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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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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대한민국 제14대 국회의원 김동길 金東吉|Kim Dong-gil | |||
출생 | 1928년 10월 2일 | ||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2] | |||
사망 | 2022년 10월 4일 (향년 94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대동문길 75-28[3] | |||
본관 | 풍천 김씨(豊川) | ||
호 | 산남(山南) | ||
외부 링크 | | [4]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08080><colcolor=#fff> 가족 | 아버지 김병두, 어머니 방신근 누나 김옥길 누이동생 2명 | |
종교 | 유교 → 개신교 | ||
학력 | 평양고등보통학교 (수료)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 / 학사) 에반스빌 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 석사)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철학 / 박사) |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14 | ||
경력 |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5] 연세대학교 부총장 고려대학교 철학과 강사 새한당 창당준비위원장 통일국민당 행정촉탁위원 통일국민당 최고위원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갑 / 통일국민당) 통일국민당 총재 신민당 대표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명예교수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 한민족명예원로회의 공동의장 사단법인 이승만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상임고문 국민의 도전 선거대책위원회 후원회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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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 종교는 개신교. 아호는 산남(山南). 본관은 풍천(豊川).2. 생애
1928년 10월 2일,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에서 원남면장 김병두(金炳斗)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시대 면장이면 내로라하는 유지였으나, 아버지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산을 모두 말아먹는 바람에 아주 어린 시절에 어머니 및 형제들과 함께 맹산을 떠나 평양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고 한다. 이때 이후로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어져서 한동안 어머니 혼자서 김동길 자신을 포함한 4남매를 먹여 살리고 공부를 시키느라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장성한 후에도 아버지를 미워하며 끝내 김동길 그 자신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1945년 해방 직전에 교원 자격시험에 통과해서 평안남도 평원군의 괴산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46년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부모와 함께 야음을 틈타 월남했다.[6]
이렇게 서울에 도착한 김동길은 연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에 미국에서 1년 동안 유학을 하고 돌아와 연세대 전임강사가 되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미국에서 다시 공부를 하라는 백낙준의 권유에 따라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이후 인디애나 주에 있는 에반스빌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한 뒤 보스턴 대학교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7]
귀국한 후에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신랄한 사회풍자글을 계속 발표하였다. 유신 이후에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에 노골적인 체제비판글을 게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였다. 학생운동권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기소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뒤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같이 체포되어 구속된 사람 중에 하나가 당시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였던 김찬국 전 상지대학교 총장이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해직되었고,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서거한 후 일시 복직했다가 신군부의 탄압으로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면서 또다시 해직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정치에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수필이나 신문칼럼만 간간히 쓰면서 칩거하였다. 1984년 6월 정권의 유화조치로 다른 해직교수들과 함께 대학에 복직하였다. 김영삼계와 김대중계가 손잡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제1야당으로 올라선 직후인 1985년 4월, 난데없이 삼김씨는 정치관두고 고향가서 낚시나 하라. 이제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노릇을 해야 한다는 신문칼럼(일명 낚시론 및 40대 기수론)을 발표하였다(한국일보 1985년 4월 4일 “나의 때는 이미 지났다”). 양김씨와 민주화세력이 관제야당을 제치고 국민의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군사정권이 아니라 야당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칼럼은 재야와 지식인들의 큰 반발을 사면서 역풍을 맞았다.
1991년 4월 강의 도중에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대해 그를 열사라고 부르지 말아라. 어린 나이에 뭘 알아서 데모를 나갔겠느냐는 식으로 폄하했고, 이것을 학생들이 교내 대자보로 비판하자 결국 5월 8일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났다.[8][9]
그는 "학생들이 교실에서의 강의 내용을 갖고 스승을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는 현실에 배반감을 느껴 결국 사표를 낸다"고 발언했다. 당시 <서양문화사 강의를 듣는 한 연세대 학우>라는 제목으로 게시된 대자보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김 교수가 지난날 29일 1교시 서양문화사 시간에 '입학한 지 2개월 된 신입생이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얼마나 느끼고 행동했길래 그를 열사라고 부르는가?', '그는 배후조종한 선배들에 이끌려 시위 도중 도망가다가 맞아 죽은 것일 뿐', '강씨를 배후조종해 죽게 만든 선배들은 내빼고 난 뒤 그를 다시 열사로 만들어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말해 김 교수 특유의 비약논리로 강씨의 죽음을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하찮은 죽음으로 만들어버렸다. - 출처 : 한겨레신문 1991년 5월 2일자.
이후 삼김정치 청산과 새정치를 주장하면서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한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1992년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최고위원직을 보장받고 합류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정주영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면서 탈당과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통일국민당 대표가 되었으나 소속 국회의원이 절반 이상이 탈당하는 등 당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1994년 5월 박찬종이 이끌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으나, 당권을 놓고 김동길과 박찬종 양쪽 다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전당대회에서 각목을 휘두르는 난투극을 벌였다. 박찬종계가 다시 이탈하고 김동길은 신민당을 장악했으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 신민당을 이끌고 1995년 1월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에 합류하였으나,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구 공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이후로는 맹목적으로 반공, 반북만을 외치는 극우가 되었다. 국민행동본부 등이 주최하는 집회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극우 매체에 수시로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살펴보면 대략 20년 주기로 정치적 스탠스가 점점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다. 1960~1970년대에는 군부독재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민주화운동가 및 지식인이었다면, 1980년대 이후로는 군사정권뿐 아니라, 민주화를 주장하는 야당과 (진보적)재야까지 구태정치라면서 싸잡아서 비판하는 정치혐오 경향을 보였다. 이런 관점에서 소위 제3세력을 자처하는 재벌회장(정주영), 기성정치인(박찬종)과 함께 현실정치에 나섰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이미지만 망가진채 초라하게 퇴장하였다. 그리고 1997년 평화적 정권교체 이후에는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자, 유일하게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극우 진영으로 넘어갔다.
특히 노무현이 대통령 퇴임 후 뇌물수수혐의로 검찰조사가 시작되자 라며 자살을 종용하는듯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어 논란을 빚었으며, 약 한 달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말로 자살하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 국민장 이후엔
자살로 생을 마감한 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민장은 가히 세기의 장례식이라고 할 만큼 역사에 남을 거창한 장례식이었다. -출처
라고 올렸다. 다만, 19대 대선 직후 친구인 문재인이 당선되자, 눈치가 보였는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을 공격했어도, 노무현은 자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저 정신 나간 늙은이가 미쳤나" 같은 소리라도 들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참 미안하다고. 하지만, 기사에서도 보이듯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후 자살하지 말라고 해 또 비난받았다. 출처2010년 전두환의 팔순 생일잔치에도 참여했다.# 이때 같이 참여한 사람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정호용 전 국방장관, 박재완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주호영 국회의원, 심대평 전 충남지사, 윤상현 의원,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소설가 이문열, 강창희 전 국회의장,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 가수 이미자 등이다.
2012년 11월에는 사퇴한 안철수 후보를 가리켜서 “만에 하나 1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고 하여도 임기 중에 암살을 당했거나 아니면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란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또다시 어그로를 끌었다.
2014년 설립된 우파 성향 정치 원로들이 모인 한민족명예원로회의의 공동 의장을 맡았다.
사단법인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종합편성채널의 패널로도 종종 나오고 있다.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2월 22일까지 조선일보에서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를 연재하였다.
김활란과 이광수를 옹호하는 기사를 실어낸 적이 있다. 링크 또한 최남선 편에서는
이광수, 김성수, 김활란, 모윤숙 등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과오만을 들추어내는 것은 우리 민족성의 하나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낙인 찍는 일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라는 글을 올렸다. 기타 인물에 대한 에세이전두환 편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징역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제부터 한국 정치는 원칙도 의리도 없다고 판단하고 크게 실망했다."
라고 적었다. 그의 과거 행적과 비교하면 180도 매우 다른 행보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전세계를 강타한 2021년 2월 12일에는 9년전 암살 당했을 거라고 폄하했던 안철수와 함께 유튜브 방송을 진행했다. 여기서 안철수는 현재의 거리두기가 아무 효용이 없다며 과학적 기준을 세우면 자영업자들의 영업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후 아예 안철수 지지를 선언하며 선거대책위원회 후원회장에 영입되었다.
2022년 10월 4일 향년 9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코로나 감염과 숙환. 생일이 지난지 불과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 본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열리지 않으며[10] 시신은 연대 의대에 기증했고 본인의 집은 이화학당에 유증하였다.[11]
3. 기타
-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100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지만, 자신의 전공인 역사학 저서나 연구논문은 거의 없었다. 모두 수필과 신문칼럼을 모은 산문집들. 문장력이 뛰어나고 사람들에게 쉽게 술술 읽히는 수필로 한때는 상당히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저자였다. 특히 미국 보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할 당시의 연구 주제가 에이브러햄 링컨이었기에 그의 일생을 간략히 요약한 《링컨의 일생》을 펴내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 금융실명제가 담긴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정식으로 승인하는 국회 표결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표결 직후 기자들에게 "금융실명제는 지지하지만, 긴급명령이라는 형식이 문제다"라면서 반대표결의 이유를 밝혔다.[12]
- 1980년대에는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당시 개그맨 최병서가 김동길 코스프레를 하며 저 유행어로 인기를 끈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실제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김동길이 강남에서 당선될 때 "최병서라는 친구 덕분에 지나가는 어린이들도 나를 알아보더라. 그래서 선거운동에 매우 유리했다."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으며, 1997년에는 SBS에서 동길 대 동길이라는 콩트 프로그램을 진행해서 화제가 되기도. 최병서가 분한 최동길 교수와 진짜 김동길 교수가 서로 대담을 하는 형식이었다.
- 평생도록 나비넥타이만 맨 것으로 유명하다. 한창 방송에 많이 나올 때는 이게 김동길의 상징이었다.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미국 유학 시절 학칙이 엄해서 학생식당에서도 항상 타이를 매라고 해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나비넥타이를 하기 시작했다고. 안경+콧수염+나비넥타이의 조합이 어쩐지 학습만화에서 볼 법한 박사님들을 연상케 한다(...).
-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사별하거나 이혼해서가 아니라, 생전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히 자녀도 없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것이 보기 싫어 어릴 때부터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다만 인터뷰에서 김동길 본인과 누나는 결혼하지 않았고, 형은 6.25 전쟁 때 실종되어 결혼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여동생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결혼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7세 위의 누나인 김옥길(1921 ~ 1990)은 1961년부터 1979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의 제8대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살아 생전 평생 독신이었다.
- 평안도 출신이다. 그런데 서울말 같은 언어를 쓴다. 단지 서울말에 기반한 언어생활을 오래했기에 그랬을 뿐이다. 스스로 억양에 남아있는 정도라고 평가한다.[13] 김동길 교수의 말투로 보아 평안도 사투리가 서울말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북한이 문화어를 '평양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어 나온 주장으로 평안도 사람들은 원래부터 사투리를 세게 구사했다. 북한 사투리에 관한 일화에 대한 반응 다만 그는 5살 정도의 나이에 고향인 맹산군을 떠나 평양에서 성장했고, 그 때문에 말투 자체가 평안도 말씨가 아닌 평양 말씨로 고정된 것이다. 그의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는 평안도 사투리를 섞어 '이게 뭡네까'로 언급되기도 하였다.
- 91세라는 나이로 '김동길TV'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고, 이는 국내 최고령 유튜버였다. 관련기사 당연하겠지만 그의 보수적인 정치성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해당 채널은 2021년까지 운영했다. 이후 2022년에 세상을 떠나고 삭제처리 되었다가 복구되었지만 생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자신이 남겼던 흔적들을 지워달라는 요청에 따라 채널명이 "링컨 아카데미"로 변경되고 환송회 영상을 제외한 기존 영상들은 전부 비공개 처리되었다.
- 지금은 보수인사로 유명하지만, 오래전부터 함석헌을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함석헌이 발행하던 잡지 "씨알의 소리"에 수차례 기고문을 올리기도 하였고, 2017년 경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저로 펴낸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는 함석헌에 대하여 "나의 스승"이라고까지 말하며 존경을 표했다. 김동길이 본래 영문학과에 들어갔다가 사학과로 전과한 것도 함석헌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 마광수 교수와도 친분이 있다. 마 교수가 학계에서 왕따를 당하던 와중에 몸까지 아파서 고생하던 시절에 김동길이 보약을 지어 병문안을 간 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김동길과 마광수 두 사람은 모두 연세대에서 교수를 지낸 이력이 있었고 또한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교수 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는 등의 동병상련이 있었기에 서로 친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 천상병 시인과도 안면이 있었다. 김동길은 유투브 영상과 회고록 에세이에서 한결같이 천상병을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원망할 줄도 모르는 순수했던 영혼의 소유자로 회고했다. 명동 거리를 지나다가 천상병과 우연히 마주쳐 인사를 건네고 그에게 술값을 꿔준 것이 첫 인연이었다고 하는데, 주당으로 이름난 천상병에게 값비싼 양주인 조니 워커 한 병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상병의 아내인 목순옥 여사가 양주는 값이 비싸니 차라리 그걸 팔아서 막걸리를 더 사먹는 것이 이득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자 천상병은 이를 그대로 따라버렸다. 이후 김동길을 만난 천상병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선물받은 양주는 전부 팔아서 막걸리를 마시는 바람에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 성신제와도 인연이 있어서, 타계 8개월 전에 성신제 부부가 세배를 온 모습이 방송된 바 있다.
- 한글날이 국경일이 되기 위해 기독교 신자인 본인이 크리스마스를 반납할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밝히는 글을 쓰기도 했다.
- 과거에 김동길이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의 남동생이라는 루머가 돌았다.[15] 애초에 김활란과 김동길은 무려 29세나 나이차가 난다. 아마도 김옥길이 김활란으로 와전된 듯하다.[16]
4.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강남 갑 | [[통일국민당|]] | 54,568 (46.10%) | 당선 (1위) | 초선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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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총선 (서울 강남구 갑) | }}}}}}}}} |
5.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1 - 1992 | 정계 입문 |
[[새한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2 | 창당준비위원회 |
[[통일국민당|]] | 1992 - 1994 | 입당 |
| 1994 - 1995 | 합당[17] |
[[자유민주연합|]] | 1995 - 1996 | 합당[18]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6 - 2022 | 탈당[19] 정계 은퇴 사망 |
6. 둘러보기
서울특별시 제14대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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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 정대철 | 서정화 | 이세기 | 조세형 | |
성동 병 | 중랑 갑 | 중랑 을 | |||
강수림 | 노승우 | 김영구 | 이순재 | 김덕규 | |
성북 갑 | 성북 을 | 도봉 갑 | 도봉 을 | 도봉 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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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 갑 | 노원 을 | 은평 갑 | 은평 을 | 서대문 갑 | |
백남치 | 임채정 | 손세일 | 이원형 | 김상현 | |
마포 을 | 양천 갑 | 양천 을 | |||
임춘원 | 박명환 | 박주천 | 박범진 | 김영배 | |
강서 갑 | 강서 을 | 구로 갑 | 구로 을 | 구로 병 | |
박계동 | 최두환 | 김기배 | 이경재 | 김병오 | |
영등포 갑 | 동작 을 | 관악 갑 | |||
장석화 | 나웅배 | 서청원 | 박실 | 한광옥 | |
관악 을 | 서초 갑 | 서초 을 | 강남 갑 | 강남 을 | |
공석 | 공석 | 김덕룡 | 김동길 | 홍사덕 | |
송파 갑 | 송파 을 | 강동 갑 | 강동 을 | ||
조순환 | 김종완 | 공석 | 김중위 | ||
* 관악 을 이해찬 사퇴 (1995.6.30.) * 서초 갑 박찬종 사퇴 (1995.6.9.) * 강동 갑 이부영 의원직 상실 (1995.11.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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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 | 원광호 | 류승규 | 정몽준 | 정동호 | |
허화평 | 김상구 | 이승무 | 김동권 | 강신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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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원직 사퇴. 잔여임기 1년 미만으로 재선거 미실시.[2] 다만 5살 무렵에 평양시로 이사해서 계속 평양에서 성장했다. 출신지는 맹산이지만 본인은 평양을 고향으로 생각한다고 한다.[3] 김옥길기념관이 원래 본인의 집 앞마당이었다.[4] 현재 유튜브 채널은 환송예배영상 빼고 다 비공개 처리되었다.[5] 1954 ~ 1979, 1980, 1984 ~ 1991[6] 김동길의 누나인 김옥길은 이미 해방 이전에 이화여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어린 여동생도 친척들과 함께 월남하였으나, 일제에게 끌려갔던 형은 입영한지 1개월 만에 전사하고 말았다.[7] 당시 미국 유학중에 아버지가 작고했는데,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많이 잊게 되었다고 한다.[8] 시점에 주목해보면 4월 말으로 강경대가 사망한 4월 26일 바로 다음주에 벌어진 발언이다. 80년대 복직 이후 김동길 교수의 강의는 작은 교양강의가 아니라 대강당에서 대규모 학생들의 참석 속에서 치러지던 강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파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9] 바로 전 해인 1990년만 해도 아이돌 이상은과 이런 대담 기사를 낼 만큼 대중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었지만... #[10] 정확히는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른다고 한다.[11] 김옥길기념관에서 김동길이 11년 전에 작성한 유서를 공개하였다.# 여담으로, 자필증서유언의 요건(내용, 연월일, 성명, 주소를 기재하고 날인)에 맞게 작성된 유서인 것을 볼 수 있다.[12] 당시에도 "내우·외환·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 그리고 "국회의 집회를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라는 헌법이 규정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의 발동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 의견이 나오긴 했다. 김동길의 주장도 이것을 따른 것이다.[13] 다만 사투리가 심한 지역에서 자란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억양 자체는 이북의 전형적인 사투리 톤이다. 이북 사투리의 말투에 옛날 서울 어른들의 말투가 더해진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14] '장차 한반도는 한자 문화권을 벗어나서 빛나는 한글 문화권을 형성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전 세계의 뜻 있는 젊은이들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영어를 배우듯 한글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공연히 가슴이 설렌다.'라는 기고 글 일부가 포함되어있다.[15] 비슷하게 전직 국무총리 노재봉도 아버지가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라는 모함을 당했다.[16] 단 김활란과 김동길은 서로 친분이 있었던 사이였으며, 본인의 저서 백년의 사람들에서 김활란 박사를 친일파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17] 신정치개혁당과 신설 합당.[18] 자유민주연합에 흡수 합당(법적으로는 신설).[19]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