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33333><tablebgcolor=#ffffff,#191919><bgcolor=#000000>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 (개구리 소년 사건) | ||
* 해결된 사건 |
화성 연쇄살인 사건 | 화성 연쇄살인 외 사건 |
화성 연쇄살인 사건 (사건 내용) | 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 청주 처제 살인사건 ·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
<colbgcolor=#121212><colcolor=#f0f0f0,#ddd>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화성 연쇄살인 사건 李春在連鎖殺人事件 | Hwaseong serial murder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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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기간 | 1986년 9월 14일 ~ 1991년 4월 3일 | ||
범인 검거 | 2019년 9월 24일[2] | ||
발생 위치 |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정남면·팔탄면·동탄면 일대[3] | ||
범죄 항목 | 강간, 강도살인, 연쇄살인 | ||
범인 | 이춘재 (남, 당시 23~28세 / 1963년생) | ||
처분 | 공소시효 만료로 인한 공소권 없음[4] | ||
인명피해 | 사망 10명[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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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춘재가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6] 반경 3km 이내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저지른 성폭행 결합 연쇄살인 사건.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 사건으로 불리며 개구리 소년 실종·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영구 미제사건이었다.[7]
수십년 동안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제사건이라서 2019년 범인 이춘재가 특정되기 전까지는 화성연쇄살인사건으로 불렸다. 10차례의 연쇄 살인 사건이 모두 당시의 화성군 일대에서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범인은 논두렁, 수풀 등에 숨어있다가 밤 늦게 귀가하는 여성을 노려 성폭행 후 살해하였는데, 대부분의 살인에 스타킹·브래지어·양말 등 피해자의 소지품을 이용하였다.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으며, 젊은층에 한정되지 않고 13세부터 71세까지 다양하였고 사는 곳과 직업도 달라 연관이 없었다.
2019년 8월 9일에 DNA 대조로 유력 용의자 이춘재가 특정되었고 2019년 9월 24일 조사에서 이춘재가 30여 년 만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 범행을 자백하였다.[8] 이로써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중 제일 인지도가 높은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결국 과학수사의 발전으로 미제사건의 틀에서 벗어났다.[9]영구 미제사건으로 생각되던 장기 미제사건들이 해결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대한민국의 미제사건 중 가장 악명 높은 연쇄 살인 사건으로,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범인이 특정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범죄사 교과서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른바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포함된 사건들은 공소시효가 2006년 4월 2일부로 모두 만료되었다.[10] 또 이춘재가 추가로 자백한 살인 14건과 강간, 강도 등 9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되었다. 이로써 이춘재를 본 사건으로 처벌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범인 이춘재는 이미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므로 가석방 신청을 차단해서 사회에서 영구히 격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2. 사건 일지
2.1. 발단: 7건의 연쇄강간 사건
자세한 내용은 화성군 태안읍 일대 연쇄 강간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tablebordercolor=#333,gray><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000><rowbgcolor=#333,#ddd><rowcolor=#fff,#000> 번호 || 일시 || 피해자 및 정황 || 기타 ||
1986년 | |||
1차 사건 | 2월 8일 |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회사원 최모씨(20) 강간 후 현금 1만원 갈취 |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장갑 착용. 상의 폴라로 재갈, 하의 단으로 결박 후 강간. |
2차 사건 | 3월 20일 | 태안읍 황계리에서 정모씨(22) 강간 |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논 아래로 끌고 가 스타킹으로 결박 후 강간. |
3차 사건 | 4월 3일 | 황계리 인근 농로 길을 걷던 이모씨(27) 현금 12만원 갈취 후 강간 | 흉기로 위협하고 70m가량 끌고감. 기저귀 천으로 결박 후 강간. 장갑 착용. |
4차 사건 | 4월 25일 | 개천둑 병점 느티미 다리를 지나가던 중 식당 종업원 하모씨(39) 강간 후 현금 10,500원 갈취 |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스타킹으로 결박하고 양말로 재갈,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씌움. |
5차 사건 | 5월 8일 | 태안읍 진안리 입구 쌍무덤 묘소 앞을 지나던 가정주부 박모씨 (43) 2회 강간 | 흉기로 위협, 치마 안단을 찢어 결박 후 강간. 1회 강간 후 돈이 없자 욕설을 하며 재차 강간. |
6차 사건 | 5월 14일 | 병점리 산업도로둑 비상활주로를 걷던 피해자(48) 현금 20만원 갈취 후 강간 |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옷을 벗기고 치마 내피를 찢어 결박 후 강간. 장갑 착용 |
7차 사건 | 7월 | 황계리 경부철도 부근을 지나던 피해자(19) 강간 | 흉기로 위협하고 찌름. 파란 천으로 입을 막고 스타킹으로 결박 후 강간. |
2.2. 범행: 10건의 연쇄살인 사건
자세한 내용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내용 문서 참고하십시오.||<tablebgcolor=#FFFFFF,#000><rowbgcolor=#333,#ddd><rowcolor=#fff,#111><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33,gray> 번호 || 일시 ||<width=50%> 피해자 및 정황 || 기타 ||
1986년 | |||
1차 사건 | 9월 15일 |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 풀밭에서 이완임 씨(72)가 귀가하다 피살[11] | 날씨 맑음. 액살(손으로 목이 졸림). 정액 반응 음성 |
2차 사건 | 10월 20일 |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농수로[12]에서 박현숙 씨(26)가 맞선 보고 송탄 집으로 돌아가던 중 버스를 타러 가다 피살 | 날씨 흐림. 액살. 정액 검출. |
3차 사건 | 12월 12일 | 화성군 태안읍 안녕리140[13]에서 권정분 씨(25)가 귀가 중에 집 앞에서 피살 | 날씨 맑음. 교살(스타킹으로 목이 졸림). 스타킹으로 재갈, 팬티를 얼굴에 씌움. 정액 검출. |
4차 사건 | 12월 14일 | 화성군 정남면 관항리 논둑[14]에서 이계숙 씨(22)가 맞선 보고 귀가하던 중 버스에서 내린 뒤 피살 | 날씨 비. 두 손 결박, 교살. 우산으로 난행, 거들을 얼굴에 씌움. 정액(혈액형 판정 불능). |
1987년 | |||
5차 사건 | 1월 10일 | 화성군 태안읍 황계리 논[15]에서 홍진영 양(18)이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 날씨 맑음. 두 손 결박, 양말로 재갈. 교살. 정액 검출. |
6차 사건 | 5월 2일 |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박은주 씨(29)가 남편의 (우산 소지)마중 가다 피살 | 날씨 비. 교살. 정액 검출. |
1988년 | |||
7차 사건 | 9월 7일 | 화성군 팔탄면 가재3리 292 농수로에서 안기순 씨(54)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 날씨 흐림. 두 손 결박, 양말과 손수건으로 재갈. 교살. 정액 검출. |
8차 사건 | 9월 16일 | 화성군 태안읍 진안1리 424[16] 주택에서 박상희 양(13)이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다 피살 | 액살, 결박이나 재갈 없음. 1989년 7월 25일 윤성여 씨(당시 22세)가 검거되었으나 이춘재의 자백 이후 재심에서 무죄 선고 확정. |
1990년 | |||
9차 사건 | 11월 15일 | 화성군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김미정 양(14)이 학교 마치고 귀가 중 피살[17] | 날씨 안개. 손과 발 결박, 브래지어로 재갈. 교살. 볼펜·포크•수저•면도칼로 난행. 정액(B형) 검출. |
1991년 | |||
10차 사건 | 4월 3일 | 화성군 동탄면 반송리 599[18]에서 권순상 씨(69)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 피살 | 날씨 맑음, 교살. 족적 2점(감정 불능), 정액(B형) 검출. |
3. 수사 과정
사건이 발생하던 1986년, 관할 파출소장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1차~4차까지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연쇄살인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는 굵직굵직한 시국사건들이 터졌을 때라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던 측면도 있었기도 했고 무엇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때라 상당히 민감해져 있어서 이런 일로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장을 빨리 태워 버리는 등 초동조치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고 이것이 사건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본격적으로 분위기가 흉흉해지면서 범인을 잡기 위해 들끓었던 것은 6차 사건 정도였다고 한다. 5차까지만 하더라도 경찰은 피해자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수사했다. 지금이라면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수법으로 2~3명만 살해되더라도 연쇄살인임을 확신하겠지만 당시에는 연쇄살인이라는 개념 자체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또 수사 기법이 발달하지 않았고 해당 지역 자체가 상당히 낙후되어 치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강간살인은 그렇게 드문 범죄가 아닌 것도 한몫했다.
당시 화성 연쇄살인 5차~10차 사건들 | MBC 뉴스데스크 영상 |
당시 수사는 인권침해 같은 것은 따질 형편도 아니었던지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원~화성 지역 25세~35세 남성의 사진을 모두 보여주면서 범인을 찾아보게 하는 무식한 방법까지 사용했으나 이들 중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목격자들의 기억이 흐릿해진 것 또는 수사 과정 자체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범죄자로 간주되었다가 풀려나는 웃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DNA 감식이나 머리카락 채취 같은 과학 수사는 세계적으로도 화성 사건이 처음 발생한 1986년에서야 영국 레스터대학교 알렉 제프리(Alec Jeffrey’s) 교수의 DNA 신원확인기법을 첫 시도된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제대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당시 대한민국에는 이런 수사 시스템이 전무했기에 증거를 많이 수집하고도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겨우 채취한 정액도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등 수사는 난항을 거듭했다. 당시 국내에는 DNA 검사를 할 시설이 없어 정액 샘플을 일본에 보냈는데 DNA 패턴을 기록해 두지 않고 용의자의 샘플이 보내질 때마다 새로 검사를 한 탓에 몇 번 하고 나니 샘플이 없어졌다.
이 사건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살인의 추억에는 각색된 부분이 많은데, 영화에서는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범인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범인은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나 6가닥의 머리카락 등 상당한 증거를 남겼다. 오히려 현장의 용의주도하지 못한 흔적, 타깃을 위협할 때 욕설을 자주 사용하는 등 저속하고 낮은 어휘력 등을 감안하면 범인은 지능이나 학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건 현장이 야외이고, 사건 수일이 지나서 사체를 발견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증거들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발견되어 알아볼 수 없게 변질된 경우가 많았고 빗물에 씻겨 내려간 것도 많았다. 게다가 증거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인력도, 장비도, 노하우도 부족했다.[19]
영화에서는 비가 오는 날에만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실제로 비가 오는 날에 발생한 사건은 2건 정도라고. 우리나라는 여름철에 강수량이 집중되는데, 오히려 알려진 속설과 정반대로, 실제 사건에서 범인 이춘재는 여름철 6~8월에는 범행을 대체로 참다가 가을, 겨울, 봄에 거의 대부분의 범행을 저지르는 패턴이 있었다. 여름에 범행을 저지른 건 수십건 중 한두 건 정도다.
이 사건은 대표적인 미제사건이었던 지라 범인이 철저한 지능범이자 능력자처럼 오인되기도 했으나, 범인 이춘재는 지능범과는 거리가 먼 단순 변태 살인마였다. 시신 유기도 잠깐 덮어 놓은 정도에 그쳤기에 금방 발견되었고, 무엇보다 7차 사건 당시 범행을 저질러 온 몸에 흙이 묻은 상태에서 텅텅 빈 버스를 홀로 타고 올 정도로 용의주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범행 후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것이 범죄자의 상식인데, 버스 엔진구에 흙발을 올리는 바람에 거친 욕까지 하면서 기사와 다투기도 했다. 그 외에 차 바닥에 침을 탁탁 뱉고 라이터까지 빌렸으며, 범행 직후 홀로 탄 버스에서 버스 기사에게 마치 자신을 알아 달라는 듯이 각인시키는 등 조심성이 전혀 없는 인물이었다. 결국 이 버스의 기사와 안내양에 의해 그동안 알려진 몽타주가 작성된 건데, 이춘재가 그간 안 잡힌 것은 사건 장소가 외딴 시골인 데다가 피해자가 모두 살해당해 목격자가 없었기 때문이지 요즘 같은 시대였다면 첫 범행만에 잡혔을 것이다.
이 사건은 한국에 제대로 된 과학수사 시스템이 자리잡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범인은 잡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 사건 공소시효가 2006년경에 만료되었다. 2000년 8월 8일 이후 살인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전면 백지화되긴 했으나 이 사건은 소급 적용하지 않는다.
공소시효 만료 직전인 2006년 검찰내부 통신망에 "피의자를 성명불상자로 기소하자"는 의견이 올라왔었다고 한다. 이성윤 부부장검사가 이런 제안을 했는데 피의자를 성명불상자로 재판에 넘기면 재판부가 소송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결할 때까지 15년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고. 김욱준 현 순천지청장도 용의자의 DNA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동종 전과자와 DNA를 대조하면 진범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 의견에 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특정되지 않은 피고인을 기소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고 법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무의미해진다는 검찰 내부의 반대로 결국 이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화성사건의 유력용의자가 나타난 이후 김욱준 지청장은 지금이라도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로 피고인을 특정하는 현행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DNA 등의 생체정보로 피고인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3.1. 몽타주
당시 제작된 몽타주 |
7차 사건 이후 당시 버스 기사와 안내양의 증언에 따라 처음으로 몽타주가 작성되었다. 당시 한 20대 남성이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손을 흔들어 버스에 탔으며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바지 무릎 아래부분과 신발이 흠뻑 젖어 있어 수상해 보였다고 증언했다. 버스 기사는 이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후 범행 현장에서 400m를 이동한 흔적이 발견됐고 그 흔적이 끝나는 장소가 당시 남성이 버스에 올라탄 장소와 동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은 당시 마을에서 버스를 탄 사람이 없다는 점, 옷이 젖어 있다는 것은 농수로나 풀밭을 헤치고 나왔다는 증거라고 보고 이 남성을 유력 용의자로 판단하고 몽타주를 만들었다. #
경찰은 목격자 진술에 의해 용의자가 20대 중반의 남성, 신장은 약 165~170cm 정도의 호리호리한 체형에 손이 매우 부드럽고 우측 소지의 봉숭아물을 들였으며[20] 혈액형은 B형이라고 추정했다.
진범인 이춘재는 2019년 기준 56세(1963년생), 1988년 첫 살인 범행 당시 25세, 마지막 범행을 일으켰을 당시 28세였으므로 경찰의 추리가 들어맞았다. 이춘재의 실제 체격은 키 173cm, 체중 71kg으로 경찰의 추리보다는 큰 체격이었다. 단, 이것은 50 중반이 넘었던 이춘재가 나이살을 먹고 펑퍼짐해진 것으로 그의 고등학교 앨범 사진을 보면 호리호리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평소 구부정한 모습'이라 적혀 있는데 이것 때문에 실제 키보다 작게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춘재는 B형이 아닌 O형이며, 사건 담당 형사는 인터뷰에서 수사팀이 범인을 B형으로 확정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후 MBC 실화탐사대에서 처음으로 이춘재의 얼굴이 공개되었는데 비교적 유사한 얼굴이다. 수감되었던 부산교도소에서도 이춘재의 얼굴이 몽타주와 닮았다며 혹시 화성 연쇄살인범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
용의자의 친모 역시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들과 많이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춘재의 모친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이 몽타주를 처음 본 것은 물론 당시 마을 어디에도 이런 수배전단이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없으며 마을에 경찰이 왔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자신의 집에는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한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춘재는 과거 경찰조사를 3번이나 받은 적이 있어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이후 경찰은 안내양 엄모 씨를 상대로 법최면 조사를 실시했고 당시와 비슷한 증언을 얻어냈다. 경찰은 이를 통해 새로 몽타주를 그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 안타깝게도 같은 목격자였던 버스기사 강 씨[21]는 몇 년 전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4. 33년 만의 진범 확인
2019년 9월 18일, 진범으로 추정되는 용의자가 확인되었다. 원래 9월 19일 오전 9시 30분에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자체 브리핑에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채널A가 방송상으로 특종 보도했고 이후 다른 언론사들도 일제히 보도하면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채널A가 엠바고를 어기고 하루 일찍 보도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KBS 박대기 기자의 트윗에 따르면 보도에 엠바고는 없었다고 한다. 2019년 7월 15일 새로 개발된 잔사 DNA 증폭 및 복원 기술로 사건 현장에 남겨진 증거품에서 새로운 DNA를 뽑아내었고 그걸 토대로 교도소 수감자들의 DNA 데이터 베이스와 대조하던 중 일치 판정이 떴다.[22]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56)는 1994년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이듬해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23] 20년 이상 부산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무기징역수다. # 그간 경찰은 수십 건의 첩보를 바탕으로 2019년 7월 이춘재를 특정하고 두 달간 진범인지의 여부를 조사하였다.
SBS의 추가 취재에 의하면 경찰이 국과수에 의뢰한 9차(1990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가 이춘재의 것으로 확인되자 경찰이 추가로 감정을 의뢰했고 5차(1987년), 7차(1988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도 이춘재의 것과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경찰은 9월 19일에 2, 3, 4차 사건의 증거물도 국과수에 의뢰했다.
사건 담당 파견 형사였던 하승균[24]•김복준 전 형사들의 용의자 확정 직전 인터뷰 영상. |
국과수는 2019년 9월 19일 경찰로부터 4차 사건 증거물 20여 점을 넘겨받았는데, 이는 피해자의 옷가지와 손수건, 메모지 등이다. 증거물의 갯수가 많기 때문에 이전 증거물 조사에 걸린 1~2주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 결과가 도출되는 데는 수주가 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경찰은 지난 7월부터 10차 사건 증거물부터 순차적으로 의뢰를 했는데 6차 사건 증거물은 의뢰하지 않아서 6차 사건 증거물이 훼손되거나 소실된 게 아닌가라는 추측도 나왔다. 경찰은 일단 수사 중인 사항이기 때문에 나중에 밝히겠다는 입장을 표했다. #
2019년 10월 1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이 사건 수사본부는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4차 사건의 증거물에서도 이 씨의 DNA가 검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이 이춘재가 자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춘재는 사건 당시 23세~28세였으며 사건 당시 화성군에서 살았다. 심지어 잡을 기회가 3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경찰 조사에서 모두 풀려났다고 한다. 1986년 8월 발생한 초등생 강간사건과 1988년 9월 8차 사건, 1989년 7월 발생한 초등생 실종사건 등 3건의 사건과 관련해 용의선상에 올랐다. 하지만 6차 사건 이후에 발생한 1986년 강간사건 당시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다. 이후 1988년 8차 사건 때는 경찰이 이춘재의 음모를 수거해 국과수에 감정 의뢰까지 했지만 ‘현장음모와 혈액형[26] 및 형태적 소견이 상이하다’는 결과를 통보받고 또다시 수사를 접었다. 1989년 초등생 실종사건과 관련해서도 6차 사건에서 확인된 용의자 족장(255㎜)과 이춘재의 족장(265㎜)이 불일치하는 이유로 용의선상에서 배제됐다. # #
이후 경찰은 당시 가장 핵심 목격자 2명을 대상으로 최면 조사를 실시했는데 둘 다 이춘재의 사진을 보고 범인으로 지목했다. 한 명은 7차 사건 당시 버스에 탄 용의자를 보고 버스 기사와 함께 몽타주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 버스 안내양 엄 씨[27], 다른 한 명은 9차 사건의 피해자가 사망하기 전 한 양복입은 남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던 41살 전 씨다. #
다른 목격자들도 나왔는데 9월 27일에는 3차 사건 당시 범인과 마주친 것 같다는 목격자가 나왔다. 당시 화성에 살고 있던 제보자는 한밤 중에 공용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어떤 남성이 따라들어왔고 제보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도망갔다고 한다. 제보자는 자신이 당시 장발에 여성 스웨터를 입고 있어 여성으로 오해한 것 같다고 하며 그 사람의 얼굴이 이춘재와 비슷해 보였다고 이야기했다. JTBC 뉴스룸의 2019년 9월 30일 보도에 의하면 1984년 여름무렵에 수원 세류동에서 당시 9살 초등학생이었던 A씨가 이춘재를 닮은 남자에게서 흉기로 위협을 당했다는 증언을 했다고 한다. 당시 A씨는 집 앞 골목에서 놀고 있었는데 칼을 든 남성이 갑자기 달려들었고 어른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니 풀어 줬다는 것이다. 이후 A씨는 화성연쇄살인사건 몽타주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자신을 위협한 남성이 몽타주와 닮았다는 것. 당시 A씨의 기억 속 남자와 몽타주 속 남성의 유일한 차이점은 짧은 머리였다고 한다. # 물론 30년도 전의 일이라 기억의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이 증언을 가볍게 무시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다. 여고생이 살해된 화서역 인근,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여고생이 잔혹하게 살해된 오목천동,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세류동은 모두 수원역을 중심으로 한 반경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춘재는 1984년 당시 군복무 중에 있었기에 가능성이 낮기는 하다. 휴가 중 나와서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1. 자백
이춘재가 자백 과정에서 직접 적은 자신의 범죄 목록 '12+2'에서 12는 화성과 수원에서, 2는 청주에서 한 살인을 뜻한다. |
이춘재는 용의자 특정 이후 이어진 8차 조사까지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으나 2019년 10월 1일 처음으로 범행 내용을 자백했다. "화성살인 포함 14건, 모두 내가 저질렀다" 초기 발표는 모방범죄인 8차 사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으며 이외에도 5건의 추가범죄에 대해서도 자백했다.'고 되었으나 실제로는 8차 사건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으며 그럼에도 경찰이 임의로 '8차 사건을 제외하고 자백'했다고 발표한 것에는 경찰의 모종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보인다.[28]
경찰은 이춘재가 특정된 18일 이후 매일같이 대면조사를 진행했다. 전국에서 선정한 베테랑 프로파일러 9명이 10차례 조사를 실시하면서 심리적 방어감을 허무는 동시에 DNA 등의 증거물로 계속 압박수사를 진행했다. 이때 동원된 프로파일러 중에는 연쇄살인마 강호순에게 자백은 물론 여죄까지 끌어내는 큰 공헌을 세웠던 공은경 경위, 정남규 사건 당시 고도의 프로파일링 기술로 자백을 이끌어낸 권일용 프로파일러 등이 있었다고 한다. # 프로파일링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예시가 나온 셈이다.
이춘재는 자백 직전 여성 프로파일러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손이 참 이쁘시네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 “손 좀 잡아 봐도 되느냐”고 물었고, 프로파일러는 “조사가 마무리되면 악수나 하자”고 응대했다. 추후 8차 재심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춘재는 자백 당시 “왜 프로파일러의 손을 만졌냐”는 박 변호사의 질문에 “손이 예뻐서 그랬다. 나는 얼굴이나 몸매는 보지 않는다. 손이 예쁜 여자가 좋다”는 답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범행 대상도 손과 관련이 있나”는 질문에는 “그런 거와 관련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추후 수원지방검찰청 전담조사팀이 재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이춘재의 자백 경위와 과정이 전문 공개되었다. #
다음은 이춘재가 검찰 조사에서 본인이 자백을 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문답 내용 전문이다.
답: 2019년 9월 18일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수사접견이 왔다고 하여 제가 교도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봤는데, 경기도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경기도에서 수사접견 올 것은 화성 사건밖에 없기 때문에 ‘화성 사건 때문에 왔구나’라고 직감했습니다.
수사 접견을 가보니 경찰관 4명과 여자 3명, 총 7명이 왔고 경찰관이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왔다고 하며 ‘화성연쇄살인사건’ 중 3건의 범행현장 증거물에서 나온 DNA와 저의 DNA가 일치된다며 ‘화성연쇄살인사건’ 10건 중 1건은 모방범죄로 해결됐는데 DNA가 나온 3건을 포함해 나머지 9건을 제가 한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문: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답: 저는 처음에는 모르쇠로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경찰관이 수사를 받을 건지 물어봤는데 수사를 안 받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여자분들과 이야기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형사들이랑 여자들이 왜 왔지’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여자들이 ‘프로파일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첫날은 ‘프로파일러’도 안 만나겠다고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경찰들이 가고 나서 DNA가 나오지 않은 나머지 살인사건과 제가 했던 강간 건은 밝혀질 수 없는 부분이므로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되나 고민했습니다. DNA 가져온 것만 이번에 자백하면 경찰들이 나머지 사건도 저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나머지 사건도 추후 DNA를 검출해 가지고 오게 될 텐데 우선은 DNA 나온 것만 인정하고 나중에 다른 사건에서 DNA가 나오면 그때 인정해서 형사들을 골탕 먹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문: 모방범죄로 마무리되었다는 건은 어떤 생각을 했나요.
답: 담당형사, 피해자, 검사도 걸려 있는 사건이고 제가 했다고 말하더라도 말 한마디로 30년 전 사건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미제 사건 같은 경우 증거물을 남겨 뒀을 텐데 해결된 사건은 증거물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저의 기억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기억도 한계가 있으므로 저의 말만으로 안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오픈을 하는 과정에서 결과가 바뀌지 않으면 아닌 걸 제가 맞다고 한 거밖에 안 된다는 부분도 생각했고, 전부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국 모방범죄 1건은 제 입장에서는 해결이 안 되고 평생 끌고 가야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그 다음날은 어떻게 되었나요.
답: DNA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99.9% 확실한 건데 제가 DNA 나온 사건에 대해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제 범행은 맞기 때문에 당시 생각은 제가 했던 14건 범행 중 어디까지 진술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습니다. 다음날 경찰관이 왔고 처음에는 어떤 범행에서 DNA가 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어떻게 조사가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서 일단은 조사를 받겠다고 동의했습니다.
경찰관이 국과수에서 온 자료를 보여주며 3건의 범행 현장에서 저의 DNA가 나왔다고 했고 3건이 제가 한 게 아니냐고 물어봤는데 이때도 처음에는 제가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조사가 2시간 정도에 끝나고 형사들의 조사는 마무리됐는데, 조사가 끝나고 형사들이 ‘여자분들 만나서 얘기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여자들하고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냐고 했는데 계속 권유하여 여자들하고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후 형사들은 나가고 여자 3명과 대화했는데 형사들하고 다르게 사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고 분위기 자체가 달랐고 좋은 이야기도 해주어 저의 마음이 조금 풀리고 안정됐습니다. 이후 1시간 정도 대화하다가 그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문: 그 다음날은 어떻게 되었나요.
답: 그 다음날 점심 이후 여자 3명이 먼저 들어오고 형사들이 들어가도 되냐고 해서 형사들은 제가 못 들어오게 하고 여자 3명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프로파일러들과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예전 저의 어렸을 때부터 성장과정, 고등학교를 떨어진 얘기, 저의 막내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었던 이야기도 하면서 오후 4시간 동안 내내 저의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저에 대해 위로도 해주어 저의 마음이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DNA 나온 부분만 인정한다고 해서 제가 괜찮은 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 털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이거나 저거나 죽일 놈 되는 건 똑같다’고 생각해 제가 범한 범행 전부를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전부 다 말하기로 결심하고 여자 3명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해서 ‘살인 12+2, 강간 19, 미수 15’라고 쓰고 프로파일러에게 전달했습니다.
문: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답: 제가 메모한 내용을 여자들에게 건네자 처음엔 여자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9건에 대해서만 인정해야 하는데 12건에 2건까지 더해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자들에게 모방범죄로 인정된 화성연쇄살인 8차사건도 ‘내가 한 거다’라고 하면서 “모방범죄라고 돼 있는데 아닌 걸로 밝혀지면 경찰들이 곤란한 거 아니냐”고 물어보고 제가 “곤란하면 안 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는데, 저 앞에 있던 여자 공은경 팀장님이 “그런 것은 상관없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이춘재 씨가 한 게 맞다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메모해 준 사건의 대략적인 위치 등을 설명해주고 위 위치에서 일어난 경찰에서 파악하고 있는 기록을 가지고 오면 제 기억과 기록을 맞춰보자고 하여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문: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답: 그 다음주에 형사들이 살인 14건을 가지고 왔는데 제가 기억하는 장소와 상황들을 얘기하면 형사들이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건들과 검토하며 사건을 하나씩 체크했습니다.
문: 당시 형사들이 가지고 있던 사건 기록을 진술인에게 보여줬나요.
답: 절대 안 보여줬습니다. 제가 하도 기억이 안 나고 자꾸 물어봐서 ‘물어보지만 말고 보여달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절대 안 보여줬습니다. 형사들이 보여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경기대학원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이춘재는 성도착증으로 연쇄 성폭행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렇게 성적인 관심이 많은 사람이 20여 년간 교도소에 있었다. 그러다 수사관을 떠나 여성과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생기니 그것만큼 흥분되는 일이 없었을 거다. 그렇게 자리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말린 거다. 결과적으로 그런 부분을 수사팀이 굉장히 열심히 분석하고 준비해서 공략한 게 성공한 것 같다. 심리적인 방어선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진술을 해도 사형 가능성이 없고 처벌받지 않는다’는 설득에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수사 접견을 가보니 경찰관 4명과 여자 3명, 총 7명이 왔고 경찰관이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왔다고 하며 ‘화성연쇄살인사건’ 중 3건의 범행현장 증거물에서 나온 DNA와 저의 DNA가 일치된다며 ‘화성연쇄살인사건’ 10건 중 1건은 모방범죄로 해결됐는데 DNA가 나온 3건을 포함해 나머지 9건을 제가 한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문: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답: 저는 처음에는 모르쇠로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경찰관이 수사를 받을 건지 물어봤는데 수사를 안 받겠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여자분들과 이야기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는 ‘형사들이랑 여자들이 왜 왔지’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여자들이 ‘프로파일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첫날은 ‘프로파일러’도 안 만나겠다고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경찰들이 가고 나서 DNA가 나오지 않은 나머지 살인사건과 제가 했던 강간 건은 밝혀질 수 없는 부분이므로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되나 고민했습니다. DNA 가져온 것만 이번에 자백하면 경찰들이 나머지 사건도 저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나머지 사건도 추후 DNA를 검출해 가지고 오게 될 텐데 우선은 DNA 나온 것만 인정하고 나중에 다른 사건에서 DNA가 나오면 그때 인정해서 형사들을 골탕 먹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문: 모방범죄로 마무리되었다는 건은 어떤 생각을 했나요.
답: 담당형사, 피해자, 검사도 걸려 있는 사건이고 제가 했다고 말하더라도 말 한마디로 30년 전 사건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미제 사건 같은 경우 증거물을 남겨 뒀을 텐데 해결된 사건은 증거물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저의 기억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기억도 한계가 있으므로 저의 말만으로 안 바뀔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오픈을 하는 과정에서 결과가 바뀌지 않으면 아닌 걸 제가 맞다고 한 거밖에 안 된다는 부분도 생각했고, 전부 이야기하지 않으면 결국 모방범죄 1건은 제 입장에서는 해결이 안 되고 평생 끌고 가야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 그 다음날은 어떻게 되었나요.
답: DNA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99.9% 확실한 건데 제가 DNA 나온 사건에 대해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제 범행은 맞기 때문에 당시 생각은 제가 했던 14건 범행 중 어디까지 진술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습니다. 다음날 경찰관이 왔고 처음에는 어떤 범행에서 DNA가 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어떻게 조사가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서 일단은 조사를 받겠다고 동의했습니다.
경찰관이 국과수에서 온 자료를 보여주며 3건의 범행 현장에서 저의 DNA가 나왔다고 했고 3건이 제가 한 게 아니냐고 물어봤는데 이때도 처음에는 제가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조사가 2시간 정도에 끝나고 형사들의 조사는 마무리됐는데, 조사가 끝나고 형사들이 ‘여자분들 만나서 얘기 좀 해보라’고 했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여자들하고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냐고 했는데 계속 권유하여 여자들하고 이야기를 하게 됐습니다.
이후 형사들은 나가고 여자 3명과 대화했는데 형사들하고 다르게 사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않고 분위기 자체가 달랐고 좋은 이야기도 해주어 저의 마음이 조금 풀리고 안정됐습니다. 이후 1시간 정도 대화하다가 그 다음날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문: 그 다음날은 어떻게 되었나요.
답: 그 다음날 점심 이후 여자 3명이 먼저 들어오고 형사들이 들어가도 되냐고 해서 형사들은 제가 못 들어오게 하고 여자 3명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프로파일러들과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예전 저의 어렸을 때부터 성장과정, 고등학교를 떨어진 얘기, 저의 막내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었던 이야기도 하면서 오후 4시간 동안 내내 저의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저에 대해 위로도 해주어 저의 마음이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DNA 나온 부분만 인정한다고 해서 제가 괜찮은 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 털고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이거나 저거나 죽일 놈 되는 건 똑같다’고 생각해 제가 범한 범행 전부를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전부 다 말하기로 결심하고 여자 3명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해서 ‘살인 12+2, 강간 19, 미수 15’라고 쓰고 프로파일러에게 전달했습니다.
문: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답: 제가 메모한 내용을 여자들에게 건네자 처음엔 여자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9건에 대해서만 인정해야 하는데 12건에 2건까지 더해서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자들에게 모방범죄로 인정된 화성연쇄살인 8차사건도 ‘내가 한 거다’라고 하면서 “모방범죄라고 돼 있는데 아닌 걸로 밝혀지면 경찰들이 곤란한 거 아니냐”고 물어보고 제가 “곤란하면 안 할 수도 있다”고 얘기했는데, 저 앞에 있던 여자 공은경 팀장님이 “그런 것은 상관없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이춘재 씨가 한 게 맞다면 그것을 이야기하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메모해 준 사건의 대략적인 위치 등을 설명해주고 위 위치에서 일어난 경찰에서 파악하고 있는 기록을 가지고 오면 제 기억과 기록을 맞춰보자고 하여 다음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문: 이후 어떻게 되었나요.
답: 그 다음주에 형사들이 살인 14건을 가지고 왔는데 제가 기억하는 장소와 상황들을 얘기하면 형사들이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건들과 검토하며 사건을 하나씩 체크했습니다.
문: 당시 형사들이 가지고 있던 사건 기록을 진술인에게 보여줬나요.
답: 절대 안 보여줬습니다. 제가 하도 기억이 안 나고 자꾸 물어봐서 ‘물어보지만 말고 보여달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절대 안 보여줬습니다. 형사들이 보여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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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일, 경찰은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과 강간미수 사건에 대해 자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
경찰은 이춘재의 추가 범행 주장이 사실인지 사실관계 및 여죄 여부를 면밀히 따져 보겠다고 밝혔다. # 범행에 대한 검증 과정이 끝나면 그동안 33년을 끌어온 이 미제사건이 마무리될 뿐만 아니라 그동안 화성과 수원 및 청주에서 발생한 수많은 미제사건들 역시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단, 사실관계 확인은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일단 사건 수만 해도 최소 40개 이상인 데다가 거의 대부분이 30년도 넘은 일이라 이춘재 본인도 많이 가물가물했기 때문이다. 대신 일부 사건은 비교적 정확히 기억했는지 그림을 직접 그려주면서 설명했다고 한다. # 또 당시 미제로 끝난 사건과 이춘재의 주장을 일일이 대조해 봐야 하는데 피해자가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경우 사건 자료 자체가 없으니 대조 역시 불가능하다.
이춘재가 저질렀다고 주장한 사건들은 1986년~1991년 사이 일어난 기존 화성 연쇄살인 사건 9건, 같은 시기에 화성에서 저지른 추가범행 3건, 1993년 4월 이사온 후부터 처제 살인건으로 잡힌 1994년 1월 이전 사이에 청주에서의 2건의 추가범행이며 30건의 추가 범죄에 대해서는 사실관계 확인 후 공개하겠다고 경찰은 밝혔다. #
2020년 7월 2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기자 회견을 열고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종합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경찰은 이춘재가 자백한 48건의 범죄 중, 14건의 살인 사건과 9건의 성폭행 사건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추가로 밝혀진 살인 사건 4건은 1987년 12월의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 1989년 7월의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 1991년 1월의 청주 여공 강간 살인사건, 1991년 3월의 청주 남주동 주부 살인사건[29]이다.
4.2. 8차 사건의 진범 논란
자세한 내용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8차 문서 참고하십시오.이춘재 연쇄살인의 8차 살인 사건은 1988년에 용의자가 잡혀 유죄로 처벌받았는데 2019년 이춘재가 해당 사건의 진범이 과거 처벌받은 용의자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자백해 진범에 대한 논란이 생겼고 재심 결과 8차 사건의 용의자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5. 범인 이춘재
자세한 내용은 이춘재 문서 참고하십시오.6. 논란
- 진범이 자백한 시점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이춘재에 대한 처벌이다. 용의자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진다고 해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연쇄살인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용의자가 이미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기 때문에 가석방 신청을 모두 불허하는 방법으로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있다. 참고로 무기징역은 20년 이상 복역하면 가석방 신청 요건이 된다. 만약 진범이라면 가석방을 해줄 경우 피해자 유족의 반발 등을 비롯해 비난 여론이 거세질 게 분명하기에 가능성은 매우 낮은 편. 또 가석방 심사요건 중에서 재범의 위험성도 대상이다. 연쇄살인범인 이상 재범의 위험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가석방 부적격 결정 사유가 된다. 그리고 경북북부제2교도소(슈퍼맥스급 교도소[30])나 경북북부제2교도소에 준하는 다른 교도소로 이감될 가능성도 생겼는데 처벌은 할 수 없지만 상위 등급의 다른 교도소로 이감시키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춘재가 교도소에서 추가로 잘못한 것은 없었고, 25년간 모범수였기도 하고, 공소시효가 지난 살인 사건을 명분으로 처우를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1년 가량 수원구치소에서 조사한 뒤 최종 결과를 발표하고 나서는 다시 부산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춘재의 안전보장을 명분으로 독방에서 다른 재소자들과 접촉도 못하고 평생 혼자 복역하게 되었으니 나름 처벌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 프로파일러 서울디지털대 배상훈 교수는 한국 수사 시스템의 허술함 때문에 진작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범인을 못 잡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미 이춘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는 2011년에 추출되어 보관되어 있었으나 경찰 측에서 이걸 미제 사건들과 대조해보지 않아서 8년이나 늦게 특정이 되었기 때문.[31] 실제 이 때 왜 대조가 안 되었는지 따져서 책임질 사람들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처제 살인사건 당시 이춘재를 붙잡았을 때 조사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 역시 놓쳤다.[32]
- 용의자가 특정된 9월 19일 OCN에서 편성된 곡성을 살인의 추억으로 변경하는 공지를 올렸으며 YES24에서는 살인의 추억 블루레이 20% 할인 행사를 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심각한 살인사건을 너무 대놓고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피해자 유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 반면 영화는 당시에도 인정됐듯이 잘 만든 내용에 유가족들도 우호적이었고 영화 편성을 통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면 좋은 거 아니냐는 옹호 의견도 나왔다. 이후 OCN 측은 사회적 환기를 위한 편성이라고 해명했고 YES24 측은 특가 문구를 내렸다. #
6.1. 왜 혈액형을 B형으로 판단했나?
다만 DNA는 일치하는데 혈액형이 다른 건 극히 드문 경우고 당시에는 혈액형 검사 수준도 굉장히 열악하여 잘못 판정된 경우가 흔했다.[33] 때문에 옛날에 기재된 자료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논란이 일자 경찰 관계자의 언급으로 당시 수사에서 확실히 B형이라고 결론지을 만한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순히 B형이라고 추정한 정도였을 것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 용의자의 DNA 분석 작업을 한 강필원 국과수 법유전자과장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용의자의 혈액형이 B형으로 알려진 건 혈액이나 DNA에서 직접적으로 밝혀낸 게 아니라 유류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즉,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체 분비물에 이물질이 유입됐다거나 용의자와 피해자의 인체 분비물이 섞였을 수도 있으며, 그런 경우에는 양적 비율에 따라 혈액형이 원래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34]
또한 당시 수사팀장도 당시에 혈액형을 밝힌 적이 없으며 왜 B형이라고 알려졌는지 모르겠다고 발언했다. # 당시 첫 번째 피해자의 유전자 분석을 맡았던 이정빈 가천대 법의학과 교수[35] 역시 혈액형 타이핑이 처음부터 잘못되었거나 단백질 변질로 인한 미스 타이핑 가능성을 지적했다. #
문제의 B형 혈액형도 당시에 어떻게 조사가 된 건지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당시 알려진 혈액형과 달라서 용의자 수사를 안 했다는 식의 핑계만 댈 게 아니라 시스템적인 결함을 돌아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
용의자의 혈액형을 B형으로 판단한 사건은 5차, 7차, 8차(음모), 9차(정액), 10차(정액) 사건 등이다.
6.2. 용의자로 몰린 수많은 애꿎은 피해자들의 발생
- 명 모군(당시 16세): 1988년 1월 12일 수원 화서역 여고생 성폭행 살인사건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된 엿새 뒤인 1월 18일 경찰서 유치장에서 쓰러져 뇌사에 빠져 사망. 당시 형사들은 구타는 없었고 현장 검증 과정에서 중요 증거품인 시계를 찾으러 갔다가 수갑을 찬 채 도주하다 울퉁불퉁 얼어붙은 땅을 굴러서 일어난 사고라고 주장했다. # 하지만 병원 측은 명 군의 폐에 물이 차 있고 엉덩이와 발바닥에 피멍이 든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다고 밝혀 가혹한 구타와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점을 암시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때가 1987년 1월 14일이었으니 딱 1년 뒤에 일어난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당시 사회문제가 될 것을 우려한 경찰이 서둘러 명 군 사망에 연루된 수사 경찰들을 독직폭행치사로 기소함으로써 조용히 넘어갔다. 당시 처벌받았던 수사팀 관계자[36]는 이춘재의 존재가 드러나기 전까지 어느 사설탐정을 빙자한 인물[37]에게 '명 군이 화성 사건의 진범'이라며 또 다시 명백한 사자명예훼손 행위를 하였다가 2019년 이춘재가 유력 용의자로 떠오르자마자 '아니면 말고'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 빈축을 사기도 했으며, 위에 언급한 자칭탐정 송 모씨는 네이버에 카페를 개설해 현재까지도 여전히 명 군과 그 가족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이제 그 두 분의 공통된 특징은 결국 화성연쇄살인사건 범행현장 주변에서 사시는 분들이고 주변에서 생활하는 분이고 또 남자이고 또 대부분의 다른 용의자도 마찬가지지만 이 시대의 전형적인 서민들입니다. 그러니까 중소기업 다니거나 무직자이거나 취약계층인 것이고요. 따라서 이분들이 이런 연쇄살인 범인으로 지목되기 쉬웠고, 지목돼서 수사를 받을 때 논리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기 자신의 방어를 제때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조건은 아마 다른 용의자들도 대부분 다 비슷할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경찰이 좀 더 인권수사, 과학수사 쪽에 초점을 맞춰서 했더라면 그래도 그렇지 않았을 텐데 대부분 당시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무게와 중압감, 진범을 잡아야 된다 이런 것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수사 방식이 바로 불러다 일단 자백을 강요하고 자백할 때까지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 그렇게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칠준 변호사가 설명하는, 2, 7차에서 범인으로 몰렸던 박모씨와 4차와 5차의 범인으로 몰렸던 김모씨에 대한 영상. 내용 전문그런 과정에서 경찰이 좀 더 인권수사, 과학수사 쪽에 초점을 맞춰서 했더라면 그래도 그렇지 않았을 텐데 대부분 당시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무게와 중압감, 진범을 잡아야 된다 이런 것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수사 방식이 바로 불러다 일단 자백을 강요하고 자백할 때까지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 그렇게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박 모씨(당시 29세): 화성 지역에서 강간미수 혐의로 붙잡힌 사람. 화성 2차와 7차 사건의 용의자로 몰렸고, 경찰서 소속 목사(경목) 앞에서 자백한 내용이 녹화돼 그대로 방송 등으로 보도됐다. 김 변호사는 박씨의 변론을 맡았을 때 뭔가 이상했다고 바로 느꼈다고 한다. 화성사건의 범행 수법과 일시, 장소는 또렷하게 자백하면서도 자기 아들이 불과 일주일 전에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더라고. 접견 도중 박씨는 그에게 “위압적인 경찰의 태도에 겁이 나 거짓 자백을 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경찰은 박씨를 일주일 동안 붙잡아놓고 화성사건의 사진첩을 반복해 보여주며 범행 현장 등의 정황들을 외우게 한 뒤 거짓 자백을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박씨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 김 모씨(당시 41세): 4차(1986년 12월 14일)와 5차(1987년 1월 10일)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김 아무개 씨. 1993년 경찰은 김씨를 상대로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뒤 여의치 않자 풀어줬다. 김씨는 1995년 김칠준 변호사의 도움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이겼다. 그러나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란 명예를 벗지 못하고 고문 후유증과 우울증 등을 호소하다가 1997년 스스로 생을 내려놓고 말았다. 당시 경찰이 미국에 사는 한 심령술사의 제보만 믿고 화성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김씨에 대한 강압수사를 해 벌어진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김씨의 가족은 이후에도 “김씨가 화성사건 범인이다” “진범인 것을 숨기려고 아내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헛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김모씨를 범인으로 몰고 간 심령술사가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그곳에서 또 루머를 퍼뜨리며 가족까지 괴롭힌 것이다. 가족들은 명예훼손으로 민사 형사 소송을 하여 승소하였으나 해당 심령술사는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실제 형은 집행할 수 없었다. #
- 윤동일 군(당시 19세): 1990년 9차 사건[38]에서 용의자로 몰린다. 행실이 바른 청년이었지만[39] 가족이 실종으로 알 정도로 갑작스레 연행돼[40] 닷새 만에 물증도 없이 14건의 강간 및 강제추행을 저지른 범죄자로 둔갑하게 된다. 윤 군은 경찰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27번의 진술서를 쓰며 허위로 자백하지만, 현장검증 때 가족의 설득으로 돌연 형사가 무서워서 거짓 자백을 했다고 털어놓으며 현장검증을 거부했으며 DNA 검사 결과 극적으로 진범이 아님이 밝혀진다. 정상적인 경찰이라면 이때 윤씨를 즉각 석방하고 사과했어야 한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기 싫었던 화성 경찰은 윤씨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건으로 옭아매는 길을 선택했다. 9차 살인사건 발생 일주일 전 성추행당한 정 모 양 사건의 범인으로 윤씨를 옭아맨 것이다. 윤씨는 다시 시작된 폭행과 고문 위협에 못 이겨 정 양을 강제추행한 뒤 도망쳤노라고 허위 자백한 뒤 변호사 접견 과정에서 그 내용을 털어놓고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변호인 접견 보고서를 사실과 달리 조작해 작성한 뒤 법정에 제출했다. 그뿐이 아니다. 피해자가 윤동일씨를 대면한 뒤 범인이 아니라고 진술했지만 진술조서를 사실과 다르게 조작해 억지로 정 양의 지문을 찍게 해서 마치 피해자가 추행범을 윤씨라고 지목한 것처럼 만드는 악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별건 구속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3개월 만에 풀려났다. 풀려난 뒤에도 서슬 퍼런 권위주의 독재 시절 경찰의 고문 폭행과 사건조작 등 비위를 고발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라 억울함을 풀지 못했고,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던 중 결국 1997년 암으로 요절하였다.[41] 7년간의 투병에 치료비로 온 가족이 가산을 탕진했고, 결국 경제적으로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그의 유족들은 30년이 흐른 시점에도 가난 속에 살고 있다. #
- 박 모씨(당시 49세): 9차 사건 피해자 김 양이 살던 마을 인근에 거주하던 언어장애인. 사망한 당일인 1990년 11월 15일 최초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됐다. 언어장애인인 그는 범행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하며 며칠 동안 고초를 겪다가 국과수 혈흔 감정이 나오고 나서야 풀려났다.
- 이 모군(당시 17세): 90년 11월 17일 서울 구로공단에서 과도를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니던 중 경찰 불심검문에 걸려 강도예비 혐의로 유치장에 구금됐다. 경찰은 이 군의 주거지가 화성으로 나오자 그를 화성경찰서로 인계했다. 수사본부에서는 청바지 안에서 여자 머리카락 한 가닥과 솔잎 등이 나왔다는 이유로 이 군을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몰아붙이며 강도 높게 조사했다.
- 강상규 씨(당시 19세): 90년 11월 20일 경찰에 연행돼 9차 사건 범인으로 추궁당했다. 경찰은 강씨에게 ‘잠 안 재우기 고문’을 하면서 “피해자를 왜 죽였느냐. 네가 죽인 걸 본 사람이 많다. 순순히 불어라”라고 추궁했다. 강씨가 부인하자 경찰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쳐 전치 3주의 부상을 입혔다.
- 차 모씨(당시 38세): 태안읍 능2리의 가구공장 노동자로, 90년 11월 27일에는 수사본부에 연행돼 자백(?)을 강요당했다. 혹독한 고초를 당한 뒤 경찰에서 풀려난 차씨는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경찰에 고발했다. 나는 억울하다”라고 외치며 맨발로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결국 같은 해 12월 18일 병점역 근처 철길에서 부산발 서울행 새마을호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 박 모씨(당시 33세): 태안읍 진안리 공장 노동자로, 12월 16일 수사본부에 연행돼 이틀 동안 폭행과 잠 안 재우기 고문에 시달리며 9차 사건에 대해 추궁을 받았다. 경찰은 “너는 여중생 살인범이다. 거짓말탐지기로 네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라며 자백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두 눈을 테이프로 감은 뒤 젊은 여성을 동원해 “저 사람이 범인이다”라고 지적하게 한 뒤 자백을 강요하고 음모를 채취했다.
- 김 모군(당시 18세): 태안읍 병점 거주자. 12월 11일 태안지서로 연행된 김 아무개 군은 경찰의 가혹행위로 머리, 등, 손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어머니의 항의로 풀려난 뒤 병원 치료를 받았다. 이때 경찰에서 찾아와 치료비로 쓰라며 3만원을 주고 갔다. 어머니는 아들이 당한 고문 흔적을 사진으로 찍고 경기도경찰청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경기도경은 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한 김 군을 연행한 화성경찰서 김 아무개 경위, 유 아무개 경사, 유 아무개 경장을 불러 가혹행위 여부를 조사하지만 경기도경은 조사 경찰관들이 김 군의 뺨을 서너 대 때린 것뿐이라며 고문과 가혹행위를 축소했다.
- 김 모씨(당시 41세): 1993년 8월 3일 흉기로 자신의 배를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동수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중태에 빠졌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화성 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화성경찰서 수사본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 처지에서 가정이 파탄 날 지경에 몰리자 자살 시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 윤성여 씨(당시 22세): 최대의 피해자. 수사 단계에서 풀려나거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들도 엄청나게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사람은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무려 20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윤씨는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한 것이라며 줄곧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해 오다가 2008년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는데 이춘재가 8차 사건도 자신의 짓이라고 자백하자 바로 재심을 신청했다. 경찰도 이춘재가 8차 사건의 범인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은 기정사실이고 재심을 맡은 재판부 역시 이례적으로 공판도 하기 전에 미리 잘못된 재판에 대해 사과했다. 재심에서 피고인의 억울함을 명확히 입증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문 경찰과 감정서를 조작한 국과수 등을 탈탈 털었다. 결국 32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후 법원은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동안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윤성여 씨(55세)에게 국가가 18억7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 용의자로 지목됐던 이들 중 자살한 사람도 4명이나 됐다는 기사가 있다. # 위에도 썼듯 9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3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던 차 씨는 1990년 3월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병점역 철길에서 달리는 새마을호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1991년 4월에는 10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조사받던 장 씨(당시 32세)가 아파트 4층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다.
- 용의자들 뿐만 아니라 당시 수사에 참여한 경찰들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김 모 치안감, 장 모 수사과장, 송 모 서장 등 많은 사람들이 수사 일선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어 과도한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숨지거나 자살을 선택했다. 최모 순경은 1999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다만 이 사람은 8차 사건 무마와 억울한 사람 누명 씌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가해 형사였고 생사람 잡은 대가로 특진까지 한 뒤 10여년간 부귀영화를 누리며 평안히 살다 간지라 그다지 동정의 여지가 없다.
- 8차 사건의 용의선상에 오른 강모씨(당시 16세)는 그저 피해자의 언니와 같은 학교[42]를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서 진술해야 했다고 한다. 훗날 이 강모씨는 경찰이 되어 화성 연쇄살인 사건 수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위와 같이 사건 용의자들과 수사 담당자들 상당수가 이상하게 죽어 가자 이른바 '화성 괴담'이라는 말도 생겨났는데 이러한 무고한 사람들의 누명과 이후의 안타까운 행적, 수사 관계자의 급사는 오늘날에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크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법 감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멍석말이처럼 순간순간 치미는 분노의 화살을 특정인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네이버 뉴스나 다음 뉴스, 기타 SNS 등지의 각종 사건과 관련된 관련 댓글 반응을 보면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고 얼마든지 판결이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인데도 혐의자 혹은 참고인이 특정되었다는 대목에서 '딱 봐도 범인이 맞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사형시켜 버려라!' 등의 과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으며 기사 역시 용의자 단계에서 해당 인물의 신상을 세세히 기록하는 등 이러한 격앙된 반응을 유도하는 뉴스 역시 찾아볼 수 있다.[43] 이러한 잘못된 여론은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옹호하게 되는 셈이다. 이미 민주화가 달성된 1990년대에 무력한 한 개인이 수사기관에 의한 고문과 협박, 그리고 이후에 이어진 자신에 대한 세간의 소문 때문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
“정말 진실이 무엇인지 누가 범인인지보다는 우선 범인으로 믿을 만한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그러다보니 윤 군 뿐 아니라 무수하게 많은 용의자들에 대해서 무리한 강압수사와 고문들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무척 많이 발생을 했었죠”
표창원 당시 화성지역 기동대 소장(시사직격 인터뷰)
전술한 비극은 용의자 단계에서 섣불리 해당 인물의 신상과 얼굴 사진을 공개하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님을 나타내는 단적인 예시다. 또 무고죄의 경우 피무고인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고 법적으로도 그 책임을 규명하고 배상받기가 매우 어려운 구조다. 이는 비단 제도의 잘못만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그리고 정부 모두의 의식적 숙고가 필요한 문제이다.표창원 당시 화성지역 기동대 소장(시사직격 인터뷰)
이런 데에는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정부의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범죄 소탕 작전이 시작되고, 검거실적은 곧 점수로 환산되어 인사에 반영되었고 점수가 낮은 지휘관은 문책을 당하게 된 것이 크다. 궁지에 몰린 경찰은 무리한 수사를 강행해 인권침해사례가 속출한 것이었다. 수사본부를 꾸려 전국의 유능한 수사관들을 불러들이고 65만 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했지만 사건의 윤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피해자가 늘어날수록 초조해진 경찰은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꿈에 범인을 보았다는 심령술사(...)의 제보만으로 물증 없이 용의자를 범인으로 단정, 지하실로 끌고 가 일주일에 걸쳐 고문해 자백을 받아내기까지 했다. 범인을 어떻게든 검거해야만 했던 야만시대의 수사에 인권은 없었다.
“경찰서마다 사건 해결에 대한 실적표를 제시해놓고 경찰관 개인을 독려했던 성과주의의 폐해들이 많이 있었죠. 성과 만능주의가 결국 피의자에 대한 인권침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김상균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침해조사국 조사담당관
김상균 교수, 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침해조사국 조사담당관
진범 이춘재가 드러나면서 연쇄살인 사건이 다시 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고 동시에 당시 경찰의 민낯과 악행도 자세히 조명되어, 경찰은 34년만에 마침내 일련의 장기 미제 사건이 해결되었음에도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고개를 들지도 못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7월 2일,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은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모씨와 그의 가족, 경찰의 무리한 수사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이춘재를 수사 대상자로 선정해 수사하였음에도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면서 조기에 이춘재를 검거하지 못해 많은 희생자가 나오게 된건 경찰의 큰 과오였고 깊이 반성하고 사죄드린다"며 당시 허술한 수사 방식과 폭행·가혹행위로 인한 허위자백, 허위 진술서 작성 강요, 조서 작성에 참여하지 않은 참고인을 참여한 것처럼 허위의 공문서를 작성한 사실 등 위법 사실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사죄라는 말을 세번 했고 90도로 고개를 숙인 게 두 번이었다. 수사당국의 이러한 위법 인정은 이례적인 일인데, 그만큼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경찰은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과거의 잘못 때문에 이미지가 안 좋아졌다는 정도가 아니다. 고문이 없어진 것만 빼면 지금의 경찰이 과거 경찰과 달라진 게 대체 무엇인지 의문인 모습들을 스스로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 경찰이 저지른 잘못들을 밝히기는 했으나 거기까지였고, 제 식구 감싸기와 흑역사 덮기에 급급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고문 폭행 조작에 가담한 경찰관 다수가 공소시효를 핑계로 수사기관에 출석하지 않자 경찰은 수사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았고 피해자들이 사건 수사를 받을 당시의 관련 서류를 열람·등사 신청해도 대부분 거절당했다. 경찰이 시신 암매장을 저지른 사건조차 유골을 은폐한 경찰관들이 공소시효를 이유로 조사에 응하지 않자 형식적인 조사만 거쳐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혐의로 이들을 입건했지만 이 또한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공소권 없음’으로 끝이 났다. 특히, 경찰 때문에 살인이 실종으로 은폐되고 끝내 시신 없는 살인사건이 되어버린 끔찍한 사건에서조차 유족이 낸 소송에서 '국가에 의한 조직적 인권침해로 볼 수 없다', '청구권 소멸시효가 이미 지났다' 운운하며 어떻게든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억지 주장을 하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결국 피해자들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진화위는 출석 또는 동행을 요구할 권한을 갖고 있다. 경찰이 내놓지 않으려는 수사 자료에 대해 제출을 요구하는 권한도 행사할 수 있다. 이 같은 ‘강제’ 조사권을 발동해서, 무고한 시민을 상대로 야만적 국가폭력을 자행한 경찰관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벌여달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요구다.#
그리고 2022년 12월, 진실화해위는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불법체포·가혹행위·자백 강요·증거 조작 및 은폐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찰의 '짜맞추기식 수사'는 수사 초기 단계부터 시작된 것 당시 경찰은 범행 현장 인근에 거주하거나 배회했다는 내용의 제보를 받아 피해자들을 용의자로 지목하고는 구체적인 물증이나 목격자 진술이 나오지 않자 경찰은 피해자들을 추궁할 목적으로 별건의 강제추행이나 절도 등 혐의로 주민들에게 고소장을 제출하도록 한 것, 피해자들을 연행할 때도 미란다 원칙 고지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고, 연행 이후에는 잠을 재우지 않거나, 구타와 가혹 행위로 자백을 강요한 것, 혐의 없이 풀려난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일상적인 감시와 임의동행, 주변 탐문 등 과잉 수사를 이어간 것 등 모든 것을 공식 인정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이 행한 행위는 직권남용·불법체포·폭행·피의사실공표·공문서 위조 등에 해당하며 이를 알고 있던 담당 검사에도 직무유기를 적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으며, 이어 헌법에서 보장하는 피해자들의 인격권과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 데 대해 국가는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이들의 명예가 회복되도록 조처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아울러 인권친화적 수사지침을 정립하고 수사기관 내 인권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그리고 저 짓거리들을 저지른 가해 경찰들을 입건한다고 했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지 오래라 실질적인 처벌은 거의 불가능했다. 정년퇴직을 했다면 근정훈장[44]을 박탈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수는 있겠으나 공무원이라고 다 정년을 꽉 채우는 건 아니다.[45] 결국 입건만 되고 공소시효 만료로 불기소하거나, 옥살이하고 나온 사람이 무고한 것으로 드러났으니 그를 잡았다는 이유로 특진했던 것이 취소되는 등의 형식뿐인 처리로 끝. 언론에 이름 석자도 공개되는 일도 피하고, 정말 그걸로 끝이었다.
6.3. 주민들의 반응 논란
이춘재가 거주했던 마을 주민들의 일부 반응이 논란이 되었다. 이춘재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춘재는 마을에서 평판이 매우 좋았으며 이 때문에 처음 용의자로 잡혔을 때도 믿지 않는 주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처제 살인을 옹호하거나 심지어는 그럴만했다는 인터뷰 내용이 여러번 나와 논란이 됐다.
이춘재의 자백 전에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주민 중 하나가 절대 이춘재가 저지른 게 아니라며 "걔가 다 죽인 거 아니야. 걔 혼자 사람을 어떻게 여럿 죽여? 자기 처제나 죽였지. 안 그랬으니까 안 그랬다 그러지", "걔는 처제 하나밖에 안 죽였어"라고 말한 게 방송을 탔다. # 이후 방영분에 따르면 마을에서 이춘재가 아내가 바람을 펴서 죽였다는 소문이 돌아[46] "오죽하면 그랬겠나", "일시적인 감정으로 그랬을 거다. 가만히 있는 사람 죽였겠냐", "누명을 쓴 것 같다", "사람 한 명 죽인 건데 뭐 그렇게 대단해서 안 내보내주느냐"는 이야기가 마을에서 공공연히 돌았다고 한다. #
여담으로 더 나아가 이춘재의 모친이 사실 아들의 범죄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부에서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직접적으로 의혹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넌지시 생각할 여지를 주는 식으로 방영되었다.[47]
이에 대해서 네티즌들은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며 맹렬히 비난했다.
7. 분석
7.1. 용의자 특정 전
7.1.1. 그것이 알고싶다의 분석
그것이 알고싶다 초창기에 이 사건을 다루었고[48] 2011년 5월 7일 800회 기념 대한민국 미제 사건 특집 첫 번째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49] 당시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프로파일링과 사건 현장의 지리적 특성 분석을 통해 범인을 추적하고자 했다.그것이 알고싶다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지역 일대에서 연쇄강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연쇄강간 사건의 상세한 자료를 남기기는 했고, 일부 수사진은 연쇄강간 사건과 연쇄살인 사건이 한 맥락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 사건은 연쇄살인 사건에 가려 묻힌 듯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같은 지역에 비슷한 성향의 연쇄강간범과 연쇄살인범이 같이 있을 확률은 매우 낮다면서 동일범에 의한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연쇄강간 사건과 관련된 파일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사건에 기록된 범인의 신상 정보는 손이 부드럽고 욕을 잘하는 166~170cm 가량의 남자로 되어 있다. 당시 연쇄살인이 일어나던 시점에 발생했던 강간 사건 피해자의 증언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있었다.
또 범죄 시간대와 장소를 분석해 보면 범인은 수원시에 사는 남자로 시외버스를 통해 수원과 화성을 오가면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TV조선 보도에 의하면 범인이 이용한 시외버스는 수원에서 화성시 정남면을 오가던 수원여객 25번 시내버스로, 노선 선형이 범행 지역과 동선이 어느 정도 일치한다. 관련 기사
실제 7차 사건 때 화성에서 수원으로 가는 막차를 젊은 남자가 불러 세웠다. 이 때가 유일하게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목격된 시점이다. 당시 버스기사 역시 피해자들의 증언과 유사하게 욕을 잘하는 20대 중반 정도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다고 기억했다.[50] 그러나 실제로 특정된 용의자는 화성군 태생에 화성군 거주자로 밝혀졌다.
그리고 취재 결과 1987년 5월부터 1988년 9월 사이 범인의 범행이 이뤄지지 않은 공백기에 수원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1988년 1월 4일 수원 화서역 근처 야산에서 여고생이 스타킹, 팬티 등에 묶인 채 강간,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범행 수법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 매우 유사했으나 당시 수원과 화성경찰서 사이에 연계가 이뤄지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수원경찰서에서 이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한 인물이 2주 후 고문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담당 형사 3명이 처벌받고 관련 책임자들이 직위해제되어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용의자는 주변에서 불을 피우고 놀던 불량 청소년 명(M) 군[51]과 정(J) 군으로, 당시 형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은 자백도 했으며 사건 현장 약도도 제대로 그려냈다. 명 군의 경우 친구에게 당시 입었던 옷을 건네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또 고문으로 사망한 게 아니라 현장 검증 도중 명 군이 도망치다가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밝혔다. 정 군은 구속 당시 사람을 죽였다고 수감자들에게 털어놓자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해라"고 했고, 결국 이러한 수법으로 빠져나갔다고 한다. 물론 당시 담당 형사들의 주장인 만큼 100% 신뢰할 수는 없고, 이 소년들을 화성 사건과 연결시키기에는 다소 무리한 감이 있다. 사건 현장 약도를 제대로 그린 것은 평소에도 그 지역에서 불량하게 놀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범인은 이전에도 살인 미수 사건 등 여러 명의 목격자가 있었는데 2명 이상이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며 나이도 20대 중반이라고 했고 프로파일링 결과 조용하고 수줍은 타입이라고 나왔다. 물론 이들이 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뉴스를 보고 모방범죄를 저질렀거나 의도적으로 화성 사건과 비슷한 수법으로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제작진이 범인을 추정하기 위해 미국까지 직접 가서 유명 프로파일러들에게 관련 자료를 보여주었다. 프로파일링 결과 다양한 분석이 나왔는데 범인은 일단 무척 깔끔한 성격일 가능성이 높고, 성장 과정이나 일상에서 여성에게 억압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애인이 아닌 가족이나 보호자 위치에 있는 여성이 범인을 오랫동안 억압했을 것이라는 뜻.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나서도 가지고 노는 듯한 정황에서 볼 때 억압된 감정이 느껴진다고 한다. 실제로 유력 용의자로 밝혀진 이춘재의 자백에 의하면 초등학교 때 동네 누나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 애초 펫 브라운의 분석이 완전히 들어맞았기에 90년대 이후 경찰 내의 화성 이외 거주자로 헛짚은 기류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제작진은 당시 유일하게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목격한 버스 운전사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당시 20대 중반, 키는 166-170 정도[52], 손이 부드러운 남자이며 경찰 출신 프로파일러 말에 수원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몽타주를 3D로 재현하고 그의 현재 모습으로 추정되는 그림을 공개했다. #, #
7.1.2.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016년 9월 4일 방영되었다. 제작진의 추적 결과 9차 사건 범인으로 추정되는 DNA 감정서가 국과수에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고 목격자가 버스기사 이외에 22명이나 더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를 통해 새로운 몽타주가 공개됐다. 이 승객들이 만일 저 위의 망언을 일삼은 마을 주민들이라면 공범이나 다름없는 입장이다.그리고 7차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 집으로 퇴근하던 두 자매가 범인의 피습을 받았으나, 언니의 기지와 이웃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후 수원의 버스 정류장[53]에서 그 자매가 그때 자신들을 습격한 용의자를 보고 근처 파출소에 신고해 바로 순경들이 출동했다. 사실상 이것이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으나 순경들이 오자 그 자리에서 범인은 도주했다.
7.2. 용의자 특정 이후
2019년 9월 25일 MBC 실화탐사대에서 유력 용의자로 이춘재가 지목된 후 처음으로 분석 방송을 했다. 처음으로 이춘재의 얼굴을 공개한다고 해 화제가 되었으며 고등학교 시절 사진 2장이 공개되었다. 방송은 주로 고등학교 동창들이나 당시 생존자와 목격자, 이춘재의 어머니와의 인터뷰로 이춘재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알아보고 실제로 이춘재에게 연쇄살인 가능성이 있는지 확인하는 내용이었다.2019년 9월 28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두 번째로 화성사건 방송 1부를 내보냈다. 이춘재가 진범일 가능성을 중점으로 다뤘는데 모든 사건의 공통점 중 하나가 스타킹, 블라우스 같은 옷가지로 매듭을 사용한다는 것에 주목했다.[54] 굳이 비효율적인 도구를 사용한 것은 범인의 시그니처이자 특이한 성향을 나타내는 증거이며 매듭을 사용한 것은 피해자가 오래 살아있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분석되었다. 제작진은 미수사건 피해자 역시 만났는데 범인이 스타킹을 벗겨 자신을 묶었으며 범인이 가방을 뒤지는 사이 스타킹이 헐렁해져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게 강조된 이유는 이춘재가 저지른 청주 처제 살인사건에서 피해자를 묶은 도구도 스타킹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의 시신을 여러 겹으로 싼 물건 중에는 청바지도 있었다.
또 이춘재의 DNA가 드러난 사진을 되짚어 봤는데 우선 1987년 1월 있었던 5차 사건은 굉장히 심한 가학 행위가 있었으며 살아있을 때 일부러 고통을 주기 위해 여러 가지 행위를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55] 1988년 9월 있었던 7차 사건부터는 피해자를 모욕하는 행위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며[56] 이 사건은 유력 용의자가 처음으로 목격되고 몽타주가 나온 사건이기도 하다. 1990년 9월 있었던 9차 사건은 다른 사건에 비해 폭력성이 유독 두드러졌는데,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공백기는 이춘재가 강도예비 사건으로 붙잡혀 구치소 생활을 했던 시기와 겹친다. 전문가는 이를 "쌓이고 쌓였던 게 9차에서 다 폭발해서 가장 잔혹하게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57]고 분석했다. 또 대부분의 사건에서 단순히 성폭행하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 고통을 주는 것이 목적이고, 희망을 줬다가 뺏는 행위가 보인다는 분석이 나왔다.[58]
1부 영상은 이전 방송에서 새로 추가된 정보들을 더해 정리한 정도이며 심도 깊은 분석은 10월 5일 방영 예정이었던 2부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춘재가 자백하면서 이에 대한 추가 내용이 들어갔고 분석은 그대로 했지만 진행 방향성이 어느 정도 바뀐 걸로 보인다.
8. 연관 사건들
유력 용의자가 나타나면서 연관된 사건들도 동일범의 소행인지의 여부에 관심이 쏠렸다.자세한 내용은 이춘재/연쇄살인 외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9. 기타
- 2000년대 중반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이 터졌을 때 경기도 남부에서 주로 젊은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사건과 같은 범인의 소행이 아닌가 하는 경찰이나# 전문가들의 추측도 많았고 당시 뉴스 기사도 연관성을 많이 언급하였다. 그러나 2009년에 강호순이 잡혔고 1969년생인 강호순은 이 사건 당시 충남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훗날 이춘재가 진범임이 드러나면서 강호순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다. 화성 여대생 살인 사건 역시 장소나 수법은 비슷하지만 이춘재가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 일어난 사건이라 관련이 없음이 드러났다.
- 범인이 잡히자 화성 시의회에서는 본 사건을 이춘재 살인사건으로 명칭 변경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오랫동안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불려 왔고 영화 살인의 추억이 히트치면서 지역 이미지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좀 회복되나 싶더니 진범 검거로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다시 범죄도시 이미지가 생겨 버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이에 시의회의 명칭 변경 의견을 경찰에서 수용해 공식적으로 사건의 이름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수정했다.
- 이 사건은 10차 사건의 현장이기도 한 동탄신도시의 이름에도 영향을 미쳤다. 원래 이름은 화성신도시였으나 LH는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라는 이름 때문에 동탄신도시라는 이름을 밀었고, 결국 신도시의 이름이 화성신도시 대신 동탄신도시가 되었다. 이춘재 한 명이 경찰 역사를 넘어선 한 도시 자체에 영향을 미친 셈.
- 당시 현장 책임자 하승균은 범죄 행각에 어찌나 분노했는지 그때 범인 잡으면 재판까지 안 데리고 가려고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잡힐 때 반항할 테니까 그럼 내가 그 자리에서…' 이런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해 자신은 실패한 형사, 죄인, 패배자라며 자책감을 안고 살았다. 정년이 되기 전에 사표를 낸 것도, 마지막 10차 사건 공소시효를 몇 달 앞두었기 때문.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마다 언론에서 찾아와 대서특필되곤 했는데 '범인도 못 잡은 놈이 자꾸 신문에 나는 것도 망신스럽고, 그때까지 월급받고 있기도 민망해서'였다고 스스로 밝혔다. 조선일보 2005년 10월31일자에 그의 인터뷰 내용을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해 실은 기사가 나온 바 있는데 그의 심정을 담은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다.
난 자넬 이렇게 부르네. 맘에 들지 모르지만 자네의 존재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10여 년 전에 내가 붙인 이름이지.
한 명인지 두 명인지, 아니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자네, 혹은 자네들을 만나려고 난 그간 무던히도 애를 써 왔네. 자네 쪽에서는 그 반대였겠지만 말야.
난 요즘 또다시 화성에서 일하네. 자네도 알는지 모르겠지만 작년 말 화성에서 귀가하던 여대생이 실종,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어. 그 사건이 여태 해결되지 않아 거기서 수사지도를 하고 있네.
근데 말야. 참 질긴 악연이지. 여대생이 실종, 살해된 곳이 바로 그 동네야. 자네 혹은 자네들이 귀한 생명들을 무참히 짓밟고 다니던 그 동네. 수사본부도 그때 그 파출소 자리에 있다네.
기분이 어떤가? 이제 자네를 잡아도 7차 사건까지는 「죄」를 물을 수 없네. 8차 사건 범인은 잡혔지만, 9차 사건의 공소시효도 다음달로 다가왔고 마지막 10차 사건은 내년 4월에 만료된다고 하네. 나도 내년(2006년) 6월이 정년이야. 지난(11월) 21일이 현직에서 맞은 마지막 경찰의 날이었던 셈이지.
시효만료에 담당형사는 정년이라. 자네는 꼭 내 손으로 수갑을 채우려고 했는데 이제 그 수갑도 반납해야 해.
1·2차 사건이 발생한 뒤 그러니까 1986년 12월 당시 수원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있을 때 화성사건 수사본부로 차출돼 갔으니 내년이면 정말 꼭 20년이구먼.
몇 달씩 집에도 안 들어가고 자네를 잡으려고 미친 놈처럼 다녔어. 마누라와 애들 생일은 몰라도 자네가 저지른 범행날짜와 시간, 형태는 아직도 줄줄 외우고 있네.
내 부하는 과로로 쓰러져 지금까지 반신불수로 있고, 또 다른 부하들은 용의자를 무리하게 조사하다가 숨지게 하는 과오도 저질렀지. 나 역시 직위해제가 됐었고 말이야.
그런 중에도 자네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추가 범행들을 저질러 갔어. 왜 그랬나. 자네도 아마 이제 중년이 됐겠지. 자넨 성격이 무척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없는 사람인데, 결혼은 했나? 아이들은 있어?
자네가 죽인 사람 가운데는 70세가 넘은 노파도 있었어. 어머니 생각은 안 나던가. 갓 결혼한 새댁도 있었고, 꽃다운 스무 살 처녀와 앳된 여고생·여중생도 있었어.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던가.
난 자네가 다녀간 곳에 나가 사체를 수습하며 분을 참을 수 없었어. 그러곤 자네를 잡으면 결코 법정에 세우지 않고 내 손으로 어떻게 하겠다고 다짐을 했지. 하지만 그러면 뭘 해. 난 결국 자넬 잡지 못했고 나를 바라보는 후배들이나 피해자 가족들에겐 평생 죄인으로 남게 됐네.
난 요즘도 꿈을 꾸네. 자네가 저지른 악마와 같은 범죄. 알몸으로 묶인 채 난행을 당한 우리 누이, 동생, 딸들. 그리곤 또 꿈을 꾸지. 내일 당장이라도 자네 같은 악마에게는 공소시효라는 것이 없어져 내가 나간 뒤라도 우리 후배들이 자네를 잡아들이는 꿈을.
그래 난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그렇지만 난 아직 화성에 있고 그만두는 날까진 자넬 찾아다닐 것이네. 그리고 그 망할 놈의 공소시효만 없다면 내가 없더라도 우리 후배들이 자넬 반드시 잡을 거야. 지금은 우리도 예전과 달라.
부디 나보다 먼저 죽지 말게. 우리 꼭 만나야지. 안 그런가?||
- 당시 수사 관계자들에게도 이 사건은 잊지 못할 한이었는지 80년대 화성 사건의 담당 형사[59]가 페이스북에 DNA가 일치하는 용의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현장 책임자[60]와 통화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며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은 불가능하더라도 범인을 잡아 국민 앞에 세우겠다는 약속이 실현되려 하고 있어 감격스럽다는 글을 올렸다. # 이후 이춘재가 자백하자 표창원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당시에 수사에 참여했던 모든 경찰관들이 자괴감을 느꼈었다며 트위터에 수사진에게 감사하는 내용을 올렸다. #
- 기사에 따르면, 연쇄살인범인 유영철은 저 화성 살인범이 사망했거나 교도소에 수감 중일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연쇄살인범의 경우 살인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연쇄살인범과 같은 강력범들에게는 의외로 교도소가 도피처이자 은신처가 될 수 있다. 아무리 흉악한 토막살인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언론이 관심 있게 취재하는 기간은 기껏해야 사건 직후 몇 달 동안이고 경찰의 수사망이 집중되는 기간도 초기 얼마 동안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대중의 관심도 서서히 식게 되고, 경찰의 수사도 새로운 단서가 나오지 않는 한 흐지부지되어 버린다. 그동안에 소매치기나 사기 등의 잡범으로 잡혀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면 못해도 몇 년 동안의 공소시효 기간을 흘려보낼 수 있다. 경찰도 대중들도 설마 그 흉악무도한 살인범이 벌써 교도소에서 다른 죄로 복역 중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는 점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범죄자 DNA 수집 이후 이런 식으로 고의로 잡범으로 붙잡혀서 도망친 중범죄자들이 잡히는 실적이 꽤 있어서 DNA 수집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도 힘을 잃고 사그라들었다. 실제로 또 다른 장기미제 사건이었던 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의 범인 김도룡도 범행 후 개를 여러 마리 훔쳐 절도로 수감된 덕에 수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2019년에 정말로 진범이 이미 다른 살인 사건으로 수감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같은 (연쇄)살인마인 유영철의 예상이 맞았던 셈이다. 실제로도 연쇄살인범들이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살인을 할 수 없었거나 수사망을 피하기 위해 몇 년 정도 살인을 중지하다가 다시 재개하는 경우는 많아도, 아예 완전히 그만두는 사례는 드물다.[61]
- 개구리 소년 사건도 재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다만 개구리 소년 사건은 이 사건과는 달리 범인을 특정할 만한 직접적인 DNA 같은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은 걸로 알려진 데다 유골 발굴을 엉망으로 해 버려 그나마 남아있는 증거를 경찰 스스로 없애 성과를 거둘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 역시 재수사에 들어갔다. 참고로 이 사건 역시 목소리만 남아있어서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 중국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바이인 연쇄살인 사건이 있다. 이 사건도 2016년 8월 26일에 범인이 검거되면서 해결되었다.
- 전 경찰대 교수이자 전 용인시 정 국회의원인 표창원이 8차 사건 이후인 1990년 7월에 화성경찰서 기동대(시위 진압이 주 임무) 소대장으로 부임하여 본 사건의 현장 지원도 나가던 와중에 9차 사건(1990년 11월)을 목도하게 되었다고. 이를 계기로 자괴감을 느껴 경찰 선진국인 영국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다만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범인이 외지인일 것이라는 잘못된 프로파일링을 한 것은 그의 경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오점이나 당시엔 그 누구도 범인을 특정해낸 사람이 없는 장기 미제사건이었고 유력 용의자가 나오기까지만도 30년이 넘게 걸렸으니 이해를 못할 것도 아니다. 문제는 자신도 유명세를 인지한 미국의 프로파일러 펫 브라운이 완전 정답을 말하는 장면이 그 분석이 나오는 화에 이미 나왔다는 것이다. 이를 인지 하지 않아 이런 결과를 불렀다는 반성은 한국 경찰의 신뢰성을 추락하기 좋다는 점이다.
- "비 오는 날 밤에 빨간 옷을 입은 여자를 죽인다."는 괴담이 돌아 빨간 옷의 판매가 급격히 줄어들거나 비 오는 날에 외출이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2~4차까지 피해자들이 붉은 옷을 입었고 흐리거나 안개가 낀 날 주로 범행했다.
- 영화 살인의 추억이 이 괴담들을 비중 있게 다루어서 더욱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영화에는 4차 사건 피해자가 비 오는 날에 외출하려다가 빨간 옷을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장면도 있다.
- 영화 살인의 추억에 나왔던 점쟁이를 찾아간 일은 사실이라고 한다.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풍수가 좋지 않다고 해서 경찰서 위치를 옮겨 보기도 하는 등 별별 수를 다 써봤다고. '너는 자수하지 않으면 사지가 썩어 죽는다'라는 말을 써 놓은 허수아비도 실제로 세워 놨다고 한다. 당시 사진 자료를 보면 관련 사진을 찾아볼 수 있다. 저 문구가 워낙 인상 깊어서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제목이 될 뻔했다.[62] 그런데 형사들이 수사를 하며 미신의 힘을 빌었던 건 대한민국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고 DNA 수사기법이 발달하기전 미국에서도 종종 있었다. 도무지 실마리가 없을 때 심령술사를 찾아가기도 했으며 이걸로 꽤 유명한 스타급 심령술사도 있었다. #
- 사건이 진행되던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수원시 지역 중고등학교들은 여전히 야간자율학습을 강행했다.[63] 결국 1989년 7월 3일 수원 오목천동에 거주하던 한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2학년 학생 정모 양이 야자를 마치고 귀가 도중 실종되었고 9일에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지역이 다르고 수법이 다르다는 이유로 화성 연쇄살인의 동일범으로 취급되지는 않았고 화성 연쇄 살인처럼 범인을 잡지 못해 2004년 7월 3일 공소시효 만료로 결국 미제사건으로 끝났다. 하지만 결국 이춘재의 자백으로 동일범임이 밝혀졌다. 수법이 지극히 잔혹해서[64] 충격이 상당했음에도 학교에서는 야자를 중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야간자율학습이 밤늦게 끝나기에 학생들이 범행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도, 부산광역시[65] 등 일부 도를 제외한 곳에선 야간자율학습이 말 그대로 야간타율학습 정도로 강행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전두환 정부가 야간자율학습을 강행했으며 당시 야간자습을 도망가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반정부 취급하여 삼청교육대로 입소시킨 것으로 악명 높았고 노태우 정부 역시 야간자율학습에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 외에도 당시 야간자율학습이 짼 기록이 있다면 대학교 면접에서 광탈하거나 들어왔더라도 교수들한테 낙인찍혀 F학점을 받는 건 물론이고 직장생활에서도 상사한테 대놓고 욕 얻어먹는 건 기본이요 아예 짤라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21세기에도 야간자습 참여 기록으로 갈구는 상사들이 몇몇 있다.
- 진범 수사 재개를 발표한 9월 19일보다 9일이 이른 9월 10일 디시인사이드의 한 갤러리에 "우리 서 근처에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 진범이 나와서 난리가 났다" 라는 글이 올라왔다. 현재는 삭제된 상태지만 해당 본문은 박제되어 여러 사이트에서 재조명되었다. 하지만 주작일 가능성이 높다. #
- 만화 김희민의 필명 기안84의 의미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기안동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기안84의 블로그 설명에 "기안84 뜻은 논두렁이 아름답고 여자들이 실종되는 도시. 화성시 기안동에 살던 84년생" 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기안84/논란 참고.
- 이 당시 강압수사로 욕을 많이 먹었던 화성경찰서는 추후 화성동부경찰서를 거쳐서 화성동탄경찰서로 바뀌었는데 2024년 이와 비슷한 수사를 하며 또 논란이 되었다.[66]
[주의] 해당 그래픽은 8차 사건의 가해자로 누명을 썼던 윤 씨가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기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8차 사건에서 진범 검거 및 모방범죄라는 설명은 현재 시점에서는 잘못된 설명이다[2] 2019년 8월 9일 유력 용의자 특정, 2019년 9월 24일 자백, 2019년 10월 14일 피의자 입건, 2020년 7월 2일 경찰 수사 종결, 2020년 12월 28일 검찰 수사 종결 및 공소권 없음 처분 #[3] 현 화성시 정남면, 팔탄면, 기배동, 진안동, 병점1동, 병점2동, 반월동, 동탄2동 일부, 동탄3동 일부[4] 다만 진범 이춘재는 이미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1995년도에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복역 중이었으므로, 가석방 불가능한 종신형으로 집행될 것이다.[5]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 10명, 이춘재의 다른 살인사건 희생자를 포함할 경우 15명 사망[6] 現 화성시 기배동, 진안동, 병점1동, 병점2동, 반월동, 동탄3동 일부[7] 다만 나머지 둘과는 다르게 지금의 과학기술이었으면 벌써 잡혔을 정도로 증거가 많이 남아 있었던 허술한 사건으로, 1980년대에 과학수사가 있었다면 피해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다.[8] 화성 연쇄 살인사건 외 4건의 추가 살인과 30개 추가 강간/강간미수까지 자백하였다.[9] 다만 공소시효 만료로 인해 추가로 처벌을 할 수 없으므로 법리적 관점에서는 영구 미제사건이 맞다.[10] 일각에서 일명 태완이법이라고 불리는 살인사건의 공소 시효를 폐지하는 법률이 왜 안 적용되냐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소급효 금지의 원칙 때문이다. 형법의 적용과 처벌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며, 개정된 법이 피고에게 불리한 경우에는 그 법을 소급하여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유리한 경우에는 소급이 가능하지만 살인죄의 공소시효 폐지는 처벌범위를 넓히니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라서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법이 시행되는 2015년 7월 31일까지 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사건들만 공소시효가 없어진다.[11] 전문가들은 이것이 연쇄 강간만 저지르던 이춘재가 저지른 첫 살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12] 현재 화성시 진안동 북부(논밭 일대).[13] 현재 화성시 안녕동 140-5 성우교차로 일대.[14] 현재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관항교차로 인근 논밭 일대.[15] 현재 화성시 황계동 수원 공군기지 남측 논밭 일대.[16] 현재의 진안동 다람마을월드메르디앙1차아파트 일대.[17] 강도 미수사건의 대한 화풀이+등화관제로 인한 목격자 부재+ 피해자가 범인인 자신이 제압하기 쉬운 여중생이라는 시너지로 인해 가장 잔인하게 살해되었다.[18] 현재 동탄국제고등학교 후문 인근.[19] 지금이야 Real-Time PCR(qPCR, 실시간 중합효소연쇄반응) 등 PCR 기술이 매우 발달하여 DNA 증폭이 가능하고 포렌식이라도 할 수 있지만 당시 과학수사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PCR이 개발된 건 당시로서는 불과 몇 년 전인 1983년이었으며 그나마도 현행 qPCR 등은 개발되지도 않았을 시기였다.[20] 사실 피해자의 혈흔이었다.[21] 2013년 7월 채널 A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22] 범인이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의 경우 범인이 죽거나 다른 범죄로 수감되면서 멈추는 경우가 많다는 가설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 가설은 희대의 연쇄살인마 유영철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런 유형의 살인범은 살인의 짜릿함에 중독되기 때문에 자신의 거동에 문제가 없거나 신상이 자유롭다면 그만둘 리가 없다는 논지다. 결국 감옥에서 자살한 연쇄살인범 정남규도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23] 1심, 2심에서는 사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에서는 계획살인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으니 이에 대해 상세히 알아봐야 한다고 판단하여 파기환송했다. 기사, 판결문[24] 1946~2020. 영화 살인의 추억 박두만 형사의 실제 모티브가 된 형사로 유력 용의자 이춘재 수사팀에 합류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2020년 11월 12일 심장마비로 향년 75세로 사망.[25]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9차 사건 피해자의 속옷에 묻은 용의자의 땀을 분석했다고 한다.[26] 경찰이 본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이었는데 처제 강간살인 사건에서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었다.[27] 그녀와 함께 목격자였던 버스기사는 2012년에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28] 안 그래도 경찰은 검경 수사권 조정이 국민적 관심사에 오른 후부터 연속적인 대형 실책들로 인해 국민들의 수사권 조정과 관련된 검경개혁 지지를 잃어 가는 상황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거 경찰의 무리한 수사방식을 통해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고 진범을 놓친 것에 대한 국민적 질타를 부담스러워해서 실제 8차 사건의 자백이 포함된 발표를 고의적으로 조작했을 가능성이 높았다.[29] 3월 7일 오후 8시쯤 청주시 남주동의 한 셋방에서 주부 김모(29세, 여) 씨가 살해당한 것을 남편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모 씨는 공업용 테이프로 눈이 가려져 있었고 스타킹이 입에 물려져 있었으며 양쪽 가슴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도 있었다. 경찰은 금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과 김씨의 방어흔이 없는 점, 범행에 사용된 도구 일체가 집 안에 남아 있는 점 등을 볼 때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점하고 범인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몇몇이 명확한 알리바이를 제시한 데다가 증거 부족 등의 이유로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면서 오랜시간 미제로 남아있었다.[30] 재소자 처우가 가장 좋지 않은 곳이며 최고 수준의 경비를 자랑한다. 미국 ADX 플로렌스 교도소, 러시아 흑돌고래 교도소, 엘살바도르 CECOT, 일본 후츄 형무소, 프랑스 샹테 교도소와 동급이다.[31] 다만 표창원 의원에 따르면 2011년의 DNA 과학기술로도 검출이 안 돼서 2019년에 와서야 가능해졌다고 한다.[32] 실제로 1994년 즈음 용의자 이춘재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됐다고 한다. 청주 처제 살인사건 이후 이춘재의 화성 본가의 압수수색이 이뤄졌고 화성수사본부는 이춘재의 조사를 요청했으나 청주흥덕경찰서는 처제 사건을 처리하느라 바쁘니 필요하다면 와서 직접 데려가라고 요구했고, 이후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다고 한다. 이 역시 이춘재의 혈액형이 O형이어서 당시 경찰이 적극적으로 확인해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33] 학교에서 검사를 해서 O형으로 알려주고 생활기록부에도 O형으로 적혀 있었고 거의 20년을 O형으로 알고 살았는데 나중에 커서 수술 때문에 병원을 갔더니 병원에서 검사를 하고는 A형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혈액형 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34] 21세기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외부에서 채취한 분비물로 진행한 혈액형 검사는 맹신해선 곤란하다. 당장 현재 수혈학에서도 ABO 및 Rh 타이핑 시 항원-항체 농도에 따라 오차가 나는 경우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35] 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에서 범인 김도룡의 유죄를 밝혀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그 교수다.[36] 위에 언급된 고문치사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37] 해병대 출신 송 모씨[38] 후술하지만 엉뚱하고 애꿎은 생사람들 여럿 잡은 사건이다.[39] 공업계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집 근처 중소기업에 근무하던 청년이었다. 3년간 개근할 정도로 성실한 성품에 우등상을 독차지해 고교 생활기록부에는 “학습태도가 좋으며 우수해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이라고 적혀 있다.[40] 평소처럼 아침에 출근한 뒤 소식이 끊겨 가족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실종 5일째 되던 날 저녁 뉴스를 보다가 범인으로 나오는 걸 보고 가족들이 대경실색했다고 한다.[41] 경찰에서 살인 누명을 쓸 당시 구타와 고문을 집중적으로 당한 바로 그 부위에 ‘악성횡근육종’이라는 희귀암 판정이 나왔다. 의사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면 암 발생과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소견을 말해주었지만 무서운 시절이라 경찰을 상대로 어찌 해볼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42]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43] 가장 좋은 예시가 김광석 의문사 의혹.[44] 귀금속으로 제작되는 데다 압류할 수 없는 특권도 있다.[45] 당시만 해도 민간의 급여는 물론 안정성도 공직에 크게 밀리지 않았으며 적당히 돈을 모으면 사업을 할 기회도 충분했다. 정년 채웠다고 훈장을 괜히 준게 아니다.[46] 실제로는 바람을 핀 게 아니라 가정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청주 처제 살인사건 항목 참고. 물론 그 전에 아내가 바람을 폈다고 그 동생인 처제를 죽여도 된다는 식의 합리화가 더 문제가 있다.[47] 이춘재의 모친과 인터뷰를 했는데 이후 비하인드 영상에서 PD는 왜 그렇게 방송을 했는지 시청자들이 고민해 줬으면 한다고 이야기했다. #[48] 5회차 방송으로 1992년 4월 7일에 방송됐다. 마지막 10번째 사건에서 딱 1년이 지난 시점이라, 이 당시만 해도 연쇄살인이 진행 중이라고 인식되던 때였다.[49] 두 번째로 14일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세 번째로 15일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이 방영되었다. 흔히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으로 통한다.[50] 심지어 라이터에 직접 불을 붙여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맨얼굴을 제대로 확실하게 본 것이다.[51] 명노열. 이 소년이 바로 고문으로 사망한 소년이다.[52] 실제 이춘재의 나이도 연쇄살인 당시 25~27세였다.[53] 이것이 중요 포인트인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범인은 사건 당시 수원에 살았던 사람으로 수원의 버스 정류장에서 피해자를 모색한 후 그 피해자를 따라 버스를 타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54] 유일하게 발견되지 않는 사건이 1차 사건인데 현장이 유독 어수선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당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55] 만약 3차, 4차도 이춘재의 범행이라면 당시부터 있었을 확률이 높다. 일단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겐 끔찍한 고통인 것은 물론 그걸 결박당한 채로 당했으니 저항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춘재가 저질렀을 거로 의심되는 화성 태안읍 연쇄 강간 사건에서 피해자 모두가 "결박당해서 강간당했다."는 증언이 있다.[56] 대표적으로 7차에서는 피해자의 음부에 일부러 복숭아 조각을 넣은 것이 확인되었고, 9차에선 피해자의 학용품을 음부 속에 넣은 것으로 확인되었다.[57] 마침 그 날이 등화관제 날인 것과 대상자가 자신이 제압하기 쉬웠던 여중생인 것도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세 가지가 겹친 건 위의 요약표에서 보듯이 제일 잔인한 비극으로 끝났다.[58] 실제로 3차~9차까지는 피해자는 항상 입이 재갈로 물리고 결박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7차, 9차에서는 이물질이 음부에 들어간 것까지 관찰되었다. 즉, 위의 사건 개요와 이 영상을 감안하자면 피해자를 납치하고 재갈을 물리고 결박을 한 뒤 피해자가 공포를 느끼도록 제압한 후 강간하고 피해자의 물건으로 살해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실제로 비슷한 상태로 발견된 3차, 4차, 5차, 7차, 9차의 피해자 중 2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미성년자 혹은 50대 이상 중장년층 여성임을 고려하면 타당한 가정이다.[59] 김복준 前 동두천경찰서 수사과장이자 현 한국범죄학연구소 연구위원. 각종 프로그램에서 패널 출연 중.[60] 하승균 전 경기지방경찰청 강력계장[61] 다만 이런 사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대표적으로 중국판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바이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가오청융은 마지막 사건 이후 14년 동안 살인을 완전히 그만두었다가 잡혔고 미국의 유명한 연쇄살인범 오리지널 나이트 스토커의 용의자도 살인을 완전히 중단한 지 32년 후에야 잡혔다.[62] 이 문구를 제목으로 밀었던 사람은 바로 박찬욱(...).[63] 물론 화성 사건의 여파가 워낙 커서 수원 지역 교장회의에서 야자 시간을 줄이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이럴 때일수록 '면학 분위기를 해치면 안 된다'면서 거부당했다고 한다. 참고로 수원은 전통적으로 학구열이 높은 지역으로 사건 당시 야자는 웬만해서는 필수였다. 물론 2010년대 들어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면서야간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자율이 되었다.[64] 수원시 오목천동 농수로에서 1989년 7월 9일 알몸의 시체로 발견됐는데 가슴은 예리한 흉기로 도려내져 있었고 옷이 벗겨져 있었으며 다음 날 경찰이 근처에서 피해 여학생의 도려내진 유방 일부와 책가방을 찾아냈다.[65] 여기는 김석준의 취임 이후 야간자율학습이 21시로 제한되었다.[66] 특히 8차 사건과 유사하다. 증거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상대로 혐의자로 몰아서 수사를 했기 때문이다.
10. 미디어에서
- 영화 《살인의 추억》은 이 사건 자체를 직접 다룬 작품으로 사건뿐 아니라 1980년대의 정서까지 담고 있어 명작으로 평가되었으며 동시대의 많은 한국 추리 작가들이 이 사건 관련 단편을 양산했다. 작품이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국민들 또한 잊혀져 가던 이 사건을 재인식하였고 봉준호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서 해외의 영화 팬들에게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형사를 연기한 송강호가 관객들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구도로 끝나는데 이는 어쩌면 영화를 볼 수도 있는 범인을 의식한 장면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19년 9월 현재 가장 유력한 용의자 이춘재가 수감 중인 교도소에서 세 번이나 틀어 줬으니 이 영화를 시청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 범인이 잡힌 후 봉준호 감독은 용의자의 얼굴을 봤으며 남다른 감정을 느꼈고 그 감정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고 밝혔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강한 호기심을 느꼈고, 그 살인자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며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다"고 솔직한 심경을 전하며 범인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준 경찰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
- 드라마 《수사반장》의 마지막 회가 이 사건을 다루었으며 줄거리는 농촌 총각을 대상으로 한 결혼 사기단 때문에 피해를 본 아저씨가 그 사기단 관련자나 다른 여자들을 살해하는 식으로 가상의 범인을 만들었다. 물론 옛날에 만든 드라마라서 실제 사건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봐도 상관 없는 수준. 이 사건을 해결해서 최불암이 높으신 분으로 승진하는 줄거리로 마무리되었다.
- 2003년 실화극장 죄와 벌에서도 해당 사건을 다뤘지만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오인받았던 윤성여씨가 재판받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그려냈다. 다만 당시에도 윤성여씨는 자신이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고 이후 실제 범인이라고 밝혀진 이춘재가 자신이 8차 사건의 진범이라고 직접 시인하고 수사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누명임이 확인되었다.#
-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2012)에 나오는 사건 역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0명이 살해당했고 2005년에 미제로 남은 채로 공소시효가 소멸한 것으로 이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영화 초반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범인을 향해 권총을 쏘는 장면은 《살인의 추억》의 명장면[스포일러]을 떠올리게 한다.
- 2012년 5월 KBS 프로그램 이야기쇼 두드림에서 왜 갑자기 범행이 멈췄는지를 예측하는 당시 경찰대 교수 표창원의 인터뷰가완벽하게 적중했다
- 2015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김복준 형사(현 중앙경찰학교 외래교수)가 김구라 채널에 출연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 tvN 드라마 《갑동이》도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tvN 드라마 《시그널》(2016)에서도 본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경기남부 연쇄살인사건[68]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범인의 하반신 마비로 살인이 중단되었다는 설정을 채용했다.
- OCN 드라마 《터널》(2017)의 메인 에피소드 역시 이 사건이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 영화 《브이아이피》에서도 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연쇄살인사건이 나왔었다. 작 중, 형사과 팀장인 채이도(김명민)가 범인인 김광일(이종석)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지만 높으신 분들의 개입으로 인해 구속에 실패한다.
- OCN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2018)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되었다.
- MBC 드라마 《검법남녀》(2018)에서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우성 연쇄 살인사건이 다루어졌다.
- SBS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2022)에서도 막바지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대성 연쇄 살인사건이 언급되었으며 진범으로 추정되는 자가 교도소에서 송하영의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었다.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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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유력한 용의자였던 박현규(박해일)가 DNA 불일치로 결백이 증명되면서 풀려나 어두운 터널을 향해 걸어가고, 분노한 서태윤(김상경) 형사가 그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68] 실제로 해당 명칭으로 대체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지역감정 유발 우려,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수원 인근에서도 발생했기 때문인데 확증이 어렵다는 이유 등으로 반영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