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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첫째는 저는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동원해서 이를 소탕해나갈 것입니다. 둘째는 민주사회의 기틀을 위협하는 불법과 무질서를 추방할 것입니다. 셋째는 과소비와 투기 또 퇴폐와 향락을 바로 잡아 일하는 사회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 당시 대통령 노태우
1990년 10월 4일 보안사 윤석양 이병에 의해 노태우의 친위 쿠데타 계획인 청명계획이 폭로되면서 여론이 끓어오르자 정국을 전환하기 위해 13일 등장한 대통령 특별선언이다. 통칭 ‘범죄와의 전쟁’ 선언.- 당시 대통령 노태우
2. 특징
사실 조직폭력배 같은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작업들은 과거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로 집권한 후 군사독재 시기가 찾아오면서 화랑동지회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무더기로 체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슬로건 자체가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또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역시 삼청교육대 등으로 상징되는 치안정책을 폈다. 결국 검찰과 경찰이 늘상 해 왔던 작업이었고 김영삼, 김대중 집권기에도 계속 유지되었던 정책이다. 물론 삼청교육대처럼 무고한 시민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였다.다만 범죄와의 전쟁이 상기된 치안 정책과 다른 점은 그 범위와 깊이에 있다. 즉 이전에는 군사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소위 뇌물의 형태를 띤 상납금을 제대로 내지 않은 조폭들만 그것도 일부를 본보기로 골라서 잡았다면 이때는 더욱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대대적으로 조폭들을 때려잡았다. 노태우는 1990년 5월 7일에 특별담화를 통해 법질서 확립에 대한 결의를 표명했으며 3일 후에 치안관계 장관들은 유례없는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범죄와 폭력을 발본색원할 것을 크게 다짐했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 ~ 제6공화국 당시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경찰력 상당수가 간첩조작 및 민주화 세력 탄압에 악용되었기 때문에 치안공백이 지적되었고 말미암아 강력 범죄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한편으로 1986년 3저 호황으로 인해 유흥업 수요가 급증하면서 여성의 인신매매와 납치가 극성을 부렸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납치를 검색하면 1980년대에 수많은 기사가 검색된다.
당시 윤락업은 도서 지역이나 내륙 깊은 시골에까지 뻗어 있었다. 인신매매에 관련된 괴담의 상당수가 이때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납치되었다가 경찰의 윤락가 단속 혹은 자력탈출로 인해 신변이 확인된 여성의 수가 많았다. 남성 역시 어선 등으로의 납치, 매매되는 사례가 적잖이 존재했다.
10.13 특별선언의 1년 전인 1989년부터 치안본부는 이미 5대 사회악의 특별단속을 지시하여 실행 중이었다. 경찰은 단속강화를 위해 인력 및 장비를 보강하였고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등 6대 도시에 무술유단자 등 전문요원을 선발하여 각 사안별로 편성해 운영하는 한편 광역화된 범죄에 대처하기 위하여 공조수사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검찰에서도 역시 1989년부터 범죄 단속을 위해 조직을 강화하였는데 대검찰청에 민생치안문제를 전담하는 강력부를 신설하여 인신매매, 가정파괴, 조직폭력, 마약, 부정식품 사범 등 5대 사회악에 강력 대처하였다. 검찰은 이와 함께 공직자의 뇌물수수 사건 등 공직부패사범에 대한 국민들의 수사 요구가 높아지자 이를 직접 조사하기 위한 조사부를 서울지검 등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는데 이는 TV 생중계는 물론, 거의 모든 일간지 톱 기사를 장식했다.
어쨌거나 1992년까지 노태우 정부 시절 내내 진행된 대대적인 조직폭력배 숙청 작업으로 대한민국의 치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좋아진 것도 사실이며 노태우에게 비판적이었던 사람들도 범죄와의 전쟁만큼은 노태우의 공이라고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일본에서도 폭력단 대책법을 제정할 때 한국의 범죄와의 전쟁을 참고했을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3. 후속작 - 새질서 새생활 운동
1990년 11월에는 범죄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새질서 새생활 운동'이란 캠페인이 전국을 휩쓸었다. 예를 들어 서울특별시에선 2억 원의 예산을 들여 아르바이트 대학생까지 동원해 연말까지 3백만 명이 참가하는 캠페인까지 벌이기에 이르렀다. 또 당시 경북도지사 김우현이 "근무자세가 해이한 자는 직위 해제시키겠다"고 경고하자 경북 지역의 시장/군수들은 현수막과 입간판 등 가두 홍보물이 얼마나 설치되었는지 일일이 확인하느라 진땀을 빼기까지 했으며 일선 시/군 단위 공무원들은 "이건 홍보물 설치 전쟁과도 같다"고 하며 "이래저래 죽어나가는 건 말단 공무원들뿐"이라고 불평했다.해도 해도 너무한 건지 언론 역시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서울신문 1990년 11월 20일자는 '새질서 새생활 운동'을 위한 결의대회에 공무원이 대량 동원되어 행정공백현상이 나타나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고 보도하였고 사흘 뒤 조선일보에선 새질서 새생활 운동에 공무원은 물론 직장인, 국민학생들까지 총동원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중앙일보 12월 1일자 기사에선 모 도교육 위원회가 새질서 새생활 운동에 동원된 13만 명 중 학생이 전체의 90%였다고 보도했다.
이 캠페인은 199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거기에 '30분 더 일하기 운동'과 '10% 씀씀이 줄이기 운동'까지 가세했다. 중앙일보 1991년 12월 7일자에서 해당 운동에 동원된 연인원은 대한민국 인구의 9배에 이르는 3억 4,925만 3천여 명, 연단체/기관 수는 254만 5,812개에 이르렀으나 이들 대부분이 각종 결의대회, 기관장 간담회나 피켓/어깨띠를 동원한 가두 캠페인 등 구호 차원의 참여밖에 없는 대회뿐이었다.
4. 빛과 그림자
조직폭력배의 활동이 크게 줄어들었다. 모든 조폭을 뿌리뽑지는 못했지만 양지에서 대놓고 활동하는 폭력조직은 대부분 소탕되었으며 살아남은 단체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고 음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대통령령이기 때문에 이전에는 적당히 묵인되었던 조직들도 싸그리 소탕되었고 1년 동안 전국 2백여 개 조직에서 7백여 명이나 구속되었던 대규모 체포가 이뤄졌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범죄와의 전쟁'은 보안사 청명계획 폭로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한 '홍보전쟁'이었다.
이는 처음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는데 정부 통계에 따르면 당시 살인 사건이 평균 이틀에 세 건, 강간 사건이 하루에 열두 건씩 발생하고 있었으니 범죄에 염증을 느낀 국민 입장에선 거창하게 벌인 '범죄와의 전쟁'에 호의적 평가를 내린 건 당연지사. 실제로 1990년 10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선-갤럽 공동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77%가 '잘한 일'로 평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오직 홍보뿐인 '범죄와의 전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각종 관제운동 전개와 홍보물 대량 설치, 무장 군인들의 시내 순찰과 실적 위주의 인권유린이 가세된 공포 분위기 조성용 '홍보'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는 '인권침해' 문제였다. 범죄와의 전쟁 과정에서 높으신 분들이 전국의 경찰국과 경찰서에 실적을 올리라고 압력을 넣는 바람에 애꿎은 사람들이 사소한 트집 하나로 범죄자로 몰려 수없이 체포되었고 고문수사 및 진술강요 역시 늘어나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해 무죄추정의 원칙이 무시되었다는 것. 예를 들어 같은 시기에 일어났던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 사건 현장 주변 지역의 어지간한 남성들은 죄다 끌려가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그 와중에 크고 작은 폭행과 고문, 협박을 당했다. 1990년 10월 ~ 1991년 4월까지 경찰의 가혹행위로 3명의 애꿎은 남성이 정신분열증에 걸리거나 자살하였고 8차 사건은 경찰이 부실조사 끝에 윤 씨에게 누명을 씌우고 20년을 감옥에 가뒀다. 그러고도 정작 훗날 밝혀진 진범인 이춘재는 전부 빠져나갔다.
특히 세계인권선언 42주년을 맞이한 1990년 12월 10일 대한변호사협회는 "범죄 예방을 빙자해 선량한 시민이 부당하게 자유를 억압당하거나 범인 검거 구실 하에 불법연행과 폭행, 고문 등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며 "정치지도자들은 국민의 기본권 옹호를 위해 비민주적인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혁신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또 대한변협이 낸 1990년 인권보고서에선 "범죄와의 전쟁 선포 뒤 불법 가두검문 및 검색, 불법연행, 총기사용의 남용 등으로 인권침해가 커졌다"며 "1990년 11월 기준 시국 관련 수감자(양심수)는 1,295명이었고 이 중 국가보안법 위반자는 전체의 40%인 513명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특히 1991년 '범죄와의 전쟁 1돌'을 맞이해 '범죄소탕 70일 작전'이라는 실적 위주의 작전으로 인해 수사 도중 인권침해 사례가 대량으로 속출하기도 했다. 당초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알려진 2인조도 이에 의한 경찰의 실적 채우기로 인해 강제자백을 받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실제로 사건이 일어난 1990년은 10.13 특별선언이 등장한 시기였고 이들이 대대적으로 초기 수사를 받은 1991년 11월은 10.13 특별선언 이후 1년 1개월이 지난 시기였다. 또 허위신고 하나에만 의존한 채 20대 여성 두 명에게 가혹행위를 해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가 하면 열 살 짜리 국민학생을 조폭으로 둔갑시켜 소년원에 보내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그렇다고 경찰들만 탓할 수 없는 게, 정부가 '민생치안평가제'라는 실적주의 방식을 도입하여 일선 경찰관에게 실적을 올리라고 닦달하는 바람에 말단 경찰관들이 출동해 과도한 비상근무로 인한 과로로 쓰러져 실려가거나 심지어 사망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정국전환용 쇼라는 민주화 세력의 비판이 거셌다. 이때 소탕된 범죄조직의 수가 적지 않았으며 이 기간 동안 숨죽이고 있던 범죄자들도 많아 대외적으로는 치안이 상당히 좋아지는 효과가 있었다고는 하나 이미 1989년부터 진행됐던 검찰 수사로 폭력조직 상당수가 검거된 상황에서 선포된 것으로, 검찰의 수사 실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범죄율이나 마약사범이 감소되었다고 하지만 2년도 안 가 동아일보에선 노태우가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크게 소리치고 조폭들이 귓구멍을 막고 비웃는 시사만화가 실리면서 장기적으로 별 효과가 없다고 풍자되기도 했다. 범죄와의 전쟁 선포로부터 2주년이 되는 해에 그려진 고바우 영감 만평도 비슷하게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계속된 범죄와의 전쟁을 풍자했다. # (실제‘범죄와의 전쟁’은 어땠을까)
한편 이와 관련해서 체포, 수감되었던 범죄 조직원들이 기간을 채우고 풀려날 2000년대 초중반에 조직이 재건될 것이라고 경찰에서 우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검거된 범죄자들이 형량을 마치고 점차 풀려나와 조직 재건을 시도하다가 꼬리가 잡히는 경우가 있었지만 치안에 큰 영향을 줄 정도의 사회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가시적인 피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조직들은 법인을 내세우는 '기업형 조폭'을 표방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조직들을 지탱해 오던 수익구조가 시대가 바뀌면서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폭력을 통한 보호비 갈취가 주였지만 이후에는 주식, 부동산, 금융, 이익단체 등에 개입하며 불법적인 성향을 내포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황정민, 이정재, 최민식 주연의 영화 신세계가 이런 세태를 보여준다. 더 현실적으로는 김민정, 박희순 주연의 2009년작 작전이 있다. 철거현장 용역깡패를 하던 박희순은 겉으로는 조폭 생활을 청산했다면서 합법적인 금융투자회사를 차리는데 실제로는 온갖 불법, 편법,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주가조작으로 큰 돈을 번다. 한국 증권시장의 소위 작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여기서 조폭들이 하는 역할을 비교적 현실적으로 보여줬다는 평가가 있다.
비교적 실체를 파악하기 쉬웠던 범죄와의 전쟁 전의 조폭들과는 달리 21세기의 조폭들은 점조직의 네트워크로 움직이며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이전처럼 대통령의 결단으로 대대적인 발본색원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물론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은 힘들어도 색출과 검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업가 행세를 해도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검찰은 2만 명에 달하는 조폭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한 번 조폭 명단에 오르면 이름을 안 뺀다.
4.1. 한국에서 조직폭력배는 왜 쇠퇴했는가
일차적으로 보면 폭처법의 꾸준한 개정과 역대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조직범죄 소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배경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첫째로 민주화 이후 사회적으로 부패도가 많이 줄어들면서 조직폭력배의 활동 기반이 되었던 권력과의 유착이 과거보다 힘들어졌다. 잘 알려진 정치깡패 이정재처럼 과거에는 대놓고 윗선과 조폭이 연결되어 있었고 많은 특혜를 얻었지만 시대가 갈수록 그것이 힘들어진 것. 물론 버닝썬 게이트 등을 보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과거처럼 대놓고 형사들이 조폭을 봐주고 정치가들이 조폭을 움직이기는 힘들어졌다. 대신 공권력이나 정치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본가들은 주목을 덜 받기 때문에 노동조합 탄압을 위해서 용역깡패를 사용하는 사례는 여전히 상당히 흔하긴 하다.
둘째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어려워지면서 전통적으로 조직폭력배들이 많이 진출하던 사업들 역시 쇠퇴했다. 일본에서도 버블 경제 시절에 야쿠자들이 활발히 활동했지만 버블이 꺼지자 그 세가 크게 쇠퇴했던 사례가 있다. 또 조폭의 수익원이었던 연예오락산업, 관광호텔, 주류유통 등 여러 분야에 대기업이나 금융기관, 외국계 자본 등이 진출하면서 체계화되었고 조폭들이 발을 붙이기가 힘들어졌다. 더불어 대한민국에서는 총기 소유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폭처법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면서 조직폭력배들은 말단 조무래기들부터 두목까지 모두 합법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 이론상으로도 가능해지는 강력한 법이 만들어진 것 역시 조직폭력배가 쇠퇴하는 것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통 충무로라고 불리던 한국 영화계의 전통적인 사업의 형태는 8.15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영화제작사와 배급망의 뒤에는 정권과 연계된 조폭들이 숨어 있었고 당시 단관 형태였던 상당수 지방극장들도 조폭들과 연계된 지역유지들의 소유였다. 그래서 연예인 기획사들도 조폭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에는 영화관객수도 서울에서만 정확히 집계되었고, 비 서울지역 관객수는 추정치로 어림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영화 흥행기준도 서울기준으로 치는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는 대기업과 금융자본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의 문화진흥정책을 등에 업고 이들이 헐리우드식의 체계적인 영화 제작과 배급시스템을 구축하였고 극장도 몇 년 만에 멀티플렉스 체인망으로 급속도로 재편되면서 조폭들은 2000년대 초반을 마지막으로 영화판에서 모두 바깥으로 밀려났다.
이런 과도기에 일어난 해프닝이 1996 대종상 시상식 논란과 곽정환 서울극장 대표와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가 탈세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특히 곽정환의 구속은 그동안 영화판에서 음성적으로 자행되던 탈세와 자금 횡령 등 검은 돈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이후 모든 극장 관객입장이 전산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금 흐름이 투명해지니 자연히 조폭들이 설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셋째로 언론의 자유가 늘어나고 정보화 매체의 발달 등으로 사회가 투명해지면서 과거처럼 음지에서 행패를 부리기가 쉽지 않아졌다. 한국의 조직폭력배들은 음지에서 소수의 약자를 향해서 행패를 부릴 수는 있어도 사회적인 주목을 받으면서 공권력과 맞설 힘은 없다. 외국에는 정치에까지 주도적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의 힘을 가진 폭력조직들이 많지만 한국에서는 그러한 일은 과도기였던 1950년대 정도를 제외하고는 있어 본 적이 없으며 그나마 전성기였던 50년대에도 몇몇 외국처럼 거대한 힘을 가진 배후세력까진 못 되었고 기껏해야 정치가, 자본가들의 돌격대장이자 따까리로 쓰이다가 버려질 뿐이었다.
다만 민주화가 이뤄진다고 무조건적으로 범죄가 줄어든다는 보장은 없다. 흔히들 말하는 붕괴 후 혼란기 현상으로 공권력이 약화되면서 조폭이 더 활개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1] 실제로 소련 붕괴 후 레드 마피아들이 판치게 된 러시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어느 정도 오해가 있는 속설은 삼청교육대 같은 전두환 군사정권 당시의 퍼포먼스들로 인해서 조직폭력배들이 쇠퇴했다는 주장이다.[2] 당시 삼청교육대에 신상사나 조일환, 구달웅 같은 한국 조직범죄사의 굵직굵직한 거물들도 죄다 끌려가서 일시적으로 탄압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빠르게 풀려나와 유흥가의 성장과 함께 폭력단의 기세는 그다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5공화국 시대는 고도경제성장으로 조폭의 기반이 되는 유흥, 건설, 호텔, 관광산업이 급팽창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조직폭력배가 가장 활개치고 다니던 시대였다. 즉, 삼청교육대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으로 잠시 동안 눌러놓은 것일 뿐이었다.[3]
이탈리아의 마피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화되더라도 조직폭력이 필연적으로 쉽게 쇠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민주화로 인해 시민 사회가 성숙하고 부당한 억압에 대한 저항의식이 커졌다. 또 정치와 조폭의 부당한 유착을 매의 눈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었고 대폭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조폭이 활개칠 수 있는 공간을 대폭 축소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치안을 요구하는 민심이 정치권의 강력한 대처를 이끌어냈고 이것이 주효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사실 언론이 힘을 못 쓰는 국가에서는 조폭들이 활개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멕시코와 중남미 국가들은 카르텔이 언론인들을 워낙 많이 죽이다 보니 언론이 카르텔에 대한 소식을 싣는 게 불가능하고[4] 그러다 보니 카르텔을 소탕하기 힘들다. 본문에도 기재되어 있지만 당시의 뉴스 기사 중에 인신매매 관련 보도가 많았다는 것도 역시 시민들로 하여금 매우 큰 사회 문제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5. 관련 문서
- 사건 사고 관련 정보
- 노태우 정부
- 홍콩할매귀신, 빨간 마스크: 이들 괴담이 나온 배경 자체가 당시 치안이 불안해서라는 정설이 지배적이다.
- 마약과의 전쟁/대한민국
-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6. 출처
-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6. p43~48
[1] 예시로 필리핀이 있다. 그나마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절에는 본보기라도 조폭, 범죄자들을 소탕하긴 했지만 1986년 민주화 이후 범죄율이 미친 듯이 늘었고, 강경 정책을 내세운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마르코스 독재에 대한 미화와 향수로 아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후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2]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과는 엄연히 구별된다.[3] 그나마 이것도 도움 되진 못했는데 조두순 같은 이들을 교화하긴 커녕 오히려 흉악 범죄자로 만드는데 일조했다.[4] 이 때문에 멕시코는 카르텔의 소식을 전하거나 소탕시키는 데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 미국 역시 멕시코 카르텔을 통해 밀수되는 마약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기 때문에 매우 협조를 잘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