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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1:31:18

북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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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A84E9> 북방정책
北方政策 | Northern Policy
파일:73081184.1.jpg
1990년 1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만난 노태우 대통령
파일:201708210156101888869.jpg
1992년 9월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과 만난 노태우 대통령
<colcolor=#fff> 추진 국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대한민국|]]
추진 정부 노태우 정부
기간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주요 내용 동구권 국가들과의 국교 수립 및 교류 확대
한반도 내 안보 위협 완화

1. 개요2. 내용3. 평가4. 기타5. 같이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외교 정책.

노태우 정부에서 추진됐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국교 수립 및 교류를 통해서 북한과의 전쟁 위협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진됐다.[1]

2. 내용

1988년 7월 7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일명 7·7선언)'을 발표하며, 자유진영 국가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 개혁·개방 노선을 타고 있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의사를 천명했다. 이후 1988년 8월헝가리와의 상주대표부 설치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다음해인 1989년에 헝가리와 수교를 맺은 이후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과 수교를 맺었고, 그 이듬해인 1990년에는 소련불가리아, 몽골, 루마니아와 국교를 맺었으며, 1991년에는 알바니아, 그리고 노태우 정부 말기이던 1992년중국, 베트남과 수교를 했고 더 나아가 1991년 9월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까지 이뤄내며 결실을 거두었다.

3. 평가

북방정책은 대한민국이 서방세계의 자본주의 강국인 미국에 대한 극단적인 의존을 타파하고 본격적으로 국제 외교 무대에 데뷔한 계기로 높이 평가받는다. 국제연합 가입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이후 한국은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불과 수 년 내에 비상임이사국을 역임하고 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등 국제 무대의 주요국 중 하나로 빠르게 발돋움한다.[2]

노태우 정부 때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 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한반도 비핵화 선언, 상호간의 불가침 합의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이해했다는 점에서 호의적인 평가가 있다.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역시 이후 한국의 외교에 긍정적인 족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한소수교 이후 한국은 경제적으로 휘청이던 소련에 다량의 차관을 빌려주었고, 직후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로 전환되면서 이를 계기로 불곰사업 등 양국 간 군사교류가 활성화되기도 했다. 불과 반 세기만에 최빈국이던 국가가 공산권의 수장국에게 경제지원을 해 주는 모습은 체제경쟁의 끝을 알리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양국 관계를 넘어 공산권 국가들에 한국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효과도 발휘했다.

정부 수립 이후 전쟁까지 치렀던 중국, 베트남과의 오랜 적대를 끝마친 1992년 한중수교와 한월수교 역시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한중수교의 경우 세부적인 평가를 두고는 갑론을박이 있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

한편, 이 시기 러시아권에 진출한 기업들은 이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의리를 지키면서 러시아인들의 대한 인식 상승에 크게 일조하였으며, 동유럽권에 진출한 기업들은 냉전 종식 이후 대한민국의 대유럽 수출기지이자 생산기지로 톡톡하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인해 노태우 정부는 학계로부터 유독 외교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편이다. '동유럽 등 공산권과의 국교 정상화'를 비롯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서울올림픽으로 대표되는 대북 체제경쟁 승리, 국력 우위의 입증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약 10년 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서 제기되었던 '퍼주기', '유화정책'이라는 식의 비난도 덜 받았다.

국방 분야에서도 북방정책은 큰 도움이 되었다. 불곰사업을 통해 러시아의 국방기술을 도입할 수 있었고, 조소동맹조약의 폐기를 통해 러시아의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끊어버리는 효과까지 있었기 때문이다.[3]

종합해보면, 40년간 이어져온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이겼음을 증명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불과 10여년전만 하더라도 북한과 수교를 하면서 원조를 주던 국가들이 북한이라는 파트너를 버리고 한국과 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것은 당시 북한 입장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였고, 그만큼 국내외 충격도 굉장했다.[4]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북한이 자력갱생을 운운하며 국제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이유를 들어 이 북방정책을 꼽기도 한다.

3.1. 중국과의 수교

한중수교의 경우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에 일제강점기와 냉전기의 맹방이던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라는 비용을 치러야 했다. 때문에 2010년대~2020년대 들어 한중관계 및 양국 간 국민감정이 눈에 띄게 악화되자, 주로 이상주의 성향을 띠는 반(反)권위주의 진영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5]

구체적으로, 민주주의 국가 간의 연대와 가치 공유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저런 평가[6]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다만 어차피 중국이 현실정치의 국가로 존재하고 이미 1971년 이래로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자리잡은 이상 이를 거스를 만한 현실적 사유가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오히려 중국과의 민간 교류를 늘려나감으로써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쪽이 우발적인 충돌을 막을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7]

한편, 국익과 실리를 기준으로 외교 정책을 판단하는 현실주의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비판에 부정적이다.[8] 먼저, 당대 동북아시아 정세에서 중국이 차지하던 위치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한반도 문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였고, 이는 남북통일을 국시로 내걸었던 당대 한국에게 무시할 수 없는 요소였다. 게다가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은 이미 1970년대에 중화민국(대만)에게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빼앗아오고 국제사회에서 중공이 중화민국(대만)을 대신해 '중국(China)'이라 인정되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반면 대만은 이와 동시에 유엔에서 자진 탈퇴하면서 영향력이 날로 축소되어가던 처지였으며, 섬에 고립된 지정학적 연유로 한국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미국일본은 이미 1970년대에 중국과 재수교하고 중국 시장에 일찌감치 발을 들이밀어 상당한 경제적 이익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고, 미중관계중일관계 역시 공산국가의 근본적인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중국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을 일본 등 다른 경쟁국들에 내주겠다는 의미인 동시에 동북아시아 외교에서 주요한 패 중 하나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기도 했다.[9] 중국이 예나 지금이나 잠재적 적성국인 건 사실이지만, 외교란 적성국과도 전략적인 제휴나 대화를 해야 할 때가 있고, 이를 위해 최소한의 외교관계는 필요했다는 것이다.[10]

1980년대의 중국은 죽의 장막으로 대표되는 오랜 폐쇄주의를 끝내고 갓 국제사회에 복귀한 국가였으며, '도광양회'라는 지침에서도 드러나듯 주변국과의 마찰을 가능한 회피하며 경제 발전에만 집중하던 국가였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게 가장 위협이 되던 아시아 국가는 중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1980년대 일본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에서 보듯이 미국을 추월한다는 전망까지 나오던 때로, 플라자 합의미일 반도체 협정 등으로 미국의 견제를 받을 정도였지만, 당시 중국 GDP는 일본의 1/8 수준에 불과했다. 현대 독일과 과거 나치 독일이 같은 "독일"이지만 주변국들이 독일을 대하는 태도도 극명하게 다르듯,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과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이름은 같은 중국이라도 정책이 다르니 당연히 다른 전략으로 맞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외교란 국가 자체가 아니라 국가의 정책에 귀속된다는 본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가령, 과거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이 승리해서 지금의 중국 대륙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아니라 중화민국(대만)이 차지했다고 가정하자. 그럼에도 그 '중화민국'이 시대별로 다른 외교 정책을 시행하면 당연히 다른 전략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또한 노태우 정부 시기는 탈냉전의 시대이기에 오늘날 신냉전 시대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탈냉전 시대의 대통령이기에 당시의 온건한 외교 정세에 따른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건 마찬가지로 탈냉전 시대에 대통령을 역임했던 김영삼, 김대중도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탈냉전 시대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들도 비교적 온건파인 인물들이 많았다. 장쩌민이나 후진타오도 지금의 시진핑에 비하면 온건한 외교를 하는 편이었으며, 일본도 무라야마, 고노, 오부치가 총리나 관방장관으로 있을 때 한국에 대해서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주었다. 노태우 대통령을 포함하여 탈냉전 시기의 지도자들은 이에 같이 온건적으로 응했다고 보면 된다. 또한 시진핑 정권 혹은 후속 정권이 다른 태도를 취할 것도 감안하여 최소한의 우호관계는 계속 유지해야 할 것이다.

4. 기타

5. 같이보기


[1] 사실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 시도는 박정희 정부 시절이던 1977년에도 있었다. #[2] 다만 남북한의 국제연합 동시 가입은 하나의 한국 원칙의 실패를 의미했고, 때문에 북한을 완벽히 고립시키지 못하고 후일 북한이 자국의 위협적 행보를 국제사회에 정당화할 길을 열어주었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중국이 70년대까지 차라리 국제연합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이후엔 대만을 국제기구에서 철저히 거부하는 것은, 결국 상대편에게 외교적인 공간을 주지 않아야 통일이 가능하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반면 남북한은 화합을 통한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고, 분명 남북한 사이의 국력차, 외교적 입지가 유의미하게 벌어지기 시작한 이후이기는 하나 남한 단독 가입을 추구할만할 정도는 아직 아니었던 시기였고 아직 소련 주도의 제2세계가 살아있던 시절이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한국과 중국의 통일 문제가 어떻게 결론지어지느냐를 두고 미래 세대가 평가할 문제이다.[3] 다만, 조소동맹조약은 1996년 폐기되었으므로, 노태우가 아닌 김영삼 정부의 업적이라고 봐야 한다.[4]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공산권의 형님 국가인 소련이 1990년 대한민국과 수교를 결정했을때 북한은 고르바쵸프 대통령을 겨냥해 인민의 배신자라며 맹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즉, 본인들에게 막대한 원조를 지원해주었던 최우방국의 수장에게 이런 외교적 걸례를 저질렀다는 뜻. 반대로 말하자면 그 정도로 북한이 대외적으로 느끼는 압박감이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북괴'란 말이 이미 적절해지지 않은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세상에 어떤 괴뢰정권이 대놓고 종주국을 비난하는가.[5] 사실 일부 사람들이 노태우의 북방외교, 특히 중국과의 수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실리보다도 노태우라는 인물의 12.12 군사반란 등 과거 하나회 행적에서 찾기도 한다. 하나회의 모든 악행과 독재는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되었고,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정부에 반발하면 공산당으로 몰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취조하는데 앞장서왔던게 하나회 정권이였다. 노태우는 그런 집단의 핵심 수괴중 하나였다. 그랬던 인물이, 언제 내가 반공을 강요했냐는 듯 아무런 전국적 합의 없이 공산당과 수교하고 공짜 업적을 가로채간 것에 일부 인물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민주화 운동가 출신인 김영삼의 북방정책에는 사람들이 그다지 큰 거부반응을 안 보이는 것과 대조된다. 김영삼은 노태우와 달리 반공을 명분으로 독재자가 된 경우도 아니고, 오히려 그렇게 집권한 독재자를 비판하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같은 보수정권이라도 김영삼의 북방외교는 명분상 문제될 요소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한 노태우는 한중수교 당시 중국에게 하나의 한국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결국 두개의 한국을 받아들이며 다소 중국에 양보하듯이 수교협상을 했던 것과 달리, 김영삼은 조소동맹조약 폐지 등 실제로 안보에 도움 될만한 결과도 쏠쏠하게 내었기 때문에 김영삼의 북방외교가 더 의미 있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6] 자유민주주의 우방국인 대만과의 신의를 버리고 독재국가인 중국을 선택했다는 평가[7] 쉽게 이야기해서 1950년대 중국은 한국 전쟁에서 미국의 의도를 불신했기 때문에 자국의 희생을 감수하고 개입을 택했다. 반면 오늘날 한국은 중국에 한국의 의도를 전달하고 설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중국이 자국의 이해관계로 한국의 이해를 묵살할 가능성은 있지만 최소한 양자 간 불신으로 인한 충돌의 가능성은 많이 낮아진 상태이다.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이는 결국 한중 수교와 이어진 교류를 바탕으로 양국이 서로의 입장을 최소한도나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8] 그러나 국익과 실리를 바탕으로 한 관점에서 그것이 옳은가 또한 생각거리가 될 수 있다. 가령 마오쩌둥, 덩샤오핑 정권의 하나의 중국 정책을 서방 국가들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시진핑 정권이 국제 사회에서 전횡을 부릴 수 있겠느냐 또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9] 예컨대 당시 일본은 한국이 마음에 안 들면 중국이나 소련으로 압박하고, 중국이 마음에 안 들면 한국에 접근하며, 미국이 통상으로 압박하면 중국과 경제협력을 체결하고, 중국이 경제보복을 가하면 미국 주도의 공급망에 참여하는 식의 유연한 대처가 가능했다. 반면 한국은 중국과의 외교관계 자체가 없었다 보니, 미국이나 일본과 이런저런 마찰이 벌어질 경우 독자적으로 해결하거나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 했던 것이다.[10] 단적인 예로 2차대전이나 냉전의 주요 강대국들은 서로 극한으로 대립하면서도 단교하지는 않았다. 공산권과 수교금지를 원칙으로 내세우던 초창기 서독조차도 소련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이는 아무리 적이라도 서로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고, 지정학적 대립 속에서 감정적인 충돌로 인한 불필요한 비용 없이 각자의 이해를 반영하는 의견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외교적인 채널을 열어 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1] 정부 기관의 관용차로 대우 차량을 선택한 국가도 많았다.[12] 실제로 대한민국 대통령실은 대한민국-쿠바 수교에 대해 "대(對) 사회주의권 외교의 완결판"이라며 자평했다.#[13] 유엔 회원국으로서 마지막 남은 미수교국인 시리아는 친북 국가이긴 하지만 공산주의 체제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