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고분의 형태와 변천 둘러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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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장식 | 계단식 적석총 | ||||||||||
석곽 | 광실/석실 | 장군총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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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풍속도 | 사신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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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곽묘지방 | |||||||||||
단독 형성 | 고분군의 형성 | 고총/고총군 형성 | 고총 둔화 |
1. 개요
중국 길림성 집안시 우산하 고분군의 고구려 적석총. 우산하 2112호. |
2. 고구려의 적석총
적석총이라고 하면 으레 고구려의 적석총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인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중국 요동지역을 포함한 동북지역 일대에서 청동기시대를 즈음하여 나타났던 적석묘 축조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그 기원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을 뿐 정설이라고 부를만한 견해는 없다. 고구려 내지는 고구려와 관련된 적석총들 가운데서는 환인 망강루 고분군이나 장백 간구자 고분군이 거론되기도 한다.일반적으로 흙으로 쌓는 다른 고분문화와는 달리 돌로 쌓다보니 현대인 지금에서는 도굴이나 개발로 인한 파괴 말고도 자연적으로 붕괴되는 경우도 많다. 흙과 비교했을 때 돌로 쌓는다는 것은 무거운 돌을 옮길 인력만 확보되어있다면 흙보다 높게 쌓기가 용이하다. 대신에 건축학적으로 흙과 돌의 유지력, 즉 안식각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단 쌓을 때는 용이할 수 있더라도 유지력에 있어서는 흙으로 쌓는 것이 반영구적인 유지력을 갖는 편이다.
흔히 무기단식 적석총→기단식 적석총→계단식 적석총으로의 변화로 알려져 있으며 전반적인 변화의 모습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한 분류안이다. 하지만 그 밖에도 계장식 적석총이라고 하는 계단식 적석총 이전의 초보적인 단계의 적석총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여러 유형이 혼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각 형식의 적석총들이 연속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분적 차이, 즉 위계적 차이였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 적석총이 존속되었던 기간은 대체로 기원 전후한 시점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형태인 장군총의 묘주(墓主)에 따라서 5세기 전반이냐 5세기 후반이냐로 나뉜다. 꼭 묘주의 가부가 아니더라도 대체로 5세기 중엽을 언저리로 모두 석실봉토분으로 대체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분포범위는 의외로 그렇게 넓지 않은 편이다. 적석총의 축조가 활발했던 시점이 사실상 졸본, 국내 도읍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적석총들이 졸본과 국내의 현 위치인 중국 환인현과 집안시에 자리하고 있는 편이다. 그 외에도 압록강의 맞은편인 북한 만포시 주변으로도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드물게 평북까지도 적석총이 확인되기도 한다.[1]
보다 자세한 내용은 고분 문화 , 고구려 왕릉을 참고 바람.
2.1. 무기단식/기단식 적석총
중국 길림성 통화시 운봉수고(댐)의 무기단식 적석총들.
중국 길림성 환인현의 상고성자 고분군의 기단식 적석총[2]
무기단식, 기단식 적석총은 가장 아래에 돌로 쌓은 분구를 보호하는 석재, 즉 기단이라고 볼 만한 시설이 있냐 없냐로 나뉘어 진다. 애초에 포석(布石)식으로 돌을 깔아두기만 하는 청동기시대의 적석묘 축조 문화의 연장선에서 고구려 적석총이 생긴 것이라고 할 때 무기단식 → 기단식 적석총으로의 발전상으로의 설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상술하였듯이 완전한 계단식 적석총인데 윗쪽의 석재들이 무너져 내려서 기단식처럼 보인다거나 원래 기단식 적석총인데 기단이 무너졌다거나 하는 상황에서는 무기단식, 기단식을 분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유물의 편년에 의존해야하지만 발굴하더라도 유물이 안나오거나 소량이 출토되기 때문에 그 마저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기단식, 무기단식 적석총들은 비교적 이른 형태이기도 하지만 4~5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하위 계층의 묘제로써 지속적으로 축조된다. 또 하위계층이 아닐지라도 연접분의 형태로도 축조되기도 하며 이러한 경우에는 비교적 대형에 해당하는 기단식 연접적석총이 생기기도 한다.
2.2. 계장식 적석총
계장식 적석총 중의 하나인 칠성산 871호의 모습.
계장식(階牆式) 적석총은 단을 지어서 계단처럼 높게 쌓긴 하였지만 계단식처럼 한 층씩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담장을 여러겹으로 만들어 쌓아올린 형태를 뜻한다. 또 정확하게 단을 쌓아올리지 않기 때문에 그 양태가 비교적 조잡하고 장군총처럼 각 동서남북면의 단의 수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 역시 기단식 적석총에서 무덤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기단을 연속적으로 쌓다보니 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여기에서 발전하여 나중에 계단식이라는 온전한 형태의 대형 적석총을 축조하는 것으로 변화한다고 본다.
또 계장식 적석총에서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로 위의 사진에서 수직으로 서있는 판석(板石)들을 담장마다 늘어놓기도 한다. 이후의 계단식 적석총에서 확인되는 기와가 와즙(瓦葺)이라고 했을 때 장식적 요소에 선행하는 것일 수 도 있고 또는 지대석이라고 하는 적석총을 보호하는 시설의 초보적 단계일 가능성도 있다. 저러한 판석을 세워놓는 것이 계단식 적석총인 서대총이나 마선구 2100호 등 일부 계단식 적석총 단계에서도 확인되기도 하며 이를 토대로 변화과정의 순서를 설정하기도 한다.
기단식 적석총이 비교적 오래도록 사용되었던 반면, 계장식 적석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계단식 적석총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계장식에서 계단식으로의 발전과정은 비교적 선명하다고 볼 수 있다.
계장식 적석총은 대체로 3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사용되었다고 추정되고 있으며 이른 시기의 왕릉급의 무덤들도 대부분 계장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는 칠성산 871호, 마선구 626호, 마선구 2378호 등이 그러한 예이다.
2.3. 계단식 적석총
계단식 적석총으로의 변화 과정에서 비교적 빠른 편에 속하는 우산하 992호분의 북측 전경
계단식 적석총의 완성된 형태인 장군총
계단식 적석총에서도 크게 2개의 유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우산하 992호분 같은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장군총처럼 거대한 석재를 사용해서 꼼꼼하게 쌓은 형태이다. 발전과정을 생각했을 때 우산하 992호분같은 형태의 적석총들이 계장식 적석총과 같은 형태에서 발전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때부터 쌓인 기술적인 노하우들이 점차 장군총이나 태왕릉, 천추총과 같은 대형의 완성된 적석총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 백제 초기의 적석총
3.1. 즙석분구묘
연천 학곡리 적석분구묘. 위의 유적은 조사 이후 돌이 굉장히 많아 보이게끔 복원되었다. 아마 원래는 저랬을 수 있다.
연천 삼곶리 적석분구묘. 위의 학곡리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즙석식 분구묘, 즙석적석총 등의 다양한 표현으로 불리는 무덤이다. 즙석(葺石)이라는 표현은 쉽게 말하자면 외면만 돌을 쌓았다는 것을 뜻한다. 실질적으로는 내부는 흙으로 쌓았지만 즙석을 하면 마치 돌로 쌓은 듯한 이미지를 보이게 한다.
즙석분구묘는 특히 입지의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데 바로 하안대지를 따라서 분포한다는 것이다. 즙석분구묘들이 통상 다인장(多人葬)을 염두에 둔 형태로 한 분구 안에 여러개의 매장주체부를 갖기 때문에 평면형태가 위의 사진처럼 길쭉하게 생기게 된다. 그때의 길쭉한 방향은 하천의 진행방향과 평행하게 형성되는 것이 즙석분구묘의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위의 사진 모두 뒤로 임진강이 흐르고 있다.
분구묘 유형의 무덤들이 갖고 있는 단점으로 도굴 여부를 떠나서 자연적으로 오랜 세월 속에서 봉토가 유실되면서 그 위에 있는 매장주체부도 많은 정보를 상실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발굴이 되어도 유물이 거의 없거나 매장주체부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역사적 해석의 설득력이 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료 자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초기 백제와 관련되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증거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편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에서 한강 중하류역인 서울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무덤들이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강 중하류역의 자체가 워낙 유역 변화도 크고 더군다나 개발도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시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3.2. 석촌동 고분군의 적석총
서울 석촌동 고분군 4호분의 모습
5세기 중엽을 즈음한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의 적석총으로 건국 당시의 기록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기록과 실제 유구, 유적의 연대의 차이가 현격하여 초기 기록과 완전히 관련된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석촌동이라는 지명이 해당 고분군의 적석총에서 유래했다.
석촌동의 적석총들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고구려 고분군인 통구 고분군에 소재하고 있는 여타의 고구려 적석총과 상당부분 닮아 있기 때문에 우연히 백제가 적석총스럽게 쌓은 것은 아니고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있다고 본다. 다만 서울 자체가 워낙 일찍부터 개발 되었다보니 주변 유적들이 파괴되어 초기 백제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을 제외하면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 자체의 발굴도 발굴기법이나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가 누적되기 전인 70년대에 조사된 것이라 세부적인 정보도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최근에 한성백제박물관에 의해서 다시 석촌동 고분군을 조사하여 이전에 확인하지 못했던 적석총들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다만 기저부만 남은 것으로(또는 기단식 적석총 그 자체) 원상이 어떠하였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아직 보고서가 공개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매스컴에 의해서 보도가 많이 된 편이며 약식 보고서의 형태로 출토 유물 및 유구도면을 공개하기도 하였다.
고구려 적석총이 무덤에서 와당이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성백제박물관 발굴 구간의 적석총에서도 와당이 출토되었으며 와당은 고구려계가 아닌 한성기 백제의 와당의 특징을 갖는 문양으로 확인되었다. 다량의 금동보요장식들이 확인되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고구려 적석총에서 출토되는 양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점토부로 매장주체부의 주변을 성토한 흔적도 있는데 백제 적석총만의 특징인지는 아직은 완전히 말하기 어려운 듯 하다. 성격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고구려 적석총과의 비교검토를 통해서 상사성과 상이성을 명백히 하는 것이긴하나, 대부분의 고구려 적석총이 분포하는 중국에서의 발굴이 우리나라만큼 꼼꼼하게 기술(記述) 및 보고하지 않기 때문에 조사 내용의 면밀한 비교 및 검토가 어려운 편이기도 하다.
3.3. 벌집형 적석유구
최근 정선 아우라지에서 벌집모양의 적석 유구가 확인되었다. 참고아직 자세한 성격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 및 연구가 이뤄져야하는 유구로써 현 시점에서 이 유구가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는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유구가 발굴된 것이 처음이고 동북아 전체에서도 처음 나타나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적석총의 한 유형일 수도 있지만 적석총의 축조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발굴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고 개별 곽(槨)들이 무덤의 기능을 하였는지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보고서의 공간까지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4. 가야의 적석총
금관국 구형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는 뜻에서 전 구형왕릉으로 불리는 적석총이다. 하지만 전(傳)이라는 접두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구형왕의 무덤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특히 무덤이라고 부르는 유구 자체도 조선시대에 민간의 차원에서 축조하였던 일종의 승탑같은 개념의 방형석탑이다. 경남권에서는 비교적 수량이 적지만 경북 안동이나 영주시와 같은 경북 북부 지역에서 이러한 불교, 도교적 사상에 기반한 방형석탑들이 더러 분포하고 있다.
5. 방형석탑
위에 언급한 불교, 도교적 사상의 석탑. 일부는 석실을 두고 불상을 안치하거나 산신 신앙에 기반한 경우가 있다. 유구 자체는 위에서 말한 경북 북부 외에도 충주, 제천 등 남한강 유역에도 꽤 분포되어 있다.
애초에 저런 구조물은 탑 항목에 나오듯 초창기 불탑의 모습에서 유래한 적멸보궁에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