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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15:00:45

순화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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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은 조선시대 당시 기준}}}}}}}}}

조선의 별궁
순화궁
順和宮
<colbgcolor=#c00d45><colcolor=#ffec56> 위치 <colcolor=#212529> 한성부 중부 견평방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5길 26[1])
설립시기 1849년
해체시기 1911년 이후
파일:2017-10-08 16-14-10.jpg
<colbgcolor=#c00d45> 순화궁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태화빌딩[2]
1. 개요2. 역사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별궁이다.

2. 역사

원래 이곳은 세종의 적8남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 부부가 살던 이었다. 조선 중종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주어 '순화궁'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중종에게 순화공주라는 딸은 없었기에 사실이 아니다. 아마 중종이 문정왕후의 딸 효순공주와 구수영의 증손자 구사안의 혼인 후, 집을 고쳐 지어준 일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구사안의 동생 구사맹[3]선조의 서5남 정원군장인이었으며, 정원군의 장남이자 구사맹의 외손자가 바로 인조이다. 인조는 어릴 때 외가인 이곳에서 머물며 장난치다가 경내의 연못에 빠진 적이 많았는데, 즉위 후, 이를 왕(용)이 잠겼던 연못이라 하여 '잠룡지(潛龍池)'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영조가 방문하여, 여기에서 보관하던 효종의 어필을 본 뒤, 구씨들을 불러 상을 주거나 등용하라고 명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영조 연간까지 구씨 집안이 소유 및 관리했던 듯하다.#

그러다, 19세기 안동 김씨세도정치가 절정일 때, 김조순의 조카 김흥근의 소유로 넘어갔다. 이후, 헌종후궁 경빈 김씨가 헌종 사후, 김흥근의 집에 머무르면서, 이때부터 경빈의 궁호를 따 '순화궁(順和宮)'이라 불렸다.# 경빈 김씨는 1907년(광무 11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여기서 살았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융희 2년), 궁내부 대신이던 이윤용에게 넘어갔고, 곧 그의 동생 이완용이 차지했다. 이후, 순화궁에 속했던 궁속들은 서소문순헌황귀비의 동생 엄준원의 집으로 옮겨갔다. 넓은 궁에서 살다가 좁은 곳으로 옮겨진 궁속들은 불만을 가졌고, 이러한 불만이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이후, 1911년, 일제의 압력으로 남작 장석주의 소유로 넘어갔으며, 궁속들은 경복궁 동쪽 간동에 있던 전 호위대 영사로 이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간동이 아닌 제동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경성부사》에 따르면, 동부의 인창면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옛 순화궁의 주인이 된 이완용은 이곳을 전세로 내놓았다. 그리고 전 숙수[4]이자 명월관 사장이던 안순환이 세들어와, 음식점 태화관으로 개조해 운영했다. 바로 3·1 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문이 낭독된 그 태화관이다. 즉, 친일매국노가 소유한 집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된 셈이다(…).

이에 당황한 이완용은 1921년, 감리교선교부에 건물을 매각했다. 이후, 태화여자관이라는 감리교 포교지 및 여성 복지 사회재단으로 사용되었고, 후에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개칭되었다. 1938년, 한국식 건축양식을 살린 건물을 새로 지어 사용했으나, 일제 말에 징발당했다.

8.15 광복 후에는 경찰서 청사 등으로 쓰이다가 다시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철거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순화궁의 전각들도 함께 사라졌다.(…) 이후, 이 자리에 태화빌딩이 들어서 현재에 이른다.

3. 여담


[1] 구 지번주소 종로구 관훈동 194번지.[2]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3] 이 구사안, 구사맹 형제의 동생 구사민의 후손이 바로 현 LG 구씨 가문이다.[4] 대령숙수의 그 숙수. 대장금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궁중요리 하면 궁녀를 떠올리지만, 사실 대량 요리는 체력 소모가 크기 때문에 남성 요리사들이 주로 담당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남성 숙수들은 모두 출궁했고, 민간에서 식당을 운영하거나 취업했으며, 남은 이왕가의 식사는 한희순 상궁 같은 궁녀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궁중요리를 전수한 것도 이 궁녀 출신들이었기에, 궁중요리 하면 여성 요리사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5] 세금을 거두기 위해 각 궁에서 파견하던 사람.