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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1:48:28

이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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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남 김해시·김해군)
선거구 분리
이재우[A]
김동주[A]
제13대
이학봉
[3]
선거구 조정
김영일[4]
송두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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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학봉 프로필.jpg
<colbgcolor=#06377a><colcolor=#fff> 출생 1938년 5월 15일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면
(現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사망 2014년 5월 24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본관 성주 이씨[6]
산남(山南)
재임기간 전두환 정부 초대 민정수석비서관
1980년 9월 9일 ~ 1986년 1월 8일
제4대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 (장관급)
1986년 1월 8일 ~ 1988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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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377a><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이민호, 어머니 김묘옥
형제자매 4형제 중 막내
배우자 이설혜[7]
자녀 장남 이일형[8], 차남 이세형[9]
인척 처남 이병태
학력 명지국민학교 (졸업)
대동중학교 (졸업)
경남고등학교 (졸업 / 11회)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포병학교 (졸업)
육군기갑학교 (졸업)
육군공병학교 (졸업)
육군대학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9기)
종교 개신교 (침례회)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3
약력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수사과장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장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제4대 국가안전기획부 제2차장
민주정의당 국책조정위원회 위원
제13대 국회의원 (경남 김해시·김해군 / 민주정의당)
자유민주연합 특임촉탁위원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8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2년 3월 ~ 1980년 9월
최종 계급 준장 (대한민국 육군)
참전 베트남 전쟁 }}}}}}}}}

1. 개요2. 생애3. 비판 및 논란
3.1. 국내 보안방첩분야 악습 고착화 주범3.2. 국민감정 및 여론 분열 조장3.3. 신군부 전쟁범죄 기획들의 입안을 보조한 가학적인 정치군인
3.3.1. 그가 관여했을 법한 부분들이 보여주는 신군부란 집단의 가학적 성격3.3.2. 반란군 범죄행위에 대한 의도적 다양화를 주도한 가학행위의 싱크탱크
3.4. 한국군 수난사의 보안방첩분야판 박희도
3.4.1. 박희도와의 비교
4. 기타5. 대중매체에서6. 선거 이력7. 소속 정당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 정치인.

이병태 전(前)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은 그의 처남이다.

2. 생애

1938년 5월 15일 경상남도 김해군 명지면(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에서 아버지 이민호(李敏昊, 1897. 6. 7 ~ 1944. 11. 23)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묘옥(金妙玉, 1897. 10. 20 ~ 1943. 6. 25)[10]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명지초등학교, 대동중학교, 경남고등학교(11회)[11], 육군사관학교(18기)를 거쳤으며 하나회 회원이었다.

방첩부대, 보안사령부에서 수사관[12]으로 오랜 기간 근무하였다. 1979년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하자 대공처장에 임명되었다. 10.26 사태를 수사하면서 김재규를 고문하고[13] 12.12 군사반란 이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조사한 끝에 김재규와 공모한 혐의로 밝혀낸다. 하지만, 당시 12.12군사반란 세력의 숙청대상 1순위가 정승화 총장이기에 공모협의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게 중론이다.

1980년 5.17 내란 이후 김종필, 김대중 등 주요 인물들을 중앙정보부나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여 조사하였다. 정동년김상현을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김대중에게 보안사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으나 김대중은 이를 거부하여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자 준장으로 예편하였고 이어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 되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으로 민정수석비서관에서 물러날 뻔 하였으나 없던 일이 되었다.

1986년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이 되어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을 보좌하였다. 이 때 평화의 댐 건설,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에 관여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경상남도 김해시-김해군 지역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5공비리 청산 정국에서 구속되었다. 그리하여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출마 자격이 상실되었고 부인 이설혜가 무소속으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자유당 김영일 후보에 밀려 낙선했으며 이후 문민정부 시절 역사바로세우기에 의해 1996년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에 관련하여 구속되었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이듬해인 1997년 특사로 풀려났다.

2014년 5월 24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3. 비판 및 논란

이학봉은 신군부 집권을 위해 각종 고문수사나 정치공작, 5.18 민주화운동 이후로도 505보안부대 등 음지에서 무고한 국민들을 지속 연행/고문하고 반란군들에 의한 잔악하다 못해 흉폭했던 살육폭동을 전두환 옆에서 구체적으로 보충/입안하고 현장에서 실행케 한 장본인들 중 하나이다. 이후 민주인사들의 내란음모 조작 사건을 필두로, 수많은 민주인사들부터 무관한 국민들에게마저도 누명을 씌우곤 당시 보안사 핵심 정보 중개인으로서 협박과 회유도 병행한 전두환의 그림자 속 또다른 오른팔이자 심복으로, 지금도 두고두고 지탄받는 한국 현대사 내 엄혹했던 시대의 암면들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이다.

이 탓에 오히려 주군이던 전두환이 받는 부정적 평가 내에서의 극단여론과 동급 내지 그 이상의 비난과 비판이 담긴 평가를 본인 사후인 지금에서조차도 정치 진영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받고 있다.

3.1. 국내 보안방첩분야 악습 고착화 주범

군대와 경찰은 특히 극도의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대표 분야이나, 하나회 핵심 멤버 이학봉은 한국의 민관군 보안방첩기관의 위상의 간판급 권위자로서는 해당 분야 담당기관들의 내부 조직문화를 국가 차원에서 망가뜨리고 고착화시킨 데에 앞장선 책임이 매우 크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그 중요성이 큰 대한민국 안보 최일선인 민관군 보안방첩기관들의 위신을 그야말로 나락 저 끝자락까지 처박아버리곤 더 나아가 권한 약화 영향까지 후대에 미쳤을 만큼, 현재까지의 한국군의 위상 하락사 원흉들 중 하나가 바로 신군부인데 그 선발주자 대표가 전두환, 이학봉은 후발주자로 끝내기 만루홈런까지 친 셈이다.

광복기와 6.25, 두 번의 군사정권 이래 안 그래도 전신 시절부터 안 지켜지던 해당 기관들의 정치적 중립이, 현 후신들인 국가정보원, 국가수사본부, 국군방첩사령부가 들어선 지금조차도 여전히 지켜지기는커녕 오히려 해당 기관 구성원 중 일부가 음지에서 벌인 일탈들이 진화를 거듭해 잊을 만하면 발각되는 현상의 원인이 바로 신군부 인사들이 기관장을 맡던 시절 이후로 굳어졌다 봐도 무방하며, 이들의 교육 영향을 받은 기성세대 주도로 정착된 한국의 각종 조직사회 문화가 지금도 여전히 수직적이고 경직된 것 역시 이러한 고착화의 연장선 상 결과물이다.[14][15]

당장 창군기~6.25 전쟁 초대 방첩부대 사령관 김창룡의 정치적 중립을 상시 위반한 잔악한 만행들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 보안방첩기관들의 담당 분야의 범위와는 무관한 온갖 국내 사정이나 정치 개입부터 로비와 비리들을 포함한 직무유기로 얼룩진 흑역사들은 그 때부터 시작되어 하나회 두목 전두환과 부두목인 노태우를 필두로 하나회 주도 신군부 인사들이 군 내외의 수도권 일선 전투부대들과 심지어는 전국 후방부대까지 마수를 뻗쳐 국가 정치권력을 독점하던 제5공화국 시기에 아예 피크를 찍었다 봐도 무방하다.

그 말은 즉슨, 굳이 과학실험에 비유하면 김창룡은 편향된 악습들을 만들어 주변 군 방첩 분야 경험자들 및 경찰의 고문기술자들과 함께 양측이 필두로 국내 치안 및 군/경 보안방첩 당국에 널리 보급한 창시자,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기존 방첩부대를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개편해 그들의 악습을 자신들의 집권 체제 확립과 유지를 위해 더욱 정치적 악용에 특화시킨 실험 안정화 시기, 박 전 대통령 밑에서 그 기술들을 배우고 진화시켜서 박정희 서거 후의 과도기 전후로 실권을 장악한 하나회 일당의 회장인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주도 신군부는 전 정부 시절 데이터를 기반으로 더욱 잔혹하고 악랄하게 계승한 상태에서 전두환 휘하 심복들의 보안방첩분야 대표주자 이학봉이 아예 그러한 관습을 아예 반영구적 지침으로 각 보안방첩기관들에 남겨 현재까지도 구조적으로 고착화하고 계승시키는 완성단계에서의 최종작업을 담당한 셈이다.

심지어 같은 하나회보안사 출신인 허삼수허화평 역시 12.12 군사반란 전후로 각종 하나회 주도의 정치공작과 권력형 부정축재로 꾸준히 도마에 오르지만 적어도 이 두 사람 역시 이학봉이랑 유유상종이긴 해도 최소한 이학봉처럼 직접 고문에 가담한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학봉은 저 둘과 달리 경찰계의 이근안과 함께 신군부 당시의 고문기술 권위자로서 "군에는 이학봉, 경찰엔 이근안." 이란 문장으로 요약될 만큼 국내외에서 악명이 널리 알려지며 사후인 지금도 여전히 오르내리는 상황이다.[16]

또한 그가 지나온 보안방첩기관들의 본분은 왜곡된 유언비어로 민중을 부추겨 민도 분열을 유도 및 야기하고 그 분열된 여론을 자극, 선동해 국가 전복을 노리는 반국가단체들을 적법히 검거/수사하는 것이다. 또한 세계사를 보면 알겠지만 그러한 반사회적인 단체들은 소속 정치진영 이념 좌우 관계없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반국가단체나 그러한 인사/조직의 정의란 하나회처럼 정상적 국가 정치체제를 파괴하는 첩보/시위/폭동행위를 벌이는 단체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폭동은 좌우 관계없이 극단적 이념을 가진 조직이 작정하고 실행하는 집단적 폭력성을 띈 계획범죄지, 극좌 진영 전유물이 아니다.[17][18]

3.2. 국민감정 및 여론 분열 조장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민주운동가/무고한 국민들을 고문, 증거를 조작해 거짓 혐의로 누명을 씌웠고, 이학봉이 전두환에게 제안하여 입안된 5공 군사정권의 무고한 국민들에 대한 무차별적 묻지마 납치/고문과 사법살인부터 억지 자백 강요로 누명을 씌우는 증거 조작은 물론, 전두환 정부가 퍼뜨린 집권 정당화 낭설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반란군의 잔악행위나 민주화 이전 민중항쟁들에 관한 지속적 역사왜곡 시도는 권위주의나 옛 독재정권들에 맹신적인 매카시즘에 물든 한국의 주요 극우층을 낳아 현재도 생존하는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한국 보수계/사회에 여전히 잔재로 남아 악영향을 주고 있다.

이학봉 및 전두환의 하나회가 주도한 만행들과 이후로도 이어지는 역사수정주의적인 행태는 민주당계/진보계 지지 기반 지역의 반감으로 고스란히 나타나며, 민주화운동을 긍정하는 온건 중도 ~ 강경 보수층부터 심지어 기성 극우층과 달리 한국전쟁사와 한국 현대사의 모든 민주화운동사를 양쪽 다 인정하는 일부 극우진영 지지 측 국민들조차 크게 반발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한국 보수계의 안정적 결속과 민주화 이래 역대 한국 정계를 양분해온 여야 거대 양당들의 상호존중적 화합을 막아, 이는 한국 보수정당의 대국민적 인식 악화로마저 이어져 한국 범 여야권에서의 보수정당이 장기적 정치 안정성과 향후의 재집권 확률조차 사실상 상실하면서 항상 각 진영 국민들에게 지지받아온 우직하고 강경한 대북 안보정책의 지속성도 점점 미래가 불투명해지는 커다란 독으로 작용했다.

3.3. 신군부 전쟁범죄 기획들의 입안을 보조한 가학적인 정치군인

전두환의 하나회 주도 신군부의 국권 찬탈 과정과 그들이 집권하며 펼쳐진 온갖 비상식적 방법들을 총동원한 공포스럽고 폭압적인 철권통치 기조 중심 인물들은, 큰 틀을 제시하고 휘하 간부진에 기획안의 보충을 지시해 그게 완성되면 최종 결정을 내린 두목 전두환과 그걸 옆에서 입맛에 맞게 보완한 정호용, 노태우였다. 그러나, 그 기획안을 중간에서 체계적으로 완성 현장 매뉴얼을 만든 이들의 중심에는 반드시 이학봉 본인이 항상 전두환을 보좌한 참모진 핵심인사로 위치해 있었다.

신군부 반란군이 대간첩작전 진행을 빌미로 삼아 광주에서 자행했던 최악의 대참사인 전대미문의 살육폭동과, 무고한 시민들을 불법적으로 강제연행해 학살하거나 당시 보안방첩기관 당국 협조로 벌어진 고문행위들을 통한 반인륜적 강압수사 등을 현장에서 실행토록 지시한 범죄행각들은 당연히 제네바 협약 및 전평시를 막론하고서 적용되는 국제/국내 인권법을 대놓고 크게 어긴 중범죄다. 게다가, 이학봉의 지적 능력을 봐도 알겠지만 제네바 협약 정도는 모를 리 없는 사람인데도 군인이기 이전에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할 수 없을 전쟁범죄를 함께 계획해 그 방법을 더욱 과격하고 잔인하게 실행되도록 심화시킨 데 일조한 종범이자 실행범으로서 현장 내에서 벌일 전범행위들에 대한 세부 지침을 전두환에게 추천했다는 건 그가 얼마나 가학적인지를 보여준다.[19]

게다가 종전도 아니라 휴전중일 뿐인 엄연한 전시상황의 국가 내에서 국방의 의무를 저버리고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은 명백한 내란이자 테러로, 전쟁범죄의 정의에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히 부합한다. 테러나 전쟁범죄 및 쿠데타 관련 항목들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신군부 휘하에서 현장에 투입된 모든 반란군 구성원들은 병과를 막론하고 군인으로서 가지는 핵심 권리인 보호대상들의 호위를 위한 합법적 무장 및 교전권과 자위권을 발동할 권한이 없는 것임을 넘어 피아에게 의료행위를 하는 중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을 의무병과 구성원들의 권리를 포함한 전권이 모조리 박탈되어도 할 말 없는 사항을 저지른 흉악한 전범집단에 해당한다.[20]

3.3.1. 그가 관여했을 법한 부분들이 보여주는 신군부란 집단의 가학적 성격

이러한 행위들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찍힌 사진과 영상들 중에서 신군부의 계획적 살육폭동이 스타트를 끊은 지 얼마 안 된 시기부터 드러났다. 대표적으로는 반란군이 광주에 투입된 초기, 광주의 길거리에서는 충격적인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반란군 측 특전사 전투원들에게 극심한 구타를 당해 부상을 입은 박남규[21] 씨가 힘없이 다친 채 반란군 장갑차 앞에 끌려가던 도중에도 박남규 씨 뒤를 졸졸 따라온 특전사 대원 한 명에게 걸어가면서도 이미 다친 몸으로 계속 구타당하는 모습이 사진이나 영상으로도 남았다.

그런데 박남규 씨의 폭행 피해 영상이나 그 외 각종 사진들을 보면, 영상들과 사진들 속 가해자는 특전사 전투원들 뿐만이 아니었다. 현장에서의 물리력 실행범들 중에는 부상당한 반란군부터 국민들까지 모두를 피아구분과 차별 없이 치료해야만 하는 중대한 생명구호 의무(義務)와 권리를 가지는 비전투 지원병과 구성원들인 특전사 소속 의무병/의무부사관 및 군의관들마저도 살육폭동에 적극 가담하고 부상당한 국민들을 방치하는 등 직업윤리를 저버린 위법적 물리력 행사와 직무유기를 하는 등 광주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실제로 살해까지 한 정황까지 있었단 것이다.

여기서 특전사 소속의 의무병/부사관들이나 군의관들의 업무는 평시에야 일반적인 의무부대원들처럼 기본 의무병과 업무만을 주로 수행하나 전시엔 통상 야전병력들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극한상황에서도 현장에 긴급현장 의료진으로 신속히 투입되어, 특전사 전투원들의 특수작전에 동행하는 엄연한 특수부대의 인도주의를 담당하는 현장 의료진이다.[22]

또한 이들은 바로 옆의 특전사 전투원 등의 모든 아군 병력들과 자국민을 치료할 의무를 지는 것과도 동시에 투항해온 상대 측 적군과 적국 민간인들이 전쟁포로/귀순/망명이나 피난/이민을 오면 그들에게도 평등한 의료를 제공해 아군과 자국민에겐 신뢰와 결속의 극대화, 적군과 적국 민간인들에게도 한국군과 대한민국의 인도적인 이미지들을 피아진영의 민중에게 덧씌우는 인도적인 대민 비살상 선무공작들을 펼쳐 호의적인 여론과 지지를 얻어내는 게릴라전 비살상 파트 수행을 담당하는 상당한 특전사 내 또다른 중역들이다. 이는 수많은 유형별 특수작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특수부대의 기본소양 중 하나인데 그걸 대놓고 개무시한 것.

즉, 이들의 주 임무는 군 의료 담당 및 선무공작 등 인도적인 비살상 특수작전에 보통 관여하는 비중이 상상 이상으로 큰데다 동시에 특수부대원으로서도 함께 담당하는 엄연한 인도적 비살상 특수작전의 전문가이다. 그런 이들이, 기본적인 현장에서의 직무수행은커녕 반란군 전투원들 옆에서 살육폭동에 적극적으로 함께 가담하는 미친 짓거리를 벌인 것이다.

또한 해당 사건의 피해자 박남규 씨의 당시 몸 상태는, 그 자리에서 빠른 응급처치를 한 후에 민/군 병원 둘 중에 한 곳에 즉시 긴급후송시켜야 될 수준으로 다쳐서 피를 흘리며 비틀대고 있었다. 즉슨, 최악의 경우 내/외출혈으로 실혈사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특전사 의무병은 그런 충돌의사가 없음을 계속 내비치는 중상 상태의 비무장 민간인 뒤를 여유롭게 졸졸 따라가며 목재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충격적인 만행을 벌였고, 이는 당시 전두환의 지휘계통을 따르던 신군부 휘하 반란군으로 현장에 투입된 병력들이 얼마나 일국의 국가안보를 수호할 군인으로서의 실무현장 마인드가 자격 미달의 밑바닥 수준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음과 동시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행동양상 상세 지침을 비공식적으로 하달했단 증거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예로부터 비전투병과로 구성되는 의무부대원들은 선제공격을 당해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국제법 상에서 물리력 선제행사가 무조건 제한된다. 아무리 반란군 소속 의무부대원이라 한들, 비무장 상태의 무고한 국민들이 반란군 전투병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해 큰 중상을 입는 걸 보고도 무시도 모자라 계속 거절하더니 모자라 다른 국민들이 지켜보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보란 듯이 당당하고 무자비하게 구타/방치하거나 살해하는 행위는 제네바 협약 등의 국제법 상에선 피아에 대한 의료행위의 의무와 환자 치료 우선순위 결정권 등을 포함한 의무병과 기본 자격부터 환자 보호를 위해 발동하는 불가피한 최소한의 합법적인 각종 개인화기나 주변 중화기 등의 사용을 통한 자위권을 행사할 자격 역시 동시에 박탈된다. 현대전에서 이따위 병크가 터지면, 해당 구성원들이 속한 국가/집단의 군대는 더 이상 국제법으로 영영 보호받지 못한다.

이러한 일환에서 보면, 광주에서 벌어진 반인륜적이고 잔악한 살육폭동은 신군부가 사실상 본인들의 집권 야욕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국내/국제적 인권조항들이라고 해도 고집적인 무소통의 태도로 거침없이 위반하겠단 의지가 담긴 초권위주의적이고 오만한 독불장군식 사고를 표출함과도 동시에 그런 자신들만이 오로지 모든 법들의 위아래와 안팎까지 입맛에 맞게 고치고 지배할 권한이 있다 주장하는 초법적이고 영구적인 독재 의지를 위압적인 실권 과시 과정 속에 모든 생명들을 경시하는 수준마저 넘어 아예 가지고 놀다가 죽이면 새 걸로 바꾸는 식의 장난감처럼 괄시해도 된다 여기는 안일하다 못해 패악하고 저열한 생명감각을 국민들 앞에 당연한 듯 대놓고 내비칠 수 있는, 철저하게 극도로 이기주의적이면서 가학적인 집단이란 걸 여실히 드러내는 점이라 할 수 있다.[23]

3.3.2. 반란군 범죄행위에 대한 의도적 다양화를 주도한 가학행위의 싱크탱크

이렇게 수많은 광주 시민 앞에서 백주대낮부터 대놓고 벌어진 진압을 가장한 다양한 방식의 살육폭동은, 반란군 지휘부에 의한 구체적인 현장 행동방침의 추가적 보충이나 폭력성 증가를 유도하는 동시에 습관화시키는 주입식 교육이 이전부터 누군가의 주도에 의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즉, 전투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도적 지원을 맡아야 할 특전사 소속 의무부대마저 의료현장 직무유기를 부추기고 살육폭동에 동참하는 등의 여러 상세 방침을 확립하는 데 그 누군가가 중재자로서 적극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전두환이 일방적 살육폭동을 주문하자, 노태우나 정호용 외의 전두환 직속 하급자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입지를 가진 누군가가 도중에 개입해 추가적인 반란군의 폭력 양상 다양화를 제안했고, 그로 인한 실질적 행동 목표를 내포시킨 비공식적 행동지침을 현장에 전달하는 방식을 통해 추가로 슬쩍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높단 걸 암시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노하우를 쌓아온 수많은 보안방첩분야 및 치안분야 내부 고문기술자들이라도 신군부 인사들이 만약 실제로 이런 방식을 도중에 추가하는 데에서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려면, 일부 예외사례가 아닌 한은 하나회 핵심 멤버들 중 그들의 회장이던 전두환 최측근에 위치한 심복 포지션이 아닌 이상 어려웠다. 거기다 어지간한 하나회 고위 인사라 해도 전두환이 매우 마음에 들어할 만한 안건을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준비하지 못할 시에는 제아무리 하나회원이라 해도 건의를 함부로 올릴 수 없었다.

당장 당시 하나회 및 그들 주도 하의 신군부에서 핵심 멤버였던 허화평이나 허삼수, 정도영 은 감청과 정보수집부터 통신 상 명령전파나 상황보고 및 전달 정도만 했던 정황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사령관을 보조하는 부관 역할이다 보니 혐의는 짙으나 생각보단 직접적으로 확실히 관여한 부분이라 생각되는 정황이 적었다. 또한 비하나회 출신이었지만 5공 초중반에 권력에서 밀려나 이후엔 그들과 완전히 반목하며 갈라서, 신군부가 은폐해온 일부 큰 진실들을 밝혀주는 데 중요 증인으로서 서 주었던 신군부 초창기 중심 멤버였던 권정달도 역시 보안사 내부에서 오로지 언론 검열을 주로 전담한 것 외엔 현역 시절 당시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 이상 잘 개입하려 들지 않았기에 사실상 고문행위나 폭력방식 다양화를 기획보조 수준의 일까지 개입했을 가능성이 다소 적은 편이다.[24]

이 정도 관여가 가능하려면 법안 악용/유언비어는 물론 각종 누명/억지 명분 생산에 능통한 정치공작 권위자+사람을 최대한의 고통으로 계속해서 괴롭히는 데 통달해서 각종 폭력과 고문 방식들을 현장에 반영해달라 건의하면 직통으로 승인받을 만큼의 고문기술자+보안사-중정을 오가는 현장감독 역부터 보안방첩 외 분야들까지 광범위하게 드나들며 개입할 정도의 강력한 중간 영향력 행사권을 부여받아 각 업무방침들의 구체적인 보충을 위한 조언을 남기며 신군부의 기획을 전두환 앞에서 진두지휘한 어드바이저형 만능 중재자이면서 음지 수행비서 역할까지 모두 충족하는 인물은 당연하겠지만 오직 이학봉 단 한 사람밖엔 없다. 즉, 그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런 상세한 기획 완성 단계를 실행할 인물이 없었다.

하나회의 신군부 휘하 반란군의 살육폭동은 충정훈련 베이스로 변형된 각종 폭력부터 대민 성범죄, 군대식 가혹행위부터 군인들 사이로 피해자들이 억지로 걸으면서 구타당하고 대검에 찔리는 환영식을 가장한 고문 방식이나, 국민들에게 행했던 온갖 집단고문 사건들은 이학봉이 변형해서 가르쳤다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피해자들에게 무릎을 세게 꿇린 뒤에 무릎을 꿇어서 오므라든 발가락이 피가 안 통하면서 펴지면 M7 대검을 착검한 M16A1으로 피해자들의 발가락들이 너덜거리다 잘릴 때까지 닭들이 모이를 쪼아대듯 난자하는 이른바 '닭발요리' 등 국군의 고문기술자가 아니라면 생각지 못할 별의 별 최악의 고문들이 무고한 국민들에게 자행되었다.

문제는 안 그래도 답이 없는 판에 5월 20일 새벽 3시경의 광주역 집단발포 직후 5월 21일 오후 1시엔 전남도청 및 전남대학교 집단발포까지 구경별 총기들로 무차별 정조준 총기난사를 벌이더니, 4배율 조준경을 장착한 M16A1과 저격용 M1 개런드를 장비한 저격수들을 광주 시가지 내 건물들의 고지대에 위치별로 빽빽히 배치 후 무고한 국민들을 화망 속에 가두는 이른바 저격수 거리 조성부터 뒤늦게 불법적 자위권 발동 후 공격/정찰헬기들의 공중포격/총격/폭격부터 기동헬기 도어건 난사나 M113 장갑차의 대구경 기관총 연발 조준난사와 자주발칸포 화망 동원부터 대전차로켓포나 세열수류탄 투척 등에 이르기까지 정상적 인간이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온갖 화력수단의 노골적 사용사례를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25][26]

3.4. 한국군 수난사의 보안방첩분야판 박희도

그렇게, 당시 그가 거쳐간 보안사부터 중정 후신인 5공의 안기부까지의 당대 보안방첩기관들은 창군기 이래 제5공화국까지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탄압하는 한국판 게슈타포라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군사정권의 비밀경찰로 전락했다. 이 후유증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서 정상화 노력이 지속중인 최근에도 음지에서의 일탈이 보도되는 지경이 됐다.

3.4.1. 박희도와의 비교

이런 맥락은 이학봉이 거쳐간 보안방첩분야와의 오랜 협업 노하우(?)를 보여준 육군특수전사령부의 옛 흑역사와 일맥상통한다. 이학봉과 같은 하나회 소속으로서, 이학봉의 육사 선배 장성이었던 준장 시절의 박희도는 과거 박정희 정권기부터 부대와 보직을 옮기기 전 시점 전후로도 전두환의 즉응전력 겸 일선 친위부대로 악용된 제1공수특전여단에서 여단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공수의 무장공비 추격/탐색 격멸전 작전실패에서 여실히 볼 수 있듯이 그의 나태하고도 편협한 보신주의적 관점이 드러난 그의 지휘철학은, 정치군인으로서 보인 안일한 경각심이 부대의 경계태세를 극도로 약화시키켰다. 이는 당연히 실전 상황으로 들어가자, 아군 영내를 대놓고 휘젓으며 활보하는 무장공비를 눈앞에서 놓치는 믿을 수 없는 대실책을 저지르고도, 정병주가 겨우 그걸 중재하고 감싸줘서 살아남는 추태(...)를 보였다.

결국 국가기밀과 그에 관련된 중요 정보 등의 여러 핵심 요소들을 북한 첩보기관 휘하의 무장공비가 여유롭게 훔쳐 달아나는 결말로 다가왔음에도, 박희도는 침투해온 적에게 정보도 털리더니 그런 적을 유유히 북한 적진에 사지 멀쩡하게 무사히 살려서 집에 보내준 역대급 병크를 터뜨려 놓고도 무책임하게 잘 살아남은 후 그 은혜를 매우 착실하게 원수로 갚아서 돌려줬다(...). 이렇듯 부패한 군내 사조직의 무능한 정치군인 장성들은 실전을 치러야 하는 야전 지휘관은 물론 더욱이 군내 소수정예 전문병과인 특수부대 지휘관으로서는 얼마나 부적합한지 해당 사건을 보면 뼈저리게 알 수 있다.

이렇듯이 국민 탄압의 현장이던 보안방첩분야의 지휘봉을 쥔 이학봉도 역시 무방비하다 못해 무자비하고, 고집불통이다 못해서 극소수의 사람들 외엔 현대의 젊은 극우층에게마저도 공감받지 못하는 조잡한 매카시즘 고문정치 정책은 보수/민주당계/진보를 아우르는 전 진영 국민들의 수많은 반대를 낳았다. 그 결과, 눈앞에 분단된 휴전선을 맞댄 적국인 북한의 조잡한 대남공작이 지금도 50~60대 남성 장년층이나 20대부터 노년 여성들 및 일부의 젊은 남성층에게마저 정기적으로 가끔 먹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첫 번째로는, 예로부터 NLPDR 등의 북한에 친화적인 성향을 가진 운동권 멤버들을 시작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의 친북 ~ 종북계/주체사상파 등을 필두로 수많은 친북/종북계가 심지어는 북한 정보당국 간첩과도 연계되기 시작해, 한땐 그래도 북한에 반대했지만 군사정권의 후유증을 겪어 군부정권과 보수진영에 큰 반감을 가진 민주당계/진보진영을 아우르는 한국 민주화운동계에 교묘히 접근, 예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침식할 좋은 기회가 되었고, 이는 한국의 민주당계 ~ 진보계 정치 진영 소속 단체나 그 성향을 지지하는 지지자 집단 혹은 개개인까지 포함한 전체의 행동양상 및 진보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본디 출발이 현재의 극단적인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던 수많은 단체들의 편향화 및 극단주의적 정치조직화를 불러왔다.[27][28]

상술했듯, 해당 진영 인물 상당수가 인권단체 등의 정치단체 등 업계나 정계 쪽에서 크나큰 정치적 입지를 가져가거나, 혹은 스스로를 민주운동계 일원으로 참칭한 뒤에 민주운동계 출신의 인사들에게 자기 방식들을 전수 및 자신들의 진영에 우호적으로 끌어들여서 한국의 민주당계 ~ 진보 진영 등 거대 메이저 정치권마저도 그들의 숨은 거점으로 삼을 기회를 주었다. 이 부분만 해도 국민 분열 및 교란의 초래라서 그걸 수습해내야만 하는 차기 정부들 전체 입장에서는 답이 없는데, 지금은 그 문제가 더 커졌다.

제아무리 북한군의 수준이 조잡한들, 엄연히 위험한 무기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데도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 때부터 서서히 북한 밈 소비가 시작되다 문재인 정권기인 2017년 이래로 젊은 세대 필두로 한 국민들이 엄연히 위협/위법적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적국 북한과 그들의 군대인 북한군을 위시한 명확한 대한민국의 적 세력들을 조잡하단 이유 하나로 단순 풍자소재 및 코미디만을 위해서 고도의 밈적 요소로 소모할 만큼 대북 안보의식과 경각심의 심각한 하락과 북한 관련 의혹엔 지나친 만물 북풍설까지 제기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2016년대까진 그래도 건재하고 튼튼했던 한국 남성층, 노년 여성층을 필두로 한 국민 상당수의 안보의식이 성별갈등 격화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나락 그 밑자락마저도 뚫고서 회복불능 단계까지 곤두박질쳤다.

즉, 이는 보안방첩기관 권위자로선 나라의 미래까지 망가뜨리는 최악의 사단을 내놓은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본다면, 이학봉은 적에게 허점을 보여 경계작전부터 시작해 무장공비 검거 혹은 추격/탐색 격멸작전을 실패한 박희도와 똑같은 짓을 자기 분야 버전으로 저지른, 그와 동급 내지 그조차도 초월한 역대급의 무능한 인물들 중 최고봉 대표주자라고 볼 수 있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파일:LeeHB-5.jpg*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재용[29]이 연기했다. 전두환 밑에서 각종 조사 보고와 정치 공작을 하는 장면들에 출연하며 그래서인지 분량이 상당히 많은데 첫 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꾸준히 나온다. 전두환의 청와대 입성 후에는 민정수석비서관을 맡아 허화평, 허삼수 등의 군인 출신 비서관들과 김재익 등의 민간 출신 비서관들의 갈등을 조율하는 성격 좋은 비서관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후반부에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된 장세동과 함께 다시 공작 분야로 복귀하면서[30] 도로 어두운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6.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김해시·군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38,020 (41.73%) 당선 (1위) 초선[31]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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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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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봉 안병규 정동호 신재기 신상식
양산 울주 거제 남해·하동 산청·함양
나오연 박진구 반성우 박희태 노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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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화민주당 오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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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한민주당 김정봉
6 제3세대당 홍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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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주당 이광희
3 공명민주당 홍의표
4 무소속 이설혜
5 무소속 이학봉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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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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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1990 정계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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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 1992 합당[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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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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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2014 탈당
정계 은퇴
사망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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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낙주 김태호 심완구 정몽준 백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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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 박진구 김봉조 박희태 노인환
거창 합천
공석 권해옥
* 진해·의창 박재규 의원직 상실 (1992.3.10.)
* 김해시·군 이학봉 의원직 상실 (1992.3.10.)
* 양산 김동주 의원직 사퇴 (1992.2.26.)
* 거창 김동영 작고 (199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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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상남도 제8선거구의 제12대 국회의원 이다.[A] [3] 의원직 상실.[4] 선거구 조정 후 김해시·김해군 선거구의 제14대 국회의원 이다.[5] 선거구 조정 후 부산 강서구 선거구의 제14대 국회의원 이다.[6] 문열공파 25세 학(鶴) 항렬.#[7] 李雪惠. 1944년 2월 2일생.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완식(李完植, 1915. 4. 19 ~ 1998. 6. 18)의 딸이다. 이병태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의 여동생이다.[8] 李一炯. 1969년 5월 8일생.[9] 李世炯. 1971년 4월 26일생.[10] 김성룡(金成龍)의 딸이다.[11] 박희태, 이병태, 구창회와 고교 동기이다.[12] 이학봉의 병과헌병이나 정보가 아닌 보병이다. 육군 정보병과는 83년에 창설되었고, 이전에는 보병 병과에서 정보 업무도 맡았다.[13] 김재규가 탄원서에서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학봉 본인은 김재규를 고문하지 않았다고 하나, 김재규가 수사받을 때 눈 주변의 멍자국 등을 감안하면 그것은 명백히 거짓말이다. 게다가 김재규는 심문 과정에서 간기능 정지로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고문 없이 정상적으로 조사했다면 이 지경까지 갔을 리 만무하다.(아이러니하게도 이학봉은 김재규랑 같은 날짜인 5월 24일에 죽었다) 여러 정황상 김재규를 직접 고문했을 가능성도 있고 최소한 고문수사를 지시한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14] 물론 이는 창군기 이래 박정희 정부 시기까지, 계속해서 초기 한국군과 한국 경찰 실무진을 구성한 주요 창설멤버 및 양측의 전체적 하부 인력구조를 살펴보면 통계 등으로 나왔듯 당시 조직 내 인력 70% 이상 비율을 차지한 상당수가 일제 치하에서 일본군과 일본 경찰에 들어가 근무하며 해당 집단에 소속된 신분으로 온갖 전쟁에 참전하고 전범행위나 고문 및 강압수사 등을 배워오는 등 그 분야의 많은 경험들을 쌓은 조선인들이 해당 조직들의 권위주의적 성향마저 똑같이 답습해 와서, 광복 후 혼란기 ~ 창군기에 이르자 거의 전원이 초기 한국군과 경찰 안에 고스란히 기용되며 사실상 양 조직 내부 문화 형성을 주도/잠식하고 있던 양상인 게 컸다.[15] 게다가, 여기에 더 문제인 건 당시 문민통제를 해야 할 대통령이 하필 그들을 어떠한 처벌 없이 대부분을 사회나 공공기관 산하에 그대로 기용한 권위주의적인 문민독재자 이승만에, 창군기 영향을 받은데다 그 권위주의를 더욱 크게 답습한 박정희 정권은 물론이고 그 이념과 행동 양상을 더 잔인하게 학습해서 진화한 신군부가 아예 그 나빠지고 있던 이미지에 권력욕을 탐하며 벌어진 수많은 비리와 전쟁범죄들로 못을 박아버리는 짓을 한 것이다.[16] 물론 허삼수와 허화평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학살엔 정보부처 고위 간부로서 정보상황 전파 및 해당 명령들이 담긴 연락들의 송수신 등에 매우 적극적으로 임한 정황이 있고, 두 사람의 보조가 없으면 당시의 전두환 역시 내란 진행 중 정보망 파악에 개인적인 부담이 컸을 것이기에, 만약 향후에 하나회 주도 신군부가 미처 은폐하지 못한 증거가 발견되거나 혹은 그들에게 파기된 증거가 복구될 정도의 수사 기술력이 발전해서 오래 숨겨둔 범죄사실이 새로 드러날 경우, 허화평과 허삼수 역시 이 문제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17] 5.18 민주화운동 이전 한국사를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준동하며 해방 후 혼란기부터 신군부 시기까지 극좌, 공산진영의 폭동과 전범행위 뿐 아니라 극우 정치깡패나 민병대들의 전범행위와 우파 진영의 폭동행위도 있었다. 즉,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학봉 본인도 비틀어진 애국심으로 점철된 엄연한 반국가단체의 고위 참모로서 휘하 정보기관 요원들의 악행에 국내의 적국 부역인사나 이적단체를 잡는단 왜곡된 거짓 자부심을 주입시켜서 억지로 부여하곤, 민중을 탄압하는 권위주의와 압제를 낳고 더 나아가 후배들에게조차 지워지지 못할 멍에와 낙인을 남겨버린 것으로 우리가 하면 정의, 쟤네가 하면 악이란 흑백논리식 망언을 한 셈이다.[18] 유럽/중동권은 대부분 집권세력 사례가 대표적이나, 제3제국 나치당 산하의 법외 사병조직 겸 당군이던 일반/무장친위대와 그 전신인 돌격대, 옛 크로아티아 극우정당 우스타샤 산하 우스타샤 민병대, 이슬람 국가권 측 근본주의 정파들의 준정규군급 테러조직 후티, 하마스, 헤즈볼라부터 이란의 라흐바르 직속 정규군 겸 친위대인 이슬람 혁명 수비대 등을 보면 알듯이 이들 모두가 반민주주의적인 심각한 권위주의를 옹호하고 반사회성을 띈 극우 테러조직들이다. 반대로 이학봉이 속한 하나회 주도 신군부 휘하의 반란군 역시 한국 법이 규정한 적국 북한과는 이념만 정반대일 뿐, 위에 언급된 조직들과 동류의 반사회적인 반국가단체이자 합법적 민주주의 과도체제를 내란으로 전복시킨 명백한 테러조직이다.[19]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이학봉이라고 한다면 더 말할 것조차 없는 것이,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으로 연행된 김재규를 지켜보더니 고문실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손수 고문했다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숙련된 고문기술자로서는 군사정권 측에서 마련해준 음지에서 장세동과 견줄 만큼이나 전두환에게는 광적인 충성을 바친 전두환의 심복이었던 그라고 하면 애시당초 그런 만행을 마치 당연한 듯 저지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던 셈.[20] 그 말은 즉슨, 대다수 민중에 협조하는 현장의 진압군과 한국의 전체 국민들에게는 병과를 막론한 모든 반란군 구성원들의 생사여탈권을 대놓고 당당히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사실상의 암묵의 준합법적인 적정한도 살인면허나 마찬가지인 면책사항들이 주어진다. 이들의 끔찍한 만행을 생각하면, 광주 학살 피해자인 당시의 모든 광주 시민들과 계엄군에 맞선 시민군들이 전두환 계엄당국 반란군들을 보복학살하거나 수하 없이 묻지마 사살을 하지 않은 게 오히려 신기했을 지경이다.[21]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가 발생했던 날을 계기로 시민군 상황실장으로 윤상원과 함께 시민군 항쟁지도부 측에서 사령탑을 구성한 박남선 씨의 동생이다.[22] 이들은 현대 미군으로 치면, 미 합동특수전사령부 산하의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들 중 최고 티어 부대인 델타 포스나 그린 베레 소속의 특수전 내 최정예 의무병과 구성원들이다.[23] 이렇기에, 그들 중 가학성 하나는 전두환도 한 수 접고 들어갈 끝판왕이었던 이학봉이라면 이걸 즐겼다면 같이 즐기길 종용하고도 남지 소극적으로 쫄아 있을 인물상이 전혀 아닌 셈.[24] 즉, 하나회장 전두환 및 전두환을 보좌한 직속 비서이자 부관들로서 쌍두마차를 끌던 5공 초창기의 허화평과 허삼수는 물론, 전두환의 오랜 붕우들로 각자 5공에서 2인자 및 3인자의 자리를 차지했던 노태우와 정호용도 생각 못할 고도의 치밀한 아이디어와 시나리오를 즉석에서 짜내서 보조하는 것부터 광범위한 정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일에 능통한 인물은 주로 보안사 소속 중견급 간부 대표주자가 아닌 이상은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이다.[25] 이러한 명령의 메커니즘은 아무리 봐도 실권부터가 전무한 바지사장 신세였던 주영복 전 국방장관,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등의 국방부 공식 지휘계통에서 하달된 게 아니라, 당시 한국군 내부 요직들을 병과별로 독점하고 모조리 같은 조직 후배들에게 대물림시켜서 국군 상층부를 잠식해 주도하던 하나회 수장이자 실질적인 준국가수반급의 당시 신군부 실권자 전두환에 의해 대간첩작전/폭동 및 반국가적 성향의 시위대 진압을 빙자한 반란군 측의 살육폭동 개시 명령이 직접적으로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26] 또한, 전두환을 포함한 신군부는 모두 본인들의 책임회피를 위해 공식 지휘라인에서는 쏙 빠져놓곤 전두환의 해당 명령의 전달방식을 공식적인 한국군 지휘계통 쪽 통신망에서 벗어난 모종의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보안사가 깔아둔 별도의 장소에 분리시켜 구축한 이원화된 지휘체계의 비인가 통신망을 사용해 공식 지휘체계에 없었던 신군부 인사들의 명령이 모조리 그 쪽을 거쳐 은밀히 내려보내졌단 것을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 이러한 학살의 명령자는 전두환이지만, 저런 다양한 화력수단들의 노골적인 동원 방식은 온갖 가학행위 실험정신이 투철한 이학봉이 거들지 않는 이상 옆에서 쉽사리 말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27] 예시로 노동계의 민주노총 계통 단체들의 심심하면 일어나는 비노조원 배척/사내 파벌화/비리/폭력시위/사보타주/공권력에 대한 폭력행사 등을 시작으로 장애인 인권운동 단체를 모토로 한 전장연 같은 집단의 지하철 운행방해 등에 의한 국민적 불편 초래처럼 이들의 반감만 초래하는 행동은 수많은 국민의 원성을 샀는데, 해당 단체들의 또다른 공통적 문제는 천안함 피격사건 음모론 등의 한국전쟁사 왜곡부터 친북/종북주의 의혹이 있는 수많은 해당 단체 주요 인사들의 발언을 시작으로, 반미시위 및 친북/종북주의 선동 의혹 등 자신의 담당분야 외 영역까지 발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일탈은 그들의 뿌리가 되는 계파를 탄생시킨 계기를 준 신군부의 책임도 크다.[28] 그들의 행동이 불러온 여론의 반감 중엔, "그나마라도 분야에 제일 맞는 행보를 보여주는 이들을 억지로 제외하고 봐도, 안팎으로 결이 다소 안 맞는 타입의 그룹이다." 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을 만큼 민주당계/진보계 진영의 대국민적 인식이 이렇게까지 일각에서 극단적으로 악화되는 등이 생긴 원인 면에서는 북한의 대남 민간사회 교란공작을 결코 제외할 수 없는 것. 또한 한국 현대사를 언급한 반응을 보면 "이렇게나 연속해서 일들이 벌어지는 정도면, 신군부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삽질을 한 거냐?" 라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이니, 신군부의 조잡하게 급조된 극우 매카시즘 정치가 얼마나 답이 없었는지를 보여준다.[29]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미와 역.[30] 이 때 "민정수석 자리가 체질에 안 맞았는데 마침 잘 되었다"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허문도의 학원 안정화 법안 추진에 반대하는 장면 직후 일이었다.[31] 1992.2.14 민주자유당 탈당
1992.3.10 의원직 상실
[32]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