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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1 19:41:44

대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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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의 상징인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1]

1. 개요2. 역사3. 역대 그룹임원4. 기업정신5. 탱크주의6. 현재7. 해체 관련 음모론
7.1. 유대인 배후자본설7.2. 대북사업 비협조로 인한 보복설7.3.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간의 악연
8. 만약에 부도가 나지 않았더라면?9. 계열사 목록
9.1. 전자·정보통신9.2. 건설9.3. 자동차·중공업9.4. 섬유·화학9.5. 무역·서비스9.6. 금융9.7. 공익사업9.8. 관계사9.9. 관련 단체
10. 여담11. 스포츠 후원

1. 개요

大宇[2]
Daewoo Group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말까지 대한민국의 경제계를 호령하던 4대 재벌그룹[3] 중 하나였으며, 현재는 해체된 기업집단 중 하나이다. 창업주는 주산 김우중.

창업 초기까지만 해도 흔하디 흔한 중소기업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지만, 연줄[4]과 김우중 자신의 경영능력이 겹쳐 빠른속도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1970년대 중동 붐으로 엄청난 잭팟을 터트렸으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오늘날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는 현대그룹, 삼성그룹, LG그룹[5]에 이은 4위 그룹으로 등극하며 한국을 호령하는 재벌 그룹 중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 중동 붐이 끝난 이후로도 5공 정권의 부실기업 정리 정책의 수혜자로서 문어발식 경영 확장으로 세를 불려나갔으며 1990년대에 북방외교와 동유럽 민주화를 기회 삼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렇게 1990년대 중반까지 기업규모를 지속적으로 불려나가며 승승장구를 지속했고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은 뒤로도 몸집불리기를 시전하여 쌍용자동차를 인수했고 그 결과 1998년에는 삼성을 제치고 재계 순위 2위를 차지하였다.[6] 김우중 입장에서는 오일쇼크 때 위기를 기회삼아 몸집을 불려먹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작전을 시전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몸집불리기는 당시 금융환경이나 시대적 상황을 감안했을때 너무도 무모한 작전이었고 결국 막대한 부채의 만기가 돌아오면서 자금난에 봉착하고,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7]가 드러나면서 김우중 회장은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며, 2000년 주요 계열사가 모조리 워크아웃에 들어가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다.

독단적이지만 우월한 경영으로 소문났었는데. 대기업에 입사를 하면 삼성은 책상 속에 연필까지 깎여 모든 게 준비돼 있고, 현대는 책상이라도 갖춰져 있고 대우는 책상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현 시점에 와서 세 그룹의 위치를 보면 정말로 절묘한 이야기.책상이 없으면 일을 어떻게 하라고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daewoo.co.kr'이었다.

2. 역사

1967년 3월, 한성실업 출신 샐러리맨 김우중이 서울 충무로 동남도서빌딩 3층에 무역업체 '대우실업'을 설립해 와이셔츠 등 공산품 수출을 주로 했다. 1970년대 경제성장 및 수출 호조에 따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단기간에 국내 최대기업으로서 성장했다. 1971년 자회사 내쇼날의류를 세우고 1973년 영진토건과 동양증권을 인수해 건설 및 금융업에 각각 손을 뻗었고, 1974년 내쇼날의류를 '대우전자'로 개편해 전자제품 수출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6년 부실기업 한국기계를 인수해 중공업 사업에 손을 뻗기 시작해 1978년 대한조선공사로부터 옥포조선소를 인수해 '대우조선'을 세웠고, 1979년 새한자동차도 인수해 중공업 사업군을 형성했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부실 국영기업의 불하[8] 등 M&A를 많이 활용한 측면에선 이후의 STX웅진그룹[9] 등과도 비견된다. 1976년 기획조정실을 신설해 그룹의 모양새를 갖췄다.

1981년 대우개발이 대우실업을 합병해 '(주)대우'로 출범했고, 1982~1983년 들어 대한전선으로부터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대한통신공업, 광진전자공업 등을 인수해 전자/전기산업에도 손을 뻗었고, 1984년 부실 건설업체 경남기업도 인수했다. 다른 한편 그룹측은 해외 자원개발 참여, 해외 건설 및 조선 수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로 눈을 돌려 동유럽 및 신흥시장 개척을 추진해 왔으며 1993년 "세계경영"에 나서면서 중공업과 자동차, 특히 자동차 부문에서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리즈시절 막바지인 1996년에 제작된 그룹 PR. 아역 광고모델은 장근석.

대우그룹 마지막 광고[10]
(여 NA) : 1분을 하루처럼 썼습니다.
시간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1시간을 1년처럼 썼습니다.
시간이 유일한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와 땀과 눈물의 시간이 이 땅의 시간을 세계의 시간에 맞추게 했습니다.
세계를 경영하게 했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새로운 천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우가 앞에 있습니다.

이 당시 김우중 회장은 그의 공격적인 경영 때문에 킴키즈 칸이란 별명이 붙었다.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진출과 경영 방식도 그렇지만, 중국-몽골-인도-루마니아-폴란드로 이어진 자동차 공장 확장루트도 흡사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4년 뒤 몽골 제국처럼 사라졌다. 관련 기사

실제 당시 대우의 대외 확장 방식은 체제 전환기를 맞아 투자 유입을 갈망하던 구 공산권 국가의 다급함을 이용해 있는 대로 금융 지원을 받아낸 것으로, 당시에는 적은 투자로 큰 사업을 한다고 호언했으나 결국 도박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극단적인 레버리징에 의한 과잉 투자의 몰락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도 맥락이 닿는다.

"만들어라, 그러면 팔릴 것이다"세이의 법칙란 야심만만한 발언은 정작 대우자동차가 주문물량을 소화하지도 못하면서 부채로 변했다. GM과 결별 이후 사들인 뮌헨 연구소, 영국의 워딩 연구소[11]와 폴란드의 FSO[12]등도 모두 2000년 전에 모기업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92년까지 긴밀히 협력해온 제너럴 모터스폴란드에서 대우자동차가 정면충돌한 것도 이 시절인 1995년. 결국 M&A 다툼에선 승리했지만... 이후 고부채로 포드에게도 버림받고 결국 GM에 팔린건 유명한 이야기다.

케이블 TV 초창기에는 DCN 같은 케이블 채널도 운영했으나, 1997년에 외환위기와 맞물려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경영여건을 극복하지 못하고[13] 1999년 동양그룹에 인수됐다. 이후 채널명도 OCN으로 개명되었으며, 2001년 오리온그룹 분가 때 합류했다가 2009년 CJ로 매각되어 2013년 12월, CJ E&M에 흡수 합병되었다.

1995년 우진필름으로부터 복합상영관 '씨네하우스'를 인수해 영화관 사업을 시작했고, '메가플렉스'란 이름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 체인사업을 준비해 오다가 개장을 못 해보고, 결국 1999년에 (주)대우가 준비하던 영화관 사업은 동양그룹에 인수됐다. 그러다가 2001년에 동양제과 등과 함께 오리온그룹으로 분리됐다. 그러나 오리온그룹이 쇼박스를 제외한 미디어 계열사를 정리하면서 메가박스는 해외 자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중앙그룹 계열에 인수됐다.

초기에 위태위태 할 때만 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대마불사를 외쳤다. 의외로 IMF 직후 대우는 친정부 그룹의 선두에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위기 속에도 1998년부터 구조조정을 통해 계열사를 정리해 다운사이징을 했고, 1999년 7월에는 잠시 3조 원의 빚을 사재출연과 경영권 포기 등을 통해 위기를 잠시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자동차를 살리려고 마지막 순간에 삼성자동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을 하려고 한게 SM5 생산문제와 부산의 하청업체 문제 등으로 실패로 끝나면서 8월 워크아웃과 10월 김 회장의 중국 도피, 12월의 임원단 전원 사퇴로 몰락했다.

IMF 금융위기가 아니었다면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초고층 마천루를 지어 본사를 이전할 계획이었다.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등의 공장, 연구소들이 모두 인천에 위치해 있었고 대우그룹 인천 이전 계획과 연계한 것이 오늘날의 송도국제도시이고, 이곳에 건설할 예정인 인천타워가 이 마천루 계획의 후신격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하지만 이 인천타워 마저도 제대로 무산이 되었다.

참고로 그룹 존속 시절 대우증권을 빼고 해체될 때까지 회사의 역사책인 사사(社史)를 단 한 번도 발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87년과 1997년 두 차례 사사 발간 시도가 있었으나 노사분규와 IMF 사태로 각각 이루지 못했으며, 30년사 내용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홈페이지에 있으나 회원만 공개중이다.

3. 역대 그룹임원

4. 기업정신

(1절)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우리는 대우가족 한 집안 식구 / 온 누리 내 집삼아 세계로 뻗자

(2절)땀 흘려 공든 탑을 쌓아 올리는 / 굳은 뜻 곧은 마음 우리들의 방패다
우리는 대우가족 든든한 일꾼 / 뿌린 씨 열매 거둘 내일에 살자

5. 탱크주의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관련 TV광고. 물건을 너무 튼튼하게 만든 "탱크주의" 때문에 신제품이 안 팔려서 망했다는 농담이 있고, 꽤 널리 퍼져 있다. 단 '탱크주의'는 어디까지나 대우전자의 슬로건으로, 타 계열사는 별 관계가 없다. 해당 광고 모델은 역사스페셜 진행자로 유명한 유인촌공룡선생에 출연했던 탤런트 조문정, 배순훈 당시 대우전자 사장이다.[14]

다만 여기에서 간과한 부분이 있는데, 필수기능과 튼튼한 제품으로 승부를 건 탱크주의 취지는 좋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전자제품은 전반적으로 품질이 매우 열악했다.[15]이것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적지 않은 집에서 연출된 상황이니 그 당시 대우전자 생산의 냉장고의 품질은 알고도 남있으니... 비슷한 시기를 겪었지만 살아남은 삼성이나 금성(LG) 냉장고는 아직까지도 꿋꿋한 현역이다.

사실 이 문제는 대우그룹 편입 이전 대한전선 시절부터 유서가 깊었다. 이미 1978년 3월에 서울 서대문구 홍제 2동에서 TV 폭발로 어린이 2명이 화상을 입었고, 12월에는 경기도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서 TV가 폭발해 일가족 5명이 사망하는 참사[16]가 있었는데, 둘 다 대한전선 제품이었다. (기사1 기사2) 이후 TV 부문은 절치 부심해 일본 SONY와의 기술협력으로 세계 최초로 고강성 CRT 모니터 개발을 하며 기술적으로 진보한 제품을 선보였고, 나름 고정 소비층도 탄탄했지만... 신규 구매자층의 마음을 잡기에는 이미 한 발 늦었다.(...) 결국 1983년에 대우그룹에 전자사업부를 매각했다.

사실 대우전자가 90년대 초중반 이러한 캠페인을 만들어낸 것도, 위의 품질 문제와 연관된다. 비교적 구조가 간단한 제품은 고장도 잘 안나고 나더라도 고치기 쉽다. 그러나 복잡한 제품들은 사소한 고장이 상대적으로 잘 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전자제품에 갖가지 기능들이 붙어 복잡해지고[17] 경쟁사들은 이런 기능들을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 기능'으로 광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러한 복잡한 기능의 제품을 따라서 만들면 품질 문제가 걸릴 수 있으니 아예 기능을 축소해서 기본기만 갖춘 제품을 만들어 상대적인 품질 트러블을 줄이고, 복잡한 기능에 피로감을 느끼는 계층을 타겟으로 탱크주의란 슬로건을 내건 것이다.[18]

그러다 보니 반대로 얼리어답터들에게는 탱크주의가 대우전자의 첨단 기술이 뒤떨어지는 것을 자뻑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삼성, 금성은 첨단기술의 상징이니 최첨단 기술의 상징이니 하는 용어로 싸우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엔 얼리어답터들의 파급력이 별로 없어, 오히려 대우전자의 전략이 상당히 틈새시장을 잘 공략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외시장에서도 이같은 일이 한번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슬로건을 장착한 전자레인지1997년 프랑스에서 우수한 평가를 얻으며 판매가 불티나게 팔리자, 오히려 자국산 전자 제품의 판매 부진을 우려한 강성 보수 층에서 대우 불매운동을 벌여 인기와는 별개로 판매가 급감하기도 한 바 있었다.

5.1. 대우자동차

한편 자동차 부분에선, 특히 같은 시기 현대자동차에 비교해서 실제 1990년대 초반까지는 탱크라고 불러도 될 만큼 내구성 및 성능이 우수했기에 과소 평가된 경향이 크다. 게다가 언론의 영향으로 현대에 비해 대우는 뭔가 2인자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됐기에 당시 자동차 판매원들 사이에서 "대우자동차는 연비, 내구성, 디자인 모두 다른 회사보다 좋은데 대우 마크 때문에 팔리지 않는다." 란 말이 돌 정도였다. 특히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이전에 나온 대형 버스, 대형 트럭 같은 대형 상용차들의 내구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잔고장이 적은 만(MAN) 엔진을 탑재해 1970년대 말 ~ 1980년대 운수산업 발전을 견인한 명품 BF101은 3만 대가 팔린 초 베스트셀러 차종이었다. 서울부터 소도시, 시골까지 BF101 시내버스가 없는 지역은 거의 없었으며, 운수회사들은 도로사정이 열악한 지역에도 과감히 뛰어들며 비로소 제 이익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시내버스 구도를 보자면 현대자동차 시내버스의 경우 잔 고장이 잦았고(특히 HD160 차종이 심했었다. 반대로 HD170은 BF101과 같은 D0846HM-V 엔진 장착), 동아자동차 HA20의 경우 출력은 좋았으나 연비가 나빴으며 아시아자동차 시내버스의 경우 한 대 당 가격이 비싼 걸로 유명했으며, 후에 현대가 1982년에 HD170의 후속으로 FB485를 출시했으나 당시의 시내버스 업체들은 여전히 연비좋은 BF101을 선호했다.

또한 자동차 합리화 조치 이전의 경우에도 상용차 부문에서는 엘프대형트럭 모델들이 현대와 기아 등의 경쟁자들과 쟁쟁히 경쟁을 이어갔으며, 1980년대 후반에 조치 해제 이후에도 개쪽박찬 바네트엘프 2를 제외하면 1995년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트럭인 차세대 트럭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승용차 부문에서는 라이벌인 현대나 기아가 선진국 시장의 경쟁 압력에 살아남기 위해 기술 자립도를 높이며 꾸준히 상품성을 끌어올린 반면, 대우는 GM과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전까지 GM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단, 이 점이 기술 개발에 소홀히 한 대우자동차의 실책인지, 50%의 지분을 가지고 대우자동차를 단순 하청 공장 수준으로 두려는 GM의 의도 때문인진 알 수 없으나 1992년 대우그룹이 GM의 50% 지분을 사오면서 적극적인 신차 개발에 나섰다는 것을 보면 후자가 맞을 듯.[19] 단, 신차 개발을 시작해도 출시까진 4~5년의 시차가 있는데 출시된 시기가 하필이면 IMF인지라...

더군다나 독일쪽 기술을 그대로 재현했다면 괜찮은데 그것도 아니고 조립 품질이 심하게 떨어졌다. 위에서 말한 버스와 달리 승용차는 대우 르망 문서에서 알 수 있듯 그야말로 엉망으로 나온 경우가 다반사.[20] 1997~1999년 라인 업을 갈아엎기 전의 모델이 씨에로는 오펠 카데트, 프린스와 브로엄은 오펠 레코드 및 제나토어로, 모두 1980년대가 가기 전에 단종 된 플랫폼을 20세기 끝날 때까지 사실상 페이스 리프트 수준으로 버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나마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모델 개발이 도산하기 직전에나마 시장에서 인정받은 것과, 국내 자동차 브랜드 중 채 10년이 되지 않은 단기간에 유럽시장 진출 성공[21]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것으로 나름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6. 현재

비록 그룹은 해체됐지만 몇몇 계열사들은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영광만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신세. 이중 일부는 대우란 이름 자체도 사라지고 있는 혹은 사라진 상태. 다만 그룹이 망하기 전에 잘 나가던 계열사들은 아직도 해당 업계에서 순위권을 유지 중이다. 재계 순위 14위의 대우조선해양, 재계 순위 24위의 대우건설, 업계에서 빅3에 속하는 미래에셋대우, 3대 엔지니어링 회사인 포스코엔지니어링, 사실상 지주역할을 했던 포스코인터내셔널 등.

본사였던 대우빌딩이 구 서울역 앞에 있어, 그 거대한 모습은 서울특별시에 찾아온 사람에게 압박을 주는 효과가 있다.@[22] 지금은 서울역 신역사가 약간 남쪽으로 내려와서, 대우빌딩을 약간 비껴서 보게 되기에 그 효과는 조금 줄어든 듯. 다만 서울의 경관을 가리고 위압감을 준다는 점에서 건축가들에게 까이기도 한다. 위치상 도쿄역의 마루노우치 빌딩과 비교되기도 한다.

학교법인 대우학원인 아주대학교는 잘 돌아가는 상황.

대우사태 이후 대우빌딩은 대우건설을 인수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손에 넘어가서 30년동안 달고 있던 DAEWOO 로고를 떼고 금호아시아나 로고를 달았다. 그리고 4개월 후에 모건스탠리에 팔았다. 이후 리모델링 시 건물 외관을 유리궁전으로 완전히 뜯어고치려 했으나, 대우빌딩이 용적률을 초월한 건물이라서 외관을 리모델링하면 모건스탠리가 세금폭탄을 맞기 때문에 내부 수리와 외부 타일 교체만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결국 모건스탠리의 손에서 대우빌딩은 이름이 바뀌어 서울스퀘어가 됐다.

7. 해체 관련 음모론

대우그룹 해체에는 모종의 세력이 관여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있기도 한데, 그 모종의 세력에 관해서 음모론은 대체적으로 두 설로 양분된다.

7.1. 유대인 배후자본설

당시 대우그룹은 국제적으로 마이너한 분야에서 잘 노는 플레이어로 정평이 나 있었다. 유대계열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에너지자원이라든지 건설, 금융 분야에서 한 켠 비껴가 있는 마이너한 곳들을 잘 공략해서 수익을 올리던 알짜기업이었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 자본이 환율 공격을 비롯한 각종 수단을 동원해 한국 정부와 대우를 압박했고 마침 분식회계 등 각종 악재가 겹친 상태에서 대우그룹은 이로 인해 결정타를 맞아 몰락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이에 관련한 내용이 2010년 11월 8일자 조선일보 칼럼에도 기재되었다. 이 칼럼에 따르면, 이는 김우중 회장의 생각으로 생전에 김 회장이 환율공부를 했던 이유라 한다.

7.2. 대북사업 비협조로 인한 보복설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하던 대북사업 자금이 모자라 기업에 협찬금을 요구했고 이에 삼성, 현대 등은 정권이 요구한 금액을 납부했지만 대우그룹은 이를 거부해 정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대우그룹에 마침 악재가 터지자 본보기로 정치보복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군사정권 시절 정치자금을 여당에 몰빵했던[23] 일부 기업과는 달리 여2 : 야1 의 방식으로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DJ와 친분을 쌓았으며, 무엇보다 김우중은 90년대 초반에 김일성과 만나 독자적으로 대북 커넥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24] 그리고 협찬금을 냈다던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25] 등 대우그룹을 제외한 30대 재벌 전원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 5일만에 시행 계획안을 제출한 사실이 있다.

더구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장치혁 고합그룹 회장과 더불어 대북경협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현대그룹(1989년)보다 2 ~ 3년 늦게 대북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빠른 행동력으로 초창기 남북경협을 대우그룹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월 남한 기업인으로는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해 무려 100만평 규모의 '남포공단' 투자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남포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북한의 수도이자 핵심부인 평양의 위성도시이며, 서해로 나가는 관문이다. 남포공단을 조성하고 남한기업을 대규모로 유치하겠다는 결정은 남한으로 치면 인천을 통째로 북에 개방한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던 개성공단도 위치만 남포에서 개성으로 바꼈을뿐, 사업 내용이나 추진방식은 1992년 남포공단 합의와 똑같다. 민간 기업으로서 최초의 남북경제협력 사업으로 이후 북핵문제가 불거져 유야무야됐다가 1994년 제네바 합의 후 1995년 미국의 대북제재 1단계 해제가 이루어지면서 대북사업을 재개해 1996년 북한 조선삼천리총회사와 합자로 '민족산업총회사'를 세웠지만, 1999년 그룹 해체 후 이듬해 북한측이 직영하면서 철수했다. 이후에도 김우중은 독자적인 대북커넥션을 유지하면서[26] 남북경협에 대단히 적극적인 인물이었는데, 대북사업에 소홀했다고 정권의 보복을 당했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에 경제 부총리로 한때 김우중 회장이 거론될 정도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쪽에선 김우중과 대우그룹에 호의적이었다. 결국 입각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 경제분야 민관협력 회의는 거의 김우중 회장이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재벌쪽에서도 김우중 회장을 국민회의 정권과의 의사소통 창구로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 동창이자 절친인 이종찬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되면서 정권의 핵심 실세로 떠올랐기에 더더욱...비록 김우중 회장의 부총리 임명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당시 탱크주의 광고로 화제를 모으고 있던 배순훈 대우전자 사장이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입각하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훈 의원이 김우중의 경기고 후배로 정계 입문 전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국민회의 정권과 대우그룹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김우중 회장의 형인 김덕중씨를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국민의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했는데, 보복까지 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김우중 회장의 추징금이 괜히 17조원이나 되는 게 아니다. 다만 이 분식회계의 금액은 당시의 환율로 인해 뻥튀기된 것이지, 정확한 금액이 아니다. 기사 링크 분식회계, 가짜 장부 등으로 회계를 조작해서 은행을 속이고 빚을 내서 돈이 저 만큼인 것이다. 이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며 미국에서는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주에게 징역 150년형을 때릴 만큼 엄청난 중죄이다. 남의 돈으로 사기쳐서 다 날려먹었으니 당연히 토해내야 되고 그 돈이 엄청난 금액이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 아니었다.

참고로 1999년 기준으로 정부 예산이 84조원인데 대우그룹의 부채는 무려 70조원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즉, 정부차원에서 감당할수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하에 있던지라 그 만한 돈을 보전해주기 쉽지 않았다. 물론, 주요 은행들이나 일부 기업들에게 공적자금을 투입하긴 했지만 이것은 구조조정을 전제로 지원해준 것이다.

7.3.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간의 악연

정부가 기업어음(CP) 발행 한도 제한 조치와 회사채 발행 한도 제한 조치를 통해 1998년의 매출액은 62조원, 전년대비 24.7% 증가했지만 매출채권(9조 2천억 원)의 증가로 실질적인 현금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부채 비율이 높아져 가게 만들었다는 주장.

하지만 대통령인 DJ(김대중)는 80년대 야당 시절에 김우중의 자금 지원을[27] 받았던 사람이다. DJ나 그 측근들이 굳이 대우 그룹만을 겨냥한 저격용 조치를 만들만큼 김우중을 미워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잘 나가던 대우그룹이 갑작스레 좌초한 건 이런 정치적 변수보다는, 김우중 본인의 현실인식이 매우 낙관적이었던데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IMF의 관리 체제에 속했던 김대중 정부의 초기정책에는 IMF와의 권고 및 협약을 이행하는 방안이 많이 반영되었는데, 걔중에는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부채비율을 200% 이하를 두는 강수가 있었다. 30대 재벌 중 29개 재벌들은 이 구조조정 시행을 전제로 하는 계획서를 5일만에 제출 완료하였지만, 김우중은 오히려 IMF 사태 초기인 1998년 2월, 김대중을 만나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내세운 국가 프로젝트를 내세웠으며, 3월에 전경련 회장을 맡으며 수출론을 주장하였다. 김우중은 현 경제위기 및 정권의 강한 구조조정 권고는 일시적이고, 대출을 더 받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아 위기 중에도 세계 경영 및 국내 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것이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이런 과감한 모습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90년대 중후반부터 김우중의 과감한 투자 여파로 대우그룹 실적이 조금씩 악화되어 지난날 김 회장 및 대우그룹에서 경영성과로 홍보해온 해외 회사들(예, 벨기에 Universal, 영국 자동차 연구소[28])을 하나씩 매각하던 상황에서, 마침내 일본 노무라 증권<대우 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내기에 이른다.

또한 밀어내기식 수출은 당시 적자 수출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수익 구조를 악화시켜 그룹 전체 수익은 1998년 기준으로 6천억 원 적자를 기록하고 금융비용의 증가를 초래시키며, 적자 규모는 조 단위를 넘어갔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대우는 삼성과의 빅딜로 타개를 시도하였지만 실패했으며, 1999년 4월 구조조정을 실시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8월, 계열사 전부 워크아웃으로 들어가게 되고, 11월 초에 대우 사장단은 사퇴를 제출하고 계열사는 매각 상태가 된다.

물론 강봉균 경제부총리로 대표되는 일부 경제 관료들은 구조조정을 하지않고 추가 대출이나 신규투자를 기대하는 김우중의 모습을 막강한 부채를 빌미로 정부를 협박한다고 간주하며 대우그룹을 좋지않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재계 2위인 대우그룹이 문제가 생길 경우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제2의 IMF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만큼 컸기 때문에 함부로 대우를 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부 자금을 투입 가능한 법정관리안을 제시하였다. 당시 한국 정부와 동업자였던 GM(제너럴 모터스)이 동시에 손을 내밀었는데, 김우중은 정부의 제안을 받은 와중에도 GM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개인의) 성세가 끝나가는 상황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힌 쪽보다는 일처리가 분명한 쪽에 의탁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이나 세(勢)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경우가 있다. 1999년 위기 때 손을 내밀었던 제너럴 모터스와 한국 정부 중 어느 쪽이 더 나았을지?

8. 만약에 부도가 나지 않았더라면?

긍정하는 쪽에서는 만약 대우그룹이 외환위기 당시에 위기를 잘 타개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현대를 제치고 삼성과 재계 서열 1~2위를 다투는 대기업이 되었을 것이며,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휘청거렸다 해도 재계 4위 안의 재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있다. 또한 LG나 삼성에게 전자 쪽이 밀렸다 하더라도 다른 사업인 국방이나 자동차 생산 쪽에서는 한화, 현대와 경쟁하며, 한국 경제에 더 큰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언제까지나 1999년 당시 대우가 70조원 가량의 대내외 부채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경우에만 해당되는 망상적인 예측에 불과하다. 부채 규모가 한 기업이나 당시 IMF 외환위기 체제하에서 국가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이러한 예측은 망상에 불과하며 [29] 대마불사를 외치며 앞뒤도 보지 않고 30년간 사업규모만 확장하면서 규모만 늘리던 대기업이었던 것을 생각하자. 결국 자립도 없는 대기업이 무조건적인 대출로 규모만 늘려서 사업만 확장하다 나라의 경제가 휘청이고 빚은 감당하지 못해서 망한 것이니, 어찌 보면 자업자득인 셈.

9. 계열사 목록

9.1. 전자·정보통신

9.2. 건설

9.3. 자동차·중공업

9.4. 섬유·화학

9.5. 무역·서비스

9.6. 금융

9.7. 공익사업

9.8. 관계사

9.9. 관련 단체

10. 여담

11. 스포츠 후원


[1] 대우건설을 따라서 금호아시아나그룹 산하로 들어갔지만,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상황이 나빠서 모건스텐리에 팔렸다. 대우건설이 현재 쓰는 사옥은 舊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옥이다. 이 때문에 대우건설 직원들이 이를 빡빡 간다고 한다.[2] 그룹 명칭인 대우의 뜻은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 회장의 이름인 우(宇)에서 따 왔다.[3] 삼성그룹, 현대그룹, LG그룹, 대우그룹. 물론 선경그룹(現 SK그룹)도 제법 크긴 했지만 지금과 같이 규모를 키운 것은 훗날 일이다.[4] 김우중 회장의 선친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은사였다.[5] 당시에는 럭키그룹[6] 1997년까지만 해도 현대그룹이 압도적인 1위, LG와 삼성이 2~3위, 대우는 4위였다.[7] 당시 한보철강, 아시아자동차, 기아자동차, 동아건설 등 총 4개 대기업들의 분식회계 규모가 6조원 가까이 됐는데, 대우그룹 혼자서 사기대출 10조원41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사실 아시아자동차는 기아자동차가 속한 기아그룹 산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3개 대기업이지만. 참고로 김우중이 도피하고 대우그룹이 해체된 1999년 기준으로 국가예산이 84조원이었는데 그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던것이었다.[8] 예를 들어,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현)두산인프라코어.[9] 얘는 알짜 계열사인 웅진코웨이를 팔고서 살아나기 라도 했지, 완전히 망해버린 대우그룹, STX 따위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다.[10] 정확히는 1999년에 제작되었으며 광고의 내용과 아래의 대사로 보아서는 완전한 해체는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는 워크아웃을 결정한 상태라 이미 늦은 시기였다. 참고로 광고에 나오는 음악은 가을의 전설 OST에 수록된 제임스 호너의 'The Ludlows'이다.[11] 1976년에 설립된 영국 톰 월킨쇼 레이싱 소속의 연구소로, 마티즈누비라의 아이디어를 낸 곳이다.[12] 자사의 승합차인 루블린을 한국에 수입할 계획이었던 자동차 회사.[13] 이 와중에도 쌍용자동차 인수를 그대로 질렀다.[14] 탱크주의 광고 이후 탤런트 조문정은 그 다음해인 1994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또한 배순훈 사장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정보통신부 장관을 맡았다.[15] 탱크주의를 내세우기 전인 1991년에는 당시 대우 IC 냉장고란 제품을 구입한 몇몇 소비자의 경우엔 구입하자 마자 몇 달 만에 냉장고가 고장이 나고 냉각이 제대로 안 되면서 걸핏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현상을 겪었고 이후에 수차례 AS를 불러도 개선이 되지 않는 터에 결국 이사갈 때 대우 냉장고는 그냥 두고 가는 게 낫겠다며 이사 간 집에서 멀쩡히 대우 IC 냉장고가 있던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했을 정도. *[16] 경찰과 대한전선 측이 제시한 결과도 황당했는데, 경찰 측은 동반자살이라 단정짓고, 대한전선 측도 광고에서까지 안전성까지 강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17] TV를 예로 들면 스위치 키고 채널 돌리고 볼륨 조절하면 끝! 에서 자동화면 조정 기능, 예약 on/off 기능, 리모콘 채널 기억 등 갖가지 복잡한 기능들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종이장 몇 개 정도였던 사용 설명서가 점점 두꺼워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18] 물론 그러한 전략 자체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무인양품참조.[19] 의외로 대우는 1978년 새한자동차 인수 이후 파워 트레인 쪽 기술 개발을 단행해, 1981년에 독자적으로 XQ엔진을 개발하였으며, 이후에도 후신 격 되는 엔진인 론지 엔진을 개발한 바 있다. 이들 엔진의 경우 기본 베이스는 제법 괜찮았지만, 적용대상이 하필 소형차 뿐만이 아니라 중형차까지라(...) 욕먹은 케이스. 소형 급인 맵시에서는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해외 유수의 기업에서도 한계라고 느껴지던 세계 최초의 횡치 직렬 6기통 엔진인 대우 XK엔진을 개발해 양산에 성공한 바 있다.[20] 사실 이 문제는 부평 연구소와 부평 공장의 연구 인력과 노동자들의 경험이 숙련되기 시작하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결된다.[21] 비록 1년 뿐이었지만 1999년 폴란드에서는 그동안 이어졌던 피아트의 점유율 1위 독주를 끝내고, 폴란드 국영 자동차업체인 FSO 인수와 현지 생산 거점 확보 및 공격적인 판매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폴란드의 자동차시장 점유율 1위를 대우가 차지했다. 또 중앙아시아의 경우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현지 정부와 함께 설립한 '우즈대우'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어서, 공장이 가동된 1996년부터 대우 브랜드가 사라진 2017년 현재까지도 부동의 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다.[22] 당시 버스 정류장 명칭은 "서울역앞, 대우"였으나, 그 후에 "서울역.대우건설"로 변경, 2009년 "서울역 버스 환승센터"로 통합됐다.[23]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맹희 전 삼성그룹 부회장 회고록에는 정치권에 댈 "줄을 찾는" 과정에서 힘을 소모해 타격을 입은 몇몇 기업의 사례가 나와있다[24] 김일성이 특히 김우중을 마음에 들어해 "김우중 같은 사람 5명이 있으면 그 나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덕담을 해주었다고 한다[25] 현대그룹은 김대중 정부가 대북사업에 직접 나서기 이전인 1989년부터 대북사업을 추진했다.[26] 김우중은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해외를 떠돌던 2000년대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대북사업에는 대단한 열의를 보인 인물이다.[27] 야권에도 손을 내미는 기업들이 대개 여권 2 : 야권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조심스레 지원하는데, 친화력 9단인데다 선친이 호남과 인연이 닿은 김우중은 이런 행보를 밟아도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에 김일성과 커넥션을 형성하고도 무사무탈했던 양반이다[28] 중형 승용차 레간자가 이곳에서 개발한 작품이다[29] KBSMBC 보도자료 참고.[30] 모회사인 오텍은 응급 의료장비 전문업체로, 앰블런스, 특수 구급차, 검진차, 장애인차, 들것 등을 취급한다.[31] 그 외에도 LG산전 자판기사업부를 인수해 캐리어LG란 회사를 설립했다.[32] 세계 3대 유리 생산 회사로 매출이 10조를 넘으며 한국에도 공장을 세우고 진출해 1조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고 있다.[33] 2001년 상장폐지 후 2006년 파산절차에 돌입했다.[34] 삼성, 현대, 대우, GS, 대림[35] 이 파업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이어진다.[36] 정확히는 임시법인 롯데백화점마산으로 매각됐다.[37] 이한구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원장, 사장을 지냈었고 그의 밑에서 일하던 인물들은 안종범, 강석훈 등이 있다.[38] 사실 이곳 이외에도 포스코의 광양제철초와 광양제철남초가 섬에 있긴 하다. 다만, 이곳은 섬 대부분이 제철소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섬 유일의 국립 초등학교는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구 제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이다. 더나아가 섬 유일의 국립 중학교도 제주대학교 부설학교이다. 여담으로 농촌지역 유일의 사립 초등학교는 남양주에 있는 심석초등학교.[39] 2011년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에 합병되어 사라졌다.[40] 구 대우인터내셔널. 포스코가 인수했음에도 꽤 오랫동안 모기업 사명이 안들어갔다. 예전 대우맨들은 아직도 '주대우'라고 부르며 대우그룹의 중심이었던 '주식회사 대우'에서 일했다는 프라이드를 드러내고 있다. 이 회사는 대우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41] 구 KDB대우증권.[42] 자일대우상용차의 공식 AS용 이동차량도 올란도가 주력 모델이다.[43] 여담으로 2019년에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임원 관용차를 현대자동차 그랜저에서 쉐보레 임팔라로 교체했는데, 모기업인 포스코와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라이벌 관계이기 때문에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44] 사내 내규에 의해 대한항공 이용시 항공료 미지원.[45] 물론 인수한 모기업에서는 이런 점을 싫어하기도 한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한참 전에 망한 회사인데 자사 소속 임직원들이 해당 모기업의 문화에 융화되기보다는 대우의 아이덴티티를 고집한다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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