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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9:45:29

박흥숙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박흥숙
朴興塾
아명 박정렬(朴貞烈 또는 朴正烈)
출생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
사망 1980년 12월 24일 (항년 26세)
전라남도 광주시 북구 문화동 광주교도소[2]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국민학교 (졸업)
중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사인 교수형
범죄 유형 살인죄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박흥숙 살인 사건2.3. 자백2.4. 판결과 사형
3. 언론 보도4. 의의5. 대중 매체에서6.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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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거 인원 4명을 보복살해한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해진 인물. 박정희 정부의 도시 개발 정책에서 발생한 철거민들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될 때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54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의 가난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박정렬(朴貞烈 또는 朴正烈)이다. 원래 그의 부모는 도로변의 허름한 점포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한부모 가정이 되고 형도 세상을 떠난 뒤부터 원래 가난했던 가세가 더욱 급격히 기울었다. 그를 알던 주변 사람들은 그를 홀어머니와 남은 동생들을 잘 돌보는 효자였다고 기억했다. 박흥숙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그가 보였던 비상한 똑똑함과 또한 그가 겪었던 지독한 가난함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난으로 인해 가족이 흩어지면서 어머니와 막내동생은 절로 가서 수발을 들며 허드렛일을 하며 연명했고 그의 여동생은 남의 집의 식모로 일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박흥숙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의 최종 학력은 국민학교였다. 그가 남긴 일기에 "바라던 학교(영광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우리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쓰여 있다.

그는 중학교에 입학해야 할 나이에 광주시내에서 열쇠수리공으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인지 주경야독을 하여 다섯 달 후 검정고시에 합격했다고 그의 여동생과 그의 일기는 증언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곧바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고 한다. 법관이 되면 가난을 벗어나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서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때 그가 자신의 거처로 삼은 곳이 무등산이다. 그는 무등산 산자락으로 들어가서 움막집을 세우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았다. 당시 무등산 자락 주변에는 20여 가구가 빈민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민들이 박흥숙과 그의 가족이 굶주림에 허덕이면 자신들의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훗날 사건 이후 형성된 박흥숙을 동정하는 여론은 주로 이 주민들의 증언에서 기인했다.

박흥숙의 어머니 심금순(沈今順)은 산중턱에 있는 무당의 집에서 무당의 수발을 들고 허드렛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평소 체격이 작고 허약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여 구한말 동학군 사이에서 읽히던 정도술이라는 무술책이 집안에서 가보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그것을 수련했다고 한다.

2.2. 박흥숙 살인 사건

운명의 그날인 1977년 4월 20일 광주시 동구청 소속의 건설반장인 오종환(吳鍾煥) 반장과 동구청 소속 일용잡급직의 철거반원 7명이 무등산을 올랐다. 그들의 목적은 등산이 아닌 바로 이 일대의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기 위한 산행이었는데 마침 그즈음에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청에서 판자촌 주민들에게 앞서 알려 많은 집들이 철거된 상태였지만 8가구의 집들이 남은 상황이었다. 무허가 판자촌에 사는 사람들 사정이야 다들 알 만하지만 이들은 그중에서도 도저히 달리 갈 곳이 없는 사람들로, 오갈 데가 없는 이들은 차일피일 철거를 미루며 최후까지 남아 버티었던 것이다.

절박한 박흥숙과 다른 의미에서 절박한 철거반원 사이[3]에 시비가 붙었는데 철거반원 중 일부가 어머니를 밀치며 욕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사 결과와 증언에 의하면 이때까지는 박흥숙도 어머니를 말리면서 "저 사람들도 위에서 시켜서 이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라며 그들을 동정하였다고 한다. 나아가 철거반이 가재도구를 모두 움막집 바깥으로 옮길 때 박흥숙도 그들과 함께 가재도구를 옮기면서 철거를 협조했다.

그런데 철거반원들이 집에 불까지 지르면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되었다. 추측건대 단순 철거만 했다간 다시 지어 살 우려가 있으므로 상부에서 완전 전소를 명령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집 지붕에는 박흥숙의 어머니가 무당의 집에서 일을 하며 모은 돈 30만 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강력하게 항의했다.

여기까지는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은 그가 네 명의 철거반원들을 살해한[4] 결정적인 계기는 다음과 같다. 그의 움막집으로부터 300여 m 정도 떨어진 집에는 김복천과 그의 처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박흥숙은 "저 집에는 병에 걸린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선처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철거반원은 이를 수락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끝내 그 집마저 불타는 모습을 본 박흥숙은 엄청난 적개심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에 대하여 박흥숙은 따져 물었는데 철거반장 오종환은 "어린놈이 지랄한다."며 박흥숙을 깔보았고 박흥숙은 철거반장 오종환을 향하여 자신이 만든 사제 공기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했다. 사제 총기를 만들 수 있던 연유는 열쇠공을 시작으로 금속을 다루는 일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총을 든 그는 철거반장에게 부하 반원들을 모두 모으라고 위협을 가하여 철거반원 7명 중 5명이 불려왔고 박흥숙은 여동생에게 지시하여 철거반원들을 묶게 하였다. 당시 그가 이들을 결박한 이유는 이 사람들을 결박하여 도망가지 않게 한 뒤 그는 스스로 시내로 가서 당시의 광주시장에게 따지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박흥숙은 포박한 철거반원들을 자신의 공부방으로 파 놓았던 구덩이에 넣은 다음 "불태운 우리 집에 사과해라"고 호통을 쳤는데 이 와중에 철거반원들은 마침 헐겁게 묶여 있던 포박을 풀고 반항하였고 박흥숙은 망치로 그들을 공격해서 5명 중 철거반장 오종환과 동구청 소속 일용잡급직 이건태(李建泰) 등 2명을 현장에서 숨지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철거반원 양관승(梁官承)과 윤수현(尹壽鉉), 김영철(金永喆) 등 3명은 동구 서남동 조선대학교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양관승과 윤수현은 치료 도중 숨졌고 김영철은 중태에 빠졌다.1977년 4월 21일 당시 경향신문 기사 이것이 박흥숙 살인사건이다.

2.3. 자백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은 놀라서 도주하였고 박흥숙의 여동생은 시내로 내려가서 광주시청으로 가서 시장을 만나려 했으나 시장은 만나 주지 않았다. 그녀는 시청 직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한 뒤 없어진 집터로 갔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공무집행방해죄, 여동생은 살인방조 혐의로 체포되어 무등산에서 하산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한편 박흥숙은 광주 시내로 내려와 예금해 두었던 돈을 찾고 머리를 깎고 양동시장에서 하늘색 재킷을 산 뒤 시외버스를 타고 여수로 향했다. 그는 여수에서 1박을 한 다음 여수역에서 서울로 향했으며 서울역 앞의 여인숙에서 다시 1박 후 노원구 상계동에 있던 이모 집에 숨어 있다가 시민의 제보로 붙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소한 상계동에서 체포되었다는 것은 경찰의 조작으로, 박흥숙의 진술에 따르면 광주에서 여수로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했다. 그는 이 기차 안에서 해외로 나가는 배를 타는 정 모 씨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에 의하면 정 모 씨는 북한의 간첩으로 의심되는 말을 썼다고 한다. 그가 간첩임을 확신한 박흥숙은 날이 늦었으므로 우선 여인숙에서 1박을 한 다음 서울로 향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간첩신고를 하러 중앙정보부를 찾았고 더불어 자신이 광주 무등산에서 살인을 저지른 박흥숙이라고 자신의 실명을 밝히며 자수도 했다고 한다. 이후 중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비밀을 지킬 것을 약속받고 검거, 즉 자수하여 연행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는 박흥숙의 진술에 의한 것이니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최소한 제보로 붙잡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수한 것은 재판부에서도 인정한 사실이다.

2.4. 판결과 사형

자수하여 검거된 박흥숙은 자신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그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죄를 뉘우치고 어떤 극형이든 받겠다고 언급했다. 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인정을 했으니 최소한 박흥숙이 자수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되었다.

판결문

원심은 그의 살인수법이 아주 잔혹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고 피고는 항소했으나 광주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했다. 박흥숙이 심신미약 등 자신의 행위를 판단할 수 없는 지능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사유이다. 변호사는 해당 범행이 피고의 첫 범행이고 사용한 총은 미리 살인을 위해 준비된 도구가 아닌 호신을 위해 만들어 두었던 것이고 망치도 공부를 하기 위해 땅굴을 파려던 것으로 결과적으로 범행에 사용한 흉기는 준비된 살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생애는 원래는 올바른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정황상 우발적 범죄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는 점을 들었으나 광주고법은 이전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책으로 무술을 연마한 점[5], 그리고 피고가 도주를 위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 명확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심신미약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의 성품이나 자백을 한 점 등을 참작해줄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범행의 수법과 수단이 아주 잔인하고 이전의 생애 전반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원심을 유지했다. 이듬해 5월에 열린 대법원 상고심 또한 상고를 기각하면서 원심을 확정지었다.

이후 빈민촌 철거 과정에서 발생한 철거반원들의 폭력이 사건의 배경이라는 점과 박흥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여 박흥숙에 대한 구명 운동이 일어났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가 수감되어 있던 도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이 그를 옥중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는 박흥숙과의 첫 대화를 이렇게 기억한다.
"18방! 18방!"
누군지 아까부터 방 번호를 여러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8방! 광주사태로 들어온 사람 아니요?"(중략)
"내가 광주사태로 들어온 사람입니다만."
"그렇군요. 나는 박흥숙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 무등산 타잔이군요."
"나를 아시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잘 모르실 겁니다. 김상윤이라 합니다."
"어? 상윤이 형이 들어오셨네!"
"날 어떻게 아시오?"
"왜 모르겠습니까? 여기 독방에 리영희 교수님이나 박몽구 등 여러 사람이 거쳐 갔어요. 그 사람들이 형님 이야기를 많이 해서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박흥숙은 그를 많이 위로했고, 심심치 않을 만큼 통방[6]도 하면서 지내며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사법고시 준비를 했던 사람이라 지적 호기심이 대단했고, 긴급조치 9호로 수감된 사람들을 통해 많은 책을 섭렵한 내공도 느껴졌다고. 박흥숙은 옥중에서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한문보다 백화체 공부에 열중했던 것을 보면 자신이 머지않아 석방될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고 김상윤은 증언한다. 하루에도 서너차례 이상 통방을 했는데, 한 일주일 정도 소식이 없다가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밤 다시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몹시 들떠 있었고 까닭 모를 흥분에 찬, 환희에 휩싸여 있는 분위기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 다음날인 1980년 12월 24일 집행되었다.

이때는 보통 사형 확정 3년 이내에 집행이 되었고, 집행을 하지 않은 채 범법인이 3년 동안 징역을 살고 나면 무기징역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있었다. 주로 국경일에 집행이 있었으니 삼일절, 석가탄신일, 광복절, 성탄절은 사형수들에게 매우 긴장되는 날이었다. 사형 언도를 받은 지 딱 3년이 되어 가던 해였고, 이 해만 무사히 넘기면 자신은 사형당하지 않고 무기로 감형될 수도 있겠다고 기대했던 모양이다. 구명운동도 계속되었으니 기대가 더 컸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성탄절만 넘기면 된다'고 생각하고 일주일 전부터 생사기로의 고통을 참았을 것이고, 성탄절 전야 일정이 끝나자 이제 살았다며 환희에 찼고 흥분한 목소리로 한 시간 가까이 통방을 했던 것 같다고 김상윤은 추측했다.(출처: <녹두서점의 오월>)

하지만 박흥숙은 결국 바로 그 다음날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전날밤 내린 폭설이 쌓여 엄청나게 쌓인 눈길 속에서 사형장으로 가지 않으려 발버둥쳤다고 전해진다. 이후 김상윤은 크리스마스 다음날 면회온 아내 정현애에게 박흥숙의 죽음을 알렸고, 정현애는 강신석 목사에게 이 사실을 알려 강 목사의 주선으로 가족들과 함께 박흥숙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3. 언론 보도

2004년 광주일보 기사, 1977년 기사, 생존자 인터뷰

당시 언론은 중립적으로 사실대로 보도하기보다는 박흥숙 개인과 그의 가족에 대한 편견을 투영하여 심각한 왜곡 보도를 일삼았다.

예를 들어 박흥숙의 어머니인 심금순이 '무등산에서 거대한 굿판을 벌려 광주시내의 돈을 긁어가는 무당이다'라는 보도가 마구 쏟아진 바 있다. 나아가 이것도 모자라서 당시 판자촌과 무등산 일대를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곳이라고 왜곡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심금순은 무당의 잡일을 돕는 댓가로 생계를 꾸리던 것뿐인 빈민이였다.

또 당시 박흥숙이 무예를 연마해서 맨손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력과 완력을 지닌 사람처럼 보도됐지만 박흥숙이 배웠다는 무술은 조선시대의 무예였던 정도술이 고작이였다. 박흥숙의 살인에서 등장한 사제 총기에 관해서 당시 언론은 사회에 불만을 품은 박흥숙이 이전에 만든 총이라고 보도했는데 실제로 그 총은 쇠파이프로 만든 딱총 정도였고 산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만든 호신용 무기였다. 그리고 살해 현장인 그의 공부방, 즉 구덩이에 관해서 경찰과 언론은 그가 사람이 오면 죽이기 위해 이전부터 파 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증언에 의한 실상은 집이 철거될 것을 예상한 그가 집이 철거된 이후에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비상용으로 파 놓은 구덩이였다. #

또 경찰의 발표 내용과 달리 박흥숙은 자수했고 상계동 사는 이모라는 사람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받은 보고에는 그가 서울 방향으로 도주한 후에 중앙정보부에 자수해서 검거됐다고 되어 있다. 박흥숙이 간첩신고를 하면서 이를 신고한 자신이 살인범 박흥숙이라고 같이 밝혔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가 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언급되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판결문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당시 보도에서는 이 살인 사건의 발단인 무허가 판자건물을 철거하면서 불을 질렀던 사실을 보도하지 않으며 숨기려고 하였다. 이전부터 있던 도시 빈민 철거에서 벌어진 여러 사례로 인하여 민심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였던 듯하다. 다만 신인 르포작가 김현장은 월간 <대화> 지[7] 1977년 8월호에 '무등산 타잔과 인간 박흥숙'이란 기고문을 내면서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해 반박했다.

오늘날에도 방송으로 나온 내용 중에서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묘사한 언론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94화)와 팟캐스트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방송분 69화 박흥숙 특집,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 정도밖에 없다.

그래도 영향인지 조금씩 사연이 알려진 끝에 2014년에 진혼제가 치뤄졌다.

4. 의의

도시 빈민에 대한 폭력적인 철거가 끝내 극단적인 참사를 부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6년 전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 등의 사건도 당시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른 국가의 도시계획과 건물 철거 등의 문제가 근본 원인이였다. 참고로 정부에서 처음에는 도시 빈민들의 판자촌 인구를 그들이 국가경제 발전에 필요하니 묵인해 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를 도시미관 훼손을 내세우고 무허가에 대한 묵인을 뒤집으면서 내쫓기 시작한 것이다. 철거 집행과 강제이주는 굉장히 폭력적이면서 무계획적이였고 안 그래도 가난한 주민들만 고스란히 그 피해를 전가받고 고생해야 했다.

21세기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대한민국은 안정화된 대도시를 이루었다. 하지만 과거의 무분별한 사다리식 행정의 문제점, 하층민의 보호받지 못한 인권,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은 행정의 역사가 있었다.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에도 주위의 빈민들이 쫓겨나야 했고 이는 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수록된 단편 만화 '선택'에서도 묘사된다.# 2009년 용산 참사 이후 철거민에 대한 인권 문제가 더 이슈화되어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개정으로 철거지역 상가 세입자의 휴업 보상금을 3개월에서 4개월치로 늘리고 2013년 경비업법 개정으로 철거용역 업체 설립요건 강화 및 폭력/성범죄 전과자 배제, 같은 해 서울시도 '주거시설 등에 대한 행정대집행 인권 매뉴얼'을 만들어 거주민 퇴거 후 철거 집행 및 겨울철/악천후 시 철거 금지 등으로 조금씩 개선 중이다.#

5. 대중 매체에서

6. 참고 자료



[1] 프로필의 사진은 MBC의 현대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94화에 나온 장면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77년 4월 23일 기사에도 이 사진이 나온다.[2]광주광역시 북구 동문대로 261 광주솔로몬로파크. 1980년 당시엔 광주교도소문흥동에 있었으나 2015년에 삼각동으로 이전했다.[3] 이들 역시 일개 일용직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본인의 사정도 어려워 역시나 어렵게 살아가는 남의 사정을 봐 줄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이 일을 끝마치는 것에 절박했고, 필요 이상으로 잔인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 한 명은 중상을 입고 생존한다[5] 이를 자칭 '와장창'이라고 불렀다.[6] 通房. 교도소나 유치장 등에서 이웃한 감방의 수감자끼리 의사소통을 하는 것.[7] 여해 강원용 목사가 세운 '크리스찬 아카데미'가 발행한 잡지이다.[8] 홈페이지 자체는 플래시 팝업 형식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