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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2 23:18:10

식모

1. 개관2. 대중매체에서3. 같이보기

1. 개관

말 그대로 '밥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한자어(食母).[1] 이촌향도가 본격화 된 1950년대에서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흔하게 볼 수 있었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로 급속히 줄기 시작하여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사실상 사라져버린 여성 직업 중 하나이다.[2]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의 집에서 숙식하며 그 집의 부엌일을 위주로 각종 가사노동을 도맡아 해 주던, 10~20대 정도의 어린 여성들을 뜻하던 말이었다. 나이 지긋 하신 분들은 요즘도 식당에서 보조로 일하는 아줌마들을 식모라고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남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가사 일을 한다는 것만 놓고 보면 그냥 가정부 및 근대 서양 사회의 메이드랑 별 차이가 없어 보이나, 그들은 노동 만큼의 월급을 받는 반면에 식모는 가난한 시골에서 '굶어 죽지나 않으려고', 즉 가족들이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도시로 식모살이 보낸 여성들이었다. 이 당시에는 평균 자녀수는 많았던데 반해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많지 않았고, 전쟁 후유증도 있다보니 끼니를 때우는것도 벅찬 가정이 많았고, 이 때문에 어느정도 자란 자녀들을 도시로 상경시키거나 어느정도 먹고사는 집에 내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에는 식모를 데려오기 위해선 부모 또는 보호자에게 일정금액을 지불하고 "숙식의 제공"을 약속한 뒤 데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임금 지불 자체가 계약조건이 아닌 경우가 상당수였다. 그래도 인심이 아주 좋은 집에서는 최소한의 임금을 받기도 했으나, 이마저도 대부분 시골 본가로 보냈다. 그렇게 몇 년간 일하다 혼기가 차면 고용인이 선자리를 주선해서 시집보내거나, 시집갈 때 장롱같은 혼수품을 하나 장만해주는 게 당시 일반적인 문화였다.

1960~70년대는 아무리 못 살아도 세끼는 꼬박 챙겨 먹을 수준이면 집에 식모를 한 명 두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서울은 두 집 당 한 집꼴로 식모를 뒀다고 하니 식모가 얼마나 흔했는지 알 수 있다. 1968년 기준으로 성인남성의 한 달 담배값이 1500원 정도였는데, 이는 식모 월급과 같았다. 당시에는 최저임금 제도는 지정되지도 않았고[3], 근로기준법도 있으나마나한 법이었기때문에 그야말로 집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더 얹으면 식모를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중앙일보-한 달 담뱃값에 식모를 두다 이 당시 신문에는 '식모 쓰는 돈을 아껴 아이들 간식비로 쓰자' 같은 기사나 칼럼이 수시로 실릴 정도였다. 이렇게 대부분 푼돈에 가까운 최소한의 임금을 받고 일했지만, 나이 어린 10대 초중반 소녀의 경우에는 아예 무임금에 숙식만 제공받는 조건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드라마 육남매에서 장미희의 가족도 가난했지만 식모 소녀 한 명을 데리고 사는 모습이 나온다.

관련된 법 같은 것도 없었고 인권에 대한 인식도 낮았던 시대이기 때문에 식모에 대한 대우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인심 후한 집에서는 좋은 거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나이 들면 시집도 좋은 곳으로 보내주어, 식모가 나이가 들어서도 고용주였던 집안과 계속 교류하는 등, 수양딸 비슷한 대우를 해주기도 했던 반면,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학대와 폭력, 성범죄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았고 힘들게 식모생활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보니 힘든 생활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최악의 경우 살인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모두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대부분은 집안 체면도 있고 동네에 나쁜 소문 퍼지는 것도 우려해서, 적당히 일 시키고 밥 챙겨주고 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래도 식모로 들어오는 사람들 자체가 대개 어린 여자애들이었고, 노동 인권에 대한 인식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였으므로 찬 물로 설거지를 해야 한다든지 찬 밥을 먹어야 한다든지 하는 등의 처참한 노동처우는 매우 일상적인 수준이었다.[4] 기본적인 인권에 대한 인식수준 자체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또한 아무리 학대가 없다고 한들 본인은 심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힘들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어린 소녀들이 타겟이다보니 본인이 직접 식모로 나선 경우보다 인신매매에 가까운 경우도 있었다. 이 시절 어르신들이 '누구네 집에 양녀로 갔다'고 하는 표현은 십중팔구는 입양이 아니라 식모로 쓰기 위해 데려간거였다.

파일:시범아파트.jpg

위 평면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75동으로 식모방이 주방으로 연결되어 문을 2개 지나야 하는 구조라 가족들과 동선이 어느정도 분리된 것을 알 수 있다. 다용도실 쪽으로 난 문과 계단은 식모 전용 출입구라고 오해하는 일이 많은데, 사실은 비상구 및 비상계단이다. 당시 지어진 아파트는 원래 계단이 개방식이라 화재에 취약하기 때문에 완전히 분리된 비상계단을 따로 두는 일이 많았다.

파일:l_2016021701001805400148117.jpg

비상계단이 없는 아파트 구조로, 계단이 이중 방화문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비상계단을 겸하도록 되어 있다.

197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중 주로 중산층과 부유층이 살던 아파트를 보면 부엌 쪽에 자그마한 쪽방이 있는 경우가 꽤 많았는데, 이 방의 이름은 "식모방"이었다. 식모를 많이 두던 시대상이 아파트 설계에도 반영된 결과이다. 식모방이란 이름으로 쓰이다 나중엔 좀더 순화시켜 '가정부 방'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80년대 들어선 가사도우미가 출·퇴근하는 형식으로 대체되면서 1980년대 후반 이후 지어진 아파트에선 식모방이 사라지게 되었다. 1970~80년대에 지어진 수도권의 비싼 아파트를 보면 상기 이미지처럼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여공들을 구하는 공장들이 많아지자 식모라는 직업은 사실상 사양길을 걷기 시작한다. 물론 여공들도 하루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려야했던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돈도 못벌거나 얼마 벌지 못하는 식모일을 하느니 여공일을 하는것이 상대적으로 더 나았기 때문에 많이 빠져나갔고, 안내양 등의 다른 직업을 택해 떠나버려서 나중엔 식모 구하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집의 식모를 빼내오려다가 그 집이랑 대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을 정도.[5] 이후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식모는 대부분 사라졌고, 그 빈자리는 돈 주고 고용하는 가사도우미들이 대체했다. 오늘날에는 식사도 외식, 배달음식, 밀키트 등 대체재가 그 당시보다 많아졌기 때문에 식모의 필요성 자체도 줄어들었기도 하다.

각종 창작물에서의 가사도우미들이 그렇듯이, 주인댁 사장님이랑 불륜을 저지르는 등의 클리셰에 쓰이기도 한다.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내뱉는 레파토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식모 출신으로서 대성한 사람도 있다. 바로 숙명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임숙재. 그녀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후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서도, 밤에는 숙명여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공부했다. 좋은 성적으로 졸업 후 숙명여학교에서는 임숙재를 일본으로 유학보내 주었고, 일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마친 임숙재는 귀국하여 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가 된다. 해방 후인 1948년, 숙명여전은 숙명여자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임숙재는 학장이 되었고, 1955년 숙명여자대학이 종합대학숙명여자대학교로 승격하자 총장이 되었다. 총장으로 3년간 재임한 후, 1958년에 퇴임했다.

2. 대중매체에서

한국 영화 <하녀>, <화녀>,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작품에서 식모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당시 식모에 대한 인식이나 시대상을 알기 쉽다. 이들 작품은 유튜브에서도 공개되어 있으므로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 링크 : 하녀, 화녀, 영자의 전성시대

2009년 시트콤 드라마 지붕뚫고 하이킥에서도 신세경이 식모로 나오지만 21세기 작품이다보니 입주 도우미 느낌이라 과거의 식모와는 큰 차이가 있다.

3. 같이보기




[1] 과거 조선 시대의 '~모'들과 비슷한 작명이다. 옷을 바느질하는 '침모'(針母), 반찬을 만드는 '찬모'(餐母) 등. 동명의 만화로 알려지게 된 '다모'(茶母)도 마찬가지.[2] 안내양도 이 중 하나. 다만 지방에서는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 초까지 식모가 있었다고는 하나, 1990년대 중반 이후론 경제 발전 덕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3] 최저임금 제도가 시행된 것은 1988년도의 일이며 10인 이하 기업에서 적용될 정도로 보편화 된것은 2000년의 일이다.[4] 어차피 이 당시에는 성인남성이라도 연간 3천 시간 노동은 기본에 군부대 잘못갔거나 직장에 잘못 입사하면 구타로 고생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학교도 학생들이 어지간히 다치지 않으면 실컷 맞는 경우가 많았다. 쌍팔년도 군대라는 말이 이 시대의 일이었다.[5] 박완서 씨의 단편소설집인 '친절한 복희씨' 중 '그리움을 위하여'라는 단편에 이런 언급이 나온다.[6] 월급을 터무니없이 적게 준다. 서울에서 집값과 생활비 걱정 없는 것을 반영하더라도 아예 무일푼으로 서울에 온 것과 시키는 일의 분량을 생각하면 적은 것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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