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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6 17:23:52

영변행궁



고려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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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안북도 영변군에 있었던 고려시대부터 조선중기까지의 행궁.

2. 상세

고려 충선왕 3년 때 건설되었다는 설과 충숙왕때에 지어졌다는 설,인종때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지고있다. 이후 이성계최영,남이장군,김종서,류승룡,선조광해군이 이곳을 이용했다.
이성계장군이 2차 요동정벌을 갈때 거쳐서 갔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최영의 중국과의 외교당시 사용되었으며[1]
김종서장군이 4군6진 개척당시 거쳐간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남이장군이 함경도평안도에서 근무할 당시에도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선조가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던 영변행궁을 이용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27권,선조25년 6월 13일 신축5번째 기사辛丑" 중에서 '영변 행궁에서 신하를 인견하고 이어할 곳을 논의하다'上권 에서도 왕이 위급시 거처를 할만큼 영변행궁이 규모가 상당한것으로 보여진다.

"상이 영변행궁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알현하였다 최흥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상이 이르기를,"이 일에대한 나의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 머무를것이니 여러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하였다. 정철이 아뢰기를,"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귀성(지금의 구성)이나 강변(지금의 압록강 일대) 근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上御寧邊行宮, 引見從臣。 崔興源曰: "自上欲移駐定州, 請姑留于此。" 上曰: "此則予意已定。 世子則當留于此, 諸臣欲不來者, 不來可也。" 鄭澈曰: "世子今留駐此矣, 終向定州乎?" 上曰: "當向龜城 江邊等處。" 澈曰: "世子留駐則力分, 朝廷恐不成模樣, 人心亦且搖動也。" 上曰: "多留從官于此, 予以輕裝移駐矣。" 澈曰: "姑待平壤聲息之來, 何如?" 且曰: "諸臣勸留 勸避,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6월 1일 기축 20번째기사
중에서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난이 일어나자 명망있는 진신들이 모두 도망하다'

''애초에 상이 경성을 떠날 때 요사스런 말이 갖가지로 퍼져 국가가 틀림없이 망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명망있는 진신(縉紳)들이 모두 자신을 온전하게 할 계책을 품었다. 수찬 임몽정(任蒙正)은 하루 먼저 도망하여 떠났으며, 【몽정은 임국로(任國老)의 맏아들이다.】 정언 정사신(鄭士信)은 도성 서남 쪽에 이르러 도망하였고, 지평 남근(南瑾)은 연서(延曙)에 이르러 도망하였으며, 그 나머지 낭서(朗署)와 여러 관사는 제멋대로 흩어져 떠났고, 산반(散班)과 외신(外臣)은 한 사람도 따르는 자가 없었다. 평양에 이르러 대사성 임국로는 어미의 병을 핑계대고, 이조 좌랑 허성(許筬)은 군사를 모집하겠다고 핑계대고, 판서 한준(韓準), 승지 민준(閔濬), 참판 윤우신(尹又新)은 서로 잇따라 흩어져 떠났고, 노직(盧稷)은 영변에서 뒤에 떨어졌다가 도망하였다.
상의 행차를 따르던 제신(諸臣)들도 서로 이르기를 ‘강문(江門)에 이르면 늙고 병든 사람은 당연히 사퇴해야 한다.’ 하면서 모두 견고한 뜻이 없었는데, 홍진(洪進)만은 울면서 이항복에게 말하기를 ‘시종하는 신하는 어려운 때에 마땅히 임금을 따라야 한다. 나는 한낱 오활한 선비이니 세자를 따른다 해도 무슨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 죽든 살든 상의 행차를 따르겠다.’ 하였다. 세자를 따르거나 왕자를 따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경성에서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문관·무관이 겨우 17인이었으며, 환관(宦官) 수십 인과 어의(御醫) 허준(許浚), 액정원(掖庭員) 4∼5인, 사복원(司僕員) 3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상이 내관(內官)에 이르기를,
"사대부가 도리어 너희들만도 못하구나."하였다. 환관과 사복원에 대해서는 뒷날 모두 녹공(錄功)하였는데, 끝내 직사(職事)는 맡기지 아니하였다.
상이 정주(定州)에 머물렀다. 사자(使者)를 의주에 보내어 거가가 본주(本州)에 머물며 곧바로 요동으로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을 효유하여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고 응교 심희수(沈喜壽)를 보내어 행궁(영변행궁)(行宮)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잇따라 차관(差官)을 보내 자문(咨文)으로 요동의 진에 알리도록 하고, 이덕형에게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진달하도록 유시하였다.


그리고 영변행궁 구조 및 형태와 건물의 종류에 결정적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에 나오는데
'선조실록29권,선조25년8월2일 기축1번째 기사'에는
영변행궁 내부에 동헌이 같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영변행궁은 남한산성 행궁과 같이 동헌과 행궁이 합쳐진 건물로 보인다. 이를 통해서 영변행궁을 조선초기에는 관아와 감영으로 쓰임과 동시에 행궁으로의 위치를 가진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행궁의 규모는 최소 화성행궁정도의 규모로 보인다.
또한 영변행궁동헌에 넒은 마당이 있다는 자료이기도 하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양 총병 등 중국군의 형편, 요동 파천 등을 논의하다.

상이 행궁(영변행궁)의 동헌(東軒)에 나와 비변사 당상(堂上)을 【윤두수·한응인(韓應寅)·이항복·이성중(李誠中)·이덕형과 승지(承旨) 유근(柳根), 주서(注書) 강욱(康昱)·구사맹(具思孟)·신잡(申磼)이 함께 입시하였다. 】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형세가 어떠한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전사(戰士)들이 전진할 마음만 있고 후퇴할 마음은 없으니 해볼 만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훌륭한 장수를 얻은 뒤라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조승훈(祖承訓)을 오도록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성중이 아뢰기를,
"신이 조승훈을 양 총병(楊總兵)에게 요청하니, 그가 ‘내가 바야흐로 공죄(功罪)를 논하여 상벌(賞罰)을 시행하고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이 엄격한 듯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 총병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성중이 아뢰기를,
"전일 양 총병에게 ‘우리 나라가 복이 없어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하였더니, 양 총병이 ‘조정의 장령(將領)들이 엄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답하였으니, 참으로 도량이 큰 사람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고 왔는데, 만약 한 번 패했다는 것을 이유로 철병(撤兵)해 버린다면 우리 나라의 일은 진실로 걱정할 게 못 되지만 황제의 위엄이 손상될 것이니 사이(四夷)가 알도록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이 적은 대군(大軍)으로 대진(對陣)하여 서로 전투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군사를 뽑아 그들의 흩어져 있는 군사[散卒]를 휩쓴 뒤라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신이 이빈(李薲)을 만났더니, 빈이 신의 아우인 신립(申砬)·신할(申硈)이 패배한 것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많은 수의 군사를 나누어 험조(險阻)한 곳에 숨어 있다가 나오는 적을 덮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차질이 생긴다면 혹 난처한 일이 있지 않겠는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영변(寧邊) 근처도 아직 대가(大駕)가 머물고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유언 비어가 전파되고 있는데 더구나 강원도·황해도 등지이겠습니까. 길이 막혀 이 한 곳에 머물러 있기는 하나 호령이 통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불행하여 적세가 온 나라에 가득 찬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수상(水上)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현재에는 다만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 바다로 나가는 것, 수상으로 가는 것 이 세 계책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장전보(長奠堡)에 머물러 있기만을 허락했을 뿐이니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의당 정주(定州)에 가서 사변의 추이를 살피든지 혹은 바다로 나가거나 수상으로 가든지 편의에 따라서 조처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수상은 위험할 듯하니 해로(海路)가 합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로 나가려 하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가는 데는 적도 갈 것이다."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강계는 길이 험하니 피란할 만합니다."
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이곳은 두 강(江)이 앞에 있으므로 중국군이 구원하면 적은 반드시 바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요동을 침범하려 하는데 어찌 소소한 원병(援兵)을 꺼리겠는가. 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반드시 간사한 계책이 있어서일 것이다."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인심이 차츰 안정되는 까닭은 대가(大駕)가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이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 도(道)의 인심이 크게 소란한 까닭은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일 장전(長奠)으로 간다면 그 중간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겠지만 난에 임하여 강을 건너게 될 때 그곳의 인심 또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지나치다." 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성중은 아뢰기를,
"요동으로 건너간 뒤에 중국에서 적을 막지 못하여 그들과 화친(和親)한다면 뜻밖의 변고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군신들이 차례로 나갔다. 신잡이 나가려 하자, 상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경의 말과 같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의당 전진하여 수습할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형세로 보건대 정주(定州)에는 결코 갈 수가 없다."
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서 선조의 '의주피란' 당시 영변행궁은 관아로 쓰임과 동시에 행궁으로의 품격또한 있음을 알수있다.



이 외에도 세종실록에도 영변행궁과 영변약산에 대한 기록이 수차례 나온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영변행궁이 세종때에는 '진'과'영'이 설치되어 군사시설로 이용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다만 이후 강계로 이전된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 116권, 세종 29년 5월 1일 신묘 1번째기사 중에서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가 문안을 드리었다. 우의정 하연(河演)·좌찬성 황보인(皇甫仁)·우찬성 김종서(金宗瑞)·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이 아뢰기를,
"신들은 생각하옵건대, 평안도의 안주읍성(安州邑城)은 본디 절제사 영(節制使營)으로서 실로 우리 나라 요충(要衝)의 땅이옵니다. 옛사람의 말에, ‘수(隋)나라 군사 백만 명이 물에 빠져서 고기밥이 되었다. ’는 것은 곧 안주(安州)의 살수(薩水)를 이른 것이옵니다. 뒤에 영변(영변행궁)(寧邊行宮)
약산(藥山)이 지형 좋은 땅이라 하여서 (鎭)을 옮기고 (營)을 설치하였다가, 근자에 변경(邊境)이 시끄럽기 때문에 또 강계(江界)로 옮긴 것이옵니다. 약산(藥山)의 이로움과 해로움은 조정의 의논이 서로 옳다 그르다 하옵는데, 약산을 좋다고 하는 이는 말하기를, ‘지형이 잘 짜였고 험준하여 만일 군사를 엄하게 신칙하여 굳게 지킨다면 적군이 와서 덤비지 못할 것이다. 혹 말하기를, 「큰 냇물 사이에 끼여 있으므로 물이 불어 길이 막혔을 때 갑자기 적변이 있으면 구원할 수가 없다.」고 하나, 우리쪽이 건널 수 없을 때는 적군도 마찬가지일 것이니, 그것은 족히 염려할 것 없다. ’고 하고, 약산(藥山)을 그르다고 하는 이는 말하기를, ‘형세가 험하고 좁으니 비록 자리잡고 있을 수는 있으나 군사를 행군시키어 상대편을 막아내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며, 도적의 오는 길이 약산(藥山)뿐이 아니라, 안주(安州)가 더욱 그 곧은 길이니, 도적이 만일 수만(數萬)의 병력으로 요긴한 길목을 끼고서 거침없이 몰아 쳐들어오게 되면, 약산(藥山)이 비록 견고하였다 할지라도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옵는데, 신들의 생각에는 안주성(安州城)은 헐어 무너진 지가 수년이 되어 만일에 불시의 일을 당하게 될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청하옵건대 그 고을 백성에게 명년까지의 기한으로 장성(長城) 쌓는 일을 면제하고 안주성을 수축(修築)하게 함이 실로 편하고 유익할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3. 역사적 변천사


조선시대(1392년7월17일~1636년12월16일?) - (행궁은 1636년12월14일부터20일 사이에 소실된것으로 추정)[7]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상으로는 영변읍성 내부에 위치한 것 으로 보이며 고려시대부터 내려져 오던 행궁을 조선시대에는 '진'과 '영'을 설치함으로서 군사시설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조선초기에는 영변도호부가 행궁건물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에서 선조의 의주피난과 광해군과의 분조가 이루어진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때까지 기록상 존속한것으로 보아서 홍건적의 난을 버텨낸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대의 화공으로 행궁이 불타버려 그 자리에 영변객사'철옹관'이 들어선것으로 추정된다. 행궁의 정확한 규모는 알수없으나 고려사에 따르면 수십체의 행량이 얽여있고 여러 전각들이 있었으며 대대적인 중수는 공민왕3년 있었으나 공민왕의 1차 요동정벌당시 쓰인이후 사실상 사절단의 숙소 및 역원으로 쓰였다고 한다.(이는 현존하는 고려사에는 전해지지 않는 부분으로 승정원일기에 일부 남아있다.)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영변행궁을 수리하라고 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상으로는 아마 고려시대부터 내려져오던 건물들이 낡아 쓰기에 불편하여 수리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한양으로 들어갈때 경유,또는 전쟁시 사용하기 위해서 지어진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이괄의 난당시 이괄의 군대가 이곳에서 주둔하였다. 하지만 이때에도 어떠한 훼손은 없었다.그러나 수리한지 불과 45년6개월만에 병자호란으로 청나라군의 화공으로 행궁이 불타버려 이후로는 재건되지 않은채 영변객사'철옹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행궁터는 고려시대 궁궐축조법을 보여주며 언덕을 이용한 높은 축대와 연못지,400여칸규모의 행량터가 조선후기까지 남아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 철옹관의 사진에도 나타난다.[2]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영변은행 건설로 동쪽의 행궁터추정 부지가 심하게 훼손되었고 이후 한국전쟁으로 조선후기의 건축물인 영변객사 철옹관이 모두 불타고 폭격으로 토지에 있던 유구들과 행궁의 축대가 모조리 무너져버려 영변행궁의 모습을 찿아보기 어려워졌다.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결과 宮이라고 쓰여진 수막새와 여러 고려시대 석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3]

고려시대(충선왕3년?~1392년7월17일)

충선왕 때에 이르러 원나라로부터 오는 사신단과 원나라왕족이 거쳐갈 역원이 부족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충선왕3년(?)에 지금의 영변에 궁궐과 역원 을 짖게되는데 이것이 영변행궁이다. 이후 원나라의 사신단과 왕족이 묶는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고려왕실에서 직접 관리하였다. 고려시대의 행궁과 원을 같이 사용한 경우로 이 경우는 현제 2020년 기준으로 발굴되거나 남아있는 곳은 파주에 혜음원지가 유일하다. [4] 1차 홍건적의 난 당시에도 많은 피해를 보지 않았으며,2차 홍건적의 난 당시 영변전투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5] 또한 이후로도 고려왕조가 멸망할때까지 남아있었다.[6]

4. 구조와 전각

수백체의 행랑채와 파행전,외한전,내경전,정문이었던 신해루,하원정 등40여 체의 건물군이 복잡하게 건축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사라져 남아있지 않다. 행궁의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르나 영변성 내부에 토지 절반가량이 국가(조선왕실)소유였던걸로 보아서 상당히 큰 행궁으로 보여진다.
현재 기록상 전해지는 건물은 6체가 있는데 정확한 용도를 알수있는 건물은 2군데밖에 없으며 이마저도 위치를 알수없어 사실상 정확한 조사가 불가능하다.

외한전
기록상 왕이 업무를 보거나 논의하는 곳 이다.(행궁의 정전正殿 이다.) 또한 유일하게 행궁의 건물의 크기를 알수있는 기록이 전해지는 전각이다.기록에 따르면 전대청(본 건물)이 정면8칸 측면5칸 이며 양 옆에 동대청과 서대청이 붙어있는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10]

파행전
기록상으로는 잠을자는 침전이었다. 정확한 형태와 크기는 기록되어져 있지 않으나 행랑에 붙어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걸로 보아서 상당히 권위있는 건축물로 보여진다.

내경전(?)
왕의 행차 및 주요 신하들이 논의와 토론을 하였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성계장군이 2차 요동정벌 당시 2차로 이곳에서 회의를 하였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형태와 크기,위치는 미상이다.

신해루(언무루)
행궁의 정문이었던 신해루는 '새로운바다를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는 곳이다. 조선초기 부터는 종루가없어 이곳에서 종을달아 성문계폐(開閉)와 정오,자정을 알렸다고 한다. 하지만 문이 낡아서 1413년에 옛 건물을 헐고 완전히 새로이 지었다. 이때 문의 위치를 바꾸고 이름을 '언무루'로 지었다. 이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의 화공으로 행궁이 모두 불탔을때도 화재속에서 살아남았으며 이후 1682년과 1746년 중건되고 이후 영변객사 '철옹관'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2층 지붕이 절반가량 무너지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다. 현재는 북한에서 다시 중건한 상태이나 상당부분의 토지가 변형되었다. 하지만 영변행궁의 위치를 추정하는데 상당부분 참고되고 있다.

하원정
후원에있던정자로 행궁내 재일 높은곳에 있었다. 위치는 영변 약산으로 추정되며 몸의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정확한 규모는 전해지지 않으나 정면5칸 측면3칸으로 추정되며 병자호란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행궁의 건물들중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이후 훼철되었거나 무너져 소실된걸로 추정된다. 이후로의 기록상 이곳에 하원정의 주초석과 기와가 있었다고 하나 1920년대 추정위치를 조사당시 발견된건 주춧돌 3개와 깨진 기왓장60여개 가 전부였다고 한다.
1920년대 조사당시 주변 주민들에게 물어본 결과 이 인근지역에 '하원뜰' 이라는 지명이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였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이 일대가 폭격대상지 여서 현재 주춧돌이 남아있는지는 미상이다.

동헌
영변대도호부의 조선초기 동헌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행궁 내부에 위치한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정확한 크기와 형태를 알수없다는점이 있다. 다만 선조가 신하들을 동헌 앞에서 만났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동헌의 앞에는 넒은 마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객사(?)
현재 기록상으로는 객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위치와 형태는 불명이다. 또한 정확한 이름도 확인되지 않는다.

5. 위치불명

위치불명으로 객사터가 행궁지로 추정되며 영변읍성 내에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북한에서 소재중이다.한편으로 과거 서희가 이곳을 지나며 시를지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있다.[8]
1991년 북한에서 영변객사 철옹관을 조사할때 "宮" 이라고 쓰인 수막새가 출토되어 이곳이 행궁터로 추정되나 일제 강점기인 1936년 객사 근처에 건물을 지으면서 행궁 추정지를 심하게 훼손시켰다고 한다.[9]
또는 약산동대 인근에 위치를 했을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약산동대 인근에 건축되었을 가능성이 높은것이 [선전료우중회관서도][11] (宣傳僚友重會關西圖)에 나오는 그림인데 이는 영변행궁을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있다. 영변행궁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현제 전해지는 영변행궁을 그린것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그림으로 기록상의 영변행궁과 상당히 유사하다. 자세한건 연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 그림의 가치를 알아보려면 일단 환수조치가 시급하다. 일제강점기에 넘어간걸로 추정되는데 현제 소유자는 일본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상태이다.

[선전료우중회관서도]속 건물군은 영변 약산근처의 건물들을 그린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영변성내를 보여주고있다. 그림속에는 활터 두군데와 중심전각으로 보이는 건물,여러체의 행랑과 성문이 보이며 성 안에 가득찬 건물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보아서 약산동대라는 정자 또는 영변행궁을 그렸을 걸로 보고있다. 다만 약산 정상부 근처에는 평탄한 지형이 없기때문에 영변행궁이 확실시 된다.

아래의 링크는 위 그림의 모습이다.


[1] 현재 추정하는 바로는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이곳을 이용한것으로 보고있다.[7] 년도 표기는 영변행궁의 존속년도를 나타낸 것으로 조선건국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2] 1939년 8월 후지타 료사쿠의필름사진[3] 1991년 북한 조선로동당 기사[4] 혜음원 또한 왕실에서 '혜음원'이라는 역과 '혜음사'라는 사찰 그리고 행궁이 혼합된 경우로 영변행궁과 상당히 유사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혜음원과 영변행궁간의 유사점을 찿을수 있는 부분이 많다. 추후에 이를 연구하여 영변행궁 조사에 도움이 될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건축인 많큼 축대와 돌계단이 크기 때문에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영변행궁이 고려건축,고려미술사에 큰 발견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5] 다만 성벽위 성량에 불이붙어 행랑10여채가 불타는 피해를 입기는 하였다.[6] 그런데 놀라운점은 조선왕조에서도245년이나 버틴다. 하지만 병자호란당시 소실되었다.[10] 이는 혜음원과 많이 유사한 형태로 보인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동대청과 서대청이 형태와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지 않다.[8] 이곳이 지금의 약산동대로 추정된다.[9] 자세한건 영변은행 문서 참고[11] 현재 이 그림은 해외반출 문화재로 지정되어 하루빨리 환수조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