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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6:35:42

이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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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이벌찬에 오른 사람들

1. 개요

伊伐湌

신라 때 둔 17관등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 이찬의 위 등급이고, 비상설직인 대각간의 아래이다. 다른 이름으로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뿔"이라는 뜻의 고유어를 비슷한 음이나 훈의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자벌, 서발, 서불, 자분, 조부리'는 '각'에, '찬/한/간'은 '간'에 대응한다. '서발'과 '서불'이 뿔 각(角)에 대응되는 것에 착안하여, '서불'이 '뿔'의 중세 국어 'ᄲᅳᆯ'의 고형에 해당한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ㅽ'의 앞 'ㅅ'은 단순한 된소리 기호가 아니라 실제로 발음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ㅅ계 합용병서가 중세 한국어에서 어두자음군의 표기로 쓰였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사실이다. 한편 자벌, 자분, 조부리 등의 이표기는 어두의 ㅅ이 본래 ㅈ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일벌간'의 경우 한자 일(一)이 고대 한국어 차자표기에서 '서'로 훈독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기 때문에[3] 역시 '서벌간'을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일(一)이 고유어의 '일'을 적는 음차자로도 사용되었던 터라, 일벌간의 一 역시 음독일 것이라 착각한 사람들에 의해 '일'과 발음이 비슷한 '이(伊)'가 들어간 '이벌간', '이벌찬'이라는 표기도 생겨나게 되었다. 즉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대표 표기로 제시되어 현재 통용 명칭으로 자리잡은 '이벌찬'은 아이러니하게도 관등명의 원래 발음과 가장 동떨어진 표기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 이사금 시대에 이벌찬이 처음 제정됐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2~3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17관등으로 정립된 시기는 법흥왕 때로 보는 편이다.[4]

자색 관복을 입었으며, 신라에서는 오직 진골 이상이어야 오를 수 있었다. 골품제 참조.

초창기 신라에서 각간에 오른 사람들이 하나같이 병부령을 겸했다는 점 때문에 원래는 병부령과 같은 업무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2.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이벌찬에 오른 사람들


[1] 3세기 당시는 아직 왕이 신라의 군주만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확립되기 전이었으며, 이후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 회의에 참가한 귀족들을 전부 '왕'이라 칭한 것도 이 때문이다.[2] 《일본서기》를 주해한 《석일본기》에는 상신을 만가리타로(萬加利陁魯)라고 읽으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가 없으므로 당시 고대 한국어를 그대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3] 자세한 까닭은 확실하지 않으나 새해 첫날을 가리키는 설날의 '설'과 연관짓는 의견이 있다. #[4] 신라의 실제 건국 시기가 2세기 말에서 3세기로 추정되니 유리 이사금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맞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