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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별궁 남별궁 南別宮 | ||
<colbgcolor=#bf1400><colcolor=#ffd700> 위치 | 한성부 남서 호현방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06[1]) | |
설립시기 | 1583년 | |
해체시기 | 1897년 |
<colbgcolor=#bf1400> 현재 남별궁 터. 신세계조선호텔 자리이다. | |
남별궁의 위치, 규모를 나타낸 도면 | <colbgcolor=#bf1400> 남별궁의 구성공관 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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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별궁. 원래는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가 결혼한 뒤 살던 저택[2]으로 '소공주댁(小公主宅)'으로 불렸다. 현재 소공동 이름은 이 '소공주댁'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공주 사후 자손들의 재산 분쟁으로 인해 경정공주의 집을 국가에서 환수했다.1583년(선조 16년)에 선조는 이 집을 크게 수리한 뒤 셋째 아들 의안군에게 주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가 1593년 4월까지 주둔하던 곳으로 쓰였다.[3] 서울을 되찾은 후 명나라군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이곳에 머물렀다. 1593년(선조 26년) 10월에 선조가 피란갔다 돌아온 이후 자주 이곳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때부터 남쪽에 있는 별궁(왕이 때때로 머무는 장소), 즉 남별궁으로 불렸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왕들이 남별궁을 중국 사신을 만나는 장소로 사용했고, 남별궁은 국가외교의 중요한 시설로 관리받았다. 정조 때에는 빈객 접대와 연회 일을 맡아보는 관서인 예빈시(禮賓寺)를 남별궁 안으로 옮겨 설치했다.
또, 청나라 사신 덕패(德沛)가 현판을 쓴 명설루(明雪樓)가 있었고, 이 현판에는 칙사들이 지은 시도 많이 새겨져 있었다. 뒤뜰에는 작은 정자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게 했고 영험이 있다고 전하는 돌거북을 세워 사신단의 무사함을 빌었다. 또한 동네 어귀에는 아름드리 통나무의 두 기둥을 세운 큰 홍살문을 설치하기도 했다.
<colbgcolor=#bf1400> 남별궁 부지에 자리잡았던 원구단 |
2. 여담
- 미국인 의사로 훗날 공사까지 지내는 호러스 뉴턴 알렌은 재동 제중원[4]의 2차 확장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6년(고종 23년) 8월에 외아문 독판서리 서상우를 통해 제중원을 남별궁으로 이전할 것을 요청했다. 병원이 너무 좁고, 인구 중심지와 너무 멀며, 그리고 전혀 위생적이지 못해 중요한 수술들을 안전하게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요구만큼은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구리개[5] 쪽에 제중원 부지를 마련해 최대한 지원해주고 편의를 봐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