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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국민당 | |
<colcolor=#22b14c> 영문명 | <colbgcolor=#fff,#1c1d1f>Unification National Party (UNP) |
등록 약칭 | 국민당 |
창당일 | 1992년 2월 8일 |
해산일 | 1994년 7월 8일 (신민당으로 신설합당) |
통합한 정당 | 새한당 (1992년 2월 12일 흡수 합당) |
총재 | 김동길 |
의석 수 | 12석 / 299석 (해산 직전) |
중앙당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63 (세종로) |
당색 | 연두색 (#22B14C) |
연두색 (#3CD370) | |
1994.7.8.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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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국민당은 1992년 1월 3일에 정주영이 창당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약칭은 국민당.
2. 강령과 정책
강령
(1)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아 공정하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국정을 혁신한다.
(2) 상호보완적 남북경제교류에 의한 신뢰구축과 민족 동질성 회복으로 통일을 주도한다.
(3) UN헌장 정신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계평화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
(4)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유지발전시켜 견실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국민복지의 향상으로 경제정의를 실현한다.
(5) 법질서를 준수하고 근면과 정직을 존중하는 사회민생이 안정된 복지사회를 이룩한다.
(6)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고양하는 교육으로 시민공동체 의식을 배양하며 과학기술 교육을 강화하여 21세기에 대비한다.
(7) 평등한 사회구조의 정착으로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확대하여 국가발전에 적극공헌하게 한다.
(8)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을 보호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국민생활의 질을 높인다.
(1)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아 공정하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국정을 혁신한다.
(2) 상호보완적 남북경제교류에 의한 신뢰구축과 민족 동질성 회복으로 통일을 주도한다.
(3) UN헌장 정신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세계평화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
(4)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유지발전시켜 견실한 경제성장을 추구하며 국민복지의 향상으로 경제정의를 실현한다.
(5) 법질서를 준수하고 근면과 정직을 존중하는 사회민생이 안정된 복지사회를 이룩한다.
(6) 도덕성과 책임의식을 고양하는 교육으로 시민공동체 의식을 배양하며 과학기술 교육을 강화하여 21세기에 대비한다.
(7) 평등한 사회구조의 정착으로 여성의 사회참여 기회를 확대하여 국가발전에 적극공헌하게 한다.
(8) 모든 생명의 근원인 자연을 보호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국민생활의 질을 높인다.
기본정책
(1) 정치 :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2) 통일 : 정권유지를 위한 남북관계의 악용 반대
(3) 외교 안보 : 한민족 경제생활권 확보를 위한 외교 노력
(4) 경제 : 정부관여 최소화로 활력있는 국민경제
(5) 사회 문화 복지 : 서로 돕는 인간 존중 사회
(6) 교육 과학 : 정직하고 진취적인 인간형성
(7) 여성 : 국가발전에 여성의 참여를
(8) 환경 : 쾌적한 환경으로 행복한 삶을
(1) 정치 : 닫힌 정치에서 열린 정치로
(2) 통일 : 정권유지를 위한 남북관계의 악용 반대
(3) 외교 안보 : 한민족 경제생활권 확보를 위한 외교 노력
(4) 경제 : 정부관여 최소화로 활력있는 국민경제
(5) 사회 문화 복지 : 서로 돕는 인간 존중 사회
(6) 교육 과학 : 정직하고 진취적인 인간형성
(7) 여성 : 국가발전에 여성의 참여를
(8) 환경 : 쾌적한 환경으로 행복한 삶을
3. 역사
3.1. 창당과 총선 돌풍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결심함에 따라 1992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같은 해 2월 김동길이 창당을 추진하던 새한당을 흡수하여 정식으로 창당되었다. 슬로건은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상징 동물은 호랑이였다. 정주영이 현대의 오너로 한창 뛰어다닐 때 사내에서 호랑이로 통했던 점이 영향을 끼쳤던 걸로 생각된다.[1] 참고로 당시 본 정당과 경쟁관계에 있던 정당들은 민자당과 민주당이었는데, 민자당의 상징 동물은 곰, 민주당은 토끼와 거북이였다. 결과적으로는 통일국민당이 잔존한 기간 동안 줄곧 민자당이 여당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토끼, 거북이, 호랑이 같은 정치인이 아닌 곰 정치인이 선택된 꼴이 되었다.
창당 한 달만에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31명의 당선자를 내면서 단번에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정주영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2]를 비롯해 수도권은 물론이고 당시에 민자당 텃밭으로 여겨지던 TK, 김종필의 본진인 충청권에서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여 민자당의 과반실패에 일조했기 때문에 당시 정치권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3.2. 14대 대선
정주영은 14대 총선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1992년 가을에는 민주자유당 내에서 반 김영삼 계열이었던 김복동, 박철언, 이자헌, 유수호 등 민정계 인사 일부가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통일국민당에 입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그러나 투표 결과 천만 명의 당원을 가지고도 400만도 안되는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정주영은 울산에서도 현대 표가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을 보고[3] 가히 당황했다고. 게다가 선거 며칠 앞두고 터진 초원복집 사건의 역풍을 맞아 보수층이 전부 김영삼으로 결집하는 바람에 현대 일가(임직원 + 가족)의 표와 중도층 표만 받으면 이길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4]
초원복집 사건이 최대 반향을 일으킨 부산광역시, 경상남도에서는 6~10%대 득표율을 올려 대패했고[5]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강원도에서마저 김영삼에 이어 2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참고로 이 선거는 언론사와 전문업체의 과학적 여론조사가 없던 마지막 선거이기도 했다.[6][7]
3.3. 대선 후
대선 이후 정주영은 잠시 선거 조작을 주장했으나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이에 동참하지 않아 물건너갔다.[8]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세무조사를 받고 대통령선거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정주영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자, 정주영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신이 제공한 통일국민당 당사마저 폐쇄해 버렸다.[9] 그 바람에 한동안 광화문 현대빌딩(현 현대해상빌딩) 앞에 천막을 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헌정사상 최초로 천막 당사를 차린 정당이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10]이후 소속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해 민주자유당에 입당하거나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잔류파는 1994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가[11] 1995년 6월 1일에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4. 이야깃거리
4.1. 원조 제3지대 정당
초기에는 경제 권력층에게 정치 권력까지 주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많았으나, "정치 자금을 한번에 100억원 낸 적도 있다"라고 폭로하면서 현대가 오히려 정경유착의 피해자라는 시선도 생기고 당시로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참신한 행보들, 비정치권 명망가들 영입으로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국민당은 3당 합당 이후의 양당이자 계파 싸움이 치열하던 민자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공천 탈락한 인사들을 대거
또한 경제정책은 뒷전이고 당파 싸움만 계속 일삼는다는 이미지의 민자당이 아닌 새로운 보수정당을 원하는 일부 보수, 중도성향 및 부동층 유권자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특히 중산층 이상 부유층에게도 민자당 대신 대안이 되었다. 실제로 총선과 대선에서 강남3구를 비롯한 고가 아파트, 특히 40평대 이상 대형 평수 아파트가 위치한 부촌에서 높은 득표율을 올렸다.
또한 3김에 신물나던 젊은 유권자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주로 구 통일민주당 성향의 유권자 상당수. 김영삼이 민정당, 공화당과 연합한 것에 실망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김대중을 뽑기에는 1987년 대선의 기억 때문에 반감이 남아 있던 유권자층이었다. 물론 민중당이나 신정당이 조직력에서나 화제성 면에서 크게 밀렸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40대 이상 유권자층에서 지지율이 낮게 나왔던 것을 보면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리고 최불암[14], 강부자, 이주일[15]같은 인지도 높은 연예인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4.2. '현대' 정당
정주영이 만들었던 정당이기에 애초부터 현대그룹의 영향력이 없을 수 없었다. 중앙당 당사 건물부터 과거 현대그룹이 본사로 썼던 건물에 있었고[16]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과 촘촘한 조직책을 이용하여 대선을 앞두고는 당원 천만명 이상을 달성또 현대 계열사 임직원들을 대거 동원하여 유권자들에게 금품 제공 및 당원 가입을 유도한 사례는 매우 흔하게 나왔으며 심지어 초원복집 사건 당시 녹취록에서도 나왔다. 그만큼 집권 여당에게도
또헌 자금과 조직력은 역대 제3지대 정당 가운데서 최고 수준이었다. 나중에 반기문도 대선출마를 포기한 원인 중 하나가 자금 모집 문제 때문이었고, 정주영만큼은 아니지만 천억대 부자인 안철수가 돈 아끼느냐고 짠돌이 소리를 들은 것을 생각하면 독보적인 일이었다.
다만 이런 자금조직력 때문에 현대가 경제계는 물론이고 정계까지 좌지우지할까 걱정된 라이벌 그룹인 삼성그룹과 럭키금성 그룹, 선경그룹 등 다수의 재벌그룹에서 더욱 가열차게 김영삼을 밀어주었다는 웃지 못할 후문도 있기는 했다. 당장 당시 삼성그룹 신문이었던 중앙일보가 노골적으로 친(親)김영삼 논조를 내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4.3. 의외의 진보적 정책들
재벌 회장 치고는 공세적인 통일 정책[17]과 반값 아파트 등의 파격적인 정책, 여성 유권자 표심을 위한 여성 정책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었다.아래는 당시 통일국민당이 내건 정책이다.
- 반값 아파트
- 국가보안법 폐지
시사저널이 주최한 대통령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정주영 회장이 국가보안법 폐지 공약에 대한 질문을 받고서는 "현 헌법에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만큼 이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공산당도 합법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가 조중동과 민자당으로부터 매카시즘성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 대학 입학정원 폐지 및 졸업자격제 도입 및 사학 육성
교육열이 지금보다 더 극심했던 당시로서는[18] 파격적인 정책이었고, 김영삼 정부도 교육열을 해소할 방안으로 대학정원의 완전자율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설립 자율화로 정원을 대대적으로 늘리며 2000년대에 대학진학률 80%를 달성하기도 했지만, 2010년대 이후 인구감소 추세와 함께 부실대학이 증가해버리고 말았다. 또한 졸업자격제의 경우에는 1980년대에 실패했던 졸업정원제를 대신해 공약했던것으로 대다수 대학이 졸업논문, 어학시험 등으로 실질적 졸업자격제를 실시하고 있다. -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정주영이 바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한 장본인임에도 당시로서는 터무니 없다는 평가였으나 2020년대에 와서 정체구간 지하화를 통한 복층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 국민학교·중학교 전면 무료급식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무상급식은커녕 급식을 하는 학교가 적었던 시절로, 이때는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조차도 무상급식 논의가 나오기 전이었다. 이 얘기가 나온 지 6년 뒤인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급식이 전면 실시됐다. 또한, 학교 급식에는 국내 농축수산물을 반드시 써야 한다라는 논의 정도가 나왔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나갔던 기발한 공약이었던 것. 시간 차는 있지만 영국 제외한 서유럽은 20세기 중후반에 이미 교육과 의료는 절대평등한 공공재여야만 한다는 사상이 퍼져 진작에 했었지만 유럽도 개념이 완전히 잡히기 전이었다. 참고로 '무상급식'은 '베푼다'는 성격이 강하지만 '무료급식'은 당연한 '권리'라는 성격을 지닌다. - 재벌 해체
당수가 한국 재벌의 아이콘인 정주영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파격 그 자체였다.[19] - 여성부 설립 및 여성할당제 실시
다른 정책에 비해선 실현 가능성이 높았다. 직선제 이후 유권자 절반이 여성인 고로 자연히 여성 친화적 정책이 생기기 마련이고 실제 여성가족부도 머지 않은 시기에 생겼으나 딸, 며느리 할 것 없이 대외 노출을 꺼리는 걸로 정평이 난 현대가의 가풍에 비추어선 파격적인 부분이 있다. - 금연 공약
당시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선진국 국민들도 일반인이건 엘리트건 레스토랑에 가면 스테이크 먹고 나서 옆에 재떨이 놓고 실내에서 담배 피우면서 대화하던 시기다. 90년대 중반부터 EC 협의로 실내금연 개념이 퍼져나갔고, 한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야 퍼져나갔던걸 생각하면 10여년은 앞선 공약이었다. 실제 정주영도 흡연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혐연에 가까웠다. 이유는 돈이 아까워서라고..
5. 의의
1990년 3당 합당으로 재편된 한국 정치는 주로 보수적인 영남의 민주자유당과 그 후신, 개혁적인 호남의 민주당계 정당과 그 후신의 대결구도로 펼쳐지게 되는데, 그 사이에서 충청이나 강원 등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하거나 중도 실용주의 이념을 들고 나온 제3지대 정당의 시초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들인 정몽준의 국민통합21도 그 후신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실 통일국민당이 지역 기반 정당이었는가는 논란이 있는데, 애초에 통일국민당이 얻은 지역구 24/237석 가운데 충청도에서 얻은 의석이 고작 6석이라는 점[22]이라는 점에서 충청 정당이라고 부를 근거는 미약하다. 강원도 역시 정주영의 고향[23]이긴 하지만, 애초에 인구가 많이 적어서 한국 정치판에서 힘을 크게 못쓰는 지역이기도 하고 결국 강원도에서도 1위를 못한지라 강원도를 대표한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당시 YS의 삼당합당에 반대해 탈당한 후 제3지대로 뭉친 부산 지역의 비DJ-민주화 세력들이 이쪽으로 다수 합류하기도 했으나 결국 부산에서도 이들 모두 낙선해 부산도 아니다. 다만 호남과 부산, 대전에서 한 석도 얻지 못했고 서울, 경기, 영남에서의 지지가 저조했다는 점을 볼 때 그나마 표를 받은 쪽이 충청, 강원인건 사실이기에 상대적으로 강원, 충청 정당이긴 했다.
이 당의 존재 의의를 마법의 언어를 발굴한(?) 것에 있다고 봐야 된다는 의견도 있는데, 당시 통일국민당이 관권 선거와 지역 구도를 무너뜨리겠답시고 폭로한 우리가 남이가 사건(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 통일국민당 시절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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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의원을 비롯한 소속 의원들의 대거 탈당 이후 통일국민당은 비교섭단체 군소정당으로 전략해 신정치개혁당과의 통합 이전 까지 원내총무를 선출하지 않았다.
8. 역대 선거결과
-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체 의석수 득표율 10.36%, (31/299) (원내 3당) 3,574,419표, 전국구 득표율: 17.4%
- 역대 지역 기반이 없는 신생 정당으로서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정당이다.[24]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정주영 3,880,067표, 16.31% 낙선 (3위)
9. 여담
-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정당이 직접 나서서 스트립쇼(...)를 개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2년 11월 28일 충청남도 대천시(현 보령시)에서 열린 지구당 대회 때, 정주영의 대선 지지 연설을 하려던 김용환 의원이 나오기 전 유흥업소 여직원(...)을 동원하여 스트립 댄스를 보여주다가, 특정 부위를 남겨 놓고 벗으려 할 때 유세를 듣던 청중이 그것을 제지하였다. 물론, 통일국민당 측은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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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 정부 이후 |
[1] 지방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 정주영이 순시 차 방문하면 직원들은 "호랑이가 떴다!"며 긴장했다고 한다.[2] 단, 정회장의 고향은 강원도 통천군으로 미수복 지역이다.[3] 울산시 동구에서는 46%를 얻어 1위였으나, 그 외 지역에서는 모두 김영삼에 뒤진 2위였다. 울산 시가지만을 기준으로 하면 약 30%, 울산군(현 울주군)을 포함하면 약 28%를 득표.[4] 노쇠한 정주영의 눈과 귀를 가린 측근들의 정보 왜곡으로 인해 정주영 본인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외국 소식통에서는 정주영의 당선을 확신한다"는 엉터리 조사보고서가 테이블에 오르기도 했다고.[5] 부산에서는 박찬종 후보에게도 밀려 4위를 기록했다.[6] 하지만 당시에도 여론조사 개념이 없던 건 아니라서 한국갤럽에서 13대 대선 예측 결과(다만 당시엔 예측조사 공표 자체가 선거법 위반인 관계로 발표는 일본 방송을 통해서 했다. 현재와 같이 예측조사를 발표하기 시작한 건 1995년 지방선거 때부터의 일) 1988년 총선을 앞두고 여러 언론사에서 공동으로 여론조사를 발표하기도 했으며 그 외에도 전화 조사를 통해 여론조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민주화된 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이다 보니 한계점은 있었다.[7] 물론 안기부와 집권당은 1987년 대통령 선거부터 해외 전문가들을 불러 내부 여론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로부터 조사기법을 전수받아 초보적 수준에서 독자적인 여론조사를 시작한 게 현재 민자당계 정당 산하 여의도연구원의 여론조사팀이다. 여기서 여론조사 기법을 배워서 나간 회사가 리얼미터.[8] 당시 김대중의 비서였던 장성민의 회고로는 선거 바로 다음날 새벽에 정주영이 직접 김대중의 동교동 집으로 찾아와서 선거 조작을 주장하면서 선거 무효화 투쟁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물증은 없다는 정주영의 이야기에 김대중은 바로 거절하고 정계은퇴 결심을 굳혔다고.[9] 이 과정에서 2인자 김동길과 관계가 크게 틀어진다.[10] 후일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여파로 17대 총선에서 기로에 몰린 한나라당이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차렸다.[11] 이 과정에서 각목 난투극이 벌어지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12] YS가 당권을 잡은 후 벌어진 선거여서 YS의 민주계 반대 세력인 민정계, 공화계 사람들이 대거 입당했다.[13] 김한길 같은 인물은 원래 민주당 인사였지만 공천 탈락 후 이곳에 입당해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진 전적이 있다. 김동길의 경우도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진보, 개혁인사였지만 정주영과 손을 잡은 이후에는 성향이 바뀐다.[14] 최영한이라는 본명으로 출마[15] 최불암과 똑같이 예명이고 본명인 정주일로 출마했다.[16] 현재 현대해상화재보험이 본사로 쓰는 건물이다. 계동 사옥이 지어지기 전인 1980년대 초까지는 이 건물이 현대그룹의 본사 사옥이었다.[17] 물론 1989년에 북한에 방북했던 일이나 1990년대 말 금강산 관광 사업, 소떼 방북 등의 대북사업을 펼친 걸 보면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애초에 정주영은 강원도 실향민 출신이다. 게다가 5공 청문회에서도 민주화 이전 군부독재에 침묵했던 것에 대해 용기가 없어 그랬다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하는 등 여러모로 정주영 본인 성향 자체가 의외로 리버럴한 부분이 많았다. 재벌 회장이니 으레 우파라고 보는거지 사실 살아온 행적이나 발언만 보면 보수와는 거리가 있다. 사실 국보법 폐지와 재벌 해체만 보면 이 나라에선 좌파였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18] 1980년대~1990년대 초반 당시의 대학 정원이 수험생들의 1/3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수험생들의 1/3만 대학에 진학할수있었고, 나머지 2/3는 재수, 삼수생이 되거나 아니면 일찍 취직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흔히들 얘기되는 586세대들이 대학가며 꿀발았다는 얘기가 많지만, 실상은 대학정원이 적었기 때문에 대졸자들의 대기업 취업이 쉬웠을 뿐이었고, 대다수의 대학 진학에 실패한 2/3는 보통 중소기업에 취직하거나 자영업을 했던것이 일반적이었다.[19] 낙선되고 난 이후엔 재벌 해체 주장을 따로 하진 않았다. 다만 훗날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이사회, 전문경영인 중심의 투명한 경영을 천명하면서 2000년 5월 정주영 본인, 정몽구, 정몽헌 3부자가 동반퇴진하긴 했다. 이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으나, 어찌됐든 얼마 안가 정주영 본인은 노환으로 사망한다.[20] 군부정권에 데인 정주영 본인 심정이 녹아들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정주영이 재벌 회장 마다하고 정치판에 굳이 나온 것도 그 시절 한 같은게 복합적으로 작용했다.[21] 참고로 정몽준은 13~17대 의원을 모두 울산광역시 동구에서 지냈는데, (18대 지역구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 14대 의원만 통일국민당으로 출마하고 다른 경우는 대부분 무소속이었다. (13대 때는 민주자유당 창당과 함께 입당, 14대 대선 이후 통일국민당이 와해되자 복당한 뒤 신한국당 창당과 함께 탈당했다. 17대 때 자신이 창당한 국민통합21의 의원이었고 말기에 한나라당에 입당했으며 지금의 새누리당 의원.) 반면 현대건설의 어느 사장은 이후 "경제와 정치는 다르다"면서 국민당을 뿌리치고 민자당으로 출마해서 당선이 되었고 이후 서울시장이 되더니... 결국 대통령까지 된다.[22] 충남 4/14석, 충북 2/9석 - 참고로 경기도 5/31석, 강원 4/14석.[23] 물론 정주영의 고향은 북한에 있는 강원도 북쪽 지역이긴 하다.[24] 열린우리당을 들 수도 있겠으나 제3세력이었던 국민당과 달리 여당이었고 탄핵 사태로 인해 후광을 받은 점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20대 총선에서 이름만 보면 친척 관계인 국민의당이 38석, 26.7%(제2당)으로 앞섰으나 국민당과 달리 지역 기반이 확고했다는 차이가 있으며, 국민의 당의 전신 격인 안철수의 진심캠프나 새정치연합을 고려하면 완전한 신생 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20대 총선에서 123석, 25.5%(지역구 1당, 비례 제3당)을 얻은 더불어민주당은 지역 기반이 없긴 하지만(사실 지역 기반을 국민의당에게 뺏겼다.) 신생 정당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