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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 基督敎韓國浸禮會 The Korea Baptist Convention | |
<colbgcolor=#404040><colcolor=#ffffff> 표어 | 생육하고 번성하라 |
설립연도 | 1889년 1906년[1] |
약칭 | 기침 |
소속국가 | 대한민국 |
총회장 | 이욥 목사[2] |
총무 | 김일엽 목사 |
교인 수 | 약 346,518명(2023년)[3] |
위치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6길 10, 12층 (여의도동) |
/ 교회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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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침례회 교단.국제적 연합체로는 침례회세계연맹에 소속되어 있다.
2. 역사 및 현황
한국의 침례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 선교사 맬컴 펜윅(Malcolm C. Fenwick)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4]가 그 기원이다.[5]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6]에 집중했다. 그리고 만주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펜윅의 신학과 성경관은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이러한 특색은 현재의 한국침례회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있다.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명이 변경되었으며, 미국 최대의 교단인 남침례회 총회[7]와 1950년에 제휴하였고 6.25 이후 존 애버내시[8] 등의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를 따르는 교인들과 동아기독교회 출신 토착 교인들 간의 신학적 논쟁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9]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10]으로 분열되기도 했으나, 1968년 두 파벌이 합동하였다.[11]
당시 안대벽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포항파가 약해지고 대전파가 강해졌다. 그래서 현재 경상북도 울릉 지역을 제외한 동해안에서는 약세를 보이고 반대로 대전 등 충남권을 중심으로 강세를 보이게 되었다.
그 외에 1950년 미국 남침례회를 탈퇴한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독립적 교회들의 연합단체[12]인 '성서침례친교회'도 1954년 미국의 아이작 포스터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와 서울 동대문구 왕십리에 성서침례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한 이래 작은 규모이지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3. 교단 신학교
대한민국의 침례회 산하 고등교육기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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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회 계열 초교파[7] | |||
한양대학교 | 한양여자대학교 | 한양사이버대학교 | |
[◆] 이단 시비가 있는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교단. [7] 재단이 침례회 계열이지만 어떤 교단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학교., |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신학교는 1954년 설립된 대전광역시 유성구 소재 한국침례신학대학교 하나이다. 1960년대 포항파가 설립한 대한침례회신학교가 있었으나 1968년 포항파와 대전파가 합동하면서 침신대에 흡수, 폐교되었다.
수도권 내 군소 신학교와 영남신학교 등 침례회 군소 신학교들을 통합하여 1981년 경기도 안성시에 4년제 학력인정 각종학교인 수도침례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2006년 침례신학대와 통합하여 안성캠퍼스로 개칭했고, 2009년에 아예 정리해버린다. 사실상 기침 교단의 신학교는 침신대 1개 대학 밖에 없는 셈이다.
4. 지역 분포
교단의 하나뿐인 신학교가 수도권이 아닌 지방(대전)에 있다보니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국내 5대 개신교 교단이고 총회가 서울 여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교회 지역편중이 심각한 수준이다.[13]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충청권 남부 및 경기도 남부, 전라북도 북부 지역, 부산 및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14] 등에서 교세가 강하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가 위치한 대전과 인근 위성도시 지역에 교세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15] 그 외에 고양, 수원, 동해, 부산, 포항, 문경, 예천, 울진, 울릉도 등지가 침례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더욱이 이들 지역으로의 집중은 개교회주의가 강하고 교회 설립이 자유로운 침례회의 특성에 신학교 통폐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지역 거점 신학교의 소멸까지 겹쳐져[16]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17][18]기독교한국침례회 홈페이지에서 지역별 지방회 목록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은 인구 990만명인 서울만 31개일 뿐 도단위의 경우 잘해야 도시별로 1개, 대도시의 경우는 많아야 4~5개 수준인데 비해 인구 154만 명에 불과한 대전에는 무려 15개의 지방회가 있다. 비슷한 인구수를 가진(151만 명) 강원도만 해도 지방회는 6개에 불과하며, 인접 지역인 충북(159만 명)은 7개, 충남(211만 명)은 12개다. 이를 지역별 인구수 대비로 환산해 보면 서울이 지방회당 31만 9천 명[19], 강원도는 지방회당 25만 1천 명, 충북은 22만 7천 명, 그나마 밀도가 높은 편인 충남도 17만 6천 명 정도 인구를 커버하는데 비해 대전은 지방회당 10만 3천 명 정도 밖에 커버하지 않아 그만큼 인구 대비 침례교회의 비중이 높다는 결과가 나와 침례회의 지역 편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당장 바로 아래 문단에 수록된 국내 침례회 주요교회 명단 중 5개 교회가 대전에 있다.
국내에서 인구 대비 침례회 비중이 대전보다 높은 지역은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인구수 1만 명 남짓에 별도의 지방회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 교회의 절반이 침례교회이며, '리' 단위로 침례교회가 하나씩 있을 정도다.[20][21] 침례회의 교세가 약한 광주광역시, 전라남도와[22] 인천광역시, 강원도 영서 지역[23], 제주도 등지에서는 침례회를 이단으로 오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음을 감안하면 이는 심각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교회주의 성향이 강하고 신학교 교수들이나 신학생들의 신학 노선도 천차만별인 침례회의 특성은 교세 집중 지역에 교회가 난립해도 통폐합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24] 교단 내에서도 수도침례신학교 폐교 이후 수도권 신학교의 부재[25]와 지역 편중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2010년대 들어 동두천 주한미군 기지 캠프 님블 부지에 침례신학대의 수도권 캠퍼스 설립을 추진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승인까지 얻었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이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승인이 취소되고 말았다.[26]
5. 주요 교회와 목회자
침례회 문서 참조[1] '대한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 설립 및 대화회(現 총회) 개최 기준[2] 대전은포교회 담임목사.[3] 재적교인 기준, 수침교인(타교단의 세례교인)은 18만 4751명, 침례회는 교회론으로 인해 수침교인만을 정식교인으로 인정한다.[4] 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5] 선교 초기인 1895년 미국 보스턴 소재 엘라싱 기념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E.C.폴링 선교사 부부를 파송,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지역인 강경에 침례교회를 세웠으나 해당 선교회의 자금난으로 이들은 몇 년 못가 철수하였고 펜윅의 대한기독교회로 흡수되었다.[6] 그래서 지금 기독교한국침례회 소속 교회들이 경상북도 울릉과 울진, 강원도 동해, 삼척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이다.[7] Southern Baptist Convention[8] John A,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9] 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일명 포항파. 안대벽 목사 중심[10] 미국 남침례회 선교사 계열, 일명 대전파. 장일수 목사 중심[11]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당시 침례회 총회장이었던 안대벽 목사를 불신임한 것이 분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12] 교단에 가까운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지만 소속 교회들이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이름에도 '친교회'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교회를 총괄하거나 제재하는 기능은 없으며, 목회자들의 정보 공유와 신학적 동질성을 위한 친목 단체에 가깝다.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에는 개신교 교단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다.[13] 그나마 국내에서 지역 편중이 심한 교단들로 구세군, 예장재건, 예장고신, 루터교회, 대한예수교복음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단의 태동 또는 총회 소재지가 지방이거나 국내에서 교세가 약한 군소 교단으로 서울에 총회를 두는 대형교단인 침례회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14]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구세군 대한본영의 교세가 강한 영덕군은 제외.[15] 그 이유는, 상술하였듯이 광복 후 재건된 침례회가 1959년 미국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대전지역 파벌(기독교대한침례회)과 펜윅의 동아기독교회 출신 교인들이 주축이 된 포항지역 파벌(대한기독교침례회)로 나뉘었고, 1968년 대전파가 포항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동하여 지금의 기독교한국침례회가 되었기 때문이다.[16] 1968년 인천 대한침례회신학교 폐교, 2009년 안성 수도침례신학교 폐교.[17] 한 예로,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전 연기군 남면 나성리에 위치하고 있던 한 침례교회는 교회 소재지 일원이 행복도시 예정지에 편입되어 주민들이 이주하게 되자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종시에 정착하여 새로이 유입되는 지역 이주민들을 흡수, 발전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침례신학대학교 인근 대전 유성구 노은동 외곽 지역으로 이주, 그곳에 정착해 흔한 인대전 침례교회가 되어 버렸다. 면소재지인 종촌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통합 교회가 행복도시가 건설되면서 종교용지를 분양받아 새롭게 단장하고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자리잡은 것이나, 인근 송담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합동 교회가 임시로 조치원읍으로 이전했다가 세종시 건설 이후 원래 지역으로 복귀하여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18] 참고로 말하면 대전에 최초의 침례교회인 대전제일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 직후인 1954년이다. 이는 1907년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유성교회), 1919년에 세워진 최초의 성결교회(대전중앙교회), 1937년에 세워진 최초의 구세군교회(대전중앙영문)는 물론 1938년에 세워진 최초의 장로교회(대전제일교회)보다도 훨씬 늦다. 애초에 동아기독교회의 선교구역에 대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 소속의 존 애버내시(John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선교사가 대전에 성서신학원을 세운 것이 대전 지역 침례회 선교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단 중 대전에 진입한 시기가 가장 늦은 침례회가 신학교를 등에 업고 대전 지역에서 개신교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라 할만 하다. 정작 하단에 있는 침례회 유명인 중 대전 사람은 1~2명 정도인데...[19] 언뜻 보면 지방회 수가 많아서 서울의 침례교회 비중이 가장 높아 보이지만 인구 대비로 계산해 보면 의외로 침례교회 비중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가 서울이다. 그나마 서울 지역의 침례교회는 한강 이남, 특히 서남부권(통칭 영등포권) 및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고, 동북부권(통칭 성북권)에는 매우 드물다.[20] 이미 1910년대에 침례회의 모태인 펜윅의 대한기독교회가 울릉도에 상륙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 활동을 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 울릉군보다는 밀도가 낮지만 울진군도 대전보다 인구 대비 침례회 교세가 강한 곳에 속한다. 다만 워낙에 인구수가 적은 오지 지역이다 보니 침례교회 밀도만 높을 뿐 대전처럼 메가처치급 교회를 배출할 정도는 아니다.[21] 물론 시도 단위에서 시군구 단위로 범주를 더욱 좁혀 지방회 소재지에 따른 침례교회 지역 분포를 확인해보면 인구수 대비 침례교회 비율은 단연 대전광역시 유성구가 1위이다. 침신대 인근인 유성구 노은지구 일대만 살펴보아도 개척교회 포함 20개 가까운 침례교회가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22] 전라북도, 특히 대전과 인접한 전북의 전익군 지역은 호남 지역 침례교회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을 정도로 침례회의 비중이 높다. 그런데 정작 전주 바로 옆동네인 진안이나 장수에는 침례교회가 하나도 없다...[23] 강원 영동 지역은 동해시를 중심으로 침례회의 교세가 제법 강한 편이다.[24] 예장 통합, 예장 합동이나 감리회의 경우 교회설립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교단법을 통해 어느 정도 거리 제한을 두어(통합/합동 300 m, 감리회 200 m 등) 특정 지역에 같은 교단의 교회들이 몰리는 것을 막는 반면 성문화된 교단법 자체가 없는 침례회의 경우 이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침례회의 비중이 높은 대전의 경우 같은 동 관내에 불과 50 m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침례회 개척교회가 몇 개씩 난립하는 현상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둔산신도시와 노은지구. 심지어는 침례교회가 입주해 있는 한 건물 바로 옆 건물에 또다른 침례교회가 있는 코미디같은 사례도 실제 존재한다![25] 참고로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전체 한국 침례교회의 절반이 수도권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26] 침신대 동두천 캠퍼스 건설로 인해 침신대의 중추 기능이 수도권으로 옮겨가고 결국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대전 지역 교권파 정치목사들이 의도적으로 캠퍼스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로비를 벌여 방해했다는 의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