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1:01:50

왕자의 난


1. 개요2. 사례
2.1. 한국사2.2. 중국사2.3. 서양사2.4. 일본사
3. 재벌가의 경영권 분쟁을 비유하는 말
3.1. 삼성그룹 (1969)3.2. 현대그룹 (2000)3.3. 롯데그룹3.4. 한진그룹
3.4.1. (1차: 2002 ~ 2016)3.4.2. (2차: 2019 ~ 진행 중)
3.5. 금호아시아나그룹 (2005 ~ 2015)3.6. 아워홈 (2016 ~ 진행 중)3.7. 해외의 사례3.8. 관련 자료

[clearfix]

1. 개요



왕자를 중심으로 왕위 계승권을 두고 벌어진 반란내전들을 일컫는 말.

대부분 왕위에서 밀려난 왕자가 형제(주로 이복형제)를 죽이고 아버지인 임금은 폐위시키는 전개가 많고 당연히 막장 패륜적인 결말이 난다.[1]

왕자의 반란으로 유명한 사례는 후백제신검이 이복동생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폐위시킨 신검의 난, 당태종이 형 이건성을 죽이고 아버지 당고조를 폐위시킨 현무문의 변이 있고, 한국에서 주로 왕자의 난은 조선 초기에 이방원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을 아울러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성경에서 다윗과 밧세바의 아들인 압살롬이 일으킨 반란이 왕자의 난으로 불리기도 한다.

후술되어 있듯 현대 들어선 재벌가의 경영권 다툼을 왕자의 난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경영권 다툼 양상은 다양한지라 왕자의 난 외에도 형제의 난[2], 남매의 난 등의 용어도 쓰이고 있다. 여성들끼리 후계자 다툼이 일어날 경우 공주의 난이나 자매의 난 쯤으로 불릴 수도 있다.

2. 사례

2.1. 한국사

2.2. 중국사

2.3. 서양사

2.4. 일본사

3. 재벌가의 경영권 분쟁을 비유하는 말

재벌가 자식들이 선대 회장의 재산 상속이나 경영권 계승을 두고 갈등을 빚을 때 마치 왕자들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모습과도 같다 하여 이런 별칭이 붙었다. 옆에서 편히 쳐다보는 LGSK.[5]

당연히 외국도 사람 사는 곳인 만큼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긴 마찬가지인데, 대표적인 게 미국 비상장 기업 중에서 카길 다음으로 2번째로 큰 코크 인더스트리즈의 경영권을 두고 형제 4명이 두 파벌로 갈라져서 경영권을 두고 다투었다. 그리고 패배한 두 명이 이긴 두 명에게 자신의 지분을 거의 헐값에 넘겨주는 수준으로 마무리된 적이 있었다. 참고로 이긴 두 형제가 바로 미국 공화당의 물주 중 하나인 코크 형제다.

3.1. 삼성그룹 (1969)

1969년 말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가 당시 대통령 박정희에게 아버지를 회장 자리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투서를 날리면서 삼성가가 뒤집어졌던 사건. 내막을 보면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독박을 쓰고 감옥을 갔다 온 이창희를 이병철이 잘 챙겨주지 않자, 이에 화가 난 이창희가 이병철 관련 비리 의혹을 청와대에 고발하면서 아버지를 구속시키라고 한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이를 무시하고 이병철의 지위를 유지했다. 당시 청와대는 아무리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정부와 삼성 사이가 서먹해졌다지만 아들이 아비를 고발한다는게 패륜이라고 여겨 못본 척 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이고, 무엇보다 당시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 정권은 세간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지만 이미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부터 경제 전반에 대한 견해를 구하는 등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에 이병철 회장을 쫒아내기는 어려웠다.

어쨌거나 이 사실을 안 이병철은 이창희를 완전히 내쫓아버리면서 삼성가의 왕자의 난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창희는 아버지가 자신을 챙겨주지 않아서 투서를 쓴 것이 아니라 이병철과 박정희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이병철의 삼성이 수장으로 있는 한 삼성은 망할 거라고 생각하여 아버지를 삼성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
"내가 뭘 잘못했다고 미국으로 갑니까? 나는 삼성을 살리려고 그렇게 했습니다. 형님 아시다시피 아버님이 삼성에 개입해 계시는 동안엔 삼성은 절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왕자의 난이 실패하고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이창희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고 이병철은 이창희가 돌아온지 3년째 되는 날 이창희에게 삼성 사장단들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말한다.
“창희 니, 각 사장들에게 잘못했다고 빌 수 있겠나?”

이창희의 모반극에 장남 이맹희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이병철한테 받으면서,[6] 이병철은 장남과 차남을 사실상 호적에서 파버리고 삼남 이건희를 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 결국 후계 구도에서 밀리면서 이병철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이맹희와 이건희는 갈등을 빚게 되고, 이건희의 삼성그룹과 이맹희의 CJ그룹 간의 대립 양상도 매우 강해졌다.

이 과정에서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 이건희 회장은 형제들의 집에 감시용 CCTV를 설치하고, 본인에게는 조카이맹희의 아들을 사람을 붙여 미행하는 등 그야말로 가족들이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7] 이 시기에 이맹희와 마찬가지로 이건희의 둘째 누나 이숙희와 둘째 형수 이영자가 이건희에게 소송을 걸기도 했다.

다음은 2012년 상속 관련 소송 과정에서 이맹희와 이건희 사이에 오간 발언 내용이다.
이맹희: 요즘 건희가 어린애 같은 말을 해서 몹시 당황했다. 앞으로 삼성을 누가 끌고 나갈건지 걱정된다. 건희는 지금까지 형제지간의 불화를 가중시켜왔고 항상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 한 푼도 안 주겠다는 탐욕이 이번 소송을 초래했다.

이건희: 이맹희 씨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니다.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 하던 양반이다. 30년 전에 나를 군대에 고소하고 아버지형무소에 넣겠다고 청와대 그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고발까지 했던 양반이다.[8] 우리 집에서는 이미 퇴출당한 양반.[9]

하여튼 소송 싸움은 1, 2심 모두 이건희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에 대해 당시 법원은 이맹희와 그 외 형제자매들의 지분은 인정하면서도 10년의 제척기간(법률적 권리 행사 기간)이 경과되어 효력을 잃었다는 식으로 이건희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하는데, 사실 이맹희 측이 알게 된 시점이 이미 10년이 지난 시점이라 좀 억울한 부분은 있을듯하다. 물론 이병철 유산이라는 것의 형태 자체가 진짜 있는건지 아니면 이건희가 비자금 핑계를 대는 과정에서 나온 거짓말인지도 확실하지 않고.. 이런 판결에 대해 당시엔 삼성이 법조계에 깔아둔 삼성장학생 출신 판사가 장난질 친 것이란 음모론이 일기도 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2014년 2월 26일, 이맹희는 형제 간의 우애유산보다 중요하다며 대법원 상고포기했다. 아마 여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더이상의 소송무의미하다고 여긴듯하다. 이맹희 본인은 상고 기간에도 본인이 말한 화해의 진정성은 의심하지 말라고 했고 이건희 측도 상고를 포기한 이맹희 측에 다행이라며 가족간 화목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식으로 조금 누그러진 반응을 보였으나, 그 해 5월 10일 이건희가 심근경색으로 의식을 잃고, 이맹희 본인도 이듬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들은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이들의 사망 이후 삼성과 CJ 후손들은 큰 왕래는 없이 남남 비슷하게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맹희의 장례식장에 이건희의 자녀들이 모두 문상을 갔으며, 이건희의 장례식장에도 이맹희의 장남 이재현이 문상을 간걸 보면 친족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하는 듯 하다. 사실 선대의 은원이지 그 자식들은 피가 섞인 친척인데 굳이 영원히 싸울 이유도 없긴 하니 말이다.

2022년 새한그룹 이창희 전 회장의 장남인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의 장례식 때는 모두 조화를 보내고, 정용진 부회장은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이창희 전 회장의 3녀인 이혜진과 조명희 부부가 경영하는 기업들은 범삼성가 그룹들과 상부상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친족으로서 챙겨주는 듯하다.

3.2. 현대그룹 (2000)

현대그룹의 경영권 계승을 둘러싸고 정주영의 아들들이 벌인 싸움을 가리킨다. 정주영의 별명이 회장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도 있어보인다. 국내 재벌가 왕자의 난 중엔 가장 유명한 사건이다보니 지금도 재벌가 왕자의 난하면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10] 이는 한때 재계 1위에 등극한 굴지의 대기업이었지만[11] 경영권을 둘러싸고 아들들이 격돌하게 되었고, 그 결과 거대한 기업 제국이었던 현대그룹이 사실상 해체되어 여러 개로 나눠진 것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바로 위 항목의 삼성그룹의 왕자의 난은 너무나 오래 전 이야기이기도 해서 와닿는 사람이 적은 반면 현대그룹의 왕자의 난은 불과 20년전이라 실제로 그 과정을 메스컴을 통해 접한 사람이 현재에도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0년, 80대 중반의 고령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차남정몽구 현대그룹 공동회장과[12] 5남인 정몽헌 현대그룹 공동회장이 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 3월 14일 밤 기습적으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속보직시킨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그룹 일원이자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었다.

사실 당시 정몽구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13]을, 정몽헌은 건설·전자·증권 부문을 가져갈 예정이었다. 고로 이대로 나뉘면 별 탈이 없는 문제였으나, 사실 장남의 사망 이후 차남으로써 실질적인 장남의 위치에 있는데다가 압구정 현대 특혜분양 사건 당시 아버지 대신 총대를 매고 옥살이[14]까지 했을 정도로 그룹을 위해 나름 헌신해왔다고 생각하던 정몽구는 자동차 산업만 물려받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지금이야 현대 하면 자동차지만, 이때만 해도 현대자동차현대건설현대전자보다 위상이 많이 낮았기 때문이다.[15] 정주영 명예회장이 경영 능력이 두드러졌던 정몽헌을 상당히 예뻐하며 당시 기준으로는 가장 알짜이던 이 두 회사를 넘겨주려고 한 것이다.[16]

물론 자동차도 나름 현대그룹 내에서 상징성이 상당히 크긴 했지만[17] 정몽구 입장에서는 친척에게서 자동차 뺏어서 줬으니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식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했고, 자동차 하나만으로는 향후 성장 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던[18]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의 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했던 것이다.

하여튼 정몽구의 기습에, 2000년 3월 24일 귀국한 정몽헌 회장은 자신의 측근이자 아버지의 가신그룹인 이익치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한다. 이에 정몽구는 26일 아버지를 만나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내지만, 몇 시간 뒤 정몽헌 회장과 가신그룹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다시 그 명령을 무효화시켰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고령과 병세 악화로 경영 일에선 손을 떼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자식들의 불화에 별 수 없이 개입하게 된다.

2000년 3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일단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되는듯 했다. 이후 그룹 회장직을 잃은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은 9월 자동차 관련 계열사들을 가지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를 실시해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든다. 허나 정몽헌 진영은 5월 25일 정 전 명예회장의 지분을 정몽구의 현대자동차로 이동시키는 '거사'를 결행했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2000년 5월 31일 "본인과 정몽구, 몽헌 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나고 정몽헌 회장은 남북경협사업에 전념한다"고 발표했다. 세계적 흐름과 여건상 각 기업들이 독자적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향후 국제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퇴진 사유를 밝힌 정주영 회장의 발표 직후 정몽구 회장은 이것은 정몽헌 측의 음모라며 거부 입장을 밝혔고, 반대로 정몽헌 회장은 6월 1일 현대아산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

허나 이렇게 그룹이 내분으로 어수선하다보니 현대를 향한 시장의 불신도는 높아져갔고, 워크아웃설 등이 난무하며 이는 치명적이게도 신용등급 하락을 자초해 특히 현대건설에 유동성 위기를 불러온다. 후계구도를 둘러싼 형제간 분쟁이 현대건설의 자금위기라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른 것이다. 결국 얼마 안가 현대그룹의 모기업이자 상징인 현대건설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아 휘청거리고[19] 12월 정몽헌 회장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현대건설만 경영 복귀를 한다고 선언한다.[20] 허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1년 8월, 현대건설은 채권단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리고 현대전자도 외환위기 당시 국민투자신탁증권 인수에 동원되고 LG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했다가 2000년과 2001년, 닷컴 버블 붕괴로 반도체 시장이 불황을 맞자 빚 10조 원을 지고 결국 채권단으로 넘어가버린다.[21] 심지어 정몽헌 회장 본인도 아버지의 숙원사업이었던 대북사업 관련해 4억 5,000만 달러(약 5,000억 원)를 북한에 은밀히 송금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2003년 8월 4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투신자살하고 만다.[22]

이후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은 사세를 키워 재계 서열 2위 자리를 굳힌다. 왕자의 난 등을 거치며 한국 최대 기업 제국이었던 현대그룹은 현재의 현대그룹(현정은 - 5남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대자동차그룹(차남 정몽구), 현대중공업(6남 정몽준), 현대백화점(정지선 - 3남 정몽근 회장의 장남), 현대해상(7남 정몽윤), 현대기술투자(8남 정몽일)[23] 등 몇 덩어리로 갈라져 버렸다.

이 쪼개진 그룹과 집안은 이후 2010년 현대건설[24] 인수전이라는 또다시 집안 싸움을 치르게 되었다. 현대그룹이 훨씬 높은 입찰가를 제시해 우선협상대상자가 됐으나, 언론과 정치권에서 자금력에서 열세였던 현대그룹이 자금 조달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다소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가 박탈된다. 그리고 승자는 정몽구 명예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이 된다. 정몽구 회장은 2011년 4월 1일, 계동 현대 사옥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에게 "감개무량하다. 11년 만이다."라는 소감을 밝혔다.[25] 고우영 화백이 수레바퀴에서 패러디하기도 했다.

2022년 기준으로 현대자동차그룹재계 3위[26], 현대중공업그룹재계 9위, 현대백화점재계 24위, 현대해상현대그룹중견기업[27]이다.

3.3. 롯데그룹

닛케이를 비롯한 일본의 경제신문에서는 이들의 경영권 분쟁을 "시게미츠 일족의 난(重光一族の乱)" 이라고 표현하였다.

3.3.1. (1차: 1966)

1966년 신격호 당시 일본 롯데 사장(1921 ~ 2020)의 바로 아랫동생인 신철호 당시 한국 롯데 사장(1923 ~ 1999)이 자신의 형인 신격호랑 동생 신춘호 당시 일본 롯데 무역부장(1930 ~ 2021)이 해외로 출장을 나간 사이에 형과 동생의 도장을 위조하고 회사의 공금을 횡령해서 롯데 화학공사라는 회사를 설립하려다가 구속되었다. 이 일로 형 신격호는 격노하며 신철호를 횡령죄로 고소를 했고 이후 롯데가에서 퇴출되었다. 1999년 신철호는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형이랑 동생이랑 영영 화해를 하지 못했다.

3.3.2. (2차: 2015 ~ 2020)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롯데/경영권 분쟁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장남 신동주 前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사이의 경영권 다툼. 롯데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준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4. 한진그룹

3.4.1. (1차: 2002 ~ 2016)

현대나 삼성, 롯데에 비해 인지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측면이 있지만, 2000년대 초부터 이어진 상당히 심각했던 재벌가 분쟁으로, 실제 분쟁 양상을 보면 다른 그룹들의 분쟁은 새발의 피 느낌도 있다.

창업주 조중훈(1920 ~ 2002)의 아들들인 조양호(1949 ~ 2019), 조남호(1951 ~ ), 조수호 (1954 ~ 2006) , 조정호(1958 ~ ) 중에서 장남 조양호는 생전 3남 조수호와는 사이가 좋았던 반면 나머지 두 동생들과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기업 상속은 대한항공은 조양호가, 한진중공업은 조남호가, 한진해운은 조수호가, 한진투자증권은 조정호가 각각 가져갔다.

조중훈 회장이 작고한 후 네 아들은 계열사를 분할 상속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알짜기업들[28]을 가져간 조양호가 사이가 좋은 조수호에게는 주력 업체 중 하나였던 한진해운를 넘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예전부터 사이가 나빴던 나머지 두 동생들관 거의 원수급으로 사이가 더 나빠졌고, 나머지 두 형제는 본인들이 가져간 회사에서 해외출장 시 대한항공 대신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하도록 할 정도. 이에 발끈한 조양호의 대한항공은 조정호의 메리츠보험(한진투자증권)에 든 보험도 모두 해지했다.

한편 3남인 조수호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형들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났고, 부인인 최은영이 한진해운의 경영을 맡았다. 하지만 운영을 엉터리로 하는 바람에 당연히 잘 될 리는 만무했고, 알짜기업임에도 결국 2017년에 고대로 망해버렸다.

조양호의 대한항공과 조남호의 한진중공업으로 대표되는 한진그룹의 상속분쟁은 현대그룹 왕자의 난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삼성 - CJ 간에도 그나마 삼성 라이온즈 공통지분이란 마지막 공통점이 하나 있고[29] 현대 일가는 자기들끼리 회사 인수전과 교류가 지금도 활발하다. 즉, 자신들이야말로 현대그룹의 정통임을 내세우고 싶어하는 것. 하지만 한진그룹 자손들은 동족혐오 수준의 인수전조차 안 하려 들며, 범롯데가처럼 정말 남남처럼 지낼 정도라서 삼성과 현대보다도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아예 조중훈 회장의 제사도 따로따로 지낼 정도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차남이 가져간 한진중공업은 회사 그 어디에서도 자기들이 한진그룹의 정통 계파임을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없다. 한진중공업 입장에선 한진그룹과 그 어떤 이유로도 안 엮이고 싶어하며, 한진그룹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기에 이를 정도로 사이가 몹시 안 좋다.[30]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매각되어 동아건설 휘하 HJ중공업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고, 한진중공업그룹은 한진중공업 없이 에너지계열 그룹으로 축소되었다.

3.4.2. (2차: 2019 ~ 진행 중)

2019년 조양호 회장이 별세하자 그 자식들 사이에서도 경영권 분쟁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기어이 조현아조원태가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쪽은 누나와 남동생이기 때문에 남매의 난이라고 부른다. 땅콩의 난.

2020년 3월 27일 일단 1차전에서는 조원태가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지만 조현아가 다시 세를 불려 재도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참여하면서 산업은행이 지주회사 한진칼의 대주주가 됐다. 산업은행은 조원태 회장의 아군 역할을 할 예정이며, 산업은행의 증자규모(지분참여규모)가 5천억에 전환사채 3천억까지 들고 있을 상황이라 사실상 양강구도가 깨지게 됐다. 다자연합(조현아+KCGI+반도건설)이 8천억을 추가로 지분 매입을 하거나 어머니 이명희, 동생 에밀리 리 조(조현민)을 끌어들이지 않는 한 사실상 패배가 확정됐다고 보여진다.

3.5. 금호아시아나그룹 (2005 ~ 2015)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금호석유화학그룹 문서
번 문단을
형제의 난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박인천의 아들 박삼구가 경영 실패를 거듭하자 동생 박찬구가 이에 반기를 들고 금호석유화학그룹을 따로 차려 분가한 사건이다.

3.6. 아워홈 (2016 ~ 진행 중)

2016년 첫째(장남) 구본성이 범LG가의 장자승계원칙을 내세우며 당시 부사장이었던 막내(3녀) 구지은을 밀어낸 것이 남매의 난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후 2020년 구본성이 보복운전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구미현(둘째, 장녀), 구명진(셋째, 차녀)[31], 구지은 이 세 자매가 연합해서 주주총회에서 오빠 구본성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해서 3녀 구지은이 부회장이 되었다. 하지만, 2022년 배당금 축소와 관련해서 장녀 구미현이 불만을 느끼면서 세 자매 연합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경영권을 되찾을 기회를 보던 구본성은 구미현을 끌어들여서 임시주총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는데 둘의 지분율을 합치면 50%가 넘기 때문에 구미현이 구지은의 사내이사 재선임 여부를 결정했다. 결과적으로는 놀랍게도 그동안 경영일선에 한 번도 안 뛰어들었던 구미현이 회장이 되었고 이영열(구미현의 남편)이 부회장이 되었다. 구미현이 구본성을 제치고 회장이 되면서 아워홈은 장자승계 원칙을 따르는 범LG가의 회사 중 이례적으로 회장의 성별이 여성인 회사가 되었다. 구미현이 아워홈의 회장이 되면서 구미현이 범LG가의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을 완전히 깨부쉈다. 또한, 구미현은 범삼성가 3세 여성 중 최초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3.7. 해외의 사례

3.8. 관련 자료



[1] 대개 아버지를 허울뿐인 상왕(상황)으로 올리고는 유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 그러나 왕정시대에는 왕의 동생과 숙부들도 (선왕의) 왕자로 대우받거나 왕'제', 왕'숙' 등으로 불리곤 했으므로 형제간의 다툼도 왕자의 난으로 총칭해도 틀린 호칭은 아니다.[3] 아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전지왕)가 왜국에 있었어서 훈해(아신왕의 동생이자 전지왕의 숙부)가 태자의 귀국을 기다리며 정사를 대리하고 있었으나 훈해의 동생 설례가 형을 죽이고 왕을 참칭했다.[4] 무사히 왕위를 잇고 무사히 산 왕이 없지는 않으나 얼마 못 가 말짱 도루묵.[5] LG는 구씨와 허씨의 관계를 정리하여 GS그룹으로 분리되었고, 나머지 LG그룹 회장 직계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도 LS그룹, LF, 아워홈, LT그룹, 희성그룹을 가지고 분리됐으며, 이후 구본무 회장의 동생 구본준 회장이 LG상사를 분리하는 등 계속해서 무난하게 분리 중이다. SK는 사소한 잡음은 있어도, 그룹의 대권은 현재 회장최태원이 가지고 있다. 또한 창업주 최종건의 자식과 2대 회장인 친동생 최종현의 자식 간에 따로 지분구조를 형성하되 한 그룹으로 뭉쳐있는 방식이라 갈등이 있을 게 없다. 이미 지분을 나눠놓았으니 말이다.[6] 이맹희 본인은 죽을 때까지 부정했다. 이런 의심이 나온 이유는 이 투서를 청와대에 전달한 루트에 있는 인물 중 하나가 당시 이맹희와 친하던 전두환 중령이었기 때문인데, 이맹희 회고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자기가 어릴 적부터 대구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로(이병철이 삼성상회에서 국수 장사할때 건너편 빈민촌에 전두환 일가가 살아 전씨 일가가 알바하러 오기도 했다고 한다) 본인이 부자니 술값같은 것도 잘 내줬는데, 이후 대통령이 되고 나선 자신을 탄압했다며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7] 2010년대 이맹희와 삼성의 재산 상속 소송 항소심 재판 결심공판에서 이맹희가 재판부에 제출한 A4 용지 5장 분량의 편지에 이 내용이 등장한다.[8] 물론 이맹희 본인은 부정했다.[9] 여담으로, 당시 어느 기자가 '이건희 회장은 원래 말수가 적고 과묵한 사람인데 저렇게 말을 한 번에 속사포로 말하는 건 처음 봤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자 이건희는 '사적인 일로 개인적인 감정을 좀 드러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고 사과한다.[10] 다만 후술된 롯데 2차 왕자의 난도 많이 유명해지긴 했다.[11] 현대그룹 자체의 성과도 있었지만, 현대와 1위를 다투던 삼성그룹이 1987년 이병철 회장 사후 삼성그룹/제일제당그룹/새한그룹/한솔그룹/신세계그룹/중앙그룹 등으로 나뉘면서 삼성그룹 자체가 작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12] 1982년, 정주영의 장남이자 정몽구의 형인 정몽필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 시간이 오래 지났기에 정몽구 회장이 실질적으로 장남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정몽필은 생전에 아들이 없었고 딸만 둘이었다.[13] 현대자동차는 본래 정몽구 것도 아니었다. 정주영의 동생인 정세영이 30년간 키운 회사로, 정세영은 이 회사 회장직을 바탕으로 현대그룹 회장까지 올랐으며, 1996년에는 아예 정몽규를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올리고 분가를 준비하고 있었다.[14] 매우 큰 뇌물 스캔들이었으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봐주기 수사의 전형이라서, 1심 판결 전 75일 구속된 게 전부다. 책임자 정몽구를 포함, 대부분 선고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관련자 수백 명 중에 중형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본인 입장에선 그래도 책임을 뒤집어 쓴 거긴 하다.[15] 물론 당시에도 현대차는 국내에선 나름 위상이 있었지만(부도 후 갓 현대그룹에 기아자동차가 합류한 후에야 현대자동차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다.), 현대건설은 현대의 모체라는 상징성이 있고, 현대전자 역시 당시만 해도 LG반도체를 통합해서 삼성전자를 맹추격하던 상황이었기에 현대차가 비빌 수준은 아니었다.[16] 정주영은 초졸이라는 짧은 학력이 평생의 컴플렉스였다. 그래서 학구파 기질이 강했던 정몽헌, 정몽준을 제일 예뻐한 반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현장에서 발로 뛰는 스타일의 정몽구에게는 아주 엄했다. 물론 정몽구 같은 현장파도 기업 경영에 있어 아주 중요한 자세이나, 정주영은 본인이 그 현장파로서 온갖 생고생을 다 했었기에 정몽구를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정몽구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출신이었으니 학벌 자체는 높았다지만 SKY 출신인 정몽헌, 정몽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17] 정주영의 첫 사업이 자동차 정비소였다.[18] 틀린 말도 아니던 것이 당시 현대자동차는 대주주로서 몽니를 부리던 미쓰비시자동차와 결별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였다.[19] 오죽하면 정부까지 나서서 몽구, 몽헌 형제의 화해를 중재할 정도였다.[20] 참고로 정주영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21일 노환으로 사망한다.[21] 이후 현대전자는 채권단에 의해 하이닉스, 매그나칩, 하이디스 등으로 분리되어 팔려나가거나 폐업한다.[22] 이때 정몽구 회장은 빈소를 지키며 연신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측근들은 정몽구가 정몽헌과 생전에 화해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밝혔지만, 가족 회의에선 화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정몽구가 외면했다며 한 유족이 정몽구 회장을 나무란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정몽헌과 친했던 정몽준도 꽤나 섭섭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두 사람의 왕자의 난 때 형제친척들은 대부분 중립을 지켰다고 한다. 다만 정몽구 회장은 정몽헌 회장이 한창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동생의 구명을 위해 노력했고, 이후 동생의 장례식에서 상주를 자처했다.(이건 정몽헌의 장남이 미성년자였던 것도 원인)[23] 다만 현대기술투자는 사실상 정몽준이 가지고 있었고, 정몽일은 경영만 맡았던 상황이었다. 이후 2016년에 현대중공업이 지주회사 체제로 돌아서면서 정몽일은 현대기술투자를 받아서 분가했다.[24] 현대그룹의 모체로서, 현대그룹의 정식 계승자라는 정통성 확보를 위해서는 이 곳을 인수할 필요가 있었다.[25] 사실 현대그룹 계동 사옥은 현대중공업이 5개층을, 현대자동차가 10개층을 나눠서 소유했지만, 막상 그룹의 정통성과도 같았던 현대건설 자체는 소유하지 않았던 데다가 본인도 껄끄러운 기억이 있어서 오지 않았다. 이후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11년 만에 계동사옥에 맘 편히 들어선 것이다.[26] 2021년까지는 2위였다.[27] 현정은 회장 체제에서 현대엘리베이터 - 현대상선 - 현대증권 3축을 중심으로 운영이 이뤄졌다. 하지만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을 잃으면서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무벡스만이 그룹에 남게 되었는데, 현대무벡스는 현대엘리베이터가 해오던 물류자동화와 스크린도어 사업을 물적분할한 것이니 사실상 현대엘리베이터 하나만 남았다고 봐도 무방하다.[28] 대표적으로 대한항공, 한진택배, 칼호텔, 한진고속(2006년 매각).[29] 지금은 삼성의 지분이 제일기획에 넘어갔지만, 애초에 제일기획은 삼성의 광고회사다.[30] 이 안 좋은 사이를 일조한 건 바로 그 잘난 장남의 . 하도 하나같이 막장인 인간성들 때문에 '조카들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참다못한 동생들이 얘기를 하자 이 얘기를 들은 조양호가 격분하여 대판 싸웠다는 얘기가 있다. 결국 이 의 사건사고로 인한 화병이 조양호 회장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조양호 회장이 상속에 대한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기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자식들 간 경영분쟁이 예상되는데, 못 키운 자식 감쌌다가 선친의 한진을 분해시키고 본인의 한진그룹마저 분해시킬 위기에 빠뜨린 셈이다. 그러게 말 좀 듣지[31] 상술한 한진가의 조정호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