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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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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7130><colcolor=#fff> 제2대 한화 회장
김승연
金昇淵 | Kim Seung-youn
출생 1952년 2월 7일 ([age(1952-02-07)]세)
충청남도 천안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본관 순천 김씨[1]
직업 기업인
현직 한화 회장
한화 이글스 구단주
학력 서울장충초등학교 (졸업)
장충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전학)
Shattuck-St. Mary's School[2] (졸업)
멘로 칼리지 (경영학 / 학사)
드폴 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 석사)
서강대학교 (경영학 / 명예박사)
부모 아버지 김종희, 어머니 강태영[3]
형제자매 누나 김영혜, 남동생 김호연
배우자 서영민[4]
자녀 장남 김동관, 차남 김동원, 삼남 김동선
신체 175cm
종교 성공회 (신명: 프란시스)[5]
병역 대한민국 공군 중위 만기전역 (학사장교)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1.1. 탁월한 경영 능력3.1.2. 의리왕3.1.3. 스포츠 기여3.1.4. 한화의 병역사항
3.2. 부정적 평가 및 사건사고
3.2.1. 자식들의 이미지3.2.2. 1993년 횡령혐의3.2.3. 동생과의 재산권 분쟁3.2.4. 2007년 보복 폭행 사건3.2.5. 배임 사건3.2.6. 취업제한 위반 논란
4. 여담5. 어록
5.1. 한화그룹 창립기념사 발언5.2. 신년사 발언
6. 수상경력7.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한화의 회장이다.

2. 생애

파일:한화家 가계도.jpg
한화 가계도

1952년 2월 7일에 김종희와 강태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종희는 자식들에게 “남자는 술도 좀 마시고, 담배도 피워 보며 단 맛 쓴 맛 다 맛봐야 한다”, “어차피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나중에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며 호연지기를 키울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1981년에 김종희가 지병인 당뇨병 합병증과 신부전증으로 고생하다 유언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29세의 어린 나이에 한국화약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고 재계서열 6위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능력으로 유명하다. 이는 동생 김호연과의 상속 다툼을 하는 원인이 된다. 김종희가 세상을 떠날 당시 김호연은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하고 있었기에 기업 경영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김승연이 홀로 한국화약그룹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남동생 김호연과 10여 년간 상속 다툼을 벌인 끝에, 결국 1990년대에 김호연이 빙그레를 가지고 독립했다.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바뀐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6] 그리고 누나 김영혜도 1996년 제일화재를 이끌고 독립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에 제일화재의 사정이 나빠지면서 다시 한화그룹에서 인수하고 합병하였다.

김승연의 장인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서정화 국민의힘 상임고문. 큰아버지 김종철도 1980년대 한국국민당 총재를 지낸 고위 정치인이며, 작은아버지 김종식도 고위 정치인이다.

김승연 회장을 비롯한 범한화가는 꽤 독실한 모태 성공회 신자들이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어머니와 아내도 독실한 신자다. 국내에는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보다 인지도가 다소 밀리는 성공회에서 가장 유명한 신자일 듯. 소년 시절엔 성공회 성당에서 복사 활동을 했으며, 1997년에는 성공회대학교 이사장이었고, 성공회대에 일부 대금을 면제해 주는 형태로 대학본부 건물을 지어주어서, 건물 이름이 승연관이 되었다.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논란 때문에 한때 건물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관련 기사.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1.1. 탁월한 경영 능력

한화그룹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화그룹이 본격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이뤄나가기 시작한 시점은 초대 회장 김종희가 경영을 맡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 이후 김승연이 2대 회장으로써 한화를 맡게 되었던 시기였다.

물론 김종희 회장이 창업주로서 기반을 매우 잘 닦아놓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화를 본격적으로 키워내 현재의 위신을 갖게 된 것은 김승연의 능력이었다. 한화생명의 인수[7]를 비롯해 각종 M&A들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크게 키워내는 데 성공해 한화를 재계서열 6위의 초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삼성과 더불어 창업주인 초대 회장도 대단하지만 후계자가 너무 뛰어나서 아버지인 선대 회장보다 아들인 2대 회장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볼 여지가 많은 몇 안 되는 사례이다.[8]

특히 김승연이 한화의 회장이 되었을 당시에는 20대 후반 정도의 매우 젊은 청년기였고 아버지 김종희 회장이 갑작스럽게 사망함으로써 세습 준비가 안 되어 경영권 분쟁을 비롯한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대단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3.1.2. 의리왕

언론에서 의리 있는 남자라고 자주 다룬다. 화끈한 성격으로 유명해서 사원과 고객에 대한 신용과 의리를 강조한다. 한화그룹의 가족적인 분위기나 그에 따른 회장님의 여러 일화를 봐도 그렇다. 이는 부전자전이다. 이리역 폭발사고 때 아버지 김종희는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기 재산 90억 전부[9]를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하여 사용했다. 지금의 90억과 1977년 당시 90억의 가치가 천지차이임과 이후에 벌어진 다른 대형사고에서 사건 책임자들이 사과만 하고 물질적인 지원을 해준 적이 거의 없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양심적인 케이스다. 참고로 1978년에 완공된 그 유명한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당시 돈으로 2,000만원이 조금 넘었다. 지금 시세로 비교해 보면 100배는 차이가 나나 대략 계산해도 50배 정도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서울 프라자호텔 전면 모델링 때문에 호텔 문을 3개월 동안 닫게 되자, 쿨하게 모든 직원(600여명)에게 60일 혹은 90일간 유급휴가를 줬다. 또한 IMF 외환위기 당시 한화에너지를 현대정유에 넘길 때 돈을 20~30억원 덜 받더라도 100% 고용승계를 반드시 지키라는 조건으로 매각협상을 하기도 했다.

한화그룹 밑에 있던 경향신문이 1998년 계열분리될 때 지분을 무상으로 우리사주조합에 넘겨주었고 경향신문의 부채 5천3백억원을 그대로 떠안았으며, 그 후로도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다. 진보적인 학회를 후원하기도 하고, 진보지(예를 들어 월간 말)에 꾸준히 그룹 광고를 내기도 했다. 진보적인 학풍으로 유명한 대학인 성공회대를 후원하고 있고 재단 이사장까지 지냈다. 재정지원 뿐만아니라 성공회대 학생들을 갤러리아 등 계열사에 인턴으로 고용해주고 정식 채용까지도 해준다. 아무리 성공회 신자라지만 재벌 총수가 학교 경영권이나 금전적 혜택을 기대하지 않고 이런 기부를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1995년 교통사고로 하반신 척수마비가 되어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된 이 모 직원을 임원으로 승진시키고 계속 근무하도록 미국 지사로 보내주었다. 또 징역형을 마치고 출소한 후에는 그 동안 심려끼쳐 죄송하다며 한화 전 직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최말단 갤러리아백화점 캐셔가 받은 돈이 무려 50만원.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북한의 잠수함의 경로를 한국에 유출해 간첩 혐의로 처벌받았던 재미동포 로버트 김은 한국 정부도 선을 그어서 생활이 어려운 상태였는데 딱히 인연도 없던 김승연이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한다#.(당시 북한 잠수함에 대한 정보는 기밀로 지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로버트 김은 자신의 행동이 간첩죄가 될 줄 몰랐을 것이다. 당시 냉랭했던 한미관계 때문에 처벌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은 대전의 자랑이 된 대덕테크노밸리가 세워진 것도 김승연의 결단 덕분이었다. 한화 이글스의 우승 축하 파티에서, 홍선기 당시 대전시장으로부터 산업단지로 개발하려는데 한화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다. 사업성이 낮다며 그룹 내부에선 난색을 표했지만, 김승연은 대전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사업 분석과 시행을 지시했다. 그 결과 2018년 기준 연매출 18조원, 임직원 35,000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성공했다.

2003년 6월 30일 전 한화 이글스의 투수였던 진정필이 백혈병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등지자 그 동안 누적되었던 치료비와 장례비까지 모두 지원했다고 한다.

2009년 4월 예술의전당은 한화그룹의 후원 10주년을 맞아 감사의 뜻으로 종신회원증을 전달했다. 후원에 어려움을 겪은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를 위해 10년 동안 단독으로 후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기관지 파열로 8강전을 포기한 복싱 선수 백종섭에게 위로금 3,000만원을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후 1년 지난 2011년 3월 20일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한화그룹 계열사에 우선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에 46명의 천안함 희생자 중 36명의 유족이 희망했으며, 이중 2010년도에 취업을 희망한 가족 5명 전원이 입사해 다니고 있으며, 2021년 현재 7명이 한화그룹에 근무하고 있다. 2015년 2월 총 12명이 각 계열사에서 근무중이며, 2월 초에 2명을 추가채용하였다. 즉 5년 동안 꾸준히 채용 중이라는 것. 여기까지만 해도 정말 개념찬 행보인데, 한화 이글스 경기에 천안함 유가족을 초청하여 시구, 시타 행사도 진행하고[10][11] 초등학생, 중학생을 대상으로 천안함 견학도 하고[12]임직원들이 천안함 묘역을 찾아가기도 한다.천안함 묘역 찾은 한화임직원[13]역시나 유가족들을 초대해 격려했다. 천안함을 잊지 않고, 그 유족들을 확실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1년 9월 14일,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있었던 최동원이 지병으로 사망하자, 지병으로 수 년 전에 팀을 떠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비는 물론 그룹 차원에서 장례식 비용 지원을 지시했다. 이 모습은 최동원의 친정팀이던 롯데의 행태와 그야말로 극과 극의 비교가 되며 야구 팬들과 여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한편 팀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당시에는 전 직원들에게 수십만원씩 특별 포상금을 준 바 있다. 그것도 정직원뿐만 아니라 협력직이며 미화직이며 한화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줬다.

2014년 한화건설의 이라크 공사 현장을 방문하면서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광어회 600인분을 떠 가지고 비행기로 실어갔다고 한다. 사막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가장 먹고 싶은 게 뭐냐고 하니 사막이라 회를 먹고 싶어한다는 말에 "그럼 여기서 떠 가지고 가지."했다고 한다.

2015년 7월 3일 울산광역시 소재 한화케미칼 폭발 사고로 협력업체 직원 6명이 숨지자, 한화그룹 임직원에 준하는 보상을 지시했다. 비슷한 사례에서 협력업체 직원들은 보상에서도 차별받는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그래도 이번에도 의리있게 대처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아래에 서술할 무지막지한 흑역사들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게 잊혀지지 않고 이미지의 일부로 강하게 자리잡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보 때문인지 다른 재벌가에 비해서 그렇게까지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상술한 사례 이외에도 긍정적인 미담들이 여럿 나오기 때문에, 돈만 많고 개념없는 졸부가 아니라, 자기만의 특이한 원칙에 따라 어느 방향으로든지 튈 수 있는 복잡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이 가장 크다.

김승연이 이렇게 의리를 강조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이자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의 영향이 크다.

3.1.3. 스포츠 기여

해외에서도 여러 스포츠단의 스폰서로 참여하고 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스폰서로 활동하면서 구장 광고권을 따내기도 했고[14] 축구에도 볼튼 원더러스함부르크 SV, 유벤투스 FC의 스폰서 계약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아마추어 복싱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복싱에도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1982년부터 1988년,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복싱협회장을 역임했다. 사실 야구단 창단 전부터 시작하고 있던 게 아마복싱 후원이었다.

사격에도 관심을 두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서, 한화그룹이 사격연맹 회장사를 맡아 자금 지원을 해 주는 등의 활동으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사격이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의 호성적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딱히 본인이 관여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나, e스포츠 구단인 한화생명e스포츠도 팬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화생명이 월즈 8강에 진출했을 때는 63빌딩 로비에 한화생명e스포츠의 월즈 8강 진출 기념 플래카드가 걸리는 등 지원 하나만큼은 정말 화끈하다.[15]

다만 야구단이나 롤팀이나 돈을 많이 쓰고 선수단 지원은 관심을 가지고 잘 챙겨주는데, 오너 본인이 스포츠에 대해 무지하고 무조건적인 의리에 의해 팀을 운영하며, 팬들 다수의 여론에 흔들린다는 점은 구단주로서 명백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김승연 회장 본인이 돈을 쓰려는 의지는 있는데 전문성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서 야구나 LoL을 잘 아는 전문가를 영입해서 프런트를 보강하고 전문적인 운영시스템을 구축하는게 급선무로 보인다.[16]

2022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야구단과 게임단의 성적이 최하위권을 맴돌자 종목을 막론하고 수십억대를 호가하는 대규모 계약을 진행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김승연 회장 본인이 작정하고 칼을 간 것으로 보인다.[17]
3.1.3.1. 한화 이글스
2012년 5월 16일, 한대화에게 격려금을 전달하는 모습. #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 부문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지만 한화 이글스 구단주답게 유독 야구를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1999년 한화 이글스가 창단 첫 우승을 확정짓던 한국시리즈 5차전 당시엔 일반석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잡히기도 했다.[18] 하지만 구단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한화 이글스의 프런트가 FA인 이범호를 놓치는 일을 포함하여 몇 가지 사고를 터뜨리자 2011년 5월 프런트를 전면 교체하고 야구단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팬들에게 약속했다. 아예 본인의 비서진을 통해 야구단을 관리하려는 듯하며 직접 잠실 야구장에 행차해서 팬들에게 "김태균이 잡아올게"라고 단번에 OK 사인을 내는 등.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한화 프런트가 물갈이 된 신호탄이었던 이범호 KIA행 사건은 한화그룹 전체가 수사당국의 표적이 되어 돈을 풀 수가 없었던 시기를 지난 직후였음을 감안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었다. 그 당시엔 구단 사장까지 조사 받으러 나갔던 일도 있었다.

2014시즌 한화가 또 최하위에 그치자 김성근을 데려와 달라는 팬들의 영상 릴레이, 1인 시위가 빗발쳤다. 프런트 측에서는 팬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내부승진을 밀었으나, 김승연의 강력한 요청으로 2014년 10월 25일, 기어코 한밭구장에 김성근을 데려온다. 게다가 16일 뒤인 2014년 11월 10일부로 구단 대표이사에 자신의 비서실장 출신인 김충범을 내정하는 초강수를 덤으로 두기도 했다.[19] 2015년 FA시장에서도 많은 투자를 했다.

그러나 2016년 들어 한화 이글스가 그렇게 팬들이 불러서 뽑은 감독의 독단적인 전권 장악, 미치광이 혹사와 시대착오적 전략, FA 영입 선수들의 잇다른 먹튀, 노쇠화 되어버린 선수층 등으로 다른 팀 다 상위권 다툼 벌일 동안 혼자 하위권에서 노닥거리며 팀이 나락에 빠짐과 동시에 야신이라 칭송받은 자의 더러운 실체가 드러나자 프런트를 무시한 권력 남용, 당장의 성적에 눈이 멀어 팀의 미래를 내다버린 선택 등으로 나쁜 의미로 재평가를 받으며 비판받고 있다.

김승연의 문제점은 허구연이 지적한 바 있듯이 일단 야구를 좋아하긴 하나 정작 야알못이라 팀의 현실을 모른다는 것.[20] 이 때문에 한대화와 김응용 등을 연달아 거치며 팀을 추슬러야 하는 선택의 순간 별 생각없이 유명인사(김성근)에게 의존해 버렸고, 그 결과가 총 700억을 쏟아붓고 7위 경쟁한 16시즌의 한화다. 매년 100억대의 적자가 나는 프로야구단에 끊임없이 투자를 해 주는 애정은 분명 높이 살만하나 팀의 내실을 키우기보단 당장 성적에만 눈이 가서 효율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2017년 5월 23일에 김성근이 자진 사퇴의 탈을 쓴 경질로 퇴출됐다, 김성근과 단장과의 마찰로 인한 여러 일들에 격분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거 말고도 구단 내부에서도 특타를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한다. 결국 그룹 차원의 내부감사 때 자질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 후 경질이 됐다. 사실 야구단을 챙기기 시작한 직후에도 김승연 회장이 직접 구단의 경영에 간섭을 하진 않았고, 비서진을 통해 소식을 전달 받고, 몇몇 중요한 안건들에 대해서만 본인이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21일 벤치 클리어링이 빌미가 되어 그룹감사가 진행 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를 들은 뒤 격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팀 내부 사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리빌딩을 비롯한 장기적인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을 감독으로 기용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들여서 한용덕을 감독으로 임명하는데 동의 했으며, 한용덕은 오랜 부진에 시달렸던 한화 이글스를 포스트 시즌으로 진출 시키는데 성공했다. 시즌 순위 3위, 최종 순위 3위다.

2018년 한화 이글스가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자, 11년간 비밀번호를 찍을 때 기다려준 팬들에게 고맙다며 장미꽃 1만 3000송이를 선물했는데, 장미꽃 구입에 든 비용 4000만원을 전부 개인 사비로 털었으며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 아내 서영민 여사와 장남 김동관 전무 등 가족들을 대동하고 직관하러 왔다. 기사 그리고 한화는 회장님 앞에서 눈이 썩을만한 경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2018시즌 종료 후 아예 팬들에게 그 동안의 암흑기 속에서도 팀을 믿고 응원해줘서 감사하다는 한화 이글스 단독 광고를 제작해 지상파 황금 시간대에도 편성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때문에 광고 단가가 매우 비싸기로 유명한 주말 저녁드라마 시작 전 광고 타임 때 여러 대기업들의 주력 제품 광고 사이에 한화 이글스 광고가 등장해 여러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부터 한화는 또 다시 하위권에 쳐졌다. 2020년에는 한용덕 감독이 14연패를 기록한 뒤 사퇴를 하고 연이어 임명된 최원호 감독 대행이 4연패를 더해 굴욕적인 프로야구 역대 최다연패 타이기록인 18연패를 기록하였고 2020년 시즌은 창단 첫 해 기록한 승률 0.290에 이어 역사상 2번째 최저 승률인 0.326를 기록하면서 마무리하게 됐다. 이로 인해 구단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전달받은 뒤엔 아예 구단 대표이사에게 구단주 대행을 맡겨 야구단의 운영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동안 간간히 비서진을 통해 구단의 중대사를 결정해오던 방식도 폐지하고, 구단에게 운영 전권을 맡겼다.

2024년 3월, MLB에서 다시 복귀한 류현진과 함께하는 한화는 개막전 1패 이후 파죽지세를 보이고 있다. 3월 29일 경기에는 김승연 회장이 6년 만에 관전했으며, 5연승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

KBO 리그 구단주 중 유일하게[21] 팀의 지분을 직접 가지고 있다. 이글스 구단 지분 중 10%에 해당하는 3만주가 김승연의 소유인데 2020년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1993년 구단 법인명을 한화 이글스로 바꾸는 과정에서 법인 등기를 새로 뗐는데 이후 현재까지 이를 팔지 않았다고 한다. 2019년 대전 신구장 건립 사업이 확정되자 430억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3.1.4. 한화의 병역사항

김승연은 공군에서 학사장교로 복무하였고 3명의 아들도 병역의무를 모두 이행하였다. 김승연의 누나인 김영혜와 남동생인 김호연도 마찬가지로 공군에서 학사장교로 복무하였다. 한화의 뿌리는 방위산업체인 한국화약이므로 국방의 의무를 잡음없이 확실하게 이행해야 한다는 창업주 김종희의 신조를 지키기 때문이다.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국민들의 의심과 질타를 받는 다른 재벌 가문들에 비하면 두드러지는 장점이다.

장남 김동관과 차남 김동원은 각각 하버드 대학교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처럼 공군 학사장교로 복무했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나온 3남 김동선은 현역 복무를 마치지는 않았지만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승마 종목 금메달리스트로서 예술체육요원 병역특례를 받았으므로 별다른 논란이 없다. 그 후로도 꾸준히 승마 선수로 활동하며 2010, 2014년에서 모두 금메달을 땄고 2016 리우 올림픽에도 대표로 출전했다. 다만 병역기피로 의심을 받을 만한 과거가 있는데, 1995년 5월~1996년 12월 사이에 당시 주한 그리스 대사의 양아들로 들어가면서 그리스로 귀화했었다. 한화그룹 측에 따르면 "그리스 대사가 (김)동선이를 친아들처럼 귀여워해서 잠시 양자로 보내줬다"고 한다.[22]

빙그레로 분리해 나간 동생 김호연은 김구의 차남인 전 공군참모총장 김신[23]의 사위로, 형 김승연과 마찬가지로 공군 장교로 복무하고 중위로 만기전역했다. 김호연의 차남 김동만 역시 공군 장교로 복무했고, 김호연의 장남은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의무를 마무리하였다.

3.2. 부정적 평가 및 사건사고

그러나 사실상 위의 병역문제를 제외하곤 장남을 제외한 부자 일가가 온갖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것도 뇌물,횡령등 일반적인 화이트칼라 범죄는 물론이고 폭행, 성추행, 음주 뺑소니 등등 일반적으로 아주 부정적으로 여겨지는 범죄들까지 저질렀다. 또한 이런 사건을 저지르고도 그들의 권력과 재력으로 인해 사실상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평소 사람 대접에 많은 지출을 하는 호탕한 그룹이라는 이미지까지 덮어씌워져 '남자가 큰일하다보면 그럴수도 있지'라는 식의 면죄부를 주는 여론도 있다. 1998년 IMF 시기에는 가장 적극적으로 정리해고를 한 공으로 정부에게서 상까지 받았다. 정리해고는 일괄 사직서를 제출하게 하고 무급휴직을 수개월간 한 후 수리하고 전화로 통보하는 방식이었는데 주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후 김대중 정부 하에서 자신보다 큰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등 급속히 사세를 불려나갔다.

2007년 둘째 아들을 폭행한 술집 종업원을 상대로 특수폭행 보복 사건을 일으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항목 참고. 이 사건이 청계산에서 일어났기에 국내야구 갤러리와 각 팀별 갤러리에서는 한화 이글스가 경기에서 못할 때마다 "청계산 가야겠네"라는 드립을 치고 있다. 2012년 들어서는 경기간 나오는 이니스프리 광고 때문에 '숲으로 와~' 드립이 야구 커뮤니티 등에서 성행했다.

2012년 8월 17일에 배임혐의로 법정에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되었다. 보통 재벌 수장들이 비슷한 혐의에 집행유예가 선고된 전례를 볼때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볼 수 있겠으나, 아니나 다를까 2014년 2월 11일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 및 벌금 선고를 받고 석방됐다. 형기의 반도 채우지 않고 나온 셈인 것이다.

3.2.1. 자식들의 이미지

장남 김동관은 어린 시절부터 전교 1등은 도맡아 했으며[24] 아무런 구설수도 없이 독서가 취미이며 운동은 주짓수와 스키를 즐긴다. 물론 아버지의 성격을 이어받은 건 확실한지 동생들이 형에게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욱하는 성격을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아버지나 동생들과 다르게 사고를 저지르지 않는 점을 보면 한화 가문에서는 가장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차남과 삼남은 사고를 많이 친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바로 밑의 사건이었다. 기업을 이어받을 장남에게 신경을 많이 쓰고 차남과 삼남은 자유롭게 키운 것인지 재벌 3세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 때문인지 차남은 보복 폭행사건 뿐만 아니라 대마초를 피우다 적발된 적도 있다. 차남은 한화생명 상무로 재직하는 중이다. # 2014년 2월 김승연 회장 차남 대마초 혐의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연합뉴스)

2011년에는 교통사고를 내고 구호조치 없이 도망가서 뺑소니 벌금 700만 원이 선고된 전력도 있다. 셋째도 역시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 전적이 있다. 2010년에 서울 용산구의 한 호텔 주점에서 여종업원을 성추행하고 보안직원 2명을 폭행하고 유리창과 집기를 부순 혐의 등으로 불구속 입건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2017년 1월 5일 새벽 3시 30분에는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한 술집에서 술에 취해 종업원의 뺨 2대를 때리고, 다른 종업원의 머리를 2∼3차례 때렸다. 김동선은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돼 경찰서로 호송되던 중 순찰차 내부 유리문을 걷어차고 카시트를 찢기도 했다. 김승연 3남 김동선 술집 난동, 한화家 사건사고 보니…보복폭행·대마초까지 이외에도 문제가 많다.

삼남인 김동선은 2017년 9월 말 서울 종로구 소재 한 술집에서 열린 대형로펌 김앤장 소속 신입 변호사 10여 명의 친목 모임에 동석해서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남아있던 변호사들은 김씨를 부축했는데 그 남자 변호사의 뺨을 때리고, 한 여성 변호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등 폭언과 함께 폭행했다고 한다. 한화家 3남 김동선, 또 음주 폭행 물의 김앤장 신입 변호사라면 모두가 부러워 하는 최고의 자리 중 하나이자 사실상 대한민국 최상류층이라 할수 있지만 그래봤자 결국 부모 잘 만난 다이아 수저에게는 똑같은 월급쟁이들일 뿐이며 재벌 회장의 가족이면 김앤장 변호사에게 그 어떠한 부조리함를 저질러도 그냥 눈감고 아무런 조치없이 그냥 넘어가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일화. 평범한 28살 직장인이면 김앤장 변호사에게 저렇게 해놓고 결코 원만하게 끝내지 못한다.

이에 대해 김앤장의 일방적인 주장과 재벌 회장의 직계 아들이 관여돼서 김동선에게 일방적으로 갑질 논란을 씌운 것이라는 기사 보도도 있긴 하다. 김앤장 변호사들이 먼저 김동선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동선을 김앤장 변호사들의 술자리에 동석시킨 지인이 일찍 나가버리면서 혼자 남았는데 김앤장 변호사들이 김동선을 그냥 제껴두고 자신들끼리만 대화를 하며 무시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것이 김앤장 변호사들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는데도 한화측에 강하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로 유력시되고 있다. “변호사가 먼저 무시했다” 한화 김동선이 처벌 안 받은 결정적 이유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히 무시한 것으로 폭행을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며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3.2.2. 1993년 횡령혐의

김승연은 6공 실세라던 박철언 전 장관과 친했고, 그의 사조직 "월계수회"의 자금줄이었다. 그러나 박철언이 당시 민주자유당 내에서 김영삼과 권력투쟁을 벌였다가 민자당을 탈당했고 이후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이끌던 통일국민당에 들어가 김영삼을 디스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런데 1992년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집권하자 박철언은 "슬롯머신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25] 김승연도 회사 돈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는 정적에 대한 김영삼의 정치 보복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3.2.3. 동생과의 재산권 분쟁

아버지 김종희가 1981년 유언도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임종을 지킨 사람은 누나 김영혜와 장남 김승연 뿐이었다. 차남 김호연은 공군 장교 복무 중이었기에 한국화약그룹의 경영권은 오로지 김승연에게만 가게 됐다. 이후 김승연-김호연 형제 간 재산권 분쟁이 일어나 한화그룹을 반분했다. 수년간의 법정 공방과 집안 내 중재 끝에 결국 그룹 분할에 합의하여 빙그레를 비롯한 식품 관련 계열사 일체를 김호연에게 넘기면서 한화그룹과 결별했다. 빙그레 이글스가 한화 이글스로 명칭을 갈아치운 것도 이 때의 일이다.

현재는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깔끔하게 화해한 상태다. 김승연은 김호연이 한나라당 입당 이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천안 선거캠프 사무실로 찾아와서 직접 지지를 해주고 선거운동원들을 독려해주는가 하면 자신의 조카이자 김호연의 아들인 김동환의 결혼식에 아들들과 함께 참석해서 축하한 바 있다.

3.2.4. 2007년 보복 폭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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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배임 사건

2012년 8월 16일 부실 차명회사 불법지원과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김승연 회장은 실형인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었다.

2013년 1월 4일에 위독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구치소에서 구속집행정지 건의서를 제출한 상태라고. 결국 1월 8일 구속집행정지가 내려져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이에 대해 재벌 회장 등 유명인들이 건강 문제를 핑계로 법적 구속 및 처벌을 회피하는 사례가 자주 있어서[26] 김승연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여론도 존재했다. 방어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근데 공판에 출석한다고 한다. 결국 2013년 4월 1일 병상에 누워 법정에 출석했고 징역 4년과 벌금 1,500억 원을 구형받았다. 관련 기사

2013년 12월 26일 검찰에 의해 징역 9년이 구형되었고, 2014년 2월 11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1억원이 선고되었다.

결국 김승연은 한화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 자리에서 모두 물러났다.

그러나 2014년 12월 사실상 경영에 복귀했다. 비공식적으로 막후 경영을 하다가 취업제한이 끝나는 2020년 2월부터 정식으로 복귀했다.

3.2.6. 취업제한 위반 논란

2019년 2월 김승연의 집행유예가 종료됐지만 이후 2년간 취업제한이 적용됐다. 그런데 이 기간에 계열사인 한화테크윈에 취업해 수십억 원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한화 측은 김 회장의 취업이 법률상 취업제한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며, 법무부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조치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 #

4. 여담

5. 어록

5.1. 한화그룹 창립기념사 발언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시대다.”
2005년
“글로벌시대에는 ‘둥지만 지키는 텃새보다는 먹이를 찾아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의 생존본능’을 배워야 한다."
2006년
"시대에 역행하는 익숙했던 과거와 단절이야말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2007년
"조직의 노화를 부추기는 관료주의, 적당주의, 무사안일주의를 배척하고 세월을 거슬러 영원한 청춘기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의 한화가 꿈꾸고 만들어갈 모습이다."
2016년

5.2. 신년사 발언

"동란의 초토 위에 사업보국의 일념으로 기적의 역사를 창조했던 화약인들의 ‘프런티어’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한화인 모두 견지해야 할 일류정신의 표상이다."
2006년
"세계 속의 한화를 이끌기 위해 국적, 학력, 나이와 같은 불필요한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겠다."
2007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여명이 동터 오듯이 이제 우리 한화는 새로운 희망을 여는 대한민국과 함께 ‘비극태래’의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2008년
"지금은 숲보다 나무에 집중해야 할 시기이며 작은 구멍 하나에 거대한 배도 침몰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방산•유화부문은 규모의 경쟁력을 넘어 실질적 시너지 확대에 주력해야 한다. 태양광부문은 글로벌 녹색성장을 주도하는 초일류 기업을 목표로 도전하고 해외시장에서 미래 사업기회를 모색하는 금융부문도 글로벌 경영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
2016년
"새는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는다고 한다. 그 어떤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을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지금 세상 밖에서 불어오는 위기의 바람 또한 우리가 더 강한 기업으로성장하는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2017년

6. 수상경력

7.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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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0세손 연(淵) 항렬.[2] 미국 미네소타주 소재 기숙학교[3] 손자 김동선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승마 경기에 출전하고 있던 2016년 8월 11일 별세했다.[4] 서정화 장관의 딸로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에 다니던 도중에 김승연과 결혼한다. 미국에서 암을 치료하던 도중 2022년 8월 7일에 6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5] # # #[6] B2C가 아닌 한국화약보다 식품회사인 빙그레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광고 효과가 있기 때문에 빙그레 이름을 붙였던 것. 비슷한 경우로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가 있다.[7] 당시에는 대한생명이었는데 그로 인해 63빌딩이 한화의 소유가 되었다.[8] 흥미롭게도 삼성 일가와 한화 일가는 1, 2, 3대 회장이 대대로 서로 간에 10살 가량 되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친분을 가지고 있다.# 물론 창업주의 뒤를 이어 회사를 잘 키우고 지켜나간 케이스들은 매우 많지만 대체로 한국이 세계 최빈국 수준의 최하급 개발도상국이었던 시기에 그러한 회사를 시작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창업주가 워낙 비범하여 그를 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으므로 창업주인 선대 회장을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 대기업들도 줄줄이 쓰러지던 외환위기를 비롯해 여러 위기들을 견뎌내고 회사를 지켜낸 것만으로도 정말 굉장한 것이고 차근차근 회사를 경영과 더불어 잘 성장시키는 경우가 많다.[9] 지금 물가가치로 무려 5,000억원 이상이다.[10] 의리의 한화, 천안함 유가족 초청 행사 실시[11] 한화, 현충일 홈경기에서 천안함 유가족 특별 시구·시타 실시[12] 한화그룹, 대전 초ㆍ중등 학생과 '천안함' 견학[13] 5주기인 2015년[14] 그런데 SF의 원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한 류현진과 묶이면서 류현진이 AT&T 파크에서 등판할 때 SF가 류현진에게 도발하는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곤 한다.[15] 사실 한화생명e스포츠의 월즈 8강 진출 당시에 한화 이글스가 꼴찌를 해서 돈만 줄창 써대는 야구단놈들 보다야 돈도 덜쓰면서 한번 밀어주면 성과는 확실한 게임단이 훨씬 낫다는 여론이 한화생명 내부에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근본이 방위산업인 한화의 특성상 월즈 8강이라는 성과가 월즈 우승 이 수두룩한 LCK 팬들 입장에서야 대단한 일이 아닐지 몰라도 모기업 입장에서야 이만한 홍보효과도 없는 셈이다. 단적으로 관리만 좀더 효율적으로 해서 월즈 우승이라도 하는 날에는 수만명의 관중이 한화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승 기념 스킨까지 출시되어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이 없어지기 전까지 전세계인들이 솔로랭크를 돌리면서 한화라는 이름을 볼 수 있는 것이니 오너 입장에서도 관심을 가질 이유는 충분하다.[16] 롤팀만 해도 같은 대기업 소속인 T1은 14~15세의 유망주들을 발굴해서 2~3년을 육성하고 대회 출전이 가능해지는 만 17세가 되면 곧바로 출전할 수 있는 즉시전력감이 되는 것을 목표르 유망주를 키우고 페이커를 비롯한 1군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와 정신과 전문의를 통한 멘탈케어까지 팀에서 챙겨준다. T1이 임요환, 최연성, 김택용 같은 수많은 명선수들을 키워내고 페이커가 10년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지원을 받아 최고의 커리어를 만든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17] 야구단만 해도 채은성이라는 거물을 90억이라는 거금을 치르고 장기계약으로 데려왔고 롤팀같은 경우 롤드컵 우승자 출신인 바이퍼제카의 재계약을 확정짓는가 하면 LCK 쓰리핏을 달성한 젠지도란딜라이트를 영입 확정시키기까지 하였다. 당장 이 4명의 1년(!) 몸값을 합치면 6년 90억인 채은성의 몸값과 맞먹는다는 소리가 있다. 선수 영입이야 프런트와 사무국이 전담하지만 이 정도 금액을 쏟아붓는다는 것은 아무리 대기업이고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회사라고는 해도 구단주 본인의 승인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하다.[18] 구단주 씩이나 되는 인물이 '일반석'에서 경기를 관람한 것이 충분히 이례적이다.[19] 다만 김충범 한화 이글스 대표는 건강 문제로 조기에 사임했다.[20] 김승연의 의리 중시 성향 + 야알못 문제점으로 인해 팬의 의견에 휘청대는 문제점이 있다.[21] 나머지 팀은 모두 구단의 모기업 법인이 구단 지분을 갖고 있다. 과거 삼성 라이온즈도 초대 구단주였던 이건희 회장이 1982년 창단 당시부터 사망 전까지 구단 지분의 2.5%를 직접 갖고 있었다. 2020년 이건희의 사망 이후 라이온즈 구단 측이 연고지인 대구광역시에 이건희의 지분을 기부하기로 하면서 구단주 본인이나 구단주의 가족이 지분을 갖고 있는 팀은 이글스가 유일하게 됐다.[22] 그리스와 한화의 관계는 선대 때부터 매우 좋다. 당장 주한 그리스 대사관이 20년 넘는 기간동안 한화그룹 본사 건물에 입주해 있다. 선대 회장 김종희가 그리스의 주한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고, 김종희가 사망하자 그리스는 김승연에게 해당 직위를 승계시켰을 정도다.[23] 김신 일가도 공군 장교를 대대로 배출하고 있다.[24] 김승연의 부인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수석 출신이다. 두뇌는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걸로 보인다. 그런데 아버지인 김승연도 공부를 굉장히 잘 해서, 70년대 당시 최고 명문 고등학교인 경기고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25] 참고로 이 슬롯머신 사건의 담당 검사가 바로 홍준표이다.[26] 여전히 2018년에도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이 8년의 황제 보석으로 공분을 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