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18:01:29

이벌찬

각간에서 넘어옴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관직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골품제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4a2d5b> 17관등
서열
관등명
장관
9주
5소경
차관
<colbgcolor=white,#191919>
}}}}}}}}} ||



1. 개요2.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이벌찬에 오른 사람들

1. 개요

伊伐湌

신라 때 둔 17관등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 이찬의 위 등급이고, 비상설직인 대각간의 아래이다. 다른 이름으로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뿔"이라는 뜻의 고유어를 비슷한 음이나 훈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자벌, 서발, 서불, 자분, 조부리'는 '각'에, '찬/한/간'은 '간'에 대응한다. '서발'과 '서불'이 뿔 각(角)에 대응되는 것에 착안하여, '서불'이 '뿔'의 중세 국어 'ᄲᅳᆯ'의 고형에 해당한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ㅽ'의 앞 'ㅅ'은 단순한 된소리 기호가 아니라 실제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ㅅ계 합용병서가 중세 한국어에서 어두자음군의 표기로 쓰였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한편 자벌, 자분, 조부리 등의 이표기는 어두의 ㅅ이 본래 ㅈ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 이사금 시대에 이벌찬이 처음 제정됐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2~3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17관등으로 정립된 시기는 법흥왕 때로 보는 편이다.

자색 관복을 입었으며, 신라에서는 오직 진골 이상이어야 오를 수 있었다. 골품제 참조.

초창기 신라에서 각간에 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병부령을 겸했다는 점 때문에 원래는 병부령과 같은 업무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2.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이벌찬에 오른 사람들


[1] 3세기 당시는 아직 왕이 신라의 군주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확립되기 전이었으며, 이후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 회의에 참가한 귀족들을 전부 '왕'이라 칭한 것도 이 때문이다.[2] 《일본서기》를 주해한 《석일본기》에는 상신을 만가리타로(萬加利陁魯)라고 읽으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가 없으므로 당시 고대 한국어를 그대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