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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3 08:08:45

삼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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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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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3대 국왕
삼근왕 | 三斤王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465년[1]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사망
(음력)
479년 11월 (향년 14세)
백제 웅진성
(現 충청남도 공주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백제 왕태자
477년 4월 ~ 477년 9월 (5개월)
백제 제23대 국왕
477년 9월 ~ 479년 11월 (3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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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성씨 부여(扶餘)
삼근(三斤) · 임걸(壬乞) / 삼걸(三乞)[2] / 문근(文斤)[3] / 삼척(三斥)[4]
부모 부왕 문주왕
모후 미상
종교 불교
왕호 삼근왕(三斤王)
별호 문근왕(文斤王)
임걸왕(壬乞王) }}}}}}}}}

1. 개요2. 생애3. 《삼국사기》 기록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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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23대 군주이자 건길지.
三斤王【或云壬乞】文周王之長子
삼근왕은【혹은 임걸이라고도 한다】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

'삼근(三斤)'을 '임걸(壬乞)'로 쓰는걸 봐선 三과 壬을 반도 일본어설과 관련된 훈독인 '미(뜻은 三/水)'로 읽었을 가능성이 있긴 하나 백제삼서를 참조해 편찬한 《일본서기》에는 '문근왕(文斤王)'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미보단 고대 한국어와 관련된 '무/모'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壬의 경우 한국어 훈독으로는 '물'로 읽을 수 있기 때문. 이 경우가 맞다면 三은 단순히 자형이 壬과 비슷해 생긴 오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무카리(むかり) 정도로 읽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출처요망] 이는 고구려어로 태대(太大)로 표기된 “마카리”라는 단어와 동계어일 가능성이 있다.

2. 생애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후 웅진성으로 도망쳐오듯 남천하여 안그래도 부여씨 왕실의 권위가 약해진 상태에서 문주왕해구에게 시해당하고 13세(만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탓에 해구에게 휘둘려 주체적인 국정 운영을 하지 못했다.

중요한 정사는 모두 좌평 해구가 처리할 정도로 해씨의 위세가 대단했다. 478년 봄에 권신 해구가 신흥 세력인 은솔 연신(燕信)과 손을 잡고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이 좌평 진남(眞男)에게 명령하여 군사 2,000명을 이끌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패배했다. 다시 덕솔 진로(眞老)에게 명령하여 정예 군사 500명으로 해구를 공격하여 그를 죽여버리고 부왕의 앙갚음을 했다. 한편 해구에 동조했던 은솔 연신은 고구려로 도주했는데 그의 처자식을 체포하여 웅진성의 저잣거리에서 처형시켰다.

부실한 이 시기 기록 탓에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해구가 웅진백제 내에서 실질적으로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였음을 감안하면 삼근왕이 진씨 등 다른 세력들과 함께 해구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어 사지로 내몰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 삼근왕의 나이가 14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른 유력 세력들과의 연대를 감안하더라도 어린 나이답지 않게 상당한 정치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랴쿠 덴노 23년(479년) 여름 4월, 백제(百濟)의 문근왕이 죽었다. 천황이 곤지왕(昆支王)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말다왕(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을 내려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6] 그리고 병기(兵器)를 주고 아울러 츠쿠시국(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 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동성왕(東城王)이 되었다.

이 해 백제(百濟)에서 바친 조부(調賦, 공물)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츠쿠시(筑紫)의 아치노오미(安致臣)· 우마카히노오미(馬飼臣)[7]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高麗)를 쳤다.
일본서기

하지만 재위 3년차인 479년 봄과 여름에 심한 가뭄을 겪고 479년 11월 갑작스럽게 승하하는 바람에 별다른 업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정황상 해씨 세력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움켜쥔 진씨 세력의 정변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삼근왕의 뒤를 이은 동성왕이 유년의 나이었다고 하니 진씨 세력이 상당한 정치적 역량을 보이던 삼근왕 대신 자신들이 주무르기 쉬운 어린 왕족인 동성왕을 왕위에 앉힌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백제에서는 다시 진씨 세력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으며 구심점이 해구를 토벌한 진로(眞老)였는데 진로가 삼근왕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얽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거듭된 국정 혼란 끝에 원래 근초고왕 대에 복속시켰던 전라도 동부 일부를 대가야에게 뺏기고 섬진강 유역을 장악당해 삼근왕이 죽음을 맞이하던 479년에는 가야가 백제 땅을 통하지 않고 중국과 통교하는 것(쉽게 말해 패싱)을 저지하지 못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악재가 계속되었다.

3.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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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근왕 본기>

一年秋九月 삼근왕이 즉위하다
二年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다
二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三年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다
三年秋九月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기다
三年冬十一月 삼근왕이 죽다

아버지도 재위 기간이 3년이었는데 아들도 재위 기간이 3년밖에 안 된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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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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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위 당시 13세(만 12세)였다는 기록으로 역산한 생년.[2]삼국유사》.[3]일본서기》.[4] 오우치씨 족보. 그러나 삼근(三斤)의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출처요망] [6] 《일본서기》인만큼 걸러 들어야 한다. 애초에 일본이 세계 제일의 나라고, 중국도 자기들 밑에 있다고 기술한 역사서이기 때문에. 다만 두 나라의 왕가가 친밀하기도 했고 동성왕은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친분으로 저런 행동을 보였을 가능성은 있다.[7] 츠쿠시의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동성왕을 호위하여 백제에 도착한 장군들이 정황상 고구려를 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