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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5:45:51

조사선

1. 개요2. 사상
2.1. 현성공안2.2. 생각의 대상화2.3. 생사라는 착각 극복2.4. 존재론적 어리석음의 소거2.5. 일체유심론
3. 비판
3.1. 불교 무아론의 존재론적 해석3.2. 깨달음의 효용 문제3.3. 도덕의 당위성 문제
3.3.1. 불교의 반출생주의 부정
3.4. 논리적 자가당착
3.4.1. 모든 영적 추구를 멈추는 또다른 추구3.4.2. 인식전환을 통한 고통의 제거 문제3.4.3. 과위 문제
3.5. 본래면목에 대한 직관적 확신3.6. 비판에 대한 반론
4.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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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사선()은 혜능이 창시한 남종선에 기반한 대한민국의 선학이다. 많은 부분 불교의 공사상, 연기론, 무아론에 기반하고 있다. 불립문자와 직지인심, 현성공안을 강조한다.

현재가 조사선의 전성시대라고 할만큼 한국 불교계와 영성계의 많은 인물들이 조사선을 표방하고 있다.

모든 것은 이미 깨달은 상태라며 수행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묵조선과는 다르다.[1]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이는 힌두교 사상인 불이일원론의 요체와 거의 일치하며 조사선은 불교적 문법을 통해 이를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2. 사상

2.1. 현성공안

그러나 보라! 일은 전혀 뜻밖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진리 안에 있었다! 아니,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모든 존재가 이미 진리 안에 있었고, 단 한 순간도 그것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다닌 진리는 저만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토록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이미 처음부터 진리 안에 있었고, 그랬기에 이렇듯 무언가 애쓰고 노력하여 진리를 얻으려던 나의 일체의 시도 자체는 처음부터 불가능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이미 진리 안에 있으면서 진리를 찾으려는 어리석음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김기태가 구도의 길을 정리하며 1994년 10월 경에 쓴 글 중 발췌[2]
본래면목[3]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문한다. 진리는 이미 드러나 있어서 구태여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진리가 아닌 것이 없고 당연하지 않은 것 또한 없다. 이를 현성공안이라 한다. 수행자는 이 사실에 대한 확신만이 필요하며 명상이나 고행으로 대표되는 별도의 유위적 수행은 무의미하다. 설법 중인 스님이나 재가법사가 중간 중간에 책상을 내리 치는 것은 언어사유에 함몰되지 말고 이 禪의 본질적 요체에 집중할 것을 청중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함이다.

2.2. 생각의 대상화

나는 이 집(육체)을 짓는 자를 찾으려고 여러 생(生)을 보냈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그동안 자꾸 되풀이 하였다. 이제 집을 짓는 자[4], 너를 찾았다. 너는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 조각이 났다.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소멸되어 버렸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 후의 부르짖음, 법구경, 153~154 게송[5]
생각자아가 존재한다는 착각과 욕망의 원천이기에, 깨달음을 위해 극복해야될 대상으로 상정한다. 분별, 경계, 구분, 망상 또한 선불교적 맥락에서 모두 생각을 가르킨다. 생각을 관찰하고, 마침내는 생각을 관찰하는 생각마저도 대상화한다. '부처는 마삼근'과 같은 터무니 없어 보이는 간화선 공안의 목적은 이런 생각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데 목적이 있다. 생사문제와 존재론적 어리석음은 모두 생각의 문제이기 때문에, 생각을 넘어섬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

2.3. 생사라는 착각 극복

시간의 현재성에 주목한다. 과거와 미래는 마음 속에 있는 관념일 뿐 실제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6] 따라서 '태어나고 죽는 내가 있다'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착각이다. 또한 자아가 허구라는 불이일원론이나 무아론적인 관점에서 생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7] 따라서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현명한 수행자의 태도이다.[8]

2.4. 존재론적 어리석음의 소거

그것은 무(無)에서 나와 무(無)로 돌아가며, 그 사이에 이 경이로운 놀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으로 있는 게임을 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분리되어 있는 게임을 하는 ‘하나임’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 불가사의를 발견할 수 없으며, 결코 깨어남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이미 그것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살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것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그 자체를 살았습니다.
제프 포스터 - <경이로운 부재>[9]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포함한 일체의 생각은 착각이다. 모든 것은 고정적인 실체가 없으며 '나' 또한 실재가 아닌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런 존재론적인 오해에서 벗어나 모든 것의 바탕, 그 절대적 여여함을 긍정함으로써 궁극적인 안심을 얻을 수 있다. 조사선은 불교의 무아론으로부터 '개별적 자아'가 아닌 '전체로서의 나'라는 불이일원론적인 결론을 도출하며 전체로서 살 것을 요청한다.

2.5. 일체유심론

만약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려고 하거든 응당 법계의 성품을 관찰하라.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화엄경 4구게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가지가지 법도 없어진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도 오직 의식이 인식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달리 찾겠는가? 내 이제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구나.”(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別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난 후 원효의 독백[10]
조사선은 불교 철학중 유심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부각시킨다. 마음이 없으면 세계도 없기에, 마음은 우리가 가진 전부이다. 마음이 본래면목이고, 본래면목이 마음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거울이나 스크린의 비유를 많이 사용한다. 거울에 무엇이 비치든, 거울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심지어 김태완 법사는 불교의 공이 곧 범아일여라는 발언을 여러차례 한 바 있다.

3. 비판

3.1. 불교 무아론의 존재론적 해석

그러면 영원하지 않으며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며, 이것이 자아며,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따라서, 물질이 과거나 미래, 현재의 것이든, 거칠든 미묘하든,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열등하든 훌륭하든, 멀든 가깝든,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니며, 자아가 아니며, 나 자신이 아닌 것입니다. 느낌과 지각과 형성작용과 식(오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상경
영원불변의 아트만이 오온 중의 하나라면 우리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무상이라는 것도 없고, 거기에서 오는 슬픔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슬픔과 괴로움은 끊임없이 따라다닌다는 것은 만인이 인정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오온 중의 어떤 것도 아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의는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역시 경험적인 사실을 출발점으로 한 논의이다. 부처는 여기에서도 경험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도 아트만이 아니다, 저것도 아트만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사실 우파니샤드의 철학자 야즈냐발키야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그에 따르면 참된 아트만을 언어적,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가 아니다, ~가 아니다’(neti neti,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는 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부처와 달리 언어적, 개념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참된 아트만의 탐구에 대단히 정열을 불태웠지만.
‘불교는 무아입니다’라고 옛날부터 일컬어지고 있으나, 최초기의 불교에서는 무아설이 아니라 비아설이 설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아설은 애초에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부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야모토 케이이치, <불교의 탄생> 190~191[11]
조사선은 자아가 실재한다는 존재론적인 착각을 무아론을 통해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무아를 처음으로 말한 것이 부처였으며 모든 과학적 증거가 이를 지지한다는 말도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부정하고자 했던 것은 '통제가 불가능한 괴로움의 원천으로서의 자아'지 실존적 착각이나 이데아가 아니다. 초기불교의 맥락에서 무아론은 말그대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완전하지 않고 괴로운 특성을 가진 자아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인식전환의 촉구였다.[12]

여러 경전상의 기록을 보면 부처의 자아에 대한 인식은 제프 포스터의 '경이로운 부재'가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13]과 같은 염세적 관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14] 부처는 자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적 환상을 해체하기 위해 시체를 관찰하는 부정관 수행을 주도했는데, 이 수행을 거친 제자들 중 60명이 극도의 허무감에 자살을 한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15] 조사선의 무아론은 매우 세련된 현대과학적 관점임은 분명하나 그것이 불교 무아론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강병균과 같은 과학자, 김영식과 같은 조사선 계통의 인물들은 무아론을 현대적 관점, 즉 존재론으로만 해석하므로 당연히 윤회에 있어 단멸론(윤회부정)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괴로움의 소멸로서 무아를 말했던 맥락을 살펴본다면 부처가 윤회를 긍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십사무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에 사후세계의 존재여부는 부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일묵스님의 말처럼, 부처의 관심사는 오로지 괴로움의 소멸이였으며, 이를 위해 사성제를 통해 윤회의 사슬을 끊을 것을 말한 것이다.[16] 즉 과학적 관점에서 윤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불교의 창시자의 관점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17]

3.2. 깨달음의 효용 문제

설지스님의 주장에 따르면 禪의 현실적 효용은 존재론적 어리석음의 소거, 즉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것 밖에는 없다. 실존적 불안의 해소는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조사선에 기반한 법사, 영성가, 거사들은 그들이 말하는 마음공부를 통해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공부를 통한 인식의 전환이 심리치료적 효과가 있고 도덕성을 제고한다는 점을 계속적으로 강조한다.[18] 이는 U. G. 크리슈나무르티와 경험 및 주장과 상반되며, 루퍼트 스피라가 말하는 수행의 본질과도 일치하지 않는다.[19]

3.3. 도덕의 당위성 문제

조사선의 선(禪)은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경계나 유위, 무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여여할 뿐이다.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다는 공 사상은 삶과 죽음, 윤회도 부정한다. 윤회를 하려면 윤회를 '하는 자'가 있어야 되는데 어떠한 주체도 없다는 것이 선에서 말하는 세계이다. 도덕에 대한 근본적 당위성을 선의 근본 논리로부터 도출할 수는 없기에, 대부분의 영성가들은 무아(無我)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도덕을 말한다. 그러나 경전상 기록을 보면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분명히 팔정도로 대표되는 도덕 수행과 그 결과로서의 윤회를 설했다.[20] 김성구 교수나[21], 일묵에 따르면 부처는 이를 방편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윤회의 존재를 믿고 이를 대중에게 설법한 것이다. 조사선은 존재론적 깨달음을 통한 도덕을 말할 권리가 있지만, 그것이 불교의 경전에 근거하는 깨달음과 도덕수행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3.3.1. 불교의 반출생주의 부정

난다, 나는 새로운 존재의 생산을 아주 조금도, 그리고 단 한 순간도 예찬하지 않는다. 왜? 새로운 존재의 생산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주 조금만 토해도 악취를 느끼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난다, 새로운 존재의 생산은 아주 조금이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고통이다. 그러므로 난다, 출생을 이루는 그 무엇이든, 즉 물질의 발생, 존속, 성장, 출현, 감정의 발생, 존속, 성장, 출현, 개념화, 영향력, 그리고 의식, 이 모든 것은 고통이다. 삶은 질병이다. 성장은 노화와 죽음이다. 그러므로 난다, 어미의 자궁 안에서 존재를 바라는 자가 흡족해할 게 무엇인가?
<입태경(Garbhāvakrānti-sūtra)>[22][23]에서의 고타마 싯다르타의 발언
문헌 기록이나 성적인 행위를 금하는 초기 승단의 규율을 고려하면, 적어도 초기불교는 출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반출생주의적 일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조사선 영성가들은 '부처는 모든 견해를 극복한 분',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지 유위법'이 아니라며 초기불교의 반출생주의를 부정한다. 조사선의 논리가 불교의 교리에 많은 빚을 지고 있기에, 이들은 조사선과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의 사상을 동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空)마저 공한 것에 불과하다며,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존재론, 인식론의 문제로 불교 사상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부처가 아니라 나가르주나[24] 달마, 혜능 이후의 일들이며 조사선 사상의 요체는 부처가 아닌 이들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재가법사들이 '고통의 존재'를 다루는 태도는 수학철학에서 볼 수 있는 수학자들의 수학의 실재에 대한 모순적 태도를 연상시킨다. 요컨대 현역 수학자는 수학을 하고 있을 때에는 마치 자신이 객관적 실재의 속성을 규명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것인양 행동한다. 하지만 그 "실재"라는게 뭐냐는 철학적 질문에 직면했을 때, 현역 수학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대답은 그런 '실재'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고 시늉하는 것이다.[25] 마찬가지로 많은 수의 재가법사나 영성인들은 실제 자신의 현실 생활 속에서는 반출생주의적 확신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철학적으로는 '삶의 고통'이라는 것이 착각이며 극복해야 될 관념으로 치부한다.

3.4. 논리적 자가당착

여러분이 자기로 알고 있고 자기로 경험하고 있는 ‘나’는 자기 존재가 끝장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계속 이어지를 바랍니다. 모든 영적 추구들은 그런 연속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자아중심적인 활동입니다. 어떻게 자아중심적인 활동을 통해서 ‘자아’의 활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어요?
U. G. 크리슈나무르티, <그런 깨달음은 없다> 268쪽[26]
조사선은 모든 분별을 버리고 생각의 경계를 만들지 말 것을 요구한다.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욕심이며 유위법이다.[27] 이미 모든 것이 진리로서 현현하고 있기에[28] 분별하는 마음만 버리면 본래면목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법사나 영성가들마다 표현법이 다르지만 이 경지를 '즉심', '무심', '부처도 없다'와 같은 용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져버렸다면 사라진 것을 아는 그 마음은 무엇인가?[29] 모든 생각과 느낌, 인식이 분별에 불과하다고 아는 것조차 또하나의 생각이고 분별이 아닌가? 정말로 모든 욕망이 공하고, 자아가 허구에 불과하다면 그렇게 주장을 하는 것 또한 타인의 수긍을 기대하는 욕망이 낳은 유아론적 행위가 아닌가? 조사선의 공(空)의 논리에 숨어 있는 본질적 자기모순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명쾌한 답변을 구하기는 어렵다.

3.4.1. 모든 영적 추구를 멈추는 또다른 추구

예전에는 나도 명상을 하는 것이 맥주를 마시는 것보다 더 ‘고귀’하거나 더 ‘영적’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행위가 충격적일 만큼 평등하다는 것을 보게 되자, 그런 분별적인 관념들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명상이 저절로 떨어져 나갔고, 자기탐구는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명상에 관심이 없고, 현존을 실천하는 일에도, 고요함이나 다른 무엇과 접촉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삶은 지금 이대로 언제나 충분합니다.
제프 포스터 - <경이로운 부재>[30]
에그하르트 톨레, 김기태제프 포스터[31], 심성일[32]은 어느 순간 모든 영적 추구가 멈췄다고 말한다. 지금 이대로 삶은 항상 완전하다고 말한다. 영성가 본인들은 영적 추구를 멈췄음에도, 지속적인 공개 활동을 통해 깨달음에 목마른 현대인들이 '모든 추구를 멈추는 또다른 추구'를 하게 만든다. 영성가들은 깨달음을 향한 추구를 멈추라고 말하지만, 대중은 영성가들이 경험한 '그 멈춘 상태'에 도달하려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33]

이런 영적 추구의 멈춤이 가지는 자기 모순은 U. G. 크리슈나무르티가 쓴 <그런 깨달음은 없다>에 나오는데, U. G.가 스위스의 그의 집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모든 종교적 영성추구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선생님은 지두님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U. G.는 지두가 영성에 대한 사람들의 환상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위선자로 보았다.

3.4.2. 인식전환을 통한 고통의 제거 문제

기독교나 전통불교에서 삶의 고통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조사선을 찾아오면 이들은 실존의 고통과 세속의 고통을 구분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자아에 대한 그릇된 오해에서 벗어나면 그러한 심리적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뇌과학이나 정신의학이 일관되게 가리키는 것은 고통을 단순히 생각이나 인식의 전환을 통해 없에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조사선 법문의 바탕에 깊게 암시된 깨달음만능주의는 공부인들이 자신의 심리적인 문제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그릇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책하게 만든다. 예를들어 인간관계나 금전, 건강과 관련된 현실적 문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김기태의 홈페이지에서 해결 방안을 구하면, 그는 '지금 이 모든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 '고통을 피하지 말고 모든 부정적 감정을 있는 그대로 허용해라'와 같은 주장을 반복하며 의식의 전환을 조언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만물의 여여함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물리적으로, 인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김영식은 그가 개발한 '생각 걷어차기'와 같은 방법을 통해 고통을 최소화하고 심리적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34][35] 그는 고통을 생각이 주는 고통과 신체의 고통으로 이분화하고 있다.[36] 그러나 엄밀한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사람의 감정과 고통은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되거나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37] 뇌신경회로, 도파민이나 세르토닌과 같은 호르몬, 전대상피질, 편도체, 뉴런의 신호전달, 그리고 인간 개개인이 처한 환경과 기질, 경험 등 다종다양한 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은 특정 정신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과학적 관점에서 정신적 고통의 해결을 위해서는 이러한 개별 요소를 이해하고, 종합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며 그래서 정신의학, 신경과학, 인지심리학과 같은 학문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깨달음을 통해 과학적 방법으로 심리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들의 대부분은 심리학, 정신의학, 생리학, 뇌과학에 대한 몰이해나 곡해에 근거하고 있다.

3.4.3. 과위 문제

조사선 관련 설법이나 글을 보면 항상 깨달음에 관한 과위(果位)[38]가 암시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있는데 당신은 지금 이것을 모르고 있다'는 식이다. 조사선은 모든 것을 공 사상을 통해 논리적으로 해체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그들 스스로의 과위를 해체하려고 하지 않는다. 영성 또한 하나의 욕망이며, 엄밀한 禪적 관점에서는 모든게 여여하므로 깨달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견지의 비판을 가장 가혹하게 했던 사람이 U. G. 크리슈나무르티이며 그는 소위 구루가 되는 것은 영적으로 빈곤한 현대인을 이용해 자신의 인정욕구를 만족시키는 위선적 행위로 보았다.[39]

3.5. 본래면목에 대한 직관적 확신

이거는. 다만 분명해지면 스스로가 분명해져요. 온 천지에 둘이 없어요. 그냥 우주 전체가 그저 이 하나뿐이라. 생각이 필요 없습니다. 저절로, 저절로 안팎이 없이 그냥 이거 하나 뿐 이고, 생각을 가지고 뭘 가지고 저렇게 하는 건가? 아! 이걸 가지고 저렇게 하는 건가? 무슨 도리를 헤아리고 이치를 이렇게 탐구 하고 하는 것은 이 공부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그건 생각일 뿐입니다. 하여튼, 이거는 이 법은, 법 스스로가 저절로 이렇게 드러나서 증명이 되는 것이지 내가 머리를 가지고 이해하는 것은 절대 아닌 겁니다. 그거만 조심하시고, 공부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시면 돼요

절대로 머리로 이해하는 거 아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백퍼센트 망상입니다. 그냥 배운 말이고 그냥 자기 분별일뿐 이에요. 법은 스스로가 저절로 오직 이 하나 뿐인 법이 저절로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고 이게 분명 해지면은 그럼 뭐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자리에요. 이 일 하나 뿐 입니다. 아무 다른 일이 없습니다. 해가 떠도 저기서 뜨는 게 아니에요. 별이 빛나도 저쪽에서 하늘에서 빛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지금 무슨 기분이 어떻다. 마음이, 뭐 감정이 어떻다! 이것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안팎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이 하나 일일 뿐이라. 이 자릴 뿐이고. 단지, 이 한개일 뿐이란 말이죠. 이게 하나가, 이게 하나가 인자 분명해지는 거예요. 이거 하나가.

이렇게 가리켜 드려도. 우리는 이미 젖어 있는 습관은 뭐냐 하면은 생각을 가지고 어떤 걸 가지고 이거라고 그러는가? 자꾸 생각하는 그 버릇이 젖어있기 때문에 모르죠. 전혀, 무슨 말인지. 그래서 생각을 가지고 이걸 아무리 생각 하고 탐구를 하고 연구를 해도 모르거든. 그래서 아이고! 이거 뭔지 뭐 전혀 모르겠다. 하고 앞뒤가 꽉 막혀가지고 깜깜 해지면은 인제 그때부터 조금 인제 공부를 할 수 있는 쪽으로 조금 방향이 이렇게 바뀌는 겁니다. 생각가지고 헤아리고 있을 동안에는 이쪽 방향이 공부하는 방향이 아니에요.
2010년 김태완 법사 설법 녹취본 일부 발췌[40]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법이나 왜 무가아니라 유인지, 즉 본래면목을 물어보면 '물어보는 그놈이 법'이라던지 '지금 이거(책상을 내리치며)'라고 대답하며 질문자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정말 진지하게 논리적, 과학적으로 들어가려하면 '오직 모를뿐'이라고 하거나 십사무기를 말하며 그러한 질문은 괴로움의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논리나 과학마저도 본래면목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며 이는 진리에 다가갈 수 있는 첩경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언어적 진술은 이미 논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시공간과 삶과 죽음이 착각이라고 말한다면 이미 과학적 명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주장한다면 의식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차머스김재권과 같은 최고 수준의 철학자들도 평생 이 문제에 천착했지만, 속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반면 조사선 영성가들은 별다른 실증적 근거 없이 마음의 본성과 본래면목에 대한 자신들의 직관에 확신에 차있으며, 동시에 이것이 논리적이며 과학적인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과학의 권위을 빌리면서도 과학적 근거을 대지 않는 것이다.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스티븐 와인버그와 같은 수많은 저명한 물리학 석학들을 인터뷰하고 <세계는 왜 존재하는가>를 쓴 짐 홀트나 대중의 눈높이에서 만물의 이론(TOE)에 대해 이야기하는 카를로 로벨리와 같은 이들이 본래면목에 대해 더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조사선 뿐만이 아닌 불교와 불이일원론 관련 텍스트를 살펴보면 '바로 이것이 모든것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진리다'라는 깊은 암시가 전제되어 있다. 양자역학이나 현대우주론이 부처의 설법과 일치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미치오 카쿠[41]나, 짐 홀트, 아인슈타인과 같은 이들이 불교의 핵심을 몰라서 과학을 진리 탐구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정확하게 이를 인지하고 있고, 실제로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불교는 인도식 논증을 활용하는 중관학파 정도를 제외하면 본래면목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존재에 대한 궁극적 진실에 대한 논의를 전개할 학문적 전통이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불교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

3.6. 비판에 대한 반론

설지스님은 선의 효용은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는 것 밖에 없다고 하였으나, 선의 원래 종지는 장부일대사를 해결하여 무학인이 되는 것이다. 즉, 윤회를 끊고, 거기에서 자유로워지며, 부처님의 반야지혜를 계승하여 무량토록 자기와 남들을 이롭게 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선종의 영향을 받은 현대 영성가나 선승들은 현대 과학 및 철학과 타 종교 전통의 영향을 받아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깨달음을 논하는 경우가 있으나, 불교는 본래 선종에서도 이른바 '열반적 깨달음'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포괄해 왔다.

또한, 논리적 자가당착의 오류에서는 조사선의 알지말라고 하면서 아는 작용을 하는 마음을 무시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비판은 나가르주나 스님이 비판했던 악취공이다. 악취공은 독사를 맨손으로 움켜잡듯이 어리석은 이를 파멸시킨다고 중론에 서술되어 있다. 고려의 지눌 스님은 선을 말하면서 영적공지(靈寂空知)를 말하기도 했고, 항상 밝게 빛나는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마음이 현전한다고 한다는 선사들의 말도 있다. 또한 이것은 선과 사상적으로 큰 관련이 있는 화엄경에 나오는 근본보광명지(根本普光明智)의 또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 다음 단락에서도, 모든 영적 추구를 멈추는 또다른 추구라며 조사선을 비방하고 있는데, 이것 또한 단멸공에 떨어져 조사들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에 다름 아니다. 조사선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연기의 세계를 말하며, 모든 영적 추구를 멈추라는 것은,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공성의 체득이지, 허무론에 떨어지고 자가당착에 떨어진 것이 절대 아니다. 모든 영적 추구를 멈추라는 것은, 깨달음 성자들이 그들의 자내증의 경지를 읊은 것이지, 절대 이생범부들하고 같은 것이 아니다. 수없는 수련과 바라밀을 통해 온 것도 간 것도 없으며, 행하는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42] 오도송과 진여의 세계를 맛본 것이지, 아무런 노력도 없고, 바라밀도 없는 사람들한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없앨 수 있는가에서도 '뇌과학이나 정신과학이 일관되게 가리키는 것은 고통을 단순한 생각이나 인식의 전환을 통해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렇게 주장을 할 것이면 불교를 배울 필요가 없다.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며, 부처님은 마음의 근본을 고쳐주기 때문에 큰 의사 왕, 즉 대의왕이라고도 불렸다. 돈이 있는 것이 가난한 것보다 고통이 적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세속적인 조건들도 중요하며, 깨달음만능주의도 다가 아닌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불교의 엄연한 기본전제는 모든 건 마음이 결정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소극적인 정신승리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망해가던 인생이 다시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측면도 포괄한다.

또한, 학문적 전통의 부재에 대해서도, 진제스님은 많이 보고 들을 수록 업식만 더하게 될 뿐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건 끊임없이 윤회 바다에 휩쓸리면서 고통을 받고 일대사인연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오죽하면 '학문은 날로 더해가는 것이지만, 진리는 날로 덜어가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라는 말이 있겠는가. 이것은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지만, 조사선의 입장과도 상통한다. 불교는 공을 말한다. 공은 텅 비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돈, 외모, 몸, 명예, 물질 등 날로 더해가는 것만을 알지, 비워가는 것은 할 줄 못한다. 진리와 세속은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책 보고 깨달은게 아니었다. 책은 어디까지나 도움이 되는 것이지, 절대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며,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선불교가 서구에 들어가고, 또 여러 요인들 때문에 최근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선불교 특유의 직관주의는 현시대의 분석주의, 논리적 사고와 이질적인 감이 있으며, 불립문자를 내세우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오는 것 또한 맞다. 한국의 조계종은 진제스님이나 송담스님, 숭산스님처럼, 일본이나 중국에는 법맥이 끊겼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 법이 남아있다고 말하며 실로 희유한 일이다라고 말을 하지만, 선종 특유의 불친절함, 엘리트주의로 인해 대중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러한 오해를 해소할 기회도 많이 없었다. 하지만, 아마, 이렇게 서로 대화를 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다 보면, 분명 합의점이 생길 것이고, 이해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4. 관련


[1] 그러나 묵조선은 여전히 좌선을 수행방식으로 삼는데 이것은 좌선이 깨달음을 위해서는 필요 없지만 '이미 깨달아 있음'을 나타내는 유효한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2] 소개와 구도의 길 | 김기태의 경전 다시 읽기[3] 불교텍스트에 따라 도(道), 한법, 불이, 참나, 진리, 이것 등 다양한 언어로 표기되나 공통적으로 가장 궁극적인 세계의 본질, 실체, 배후를 가리킨다. 서양철학에서 비슷한 개념으로는 칸트의 물자체, 하이데거의 존재가 있다.[4] '집을 짓는 자'를 욕망으로도 해석하며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생각(분별적 사고)으로 설명한다.[5] 부처되면 생사 문제 해결 - 현대불교신문[6] 탄생과 죽음의 미신 : 김영식 네이버 블로그[7] 무아와 죽음에 대하여 : 김영식 네이버 블로그[8] 현존(現存)의 힘 - 김기태의 경전 다시 읽기[9] 알라딘 도서 소개: 경이로운 부재[10]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 불교신문[11] 알라딘 - 불교의 탄생[12] 당시 힌두교의 철학에서의 자아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신적 브라흐만(아트만)의 표현이였다. 부처는 자아의 근본적 특성을 근거로 이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장을 한 것이다.[13] Man kann auch unser Leben auffassen als eine unnützerweise störende Episode in der seeligen Ruhe des Nichts.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출전: Nachträge zur Lehre vom Leiden der Welt.)[14] 부처 생존 당시에도 주류종교였던 힌두교는 완벽하고 순수한 자아의 관념인 '브라흐만'에 기초했는데, 부처는 이 지점에서 힌두교와 갈라졌다.[15] 자살을 바라보는 불교의 관점 - 불교평론[16] 나는 이전도 지금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 - 아누다라경[17] 일묵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부처는 윤회와 전생, 사후세계를 분명하게 설명하였고, 이를 근거로 윤회 개념은 불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18] 조사선의 핵심 주장은 수행을 통해 깨달을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19] 그러나 스피라 또한 이 모호한 경계를 계속 넘나들고 있으며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대한 그의 조언을 구하는 자리에서도 의식에 대한 본질적 앎으로써 이를 극복할 것을 주문하는 등 깨달음만능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20] 윤회가 ‘환망공상’?…윤회 부정은 붓다 가르침 왜곡 - 불교닷컴[21] 과학의 관점으로 바라본 윤회와 전생 _ 김성구 교수 - YouTube 후반 질의응답 참조[22] Garbhāvakrānti-sūtra - Encyclopedia of Buddhism[23] The Teaching to Venerable Nanda on Entry into the Womb / 84000 Reading Room[24] 여기에 대해서는 불교가 종파화되고 교조화되기 이전 석가모니의 진의를 나가르주나가 재발굴했다고 여기는 재가법사들도 있으며, 피론과 같은 그리스 사상가를 그 근거로 드는 경우도 있다.[25] Reuben Hersh, "Some Proposals for Reviving the Philosophy of Mathematics"[26] 알라딘 도서 소개: 그런 깨달음은 없다[27] 김태완 기고글 - 무심선원[28] 현성공안이라고 한다[29] 이 지점에 대해, 설지는 '본래면목은 경험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30] 알라딘 도서 소개: 경이로운 부재[31] 제프 포스터(Jeff Foster) 작가 소개 - 교보문고[32] 심성일 작가 소개 - 교보문고[33] 설지스님 블로그[34] 수행법 설명 - 생각 걷어차기 : 김영식 네이버 블로그[35] 그의 '생각 걷어차기'는 간화선과 생각의 대상화라는 목적을 공유한다. 다만 화두를 드는 대신, 생각을 생각에 물들지 않은 중립적 이미지로 계속적 치환하는 것이 다르다.[36] 생각의 본질에 대한 설명 : 김영식 네이버 블로그[37] 실제로 신체적 고통과 감정적 고통이 둘 다 전전두피질과 대상회에서 처리된다는 연구가 있으며 일반의약품 진통제가 정신적 고통도 완화한다는 연구도 있다.[38] 행한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은 지위.[39] U. G.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이런 위선적 구루의 대표격 인물로 보았다[40] 무심선원 월간소식지 2018년 11월 196호[41] 부모 모두 일본인으로 불교신자였다. 그는 렉스 프리드만과의 대담에서 시간을 부정하는 불교의 세계인식에 대해 언급한다[42] 상좌부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아라한의 행위에 대해 '행위가 업이 되지 않는' 경지를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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