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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9 21:44:45

무아론

1. 개요

무아(팔리어:Anatta, 산스크리트어:Anātman). 자아의 실체를 부정하는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

2. 설명

그러면 영원하지 않으며 무상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며, 이것이 자아며,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따라서, 물질이 과거나 미래, 현재의 것이든, 거칠든 미묘하든, 내재적이든 외재적이든, 열등하든 훌륭하든, 멀든 가깝든,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니며, 자아가 아니며, 나 자신이 아닌 것입니다. 느낌과 지각과 형성작용과 식(오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아상경
나는 이 집을 짓는 자를 찾으려고 여러 생(生)을 보냈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그동안 자꾸 되풀이 하였다. 이제 집을 짓는 자[1], 너를 찾았다. 너는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이제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산산 조각이 났다. 나의 마음은 열반에 이르렀고, 모든 욕망은 소멸되어 버렸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 후의 부르짖음, 법구경, 153~154 게송[2]
영원불변의 아트만이 오온 중의 하나라면 우리들은 영원히 살 것이다. 그렇다면 인생무상이라는 것도 없고, 거기에서 오는 슬픔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슬픔과 괴로움은 끊임없이 따라다닌다는 것은 만인이 인정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오온 중의 어떤 것도 아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논의는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역시 경험적인 사실을 출발점으로 한 논의이다. 부처는 여기에서도 경험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도 아트만이 아니다, 저것도 아트만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사실 우파니샤드의 철학자 야즈냐발키야의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그에 따르면 참된 아트만을 언어적,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가 아니다, ~가 아니다’(neti neti,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라고 부정하는 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부처와 달리 언어적, 개념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 참된 아트만의 탐구에 대단히 정열을 불태웠지만.
‘불교는 무아입니다’라고 옛날부터 일컬어지고 있으나, 최초기의 불교에서는 무아설이 아니라 비아설이 설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아설은 애초에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논의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부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미야모토 케이이치, <불교의 탄생> 190~191[3]

부처가 깨달음 후 2번째로 설법한 것이 무아론에 관한 무아상경이다.[4] 부처는 '통제 불가능한, 영원하지 않은, 괴로운' 특성을 가진 '나'를 본질적 실체로 인정하지 말 것을 설하였다. 초기불교의 맥락에서 무아론은 말그대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완전하지 않고 괴로운 특성을 가진 자아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라는 인식전환의 촉구였다. 당시 힌두교의 철학에서의 자아를 포함한 모든 존재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신적 브라흐만(아트만)의 표현이였다. 부처는 자아의 근본적 특성을 근거로 이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조사선과 현대 불이일원론에서는 존재론적 맥락에서 무아론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승불교의 관점으로 초전법륜과 초기불교의 수행에서 고타마 싯다르타가 말한 무아와는 거리가 있다. 초기불교는 자아를 욕망과 동일한 것으로, 욕망은 괴로움의 근원으로 윤회를 지속시키는 동인으로 보았다. 팔정도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 즉 사성제가 초기불교 수행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삶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는 전제가 있으므로, 초기불교를 반출생주의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강병균과 같은 과학자들은 진화론이 플라톤 철학을 전복시키기 이전에 이미 무아론이 이러한 함의를 지녔다고 본다. 무아론은 본질주의에 반하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무신론, 실존주의 등 많은 철학사조와 연결되어 해석된다.

3. 윤회

무아론의 현대적 관점, 즉 존재론적 성격만을 강조할 경우 당연히 윤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괴로움의 소멸로서 무아를 말했던 맥락을 살펴본다면 부처가 윤회를 말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5] 십사무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에 사후세계의 존재여부는 부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부처의 관심사는 오로지 괴로움의 소멸이였으며, 소멸의 수단으로서의 윤회의 사슬을 끊을 것을 말한 것이다.[6]

[1] '집을 짓는 자'를 욕망으로도 해석하며 크리스 나이바우어는 생각(분별적 사고)으로 설명한다.[2] 부처되면 생사 문제 해결 - 현대불교신문[3] 알라딘 - 불교의 탄생[4] 첫번째는 팔정도이다.[5] 일묵은 초기불교 경전에서 부처는 윤회와 전생, 사후세계를 분명하게 설명하였고, 이를 근거로 윤회 개념은 불교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6] 나는 이전도 지금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 - 아누다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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