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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5 15:53:25

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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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전반, 즉 한민족이나 대한민국/북한 국적자 등에 대한 차별은 anti-Korean sentiment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혐한'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인]에 대한 혐오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북한[인]에 대한 혐오는 anti-Korean sentiment에 속하지만 보통 '혐한'과는 별개로 본다. 또한 ethnic Korean (한민족) 뿐 아니라 비한민족 계열 대한민국/북한 국적자도 넓은 의미의 Korean에 포함된다. }}}}}}}}}


1. 개요2. 역사3. 교리에 대한 비판
3.1. 불경에 대한 비판3.2. 윤회에 대한 비판3.3. 여성 차별
3.3.1. 반론
3.4. 과학성에 대한 논란
4.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
4.1. 반론4.2. 티베트 불교의 호전성 관련 논란4.3. 일본 불교승병제국주의 협력 논란4.4. 로힝야족 학살 옹호 및 적극적인 참여
4.4.1. 옹호4.4.2. 비판
4.5. 스리랑카 불교 극단주의
5. 방생 문화에 대한 비판6. 부라쿠민 차별에 대한 비판7. 현재8. 외부 링크9. 같이 보기

1. 개요

반불교()는 불교에 대해 적대/반대하는 태도를 말한다. 반종교의 한 종류다.

2. 역사

한국사에서 삼국시대통일신라, 고려 시대까지는 불교국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고려 망국의 원흉으로 불교계의 타락을 꼽았고 조선 500년간 반불교에 입각한 숭유억불을 국시로 간주하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간헐적으로 불교 우대적인 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주류는 반불교 성향이 강했다. 승려의 신분은 사회적으로 팔반사천(八般私賤)으로 격하되었고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다.[1] 따라서 한국사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은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했다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유교에 대한 반감이 더 높고 사회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거대하고 그에 따른 문제는 매우 극단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반불교 정서는 상대적으로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파되던 초기에 불교에 대한 비판이 극심했는데 기존 사상이나 종교의 입장에선 새로운 것에 대한 경계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비판 세력의 주체로는 유학자들이나 도교의 신봉자들이 있었다. 한(漢)의 유학자 한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불교를 비판했다. 아래에 이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2]라는 상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① 중국에 불교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역대의 군주가 다 장수하였고 국가가 태평했다. 백성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대였으나 불교가 수입되어 융성해진 결과 어지러워지고 멸망하여 재앙이 많은 시대가 되었다. ② 부처는 오랑캐이고 불교는 오랑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언어와 풍속이 다르다. ③ 불교는 군신 간의 의나 부자간의 정 등 일상적인 윤리를 알지 못한다. ④ 이마를 불태우고 손가락을 지지는 등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또 경제 관념도 엉성하여 생업에도 종사하지 않게 된다. ⑤ 죽은 자의 뼈 등은 삶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멀리해야 할 것이다. - 한유 #

한유헌종을 보면 알듯이 당 헌종이 불골(정확히 말하자면 법문사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막대한 국고를 낭비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고 다분히 유교적인 시각에서의 불교를 비판한 상소다.

한유가 당송팔대가에 속할 정도로 고명한 유학자인 만큼 그의 이름과 명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종 때까지 많이 언급되어 왔으며, 한문공(韓文公)이라고도 칭해져왔는데, 위에 이 간영불골표는 태종과 세종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조와 인조, 성종, 현종 때까지도 계속 언급되어 불교를 경계해왔다.

3. 교리에 대한 비판

3.1. 불경에 대한 비판

우선 불경의 문제점 중 하나가 석가모니가 입멸하고 난 뒤 초기불교 200년 동안 기록물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불교가 석가모니가 죽고 난 뒤 제자들의 견해차로 분열되었는데[3] 수없이 오래된 구전으로 석가모니의 원래 말씀(다르마)은 상당부분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초기불교의 모습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부파 불교의 경전(아함경, 니까야)으로 간접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4] 이들 경전도 '원래 석가의 다르마와 다르다'[5] 소리를 듣는 형편인데, 초기불교가 구전과 분열로 전해져오는 이상 진짜 다르마는 엄밀히 말하면 아무도 모른다.[6]

두번째로 상당 부분 왜곡이 쉽게 이루어졌다. 수많은 불경이 존재했지만 만들어진 시기도 각기 다 다르고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국가들을 거쳐 번역되고 심지어 새로 쓰이기도 하며 각 나라에 존재하던 자기 나라의 문화와 토속 신앙들이 불교에 섞이는 과정을 거쳤다.[7] 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불경끼리 상충되는 내용들이 나오는 경우들도 있으며, 초기 경전에선 없던 개념이나 내용이 그보다 뒤에 만들어진 경전에서 새로 등장하며 석가모니의 말씀이라고 나오는 경우들도 있다. 즉, 원래부터 분열과 구전으로 전승되어왔던 다르마인데 거기서 후대 고승들의 연구로 불법이 전승된 셈이며, 그래서 사실 아래의 비판적인 내용들은 문화적, 역사적 산물로서의 불교에 가깝다.

타 종교의 경전들도 친저성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교리 연구와 역사적 해석으로 인해 학문의 완성도를 닦아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불교의 경우 승려들이 석가모니에게서 구전된 교리들을 원래의 뜻에 가깝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승려 자신들이 수행과 사유로 얻어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경전의 내용을 교정하거나 보충하는 방식을 택했고,[8] 이 때문에 보다 다양한 해석과 철학적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것이 되려 석가모니의 친설을 후대의 재해석과 한데 뒤섞여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서구 불교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불교 경전은 단순한 게송 형태의 원본을 뼈대로 한 뒤, 여기에 각 부파의 논서에서 가져온 교리나 복수의 수행 공동체 간의 회의 결과 합의된 전승 등으로 살이 붙어서 마치 위키처럼 양이 늘어난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9]

석가모니가 자신마저 부정함으로서 불경 해석에 유연성을 부여한 점도 긍정적인 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초기불교 시절 인도의 아소카 왕은 비법파로 몰린 승려를 숙청했고 이는 '설일체유부'의 전신이 되었고, 이 설일체유부를 비판한 관점이 대승불교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대승비불설의 뿌리가 되었다. 불경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불경에는 절대성이 존재할 수 없기에 후대 승려들의 저술들에 서로 상반된 구절이 존재하는 것도 왜곡이 아닌 깨달음을 위한 발자취나 혹은 발전이라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단지 석가모니의 교리를 해석해서 따랐을 뿐인데 2차대전 때 많은 살생과 살육을 불러왔던 일련정종정토종은 그런 논리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3.2. 윤회에 대한 비판

若有故作業,我說彼必受其報,或現世受,或後世受。若不故作業,我說此不必受報。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ㅡ중아함15경 사경(思經) 업상응품(業相應品)

불교에서 업은 현세에 과보를 받는 업과 후생에 받는 업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의도가 수반되지 않는 업은 그 과보를 온전히 산출하지 못 한다. 그러므로 의도의 개입 여부는 불교 윤리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불교는 모태가 되는 바라문교(브라만교)와 더불어 윤회설을 주장하는 종교 중 하나인데, 윤회설의 비판점은 '불평등 합리화'라는 차원에서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전근대 시기에서 신분제는 사회가 유지되는 데 공통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특정 인물들이 지식과 무력, 재화를 독점하고 사람을 부리던 때였고, 종교는 이를 합리화하는 도구였다. 당연히 전근대사회의 종교였던 불교도 분명히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분명한 점은, 불교의 업설은 불교 이전의 전통 바라문교의 업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되어 있다. 바라문교의 업설이 더 높은 카스트로 올라가기 위해 카스트 제도에 복종하라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면,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인 색채가 강하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은, 악업은 고통을 장기적으로 일으키는 어리석음의 행위이고, 선업은 그 반대로 궁극적으로 행복과 자유를 초래한다는 의미이다.# 카스트에 상관없이 선업을 쌓으면 누구든지 부처가 되어 열반에 들 수 있다는 개념은 오직 브라만 계급만이 천상에 들 수 있다고 믿는 철저한 계급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사상의 전환이라 볼 수 있다.[10]

하지만 바라문교든 불교든 힌두교든 중요한 문제점은 업과 윤회라는 개념에 있다. 먼저, 현생에 겪는 고통은 전생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에 현생의 차별과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인 차별과 지금 현재의 괴롭고 힘겨운 상황과 대우를 당사자 본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기 쉽다. 제 아무리 석가가 전생의 악업을 현세에서 어떻게 풀 수 있다고 한들, 전생의 업 때문에 나온 현세 자신의 개막장스러운 출신적 상황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또한 죽음과 함께 몸이 부서지며 기억이 단절되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이 후생으로 이어지지 않는데, 기억나지도 않고 뭔지도 모르는 전생의 죄 때문에 현생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게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불교의 윤회 사상이 정치와 결합하여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일이 많았다. 그중 한 경우가 왕즉불 사상으로, 본래 불교의 사상이 아니라 불교가 동아시아에서 왕권과 함께 정착하고 살아남는 과정에서 새로 생겨난 개념이다. 불교환생설을 기득권의 논리로 해석하면 왕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기 때문이고, 귀족으로 태어난 것은 왕만큼은 아니어도 역시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았던 것으로 합리화하기 유리하고, 여기에 왕즉불 사상까지 가면 지배자는 불교를 후원하는 만큼 무제한적인 충성 세력과 집권의 합리화가 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과거 왕실에서 불교를 많이 후원했던 것 또한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봐도 설명이 가능하다. 비롯한 동북아에 불교가 들어올 때 처음에 반발하던 지배층들이 오래가지 않아 불교를 쉽게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가, 업설이 신분제를 합리화하는데 토속신앙보다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교 도래 이전 토속신앙에 기초한 신정일치제 시절의 경우, 왕은 신의 자손으로서 집권할 수 있지만 동시에 리스크도 컸다. 외부 세력의 침략에 패배하거나, 자국이 이겨낼 수 없는 수준의 천재지변이나 역병 등 재해가 닥쳐오거나 하면 신의 자손이라는 지배자의 신성한 권능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피지배층의 충성심이 흔들리고, 이게 반복되면 안정적인 충성의 기반이 흔들린다. 당장 한국사만 봐도 과거 부여에서는 재해가 들면 왕을 죽여버렸다.

인도의 경우, 바라문교가 대중적이던 고대부터 힌두교가 대부분인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참혹한 인권 탄압의 좋은 도구가 되어왔으며, 카스트 제도에 반발해 나왔다는 불교조차 신분제를 완전히 철폐하지 못했다. 그리고 불교를 믿었던 마우리아 왕조, 쿠샨 왕조 조차도 500년 동안 고치지 않았다. 애초부터 아소카 왕과 카니슈카 대제가 불교를 국교로 세운 건 신분제 사회 유지였지 평등 사회 건설이 아니다.

다만 근래에 들어 윤회 자체는 불교의 자체 가르침에도 상충하고 초기불교에서 변질된 잘못된 믿음이라는 설이 학계에서 떠오르고 있다. 여러 삶을 넘어 윤회을 하는 본질적 자아(진아, 아트만)의 개념은 깨달음과 상충된다(무아, 비아, 아나트만)는 가르침이 초기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었고, 윤회를 하지 않고도 누구든 현재 삶에서 '지금 바로 이때(akālika)'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석가모니 당시 불교의 인기 원인 중 하나였다. 해당 입장에 따르면, 숫타니파타 등에서도 진아와 깨달음의 연관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데에 비해, 상좌부 불교의 아함경부터 다시 나타난 업과 윤회 사상이, 정확히는 명백히 교리에 상충하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사람들이 믿어온 비불적 이중사고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성 불교에서는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순간 해탈을 위해 부지런히 정진할 당위성이 사라진다고 보아 이러한 관점을 극렬히 비판하며, 이러한 주장은 지옥에 떨어질 악업이라고까지 여긴다.

이슬람교의 발흥기에 칼리프들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불교를 극렬히 탄압했던 이유도 불교의 윤회설에 있었다. 이들은 윤회를 논하는 불교를 마니교의 일파로 보아 이단시했으며, 알라의 영혼 심판에 대한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보았다.[11]

3.3. 여성 차별

一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各各器盛食在道側,胡跪授與沙門。
첫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모든 시주들이 항상 그릇그릇마다 음식을 담고 길 가에서 무릎을 꿇고 스님들께 공양할 것이다.
二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與衣服卧具逆於道中,求沙門受用
둘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모든 시주들이 항상 의복·침구 따위를 시주하되, 길에서 맞이하여 스님들이 받아 쓰도록 할 것이다.
三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乘象馬車乘在於道側,以五體投地求沙門蹈而過。
셋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이 항상 코끼리나 마차를 타고 있더라도 길 가에서 오체투지함으로써 사문이 밟고 지나가도록 할 것이다.
四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在於路中,以發布地求沙門蹈而過。
넷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마땅히 길에서 머리카락을 땅에 펴 스님이 밟고 지나가도록 할 것이다.
五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恭敬心,請諸沙門至舍供養。
다섯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공경심으로 스님들에게 집으로 와서 공양하기를 청할 것이다.
六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見諸沙門常應恭敬心凈掃其地,脫體上衣布地令沙門坐。
여섯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공경심으로 자리를 깨끗이 하고 상의를 벗어 땅에 펴 스님이 앉도록 할 것이다.
七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脫體上衣拂比丘足上塵。
일곱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상의를 벗어 비구의 발의 먼지를 털 것이다.
八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舒發掃比丘足上塵。
여덟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머리카락으로 비구의 발의 먼지를 털 것이다.
九者若女人不出家者,沙門威德過於日月。況諸外道豈能正視於沙門乎?
아홉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사문의 위덕은 태양과 달에 버금갈 것이니, 하물며 외도들이 어찌 능히 사문들을 똑바로 볼 수 있겠는가?
十者若女人不出家者,佛之正法應住千年,今減五百年。一百年中得堅固解脫。一百年中得堅固定。一百年中得堅固持戒。一百年中得堅固多聞。一百年中得堅固布施。初百歲中有解脫堅固法。
열째, 만약 여인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정법은 마땅히 천년을 머무를 것이지만, 이제 오백년으로 감하였다.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해탈을 얻을 것이고 일 백 년 중에는 견고한 정(定)을 얻을 것이며, 다시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지계(持戒)를 얻을 것이다. 또한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다문(多聞)을 얻을 것이며 마지막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보시(報施)를 얻을 것이다.
ㅡ<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대정신수대장경 제 53책 100권

위의 비니모경의 내용은 아함경 116경 구담미경(임품)을 풀이한 내용이다.[A]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와, 이하 500명의 샤카족 여인들이 출가하려고 하자 내내 거절하다가 아난다의 간곡한 부탁으로 할 수 없이 이런 말을 하면서 들어준 것이다. 애초에 석가는 "여자도 성불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 어렵다"는 입장이다. 끝내 석가는 비구니를 받아들여놓고도 후회하면서 아난다를 가루가 되도록 까버렸는데. 이를 옳긴 게송이 이렇다.
安住於此中 悉能達解義,第二百歲中 復有堅固定,第三百歲中 持戒亦不毀,第四百歲中 有能多聞者,第五百歲中 復有能布施,從是如來法,念念中漸減 如車輪轉已,隨轉時有盡 正法所以隱,阿難之愆咎 為女人出家,勸請調御師 正法應住世,滿足於千年 五百已損減,餘者悉如本,是故五百歲 五法興於世,解脫定持戒 多聞及布施。
처음의 백 년 가운데는 해탈견고법이 있어 이 가운데 안주하면 모두 능히 해탈의 의미를 통달할 것이며 두 번째 백 년 중에는 다시 견고한 정(定)이 있고 세 번째 백 년 중에는 지계(持戒)가 역시 무너지지 않으리, 네 번째 백 년 중에는 많이 들은 제자가 있으며 다섯 번째 백 년 중에는 다시 보시가 있다네. 이와 같은 여래의 법을 쫓아 시시각각으로 점차 없어짐은 수레 바퀴가 구른 뒤에 구르는 것이 다하는 것과 같다네. 정법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난의 허물과 잘못이니 여인을 출가시키도록 부처님께 권청한 것이라네. 정법은 마땅히 세간에 머물러 천 년을 채울 것이었건만 오백 년이 이미 감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본래와 같노라. 그러므로 오백 세 동안은 다섯 가지 법이 세간에 흥하리니 해탈과 정과 지계 다문 그리고 보시이니라.#

어쨌든 석가는 비구니를 받아들이기 위해 팔경법(팔존중법, 팔경사법)을 만들긴 했다. 내용은 이러하다.[13][A]
① 출가한 지 100년이 된 비구니라도 바로 그날 계를 받은 비구에게 먼저 합장해야 한다.
② 비구가 없는 장소에서는 안거를 해서는 안 된다.
③ 1달에 2번씩 비구 승단에 나아가 계율을 반성하고 설교를 들어야 한다.
④ 안거를 마친 뒤에는 비구들에게 나아가 안거 중의 잘못을 참회하고 의심난 일들은 물어야 한다.
⑤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는 대중의 처소에서 떠나 보름 동안 별거해야 한다.
비구니가 되려는 자는 2년 동안 일정한 수행을 거친 다음 온전한 비구니가 되는 계를 받아야 한다.
⑦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된다.
⑧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꾸짖을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꾸짖어도 무방하다.

또한, 석가모니사리풋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舍利弗。此八佛土皆悉清淨。無有女人亦無五濁。舍利弗。若善男子善女人住大乘者。聞此八佛名號。受持不忘并為他說。若生三塗八難處者無有是處。若有女人聞八佛名號。自能憶持兼為他說。若更受女身無有是處。
사리불이여. 이 여덟 부처(여래, 응공, 정변지 등을 말한다.)의 정토는 다 청정하여 여자가 없고 오탁(五濁)도 없나니, 사리불이여, 대승(大乘)에 머무는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만약 이 여덟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받아 지녀 잊지 않는 한편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한다면, 그는 삼도(三塗)와 팔난(八難)이 있는 곳에 태어날 이치가 없으며, 여자로서 여덟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스스로 기억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한다면, 그 또한 여자의 몸을 다시 받을 이치가 없으리라.

女人聞佛名 憶持為他說 盡此女人報 後生不復受 誦持為人說 八佛之名號 得諸功德果 如上之所說
여인이 불명을 듣고서 기억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하면 그는 여인의 업보를 다 벗어나 후생엔 다시 여인의 몸 받지 않고 이 여덟 불명을 받들어 외워 선설한 인연으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그 모든 공덕의 과보를 얻으리니,
ㅡ<팔길상경(八吉祥經)>에서# (해석은 #)

이 석가의 말씀은 여자는 불국정토에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삿된 존재이자 오탁[15], 삼도[16], 팔난[17]과 같은 급으로 본다는 의미이며, 불도를 지니고 선행을 베풀고 그 가르침을 베풀면 정토에 남자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다. 결국 여성은 성불할 수 있어도, 여성의 몸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교리 자체가 구원론까지 여성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약사여래에겐 전여득불(轉如得佛)이라 하여 여성이 불리한 조건으로 성불할 수 없다면 남성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서원이 있으며, 초일명경 등에서는 여자가 선업을 쌓아 내생에 남자로 태어나라는 이야기도 있다.#

여성의 출가 허락 이후로 비구와 비구니와의 갈등도 매우 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석가의 십대제자이자 훗날 1대 종정(宗正)인 마하가섭이 비구니들과 제일 다투어 싸웠고, 비구니들은 마하가섭을 개무시해서 아난다만 따랐었다.# 비구니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이를 들여온 아난다도 세트로 까이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총합적으로 보면 세존이 그렇게 여자를 싫어하고, 여자를 들이는 것이 시주 500년 까이는 게 아깝다고 쫌생이처럼 굴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세존 같은 성자도 여자가 아라한에 들 수 있음은 알지만 당시 남녀관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는 게 맞다.

하지만 비구니는 이 팔경법으로 인해 종단에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고 있으며 비구(남성 승려)의 똥군기에 시달리면서도 그들 대신에 궂은 일을 하느라 불경 공부나 설법을 듣는 등의 수행이 쉽지 않으며 종단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로 넘어와서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적극적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한국불교 조계종단의 경우 아직도 남성 승려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진보적인 비구니들이 참종권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어떤 불교 옹호론자들은 법화경을 예로 들며, 법화경에서는 용녀(인간이 아닌 짐승, 남자가 아닌 여자)가 부처로 성불하는 것을 보고, 불교가 여성 평등을 주장한 종교라고 변론하기도 한다. 확실히, 용녀가 성불하는 장면은 남녀평등적이라고 보일 여지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 법화경은 석가모니가 그 전에 했던 모든 설법을 부정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면, 불교도들은 우선 법화경만 남기고 모든 경전을 없애버리고 가야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애초에 법화경 자체를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른 불교 교파는 논외) 비불교도 시점에서는 사실상 얼렁뚱땅이다 할 정도로 법화경도 경전으로 인정하고, 다른 불교 경전들도 경전으로 인정하는 어물어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18]

이 문서에서 예시로 든 것과 같은 여성차별적 구절들이 여전히 불교계에서는 유효한 구절이라는 것이다. 근데 법화경에서도 용녀가 순식간에 남자로 변화는 과정을 거쳐서 성불한다. 즉 용녀-부처가 아니라 용녀-남자-부처 중간에 남자를 거쳐서 성불을 한다. 당시에는 여자는 성불할 수 없고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 성불할 수도 있다고 봤다. 용녀의 이야기는 아마 여자 계층을 포용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계층 또한 끌어 안을 절충안 같은 이야기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설령 법화경을 어떻게든 인정하더라도, 당장 불교 종단에서 여성을 대하는 것이 법화경에 따라 동등하게 대우를 하지 않으니 의미가 없는 노릇이다.

3.3.1. 반론

일단 이 문서의 개요에도 적혀있듯이 불교 경전이라는 것은 한두개가 아니며 각기 작성된 시기와 문화권도 제각각이다. 석가모니가 죽고 난 후 시간이 수백 년, 천년이 흐르며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이 경전에 반영된 경우도 많다. 당장 같은 인도 불교에서도 초기불교와 후기 인도 불교가 다르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불과 수백년 후에 초기불교는 수많은 부파로 갈라졌다. 같은 인도 내에도 이런데 그 이후 다른 나라로 퍼지는 과정에서의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러 경전들에선 위와 같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반대 내용도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소마라는 비구니가 마라 파피야스를 물리칠 때 이렇게 게송했었다.
心入於寂靜 女形復何障, 智慧已顯現 即見無上法, 我若思男女 思此為何物, 心感於如是 即應惡魔語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진리를 보는 자에게 지혜가 항상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자다 또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
ㅡ<아함경. 비구니상응比丘尼相應>에서.

또한 아함경을 보면 석가모니는 아난다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난다: 大德! 女人若於如來所說之法、律,從家而出家,則可得現證預流果、一來果、不還果、阿羅漢果耶?
세존이시여!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일래과와 불환과와 아라한과로 도달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석가모니: 阿難! 女人若於如來所說之法、律,從家而出家,則可得現證預流果、一來果、不還果、阿羅漢果。
아난다! 여인들이 여래께서 설한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해서, 일래과와 부환과와 아라한과로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ㅡ아함경 116경 구담미경(임품)에서.

위와 같이 여자도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나온다. '여자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므로 먼저 남성으로 환생한 뒤에 도전해야 한다'는 식의 얘기는 석가모니가 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19]

석가모니 당대의 여승들은 비구니 법계를 받고 잘 수행했다고 한다. 당장에 남방불교의 경전 중에는 깨달은 남자 비구승들의 시 모음집인 장로게와 더불어 여성 수행자들의 시인 '장로니게'가 같이 존재한다.# 물론 비구들이 지켜야하는 250계보다 더 많은 항목을 담은 비구니 348계가 있었으나 여기에 대한 반발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출가시켜 수행공동체를 운영하게 한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팔경법 같은 경우는 석가모니의 고육지책이라는 해석이 있다. 평등을 외치던 석가가 당시 남성 제자들의 성관념의 한계에 부딪쳐 겨우 합의안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 석가는 천대받던 수드라 및 불가촉천민마저도 출가시켜 제자로 삼았다.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이 우팔리는 왕궁 이발사 출신으로 천민 출신이었으나, 부처의 사후에 율의 계승자로서 교단의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런 석가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 따윈 없던 것이다.

또는 팔경법은 석가모니 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석가모니 사후 부파 불교 말기에 비구 중심 승단에 만들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당장 아함경이 이 시기 때 경전이다.

비구와 비구니를 차이는 있으나 나름 동등하게 봐주었다. 당장 아함경 제자품만 보더라도 석가의 자기 제자 자랑 목록인데 거기서 비구와 비구니를 같이 자랑하고 있다(...). 즉 불도에 든 이상은 다 같은 동도로 보는 셈이다.

불교의 다양한 경전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장소와 문화권에서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여러 경전들을 비교하다보면 모순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남존여비적 문구가 발견되는 한편, 어떤 경전에서는 남녀평등의 정신이 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동북아시아 불교에서 널리 숭앙된 법화경의 경우 용녀(인간이 아닌 짐승, 남자가 아닌 여자)가 부처로 성불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승만경의 경우에는 여성 재가신자인 승만부인이 부처가 되기 위한 서원을 세우는 내용이 나오며 부처가 될 자격을 갖춘 제자로 등장한다. #

승려 법륜은 2014년 구글에서 열린 강연에서 한 질문자가 이에 대한 질문을 하자 그런 것은 불교가 인도 전통 사상과 봉건 문화의 영향을 받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며, 현실적으로 일부 불교(특히 동남아에 퍼진 테라와다 불교가 "깨달은 자가 되려면 먼저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에 문화적으로 그런 차별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석가모니의 원래 다르마는 아니라고 답변하였다.(40분 36초부터)

3.4. 과학성에 대한 논란

불교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가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주장하며 때로는 과학적이거나 철학적, 혹은 무신론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달라이 라마가 적극적으로 밀고 가는 설이기도 하다. # 조사선 또한 이런 경향이 있다. 실제로 불교는 자기네들 가르침을 과학과 결부시켜서 합리화하려는 학술적, 포교적 움직임이 왕성하다. # # # 또한 무아론까지 들먹이면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까지 접목하는 등 유사과학적인 접근까지 허다하다. # # #

실제로 20세기 초 흥미롭게도 양자역학과 동양 철학을 접목시키려는 움직임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닐스 보어 등이 그 대표적이며, 국내에는 김성구가 있다. 다만 유의할 것은 기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늘면서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의 음양론부터 유교주역까지 두루 실험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들은 종교를 자신의 도구로서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다. 처음부터 양자역학이 서양식 관념 인식에서 생각하니 답이 없어서 동양 사상에서 힌트를 얻고자 접근했을 뿐이었지, 진심으로 동양 사상에서 도를 얻고자 접근하진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불교 및 동양 사상에 대한 이해에는 편파적이고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불교 측에서 이들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종교를 홍보하는 건 처음부터 오류였던 셈이다.[20]

하지만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는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일 뿐, 불교의 교리는 위의 환생설처럼 반증 불가능한 것도 많다. 또한 불경의 내용은 영적인 수련과 철학적인 사유로 저작되기에 형이상학적인 내용도 많은데,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특정 이론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주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불교를 과학으로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는 셈. 또한 불교의 내용이 보다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고, 때문에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사실 어느 종교나 그 종교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종교와 철학이 융합하는 경우는 존재한다.

물론 불교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이런 불교의 행태를 창조과학과 똑같은 짓이라 지적했다. #

또한 불교계 내에서도 현대사회에 적응하고 발전해나가려면 현대 과학의 결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오류로 밝혀진 낡은 내용들을 버려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전통 불교 교리들 중 여러가지가 현대 과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미국의 불교학자 도널드 S. 로페즈 박사는 불교의 관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Buddhism and Science: A Guide for the Perplexed (Buddhism and Modernity)#

4.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

평화의 종교라는 미명과 달리, 불교 또한 정치적 폭력 세력으로 변질하여 타 종교권에 대해 문화 등으로 침략을 행한 적이 있으며, 한국, 중국,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준 선불교의 무아론, 열반론, 번뇌론이 전체주의 파시즘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제기된 적 있다. 실제로 선불교적 교리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정당화한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 불교만의 특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본 불교의 폭력 그 이전부터 불교가 어느 정도의 폭력성이나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도 기존 바라문교의 승려들의 교리와 수행을 외도(外道)라 비하하며[21] 기존 바라문교의 분노를 샀다. 사실 불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진리이니 관용을 베푼다는 의미가 크다.[22]

게다가 석가는 범망경(梵網經)에서 근본적인 입장은 타종교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으므로 존중해야 한다고 하지만[23] 실제로 범망경에서 그런 구절이 없으며, 되려 대승불교 입장에선 전분사견(全分邪見)중에 하나인 잡사견(雜邪見)에 해당될 수 있다.
넷째 잡사견(雜邪見)이라 함은, 여기에 또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치우치게 고집하는 것이니, 대승에 집착하여 소승을 비방하거나 치우치게 일부를 고집하는 것이다. 둘은 여러 가지로 믿는 것이나 비록 불가의 정법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외도의 말한 바에도 역시 도리가 있다”고 말하고, 또 “귀신에게도 거룩한 힘이 있다”고 말하며, 마치 “유가(儒家) · 도가(道家) · 불가(佛家) 세 종교가 한결같이 일치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셋은 잠시 동안 소승을 생각하는 것이나, 작은 도(小道)에 의하여 의혹을 끊으려고 한 연후에 다시 대승의 행을 닦는 것이다. 넷은 뜻을 생각하며 치우치게 그르치는 것이니, 소리를 따라 뜻을 취하면서 다섯 잘못(五過)을 일으키는 따위이다.#

문제는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전부 기독교 광신도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기독교인 중에 불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본 문서에서의 불교 비판의 출처는 무신론자들이나 회의주의자, 불교 승려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기독교인도 아닐 뿐더러 특정 종교를 위해서가 아닌, 지식과 이성으로 불교의 자화자찬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불교인들은 이들의 비판을 수용하기보다는 아무런 근거 없이 기독교의 스파이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4.1. 반론

석가모니가 브라만교를 비롯한 다른 가르침(외도)들을 비판한 것은 어디까지나 지성적인 비판이었고 폭력이나 물리적인 압력을 가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애초에 누군가가 자신의 가르침이 옳다라는 의식이 없다면 남에게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가능한것인가? 그렇기에 자신의 가르침이 진리라 하고 타 가르침들을 외도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그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지적이랍시고 한 "불교에서 다른 종교에 관용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진리이니 관용을 베푼다는 의미다"라는 말은 오히려 정확한 표현이고 비판받을 내용도 아니다.

애초에 자신의 사상이 옳다라는 의식이 없으면 새로운 사상이 생겨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그걸 잘못됐다고 얘기하면 뭘 어쩌란 말인가? 그것마저 잘못됐다고 비판한다면 이 세상에 새로운 사상, 새로운 종교는 애초에 탄생자체가 불가능하다. 새로운 사상이든 종교든 기존의 것에 대한 비판을 매개로 탄생한다. 또한 타 종교에 대한, 특히 기존 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종교가 성립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건이다. 불교도 기존 브라만교의 카스트 논리를 부정하며 탄생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상대가 와서 가르침을 청할 경우에만 설법을 하였지 묻지도 않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서 너의 믿음은 틀린 것이니 나를 따르라 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사실 석가모니가 브라만교를 외도라고 칭하는 것은 기독교로 치자면 예수가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또한 특히 불교계 내에서는 이단이라는 개념이 약한 것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전통 불교계는 선종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종파가 공존하고 있는 구조였다. 이는 당연한 것이, 불교의 구원체계 자체가 독자성을 띄고 있으며 무슨 가르침을 받던 간에 적멸만 이루면 상관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교리에 대해서 개방적인 상황이다 보니 대승 불교만 하더라도 다소 자유로운 철학적 사유가 마음껏 합쳐져서 다양한 종파가 태어나 발전할 수 있었다. #

이러한 정신은 아함경에서 석가의 말씀에서 비롯될 수 있다.
我不與世間諍,世間與我諍。所以者何? 比丘! 若如法語者,不與世間諍。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투는구나.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만일 법다이 말하는 사람이라면 세상과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雜阿含 제2권 37, 「我經」에서#

이러한 정신은 불교를 국시로 했던 아쇼카 왕의 통일왕조의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인도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완성한 후 불교의 정법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했던 아쇼카(B.C.272∼232 재위) 왕도 비문 칙령에서, “자신의 종교만을 존중하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행동이 그와 같지 않으면 자신의 종교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모든 이의 종교의 교의에도 귀기울이도록 하라.”고 선언했다.[24]

4.2. 티베트 불교의 호전성 관련 논란

달라이 라마 14세의 비폭력주의 정책을 생각하면 의외인 부분이지만, 근대 이전 티베트 불교는 역사상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적지 않았다. 토번 제국의 10대 찬보였던 랑다르마는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이를 본 티베트 승려 라룽 베끼도제[25]는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이 혼란을 종결시켜야겠다고 결론을 내렸고, 활과 화살을 구해 라싸로 들어갔다. 그는 당번회맹비를 읽고 있던 랑다르마에게 접근하여, 활을 쏘아 왕의 미간에 화살을 명중시키고 친위대의 추격을 피해 달아났다. 랑다르마는 후계자를 지목하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사후 토번 제국은 급속히 힘을 잃고 여러 왕국으로 나뉘었다.

1285년, 탕구트 출신 티베트 불교 승려 양련진가는 원나라의 남송 점령 후 강남 지역의 불교를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그는 남송 한족들의 저항 의지를 꺾기 위해 남송의 황제, 황후, 제왕릉 101곳을 도굴하고, 이종의 시신을 파내어 부관참시한 후 머리를 술잔으로 만들었다.[26] 원나라 조정은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양련진가를 처형하여 한족들의 분노를 무마하려 했지만, 이로 인해 강남의 한족들은 원나라가 망한 지 한참 뒤인 청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티베트 불교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품었다. 박지원열하일기에서도 이 당시 한족들의 양련진가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등장한다.

달라이 라마 5세 이래, 역대 달라이 라마는 종교국가의 군주로서 실권을 가지고 티베트를 다스렸다. 이 과정에서 티베트군의 통수권자로서 여러 전쟁을 설계하거나 지시하기도 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코슈트 칸국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위짱 지역, 라다크 왕국, 구게 지역을 무력으로 정복했다. 달라이 라마 13세중국-티베트 전쟁을 지휘하여 일시적으로나마 달라이 라마 5세 시절의 강역을 회복하기도 했다.

4.3. 일본 불교승병제국주의 협력 논란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도조 히데키의 유언#
자비심으로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더 나은 보살행은 없다.
승려 난텐보 [B]
선에는 특별한 교리도 철학도, 일련의 개념도 지적인 법칙도 없다. ……
선은 아나키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민주주의, 무신론이나 관념론,
혹은 어떤 정치적·경제적 독단론과도 결합할 수 있다.
ㅡ 승려 스즈키 다이세쓰 데이타로 [B]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불교의 대자대비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는 때로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한 명을 죽이는"자비의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대승불교는 이를 매우 진지하게 승인한다.
일본의 불교 지도자
ㅡ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증언

일본의 경우, 센코쿠 시대엔 말이 승병이지 무사들이 승려인 척했던 게 태반인[29] 소헤이처럼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불교 측에서 "부처극락 야소지옥"을 외치며 일본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한 기록도 있다.[30]

일본 불교 지도자들은 일본군국주의에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군국주의에 뛰어들어 행동하기도 했다.[31] 대표적인 것이 일본 식민지에 대한 불교 전도 사업인데, 일본의 주요 불교도들은 "중국아시아 나머지 지역의 불교는 후진적이고 수동적이며 사회적 요구에 무관심한 반면에, 일본 불교는 능동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과학적이기 때문에, 일본 불교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참된 불교"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일본의 참된 불교를 아시아의 민족들, 심지어 서양인에게까지 전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또한 식민지 곳곳에 전파된 일본 불교의 은 그 지역의 일본군에게 든든한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다.

이 문제는 일본 조동종 승려였던 종교학자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rian 'Daizen' Victoria)가 쓴 『전쟁과 선(禪)』(Zen at War), 그리고 『불교 파시즘』(Zen war stories)을 통해 제기되었다. 이 두 책에서는 일본 불교가 어떻게 전쟁을 옹호했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도조 히데키는 선불교의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구결을 해석해서 《전진훈(戰陣訓)》을 내서 군인들에게 옥쇄를 강요하던가[32] 사형 직전에도 어떤 반성도 안하고 정토종으로 개종한 이유도 불심과 염불만 있다면 누구든 성불할 수 있다는 정토종 특유의 교리 때문이었다.[33] 이보다 더 쇼킹한 경우가 있는데, 승려 도모마쓰 엔타이는 《유족독본(遺族讀本)》을 내놓으면서 남편이 전사한 건 누구의 책임도 아닌 자업자득이라는 마구니도 지옥에 실직할 고인드립을 저지르고 다녔다.#

일본 불교 특유의 폭력적인 승려 양성 문화도 일본군 병영부조리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일본 조동종과 진언종에서는 사찰 내 똥군기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편이다. 물론 불교가 일본군 병영부조리의 전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인 영향을 끼친 책임을 부정할 순 없다. 일본 선불교의 집중 수행이나 화두선은 검술이나 무술과도 융합되어 전해오는 경우가 많다. 검을 다루는 법을 익혀 집중력을 다스리고,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투 경험을 통해서 자아에 대한 집착과 번잡한 생각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체험을 한다는 식이다. 일단 부파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이는 확실한 파계외도에 해당하겠으나, 대승불교 혹은 선불교(특히 동아시아)의 관점에서는 이런 무사화된 불교 역시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적이 있고,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스즈키 데이타로, 야스타니 하쿠운 등 불교 지도자들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국주의의 편에서 노력함으로서 전후 일본에서 좌익 정당이 성장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일본회의우익 단체의 기반이 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 일본이 전쟁 당시 잔혹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고 암시하는 것을 모두 교과서에서 제거하려 했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타 종교를 깎아내리며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식이라는 반응 및 언플이 많다.# # # # #

그러나 현재 일본에선 인구 감소와 노령화로 인해 불교 사찰이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주지가 없는 빈 절도 있어 한 스님이 여러 절을 관리해야 할 지경. ##

4.4. 로힝야족 학살 옹호 및 적극적인 참여

미얀마의 불교는 현재 버마족 군부가 행하는 로힝야족 학살을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는데, 먼저 불교계가 무조건[34] 미얀마를 옹호한다고 보는 것은 편견임을 밝힌다. 하지만 버마인이 아닌 불교 신도들도 몇몇이 로힝야족을 종교적으로 증오하는 건 사실이며, 불교계에서도 버마 불교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데, 이러한 불교 프레임이 로힝야 학살을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여기서는 의견이 갈린다.

4.4.1. 옹호

로힝야 사태는 과거 벵골인이었던 로힝야족영국의 식민지배 시절 영국의 비호 아래 이주하여,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박해를 가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즉, 이 문제는 19세기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과 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이다. 또한 로힝야 족의 무제한적인 인구 증가는 실제로 기존의 미얀마인들의 문화와 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사태의 핵심은 로힝야 족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과 거주권 등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이다. 친일파 토지 환수 문제와 비슷하게 사법적인 수단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불교계 언론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영국이 분쟁의 씨앗을 뿌린 민족분쟁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그 외에 늘어나는 로힝야 인구와 이에 비해 사라져가는 버마인들의 정체성과 불교를 지켜야하는 의무감, 불교민족주의와 미얀마 군부의 야욕 등도 원인으로 꼽고 있다. 즉, 버마족과 로힝야족 모두가 피해자라고 보고 있으며 불교 교리적인 영향은 적거나 아예 없다고 보고 있다. ### 즉, 불교의 자체의 잘못은 아예 아니라는 것.

게다가 네이버 등에서는 극단적인 댓글이 판치고 있었다. ###

4.4.2. 비판

위의 옹호의견은 버마족=불교=선, 로힝야족=이슬람=악이라는, 편견에 기초한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의존하고 있다.

첫째, 버마족은 불교를 믿는 평화 민족이 아니다. 과거 버마족은 인도네시아같은 불교 국가인 태국을 공격하고[35], 타 민족을 학살한 전과가 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미얀마의 민족주의에 영향을 끼쳐온 미얀마 불교가 이 문제에 연관이 없다고 볼 순 없다.

둘째, 로힝야족이 버마족을 학살한 원인은 이슬람 신앙보다는 버마족이 일본군과 협조하여 로힝야족의 땅을 환수한 것이 크다. 일제의 동남아시아 침략이 시작되자 미얀마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고 일본군에게 협조적으로 대했다. 영국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벵골인과도 차별받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귀축영미의 아시아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를 해방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다는 선전을 하던 일본군은 이들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점령지의 벵골인들의 농장을 해체하여 땅을 다시 미얀마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이미 그 지역에서 거의 100년을 살아온 로힝야족도 자연히 일본과 미얀마인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영국은 이런 분노를 대일항전에 있어 전선 유지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로힝야족을 무장시켰는데, 이런 영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로힝야족은 일본군과 싸우는데는 별 관심이 없고, 농토를 돌려받은 미얀마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1942년 아라칸주에서만 아라칸인들을 2만 명이나 죽였다. 분명 로힝야족이 버마족을 학살한 것은 악행이 맞지만, 버마족도 극악무도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잠깐[36]이나마 협력했고, 이슬람 신앙이 로힝야족과 버마족의 갈등에 영향이 없지는[37] 않겠지만 단순히 이슬람에 미친 광신도 테러리스트들이 불교인들을 죽였다는 불교신자들의 주장은 비약이 크다.

셋째, 결국에는 미얀마 불교의 행위도 과거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등이 행했던 종교간 보복과 서로의 악행에 대한 앙갚음을 하는 것뿐이다. 미얀마 불교의 논리대로라면 과거 기독교가 행했던 십자군 전쟁종교재판 또한 이슬람의 침략과 로마 제국의 박해에 고통받던 기독교의 보복으로 정당화되고, 알 카에다, ISIL의 테러행위 또한 서구 국가에 당했던 식민지배에 대한 보복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 신자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내세운 것은, "타 종교의 종교 전쟁과 상호간의 보복[38]은 그들이 그냥 사악해서 행한 것이고, 우리 불교는 증오와 원한의 연쇄와 업보를 끊는 평화적인 종교"라며 선전한 데 있다. 그런데 미얀마불교는 증오와 원한의 연쇄와 업보를 불교의 이름을 빌어 정당화하고, 그러한 정당화에 대한 비판마저 불교 신자들은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편견으로 차단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불교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옹호만큼 만만찮다. 조계종과 신대승네트워크가 타 종교와 운동권과 힘을 합쳐 반대 시위를 펼쳤고, # 거기서 신대승네트워크는 로힝야족 난민 인권실태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

만달레이 지방에서는 많은 무슬림들이 불교도들의 탄압과 테러 행위에 지친 나머지 불교 승려들에게 공양물을 보시하며 현지 불자들과 타협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타협한다고 해서 테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기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무슬림들이 많다.

2021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로힝야족 학살을 비롯해 불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국가 단위의 폭력과, 이에 대한 불교 승가의 침묵 및 정당화에 거부감을 느끼고 불교를 버리는 젊은 층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미얀마 재가자에게 익숙한 불교는 점성술과 정령()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이를 비과학적으로 여겨서 미얀마 주류 불교를 떠나 대안적인 상가에 귀의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 아신 냐나(Ashin Nyana, 1938-)가 창시한 종파에 귀의하는 경우가 있다. 아신 냐나는 하늘색 가사를 입고, 서구적 사유의 영향을 받아 윤회를 부정하며, 현생에서의 업만을 설한다. 또한 공덕을 쌓기 위한 보시, 불공, 명상 등에 대해서도 기존의 상좌부보다 큰 비중을 두지 않으며,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를 기르는 데 더 초점을 맞춘다. #

물론 미얀마군은 이러한 움직임을 극도로 경계해 이단시하고 있으며, 아신 냐나에게 여러 혐의를 씌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고 징역형을 선고하거나[39], 군부가 나서서 각 종단의 '교리 정화'를 명령하고 감독하거나, 승가고시 시험장에 군인을 배치하여 감시하게 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얀마에서 공식 인정된 불교 종단(gaing, 가잉)은 최대 종단 수담마(Sudhamma)를 포함한 9개 뿐이며, 아신 냐나의 종단인 천람종(Mopyar Gaing)은 여기에 포함되지 못했다.

4.5. 스리랑카 불교 극단주의

스리랑카의 고대 역사서인 《마하왕사》에서는 고대 실론 섬의 전설적인 왕 둣타가마니(팔리어: Duṭṭhagāmaṇī, 싱할라어: Dutugamunu)가 아라한 8명의 조언에 따라 엘랄라 왕이 이끄는 타밀족을 격퇴한 내용이 나온다. 문제는 이 아라한들이 다섯 가지 계를 따르지 않는 비불교인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는 것이다.

본래 팔리어로 되어 있던 《마하왕사》는 근대에 한 영국인에 의해 싱할라어로 번역되어 널리 퍼지면서 스리랑카 불교 극단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스리랑카 최고의 불교 승려 학자이자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의 지지자였던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둣타가마니의 사례를 예로 들어, 불교를 보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 교리를 주장했다. 앞서 언급한 미얀마의 사례에서도 고승들이 《마하왕사》를 근거로 들어 로힝야족 탄압을 옹호하는 일이 자주 있다.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에서는 붓다가 실론 섬을 불교의 가르침(담마)을 수호할 땅으로 예비해 두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불교에 기반한 선민사상의 뿌리가 깊다. 대다수가 불교도인 싱할라족 사이에서는 '폭력적인 이교도'로부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붓다의 가르침을 수호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팽배해 있다. 반면 타밀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는 알 바가 아니라는 입장으로, 1981년에는 경찰과 친정부 민병대가 자프나(Jaffna) 도서관을 불태워 타밀족의 귀중한 역사 문헌들을 소실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외에도 모스크를 공격하고 재림교회를 강제로 점거하여 불교 사원으로 개조하는 행위도 많이 일어났다.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는 스리랑카의 정치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 왔다. 1959년에는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적 정책을 펴는 데 미온적이었던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총리를 탈두웨 소마라마(Talduwe Somarama)라는 불교 승려가 총으로 저격하여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라자마하위하라 사원의 주지 대리였던 마삐띠가마 붓다락끼타(Mapitigama Buddharakkitha)의 사주를 받고 범행을 저질렀다.

5. 방생 문화에 대한 비판

일단 불교의 방생 문화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며 소중히 하자는 주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문제는, 생명을 잡아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았다가 다시 풀어주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흉기와 함께 길가던 타인을 납치해 살해 위협을 하다가, 갑자기 풀어주며, "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운명이었던 너를 풀어주겠다."며 주장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논리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는 아예 따로 방생 법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 경우 아주머니들이 물고기나 거북을 판다. 하지만 붉은귀거북이나 배스 등 외래종을 풀어주기도 해서 생태계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나온 생물을 사다가 풀어주는 건 자비라고 보기 힘들다. 막 풀어줬다가 얼마 못 가 떼죽음 당하기도 하고.##

때문에 과거 붉은귀거북이 문제가 되어 네이버 기사에 나온 적 있었는데#, 거기서 한 네티즌이 불교의 방생문화를 비판하자 다른 네티즌들이 "너 기독교인이지?"라며 기독교를 비난하는 답글을 올린 적 있다. 이 네티즌이 기독교인이라서 불교를 공격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네티즌들의 극성 때문에 위의 댓글은 삭제되어야만 했다. 실제 불교 신자들의 방생문화가 피해를 준 실제 사례가 존재하는데 말이다.

6. 부라쿠민 차별에 대한 비판

일본의 경우 되려 불교가 신분제를 만든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바로 천민 신분인 부라쿠민이 그것이다. 그 원인이라는 것이, 생명의 끝을 담당하는 도축업자, 사형집행인, 장의사 등을 부정한 존재로 보아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후손들까지 죄다 싸잡아 부라쿠민이라는 천민으로 묶어 놓았다는 것이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미명 하에 또다른, 더군다나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다.

부라쿠민이 불교에서 비롯된 천민 신분인 탓인지 실제로 부라쿠민에 해당되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의 종교가 가톨릭이다.

7. 현재

반기독교와 비교할 때 반불교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현대 대한민국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다소 적은 편이다. 종교의 교리상 선교의 의무가 기독교처럼 강하지 않아 외부에 민폐로 여겨지는 행위도 비교적 덜하기도 하고, 기독교, 이슬람처럼 특정한 을 숭배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자기 수련에 중점을 두는 철학 개념으로 이해하는 불교도가 많아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 중국 등 사회(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반불교 성향이 강하다. 특히 북한에서는 불교를 ‘정상적인 사회(가족)질서를 파괴하며 자본가들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계급의식과 투쟁의식을 마비시킬 뿐만아니라 문물/과학의 발전에도 지장을 준 퇴폐하고 낡아빠진 사상’ 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사. 중국 역시 비슷한 입장으로 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주요한 박해대상이다. 공산당원은 절때 종교 갖지 말라

사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넷상에 안티불교 활동이 꽤 있었으며, 특히 한 안티불교 블로그의 상당한 안티활동이 맹위를 떨친 이후로 안티불교 사이트도 몇몇 만들어져 불교의 교리적 비판과 동시에 스님들의 비도덕을 낱낱히 밝혀냈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훼불행위라며 경계심이 꽤 높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성의 목소리도 없이 강경하게 대했다. # #

결국 불교측에서 직접 손을 써 안티불교의 중심격인 블로그와 까페까지 폐쇄시켰다 #. 결국 이 때문에 반불교 활동은 지리멸렬하게 흩어졌다. 이렇게 중심 커뮤니티가 망했다고 심한 타격을 입은 이유는, 무신론자들이 대부분인 당시 안티불교 주동자들에 비하여 나머지 참가자들이 대부분 극단적 기독교인인 탓이 컸기 때문이다.

즉, 주동자들은 순수한 불교 비판을 위해 반불교 운동을 시행했다면, 나머지 이들은 안티기독교에 대한 미러링을 위해 반불교를 이용했다.[40] 이들은 다른 군소 안티불교까페를 여럿 만들다가 정작 불교비판 자체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자기 종교에 관한 전도만 하다 보니 별 호응도 못 받았고 폐쇄만 반복하고 사라졌다. 역사와 관련되어 불교를 비판하는 커뮤니티의 경우보다 기독교와 관련하여 불교를 비판하는 커뮤니티는 공감을 사지 못했다.

이후 반불교 세력은 상당히 쇠퇴했으며, 현재도 불교 측에선 '불교를 배워야 안티를 하고 공부해도 심오한 교리 때문에 안티 못한다'라는 당당한 입장이다. 사실 교리가 현학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일반 신도가 교리에 대한 공부가 쉽지 않고, 거기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쉽지 않다. 그리고 또한 불교가 한국 사람들에게 친숙하면서도 정작 절이나 포교당은 멀거나 생소한 곳에 있기에 제대로 교리를 접할 기회가 없다는 점, 그리고 외래종교이면서 동아시아에서 1000년이 넘게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해왔다는 점[41],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 남아있는 서양 사회를 생각하면 불교에 대한 피상적인 호감만 남아있는 지금으론 기독교나 이슬람보다 엄정한 비판은 어려운 상황이다.

8. 외부 링크

9. 같이 보기


[1] 신량역천(身良役賤). 신분은 양민인데 직업이 천하다는 뜻이다. 승려가 양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승려 자체가 신분과 상관이 없었고 양반 승려 천민 승려도 있었으나 전부 천대받았다.[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간골표(諫骨表)라고도 표기하곤 한다.[3] 제1차 결집에서 아난다와 마하가섭의 갈등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2차 결집에선 상좌부와 대중부가 갈라지는 근본분열이 일어났다.[4] 이러한 관점에서 더 나아가 자현상좌부 불교를 소승불교로 깎아부르며 오늘날에 초기불교 수행은 가능하지도 않고 저들은 다 사기꾼이라고 극언을 남기기도 한다. 자세한 사항은 자현 문서 참조.[5] 언어학적으로 볼 때 석가모니는 인도 동북부의 프라크리트로 말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니까야를 기록한 언어인 팔리어는 인도 서부에서 사용되었던 프라크리트로 추정된다. 아함경은 산스크리트로 되어있으며 가장 많이 남은 판본은 한역본이다.[6] 당장 아함경과 니까야만 하더라도 대승비불설과 맞물려 이 두개가 친설이냐 아니냐 따져 논란이 심했고, 특히 니까야는 마하위하라 부파의 교조주의와 맞물려 신빙성이 의심되어 학계에서 위상이 작아진 경전이다.[7] 그렇다고 해서 위경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불교의 정경들이 종교 중에서 친설과 가장 거리가 멀 뿐, 불교나 타 종교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제작된 위경은 존재한다. 복희외 여와를 보살로 왜곡했던 수미사역경, 공자, 안회를 보살로 노자를 마하가섭의 환생으로 보는 청정법행경, 대놓교 유교의 효 사상과 섞은 부모은중경이 그 예다.[8] 이로 인해 《법구경》이나 《대반열반경》등 초기 경전은 각 부파마다 내용이 겹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열반경의 경우 인도 북부에서 전래되는 판본은 붓다가 무여열반에 든 뒤 법신으로 남아 계속 수행자에게 힘을 준다고 여기지만, 남방 상좌부의 전승본은 무여열반에 든 붓다가 삼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삼계를 초월했다고 해석한다.[9]숫타니파타》도 가장 오래된 계층은 8게송(앗타카) 부분이며, 대승 경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꼽히는 《팔천송반야경》과 《묘법연화경》도 그 고층부는 훨씬 짧은 게송의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10]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뿌리인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본체적 실제인 브라흐마(梵)와 본체적 자아인 아트만(我)와 같다는 원리. 혹은 그러한 원리를 깨달은 경지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지만 미처 찾지 못하고 있는 참 자아를 발견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 원리에서 윤회사상과 브라만 계급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범아일여는 BC 6세기즈음에 여러가지 도전을 받게 되는데 그 중에서 석가모니는 범아(梵我)의 아(我)를 통째로 부정한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주장하였다.#[11] 하지만 수피 공동체, 시아파 일부, 동남아시아 무슬림들은 윤회를 지지했다.[A] 범어적 해석은 이 링크를 참고[13] 조선왕조실록사전[A] 범어적 해석은 이 링크를 참고[15] 겁탁(전쟁, 기근, 질병), 견탁(사악한 견해, 법도), 번뇌탁(마음에 번뇌가 가득함), 중생탁(사람이 인륜 도덕을 저버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명탁(수명이 차례로 단축되는 것)[16] 삼독(三毒)이라고 하여, 성냄, 탐욕, 어리석음을 말한다. 각자 지옥, 아귀, 축생을 뜻하기도 한다.[17] 생, 노, 병, 사, 애별리고(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원증회고(원수와 만나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원하는 것을 못 구하는 괴로움), 오음성고(오온에서의 집착에서부터의 괴로움)[18] 대체적으로는, 법화경이 아닌 다른 경전은 깨달음이 낮은 이를 위한 설법이고,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이들을 위한 설법이 법화경이라는 식이다.[19] 정확히 말하자면 자이나교 공의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20] 닐스 보어만 하더라도 예전엔 루터교 신자였지만 나중엔 불가지론자로 변모했다.#[21] 석가는 바라문교의 고행에 대해,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고행인데 굳이 고행을 해야 하냐며 부질없는 짓이라고 했다. 석가는 지나친 고행은 오히려 제 몸만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입장이었다.[22] 정확히 말하자면 본지수적에 입각하여 타 종교를 자신의 종교의 하위호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원래 종교(宗敎)라는 말 자체가 '진리의 궁극적인 경지(siddhānta)'이라는 말로 불교를 스스로 높히 부르는 말이었다.[23] 여래는 이미 이러한 여러 견해들의 장단점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보다도 더 훌륭한 것도 알고 있지만 지식에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적멸과 해탈을 얻었다.(남만대장경 6, 52-53)#[24] '모든 종교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들 모두 순수함과 자제심을 갈구한다(아소카 칙령 Nb7 #)'[25] 이 사람은 티베트 사자의 서의 저자로 유명한 파드마삼바바의 제자였다.[26] 양련진가는 도굴에 다른 티베트 승려들까지 동원하였는데, 이 승려들은 도굴을 막기 위해 무덤에 조성한 수은에 중독되어 죽었다. 도굴한 부장품을 가지겠다고 서로 싸우다가 죽은 승려들도 있었다.[B] <불교 파시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 <불교 파시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29] 다케다 신겐이나 무사시보 벤케이처럼.[30] 일본 불교는 원래부터 분쟁과 폭력 사태를 일으키며"進者住生極楽 退者無間地獄"(나아가는 자는 극락왕생, 물러나는 자는 무간지옥)을 외치면서 만만찮게 성깔이 있었다.[31] 그 중에서도 특히 앞장선 것이 일련정종이었다.[32] '항상 향당가문(鄕黨家門)을 생각하라,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받지 말아야 하며 죽음으로 오명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따위의 내용.[33] 도죠 히데키의 원래 종교는 국가신토였다.[34] 달라이 라마 등은 반대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35] 이는 태국이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36] 나중에는 일본군의 미얀마인 학살로 반일 국가로 돌아섰다.[37] 실제로 이슬람이 타 종교에 비관용적인가 관용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38] 사실 이러한 분쟁은 단순히 어느 종교가 악해서 행했다고 보기엔 정치적,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39] 아신 냐나는 2016년이 되어서야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40] 왜 미러링이냐면, 당시 초기 안티기독교의 주체는 악성 불교도와 환빠였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은 단순히 무신론을 차용했을 뿐이었다. 물론 지금의 반기독교 운동은 이들이 쇠퇴하고 나서 무신론자들이 주축이 된 지라 이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 반기독교/한국 참조[41] 일례로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생 성추행 사건의 주범인 최 신부가 자신의 죄를 전생이 저지른 죄라는 식으로 불교식 논리로 회피한 경우.[42] 조선이 반불교를 펼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정작 성리학 자체는 불교에 가장 영향을 받은 유교 학파이자, 유교가 불교를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학파이기도 하다.[43] 불씨잡변이라는 불교 비판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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