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훗날 철종이 될 이원범은 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1]에서 태어나 한동안 그곳에서 자랐다.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2]들과 함께 조선 왕실의 몇 안 되는 남자 왕족으로 그럭저럭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사망한 것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헌종 10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되면서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이명은 사형당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욱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갔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이후 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원범은, 강화도에서 왕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으로 생을 마칠 뻔했으나...일약 인생 역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후사없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급사했다. 당시 영조의 후손으로서 정통성을 가진 왕족은 이광의 아들들밖에 없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 김씨는 이광의 아들인 이원범을 다음 국왕으로 지명했다.[3]이 시기에 직계 왕통(혈통)이 자주 단절된 이유는 효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은 아들이 몇 명 있었지만 영조 빼고는 대가 끊기고, 영조도 아들을 둘 뒀지만 장남 효장세자는 어린 시절 사망하고 후손을 남긴 아들은 사도세자 뿐이었다. 사도세자는 아들을 다섯을 두었지만 아들 둘의 대는 끊겼고[4] 넷째 은신군과 다섯째 은전군은 10몇 촌이 넘어가는 친척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5] 은언군은 아들을 7명을 두었지만 후손을 남긴 아들은 전계대원군 밖에 없었다. 즉 헌종 사후 실제 효종의 피를 받은 왕족은 이원범 뿐이었던 것이다.[6] 그래서 비록 선왕 헌종보다 한 항렬 높았지만 궁여지책으로 그가 왕이 되었다. 뭐 무식하기까지 했으니 세도가 입장에선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겠지만.[7]
<colbgcolor=#bf1400> 〈강화도행렬도(江華島行列圖)〉. 북한의 평양에 있는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이원범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큰형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이원범의 형 이욱은 도망가다가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의 설득과 주민들의 협조(?)로 결국 가마에 올라 궁으로 가고 결국 철종임금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이 흥하게 되었다' 하여 '용흥궁'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1] 지금의 서울특별시종로구낙원동, 익선동 일대.[2]회평군 이명(혹은 이원경), 영평군 이경응(초명은 이욱).[3] 이원범 위로는 작은형 이욱이 있었지만, 대체로 양자로 입적해 '나가는 집안'의 '남은 장자'는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므로 둘째가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이원범으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예로 역시 장남이 아니었던 선조와 고종이 있다.[4]의소세손과 정조의 대(헌종이 후사 없이 죽으면서 완전히 끊김).[5] 은전군의 양자풍계군은 은전군과 3촌이라는 아주 가까운 촌수였지만, 풍계군 역시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풍계군의 양자로 들인 왕족이 10몇 촌이 넘어가는 먼 친척이었다. 그것도 철종 즉위 후 이루어진 입양이었다.[6]은언군의 장손 익평군 이희와 이원범의 형 이욱이 있긴 했지만 각각 은언군 종가와 전계대원군의 대를 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을 빼면 정말 이원범밖에 없었다.[7] 다만 철종 본인의 항목에선 철종이 일자무식이 아니라는 관점이 우세한 편이다. 그래도 아주 일자무식은 아닐지언정 왕으로서의 기본 소양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철종(조선) 문서 참조.[8]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종가.[9]사진 출처 - 강화군 보도자료.[10] 좌측에 보이는 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