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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5 20:52:30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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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투표는 선거에 포함되지 않으나, 편의상 기술함.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에서 추가적인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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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1988년 4월 26일 1992년 3월 24일 1996년 4월 11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무소속
149석 97석 31석 1석 21석
49.8% 32.4% 10.4% 0.3% 7.0%
제14대 국회의원

1. 개요2. 과정3. 결과
3.1. 분석3.2. 박빙 선거구
4. 여담

1. 개요



1992년 3월 24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13대 총선보다 3.9% 감소한 71.9%를 기록했다. 당시 KBS 9시뉴스는 80%를 예상했었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3대 총선과 같았지만 지역구 의원이 13명 늘어나서 237명으로, 반대로 전국구 의원수는 13명이 줄어 62명으로 조정되었다.

이 선거에는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민중당, 공명민주당이 참여했으며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로 전국구 의석은 각 정당의 지역구 의석비율을 기준으로 배분하였다.[1]

2. 과정

1991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은 물가 상승과 부정부패, 당내 갈등으로 지지율이 저조했음에도 3당합당으로 이뤄낸 탄탄한 지역 기반, 야권 분열과 투표율 저조 등의 이유로 과반을 훨씬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564/868) 덕분에 14대 총선 또한 민자당이 압승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민주자유당은 공천 과정에서 잡음이 불거지고 계파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탈락한 후보들이 통일국민당무소속으로 출마하는 등의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안전기획부가 무소속 후보들에게 압력을 가해 출마를 포기시키려 했다는 의혹이 나돌기도 했다.

반면 광역의원 선거에서 참패한 신민주연합당꼬마민주당은 광역의원 선거 참패의 원인이 분열 때문이었다고 진단하고 민주당으로 합당하여 통합야당을 구성했다. 그 외에도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이 노태우 정권 타도, 반값 아파트, 전향적인 통일 정책을 내세우며 바람몰이를 했고, 박찬종이 창당한 신정치개혁당과 혁신(진보)정당인 민중당도 후보를 내며 선거전에 끼어들었다. 어쨌든 여느 선거와 다름없이 치열하게 선거전이 펼쳐졌으나...

선거를 얼마 남기지 않고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대놓고 흑색 선전 유인물을 날린 사건이 일어났고 선거 이틀 전 이지문 중위에 의해 군 부재자투표 부정 폭로 사건이 폭로되면서 선거 판세는 민자당에게 상당히 안 좋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여파인지 총선은 당일 70%를 넘는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 투표율은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보다 낮았지만 광역의원 선거에서의 투표율보다는 크게 높아진 수치였다.

다만 민자당 내부에서는 그래도 과반은 확보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3] 물론 대외적으로는 과반을 못 넘을 것이라고 엄살 작전을 펼쳤지만...그런데 그 엄살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참고로 개표방송을 보고 싶다면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보자.

3. 결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무소속[4], 기타 합계
서울 16 25 2 1 0 44
인천 5 1 0 0 1 7
경기 18 8 5 0 0 31
강원 8 0 4 0 2 14
대전 1 2 0 0 2 5
충남 7 1 4 0 2 14
충북 6 1 2 0 0 9
광주 0 6 0 0 0 6
전남 0 19 0 0 0 19
전북 2 12 0 0 0 14
부산 15 0 0 0 1 16
경남 16 0 3 0 4 23
대구 8 0 2 0 1 11
경북 14 0 2 0 5 21
제주 0 0 0 0 3 3
지역구 116 75 24 1 21 237
전국구 33 22 7 0 0 62
득표수[A] 7,923,718 6,004,578 3,574,419 369,044 2,712,053 20,583,812
득표율[A] 38.5% 29.2% 17.3% 1.8% 13.2% 100%
총합 149 97 31 1 21 299

3.1. 분석

개표 초반에는 민주자유당이 충분히 과반을 확보할 것 같았고, 반대로 민주당과 통일국민당은 별 힘을 못쓰고 참패할 듯 보였으나...[7] 개표 중반을 넘으면서 판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민주자유당은 과반수에 한석 모자라는 149석 확보에 그쳤다. 숫자로만 보면 참패까진 아닌 것 같지만 3당 합당으로 200석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확보했던 민자당으로선 그야말로 대참패. 더군다나 접전 끝에 민자당이 겨우 가져간 지역구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부재자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졌으면 단순 과반미달 수준을 넘어 더 심각한 결과를 낳을수있었다. 특히 총선 직전 기준으로 보자면, 공천 문제로 상당수 의원들이 무소속으로 탈당하였음에도 194석의 의석을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45석이나 날려먹은 셈이 되었다. 특히 국가안전기획부의 흑색 선전에 강남3구 6개 선거구 중 5곳을 범야권이 가져갔고, 민자당은 해당 지역에서의 지지 기반이 확고한 서초을의 김덕룡 의원만 승리했다.

한편 민주당은 비록 호남 의석 2석을 민자당에게 내주기는 했지만 서울에서 25석, 경기도에서 8석을 확보하며 수도권에서 의석을 대폭 늘리고, 충청권에서도 대전 2석, 충남 1석, 충북 1석 등 총 4석의 의석을 확보하며 사실상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며 선전했고, 통일국민당은 31석을 확보하는 돌풍을 기록하며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민주당은 경기와 충청 지역에 의석을 확보했지만 영남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고, 통일국민당은 종로에서 이내흔 후보가 바싹 민주당을 추격하고, 서울(강남갑의 김동길, 송파갑 조순환), 경기,[8] 강원,[9] 충청, 대구와 경남북에서 고르게 의석을 내는 데 성공했다.

반면 신정치개혁당민중당은 청년층에게 상당한 인기 몰이를 했으나, 신정치개혁당은 1석 확보에 그쳤고 민중당은 의석(득표율은 1.5%)을 확보하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이는 지금과는 달리 지역구와 비례대표 의원을 따로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200석도 훌쩍 넘기던 초거대 여당 민자당이 야당에게 129석, 무소속에게 21석이나 내줬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선거의 영향으로 안 그래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노태우 정권은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사실상 선거판을 주도한 김영삼은 민정계 등 민자당 내 타 계파로부터 책임론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김대중은 체면치레를 하며 대권 주자 자리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정주영은 일약 유력 제3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김영삼은 위기가 기회다 오히려 선거의 책임을 자신에게 비협조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계에 돌리면서 당권을 장악, 이후 민자당 대권 후보에 무난히 선출되었고, 초원복집 사건 등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선거에서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초경합이었던 판세가 역전되어[10] 여유있게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된다.

한편 박찬종 대표가 당선되며 1석을 건진 신정치개혁당은 1992년 14대 대선에서도 3김 정치에 신물나 있던 청년층을 파고들어 박 후보가 6%의 득표율을 확보하며 나름 선전하나, 혁신(진보)정당을 내세운 민중당은 14대 총선에서 1명의 당선자도 못내며 정당법에 따라 해산하고 이후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출마한 백기완도 저조한 득표력을 보이며 빛을 바랜다. 그리고 이 여파로 15대 대선이 치뤄진 1997년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이 구성될 때까지 약 5년간 진보정당은 재건되지 못하는데, 이것은 일부 민중당 당직자들이 훗날 YS정권 시절 보수정당으로 입당하는 계기가 된다.[11]

3.2. 박빙 선거구

3.24 총선 당시 서울특별시 노원구을은 개표 결과 민주자유당 김용채 후보가 민주당 임채정 후보에 36표차로 승리하며 당선되었다. 그런데 재검표 요청이 이뤄졌고, 재검표 결과 당락이 뒤집히는 사태가 발생한다. 흠좀무 같은 해 7월 20일에 서울지법 북부지원에서 실시된 재검표에서 임채정 후보의 표 98표가 김용채 후보의 표로 잘못 계산된 것이 확인되면서, 선거 결과가 뒤집어진 것.# 그에 따라 김용채 의원은 임기 시작 50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하는 동시에, 당시 맡고 있던 정무1장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경상남도 울산시(광역시 승격 이전) 중구에서는 통일국민당 차화준 후보가 50,138(39.296%)표를 득표하며 민주자유당 김태호[12] 후보의 50,127(39.287%)표를 불과 0.01%인 11표(정확히는 0.0086%) 차로 이겼다. 이후 차화준 후보는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대선 패배에 따라 무소속 탈당했다가 다시 민자당으로 입당하는데, 정작 이 사람이 유명해진 건 틀니 동영상(...)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경남 울산은 중구, 남구, 동구 3개 선거구 모두 통일국민당이 승리했다(차화준/차수명/정몽준 당선자).

4. 여담

14대 총선은 당시 강부자, 이순재, 이주일, 최불암 등 많은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된 선거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당시 연예인 정치계 진출이 붐이었다기보단 우연이 겹친 것으로 보는 게 좀 더 맞을 것이다. 강부자는 정주영 전국구 의원의 사퇴로 인한 승계, 이순재는 한 차례 낙선 후 재수 끝에 민자당 후보로 지역구 당선, 이주일은 정주영의 스카우트로 지역구 당선, 최불암은 강부자와 같이 통일국민당 전국구 당선과 같이 각자 다른 사유로 국회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정주영이 대중 인지도 있는 연예인 3명을 정치판에 끌어들인 셈.


[1] 참고로 15~16대 총선에서는 전국구 의석 배분 기준이 각 정당의 지역구 득표율로 바뀐다.[2] 다만 실제로는 1991년 지방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압승을 거뒀기 때문에 실제 목표 의석 수는 180석 안팍이었다.[3] 당시 민주자유당은 자체 조사에 의거해 우세 지역 112곳, 백중 지역 60곳 정도로 판세를 예측했다고 한다(1992.3.24 동아일보). 그렇기에 개표 초반까지는 과반은 거뜬히 넘지 않겠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고. 하지만 개표 중후반에 접어들며 백중세로 예측했던 지역구 대부분이 패하는 것으로 나오며 망했어요.[4] 의석은 모두 무소속에서 배출됐다.[A] 결과적으로는 선거와 관계없는 자료이다. 당시 총선 규정은 지역구 득표율이 아닌 지역구 의석 수에 따라 전국구를 부여하는 규정이었기 때문.[A] [7] 여기에서 군 부재자 투표 부정 선거가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개표 편의상 관례적으로 일반 개표보다 손이 많이 가는 부재자투표를 맨 먼저 시작하기 때문에 보통 개표 초반에 그 결과가 나오기 때문.(사전투표로 제도가 바뀐 현재도 이 관례는 유지 중이나 관외 사전투표 참여자가 너무 많아서 봉투 자르다 시간을 다 잡아먹기 때문에 맨 먼저 시작해도 보통 맨 나중에 끝난다.) 참고로 1년전에 치러진 1991년 지방선거에서는 신민당과 민주당, 민중당이 개표초반에 상당히 선전하는 상황이 펼쳐졌다.[8] 수원 장안, 광명, 과천-의왕, 구리, 김포-강화. 도농 선거구들의 경우 당선자의 연고에 따른 의왕(박제상), 김포(김두섭) 쪽 표심 영향이 컸다.[9] 춘천, 원주, 강릉, 홍천(조일현)의 대도시 위주 당선.[10] 의외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선거 운동 기간 중에는 김영삼 후보가 1위이긴 했지만 김대중 후보와의 격차가 선거날이 다가올수록 줄어들어서 막판엔 김대중 후보와 1-3% 격차로 초박빙을 벌여나가던 상황이었고, 3위였던 정주영과 박찬종 후보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부동층도 30%에 이를 정도여서(근데 이건 한국갤럽 자체가 부동층 비율이 다른 조사기관에 비해 좀 높은 편이긴 하다) 막판까지 선거 판세를 예측하기 힘든 상태였다.[11] 이때 입당한 인물 중 유명인사론 이재오, 김문수가 있다.[12] 이 사람의 며느리가 바로 바른미래당 이혜훈 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