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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7:41:43

장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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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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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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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영어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중국어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프랑스어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 지린성 지안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v)[5]
지정번호 1135

將軍塚 / 将軍墳遺跡

1. 개요2. 무덤의 구조3. 무덤의 주인4. 기타5. 같이보기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돌무지무덤. 무덤의 형식은 화강암을 쌓아 만든 돌무지 돌방무덤이며, 동방의 피라미드라 할 만큼 규모가 크다. 한 변이 31.5~ 33 m이고 높이는 14m이다. 근처에 있는 다른 고구려계의 무덤, 수도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장군은 군대의 지휘자를 이르는 일반명사이고, 총(塚)은 연고가 확인되지 않은 무덤을 의미한다. 일본군만주에 세력을 뻗친 후에 '쇼군'에 빗대어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 명문화된 첫 조사였던 1907년 프랑스 동양사학자 에두아르 샤반느가 조사할 때부터 이미 장군총이라고 불렀고, 일제가 편찬한 한국의 문화재 도록인 조선고적도보 제1권(1915년 간행)에는 '장군분(將軍墳)'이라고 기재했다.[6] 100여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장군총》 모습

장군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대형 무덤에 대해 지역민들이 장군 또는 ㅇㅇ왕 무덤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맥락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대가 청나라 때에 봉금조치로 인해서 역사적 맥락이 끊겨 장군이라는 다소 막연한 명칭을 사용했을 수 있다. 태왕릉천추총, 서대총과 같은 소위 네임드 무덤 또한 출토된 유물의 명문이나, 지리적 특징을 따라 일제강점기 조사 때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7]

비슷한 사례로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성산동 고분군에는 팔장군묘라는 이름의 무덤이 있었다. 일제가 아니라 지역민들이 사용하던 명칭을 고스란히 사용한 사례이다.

2. 무덤의 구조

장군총은 적석총의 구조상으로 가장 완성된 형태이자 적석총 변화의 마지막 형태로 보고 있다. 장군총은 논자마다 용어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보편적으로 계단식 석실 적석총[8]으로 분류되고 있다. 세부 제원은 상술. 조사 결과 장군총을 비롯하여 배총 2기, 추정 제사 시설 1기, 배수구 1기, 추정 부속 건물지 등이 확인되어 무덤에 딸린 능원(陵園)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장군총은 강돌을 깔아 기초부로 삼고 가공된 화강암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그 위로 계단 7곳을 구성하여 석재를 쌓아갔다. 장군총에는 석재 1,146매를 사용해 외면을 구성하였고 내부를 강돌로 채웠다. 장군총에 사용된 석재들은 태왕릉의 석재보다 더욱 가공되고 한층 규격화되었다. 특히 장군총의 가장 아래 부분인 1단에 사용된 석재는 그 위에 쌓인 석재에 비해서 훨씬 크다. 또 1단의 계단에 사용된 석재를 보면 살짝 들여쌓아가면서도 석재가 맞물리는 면에 과속방지턱처럼 턱을 두어 하중으로 적석총의 형태가 어그러지는 것을 방지하였다.[9] 이러한 건축 기법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장군총을 적석총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이자 완성된 형태로 보는 것이다.

장군총의 매장주체부는 평행고임식의 천장을 갖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장군총의 밑에서부터 3번째의 계단 위에 묘실을 두었다. 태왕릉, 천추총을 비롯한 이전 단계의 적석총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미 적석총이 주된 무덤 양식으로 채용되던 시점에도 흙으로 무덤을 만든 굴식 돌방무덤(석실봉토묘)이 도입되어 있었다. 장군총의 묘실의 수직적인 위치는 고구려의 굴식돌방무덤과 거의 비율이 비슷하며 장군총 자체의 비율 또한 굴식돌방무덤과 유사하여 굴식돌방무덤의 영향을 꽤나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현실의 한 변은 543~550cm 남짓한 정방형이고 높이는 510cm로 집안 통구 고분군 내에서 가장 가공도가 높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먼저 만들어진 태왕릉과 비교하면 장군총이 전체적인 규모는 작아졌지만, 매장주체부만 놓고 보면 2배 가량 커졌다.

무덤의 정상부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난간의 일부도 확인되었다. 이에 학자들 간의 의견이 분분한데 단순히 난간이 있었다는 설, 나아가 적석총에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제의를 할 수 있었다는 설, 아예 무덤 위에 기와로 형성된 구조물이 있었다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장군총의 주변과 계단의 상면에서 기와나 막새가 출토되는 맥락을 보면 분명 구조물이 있었던 것으로도 볼 여지는 있으나 역시 구체적인 형태와 사용 양상을 추정할 근거는 부족하다.[10]

파일:장군총 전경.jpg
계단 중간에 사람이 서있으니 비교해보면 된다. 사진에 보이는 큰 돌이 바로 장군총의 특징적 요소인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이다. 호분석이란 무덤을 보호하는 돌이라는 뜻이다. 적석총의 구조상 하중이 기단부로 몰리게 되면서 무덤의 아래 부분이 큰 측압을 받게 되는데, 이때 돌들이 바깥으로 밀리는 현상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가장 큰 호분석은 높이 4.5 m, 두께 1.9 m에 달한다. 평균적인 호분석의 크기는 태왕릉, 천추총에 이어 세 번째로 크다.

이외에도 장군총의 주변으로는 배총이라 불리는 왕의 근신자(近臣者)의 무덤으로 현재까지 2기가 확인되었다. 1호의 경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으며 마치 장군총의 축소판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장군총과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2호의 상태는 잔존상태가 불량하여 잘 거론되지 않는다. 또 2호 배총의 서쪽으로는 이른바 제대(祭臺)라고 불리는 추정 제사시설이 위치하였다. 그러나 그 어떤 물질증거로도 제사와 관련된 시설임을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연접된 적석총의 기초부라는 견해도 있으나 마찬가지로 명확히 알 수 없다.[11]

3. 무덤의 주인

정식 명칭은 우산하1호분(禹山下一號墳, JYM0001[12])이며, 인근에 있는 태왕릉보다 정제된 형태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장수왕릉(長壽王陵)이라고 알려졌다. 태왕릉에선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광개토왕의 능이라는 의견이 많고 무덤 축조 양식이나 기술적으로 후대의 것이 확실한 장군총은 장수왕릉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설도 있다. 이쪽이 일반적으로 광개토왕릉이라고 알려진 태왕릉보다 광개토왕릉비로부터 거리는 멀지만 방향은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태왕릉은? 장군총이 광개토왕릉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 중 다수는 고국원왕릉으로 여긴다. 드라마 태왕사신기, 광개토태왕 등으로 인해 오해는 많지만, '태왕'이라는 호칭을 쓴 고구려 임금은 광개토왕 외에도 다수 존재한다. 또 태왕릉=광개토왕릉설의 다른 근거로는 2003년 무덤 근처에서 수습된 '신유년 호대(태)왕(辛卯年 好大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울[13]인데, 앞에 호(好) 자를 붙인 고구려 임금은 한둘이 아니다. 2019년에 발표된 자료에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므로 장수왕릉은 평양에 있으리라고 본다.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평양에서 보낸 장수왕이 죽었으면 당연히 평양에 매장했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설들에 대한 재반박으로 장수왕릉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먼저 평양이 아닌 집안(국내성)에 장수왕의 무덤이 있는 이유를 이것이 북위효문제의 예시를 들어 수릉(壽陵), 즉 살아 있었을 때 만든 무덤일 수도 있다 설명한다. 또 장군총 광개토왕릉설의 주요한 근거인 방향 문제는 2000년대 중국 고고학계의 조사보고서가 장군총과 태왕릉의 동북쪽과 동쪽 방향(즉 태왕릉의 경우는 광개토왕릉비 방향)에 제단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발견돼서, 태왕릉의 방향 문제에 반론을 제시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태왕릉의 정면은 제단 쪽이고, 광개토왕릉비와도 방향이 일치한다는 것이다.[14][15]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무덤 관련 논쟁은 처음 태왕릉이 발견된 1906년때부터 끊이지 않던 떡밥이었고, 오늘도 역사학자들은 이 무덤들의 피장자가 누구인지 마르고 닳도록 논쟁한다. 다만, 장군총이 장수왕릉이고 태왕릉이 광개토왕릉이란 주장이 더 많은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참고로 북한과 중국 학계는 이 문제에서는 다수설로 거의 일치한 실정이다.

다만 한국에는 장군총을 고구려 시조묘로서 신전과 같은 상징적인 의례를 거행한 공간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쪽 학자들은 장군총이 사람을 장사 지내기보다는 어떤 제례를 치르기에 더 적합한 구조이고, 삼국사기 등에 묘사된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 같은 행사를 수행하기에 적당하다고 여긴다.

4. 기타

조선 시대 허백당시집의 <망황성교>에서도 도굴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언덕처럼 돌을 쌓아 황제 무덤 만들어도 / 累石如丘作帝冢
목동에게 많은 보물 도굴되고 말았어라 / 金多竟遭牧豎兒
<망황성교> 中 (#출처)

반면 고구려식 무덤과 달리 신라 묘제는 통일 전후까지 돌무지덧널무덤이 주를 이루어 대체로 이런 참화를 면하였으므로 금관 따위가 출토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와 달리 중국측에서 장군총에 따로 철제 계단을 설치해두어 관광객들이 올라가서 볼 수 있었으나 2005년부터 유적 보호 차원에서 장군총 내부 관람을 차단하면서 철제 계단을 치워버렸다. 그래도 바깥은 구경하기는 가능하다. 하지만 태왕릉을 제외한 다른 통구 고분군 내의 왕릉급 적석총과 달리 유료인데다가 제복을 입은 안내자들이 나름대로 삼엄하게 관리한다.

5.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그 밖에도 당시 조사자들이 각자 출간한 단행본에도 이에 대해서 지역민이 부르던 명칭이라고 써놓았다.[7] 예를 들면 서쪽의 큰 무덤이라는 의미로 서대총, 서강(西岡) 남쪽의 가장 큰 무덤 : 서강 남대석묘(現 우산하 2110호) 등의 명칭이 붙여진 바 있다.[8] 적석부가 계단 형태인 굴식돌방 돌무지무덤이란 뜻. 중국이 사용하는 '방단계제석실적석총'이란 단어와 의미가 상통한다.[9] 태왕릉, 천추총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확인된다.[10] 장군총 외에도 다른 고구려 적석총의 상면에는 기와와 막새가 출토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적석총의 상부에 목조시설이 있었다는 견해, 소위 와즙(瓦葺)이라하는 기와로 무덤을 덮는 치장을 하였다는 견해 등이 있다.[11] 흙으로 만든 시설은 흙을 파보면 흔적이 남지만 돌은 누가 옮겨버리면 끝이기 때문에 알 도리가 없다. 이러한 점이 고구려 적석총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하는 학자들에겐 큰 어려움이 된다.[12] 集安 禹山下 墓群(Jí'ān Yǔshānxià Mùqún)의 약자, 통구 고분군 내 우산하 고분군(JYM), 마선구 고분군(JMM), 산성하 고분군(JSM), 만보정 고분군(JWM), 칠성산 고분군(JQM), 하해방 고분군(JXM)으로 크게 구분된다.[13] 자세한 것은 태왕릉 참고[14] 단, 2000년대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지정받기 위해 무수히 쏟아진 이 중국 보고서들은 국내 학자들에게 자주 비판받을 만큼 졸속인 정보도 많았다. 게다가 이 석축이 실제로 가 보면 알겠지만 제단이라고 보기 위해서는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보기에는 그저 돌을 나란히 깔아 만든 경계선 정도라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 제단이 앞에, 입구가 뒤에 있는 무덤이라니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15] 중국의 보고서는 다소 문제가 있긴 하지만 최소한 집안 통구 고분군의 왕릉급 무덤들에 대해서는 공을 들인 편이다. 그 중에서도 태왕릉과 장군총은 발굴의 누적이 다른 적석총에 비해 현격하다. 다만 연구에 있어서의 문제점은 단지 제단이라 추정되는 제대의 기능의 문제일 뿐 중국의 졸속보고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한국에서도 제단시설로 보는 견해, 그렇지 않은 견해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