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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LG그룹 제3대 회장 구본무 具本茂|Koo Bon-moo | |
<colbgcolor=#a50034> 출생 | 1945년 2월 10일 |
경상남도 진양군 대곡면 단목리 (現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1][2] | |
사망 | 2018년 5월 20일 (향년 73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장지 |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화담숲[3]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능성 구씨[4] |
호 | 화담(和談)[5] |
직업 | 기업인 |
학력 |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삼선고등학교[6][7] (졸업)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상학 / 중퇴) 애슐랜드 대학교 (경영학 / 학사)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경영학 / 석사) |
부모 | 아버지 구자경, 어머니 하정임 |
형제자매 | 남동생 구본능 남동생 구본준 남동생 구본식 여동생 구훤미 여동생 구미정 |
배우자 | 김영식[8] |
자녀 | 장남 구원모[9] 장녀 구연경 차녀 구연수[10] 양자 구광모[11] |
병역 | 육군 병장 만기전역 |
종교 | 불교[12] |
혈액형 | B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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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당히 실력으로 1등을 하든지, 부정한 방법으로 1등을 할 거면 차라리 2등을 하라.
대한민국의 기업인. LG그룹 제3대 회장.2.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LG가 문서 참고하십시오.3. 그의 경영이념
- 정도경영
- 가치창조형 일등주의
- 도전주의와 시장선도
4. 야구 관련
재계에서 삼성 이건희 - 이재용 부자,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두산그룹 박용만 회장 등과 더불어 소문난 야빠로 알려져 있다. 1군은 물론 2군 선수들까지 70여 명의 이름과 학력을 전부 다 외웠을 정도. 럭키금성그룹은 야구팀 LG 트윈스가 MBC 청룡을 인수한 첫 해인 1990년과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후 1995년에 그룹명을 LG로 고쳤으며[13] LG 트윈스 창단 원년부터 2007년까지 17년간 구단주를 맡아 팀에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단목 행사'라는 이름으로 LG 트윈스 선수단 + 프런트 + 그룹 계열사 사장단에 LG 트윈스 출입기자까지 부르는 전체 단합행사가 있었는데 구 회장이 직접 생각하고 주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목'은 구 회장의 외가이자 생가가 있는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의 이름을 딴 것인데 이 행사는 21세기가 되고 구 회장이 동생 구본준 부회장에게 구단주 자리를 넘겨준 후 사라졌다고 한다.
김용수의 회고에 따르면, 구본무 회장은 2군 선수들 이름까지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팀에 관심이 많았고[14] 가끔씩 선수들을 자택으로 불러서 격려했다. 또한 선수들을 불러서 회식을 한 적이 있었는데, 선수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 "밖에서 피지 말고 안에서 피워라."라고 할 정도였다. LG의 보수적인 문화를 감안하면 선수들과 격의없이 어울린 모습이 의외로 보일 정도. 그 만큼 선수들에게 너그러웠다는 것이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1994년 우승 이후 일본산 아와모리 소주를 사서 우승주로 만든 것과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을 하자, 나중에 LG 트윈스가 우승했을 때 한국시리즈 MVP에게 주기 위해서 당시 가격으로 8천만원 상당의 롤렉스 시계를 준비한 것도 그의 야구팀 사랑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15] 심지어 1999년에 부진하자, 2000년에는 아예 '우승시 백지수표'라는 큰 보너스까지 걸었을 정도였다.
1990년대 중반에 손해를 감수하고 한국 내 최초 돔경기장 건설에 의욕을 보인 것도 구 회장이었는데, 만일 1997년 외환 위기가 오지 않았다면 LG는 2000년대 초에 잠실을 떠나 뚝섬 돔 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삼았을 것이다.
2000년 들어서 동생인 구본준 LG그룹 부회장에게 구단주 자리를 물려줬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서 이후에도 1년에 몇 경기는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으로 직관을 왔다고 한다. 참고로 구본무 회장의 또 다른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KBO 총재가 되면서 구본준 구단주 대행이 사임하고, 당시 LG U+ 신용삼 사장이 구단주 대행을 맡았다가 신용삼 대표 퇴임 이후에는 구본준 부회장이 다시 겸임했었다. 지금은 4세 경영체제로 접어들면서 구광모로 구단주가 바뀐 상황.[16]
5. 여담
- 2014년, KBS 시사기획 창의 보도에 따르면 외손자, 외손녀 4명이 미국시민권자라고 한다.
- 허영만의 꼴에서도 언급되었지만 관상가들이 꼽는 전형적인 부자 관상이다. 조선시대 만석꾼의 관상의 표본으로 유명한데 꼴에서는 어릴 때 구본무 회장의 관상을 본 관상가가 돈이 붙어다닐 관상이라고 표현하였다. 정확히는 거북이상이라고 한다는데, 거북이가 예전부터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영물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 역시 거북이상이라고. 물론 관상가도 LG라는 재벌 가문의 3대라니 당연히 부자인 점을 고려해 그러한 평가를 내렸겠지만 다른 대기업 회장들에 비해 상이 좋다는 평가가 많다.
- LG전자의 스마트폰 주력 상품 옵티머스 G는 구본무의 지시로 LG 계열 회사들의 핵심 기술이 집합된 제품으로 계획되었으며, LG전자를 주축으로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LG화학 등이 개발에 참여했었다. 이 때문에 회장님폰 혹은 구본무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코드 네임이 펫 네임이 된 특이한 사례로[17], 회장님폰에 대한 관심이 크던 와중에 프로젝트 gee가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출되었다. 이것이 여론에 오르내렸는데, gee가 알파벳 G와 발음이 비슷하여 'G'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고 결국 펫 네임으로 대문자 'G'가 확정되었다. 구본무 혹은 Great의 약자로 G를 썼다는 설도 있다.
-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가 우승한 뒤, 다음 LG 우승 때의 MVP에게 선물할 최고급 명품 시계[18]를 준비하고 우승 선수단과 같이 축배를 들기 위해 오키나와에서 수제 아와모리 소주를 공수해 준비했지만, 이후 LG가 우승을 번번이 놓치면서 소주도 시계도 오랫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 하게 된다. 둘 다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에 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시계는 1998년에 구본무 회장의 해외출장 때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19] 2013년 LG 트윈스 프런트에 따르면 이 두 물건은 아직도 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술이 식초되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나오는 중. 참고로 이 아와모리는 장기간 묵혀서 마시는 쿠스(古酒)인 데다가 40도가 넘는 꽤 독한 술이라 식초가 되려면 그래도 50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2019년 스포츠 조선이 LG구단에 문의한 결과
다행인지식초가 되어버리진 않았지만불행하게도2017년에 술은 거의 증발해버렸다고. 그리고 다시 채웠다고 한다. 참고로 1994년 이후 LG는 20년 넘게 우승한 적이 없기에 구본무 회장 본인은 증발되기 전의 술을 단 한 번도 마시지 못한 채로 2018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다가 5년 후인 2023년에 LG 트윈스가 드디어 우승을 하면서, 마침내 봉인되었던 술도 풀었고, 시계 주인도 찾아갔다.[20] - 이낙연 전 총리가 자신의 기자 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글을 보면 술을 마실 때 일반적으로 중간 정도 가격대의 술을 즐겼다고 한다. 너무 싼 술은 위선처럼 보일 수가 있고 너무 비싼 술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상기된 경영이념이 일상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
- 배우 구본승과 이름이 비슷하여 친척관계로 많이들 착각하는데, 구본승은 LG그룹 일가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둘 다 능성 구씨 본 자 항렬인 건 맞는지라 착각할 여지가 높지만, 조상만 같을 뿐 아주 먼 친척이다. 그와 같은 항렬을 가진 LG그룹 일가에서 '本'자 항렬을 사용하는 사람이 꽤 많다.
- 2004년에 동생 구본능의 장남인 구광모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구본무는 슬하에 딸만 둘을 뒀는데, 대를 이으려면 아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룹 경영에 여성을 참여시키는 삼성[21], 현대그룹 등과는 달리, 유교적 성향이 짙은 LG그룹은 그룹 경영에 여성을 참여시키지 않는다.[22] 구광모는 차기 CEO 수업을 받고 승계했다. LG그룹 대리로 입사. 사실 구본무도 구원모(具元謨)[23]라는 외아들을 뒀는데, 이 사람이 1994년 6월에 향년 19세로 요절했다. 이때 상심이 컸던 구본무는 다시 아들을 얻으려고, 1996년에 51세인 몸으로 자녀를 다시 얻었다만 문제는 또 딸이었다는 것.[24] 50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아들을 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60살이 되자 조카를 양자로 입적한 것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택과 묘소가 있는 봉하마을에는 북한에서 들여온 약밤나무가 심겨 있는데, 이 나무는 구본무 회장이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구 회장이 2007 남북정상회담 때 LG그룹 회장 자격으로 노 대통령과 방북에 동행했을 때 북한의 약밤을 접했고, 두 사람이 서로 맛있게 나누어 먹은 인연이 있었는데, 이후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구 회장이 북한 측으로부터 약밤나무 묘목을 구해다가 봉하마을에 보냈다고 한다. 다만 당시에는 친노 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극심하던 때라서, 봉하마을에서도 이러한 일을 외부에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 마냥 온후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대기업 총수로서 필요한 결단력과 승부사적 기질을 보인 사례들도 있다.
- 첫 번째 사례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주도한 기업 간 빅딜(주력업종 지정으로 인한 반강제 기업 교환)에서 외국계 컨설팅 회사 아서 디 리틀(ADL)의 편파적인 평가로 인해 LG그룹 전자사업군 내에서 알토란 같은 기업이었던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게 된다. 당시 이 컨설팅 회사에서 해당 업무를 맡은 한국인 컨설턴트 한 명이 LG반도체보다 역량이 부족했던 현대전자를 더 높게 평가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넥센 팬들이 빌리장석이라고 칭송했었던 이장석이다. 이러한 빅딜 안을 낸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반발하여 LG그룹 사옥인 트윈타워에서 5분 거리인 전경련에 1999년부터 2013년 11월까지 근 15년간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동업자 관계였던 GS그룹 허창수 회장은 2008년부터 전경련 회장을 맡은 바 있다.
- 두 번째 사례는 LG전자가 남용 부회장 시절의 여러 경영 실패들, LG전자의 글로벌화를 한다며 외국인 임원들을 많이 뽑았는데 한국 직원들과 말이 안 통하니(…) 직원들의 협력은 고자가 되어버렸다. 이건 그렇다 쳐도 진짜 큰 문제는 컨설팅 회사 맥킨지 제안을 너무도 잘 따랐다는 것. 전문 상담사의 조언을 참조하는 것은 좋은 경영 방법 중 하나이지만 문제는 2010년 당시, 스마트폰은 곧 망할 테니 LG가 기존에 하던 대로 피처폰에 투자를 한다[25]라는 오판으로(…) MAXX 같은 고성능 피처폰 개발에 힘을 쏟았다. 같은 시기에 삼성이 윈도우 모바일을 택한 옴니아를 재빨리 쓰레기통에 갖다버리고 안드로이드를 탑재한 갤럭시를 내놓아 S2부터는 아이폰의 진정 대항마로 꼽히게 되고 2016년 현재까지도 HTC, 소니, 모토로라 등이 무너지는 와중에 여전히 아이폰의 대항마로 꼽히는 반면 LG는 휴대폰 사업부가 증발할 뻔했다. 결국 구본무 회장 사망 3년이 지난 2021년에 LG전자 핸드폰 사업부는 해산되었다.
- 이로 인해 발생한 손실들을 만회하기 위해 수십 년 만에 친정 체제를 선포한다. 그 전까지 LG전자는 구본무 회장 체제 하에서 오너가 방향 제시에 관여했던 삼성전자와 달리 전문경영인 체제를 쭉 유지하고 있었다. LG반도체의 경우에는 정말 중요한 사업이라 오너 일가가 챙기긴 했지만. 그리고 작은 동생 구본준을 LG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보내고[26] 무려 1조 원의 유상증자를 추진했다. 그것도 재벌들이 많이 써먹는 감자 후 유상증자가 아니라 공모 형식의 무감자 유상증자를 말이다! 이로 인해 (주)LG의 LG전자 주식 보유량이 30%대 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간신히 지주회사 자격을 유지했지만, 그 덕분에 LG전자는 남용 시절의 손실들을 극복하고 지금 수준으로 올라왔다.[27] 그야말로 회장님의 뚝심이 드러난 에피소드.''' 역시 대기업 총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듯.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다른 기업 총수들처럼 청문회에 불려나갔는데, 두 재단에 기부금을 내고도 확실한 혜택을 받은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질의에 막힘 없이 답변했다. 특히 하태경 의원이[28] "정부에서 요구하면 요구한다고 계속 돈을 낼 겁니까?"에 대한 답변이 걸작. "국회에서 입법으로 막아주십시오." 비록, 말은 품위 있게 했지만 국회, 그것도 이 사태의 최소 종범이나 다름없는 새누리당에게 뼈 있는 비판의 메시지를 던진 것. 이에 할 말을 잃었는지 하태경 의원은 다른 부분에 대한 질의로 화제를 돌렸다. 더군다나 화면분할 방식으로 두 사람을 동시에 띄운 화면을 보면 구본무 회장의 풍채가 하태경보다 더 좋아보여서, 특히 어깨 너비 차이가 압도적이었다. 두 사람의 입장이 뒤바뀐 듯한 느낌도 줬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LG그룹을 찬양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는데 구본무 회장의 청문회가 특히 찬양받았다.
- 같은 집안의 다른 오너 경영진 대부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살아 생전에 그룹 임원들에게 크게 화를 낼 때에도 언성은 높일지언정 절대 욕설과 반말을 안 쓰고 경어로 질책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겁니까?"나 "왜 이렇게 일을 처리한 거요?" 정도. 그나마 말을 짧게 한다는 게 하오체를 쓰는 게 최대치였다고. 이는 조부 시절부터 이어져 온 LG그룹 총수들의 긍정적인 전통으로 평가된다.
- 만화가 허영만과 나이를 초월한 친구[29]로 식객 4권 20화 삼계탕 편에 등장하기도 했다. 근데 둘의 친분을 모르는 LG그룹 비서실에서 만화를 보고 왜 회장님 얼굴을 만화에 넣었냐고 전화로 항의했다고 한다.
- 새 관찰을 좋아하는 탐조가로도 유명했다. 1995년 회장 취임 이후로 LG 트윈타워 30층 회장 집무실에 망원경을 놓고 밤섬에 있는 새를 관찰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 덕인지 LG 상록재단에서 '한국의 새' 라는 포켓용 도감 책자를 출판하였고, 구본무 본인이 초판의 발간사를 써서 수록했다.#
- 사망 후에 고인의 평소 뜻에 따라, 수목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대기업 회장 중에는 처음이다.
6. 수상경력
- 금탑산업훈장 (1993)
- 산학협동상 (1996)
- 매경이코노미 올해의 CEO (2009, 2012)
- 체육훈장 거상장 (2012)
7. 사망 및 경영 승계 작업 진행 상황
2018년 5월 17일에 와병으로 인해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는 기사가 나왔으며, 위독한 상황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구 회장이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12층 특실 121병동에는 이날 정오부터 친인척들의 병문안이 잇따랐다.구 회장이 입실한 곳은 무조건 허가 받은 사람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방문자들 중 본인을 구 회장의 직계 친인척이라고 소개한 한 중년 여성은 “구 회장의 건강이 악화된 상태”라며 “발만 주무르다 나왔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해 두 차례의 뇌 수술을 받은 바 있는 구 회장은 서울대병원에서 와병하였다. 업계 일각에서는 구 회장이 수술 후유증으로 위독한 상태라는 소문이 나왔다. 보도
결국 같은 해 5월 20일 오전 9시 52분, 입원해 있던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이때가 향년 73세. # 무의미한 연명치료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고통 받는 것이 싫어 연명치료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구자경 명예회장은 연로한 데다가 멀리 천안시에서 거주하고 있는데다 본인도 건강이 영 좋지 않아 빈소를 찾지 못했다.[30]
이보다 불과 이틀 전인 5월 18일 LG그룹은 구본무의 양자(실제 혈연관계는 조카) 구광모가 승계하는 4세 경영을 본격 선언했다. 다만 2018년에 아직 40세에 불과했고, 직급도 아직은 상무라서 경영 전선에서 본격적으로 대두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인다. 구본무 회장의 와병 중에 LG를 실질적으로 이끌던 둘째동생 구본준 부회장의 경영 정리[31]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32]
장례는 평소 소탈하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던 고인의 뜻에 따라 유족들이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렀으며, 화장 한 뒤 곤지암 인근에 수목장에서 진행되었다.[33] 조문과 조화를 사양하겠다고 밝혔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등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다. 그 외에는 LG그룹 내 사장단들이 일부 방문한 정도. 장례를 간소하게 치른 것에는 LG그룹 특유의 유교적인 문화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 유교식 장례에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는 것이 전통이기 때문이다.
부고가 전해진 당일 LG 트윈스는 앰프 응원을 중단하고 원래 SEOUL 유니폼을 입기로 했으나, 대신 LG 트윈스 선수단의 기본 유니폼에 검은 리본을 달았고, 선수단 전원도 스타킹을 올린 농군패션으로 경기에 임했다. 주장 박용택의 제안에 선수단이 동의했다고 한다. 한편 이날 LG 트윈스는 한화 이글스에게 시즌 첫 승을 거두며 회장님의 영전에 승리를 전했다. 한화 역시 LG의 요청에 동참하여 앰프 응원을 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과도 친분이 있었던 듯 하다. 1945년생 동갑내기이고 연대 동문이라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구 회장 장례식 때 박 회장은 3일 모두 빈소를 찾았고 발인까지 함께 했다. 관련 기사
[1] 진양 하씨 집성촌으로, 구본무의 외가가 있는 곳이다.[2] 관련기사[3] 수목장으로 안장되었다.[4] 도원수파(都元帥派)-호양공계(胡襄公系) 28세손 본○(本○), 동○(東○) 항렬.(족보)[5]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을 갖고 있다. LG그룹 소유 리조트인 곤지암리조트 옆의 대형 생태 수목원 '화담숲'이 그의 호를 따서 만든 곳이다. 실제로 구 회장은 생전에 이 숲을 가꾸는 과정에서 상당한 애착을 가졌으며 별세 후 그 의 시신도 화장 후 화담숲에 수목장 형태로 매장됐다. 화담숲 내 소나무 정원에는 구 회장을 기리는 추모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6]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존재했던 고등학교로, 삼선중학교와 함께 설립되어 서울특별시 성북구 동소문동1가에 있었다. 1972년 2월, 9회 졸업생 배출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이건무, 진태구 등이 동문이다.#[7] 한때 서울고등학교 출신으로 알려지기도 했다.#[8] 金英植. 구 안동 김씨 김태동(金泰東)의 딸.[9] 19세에 교통사고로 요절했다.[10] 장남이 사망하여 아들을 낳고자 했으나, 셋째로 딸이 태어났다.[11] 첫째 남동생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즉 구본무에게는 장조카다.[12] #[13] 물론 LG그룹에서는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그룹명 변경의 상관관계는 없다고 밝히는 중이다. 단, 이미 내부적으로 LG 라는 이름으로 바꿀 계획을 잡은 상황에서 야구단이 호성적을 보이자 제대로 홍보효과가 나서 그룹명을 바꾸는데 탄력을 받았다고 보면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LG 트윈스 외에도 'LG' 사명을 건 계열사들이 있었기 때문.[14] 삼성 구단주인 이건희도 야구를 좋아했다고는 하나 2군 선수들 이름까지 외우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한화 구단주인 김승연도 마찬가지.[15] 하지만 LG는 98년에도 준우승을 했고, 우승주도 우승시계도 02년에도 준우승을 하면서 주인을 찾지 못했다.구본무 회장은 우승주와 우승시계가 주인을 찾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리고 구 회장이 별세한지 5년만에 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아와모리 소주와 롤렉스 시계의 주인은 오지환으로 결정되었다.[16] 하지만 구광모 회장은 구단주 대행을 두고 있는데 그 사람이 그의 생부이자 KBO 총재를 맡았던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다.[17] 옵티머스 G의 제품명은 한국 내수용이 LG-F180, 글로벌 모델이 E975이다. 펫 네임은 마케팅적인 측면이 강한 별명이다.[18] 롤렉스 116598 SACO, 롤렉스 데이토나 레오파드라고 불리는 모델로, 1994년 당시에는 8만달러가 넘던 시계였다. 2022년 현재는 한 번도 차지 않고, 뜯지도 않은 새 제품은 찾아보기 힘들며 중고의 경우 관리상태가 아주 좋은 것은 약 16만달러에 이른다(00년대 중반 제품까지 있으므로 94년 제품의 가격은 다를 수 있다)[19] 사실 그 때만 해도 LG 트윈스의 우승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 결과적으로 LG 트윈스는 2년 연속으로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20] 다만 오지환 본인은 받길 사양하고 구광모 회장에게 주겠다 했는데, 이유는 선대의 유품이 부담스러워서라고. 대신 모두가 볼 수 있게 전시해달라고 인터뷰에서 부탁했다. 이후 오지환에게는 구광모 회장이 개인사비로 새시계를 선물해주었다.[21] 삼성그룹이 이병철 회장 사후 2세 경영으로 넘어갈 때에 이병철 회장의 딸인 이인희의 몫으로 한솔그룹이, 이명희의 몫으로 신세계백화점이 주어졌다. 이숙희는 LG가문의 며느리였던 탓에 큰 족적을 남길 수 없었고, 이순희는 알머스(영보엔지니어링)을 물려받았다. 나머지 딸들은 정실 자식이 아니었던 탓에 승계받은 회사가 없다.[22] 아워홈 구지은 대표이사가 이례적인 경우이다.[23]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24] 같은 해에 구본능은 아내인 강영혜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구광모는 그 때 고3이었는데, 친어머니의 사망에 충격을 받았다고.[25]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맥킨지의 LG전자 프로젝트는 오히려 어떻게 하면 스마트폰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선택할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맥킨지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MS와 구글의 운영체제에 집중하라는 얘기였다.[26] 당시 LG상사 부회장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LG전자 부회장으로 전보되었다. 사실상 오너가 직접 LG전자를 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27] 다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애물단지 취급이던 MC 사업부를 청산해야 했다. 남용 시절의 삽질로 인해 LG전자는 후발주자의 입장이었으며 계속해서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28] 하태경 의원은 “명분만 맞으면 앞으로도 돈 낼 것이냐”고 질책했고, 이에 구본무 회장은 “연금이나 불우이웃 돕기 같은 일에는 앞으로도 지원을 하겠다”고 답했다.[29] 허영만 화백이 1948년생으로 3살 연하이다. 다만 학년, 기수 문화에서 자유로운 해방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2~3살의 나이차이를 막론하고 친구로 지내는 케이스가 많았다.[30] 프로필 상단을 보면 알겠지만, 기구하게도 구본무 본인도 생전에 아들을 먼저 잃었다. 1년 후 겨울에 부친 구자경도 결국은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숨졌다.[31] LS그룹, LIG 등의 예전 사례를 볼 때, 현재 갖고 있는 LG 지분을 일부 계열사와 바꾸어 분사/독립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실제로도 구본준 부회장은 구광모 회장 추대 이후 고문으로 물러나 지분을 정리한 후 LG상사를 비롯한 계열사들을 가지고 LX그룹으로 분가한다.[32] 하지만 이와 반대로 범 LG가 기업들이 일부나마 결집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LG그룹의 4대 총수 구광모 회장의 친부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그룹 계열사들을 LG그룹에 다 편입시키고 자신의 지분만을 구광모 회장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그룹의 지배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 게다가 LG그룹의 문화 특성상 장자승계 원칙도 어느 정도 작용하기 때문. 희성그룹에서 구본식계 계열사가 LT그룹으로 분가한 것도 이런 것과 연관성이 추정된다.[33] 체육훈장 수훈자라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있었지만, 본인이 평소에 좋아하던 숲에 묻히고 싶어했던 듯. 대기업 회장들 중 국립묘지에 묻힌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포스코 초대 회장이자 국무총리 및 군인을 지낸 박태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