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06:04:32

온양행궁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한성부
경모궁 계동궁 남별궁 누동궁 도정궁
명례궁 사동궁 선희궁 수진궁 순화궁
안동별궁 어의궁 연희궁 영수궁 영희전
용동궁 운현궁 이현궁 인경궁 인덕궁
자수궁 죽동궁 창성궁 창의궁 칠궁
태화궁
경기도
강화행궁 개성행궁 경덕궁 남한산성 행궁 낙생행궁
낙천이궁 노량행궁 목청전 수원행궁 수창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안양행궁 양주행궁 용흥궁
월미행궁 이천행궁 이태조 행궁 진위행궁 통진행궁
파주행궁 풍덕행궁 풍양궁 포천이궁 화성행궁
충청도
노은리 행궁 목천행궁 보은행궁 신도안 대궐 온양행궁
전의행궁 직산행궁 초정행궁 천안행궁
전라도
격포행궁 경기전 무풍 명례궁 전주행궁 보길도 행궁
경상도
집경전
평안도
영변행궁 영숭전 영유행궁 의주행궁 평양행궁
풍경궁
황해도
배천행궁 평산행궁 해주행궁
강원도
고성행궁 분수령 행궁 상원사 행궁 춘천이궁
함경도
영흥본궁 함흥본궁
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파일:온양행궁 복원도.jpg
<colbgcolor=#bf1400> 온양행궁 복원도
KBS1 《역사스페셜》에서 다룬 온양행궁
1. 개요2. 역사3. 건물 구성4. 현재

[clearfix]

1. 개요

溫陽行宮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대로 1459에 있었던 조선시대 행궁이다. 다른 공식 행사나 임시로 머물기 위한 다른 행궁들과는 달리 온정욕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용하는 일종의 요양소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를 초수행궁이라 하는데, 초수행궁은 전국에 꽤 있었다.

2. 역사

파일:온양행궁 혜파정.jpg
파일:일제강점기 온양행궁 영괴대.jpg
<colbgcolor=#bf1400> 흥선대원군 시기에 지은 혜파정[1]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에 찍은 온양행궁 영괴대와 회화나무의 모습
조선왕조실록》에는 첫째 임금 태조부터 온정을 자주 찾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는 처음에는 주로 황해도 평산행궁에 있는 평주온정을 이용했으나 도읍을 옮긴 뒤로는 300리나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신하들이 자제할 것을 청했다. 태조는 저런 반응을 불편해했으나, 애초에 본인도 멀다고 느꼈으므로(...) 차츰 덜 찾았다.

1396년(태조 5년)에 충청도 온정으로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한 지명은 없지만 이때부터 온양온정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 이후 태종세종평주, 이천 등에 있는 온정을 찾았으나 뛰어난 치료 효능 및 한양과 가깝다 등의 이유로 온양으로 떠나는 횟수가 늘었다.

그래서 세종 때에 행궁을 세웠다. 세종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정을 비롯한 여러 효험이 있다는 물이 나는 장소들을 찾았으며, 이에 온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초수행궁 건축을 감독했다. 세종은 이러한 공사로 백성들이 피해를 받을 것에 대한 우려로 인해서 상당히 작은 규모로 행궁을 건립했다. 이 행궁이 바로 온양행궁이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이 전라도를 거쳐 북상하면서 온양 지역을 급습했고 이 때 불에 탔다. 이후 오랫동안 터가 방치되었고, 결국 왕들의 온행도 끊겼다.

임금이 다시 온양을 찾은 것은 현종 때였다. 당시 현종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폐허로 남아있던 온양온정을 선택하고[3], 이후 무려 5차례나 온행을 했다.[4] 이때 복구했다.

현종 이후 숙종, 영조를 거쳐 사도세자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95년간 왕과 세자가 활발하게 이용했다. 그러나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잠정 중단되었다.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추억이 깃든 온양행궁에 영괴대라는 단을 설치했다. 사도세자가 직접 심은 3그루의 회화나무를 정비했으며[5]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했다. 이후 비록 행궁은 많이 퇴락했지만, 순조가 즉위하고 1834년에 온 조수삼의 《온정기》에 의하면 이 무렵까지 행궁은 관리를 받으며 온전히 유지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종 8년인 1871년에는 국왕이 정무를 보던 내정전이 관리 소홀로 무너져 철거됐지만, 이 무렵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과 혜파정을 지었고,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는 등 여전히 왕실에서 활발히 사용했다.

임금이 안 찾는 비수기에는, 왕의 전용 공간과 세자궁 침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에 백성들도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또한 재상사대부가의 부녀 또한 남쪽 탕에 한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여 일반인들도 온정욕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파일:조선총독부 온양행궁.jpg
파일:온양행궁 일제강점기 모습(온양관).jpg
<colbgcolor=#bf1400> 조선총독부의 지리조사 자료에 나오는 온양행궁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온양관으로 사용할 당시의 모습
그러나 1904년(광무 8년)부터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정부에게서 온양행궁의 소유권을 가져오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을 헐고 그 터에 대중탕과 여관을 겸비한 '신정관'과 '온양관'이라는 온천숙박업소를 지었다. 이후 탕실이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바뀌었다. #
파일:2017-10-11 00-32-55.jpg
<colbgcolor=#bf1400> 1920년대의 온양행궁 전경
이렇게 점차 옛 모습을 잃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으로 불이 붙어 완전히 사라졌다.

3. 건물 구성

파일:L20061120.22020213610i1.jpg
<colbgcolor=#bf1400> 〈온양행궁 전도〉
정조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그 자취를 기록한 책인 《영괴대기(靈槐臺記)》[6]라는 책 속에 《온양행궁전도》가 실려있다. 이 그림에 따르면, 2중의 담장이 온양행궁을 둘러쌌다. 안쪽 궁장 가운데에는 왕의 침소인 내정전(內正殿)과 집무실인 외정전(外正殿)이 있었고 옆에는 국왕의 치료와 휴양을 위한 시설인 탕실이 있었다.

내정전은 정면 4칸, 측면 4칸인 16칸이고, 외정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인 12칸이며, 탕실은 정면 4칸, 측면 3칸인 12칸이라고 적혀있다. 그 외에도 여러 관청들이 있었다. 당시 안쪽 궁장과 바깥 궁장 사이에는 초가지붕 또는 기와지붕으로 된 홍문관, 승정원, 상서원, 사간원, 수문장청 같은 건물들과 수라간이 있었다. 수라간은 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대거 머물렀기에 임금의 처소를 제외하고 제일 규모가 컸다.

중앙에 12칸짜리 욕실과 양방, 협실 등이 갖춰진 온정당이 있고 그 건물에 바로 천연 온정 탕실이 있었다. 탕실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통로로 보이는 협루가 있고, 찬바람을 쐴 수 있는 이 남북으로 하나씩 있었다. 온돌을 깐 욕실은 동, 서 양쪽에 있었다. 이중에서 온정은 옥돌로 함 가운데를 빙 둘러 붙여 만들었다. 중국 온정과 달리 화려한 장식물 및 치장은 없었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만든 솜씨가 굉장히 세심했다.
파일:dfdfagrehnty ,miu.jpg
<colbgcolor=#bf1400> 영괴대

4. 현재

파일:10436167_33_z.jpg
<colbgcolor=#bf1400> 터에 들어선 온양관광호텔
지금도 천연 그대로인 온정이 나온다. 입장료는 온정만 따졌을 경우 대인은 7,000원, 소인은 3,500원(24개월~초등학생 미만), 65세 이상은 경로 우대로 5,500원이며, 30매 이용권은 135,000원이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참조.

[1] 한국전쟁 당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2] 충청도에 온정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아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종 때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온양군의 온정에 대해,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서 우리 태조, 세종,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둥하여 머무르면서(후략)'라고 쓰인 것을 보아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3]현종실록》을 보면 '평산온정은 너무 뜨겁고 이천은 길이 험해 온양으로 정한다.' 고 젹혀있다.[4] 왜 무려라고 했는지 의문이 들수는 있겠지만, 당시 왕들은 신하들의 간청으로 온행을 많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도 5번이나 갔다.[5] 2그루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살아남았다. 현재는 한그루만이 남아 행궁 터를 지키고 있다.[6] '영괴대'란 신령스러운 느티나무 옆에 설치한 사대(射臺)라는 뜻. 1760년(영조 34년) 사도세자가 행차에 활을 쏘던 자리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세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어 영괴대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