.[86]

2014년 9월, 미국 남침례회 소속 캘리포니아의 뉴하트 커뮤니티 처치의 담임목사 대니 코르테스가 동성애자와 동성커플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남침례회에서 제명되었다. 대니 코르테스 목사는 자신의 아들 역시 게이었지만, 기독교인이고 목사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음을 깨닫고, 그리고 수많은 성소수자가 이웃으로 존재함을 깨닫고 스스로의 신앙적 양심과 고찰을 통해, 그리고 사무처리회라는 침례회의 절차적 전통을 거쳐서 결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남침례회는 고수하는 교리를 더 중요시하여 제명한 것이다.[87] 남침례회의 뿌리는 철저한 근본주의임을 다시금 증명한 역사다.

남침례회의 근본주의성은 사회문화적 측면 외에도 미국의 정치적 현실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는데, 남침례회 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의 알버트 몰러 총장[88] 은 조직신학자로서 몰몬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한 인물이다. 심지어는 논문도 썼고 자기 홈페이지에서 까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인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밋 롬니가 몰몬교인임에도 불구, 그가 공화당 후보라는 이유로 지지했으며[89], 롬니의 패배에 대한 논평을 "미국 복음주의자에겐 충격적인 결과", "세속화된 미국에서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후보의 승리"라며 분통을 터트렸다.[90]

이러면 마치 버락 오바마무신론자인 것처럼 보이는데, 오바마는 엄연히 개신교인이다. 오바마가 과거에 속했던 교파인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는 사회 참여를 강조하고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교단이다. 그리고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오바마 대통령 가족 모두가 백악관 근처의 침례교회에 등록해서 다니고 있다.[91] 또한 해비타트 운동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역시 남침례교인[92]으로 홍보하다가 지미 카터가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고, 남침례회의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하며,[93] 미국의 종교 근본주의를 경고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과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남침례회 일부에서 지미 카터를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이라며 까고 있다.

다만 남침례회에는 여전히 진보적인 신학자나 목회자들도 꽤 있다. 리처드 마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저 남침례회조차 진보적이라며 비난하는 극소수의 극단적인 보수성향 독립교회들도 있다. 이들은 특정한 교단을 형성하지 않고 성향만 공유하는 편이다. 대체로 남침례교인들조차 한 수 접어줄 수준의 과격성을 띄고 있는 교회들이다.

미국의 주류 개신교 교단 중 하나로 신자수도 많은 미국 침례회는 중도~진보 성향의 침례교 교단이다. 마틴 루터 킹, 석유왕 록펠러,에이브러햄 링컨의 모교단이었다.

10. 교인

10.1. 목회자

10.2. 평신도



[1] 일반침례교회[2] 특수침례교회[3] 침례교세계연맹 2023년. 침례 받은 성인 기준. #[4] 장로교, 청교도, 위그노 등[5] 존 스마이스가 이끌던 모임은 40여명이었다. 존 스마이스를 따르던 30여명이 메노나이트로 들어갔다. 토마스 헬위스와 존 머튼 등 10여명은 존 스마이스를 파문했다.[6] 운영위원회, 시무연회, 사무처리회 등[7] 가톨릭·정교회·성공회의 '교구', 장로회의 '노회', 감리회의 '연회'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정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이다.[8] 장로교회의 영향도 있지만 안수집사라고 하면 교계의 공식적 자리에 참석할때 침례교의 제도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타 교단에서 '안수집사 말고 장로가 와야 한다'는 마찰이 생겨서 결국 안수집사에게 장로라는 호칭을 주는 것이다.[9] 최근 한국의 개신교의 관습적 절차에 따라 '장로'직책을 두는 침례교회도 늘어나고 있으나, 침례회에서 부르는 장로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호칭'이다. 그러나 이름 자체에 권위가 있는 것은 함정[10] 개교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침례회의 특성상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선별되어야 할 신학생의 인준이 형식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교단 헌법(교회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무처리회 절차가 교회마다 다르며 중앙에서 목회자를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소가 없고 은사가 없는 사람이 성적만 맞춰서 신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기 힘들다.사실 이것은 한국의 개신교의 어느 교단이나 마찬가지지만[11] 이는 전통적으로 성인으로 여겨지는 연령이다.[12] 사실 마르틴 루터츠빙글리, 칼뱅과 차이가 없는 이중예정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주도한 멜랑히톤이 구원으로의 예정만을 주장했다. 물론, 개혁교회에서도 츠빙글리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불링거 등이 구원으로의 예정만을 언급했다. 다만, 개혁교회와 루터교회가 갈라선 원인은 성찬론인데, 루터가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를 강경하게 주장했다. 멜랑히톤은 개혁교회와 동일한 견해로 입장을 수정했고, 그 제자들은 개혁교회로 대부분 합류하거나 루터파 내에 온건파에 합류했다. 정통루터파는 성찬론을 중심으로 뭉쳐졌기에 그들 내부에서도 이중예정이냐 구원으로의 예정이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일치신조는 구원으로의 예정만을 주장한 파가 주도했다. 이들이 강경파다.[13] 침례교회 중 안수집사의 권한이 장로교회의 장로만큼 강한 곳들이 있는데 이러면 차이가 더 없어진다.[14] 선교 초기인 1895년 미국 보스턴 소재 엘라싱 기념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E.C.폴링 선교사 부부를 파송,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지역인 강경에 침례교회를 세웠으나 해당 선교회의 자금난으로 이들은 몇 년 못가 철수하였고 펜윅의 대한기독교회로 흡수되었다.[15] 실제 당시 동아기독교 소속 교회들은 경상도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교세가 집중되어 있었다.[16]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당시 침례회 총회장이었던 안대벽 목사를 불신임한 것이 분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17] 사실 이게 말이 좋아서 합동이지, 엄밀히 말해 안대벽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포항파가 급격히 힘을 잃어 대전파에 일방적으로 흡수당한 것이다. 충청권과 더불어 한국침례회의 2대 중심지격인 영남 지방의 침례회 교세가 오늘날 정체되고 대전 지역에 교세가 심하게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 합동이기도 하다.[18] 교단에 가까운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지만 소속 교회들이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이름에도 '친교회'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교회를 총괄하거나 제재하는 기능은 없으며, 목회자들의 정보 공유와 신학적 동질성을 위한 친목 단체에 가깝다.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에는 개신교 교단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다.[19] 그나마 국내에서 지역 편중이 심한 교단들로 구세군, 예장재건, 예장고신, 루터교회, 대한예수교복음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단의 태동 또는 총회 소재지가 지방이거나 국내에서 교세가 약한 군소 교단으로 서울에 총회를 두는 대형교단인 침례회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20]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구세군 대한본영의 교세가 강한 영덕군은 제외.[21] 그 이유는, 상술하였듯이 광복 후 재건된 침례회가 1959년 미국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대전지역 파벌(기독교대한침례회)과 펜윅의 동아기독교회 출신 교인들이 주축이 된 포항지역 파벌(대한기독교침례회)로 나뉘었고, 1968년 대전파가 포항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동하여 지금의 기독교한국침례회가 되었기 때문이다.[22] 1968년 인천 대한침례회신학교 폐교, 2009년 안성 수도침례신학교 폐교.[23] 한 예로,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전 연기군 남면 나성리에 위치하고 있던 한 침례교회는 교회 소재지 일원이 행복도시 예정지에 편입되어 주민들이 이주하게 되자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종시에 정착하여 새로이 유입되는 지역 이주민들을 흡수, 발전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침례신학대학교 인근 대전 유성구 노은동 외곽 지역으로 이주, 그곳에 정착해 흔한 인대전 침례교회가 되어 버렸다. 면소재지인 종촌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통합 교회가 행복도시가 건설되면서 종교용지를 분양받아 새롭게 단장하고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자리잡은 것이나, 인근 송담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합동 교회가 임시로 조치원읍으로 이전했다가 세종시 건설 이후 원래 지역으로 복귀하여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24] 참고로 말하면 대전에 최초의 침례교회인 대전제일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 직후인 1954년이다. 이는 1907년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유성교회), 1919년에 세워진 최초의 성결교회(대전중앙교회), 1937년에 세워진 최초의 구세군교회(대전중앙영문)는 물론 1938년에 세워진 최초의 장로교회(대전제일교회)보다도 훨씬 늦다. 애초에 동아기독교회의 선교구역에 대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 소속의 존 애버내시(John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선교사가 대전에 성서신학원을 세운 것이 대전 지역 침례회 선교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단 중 대전에 진입한 시기가 가장 늦은 침례회가 신학교를 등에 업고 대전 지역에서 개신교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라 할만 하다. 정작 하단에 있는 침례회 유명인 중 대전 사람은 1~2명 정도인데...[25] 언뜻 보면 지방회 수가 많아서 서울의 침례교회 비중이 가장 높아 보이지만 인구 대비로 계산해 보면 의외로 침례교회 비중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가 서울이다. 그나마 서울 지역의 침례교회는 한강 이남, 특히 서남부권(통칭 영등포권) 및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고, 동북부권(통칭 성북권)에는 매우 드물다.[26] 이미 1910년대에 침례회의 모태인 펜윅의 대한기독교회가 울릉도에 상륙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 활동을 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 울릉군보다는 밀도가 낮지만 울진군도 대전보다 인구 대비 침례회 교세가 강한 곳에 속한다. 다만 워낙에 인구수가 적은 오지 지역이다 보니 침례교회 밀도만 높을 뿐 대전처럼 메가처치급 교회를 배출할 정도는 아니다.[27] 물론 시도 단위에서 시군구 단위로 범주를 더욱 좁혀 지방회 소재지에 따른 침례교회 지역 분포를 확인해보면 인구수 대비 침례교회 비율은 단연 대전광역시 유성구가 1위이다. 침신대 인근인 유성구 노은지구 일대만 살펴보아도 개척교회 포함 20개 가까운 침례교회가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28] 전라북도, 특히 대전과 인접한 전북 지역은 호남 지역 침례교회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을 정도로 침례회의 비중이 높다. 그런데 정작 전주 바로 옆동네인 진안이나 장수에는 침례교회가 하나도 없다...[29] 강원 영동 지역은 동해시를 중심으로 침례회의 교세가 제법 강한 편이다.[30] 예장 통합, 예장 합동이나 감리회의 경우 교회설립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교단법을 통해 어느 정도 거리 제한을 두어(통합/합동 300 m, 감리회 200 m 등) 특정 지역에 같은 교단의 교회들이 몰리는 것을 막는 반면 성문화된 교단법 자체가 없는 침례회의 경우 이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침례회의 비중이 높은 대전의 경우 같은 동 관내에 불과 50 m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침례회 개척교회가 몇 개씩 난립하는 현상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둔산신도시와 노은지구. 심지어는 침례교회가 입주해 있는 한 건물 바로 옆 건물에 또다른 침례교회가 있는 코미디같은 사례도 실제 존재한다![31] 참고로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전체 한국 침례교회의 절반이 수도권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32] 침신대 동두천 캠퍼스 건설로 인해 침신대의 중추 기능이 수도권으로 옮겨가고 결국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대전 지역 교권파 정치목사들이 의도적으로 캠퍼스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로비를 벌여 방해했다는 의혹이 있다.[33] 실제 대전의 전체 개신교 교단별 비율은 기침 교단이 압도적이지는 않으며, 기감,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침, 기성 순으로 특정 교단에 치우침이 없이 고루 분포하는 편이다. 다만 6.25 이후 남침례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침례신학대학의 입지 등으로 인해 대전이 기침 교단의 홈그라운드처럼 인식되면서 침례회 개척교회들이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대전에서 심하게 난립하며 지역 내 기침의 개교회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 교회들은 지역내 개신교 연합행사나 부흥회,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 등에 활발히 참여하여 명단을 올리며 지역내 다른 교단에 비해 현격하게 눈에 띄는, 사실상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면서 "기침=대전"이라는 고정관념이 고착화된 것이다.[34] 이 외에도 원래 동아기독교회의 거점지였던 원산이 해방 후 북한 영토가 되면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세력들은 기반이 크게 약화된 반면, 엘라싱 기념선교회에서 양수받은 선교지인 충청권 남부지역의 신자들은 원산이나 동해안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관심과 지원 가운데서도 자력으로 지역 내에서 부흥하면서, 해방 이후 남침례회 선교사들의 활동 거점지를 지역 내에 유치하였고 교단이 분열된 후 힘의 균형이 구 동아기독교회(포항파) 쪽에서 남침례회 선교사들(대전파) 쪽으로 기울어 포항파가 대전파에 흡수당하면서 대전 및 충청 출신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구 포항파 세력의 거점지였던 대한침례회신학교를 폐교시킨 것도 이러한 상황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35] 침례를 베풀 때 목사의 인도에 따라 평신도가 들어가는 욕조.[36] 다만 기침의 경우 예장합동과 달리 교단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 자율에 맡겨지며, 따라서 개교회 성격에 따라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도 일부 존재한다. 특히 침신대가 있는 대전 지역의 침례교회들 중에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가 많다. 하긴 대전은 강단 십자가를 교단 헌법으로 금지하는 예장합동 교회들 중에도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가 있을 정도로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문화가 보편적이다 물론 전통적인 침례회의 신학 견해상으로는 예배당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것은 십자가를 우상숭배하는 것으로 보아 강단에는 십자가를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실제로 동아기독교 출신들(포항파)이 주를 이루었던 경상도 지역의 침례교회들 중에는 부산침례교회 등과 같이 지금도 예배당 내부 강단에 십자가를 두지 않는 교회들이 많다.[37] 개교회주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침례회 특성상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진상규명 농성에 참여한 최헌국, 양민철 목사처럼 좌파 성향을 가진 목사들도 있기는 하지만 교단 내 교권파 인사들은 대다수가 기독교 우파 성향이다. 기침 내 교권파 목사들인 윤석전(연세중앙교회), 장경동(중문교회), 김장환(수원중앙교회) 목사 등이 어떤 정치 성향을 갖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38] 당시 설립총회장인 김기동 감독을 교단에서 제명하는 결의를 하였는데 당시 결의를 했던 총회장이 성락교회에서 개혁파로 직무를 박탈당한 지교회 목사라서 소속교회에서 파면당한 목사가 교단 총회에서 결의한 내용이 유효한가 논란이 있었다.[39] 아래 세베연 설립자인 김기동이 설립한 교단이었다. 1987년경 현재의 기독교한국침례회에 소속되어 있던 서울성락교회와 김기동 목사와 관련한 이단시비가 있자 기독교한국침례회를 탈퇴하여 김기동 목사와 뜻을 같이 하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함께 김기동목사가 설립한 교단이다. 초기에는 기독교한국남침례회(미국 남침례회와는 무관)라 불리다 기독교한국침례회연맹(기침연맹)으로 개칭, 이후 기침 측에서 이름이 같다며 항의하자 사도행전 17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에서 따와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기베연)'으로 바뀌었다.하지만 이후 장로회 통합측의 사면철회 사건과 SBS 보도사건 이후 서울성락교회 내에서 김기동 감독을 지지하는 측(원감파)과 비판하는 측(개혁파)의 대립이 발생할때 기베연 내부에서도 그러한 대립이 있게 되자 결국 교단결의를 통해 해산하게 되었다. 이후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측은 세베연을, 지지하지 않는 측은 한침을 각각 설립하였다. 그리고 성락교회의 개혁파(성락교회 교회개혁협의회)는 세베연, 한침 어느 쪽도 속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참고로 기베연은 법적·행정적으로 완전히 해산되었고 세베연과 한침은 기베연이 해산, 소멸된 이후 설립된 교단이므로 어느 곳도 기베연의 법적·행정적 후신은 아니다.[40] 서울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 입장을 지지한다. 기존의 기침교단과 교리는 근본적으로 같으나 귀신론(귀신은 불신자의 사후 영이라는 견해) 부분에서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일부 신학적인 부분(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별개라는 견해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개신교인에게는 이 교단 최대의 교회인 서울성락교회와 김기동 목사 그리고 귀신론으로 더 알려져 있다. 본 교단은 자신들이 개신교의 일부이며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하나, 이단 시비로 인해 실질적으로 기침교단 및 다른 개신교단과의 교류는 없는 실정이다. 2016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서는 귀신론 등이 김 목사의 체험을 기초로 한 비본질적인 개인적 의견일 뿐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은 기성 교회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서울성락교회를 이단에서 사면하였다. 그러나 불과 며칠 되지 않아 예장통합 총회가 사면을 철회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불거졌다.[41] 그런데 귀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가 이단정죄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는 현재도 논란이 많다. 대개 이단으로 분류하는 근거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지의 여부인데, 귀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 이 때문에 국외에서도 귀신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고, 모두 그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가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 논리도 각각 존재한다. 개중에는 한국 교회의 주류 학설인 사탄 및 타락한 천사라는 견해도 물론 해당되며, 불신자의 사후 영이라는 견해도 또한 해당된다. 그러나 한국처럼 주류 학설이 아니라고 이단시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이유는 앞서 서술했듯이 성경에서 명확히 정의하고 있는 부분이 없고, 삼위일체 같은 핵심 교리가 아닌 곁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장통합 사면위에서 서울성락교회가 사면 판정을 받은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42] 공주, 세종, 유성 지역에서 교세가 강하다.[43] 이동원 목사는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목사와 더불어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린다. 교계에서 존경받는 원로 목회자 중 한명이다. 특수침례교인으로 칼빈주의를 설교한다. 지구촌교회는 연세중앙교회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침례교회이다.[44] 원래 이름은 둔산중앙침례교회였으나 도안지구에 새성전을 건축해 이전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45] 김장환 목사는극동방송 사장이며, 세계침례회총회장을 역임했다.1973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 주최로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부흥회 통역을 담당하며 명성을 얻은 후 한국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46]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주축의 교회로 성장하다가 유성선병원 옆으로 이전하였는데, 지하에 건축된 예배당으로 일명 '카타콤'교회로도 불리기도 한다.[47] 신사도 운동 논란이 있는 교회로 알려져있다.[48] 대한민국 거의 모든 대형교회에서 부흥회를 집회해본 유명한 부흥사이다. 유머러스하여 예능 방송에 많이 나온다. 최근 전광훈 목사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49] 고 한기만 목사가 1972년 창립한 교회이다. 서울의 대형 침례교회 중 하나이다. 매주 헌금액을 주보에 투명하게 공개한다. 음향 지식 유튜버 김도헌 프리비전스 대표가 교회 음향을 담당하고 있다.[50] 서울의 대형 침례교회 중 하나이다. 1976년, 방배동의 삼호아파트 상가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했다.[51] 연세중앙교회에 이어 서울에서 두 번째로 큰 침례교회이다. 피영민 2대 담임목사는 특수침례교인이며 칼빈주의 신학자로 유명하다. 2023년 침신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52]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침례교회이다.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했다.[53]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가 최초로 설립한 침례회 교회이다. 현재 한국침례회 주류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다.[54] 마포구 아현동 소재.[55] 교회 명칭과는 달리 신촌이 아닌 서대문구 연희동 옛 성산회관 인근에 있다.[56] 2017년 '대학연합교회'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로, 담임목사는 이름과 달리 여성이다. 배우 최강희가 다니는 교회이다.[57] 한때 에덴수도원의 후신으로 알려져 이단 논란이 있었던 명인교회 자리에 들어섰다. 고흥식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하였다.[58] 1966년 서울 성산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하여 1990년대 고양시로 이전하였다. 유관재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59]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통일로 1001) 1001카페로 열린 소통과 함께 20년 이상 매일 복음전도와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에 헌신함.[60] 2014년 2월에 한국 개신교의 기형적인 구원관을 비판하는 저서'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박사과정 수학중이며, 다수의 신학서적을 번역, 저술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서적이 한국교회의 대형화, 기업화를 비판하는 '메가처치논박'이다.[61] 평신도가 읽기 쉬운 신학 서적을 번역, 저술한 작가로 유명하다.[62] 미국 남침례회 출신이며, 초교파적 연합 선교단체인 새물결선교회의 회장. 그가 담임하는 포도나무교회는 새물결선교회의 집회와 교육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사실상 새물결선교회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3] 동아기독교 재건의 주역이었던 안대벽 목사가 1951년 설립한 부산 지역 침례회의 모교회. 침례회 분열 시기에는 포항파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동래구 안락동 동래봉생병원 인근에 있다.[64] 부산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형 침례교회. 가야동 본당과 센텀(재송동)에 지성전을 두고 있다.[65] 송성구 원로목사는 2021년 11월 별세했다.[66] 김성로 목사는 체육교사 출신으로 늦게 침례회 신학을 공부하여 40대 후반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강원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마음교회를 개척하여 춘천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2013년 7월 대동 · 대한운수 차고지 맞은편에 있던 예배당을 인수하여 이전하였다. 소위 '부활복음'이 비성경적으로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201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 이단성 연구조사를 진행했다. 기침은 문제 있는 부분의 수정을 약속했다며 김성로 목사를 옹호했다. 예장합동 제 104회 총회에서 이단성 없음으로 결론짓고 교류금지를 해제했다.[67] 교회 창립 70주년이 넘은 교회로 원주 지역 사역에 힘쓰고 있음[68] 서울중앙침례교회 월드비전교회 → 하늘비전교회로 교회 명칭이 변경됨.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했다.[대전] [70] '함께하는공동체'를 표방하며 4개 교회의 공동체 모임을 각자 가지며 문화사역에 힘쓰고 있다.[안성] [72] 구한말인 1909년 설립되어 110년의 역사를 가진 문경시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1957년 석조로 건축된 현 예배당은 문경시내에서 '돌교회'로 유명하기도 하다.[73] 김기동 목사로 유명한 서울성락교회에서 부목사와 베뢰아아카데미 원장 등을 하다 탈퇴를 하고 개척한 교회이다. 초기에는 부천에 있었으나 서울 금천구로 교회를 이전하였다. 기독교 한국침례회에 정식으로 회원가입을 하고 지방회에 소속된 것으로 보아 신학적으로는 베뢰아 요소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74] 기침 교단 소속이었다가, 1987년부터 2005년까지 이단인 베뢰아 소속이었다. 베뢰아 교단에서 두 번째로 큰 교회였다. 기침 교단이 요구한 까다로운 검증 조건을 수용했다.[75] 김관성 목사는 고양시 행신침례교회 담임목사였는데, 2022년 1월 안디옥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는 내용으로 설교하던 중 교회는 교회를 낳아야 한다면서 자신이 직접 분립 개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멀리 울산으로 가서 남구 삼산동에 교회를 개척하고 2022년 8월 7일 개회 예배를 드렸다.[76] 대전 노은지구에 소재한 교회. 대전 연구단지 인근의 새누리교회에서 분립. 이후에도 계속 분립 개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77]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특징은 개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방언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성경을 권위가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며 보수적인 신학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칼뱅주의를 지니는 교회도 있다. 아울러 축도가 없으며, 폐회기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미국도 자유 의지 침례교회나 성서침례교회, 그리고 독립침례교회도 똑같다.[78] 아이작 포스터 선교사가 세운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모교회로 성서침례신학교의 발상지이다.[79] 김우생 목사는 1961년부터 목회하고 있다. 불광동성서침례교회는 대한민국 성서침례교회 중 가장 유명한 교회이다.[80]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사직대로 257[81] 전라북도 군산시 흥남2길 34[82] 진보 그리스도교인 일부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유럽에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교단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83] 미국의 옛 주류 교단 5곳 중에서 연합감리교회(UMC)를 제외한 나머지 4곳 신자 수를 다 합친다 해도 남침례회 신자 수보다 수가 적다. 물론 남침례회 신자 수는 연합감리교회보다도 2배 많다.[84] 당연히 보수적인 남침례회가 노예제를 찬성했다. 그러나 최근 남침례회는 흑인 목회자를 총회장으로 추대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85] 참조.[86]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는 침례회라는 이름만 쓰는 독립교회이다. 미국의 주요 침례회 교단인 남침례회와 북침례회에게 이단으로 정죄받았다.[87] 참조.[88] Albert Mohler Jr.은 미국의 남침례회 신학자로서 개혁주의근본주의노선을 따르는 보수 교의학자다. 그의 대표적인 어록은 다음과 같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 등의 타 종교는 사탄의 무리다', '천주교'는 가짜 교회다', '요가는 이교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해서는 안 된다.' 남침례회 신학교는 교단의 근본주의적 노선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학자들이 다수 존재했는데, 교단의 노선과 입맞에 맞는 몰러의 취임 이후 교수진 역시 철저히 근본주의화 되었다. 미국의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몰러를 알 카에다에 비유하며 까기도 한다.[89] 사실 오바마가 동성애 지지 선언이나, 낙태 찬성 의사를 나타내면서 대다수의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한 건 사실이다.[90] 참조.[91] 참조.[92] 남침례회 안수집사장로로서,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학교 교사로 빠짐없이 봉사할 정도이다.[93] 미국 남침례회는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 남침례회와 달리 한국의 침례회는 2014년부터 여성에게도 목사 안수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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