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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하게 부자관계가 아님이 증명됨 | |||
백제 국왕 | }}}}}}}}} |
백제 제4대 국왕 개루왕 | 蓋婁王 | |||
<colbgcolor=#008080><colcolor=#fbe673> 출생 (음력) | 연대 미상 |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사망 (음력) | 166년 | ||
백제 위례성 (現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일대)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백제 제4대 국왕 | ||
128년 11월 ~ 166년 11월 (3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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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개루(蓋婁) | ||
부왕 | 기루왕 | ||
왕후 | 부여초고, 고이, 우수의 모후 | ||
왕자 | 장남 부여초고(?) 차남 고이(?)[1] 아들 우수(?)[2] | ||
왕호 | 개루왕(蓋婁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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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백제의 제4대 군주이자 건길지. 제3대 기루왕의 장남.2. 생애
재위 기간은 39년으로 결코 짧지 않지만 《삼국사기》를 통해 남겨진 기록이라고는 고작 7줄뿐이다. 그마저도 일식이나 별의 움직임 같은 천문 현상[3] 말고 업적이라고 할만한 건 북한산성[4]을 축조했다는 기사가 전부다.그 외에 165년에[5] 일식에 관한 기사가 있다. 다만 같은 해 1월의 일식 기사가 《자치통감》에 165년의 일로 그대로 등장하는 걸로 봐선 155년보다는 165년으로 보는 게 더 옳아보이긴 하지만, 신라가 신라 건국기로 설정한 시기부터 낙랑군이 망하는 4세기 초 일식 및 월식 기사를 주로 낙랑군에서 입수한 일월식 기사로 채운 정황이 역력하기에[6] 정황으로 봐선 그렇게 보기도 힘들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백제로 도망온 신라의 반역자인 아찬 길선을 돌려보내지 않은 걸 계기로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아달라 이사금이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고, 신라군이 군량이 떨어져 물러나서 막아낸 걸로는 되어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나라를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자를 받아주다니 님 바보 아님?"이라는 식으로 혹평했다. 이후 근초고왕 대에 등장한 인물 사기도 백제에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다시 백제로 귀순했기에 평가가 틀린 말은 아니다.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백제든 신라든 이 시기에는 각기 한성과 경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지만 애초에 아달라 이사금이 재위했던 시기가 165년일 가능성 자체가 대단히 적은 상황인데, 《삼국사기》상 연대보다는 상당히 후대에 벌어진 일이라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3. 기타
-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 기록에서 많이 드러나는 문제점이지만 재위 기간이 굉장히 길어 계보에 의심이 있기도 한다. 개루왕 혼자 길면 몰라도 앞뒤로 다들 40~50년 정도씩 재위한다고 써 있는데 계산해보면 아들을 가진 시기나 수명이 부자연스럽다. 특히 다루왕이나 기루왕과 다르게 개루왕은 기록도 거의 없고 기루왕이 태자로 책봉하지 않은채 즉위하는데다가 아들이라고 불리는 고이왕과의 나이차도 심하게 나는 등 이유로 온조왕 직계, 초고왕계, 고이왕계를 모두 하나로 연결하기 위한 가공의 국왕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 제21대 왕인 개로왕이 '근개루왕'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사람과의 연관성 때문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기록상 개루왕은 초고왕과 고이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는 점과 개로왕이 왕족 중심의 왕권 강화를 시도해서 이와 연관있는 걸로 추측되지만 확실치 않다.[7] <도미 부부 설화> 건에서도 개루왕이 등장하지만 시기상 개로왕 시기로 보는 의견이 많다.
- 부여왕 해부루(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비류의 아버지인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 된다), 고구려의 제2대 왕인 유리왕(해유류), 고구려의 제3대 왕인 대무신왕(해주류) 등 婁(별이름 루), 留(머무를 류) 등을 왕명으로 쓰는 왕들이 모두 해씨였기 때문에(비류는 流(흐를 류)자를 쓰지만 역시 해씨이다.) 婁를 쓰는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을 모두 마찬가지로 해씨로 보고[8] 해부루 → 우태 → 비류 → 다루왕 → 기루왕 → 개루왕으로 이어지는 소위 해씨의 비류왕계 왕가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다루왕 및 '루'자 돌림 왕들은 온조왕계와는 다른 왕통이 되며 후에 초고왕이 즉위함으로써 비류왕계 왕가가 물러나고 부여씨의 온조-초고왕계 왕가의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9] 게다가 이후 고이왕이 집권한 뒤 초고왕계와 고이왕계가 권력 투쟁을 벌이다 근초고왕 대부터 초고왕계로 일원화되는데 고이왕 시기 우씨(우태를 통해 연관된다) 왕족의 대거 출현을 근거로 고이왕계를 비류왕계를 이은 우씨의 비류-고이왕계 왕가로 해석[10]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초기 백제를 비류왕계 - 초고왕계, 초고왕계 - 고이왕계의 권력 다툼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 39년간 왕으로 있었지만 기록은 고작 7줄. 책계왕, 사반왕, 계왕, 혜왕 등에 비해 기록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재위 기간 대비 기록 수를 대입하면 거의 최고 수준으로 기록이 적은 왕이다. 5년에 한 줄도 안 되니 말 다했다. 게다가 천문 현상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남는 개루왕의 행적은 재위 5년에서 끝나기에 이후의 긴 공백 동안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28년에 길선이 망명했다는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대조했을 때 실제로는 재위 38년의 일이기 때문. 애초에 존재 자체가 의심받는 왕이니만큼 <신라본기>의 연표를 따르는 것이 올바르다.
- 삼국사기 백제 본기는 기년 인상이 의심되는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초기 임금들 재위 기간이 나름 큰 문제였다. 때문에 일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사를 실증적으로 연구할 때는 이걸로 트집잡아 아예 근초고왕 이전 백제 왕들 자체의 재위기 기록 전체를 부정하거나 기년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었다. 물론 그와 같은 처사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의도적인 폄하 및, 삼국사기가 일본서기보다 정확도가 앞설리 없다는 유치한 비학문적 편견이 주된 이유였으나 어쨌든 백제 초기 임금들의 기년이 사반왕 외에는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될 정도고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지적은 식민사관 및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논파가 꽤 진행된 지금까지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도 일대에 고구려계로 추정되는 세력이 임진강 유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게 고고학적으로는 2세기 후반~3세기니, 건국자가 온조든 비류든 구태든 백제 건국자의 4대손으로 설정된 고이왕이 건국으로부터 대강 90년~110년 시차가 있다면 그럭저럭 이해되는 범주로 들어오게 된다. 고로 백제 창건자, 다루, 기루, 개루 등 임금 네 명의 재위기 또한 합리적인 재위기 간격으로 들어오게 된다. 한편 고이왕의 아버지로 설정되었고 집권자로서는 전전임자는 이 개루왕은, 실제 재위기는 3세기 초반~중반에 걸쳐있을 확률이 높다. 가능한 고고학적 최대 상한년대가 3세기 중반인 위례성 일대 현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이 개루왕이 하북위례성에서만 재위기를 보낸 마지막 임금이거나 혹은 하남위례성으로 처음으로 천도하여 그 일대 토돈분구묘계 해양 세력과 전격적인 제휴를 단행한 임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렇게 재위 기간을 인하해도 신라와의 충돌은 여전히 불가능하며, 아주 오래된 가설인 마한 내 소국-진한 내 소국 충돌 추측 또한 이 시기에 한해서는 거의 설득력이 없다는 게 또 다른 문제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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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개루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개루왕이 즉위하다
四年夏四月 한산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二月 북한산성을 쌓다
十年秋八月 형혹이 남두를 범하다
二十八年春一月 일식이 나타나다[11]
三十八年冬十月 신라의 아찬 길선이 망명해 오다
三十九年 개루왕이 죽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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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 ─ | ─ | 동명왕(?) | 구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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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좌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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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13대 근초고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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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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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선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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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사 | 부여문선 | 부여덕장 | 부여사 | 부여창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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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실재 혈통 기준 세로선(│) 부자, 부녀, 사위관계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 |
[1] 둘째 아들 또는 손자로 추정. 고이왕이 초고왕의 동생이 아니라 초고왕의 동생의 아들이라는 견해도 제법 있어서 이게 사실일 경우 고이왕은 개루왕의 손자가 된다. 초고왕 문서 참고.[2] 《삼국사기》에서는 고이왕의 동생으로 기술되어 있다.[3] 이런 불길한 천문 기록들을 역사적 사건을 은유한 것이라고 해석해보려고도 하는데 결국 결론은 알 수 없다로 귀결된다.[4] 그런데 현재 우리가 아는 북한산성이 아니라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북쪽의 아차산성일 가능성이 높다. 아차산성 발굴에서 '북한산성' 관련 기와가 나온 반면 북한산에는 삼국시대 성터 유적이 확인된 바가 없다. 구리시 문서 참고.[5] <백제본기>에는 155년이라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는 165년으로 되어 있다.[6] 낙랑군이 망하는 4세기 초 부분이 꽤 적어지거나 부정확해지며, 일월식 기사는 이후 신라가 독자적으로 천문학적 역량을 키우는 수백 년 뒤로 가야 다시 정확해진다. 김용운 교수의 《한국수학사》 참조.[7]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초고왕과 고이왕의 관계가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고이왕이 50년을 재위했는데 초고왕의 동생이라면 70살에 즉위해 120살까지 왕을 했다는건데 만약에 120살까지 왕을 하다가 죽었다는게 사실이라 해도 그 정도면 증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 뒤를 이은 책계왕은 고이왕의 아들인데 학계는 이를 토대로 고이왕은 초고왕 동생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아예 초고왕과는 혈연이 꽤 멀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8] 해씨는 고구려 국성인 고씨와 동일시되고, 부여계 성씨로 추정되며 한성백제 때부터 활동한 귀족으로 백제 개국공신 해루도 있다. 후에 해씨는 대성팔족 중 하나가 된다.[9]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10] 천관우. 1976.《한국의 국가형성》, 노중국. 1988.《백제정치사연구》[11] 《이십사삭윤표》 등의 사서와 비교하면 이 날짜는 정확히 개루왕 38년(165년, 을사) 음력 1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