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구자경(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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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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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LG그룹 제2대 회장 구자경 具滋暻 | Koo Ja-kyung | |
<colbgcolor=#a50034> 출생 | 1925년 4월 24일 |
경상남도 진주군 지수면 승내리 (現 경상남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1] | |
사망 | 2019년 12월 14일 (향년 94세) |
본관 | 능성 구씨[2] |
호 | 상남(上南) |
직업 | 기업인 |
학력 | 지수공립보통학교 (졸업) 진주중학교 (졸업)[3] 진주사범학교 (졸업) |
부모 | 아버지 구인회, 어머니 허을수 |
형제자매 | 누나 구자숙 남동생 구자승, 구자학, 구자두, 구자일, 구자극 여동생 구자혜, 구자영, 구순자 |
배우자 | 하정임 |
자녀 | 장남 구본무 장녀 구훤미 차남 구본능 삼남 구본준 차녀 구미정 사남 구본식 |
신체 | 172cm, 70kg, O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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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LG그룹 제2대 회장.2. 생애
1925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군 지수면 승내리(현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아버지 구인회와 어머니 허을수 사이에서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그는 지수공립보통학교(14회)와 진주공립중학교,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지수공립보통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이 시기에 일제로부터 입대영장이 날아왔는데 그 날이 1945년 8월 12일이었다. 입대 예정일은 1945년 8월 21일. 영장을 받은 그는 한동안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했다고 한다. 물론 3일 뒤 일본이 항복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이후 아버지가 가업에 참여하라기에 하러 갔더니 그 일이 알고 보니 공장 관리인이었다고 한다. 물론 폼나는 공장 책임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공장 문 여닫고, 경비 서고, 잡일하는 관리였다. 이것도 일종의 경영 수업의 일환이었다.
1969년 12월 31일, 아버지 구인회 창업주가 뇌종양으로 작고하여 이듬해인 1970년 1월에 후임 럭키그룹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LG그룹을 현재의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구씨 및 허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기반을 닦았다.
1972년과 1978년 제1·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서울 종로구 2선거구)과 1981년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서울 종로구 3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는 등 정치인으로도 활동하기도 하였다.[4]
제2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左) & 제12대 대통령 선거 선거인단 선거(右) 벽보 |
71세가 되던 1995년 2월, 그룹의 경영권을 장남 구본무에게 넘기면서 명예회장으로 영전하였고, 그 후로 천안시 소재 본인의 농장으로 낙향하여 편안하게 여생을 보냈다. 근데 이 농장, 정확히는 수향식품에서 된장, 만두도 같이 파시더니 5년도 채 안 돼서 총 매출 100억 원을 찍어버렸다. 사실 LG그룹 임직원들에게 명절만 되면 뿌려지는 선물 세트가 수향식품 제품인 걸 보면 단순 내부 거래로 당연한 결과이다. 일반 시중에서도 수향식품 제품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범LG가 계열 편의점인 GS25에서 판매하는 '순수향 냉동만두' 등이 이 회사 제품이다.
하지만 2011년 이후로 수향식품의 매출은 내리막길이며, 2014년엔 4억 여 원의 적자를 봤다. 또한 대표자도 김유진이라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고, 대주주도 구본능과 구본식이 50%를 나눠 가진 걸로 보아 수향식품의 경영권도 넘어가고 이 시점부터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듯 하다.
2008년 1월 9일, 평생의 반려자이던 아내 진주 하씨 하순봉(河恂鳳)의 딸[5] 하정임(河正任)[6] 여사가 지병으로 별세한지 만 10년 4개월 만인 2018년 5월 20일에는 장남 구본무 회장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자식을 먼저 보내게 되었다. 당시 구 명예회장은 93세의 고령이었는데다 건강도 안 좋고 거동도 상당히 불편해 도저히 서울특별시로 올라올 수 없어 아들 구 회장의 참척에도 사망 순간을 지키지도 장례식에 참여하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회장 시절인 1994년 장손이자 구본무의 외아들이었던 구원모를 먼저 보낸 적도 있다. 그리고 명예회장이 된 다음 해인 1996년에는 둘째며느리마저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장남을 보낸 지 약 1년 7개월 후인 2019년 12월 14일 오전, 본인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4세.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가 별세한지 단 5일 만이였다. #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외부 조화도 전혀 받지 않았다. 한 달 뒤인 2020년 1월 19일에는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도 별세하면서 이렇게 신격호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재벌 1세대들은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묘소는 LG가문 선영이다. 가문 전통에 따라 화장된 후 유골이 선영으로 들어간 듯하다. 참고로 SK 최종현 전 회장도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3. 그의 경영이념
-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 자율경영
4. 수상경력
- 동탑산업훈장 (1970)
- 은탑산업훈장 (1975)
- 대통령 표창 (1978)
- 한국의 경영자상 (1979)
- 5.16 민족상 (1984)
- 국민훈장 동백장 (1984)
- 금탑산업훈장 (1985)
- 최고경영자상 (1989)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2 |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서울 종로구 제1선거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8,268 (23.6%) | 당선 (2위) | 초선 |
1978 |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 서울 종로구 제2선거구 | 무투표 당선 | 당선 | 재선 | |
1981 | 1981년 대통령선거인단선거 | 서울 종로구 제3선거구 | 3,422 (17.5%) | 당선 (1위) | 3선 |
6. 저서
- 오직 이 길밖에 없다 - 행림출판. 1992
7. 대중매체에서
- 1997년 11월 20일자 MBC <다큐멘터리 성공시대> 2회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바 있는데, 배우 최상훈이 구자경을 연기했다. 유튜브에도 한동안 올라와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저작권 등의 문제로 삭제된 상태다.
- 2002년에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8. 이야깃거리
- 사진을 보면 외모가 장징궈랑 닮았다.
- 생전에 종로구 사직동의 한식당인 '진주집'의 단골 손님이었다고 한다. 진주 출신답게 진주식 비빔밥을 즐겨 먹었는데 수행원 없이 혼자 와서 식사하는 일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이낙연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진주집에서 혼밥을 하고 있는 구자경을 종종 봤다고 한다.
- 생전에 야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가 출범을 준비하던 시절 해외 출장을 간 탓에 럭키금성 프로야구단의 창단이 늦어진 사연이 있다. 1981년 말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던 MBC와 KBO는 럭키금성 측에 "부산·경남 연고 프로야구단을 맡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서울이 아닌 부산·경남 연고팀 제안이 들어간 것은 구인회 창업주와 구자경 회장을 비롯한 범LG가의 식구들이 모두 경상남도 진주시 출신이었고 럭키금성의 뿌리가 된 락희화학공업사가 세워진 곳도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에 있던 구인회의 자택이었기에 부산·경남 연고팀을 맡을 적임자로 꼽혔다.[7][8]
그런데 하필이면 이 제안이 들어왔을 때 구자경은 국내에 없었고 제안을 대신 받은 이헌조 럭키금성그룹 기획조정실장이 "회장님이 현재 자리에 계시지 않으니 돌아오시면 논의한 후 답을 하겠다"고 말을 아꼈다. 이 당시 럭키금성의 대답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MBC와 KBO는 부산·경남 연고팀의 모기업으로 롯데그룹을 낙점했고 이 과정을 통해 롯데 자이언츠가 부산을 연고로 창단하게 된다. 문제는 그 후의 일인데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구자경이 이헌조로부터 보고를 받다가 "부산 연고 프로야구단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는데 회장님이 안 계셔서 답을 못 했습니다"라는 얘기를 듣자 격분한 나머지 "야 이 문디야! 그냥 우리가 하겠다고 받아들였어야 안카나!"라며 이헌조를 눈물이 쏙 빠지도록 나무랐다고 한다.[9]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는 능성 구씨 인사들의 성향을 고려할 때 구자경이 이처럼 격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야구단 창단에 관심이 있었지만 리그 확장 과정에서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고 결국 1989년 서울 연고팀 MBC 청룡이 매물로 등장하자 냉큼 구단을 인수하면서 프로야구단 창단의 꿈을 이루게 된다. - 야구에 대한 개인적 관심은 높았지만 아들들이 야구선수로 크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경남중학교 시절 야구선수로 활동하던 둘째 아들 구본능[10]을 말려서 야구선수의 꿈을 접게 한 것이 대표적 사례. 셋째 아들 구본준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야구에 환장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야구선수의 꿈을 접은 작은 형의 사례를 본 탓에 성장할 때까지는 야구의 'ㅇ' 자도 꺼내지 않았다. 훗날 구자경의 아들들은 모두 야구와 인연을 맺었는데 장남 구본무는 LG 트윈스의 초대 구단주가 됐고 차남 구본능은 KBO 총재가 되었으며 삼남 구본준도 LG 트윈스 구단주로 활동했다.
9.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LG가 문서 참고하십시오.[1] 능성 구씨 집성촌이다.[2] 도원수파(都元帥派)-호양공계(胡襄公系) 27세손 자○(滋○), 윤○(潤○) 항렬.(족보)[3] 구자경 회장의 생일과 모교의 개교일이 일치한다.[4] 근데 사실 이건 당시 정권 차원에서 재벌 총수들에게 이런저런 직함도 달아줄 겸 후원금도 뜯어낼 겸 해서 강제로 떠맡긴 것에 가깝다. 실제로 당시 당선됬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김종희, 최종현 등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들도 많다. 물론 당시 참여했던 총수들 중 정주영이나 김석원처럼 정치에 뜻이 있던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적어도 LG가의 성향 상 강제로 떠맡은 것이 맞다.[5] 출처: 《능성구씨족보》 구자경편.[6] 출처: 구인회 묘비.[7] 당시 프로야구단을 맡을 기업의 선정 기준으로는 해당 기업의 오너가 연고지 출신이거나 해당 기업의 창업지가 연고지 내에 있는 경우로 한정했다. 삼성 라이온즈가 대구광역시를 연고로 창단했던 것도 삼성그룹의 뿌리인 삼성상회가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8] 비슷한 사례로 현대그룹 창업주였던 정주영 회장이 강원도 통천군 출신의 실향민이었다 보니 인천·경기·강원 연고팀을 현대그룹이 맡아 달라고 제안했으나, 당시 서울 올림픽 준비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프로야구 진입 제의를 거절했고, 대신 삼미그룹이 인천·경기·강원 지역 연고팀의 모기업으로 낙점된다. 그러다가 14년 후 이미 주인이 몇 번 바뀐 인천 연고팀을 현대그룹이 인수해 프로야구에 진입하긴 하지만.[9] 요즘이면 전화로 연락하고 비대면 화상 회의를 하거나 보고서를 e메일 등으로 보내면 되겠지만 이 시기에는 국제전화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걸 회장의 의사를 묻지 않거나 그냥 하겠다고 받아들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던 게,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돈이 나가는 야구단 창단을 회장의 의사결정 없이 한다면 엄청난 월권이었으니 만약 기조실장이 단독으로 그걸 수락했다면 그건 그것대로 구자경 회장의 화를 불렀을 것이다. 특히 유교적 가풍으로 보수적인 LG그룹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더더욱.[10] 구광모의 친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