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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1:40:24

고계수

<colbgcolor=#000><colcolor=#c5b356> 성씨 고(高)
이름 계수(罽須)
부왕 신대왕(新大王)
형제 고발기(高拔奇)[1], 고남무(高男武)[2],
고발기(高發歧), 고연우(高延優)[3]
생몰연도 ? ~ ?

1. 개요2. 일생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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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대왕의 아들이었으며, 고국천왕, 고발기, 산상왕의 동생이었다. 그리고 명언 제조기[4]

둘째 형 고발기산상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에 한나라에서 군사를 빌려와 고구려를 치자 이를 무찌르고, 서로간의 탐욕 때문에 피흘리고 싸웠던 형들을 꾸짖은 일화로 유명하다.

용병술과 무예가 출중하여 무관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형인 발기가 일으킨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2. 일생

184년,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침략해오자 왕명을 받들어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자 고국천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좌원에서 한나라 군대와 싸워서 크게 격파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하자면 이때 잘려나간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5]

197년, 고국천왕이 뒤를 이을 후사를 얻지 못한 채 죽자 그 둘째 동생인 산상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은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인 고발기요동 지역으로 도망쳐 당시 그 곳에서 독립적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공손도동연으로부터 3만의 군사를 빌려와 고구려를 전격 침공했다.

이때 계수는 산상왕의 명을 받들어 나라를 배신하고 타국에 붙은 형의 군대와 싸웠다. 이 싸움에서 계수는 크게 승리하였고 이에 발기는 군사를 잃고 패하였는데, 계수는 스스로 선봉에 서서 달아나는 형을 추격하였다.

계수는 발기를 거의 잡아 죽일 뻔했지만 이때 발기가 "네가 늙은 형을 죽이려하느냐?"라고 꾸짖자 차마 형제를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발기를 그냥 놓아 주었다. 그러나 계수는 달아나는 발기에게 폭풍간지의 명언을 날렸다.
연우가 나라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지만 당신이 한때의 분함을 가지고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보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발기는 그제서야 잘못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다가 결국 스스로 목을 찔러서 자살을 하는 실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계수는 사망한 발기의 시신을 거두어서 후히[6] 장사를 지낸 후에 다시 고구려로 돌아왔는데, 이를 알게 된 산상왕이 계수를 불러서 반역자를 그냥 놔준 것도 모자라서 장례까지 치러주고 왔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계수는 슬프게 울더니 또다시 폭풍간지의 명언을 날리며 되려 형의 잘못을 비판했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세웠더라도, 대왕께서 예로써 사양하지 않은 것은 일찍이 형제의 우애와 공경의 의리가 없었던 까닭입니다.[7] 신은 대왕의 미덕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시신을 거두어 안치해 둔 것입니다. 어찌 이것으로 대왕의 노여움을 당하게 될 것을 헤아렸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일 어진 마음으로 악을 잊으시고, 형의 상례(喪禮)로써 장사지내면 누가 대왕을 의롭지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이미 말을 하였으니 비록 죽어도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관부에 나아가 죽기를 청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산상왕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는 계수에게 다시 화해를 청하였다. 이때 계수가 왕에게 절을 하였는데 산상왕도 계수에게 맞절을 하였다고 한다. 형제 네[8] 명 중에 반란 1명, NTR 1명이다. 고국천왕과 계수가 제일 개념 있다...

3. 둘러보기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왕실의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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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상왕과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던 신대왕의 차남 고발기(高發岐)와 동일인물이다.[2] 9대 왕 고국천왕[3] 10대 왕 산상왕[4] 그런데 고국천왕 6년 조에는 왕자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에 왕제(王弟)라는 개념이 없고 대신 선왕인 신대왕의 왕자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라 추측되기도 한다.[5] 이전에 고구려의 국상 명림답부도 좌원에서 한나라군과 싸워 크게 승리한 적이 있다.[6] 원문에는 草葬, 즉 적당히 시체를 풀로 덮어 장사지냈다고 나와 있다. 추격 중에 후히 장사를 지내줄 여유도 없을 테고, 후히 장사지냈다가는 진짜로 엄청난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실제로 후에 나온 산상왕의 반응을 보면 답이 나온다.[7] 보통의 경우라면 겸양을 표시하기 위해 '나는 왕위에 욕심이 없지만...' 을 내세워 한번 이상, 많으면 세 번까지 거절하기도 한다. 헌데 단 한 차례도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냥 대놓고 왕위에 오르고 싶다고 말한 것이고 그나마도 위에 형이 있는데도 저랬으니 계수가 보기엔 당연히 "형을 생각했으면 사양하는 척이라도 했어야죠!" 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8] 기록상 신대왕의 아들은 4명이다. 신대왕의 아들이 5명이라는 설은 음독이 같은 발기 두 명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나온 설인데, 해당 설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중국 측 기록(삼국지 혹은 통전)에 고국천왕의 존재가 누락된 것을 알지 못해 산상왕 이이모(伊夷模. 삼국사기엔 '伊夷謨'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되어 있음)를 고국천왕, 동천왕 위궁(位宮)을 산상왕으로 착각하여 중국 측의 발기 관련 기록을 삼국사기 고국천왕 즉위년 기록으로 잘못 옮겨 생긴 착오를 후대 사람들이 그대로 신뢰해서 나온 설이다. 공손도가 요동 태수가 된 시기는 서기 189년, 공손강이 요동 태수가 된 시기는 서기 204년으로 고국천왕이 즉위한 서기 179년 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