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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수록된 처용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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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처용가(處容歌)는 통일신라 시기 처용이라는 사람이 역신에게 아내를 빼앗긴 후 지었다고 전해지는 8구체 향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제2권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 편에 수록되어 있다. # 선율은 조선 초에 지어진 악장 〈봉황음(鳳凰吟)〉의 것을 공유한다. #2. 원문
향가 | 고려가요 |
東京明期月良 | 東京 ᄇᆞᆯᄀᆞᆫ ᄃᆞ래 |
夜入伊遊行如可 | 새도록 노니다가 |
入良沙寢矣見昆 | 드러 내 자리ᄅᆞᆯ 보니 |
脚烏伊四是良羅 | 가ᄅᆞ리 네히로섀라 |
二肹隱吾下於叱古 | 아으 둘흔 내 해어니와 |
二肹隱誰支下焉古 | 둘흔 뉘 해어니오 |
本矣吾下是如馬於隱 | - |
奪叱良乙何如爲理古 |
2.1. 양주동의 해석
ᄉᆡᄫᆞᆯ ᄇᆞᆯ긔 ᄃᆞ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ᅀᅡ 자리 보곤
가ᄅᆞ리 네히어라
둘흔 내 해엇고
둘흔 뉘 해언고
본ᄃᆡ 내 해다마ᄅᆞᆫ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서울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뉘 해인고
본디 내 해다마는
앗은 걸 어찌할꼬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ᅀᅡ 자리 보곤
가ᄅᆞ리 네히어라
둘흔 내 해엇고
둘흔 뉘 해언고
본ᄃᆡ 내 해다마ᄅᆞᆫ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서울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뉘 해인고
본디 내 해다마는
앗은 걸 어찌할꼬
2.2. 김완진의 해석
東京 ᄇᆞᆯ기 ᄃᆞ라라
밤 드리 노니다가
드러ᅀᅡ 자리 보곤
가로리 네히러라
두ᄫᅳ른 내 해엇고
두ᄫᅳ른 누기 핸고
본ᄃᆡ 내 해다마ᄅᆞᄂᆞᆫ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동경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누구 핸고
본디 내 해다마는
앗은 걸 어찌할꼬
밤 드리 노니다가
드러ᅀᅡ 자리 보곤
가로리 네히러라
두ᄫᅳ른 내 해엇고
두ᄫᅳ른 누기 핸고
본ᄃᆡ 내 해다마ᄅᆞᄂᆞᆫ
아ᅀᅡᄂᆞᆯ 엇디 ᄒᆞ릿고
동경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 해였고
둘은 누구 핸고
본디 내 해다마는
앗은 걸 어찌할꼬
3. 얽힌 설화
용의 아들인 처용은 헌강왕을 따라 수도 서라벌에 와서 벼슬을 하는데 어느 날 밤 역신(疫神)이 자기 아내와 함께 동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용이 그걸 보고도 태연하게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더니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 처용의 관대함에 감복하여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는 앞으로 대문에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붙여 둔다면 그 집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그 후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1]을 그려 문간에 붙여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가 나게 하였다. 그리고 헌강왕이 세운 절 이름을 망해사(望海寺), 혹은 신방사(新房寺)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망해사는 울산 울주군 청량읍 울주군청 뒤에 있었는데 지금은 절터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된 승탑만 남아 있다.
이때 처용이 춘 춤이 악부(樂府)에 처용무(處容舞)라 전해지고 이 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정재(呈才) 때와 구나의(驅儺儀) 뒤에 추는 향악(鄕樂)의 춤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를 처용무라고도 한다.[2]
그런데 처용가는 단순히 처용설화하고만 연관해서 생각해서는 안 되고 헌강왕설화, 어법집의 기록 등과 함께 살펴봐야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들이 각기 출현하여 국가의 존망에 대한 예조를 보인다는 것.
반면 처용을 무당으로 추정하는 쪽에서는 처용의 아내가 역신이 들어 그 귀신을 쫓기 위한 노래를 지어주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용의 아들' 이란 것은 그가 용신을 모시는 무당이었다는 것이며 무속에서는 꿈속에 자신과 검열삭제하는 사람이 하반신만 보이고 상반신이 보이지 않으면 '역병 귀신이 역병을 옮기려는 재수없는 꿈'으로 본다고 한다. 노래에서 '다리'만 나온 것이 그런 의미라는 것. 그래서 그런 꿈을 꾼 아내가 역병에 걸리지 않도록 무당으로서 역병귀신을 쫓는 노래와 춤을 만들어 주었다는 설을 무속 연구가 서정범 교수가 제기했다.
한편으로는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이 여성 천연두 귀신인 호구별성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가설을 주장한 김현우(처용탈 제작자)에 의하면 처용과 역신, 아내를 삼각관계 또는 성적인 관계로 해석한 것이 잘못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역신이 아내에게 NTR이 아니라 전염병을 옮기려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와 반대로 역신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내용도 많다. 역신이 생전에 처용의 아내를 사모한 남자였다거나 역신이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 아내를 품었다는 내용도 전해지기 때문에 꼭 성적인 관계가 없었다고도 확정지을 순 없다.
처용가의 마지막 부분을 "원래 내 것이었으니 빼앗은들 어쩌겠느냐."라고 해석하는 설도 있는데, 이 설도 처용이 무당이라는 설을 바탕으로 한다. 귀신을 쫓는 무가에서 "빼앗음을 어찌 할까"와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표현은 대체로 귀신을 위협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적 간격이 너무 크기 때문에 현재의 무가를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과 설화의 내용 등을 이유로 용서하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이다.
실화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실화설을 주장하는 사람에 따르면 역신은 헌강왕이라고 한다. 대놓고 왕을 비판할 수 없어서 역신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4. 고려가요
한글 부분이 고려가요 처용가이며 표시 부분은 향가와 중복되는 부분이다. |
고려가요 처용가에서는 향가 처용가 부분 앞에 처용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이 들어가는데 이 부분이 원래의 처용가보다 훨씬 길다. 또한 마지막 구절인 "본래 내 것이었는데/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부분이 없어지고 대신 역신은 처용 앞에서는 상대가 안 되니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며, 처용은 역신을 잡으려고 하고 역신은 멀리 달아나는 내용으로 끝난다.# 악학궤범(1610) 권 5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초입배열도(pdf 71쪽 - 왼쪽)) 악장가사(pdf 31쪽 - 왼쪽)
아래는 악학궤범의 표기를 따른 전문이다. 위 루비는 악장가사에 달리 표기된 부분이다. 악학궤범에는 전문이 한 줄에 2자씩 쓰여져 있고, 악장가사는 한자어만 한 줄에 한글-한자로 2줄이며 한글 표현은 한글이 1행 1자를 차지하고 있다.
원문 | 해석 |
(前腔) 新羅盛代 昭盛代 天下大平 羅候德 處容아바 以是人生애 [ruby(相,ruby=常)]不語ᄒᆞ시란ᄃᆡ 以是人生애 [ruby(相,ruby=常)]不語ᄒᆞ시란ᄃᆡ (附葉) 三災八難이 一時消滅ᄒᆞ샷다 (中葉) 어와 아븨 즈[ruby(ᅀᅵ,ruby=이)]여 處容아븨 즈[ruby(ᅀᅵ,ruby=이)]여 (附葉) 滿頭揷花 계[ruby(오,ruby=우)]샤 기울어신 머리예 (小葉) 아으 壽命長[ruby(願,ruby=遠)]ᄒᆞ샤 넙거신 니마해 (後腔) 山象 이슷 [ruby(기ᇫ,ruby=기ᇰ)]어신 눈[ruby(닙,ruby=섭)]에 愛人相見ᄒᆞ샤 오[ruby(ᅀᆞᆯ,ruby=ᄋᆞᆯ)]어신 누네 (附葉) 風入盈庭ᄒᆞ샤 우글어신 귀예 (中葉) 紅桃花ᄀᆞ티 븕거신 모야해 (附葉) 五香 마ᄐᆞ샤 웅긔어신 고해 (小葉) 아으 千金 머그샤 어위어신 이베 (大葉) 白玉琉璃ᄀᆞ티 ᄒᆡ[ruby(여,ruby=어)]신 닛바래 人讚福盛ᄒᆞ샤 미나거신 [ruby(ᄐᆞᆨ애,ruby=ᄐᆞ개)] 七寶 계우샤 숙거신 엇게예 吉慶 계우샤 늘의어신 ᄉᆞ맷길헤 (附葉) 설[ruby(믜,ruby=ᄆᆡ)] 모도와 有德ᄒᆞ신 가ᄉᆞ매 (中葉) 福智[ruby(俱,ruby=具)]足ᄒᆞ샤 브르거신 ᄇᆡ예 紅鞓 계우샤 굽거신 [ruby(히,ruby=허)]리예 (附葉) 同樂大平ᄒᆞ샤 길[ruby(이,ruby=ᅌᅥ)]신 허튀예 (小葉) 아으 界面 도ᄅᆞ샤 넙거신 바래 (前腔) 누고 지[ruby(ᅀᅥ,ruby=ᅌᅥ)] 셰니오 누고 지[ruby(ᅀᅥ,ruby=ᅌᅥ)] 셰니오 바[ruby(늘,ruby=ᄅᆞᆯ)]도 실도 [ruby(어ᄡᅵ,ruby=업시)] 바[ruby(늘,ruby=ᄅᆞᆯ)]도 실도 [ruby(어ᄡᅵ,ruby=업시)] (附葉) 處容아비[ruby(ᄅᆞᆯ,ruby=를)] 누고 지[ruby(ᅀᅥ,ruby=ᅌᅥ)] 셰니오 (中葉) 마아만 마아만ᄒᆞ니여 (附葉) 十二諸國이 모다 지[ruby(ᅀᅥ,ruby=어)] 셰[ruby(온,ruby=욘)] (小葉) 아으 處容아비[ruby(ᄅᆞᆯ,ruby=를)] 마아만ᄒᆞ니여 (後腔) 머자 외야자 綠李[ruby(야,ruby=여)] ᄲᆞᆯ리 나 내 [ruby(신,ruby=시ᇇ)]고[ruby(ᄒᆞᆯ,ruby=흘)] ᄆᆡ[ruby(야,ruby=여)]라 (附葉) 아니옷 ᄆᆡ시면 나리어다 머즌 말 (中葉) 동경 ᄇᆞᆯ[ruby(ᄀᆞᆫ,ruby=근)] ᄃᆞ래 새도록 노니다가 (附葉) 드러 내 자리[ruby(ᄅᆞᆯ,ruby=를)] 보니 가ᄅᆞ리 네히로섀라 (小葉) 아으 둘흔 내 해어니와 둘흔 뉘 해어니오 (大葉) 이런 저긔 處容아비옷 보시면 [ruby(熱病神,ruby=熱病大神)]이[ruby(ᅀᅡ,ruby=아)] 膾ㅅ가시로다 千金을 주리여 處容아바 七寶를 주리여 處容아바 (附葉) 千金 七寶도 [ruby(말,ruby=마)]오 熱病神[ruby(를,ruby=을)] 날 자바 주쇼셔 (中葉) 山이여 ᄆᆡ히여 千里外예 (附葉) 處容아비[ruby(ᄅᆞᆯ,ruby=를)] 어여 [ruby(려,ruby=녀)]거져 (小葉) 아으 熱病大神의 發願이샷다 | (전강) 신라성대 소성대 천하 태평은 나후의 덕 처용 아비여 이로써 인생에 서로 말씀 아니하실진대 이로써 인생에 서로 말씀 아니하실진대 (부엽) 삼재 팔난이 일시에 소멸하도다[4] (중엽) 어와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부엽) 머리 꽂은 꽃에 겨우사 기울어진 머리에 (소엽) 아으 수명 장원하사 넓으신 이마에 (후강) 산의 모습 비슷하게 깃으신 눈썹에 애인을 만나보사 오롯하신 눈에 (부엽) 바람 가득한 뜰에 드사 우그러진 귀에 (중엽) 홍도화같이 붉으신 모양에 (부엽) 오향 맡으사 우멍하신 코에 (소엽) 아으 천금 먹으사 드넓으신 입에 (대엽) 백옥 유리같이 허연 이빨에 남들이 기리고 복이 성하사 내미신 턱에 칠보에 겨우사 숙어진 어깨에 길경에 겨우사 늘어진 소맷길에 (부엽) 슬기[5] 모이어 유덕하신 가슴에 (중엽) 복과 지혜 갖추사 부르신 배에 붉은 가죽띠에 겨우사 굽으신 허리에 (부엽) 태평을 함께 즐기사 길어진 다리에 (소엽) 아으 계면조 맞춰 도사 넓으신 발에 (전강) 누가 지어 세우는고 누가 지어 세우는고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부엽) 처용 아비를 누가 지어 세우는고 (중엽) 많고 많은 이들이여[6] (부엽) 열두 나라가 모두 지어 세운 (소엽) 아으 처용 아비를, 많은 이들이여 (후강) 버찌야 오얏아 녹리야 빨리 나와 내 신코를 매어라 (부엽) 아니 매어 있으면 나오리다 궂은 말 (중엽) 동경 밝은 달에 새도록 노닐다가 (부엽)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소엽) 아으 둘은 내 것이거니와 둘은 누구 것인고 (대엽) 이런 적에 처용 아비만 보시면 열병신이야 횟감이로다 천금을 주랴 처용 아비여 칠보를 주랴 처용 아비여 (부엽) 천금 칠보도 말고 열병신을 내게 잡아 주소서 (중엽) 산이나 들이나 천 리 외에 (부엽) 처용 아비를 피해 가련다 (소엽) 아으 열병대신의 발원이시로다 |
[1]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탈 등에 남아있는 처용의 외모가 중동 지역 사람과도 비슷하다고 해서 이것이 신라와 중동의 교역 증거라는 말도 있다. 처용이 왕과 만난 곳도 당시 국제 교역항이던 울산. 이 학설을 최초로 발표한 사람은 1996년에 북한 간첩으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2003년에 공식적으로 복권되어 학계로 돌아온 정수일이다. 이 사람에 대한 것은 해당 문서로.[2] 연산군이 그렇게 처용무를 잘 췄다고 한다. 오죽하면 곁에서 구경하던 궁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참고로 조선의 연산군과 중종은 형제가 쌍으로 이 처용무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연산군이 벌인 짓이 벌인 짓이라 나중에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된 중종조차 "님 연산군처럼 되고 싶음?"이란 신하들의 반대로 처용무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이 행한 모든 행위들은 폭군의 기준으로 간주되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3] 고려 중기 석독 구결 문헌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어미 '-곤'의 빈도 감소로 대체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대 한국어에 '-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고+-는'으로, 중세 한국어에는 이와 같은 형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의미도 석독 구결 시기의 '-곤'은 현대 한국어 '-곤'과는 전혀 다르다.[4] 조선 후기 처용무의 가사는 여기서 "산하천리국(山河千里國)에"로 시작하는 〈봉황음〉의 가사로 이어진다.[5] 원문의 '설믜'는 현대어 '눈썰미'와 '귀썰미'의 어원이다.[6] '마아만 마아만ᄒᆞ니여'의 해석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